2024년 9월 7일(토)
* 시작 기도
주님...
활 노래라 불리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윗의 노래가 오늘 나의 심령을 울립니다(삼하 1장).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일컫는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신부인 우리의 죽음이 신랑되신 우리 주님께 그토록 애통스런 고통이셨을까요?
내가 무엇이라서 그러셨을까요?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인데 내가 무에라서 그리도 아파하셨을까요?
거기에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이 있는 줄 믿습니다.
아들이신 우리 주님의 목숨과 우리의 생명을 바꾸신 것이지요.
아들 안에 있는 그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나에게 주기 위하여 아들을 십자가에 걸어버린 것입니다.
나는 오늘 그 은혜와 사랑 앞에서 감읍하여 두 손으로 입을 가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긍휼로 덮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옛 사람은 우리 주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그리하여 다윗의 활 노래가 우리 주님의 노래가 되어 이 종의 심장에 꽂히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4:15-23
제목 :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음.
15 우리의 대적이 우리가 그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일하였는데
16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18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19 내가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공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떨어져 거리가 먼즉
20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21 우리가 이같이 공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으며
22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23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 나의 묵상
산발랏 도비야 게셈과 같은 원수들은 자기들의 계획이 탄로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계획을 헛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성벽 쌓은 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각기 일터로 돌아갔다.
그날부터 느헤미야의 부하들 가운데 절반은 성벽 쌓는 일을 하고 나머지 절반은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또한 갑옷을 입었으며 관리들은 성벽을 쌓는 유다 백성들 뒤에 섰다.
짐을 나르는 사람은 한 손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기를 들었다.
성벽을 쌓는 사람도 허리에 칼을 차고 일을 했으며 나팔 부는 사람은 내 곁에 있었다.
그 때 나는 귀족과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일은 매우 크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성벽을 따라 넓게 퍼져서 멀리 떨어진 채 일하고 있다.
따라서 여러분은 어디에 있든지 나팔 소리가 나면 그곳으로 모여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일을 하였는데 절반은 창을 들고 일했으며 동이 틀 때부터 시작해서 별이 보일 때까지 일을 하였다.
그 때 내가 다시 백성들에게 말하였다.
모든 사람은 자기 부하와 함께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와서 자되, 밤에는 번갈아 가면서 보초를 서고 낮에는 일을 하여라.
이런 상황에서 나와 형제들 그리고 종들이나 나와 함께 다니는 파수꾼들은 어느 누구도 자기의 옷을 벗지 않았는데 심지어 물을 길러 다닐 때조차 무기를 가지고 다녔다.
산발랏 도비야 게셈과 같은 원수들의 음모는 우리에게 탄로가 나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우리를 대적하고자 세력을 모으며 음모를 꾸민다.
이는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린 뱀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뱀으로 위장한 사탄은 그 힘과 세력을 뽐내며 날뛰지만 여자의 후손인 예수께서 오셔서 그의 머리를 박살내신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탄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죄의 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이는 죄의 세력인 뱀에 의해서 발꿈치를 상한 것과 같다.
죽으셨으나 무덤에 장사되셨고 그 곳 음부에서 모든 사망의 세력을 멸하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예수께서 죄의 세력에 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패한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지옥에까지 들어가셔서 승리를 선포하셨다.
(벧전 3:19) 그(예수 그리스도)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세력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 세상은 죄의 세력이 활동을 하고 있다.
뱀의 머리를 박살내도 그의 몸통은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린다.
여전히 그 힘은 남아 있다가 서서히 힘이 빠지는 것이다.
이처럼 그 사망의 세력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고전 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그렇다면 주님이 재림하셔서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멸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그 원수와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 싸움에 우리로 하여금 함께 싸우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다.
뜨거운 햇살과 비, 때로는 소낙비와 태풍을 맞아 맞서 싸워야 하는 실전이며, 거기서 신앙의 야성을 키워야만 한다.
삶의 현장 속에서 치루는 영적 싸움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느헤미야는 원수들과 대적하기 위하여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돌을 들어 성벽을 쌓았다.
누가 대신 싸워주는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면서 또한 원수와 대적할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다.
(20)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성실히 성벽 쌓는 일을 하다가도 전쟁을 선포하는 나팔이 울리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로 모여서 함께 원수들과 대적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다.
나 한 사람쯤이야 하면서 뒤로 숨는다면,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역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믿음의 조상들 중에는 사탄의 강력한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심지어 여자들은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구차하게 풀려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은 주님을 위하여 조롱과 채찍질 그리고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 당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 세상 만물 안에 있는 존재물을 초월하여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날마다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히 11:34-38)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나는 그동안 이 세상에 살면서 영적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 좋게 넘어지고 마는 자였다.
음란과 부정 사욕과 악한 정욕 그리고 방탕과 향락, 무법한 우상숭배와 같은 탐욕에 맥을 못 추고 쓰러졌다.
아무리 싸워 이기려고 해도 나에게는 힘이 없었다.
그래서 맨날 말로만 결단하고 이기는 자가 되고 말았다.
말로는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나는 죄의 세력을 볼 줄 몰랐고, 나의 옛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복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또한 안다고 해도 죄의 세력을 이길만한 야성이 없었다.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삶의 현장에서 죄의 세력과 싸워 이길만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에 싸우면 되는데,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싸울 생각도 안 하고 항복하곤 하였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민국을 감독한 히딩크는 프랑스와 체코에 잇달아 5:0으로 졌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오대빵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오대빵이 아니라 백대빵이다.
백전백패하던 자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나에게 복음이 찾아 왔다.
그리고 나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성벽을 쌓는 것처럼 말씀의 성벽을 쌓았다.
매일매일 말씀 앞에 나아가 말씀으로 성벽을 쌓는 것은 원수를 대적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날마다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갖고 나갈 때 그 안에 능력이 있다.
그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성전 앞에 두 기둥을 세우고 야긴과 보아스라고 명명하였는데, 야긴은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뜻이고 보아스는 ‘그 안에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말씀 묵상이야말로 원수를 대적하는 최고의 성벽이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며 능력을 주시는 야긴과 보아스이다.
이제 그 주님께서 나를 세우시고 내 안에서 능력이 되어 주신다.
이제 나는 파레시아로 주님을 힘입어 담대하게 아버지께 나아간다.
나 비록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능력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께 있기에 오늘도 담대하게 일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기에 죄를 그치고 그리스도의 갑옷을 입는다.
더 이상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 것이다.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 등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
더 이상 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지 않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그 분의 능력으로 세우시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영이 곤고하오나 다시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일어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죄의 세력에 힘없이 무너지던 자가 복음을 통하여 말씀의 성벽을 쌓아 이제는 전투력이 증강(增强)되었나이다.
그 전투력은 나의 능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능력임을 믿습니다.
나의 힘도, 나의 능도 아닌 오직 주의 영으로만 가능하나이다.
나를 대적하던 원수 마귀가 더 이상 나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은 말씀 묵상으로 쌓는 높은 성벽이 있기 때문이오니 오늘도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은혜가 나를 사로잡나이다.
주의 영광의 광채가 내게 비추어 내 얼굴빛이 주님을 닮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