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 환각과 마음의 자세 관련 其他 等 一、내가 느끼어 환각이지 실제에 있어선 환각이 아니고 그 方式의 進行과정이 그러한 것이니 그 어른 거림을 뚫고 나간다는 느낌이나 그 어림(凝)의 느낌이 환각作用이 아니라 그 方法이 그렇게 와닿을 뿐인 것이다.한가지 次元이 아니므로 그 방식론에 있어서도 여러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할 것이다。그렇게 믿음은 想念力의 結定으로부터이니 그렇게 생각이 이미 어떤 方向으로 기울어짐을 탓다(편승)면 주위의 동정 진행사가 그대로 빨려들어 오게되는 것이다.그것이 如何한 五感의 다양한 논리던 그 상념이 결정된 바대로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믿으면 긍·부정적인 영향을 거론할 것이 없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이를테면 外部에 내게로 向하는 촉감에 의한 예측하는 상념은 하고자 하는 行事에 대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저런걸 보니_이런걸 보니 이 어떻게 될것이다」하는 것과「저런맛 이런 향은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이다」의 추측에서 하면된다。하면되지 않는다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그 일을 하면 생각과 이완된 행동이므로 아무리 잘 하려 하여도 결과가 좋게 나올리 드물고 곱곱이 힘만 들고 의외의 변수로써 유종에 미를 거두라고 함이 많은 것이다.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어떤 일을 임한다면 그 일이 설령 어렵더라도 의외의 변수가 없는 한 성취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는 것이다。이를테면 내가 行코자 하는 앞에 어떤 물체가 가로놓여 있다。또는 동물 사람이 가로질러 간다.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상념을 두면 그렇게 事가 귀결된다는 것이다.그러나 이것을 장기를 한 수 더 들여다보듯 이 그내면을 들여다보고 좋을 것이라고 상념을 한다면、물체가 가로질러 있다。그 無現의 폭좁은 길을 폭을 넓게 해주었다。또、사람 동물이 가로질러 금줄을 놓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못쓰는 화살들같이 내게 여러군데서 쏘아들어 오는 여러잡다한 강한 기운과 세로 모아드는 엇가른 걸림을 이렇게 저렇게 걷워치우시는 천사나 보살님의 나를 위한 行이시다。저렇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한다면 그 臨하는 事는 좋게 귀결된다는 것이다。一言해서 마음의 자세가 어떻게 되있느냐에 따라서 행동의 결과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以上은 두번 顚倒의 모양이지 세번 네번 등 무량의 전도상이 있으니 엎치락 뒤치락의 일체양상이 일체생각 겉껍질의 作用活動 모습인 것이다.) 二、 그 어른거림을 뚫고 나간다는 느낌이란? 혹이 말하길 그 빛같은게 왔다갔다 한다는 것이다。이와 좀 뜻이 통할런지는 몰라도 내가 어릴때 氣가 약해서 경끼를 이따금씩 하게 되었는데 경끼를 하게 되면 「으」와」하고 울게 된다.그 와중에도 무슨 헛소릴 한다는데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고 그것이 두뇌의 발육상태가 양호치 못해서 그런다고 하나 그 우는 경향중에도「쏴」」하는 밝은 빛이 쐬이는 상태에 들어 가거나 참말로 막 빛이 왔다갔다하는 상태를 겪은 것 같다。그러다 정신이 진정되고 원위치로 돌아오면 백모께서(나는 어머니라 함) 나를 양육하셨는데 나를 꼭 껴안고 내 이름을 부르면서 얘가 왜 이래 얘가 왜 이래 하신다。그리고 내가 막、헛소리를 했다한다。내가 알기론 예닐곱살 정도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다。이것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공포감을 느껴 정신상태가 놀란 토끼처럼 불안한 상태를 유지 신체적인 어떤 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할 것이다.그럼 그 빛의 쏴 함은 뭔가? 그것이 환각상태로 들어가는 初入門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三, 환각이란 주제의 문제의 차원을 좀 달리해서 환각의 영상을 뚫고 들어가면 그 空으로 化한다는 것이다。즉、그 空의 立長이 되어 物事를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 아무도 없다.(나는 실상 있으데) 나조차도 없다 한다면 자기정신의 위치가 환각을 뚫고 들어간 것이니 무형에 공간이 되어 사물을 바라보는 입장을 취한다거나 實에 物事가 되어 무형에 공간을 쳐다보는 입장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의 경지가 깊어지면 無形 空의 입장이 되어 두루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실제 육안으로 보는 것처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필자가 미달이라 겪어보지 못했음으로 확증적이라곤 할 수 없고 환각에 의한 것이 다만 그렇치 않을까? 하는 추측론에 불과하다.따라서 이에 너무 현혹될 필요는 없다 할 것이다. 釋經 한 곳을 읽고선 마음에 와닿는 봐 있어서 나름대로 풀이한 章(八陽經中에서 발췌(\)별 (/)불이 人形을 짓는 해설… ◎ 왜ㅡ 空을 제창하는가? 그것은 무애 열반에들기 위해서다。무애열반에 든다는 것은 되돌아 올 건덕지(걸림 고(罟))가 없다는 것이다。되돌아 올 건덕지가 없다는 것은 쌀 이는 조리로 물을 짓고자 하는 것같아 늘상 그렇다는 것이다。무애열반에 들기 위해선 어떻게 하여야 하나 그것은 편당을 짓지 않음 (편벽된 思와 觀을 갖지 않음。모든 事行爲 고(罟)는 思와 觀으로 부터다)에 있다 할 것이다. 이를테면 左로 뻗침을 바름이라 한다 하였는데,그 斜視的 뻗침外에는、無有現相을 논할 것 없이 바르다는 뜻이다。(즉 사시적인 것을 그른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그 그르게시리 보이는 그 음도 바른걸 가르친 스승位에 있음으로 이 또한 바르다는 것이다。즉 바른 가르침을 주시는 바른 선생님이란 뜻이다.말씀을 자루 뒤집듯 뒤집어서 無有現相을 논할것 없다하는 것은 有形의 그른걸 표현하게 하였음으로 이또한 사시적인 그릇된 것이다.따라서 뻗침도 그른 것이고 그 外의 無有現相도 그른 것이다는 뜻이다。이런 흑백편당을 가르킨 것을 왜 바름이라 하였는가? 그것은 바르고 그른 편벽된 實相을 떠난 空의 相 관점을 가르치기 위해서 바름이라 가르쳐 말씀하신 것이다.空은 이런 저런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그럼 空은 空아님과 편당이 되질않는가? 한다면 물론 그렇다。그렇기 때문에 空을 이루겠다는 집착을 버려라.진리란(相)것도 버려 떠나보내라°진리도 멀리 떠나보내는 마당인데 하물며 진리 아닌거야 말할 나위 있으랴? 하였다。右로 파임( 左로 빗김과 右로 파임함을 갖다 붙임。人形을 이루는 데(이는 사람을 뜻한다) 바름과 그름。참과 거짓은 임함을 覺의 연속선이 되어 면적과 부피를 이룬 空을 八등분한 한등분처에서 空의 속內面을 (안의 얼굴)들여다본 형으로써 속속들이 다 들여다봐서 숨김 없이 밝힌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사과를 상하좌우 전후로 잘라서 한쪽을 들어내고 속을 들여다 본 형태를 단면으로 그릴 때 人字形을 취한다는 뜻이다. (이런 풀이가 필자의 잘못된 인식 착각인지도 모른다) 사람에겐 異性이란 슬기가 들어 있는데 그 슬기란 性覺의 發露現象으로 사람의 성각 발로에 의한 지혜가 아니면 얽힘 고(罟)를 풀지 못한다는데서 人形을 취한 것으로써 性)이 곧、空으로 들어가는 門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또한 空 첫단계가 된다고도 할 수 있다.人性은 精神이 웅크리게 되고 (그 흐름覺에 정신이 서리게 된다는 뜻) 마음을 접하게 되며 마음은 三覺(면적과 부피를 이루는 갈등선의 첫점각)이 活動하는 象으로써 性覺이 그린 形이며 그 성각의 의지처도 되고 집과 몸도 되며 그 마음은 육신을 집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사람의 心身은 空覺門임으로 森羅가 사람의 관점이 되어야지만 무애열반에 든다 할 것이다. 그렇다고 탈을 써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人性覺 行動을 지으면 되는데 그것이 어렵다는 뜻이다。이것은 人本위주로 말한 것임으로 반듯이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할 것이다。諸物事象이 제구실、제노릇 하는 걸 갖다 사람이 제노릇하는 것과 同一視인지도 알 수 없으나、구실과 노릇이란 것은 뒤집어 쓴 脫行인 것이니 그 탈행(脫行)을 벗어 치울 때(그 탈행이 끝날때)、성취관점이 될 때´空器가 되어 人性(自性=이랬다 저랬다 그랬다=가로하고 세로하고 높이하고 등。三分割 三集會。그래야만 제차원의 立體 形이 된다) 本位가 된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여러 설법을 편답해서 釋說을 魔頭 魔說이라 하나 그는 반대하는 입장이나 神崇上의 비판적 시각을 갖는 자의 말이요.풀기、어렵지만 마두 마설은 아니라 할 것이다. * ◎ 왜 그런가 章 序論頭 覺靈들의 集合活動은 點의 集合이고 그러한 점들의 연결은 生覺을 꾸려나가는 線이 되며 想念하여 (엇가로 짜집기) 그림을 그리는 것은 面化이며 겉으로 表出하는 것은 立體空化인 것이다。겉으로의 表出은 그 그림이 어떻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말하는 것)이다。또 생각대로 行하는 것(行爲를 지음)이다。어떠한 말(言)이던가 소리(音) 等 諸感을 일으키는 主體는 언제까지라도 우주에 새겨져 있어 없어지지 않나니 만약상 그것이 음성이라면 과거로 돌아가 귀를 열어논다면 모두다 들리니 흡사 녹음영상 필름을 재생시키는 거와 같으리라」°과거론 어떻게 돌아가나? 이미 音聲을 내면 흘러가는 것인데… 그렇지만 돌아갈 수 있으니 저만치서 소리치는 말이 이제야 들린다 한다면 말은 이미하여 과거로 흘렀으나 듣기는 현재로 (현재도 가만히 있질 않고 흐르고 있는 중이다) 한 것이니 以 現在란 것을 과거의 관점으로 놓는다면 未來에서 들은(聞)것이니 未來는 과거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초음속을 돌파하는 젯트기의 行이 이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곧 음성을 내고 그 음성보다 먼저 달아나 음성이 들리기를 귀를 열어놓고 기다리는 거와 같은 것으로써 과거로 흘러가는 음성 그보다 더 빨리 과거로 축적해서 귀를 열어 놓는 것은 곧 未來이니 이러한 논리라면 얼마던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法。십년전에 음성도 지금 추적한다 하더라도 능히 따라 잡아들을 것이다。(옛님들이 간지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데 까지 아니 그 以前이라도 길게는 몇만년이나 몇천년 짧게는 一二年 몇달 몇일 時이나 그것은 우주空을 거론할진데 미진만도 못한거리 빨리 추적하면 그 궁금한 것을 묻거나 살피거나해서 알아볼 수 있으리라。그렇게 할 수 있더라도 역시 그 시대의 立長으로 지어지거나 아님 비행접시의 원반빛처럼 그 공간과 융화되지 못하여 따로 노는 것으로 되어지리라.그래도 저ㅡ立長(과거상태)을 알 수 있을진 모르리라°우주란 空이며以空의 관점으로 제반걸 놓아볼진데 立長의 同不同與否를 떠나 모든게 只今같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있다는 것이다。그렇게됨 과현래를 따질것 없이 (((붙들어 메고자 하는 三心軸에 메이지 않으니 걸릴게 없어 어디던지 어느 것이던지 無所不能의 段階의 位에 있게 된다는 뜻이다=이 말은 무슨 뜻인가? 지난바 회상은 꺼림이 많아 앞 일을 헤쳐나가고자 하는데 주저하는 장애요인으로 불안을 조성하는 것이 되고 미래에 닥쳐올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자신감을 갖고 무슨 일에든 임하여 行할래기지 미리 불안하게 여길게 아니라는 것이다。현재는 현재대로 애로사항이나 근심걱정을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번뇌스런 염려를 모두 떨쳐버리라는 것이다.이것은 누구말을 표절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가르침을 옮겨놓는 것일 뿐이다.멀리 미치는 생각에 의해(유비무환) 완비되었다고 느슨((자만 교만°제실속들만 챙기려는 다툼。實利 다툼속에 모두가 (空的인 立長에서 功들여 쌓은) 힘모아 어렵게 쌓은 玉山은 무너진다。그렇게 됨 모두가 피해가 온다.물론 개중엔 그로인해 이 덕을 보는 자도 있을 것이다.그래서 세상사 어지럽다 하였던가?)) 치도 말며 전전긍긍 너무 단단한 조임도 하지 말며 느상 생각의 門은 열려 있으라는 것이다。)) )제반걸 알 수 있지 않을까이다。혹시 무량道를 修行한 분이나 可能할런지 모르겠다。以上의 말들이 또 뭔가 착각인지도 모르겠다。저 십년전 흘러간 내 말을 들을려고 지금부터 그 말씀의 흐름을 따라잡기 위하여 빠른 속도로 달린다면 그 방향을 어디다 대고 하였는진 몰라도 그 向方 또한 우주 空속에 있음이라 저쪽에서 던져오는 物體를 아직 받지 못하고 받고자 하는 자세만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아직 그 말은 도달해 있지 않을 수도 있다。모든 感의 實體는 우주에 새겨져 있으니 얼마던지 가능한 일일것이다。비행 접시는 하필 다른 行星에서 오는 것만 아니라 미래의 人間行이 과거로 희귀해서 나타나는 것이 현시점에서 보이는 것이다。또 이 앞서 말한 옛님들과 방금 前의 행성이라 하는 것도 미래에 변화한 아니 현래를 싸묶은 나일수도 있는 것이 그렇게 보이고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나이다 나空이다. .. ◎ 과거로 가는 方法에 대해 한 말씀 더 附言한다면 한번 지나간 音은 또다시 듣기 어렵단 말인가?그렇기 때문에 과학문명은 녹음기를 만들게 해 재생시켜 듣게 하는 것이다。以 녹음기처럼 한번 걸쳐 지나간 音域 같은 것을 되돌려 보고자 하는 것이 과거로 된 흐름 시간을 역추적하는 것이다。공간은 그 달아남이 어느곳으로 달아났던간 그 방향으로 추적하면 될 것이다。흐르는 시간을 어떻게 역추적할 것인가? 흐름을 알 수 있는 것은 事物의 變化에 있고 變化는 明暗의 바뀌는 현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모든物事는 恒常의 支撑力을 갖을 수 없다。「언젠가는 하는 것이 곧 흐름에 의한 변하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뜻인 것이다。그것은 반복현상으로 부터이니 반복현상은 無形의 걸리적거림 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명암현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명암은 光과 그를 받아 逆射시키는 對抗物體와 그 뒷켠에 의해 生成되는 것이다。즉 그 明暗이 順行으로 바뀌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과거로 추적하는 初入門이요 바뀌고자 하는 현상이 따라옴을 점점 멀리 뿌리치며 내닷는 것이 과거로 추적하는 方式인가?(이것을 갖다 착각이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캄캄한 상자속에 전등불을 항상 켜놓아서 변함없는 것 같음이 과거로 들어가는 門이라 하는 것과 같음이다.그래도 시간은 흐른다。어떻게 하면 과거로 갈 것인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과거로 가는 방식은 뒷걸음질쳐 가는 것이 그 방식 중의 또 한 방편인가?생각에 생각은 구름일듯 할 뿐이다) 그 시간이 앞으로 간다거나 뒤로간다거나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에 있지 實은 未來로 가거나 과거로 가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그 變化物事軸만 空間에서 活動하는 것일 뿐이니 남에 물건을 손괴시키면 먼저번처럼 똑같게 원상복구 시켜 주는 것이 以과거로 가는 방식중에 하나가 아닌가 한다。(공장에서 똑같은 제품이 나온다. 그 어느것 하나를 구해다가 변상해 주는 것이 과거로 가는 방식인가? 나아가선 쌀로 밥을 지어 먹으면 그만한 쌀이 또 있음 과거로 된다는 뜻 아닌가? 그 異常한 곳으로 정신의 끝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生物이라면 어른된 것을 어떻게 어리게(幼)할 것인가? 여동빈의 빗이라도 있어 머리를 빗기면 흰머리가 검은 머리로 될 것인가? 어떠한 약물을 먹으면 回春하듯 과거로 된다 할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머리에 들은 생각의 집 정신으로 가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정신이 과거로 갈 현실 현재의 육신의 집을 버려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되니 生을 초연히 여긴다는 것이 아닌가? 과거 미래 현재란? 사람의 생각 느낌에 있는 것이니 느낌의 感尺度를 개발하는 것이 어떨까? 느낌의 현상을 어떻게 말해야지만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찬물에 발을드려나 정신이 확들듯、어둠에 있다 갑자기 밝음에 들면 그 感度가 全身에 감돌아 전률이 오듯 정신이 번쩍들듯함(극한 자극)이 과거로 추적하는 방법인가? 徒是 과거추적의 感을 잡을 수 없다 할 것이다. 과거 추적은 정신속에 있지 어떤 物事行에 있는건 아니다。정신의 감지力은 物事行 또한 뒤바뀌어 놓을 수도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수평선 위에 저해가 떨어지기 전에 그 方向으로 달린다면 해는 水平線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항상 수평선에 걸쳐 있듯이 보인다。그렇게 보이는 것이 과거로 가는 門인가? 아니 더빨리 내닷는다면 오히려 해는 지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것으로 보인다 할 것이다。지금 동쪽에 해가 떠르는 것은 지구의 운행이 과거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한다면 지금 이렇게 시간이 흐름은 과거로 가고는 것이며 生物의 성숙이나 사람의 늙음 또한 과거의 그러했던 것으로 표현지어지는 것이요。죽음 또한 과거의 그러했던 곳으로 귀환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이것이 또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西氏學은 어리석게도 뭔가에 겁이나서 쫓기듯 하는 것이 즉 빛과 같이 가는 것이 늙지 않는 것이라 한다。이것은 順行으로 도망가는 것을 말하는 것일뿐 그래도 시간은 역시 흐른다 할 것이다。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오는 시간은 약 八초 걸린다 한다。그렇담 정신감은 단 一초 아니 쳐다보기만해도 다달으니 時無流 時無가 아닌가? 정신은 성숙해도 늙지 않으나 그 담고 있는 육신의 굴레가 늙는단 말인가? 정신이 흐름을 감지하는 감관기관처의 엮음에 의하여 生成된 異常한 것으로써 그 存在를 확인하려드는 것이라면 왜 그 감관기관의 노쇠현상을 막지 못하며 막는 방법을 알지 못한단 말인가? 참으로 잡힐듯 잡힐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정신의 고심하는 말들만 지금 늘어놓고 있을 뿐인 것이다。어떻게 과거로 갈 것인가? 각자 심상에서 모색해 보라. - ◎ 그 무언가(사탄에 一種)가 사람의 本性을 제어하여 心相의 한편으로 내어몰고 제가 그 심상의 집을 차지하여 사람을 노복처럼 부리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그것이 곧 異性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왜? 사람을 선택하였는가? 이는 사람이란 性體는 空 그것의 무한깨임의 결과로써 宇宙의 眞髓이기 때문이다. ○ 왜 그런가 章 발췌文 왜? 그런가를 말하지 않으면 西氏한테 當한다。해가 동쪽에서만 뜬다고 자랑만할게 아니라 해가 동녘 에 뜨지 않으면 서쪽에 떨어질 해(太陽)도 없다를 말해야지 西氏가 그런줄 여기리라。뿐만 아니라 해를 뜨여준 동녘을 감사히 여기리라°먹는이도 음식 생긴 理治를 알면 고맙게 여기고 달갑게 먹지 않으랴?… ◎ 先天圖 說明 이것은 桓國의 雨師 司育畜 包義氏 先天卦圖 順序이다。 一、이것을 順次的인 數의 연결을 해서 立體的으로 본다면 살아있다는 표현。흐름(回流)의 左로 돌아가는 나선형이 된다. 方位가 南이라 한 것은 地球에 국한해서 말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필자는본다.이는 원기왕성하게 활동해 나아가는 머리를 뜻한 것일 것이다。지구에 있어서 南方이라 하는 것은 人類가 많이 사는 大陸이 북반구에 치우쳐 있었음으로 文明의 발상地가 있게 되고 그 文明의 發達에 의해서 精神이 깨인 사람들의 思考가 해(太陽) 지나는 곳, 여름을 向할때는 해가 그 쪽에서부터 지나는 길을 북쪽을 向해 점점 차 올라와 낮을 길게하여 日氣를 덥게 하는 따스한 方位 活動的인 方位(여름이면、동식물은 왕성한 활동을벌인다)를 南方으로 봤었기 때문에 그런것이지 만약상 남반구에 大陸이 크게 형성되어 人類의 문명발상지가 되었다면 그 반대 개념 北쪽이 따뜻하다 했을 것이며、활동이나 행동의 思考(一例로 오른쪽이 뭐뭐다 를 왼쪽이 뭐뭐다로 했을 것임)도 반대立長을 취하게 됐을 것이다. 이런걸 생각해봐서라도 南이란 뜻은(남 뿐만 아니라 모든 方位의 개념이 다 그런 식으로 해설 하게 된다) 여기선 方位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활동해 나아가는 흐름의 머리 役事의 頭를 뜻한다. 여기서 北은 디되고서는 발판이나 꼬리를 뜻한다。 나아가는 추진력을 얻게 하는 自體的 저항할 수 있는부분을 뜻한다。로케트는 제 몸에서 뿜어내는 깨스를 추진력으로 해서 앞으로 나아간다。이와 같은 논리이니 흡사 허공중에 힘차게 꿈틀거리며 나르듯 나아가는 龍의 象을 상상하면 이 數의 순서배치도와 맞는다 할 것이다。一을 純陽乾으로 하여 머리를 삼고 八을 純陰坤으로 하여 尾를 삼는 것이다。혹 頭尾의 反對概念을 取하여 그 反對가 두미라 하여도 된다 할 것이다。三數가 東片 六數가 西片이라 한 것은 虛의관점이다。어떠한 實이 있다는 것은 虛의 관점 ((이를테면 지구에 국한한다면 쉽게 말해서 궁글를 수 있는빈 곳。또 實한 것이 빠져나아가면 비게 되는 곳°자체적으로 회전하여 한 곳에 가만히 있는 것이라 하여도 허한 틈새 떨어진 틈새가 없다면 (소위 빈 공간) 돌 수 없다))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二、 다음은 이에대한 作用과 反作用의 설명이다。어떠한 作用이 있다면 그에 의한 (결과와 같은=결과의 성격이 전부 다라곤 할 수 없고 진행과정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봐야 적당할 것이다。) 反作用은 제절로 있게 된다。작용과 反作用間에는 合을 낳고 合은 無量이고 수많은 作 反作用을 일으켜 作 反作 合 集會現相이 空化인 것이다。그러나 그 근본은 作用一이다。혹 反作用까지 근본이라 보기도 한다。따라서 앞서 말한용 한 마리의 활동은 실제에 있어선 용 두 마리가 활동한 결과를 낳게 된다. 源泉 龍 두마리를 상징한다.이는 곧 어떠한 것이 (家見 관점 作家 內用 性格) (삿=邪) 진리라 하면 그 진리에 反하는 것이 절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이 뿐만 아니라 그 反하는 것과의 相間에서 子를 生成시키게 된다는 논리이다。또는 그 作用 反作用 全體 現相을 空體化현상이라 한다. 우리가 山에 올라가 자라나는 나무를 볼때 어떠한 넝쿨식물이 감고 올라간다면 연약한 나무는 그 넝쿨이 감고 오르는 힘을 견디다 못해 자국이 나던가 넝쿨과 함께 새끼 꼬이듯 한다.이것이 곧 작용에 의한 反作用의 原理를 잘 나타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설령 그것이 머리를 같이하여 하늘을 向에 있다 하더라도 反作用의 머리는 저 뿌리쪽이 되어 흐르는 것이 된다할 것이다。이것이 反對立長의 형상을 나타내기 때문에 꼬리는 머리、머리는 꼬리의 형상을 지어보여 원위치의 立長의 象이 되어 보이는 것이다.소위 꼬리를 머리라 하고 머리를 꼬리라 하나 실상 보기엔 젖가락의 짝을 뒤집어 놓지않고 잘 맞추어 논 것과 같다는 뜻이다。설령 머리는 머리 꼬리는 꼬리라는 시각감을 놓는다 하더라도 反作用의 流行엔變함이 없다。작용은 앞으로 나아가면 反作用은 저 뒤로 나아가면서 작용과 同行하는 것이니 흡사 쌍용이 서로 몸을 감고 있는 것 같으니 한쪽은 흐르는 시간(回流) 한쪽은 시간에 의한 결과 空化라 할 것이나 두가지 모두를 서로가 혼합겸해 갖고 있을 수도 있다 할 것이다. 三、只今 필자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어디로 가고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作用과 反作用이 空 속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그 數配置象을 둥그렇게 놓아 어디서보나 같은 立長을 취하게 함인 것이다.다만 수의 순서차 등은 그 變化象貌를 그린 것일 뿐이다。끊임없는 흐름작용인 시간의 의미는 거래가 아니라、空의 活動이라는 것이다。이런 작용과 反作用의 논리를 겉으로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太極이다。즉、作用하는 용수철 나선의 중간을 헤쳐서 그 속 反作用의 內用이 어 떤 것인가를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흐름의 合相 空속의 과거와 미래와 같은 것。現在의 立體空化로 우뚝 서 있어 보이는 것°소위 과거와 미래는 면적°우뚝 서 있어 나타내 보이는 것은 부피。(그사람의 現 얼굴은、과거란 풍상을 새기고 미래란 未知界를 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太極象)은 살아있는 흐름의 축적시키는 內用을 보겠다고 배를 갈러보는 形의 것과 같은 것。만약상 그것이 어떠한 생물체의 넋과 같은 것이 깃든 것이라면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면 생사의 기로에서 고통스레하는 상을 지을것이다。(예로부터 그런 것을 모르고 흐름에 그냥 내어 맡긴자 보다 크게 부귀와 영달하는 이가 드물고,조건에 걸린듯한 삶에 여유롭지 못한 생각하는 이만 있게 하여 爭名만 무성하였다。즉、관찰자의 삶이 그러한 자가 많았다는 것이니 태극의 원리를 빌미로 修道하는 者。卜術예언 등 여러가지) 그러므로 이제라도 그 헤쳐보는 짓은 그만 해야한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여의주를 물고 날아가는 용 한 만리를 그리던지 외롭게 보인다면 쌍용을 그리던지 용이란 것은 저들이 협오를 두는 사탄을 상징하는 것이라서 좋지않은 것이라 한다면 그냥 저서 와서 활동하다 저로 간다는 끝이 희미한 반고리형이나 S字形이나 (작은도형 )形이나 아무것(그럴듯한 명분의 形)이나 대체하면 된다 할 것이다(※ 다음 페이지에 文章이 이어진다)。 *@ 이것은 八卦 陰陽對比 順序를 나타내는 그래프 圖形이다。앞의 先天卦圖 설명에 보조 역할을 하기위해서다. 此後의 얘기에도 많은 참고역할을 할 것이다. 즉 一은 乾를 상징하고 二는 兌卦의 順序란 뜻이다。이卦順序의 數配置를 注知하고 있어야지만 此後에 나오는 數變에 의한 괘상 抽出理論을 理解할 수 있게 된 다(※ 앞 페이지 후미에서 이어진 문장이다) 원래 아무런 形을 짓지 않는 것이 걸고 넘어지고자 하는 이에게 걸림이 없는 것이나 (이 또한 생각에 폐단 말씀에 語弊가 있다=그래도 「왜? 아무런 걸림이 없어 하고 트집잡고자 하는 개념을 갖는다면 그래서 나는 그 걸리는 것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 이라 한다면 이것은 徒是 제반걸 생각할제 걸리고 안 걸리고는 자기 심중에 있는 것이지 外部의 어떤 상태에 의한 것이라곤 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그렇게됨 이와같은 걸리고 걸리지 않는 논리를 가르킬 수 없게 되므로 어떠한 모습을 象形化하여 걸려드는 것과 같은 批判을 加하게 하여 걸림을 없애는 방편논적으로 利用 생각을 하게 해서 象貌를 그리고 諸主長을 펴게 해서 걸림과 같은 念願을 行으로 풀게 하는 것이다. 앞의 包義氏 先天卦圖에서 十進法을 갖고 논한다면 九와 十이 보이질 않아 빠진 것 같으나 잘ㅡ살펴보면 對稱合數가 九數의 性格을 띄고 있고 동그렇게 싼形(모양形 생긴形)이 空形으로써 十과 같은 의미를 부여해 갖고 있다 할 것이다。즉 一合八은 九란 뜻으로써 合이란 意味 또한 十數를 代辯하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할 것이다. @ ◎ 이 數(위 도형) 配置局은 桓國의(龍圖) 龜書에 의한 後天數配置局圖이다. 대칭선상의 세 개의 수를 합하면 十五가 된다。十五란 여러의미가 있겠으나 여기선 필자 생각으론 十四一心 원만함을뜻한다 할 것이다. 十五數를 뜻하는 갯수가二十四개나 된다.이는 같은 立長을 취하는 것이 그렇게 많다는 뜻이다。內用合數가 어떻든간에 궁극에 가선 같은 立長이 된다는 뜻이다。그 궁극이란 뜻도 실상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에서 끝난다는 시간적 거래적 개념이 아니라 空속의 活動相이 그렇다는 뜻이다。즉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은 어디서 보나 같은 모양이 되어야 하는 것임으로 그것은 空虛밖에 없는 것이다. 森羅諸象의 脫象이나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그 삶이 복잡 다단하더라도, 궁극에 목적은 탈파(깨트려 벗어치움)이니、파괴해 치우면′궁극엔 같은 立長 영(零) 空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모두가 다 아太虛로 돌아가、虛한 것이 되어 아무것도 걸림이 없으니 內面의 세계를 파괴해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그 모든것을 다 해결하여 무애관점이 된다는 것이다。이 數 배치에 의한 圖를 立體的으로 볼진데、여러가지로는 볼 수 있으나, 필자가 탈파코자 하는 뜻과 적당히 合致되는 두가지를 例를 들어보겠다. 一、하나는 回와 回中에 點의 관점이다.陽數끼리 이어 테두리하고(가운데 五는 제외하고 이는 점의 관점 사라진다。 나타난다를 의미하거나 어떠한 物體生成을 의미한다) 陰수끼리 이어 테두리하면 나선 대통관을 구멍을 통하여 그 흐름이 어떠한가를 들여다 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즉 작용에 의해 反作用의 變化를 直示관찰 하는 상태를 뜻한다. 가운데 五는 作用에 의한 生子를 의미하거나 주위가 조성된 가운데物體를 의미하거나, 흐름의 결과나 원인이 저쪽 어딘가로 묘현히 소멸됨을 뜻한다.또는 묘연한 곳에서 옮을 뜻한다. 어딘가라는 말뜻 또한 역시 全空 속의 말뜻이다. 다르더라도 궁극의 到達한 立長은 같아진다는 뜻이다. 三、以上의 說을 比判하는 反對理論 및 그 治療立長。以上은 견강부회나 아전인수격의 삿된 생각의 說을 털어논 것에 불과하다。또한 옛사람도 착각이거나 무언가에 속고 있는 것이다。몇 개의 같은 立長을보여주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屈曲된 입장이 희생되었는가를 그 내면을 파헤쳐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공허상이 또한 그러한 서로가 다른 굴곡된 입장을 안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一位의 立長에서부터 例를든다면 一六七이 굴곡된 입장이고 一五七이 굴곡된 입장이고 五三一八三이 굴곡된 입장이고 一九二一七九二三四一五四一九四一六九一八九一七四一二三 등등 一位를 主役으로 하여서도 굴곡된 입장이무량이라 할 것이다。더 飛躍한다면 두자리 수나 네자리 수나 다섯자리 수나 자릿수 가감에 의한 굴곡이있고 十進 五進 六進二十一進三十一進둥 進法 加減에 의한 달리하는 입장의 굴곡이 있는 등°그 척도를달리하는 무량수나 무량진법을 다 동원한다면 그 굴곡은 셀 수 없다。이런 많은 걸림을 숨겨 갖고 있거나內在해 갖고 있으면서 같은 입장 운운하는 것은 무슨 利속 차릴 것(잘 꾸민、헛상의 껍질로 유혹、뜻하는 목적을 관철시키려는 꿍꿍이 수작과 같은 이념·사상主義 主長)이 있어서 그렇거나 語不成說이다。이런걸 봐서라도 즉 이러한 無碍를 이루고자 하는、「虛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꾸며되는 이론相도 이러할진데 하물며 어떠한 相이나 主長하는 諸理論의 實相이나 실제에 있어서의 어떠한 실상이라도 그 내면을 파헤쳐본다면 俗되고 거짓되고 모순투성인 것이다。걸리지 않는、또 걸리지 않겠다는 虛의 관점도 이러할진데 하물며 다른 주장의 걸리는 相이야 말할나위 있을 것인가? 諸相은 거짓투성이 참이란 없는 것인가 한다 했더니 혹이 달래는 입장에서 말하길、이 사람아、뭘 그렇게 흥분하고 비관적으로만 생각할 것인가? 좋은 관점으로 돌려보면 어떻겠는가? 한다。그대는 만약 귀한 손님이 방문한다면 쓸고 닦고 청소해서 잘 정돈해 놓고 빈객을 접대코자 할 것 아닌가? 그건걸 갖고 뭘ㅡ속인다고만 할 것인가? 諸흐름상의 나타난 空化가 이와 같은 것이거늘 알알이 들춰서 여기는 먼지가 끼얹네 저기는 헐어져서 틈새가 벌어졌네 메주알 고주알 탈을 잡는다면 그것은 고약한 방면으로의 안목을 돌려서 즐기고자 하는 깨끗치 못한 성격소유자의 관점이라 할 것이라 한다。또 世態 生態行을 긍정적인 방면으로 관점을 두어서 긍정적으로 관찰할래기라 한다。가만히 듣고보니 그 말씀이 또한 그럴듯한 것 같기도 하고 일면 사탄이 꾀이는 말 같기도 해 미심쩍은 面이 없지 않으나 그래도 마음에 와 닿는 가르키는 뜻이 있으므로 병될건 없다 하였다。 諸般屈曲된 立長의 業積이 궁극에 가선 같은 立長 空化로 나타나 뵈인다고도 할 수 있어 흠결잡히는 쪽으로만 볼 것 또한 아닌 것이다。염원해탈이란? 생각으로 원한걸 실행으로 옮겨 풀어벗은걸 뜻하는데 이것을 갖다 목적성취라 하는 것이다。이 목적성취 달성이 空化란 것이지 하필 一相(같은 모양=삼라만 같은 모양이 아니라서 삼라만상이라 한다) 求함만을 말하는건 아니다。화단의 화초의 자람은 각 개성을살려 화려함을 목적으로 하고((의도하는 것 있어 (그 자체가 의도하는 것이라도 그렇다) 그의 의도하는 대로의)) 저 포도넝쿨은 자기 존재가치를 영원히 살리기 위하여 탐스런 포도 열매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이다。景界·感想.無無料 실증권태 卽樂이다。存在價値 永遠性要求 自性 탈파상 비친그림 |
|
첫댓글 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