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불사르고
김일엽 지음/김영사 펴냄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기에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 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어질까요.
혼마저 합쳐진 한 몸이건만
그래도 그지없이 아쉬움
그저 남아요.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기에
-본문 중에서
불탄 송아지처럼 날뛰던 이 청춘을 불살라 버리고, 영원히 시들어지지 않는 청춘을 얻고자 입산했던 일엽 스님은 수십 년의 참선 끝에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아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부처님과 보살들도 그 고개만 넘으면 한숨을 쉬며 이제는 틀림없이 성불할 수 있다는 정의 고개, 그 고개를 넘어 '성불의 길을 동행하며 사업으로 서로 돕는 벗, 변치 않는 동지가 되기를 바랄 뿐'이라는 말로 그 길고 긴 인연을 마무리한다.
스님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가지는 인간적인 욕망과 고뇌,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는 과정은 미려한 문체를 통해 3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부처님의 법문이니 하나님의 말씀이니 할 것 없이 내 스스로 의심나지 않는 현실을 보아야'하며, '회의와 불안이 이는 생활은 진정 자유와 생명을 지닌 생활이 아니'라는 깨달음, 그리고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치열했던 구도의 땀방울은 이 책의 행간마다 오롯이 담겨 있다.
일엽 스님은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여성으로 화가 나혜석 등과 함께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결혼에 두 번 실패한 뒤 1928년 32세의 나이에 돌연 출가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이렇듯 겉으로 보였던 파란만장한 삶 때문에 '사랑에 실패하고 출가한 여승'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그 반작용으로는 치열한 구도자적 삶의 모습이 가려져 있었다. 이에 일엽 스님의 가려진 진실한 모습과 삶을 되살려 내고자 한다.
저자 김일엽은 1896년 평남 용강에서 출생. 본명은 원주(元周). 이화전문과 동경의 영화(英和)학교를 수료한 후, 한국 근세사의 여류 문인으로 활동했다. 1920년에 잡지를 창간해 여성해방을 부르짖으며 당시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28년 만공스님의 문하로 입산, 덕숭산 수덕사 견성함에 거처하며 수도생활에 정진하다가 1971년 입정했다.
작품으로는 『어느 수도인의 회상』『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단장(斷腸)』『애욕(愛慾)울 피하여』『일엽선문(一葉禪文)』『당싱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사랑이 무엇이더뇨』『꽃이 지면 눈이 시려라』『청춘을 불사른 뒤』 등이 있으며, 입적 후 월송 스님에 의해 출간된 문집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이 있다. 수덕사 환희대에 영정과 추모탑이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