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컴퍼니 유 킵 The Company You Keep (2012, 미국, 121분)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 출연: 로버트 레드포드 (짐 그랜트), 샤이아 라보프 (벤 셰퍼드), 줄리 크리스티 (미미 로리), 수잔 서랜든 (샤론 솔라즈) |
(제목을 해석하면 당신들이 사귀어온 친구들. 지속된 우의. 제목에서 프랜드가 아니고 컴퍼니라고 쓴 점에 주목하자. 이 영화는 80을 바라보는 나이인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출과 주연을 맡았다.)
짐(로버트 레드포드)은 뉴욕 주 조용한 한 지역의 인권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옛 친구 샤론(수잔 서랜든)이 30년 전 자신과 그녀가 소속되어있던 조직에서 조직의 자금을 동원하기 위해 은행을 털다가 실수로 경비원을 죽이게 된 사건 때문에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건 당시 조직의 리더만 체포되었고 조직원들은 수배 속에서 신분을 세탁하고 모두와 연락을 끊은 채 살아간다. 특종으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으려는 젊은 기자 벤(샤이아 라보프)은 샤론의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신분을 감추고 변호사로 살아오던 짐을 지목하고 가려졌던 그의 진짜 정체를 폭로한다. 짐은 어린 딸을 동생에게 맡기고 수배망을 피해 도주 한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30년 전 친구들을 찾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기자 또한 그를 추적하며 짐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영화는 그 두 갈래의 여정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들의 조직은 웨더맨(이후 웨더 그라운드로 바뀜- 영화<허공에의 질주> 주인공도 웨더맨 소속)이다. <상상의 정치: 웨더맨의 형성>(서울대, 안효상) 논문에서 보면, 파리 혁명을 제외한 유럽 유일 혁명인 ‘68의 혁명’의 강령은 자유였고 당시 미국 혁명은 폭력이었다고 쓰고 있다. 그때의 미국 ‘스튜던트 파워’는 전복적이었다. 체제의 올바른 인식을 위해 마르크스 이론에 주목 했고 체제 변화를 위해 무장투쟁을 조직했다. 그 조직 중 하나가 웨더맨이다.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알기 위해서 기상통보관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 스스로 웨더맨이다. 바람은 우리가 일으킨다.” 반인종차별주의, 노동자혁명, 베트남 반전운동의 맥락에서 나온 신조가 ‘베트남전을 내전으로! 제국주의 모국인 미국 정부를 전복하자. 전쟁을 국내로!’였다. 웨더맨은 제국주의를 내부로부터 공격하자는 급진 조직이었고 문제가 자신들의 모국인 미국 안에 있다는 것을 이 나라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강력한 무장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국내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도심 곳곳의 상가를 파괴했고 빈 건물을 폭파했으며 경찰과 물리적 투쟁을 벌였다. 이런 강력한 파괴 투쟁은 실패를 불러왔다. 하지만 그들은 주관적으로 승리를 선언했다. “우리 웨더맨 조직이 ‘물질적 손실’을 입힌 것 이외에도 목숨을 걸고 나섬으로써 다른 백인 급진주의자들이 유사한 행동을 하도록 자극했으며 전국 행동 속에서 간부 대오가 형성되었다”
위 논문에 의하면 68년 포춘 지에서 미국 대학생 중 36만 명이 자신을 혁명가라고 인식했다. 70년 갤럽조사에서는 대학생 절반이 사회변화를 위해선 폭력도 정당하다고 답했고 학생들 3분의 1이 자신은 좌파, 극좌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태동한 신좌파들(“우리는 최소한 적당히 안락하고 적당히 쾌적하게 자라났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를 더 이상 안락하게 바라볼 수 없는 자들이다. 우리는 불편하게 되었다. 우리의 안락함을 유지할 수 없는 사건이 개입했기 때문이다.”)은 그 체제에서 백인들만의 특권을 누리는 집단의 출신이자 바로 그 집단 자체였다. 이런 위치가 인식 기반의 지반을 이루었다. 그들의 혁명적 열정과 실천의 밑바탕에 인종적 죄책감이 있었고 여기서 벗어나려는 도덕적 책무, 즉 지적 엘리트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오직 자신들만이 흑인들만을 위한 투쟁,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 반 베트남전의 유일한 백인집단이라는 인식.
이런 배경 하에서 영화를 보면. 짐은 동지Comrade였던 사람들을 컴퍼니Company로 만난다. 제일 먼저 체포된 샤론은 신문 당하는 방에서 기자와 인터뷰하며 말한다. 주부로서만 살다가 아이들이 자기 길을 갈 때 자수하려고 결심했었다고. “그때 우리는 모두 싸웠다. 파리와 도쿄, 앙골라에서도 싸웠다. 싸움이 폭력이 아니라,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국가에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이 폭력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무고한 생명을 죽인 후의 30년은 나에게 지옥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동일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나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짐은 자기 무죄를 입증해줄 유일한 증인인 옛 연인 미미(줄리 크리스티)를 만난다. 줄리는 30 년 동안 6번의 신분을 바꾸며 살아왔다. 둘이 재회했을 때.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부자들만을 위한 나라에 결코 복종할 수 없으며 혁명은 계속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나이 들면 세상에 굴복하거나 자기 신념을 꺾지만 나는 아직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우린 꿈을 꾸었지. 하지만 그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어. 우리는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있었어.” 짐만이 가장 명료하게 신념을 저버린 인물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에 회의를 품었고 그에게는 딸을 키우는 것이 더 소중했다.
“너 변했구나.”
“변한 게 아니야 나는 철이 들었을 뿐이야.” “
“우리는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있었어.”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그들과 다른 사람이었다면 말이야.”
30년 전 그들의 정치적 활동 시기와 시대적 배경이 같은 영화 <허공에의 질주>(시드니 루멧, 1988, 115분)는 FBI에 쫓기는 반전운동 가족을 그리고 있다. 가족들이 끊임없이 도주하며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자신들의 선택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잠정적으로 거주하는 곳에서 새로운 일을 찾고 그 신념을 어떻게든 변주해서 지속할 방법과 가능성을 찾았다는 데 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과 함께 깊은 감동을 준다.
비교해서 <컴퍼니 유 킵>은 서글픈 향수에 빠진 느낌을 주며 과거의 사건은 회한이 되었다. 이유는 인물들의 삶과 그들이 말하는 삶이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신분을 감추고 과거를 세탁하자마자 그 시대에 살만한 인물들, 즉 잘 먹고 잘사는 인물들이 되었다. 6번의 도주에도 멋진 남자와 별장에서 뱃놀이하는 유유자적한 삶, 교수로서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삶, 변호사로서 인정받고 신망도 얻으며 딸을 키우는 삶. <허공에의 질주>의 가족들이 끊임없는 실천 속에서 기쁨과 새로움을 창조하는 인간의 모델을 보여줬다면 <컴퍼니 유 킵>은 죄의식이 믿음을 압도했을 때 인간이 어떻게 변질하는지를 보여준다. 말과 삶이 완전히 다르다. “나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어!” 그들은 기만적이게도 현실에서 엘리트에게 주어지는 모든 특혜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오로지 짐만이 신념을 포기했을지라도 당시 자신들이 멈추게 하고 싶었던 그들과 내가 무엇이 다르냐는 인식에 도달해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특권을 받는 것을 성찰하지 않으면서 ‘난 여성을 차별하지 않아.’ 명문대를 나왔다는 특권이 정당한가에 대한 고민도 없이 ‘난 학벌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 여자인 것을 내세워 무언가 더 얻으려 하면서 ‘난 성별로 인간을 차별하지 않아.’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당하게 특권을 누리거나 특별한 행운 때문에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생각하지 않으며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으로 정당화한다. 우리가 누리는 특권이야말로 우리의 맹점인 것이다. <컴퍼니 유 킵>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에 대해 어떠한 각성도 없이 신념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의 나는 누구이며 어떤 인간인가?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여기서 인간의 죄가 생긴다.
구약에서도 자주 언급하듯 예수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지칭한다. 구약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서 포도나무는 율법을 잘 지키는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즉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한다. 구약의 이 비유는 모두 실패하고 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라는 예언자들의 탄식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라는 특권적 근거로 스스로 포도나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특권을 누리면서 이곳에서 공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기만하는 것이다. 전제부터 틀렸다. 포도나무는 혈통도 민족도 소속도 아니다. ‘내가 유대인이다. 내가 선택된 자다’라는 자의식으로는 포도나무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인간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다.
예수는 그 실패한 비유로부터 다시 출발한다. 실패한 자리인 그 원점에서 출발한다.
“너희가 아니라 내가 포도나무다.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고 너희는 너희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구분된 자다. 나는 선별된 자다. 난 남다르다. 나는 예외다.’ 예외가 아닌 삶을 살면서 스스로 예외라고 생각한다는 것에서 너희는 예외가 아니다. 가지일 뿐이다”.
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 시스템의 특권을 맹목으로 누리면서 그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우리는 각각 다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존재의 전제 자체가 틀렸다는 점에서 같다. 우리가 틀렸다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예수는 포도나무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는 거기에 연결된 가지다. 가지의 사명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열매를 맺는 일은 포도나무에 머물러 있는 존재에겐 필연의 결과이다. 모든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에 슬픔이 있다. 열매를 맺기 위해 모든 가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포도나무는 3년간 열매를 맺지 못하게 계속 가지만 친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과정이 열매 맺는 과정이다. 열매 맺는 가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머지 가지를 가차 없이 잘라낸다. 과정이 열매이다. 과정이 목표이다. 가지를 죽이고 살리는 일이 열매를 맺는 과정이다. 잘려나간 가지, 살아남은 가지, 또 살아서 열매 맺는 가지, 열매를 못 맺는 가지. 모두 분열을 겪는다. 분열을 겪기는 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 모두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실패한 자리에서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이다.
열매로 비유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 포도로 비유되는 열매는 어떤 것일까? 내가 맺어야 할 열매는, 내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답하기 힘들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간절히 원하는 일.’ 그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바로 그것이 ‘열매’다!
지금 현실에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다.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면 평생 다른 사람이 보고, 듣고, 묘사하고, 가르쳐준 세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에릭 메이젤 <나는 예술가로 살기로 했다> (Eric Maisel/ 안종설 옮김/ 심플라이프) |
이 책은 새로움을 창조하고 싶은 사람들의 질문 메일을 답변한 책이다. 수많은 사람의 보편적인 질문. ‘이 나이에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일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한다.’ ‘난 한 가지 일에 몰두해 본 적이 없다. 하다 말다를 반복한다.’ ‘갈수록 창의력이 시들어 간다.’ ‘ 남들의 평가와 시선에 너무 신경 쓴다’ ‘생계를 꾸리느라 창작할 시간이 없다.’ ‘퇴짜를 맞을까 봐 못하겠다.’ ‘이런 내가...?’ 작가는 단순하고 명료하게 질문의 형태로 답을 해준다.
“당신은 매일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다른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것에 집중하면서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그것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그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그것이라 생각해도 매일 그것을 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찰라이든 오랜 시간이든 매일 하나님을 부르는 순간이 있을까? 매일 간절히 원하는 것을 위해 기도하는 순간이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인이 맞다.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하다. “너희가 아니라 나는 포도나무다. 너희는 포도나무 가지다. 그렇다면 포도를 맺어라. 그 증거는 하나다. 나는 사랑하고 믿는다. 사랑의 증거는 내가 삶을 기뻐하고 있는가? 삶이 매일 한순간이라도 기쁜가? 매일 스스로 기쁨을 생산하기 위해서, 기뻐할 수 있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 선택하고 몰입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너희는 이미 포도 열매다.”
바울 서신을 읽을 때 바울이 띄운 서신을 가장 잘 읽는 방법은 내가 수신인이 되어서 읽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통찰력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어서 가장 좋은 것이 스스로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외의 열매가 가득하여 어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빌립보서 1장 9~11절)
가장 좋은 것을 분별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열매이다.
1979년 ‘이 시대의 사랑’으로 데뷔한 최승자 시인은 정신분열증을 겪고 고시원을 전전하며 노숙자처럼 버려진 삶을 살아왔다. 시인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던 출판사가 최소 생계유지를 위한 경제적 지원도 했으나 환청을 보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스스로를 의식하며 고통스럽게 살아왔다. 그녀는 정신분열증 11년 만인 2013년에 <쓸쓸해서 머나먼>이란 시집을 냈다. 그녀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우리 시대와 사회가 시인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요? 오늘 찾아온 것은 사실 이 때문입니다.
"그건 틀린 말입니다. 자기 삶을 사회나 남에게 전가할 수는 없어요. 괜히 '우리 시대가 저 친구를 버려놓은 것이 아닌가' 말하는데, 이는 내가 선택한 삶이었어요. 나 혼자 겉돌았고 그런 공부를 했고 병원에 들어가 있었을 뿐입니다."
"죽으면 죽겠다 싶었어요. 내가 썼던 시집 다섯 권만 둥둥 떠다니겠지 했어요. 2년 전 막내 외삼촌이 나를 찾아내 병원에 입원시켰어요. 병원에서 규칙적으로 내게 밥 세 끼를 먹이고 약 먹이니 살겠더라고요. 당초에는 '이 정신의 병에 약을 먹은들 되겠나' 생각했어요. 이건 정신의 문제인데도…. 밥을 먹으니 괜찮아졌어요. 병원만 나오면 먹는 것을 잊어버려요. 그래서 다시 입원하게 됩니다."
―본인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시를 계속 쓸 것이고, 밥만 잘 먹으면 돼요."
열매 맺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앞으로 계속할 것이다. 밥만 잘 먹으면 된다. 내가 열매 맺기 위해 애쓰는 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애쓰는 한 하나님은 나에게 밥은 잘 먹여주실 것이다. 단순하고 명료하다.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열매다. 가지가 할 일은 기뻐하며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 열매가 또 다른 기쁨을 생산하고 창조한다. 우리의 꿈이 더는 꿈이 아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 일을 우리 일로 만들어 내는 그런 기적을 낳을 것이라는 기적 속에서. 우리는 우리 삶이 기쁜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기쁨이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고 예수님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이 맞다!
-----------------------------------------------------
이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순전히 애인 동석의 일 때문이었지만 덕분에 동두천과 상주 두 곳의 작업실을 운영하던 경제적, 정신적 부담은 줄었다. 동두천 작업실을 유지하던 이유는 작품 활동의 중심인 서울에서 벗어난다는 두려움을 상쇄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제 주거지 이주에 더해 별 볼 일 없는 중견 작가가 지방으로 내쳐지는 것 같은 삼류 감정이 이사 옵션으로 따라붙는다.
상주에서의 생활은 평온했다. 아파트 10층 집에서 애인과는 애틋했고 살가웠으며 같은 동 7층 작업실에서는 그림에 매달렸다. 그림 그리기가 버거우면 냅다 세 개 층 계단을 겅중겅중 뛰어 애인 품으로 쏙 들어갔다. 물론 작업만으로 작업실 시간을 모두 보낸 것은 아니다. 혼자만의 공간의 힘은 작업하는 공간 그 이상의 힘을 준다. 대전은 상주보다는 도시지만, 주소지까지 처음으로 옮기는 복잡한 마음마저 더해 작품 발송도, 재료를 사는 것도, 넓은 작업실을 확보하는 것도, 작가들과의 교류도, 전시회를 보는 것도 힘들다는 푸념이 나를 시끄럽게 했다.
이사 온 집의 누수 문제로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때마침 장마철이어서 집안을 감싼 눅눅한 공기는 늘어지는 공사를 더 잡아끌었다. 작은 방 하나가 덜렁 작업 공간으로 주어졌다. 집은 쌓아둔 그림으로 꽉 찼다. 레지던시에 도전할 나이도 이미 지나버렸고 따로 작업실을 운영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이사 준비를 위해 동두천에서 캔버스를 정리하고 옛날 그림과 드로잉들을 추려서 버리고 쓰던 책상과 물건들도 많이 버렸다. 나이 숫자가 올라간 만큼 먼지 쌓인 그림들과 학교 수업 시간에 했던 판화 에디션까지 하나하나 들여다볼 만큼 세세하게 짐정리를 할 때 그림들이 나를 과거로 몰고 갔다. 자만도, 우월감도, 칭찬도, 패배감도, 좌절감도, 당혹감도, 우물쭈물함도 고스란히 지닌 흔적들. 회한이 몰려왔다. 당시에는 그림을 그릴 종이와 캔버스와 물감을 사는 것도 힘든 시기였다. 간절한 소망 하나는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 환경만 제공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이었다. 순진하게 고민하고 순박하게 그렸다.
죽을 때 깡그리 태우고 죽자던 그림들을 고이고이 포장해 이사했다. 생활공간과 작업실이 합쳐진 지금, 집안을 뱅뱅 돌며 방황하고 있다. 앞으로 작업을 위한 돈은 점점 더 필요하게 될 것이고, 작품을 쌓아 둘 공간도 더 넓어져야 할 것이고, 작품의 질은 더 좋아져야 하며 나를 초대할 갤러리는 더 커져야 한다. 시대는 예술가를 외면하고 있고 문화적 소양까지 잃은 사람들의 대중적 기호가 예술의 기준이 되었다.
며칠 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잡스러운 신변 이야기가 오고 간 후 친구가 물었다. “너도 그림 그리기 싫으니?” 내가 말했다. 당연하지. 난 그림 그리기가 죽을 만큼 지겨워.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면 화가란 직업도 꽤 괜찮은데... 낄낄 거리며 대화는 더 이어졌다. 그림 그리기가 지겹다고 하면 그 짓을 왜 하냐고 물을까 봐, 작업은 즐겨야 한다고 비난할까 봐 사렸던 말들이 서로의 입에서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나도 지긋지긋하게 물리고 짜증 나. 이 바닥에서 계속 버텨야 할까?” 축 늘어진 나보다 더 무거운 방에서 내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지긋지긋 죽을 만큼 힘들어도 계속해야지. 하는 도중 별별 생각이 나를 압도해 기분이 널을 뛰어도 난 해야지. 내 능력이 나를 시험하고 모략에 빠트려도 꺾이지 말아야지. 그런데 말야... 이 시대는 왜 이토록 우리에게 가혹한 걸까? 어떤 경제적 보상도 없이 작가 스스로 십몇 년을 이어왔으면, 그렇게 만든 예술가들의 세계를 자신들의 문화라고 주장한다면 이제 어떤 반응이라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냐? 이제 꼴랑 중견작가가 생긴 나라에서 신인만 찾고 스타만 찾으면 나머지 중견, 원로들은 부록이야? 이게 문화야? 문화라고 내세울 땐 예술인 잘도 꼽으면서 문화적 가치에 대해선 아무 생각도 없어. 아이돌이 문화야. 아이돌만이 가능성이야. 잘 처먹고 잘 외면하면 잘 사는 처참한 시대야...
친구와 난 조만간 있을 서로의 여행에 대해 잘 다녀오라는 당부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애꿎은 담배만 타들어 갔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피곤함으로 잠을 설치는 안쓰러운 동석을 위해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창밖 어둠에 반사된 해괴한 몰골에 놀라 담배를 급히 끄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설교 녹음파일을 열었다. 말씀은 정확히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저격당한 나는 피를 질질 흘렸고 눈을 감았다.
입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포도를 보면서 생각한다. ‘이것이 내 열매인가? 저 포도, 속을 알 수 없는 저 시커먼 포도 알이 내 열매인가?’
내가 덜 교만해 기회와 조건을 더 살렸더라면? 그때 그 인연을 건방 떨며 놓지 않았다면? 더 일찍 시작해 재능을 발휘했다면? 물리적 환경이 받쳐 주었다면? 더 좋은 학교를 나와서 더 좋은 배경으로 더 좋은 동기와 더 좋은 선후배를 두었다면? 조금 더 대중적 취향을 고려해 그림을 그렸다면? 팔리던 그림 시리즈를 더 그렸다면? 진즉에 인맥을 넓혀 왔다면? 아예 그림을 취미로 하고 돈을 벌었다면? 앞으로도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예술가라는 특권, 특별한 재능, 전업 작가라는 행운을 누려왔으면서도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어떤 각성도 없이 삶을 연명해왔다. 나는 여전히 잘못하고 있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다시 할 수 없는 자리에 돌아와 있다. 나의 자리를 여기서부터 다시 출발할 수 있을까? ‘내가 예술가이다. 내가 선택된 자다’라는 자의식으로는 포도나무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예수는 그 실패한 비유로부터 다시 출발하셨다. “너희가 아니라 내가 포도나무다.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고 너희는 너희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구분된 자다. 나는 선별된 자다. 난 남다르다. 나는 예외다.’ 예외가 아닌 삶을 살면서 스스로 예외라고 생각한다는 것에서 너희는 예외가 아니다. 가지일 뿐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과정은 지난하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죽을 것 같고 포기하고 싶다. 열매 맺는 것에 집중할수록 초조함만 더해지고 자괴감이 몸을 좀먹는다. 나는 아직 왜 제자리인가? 예수는 생명의 참 포도나무요, 나는 잘려나간 가지이니 다시는 그 나무의 수액을 먹지 못하리라. 너는 이미 잘려나가 가벼운 바람에도 쉽게 부러지는 죽은 가지가 되었고 땅에 짓밟혀 먼지처럼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예술가로서 너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지워질 것이며 영원히 끝없는 열패감으로 너의 생을 마감할 것이다. 너는 죽도록 주위 사람들을 괴롭혀왔고 그 덕에 그 사람들도 같은 생을 마감할 것이다...
예전에 누군가 내게 그랬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업을 할 때는 눈꺼풀이 열리기도 전에 전날 밤 죽도록 매달렸던 그림을 보러 뛰었다. 이사 후 우울한 불안감이 헤벌쭉 웃으며 천정에서 나를 바라본다.
“당신은 매일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다른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것에 집중하면서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그것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그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그것이라 생각해도 매일 그것을 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그것이 아니다.”
그만큼 해왔다고 자부해왔다. 기꺼이 포기하고 집중하고 생각하고 실천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라! 당연하게 생각했다. 과정이 열매이고 목표라고 숱하게 지겹도록 말해왔다. 그 과정에 내가 있고 내 작업이 그 보증물이라고 생각해왔다. 조그만 흔들림에도 와르르 무너질 만큼의 간절함? 작은 진동에도 불규칙한 그래프를 만들어내는 집중? 나의 말에 책임을 져왔던 것일까? 책임 운운 전에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알고 내뱉은 것일까? 그 말의 무거움을 알고 있을까?
좌절감에 동공이 흐려지면 과정이 열매라는 생각은 가차 없이 삭제된다. 죽을 만큼의 그만큼의 현실만이 보일 뿐이다. 다시 간신히 생기를 얻어 작업을 시작하면 현실은 사라지고 그림과 나만 존재한다. 나는 얼마나 솔직하게 그렇게 해왔을까? 예전 꿈을 계속 그 꿈으로 착각하고 있을까? 오늘만 사는 작가라고 말하면서 그 오늘은 간절한 그 소망대로 보내왔을까? 불안이 영혼에 침투하고 미래의 공포가 내 우주를 전부 집어삼키는 걸 그리기는 쉽다. 내가 선택한 길을 가는 동안 기쁨을 보았을까? 기쁨 없이 사명감만 있었을까? 죄의식으로 교회를 다니고 습관처럼 그것에 압도된 그림을 그렸을까? 나에게 기쁨과 새로움은 있었을까?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이 내게 어떤 기쁨을 주었을까?
가지를 죽이고 살리는 일이 열매를 맺는 과정이다. 잘려나간 가지, 살아남은 가지, 또 살아서 열매 맺는 가지, 열매를 못 맺는 가지. 모두 분열을 겪는다. 분열을 겪기는 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 모두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실패한 자리에서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맺어야 할 열매는, 내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답하기 힘들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간절히 원하는 일.’ 그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바로 그것이 ‘열매’다! 가장 좋은 것을 분별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열매이다.
광대뼈가 도드라져 볼이 푹 패이고 눈만 이상하게 빛나는 최승자 시인은 밥을 먹으면 된다고 했다. 밥만 먹으면 자신은 시를 계속 쓸 것이라고 했다. 풍족하게 밥을 먹는 나는 밥을 먹여주는데도 앞으로 풍족하게 먹지 못할까 봐, 앞으로 그림을 계속 그리지 못하는 조건에 처하게 될까 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죄의식과 변명은 다시 내 삶의 불안함을 사회나 남에게 전가하고 있다. 다시 그 전가는 죄의식으로 돌아온다.
밥만 잘 먹으면 된다. 나는 앞으로 계속할 것이다. 열매 맺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 일을 우리 일로 만들어 내는 그런 기적을 낳을 거라는 기대 속에서. 나의 삶이 기쁜지 물을 필요가 있다.
설교 파일을 타이핑하며 읽고 또 읽는 동안 몇 번은 높은 파도를 탔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울렁대는 파도 속에서 동석의 얼굴도 지나가고 친구의 얼굴도 지나가고 어린 나도 지나가고 늙은 나도 잠겼다 떠올랐다.
얼마나 빛나는 가을인가? 얼마나 아름다운 계절인가? 화단에는 작은 나비가 날고 로즈마리는 풍성해졌고, 알로에 잎은 세 배나 굵어졌으며 풀들은 얼굴을 붉히며 유리창에 기댔고 바람은 달고 볕은 따뜻하다. 당장 작업 공간도, 재료도, 시간도 여유 있고 아직 배부르며 아직 그릴 수 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더 잘 실패한다는 말이 침처럼 입안에 고여 있지 않은가?
“기쁨이 나를 압도하고 있는가?”
다시 묻는다.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기쁨이 나를 압도하는가?”
“이미 일어나고 있고 간절히 원하는 그 일에서 기쁨이 나를 압도하는가?”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열매다. 가지가 할 일은 기뻐하며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 열매가 또 다른 기쁨을 생산하고 창조한다.
아침은 건너뛰고 점심 잠을 자고 일어나니 늦은 오후다. 목에 담이 와 고생하는 동석이 출근하고 다시 노트북을 켰다. 죽어가던 하루가 살아나는 저녁이다. 말씀이 다시 가슴에 불을 켠다. 가능성의 불이기를, 사랑의 불이기를, 다시 원점에서 생각할 기회의 불이기를 기도드린다. 나는 분열한다. 나는 밥을 먹고 분열한다. 나는 밥을 먹고 분열하고 다시 시작한다. 나는 밥을 먹고 분열하고 다시 시작해 열매를 맺는다.
--------------------------------------
자화상
최승자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나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섭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 뚱어리의 슬픔이에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독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첫댓글 예배 후기가 안 올라와서요 제가 올려요. 뒤늦게 전도사님 설교 파일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힘을 냈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씀후기를 써야지 생각하며 몇 주에 걸쳐 설교녹음한 걸 여러 차례 들으며 생각을 가다듬고 있었는데...아니, 사실은 엉덩이 붙이고 앉아 글을 쓸 시간을 만들지 못해 늦어지고 있었는데...샛별 교우님에게 이런 은총의 시간이 주어졌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호호 제가 감사합니다. 미리 올라와 있었다면 글 쓸 시도도 안했을 거에요.
정성스럽고 진솔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그 자체로 참 좋은 글이네요. 기쁨과 감사를 전합니다.
^^; 내릴까말까 한 이틀은 고민했다는...
긴글 잘읽었습니다 이사후 적응하고 정리하고 마무리 글까지 썼으니 대전 신고신 단단히 했네. 묵상한 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