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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제3권 무거(武擧)를 논함
【문】: 우리나라의 무거는 너무나 용잡(冗雜)한데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가.
【답】: 무거의 대체(大體)는 문과(文科)와 다를 것이 없다. 이 역시 국학(國學)과 부(府)ㆍ주(州)ㆍ현(縣)에 무학(武學)의 명색(名色)을 함께 설치하여 무생(武生)을 뽑아서 그 액수를 채우면 될 것이다.
【문】: 무생을 어찌 국학(國學)에 예속시킬 수 있겠는가.
【답】: 문(文)과 무(武)는 두 가지가 아니다. 그 누군들 공자(孔子)의 제자(弟子)가 아니겠는가. 과연 국학에 예속시킬 수 없다면 등과(登科)한 후에 알성(謁聖)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나 그 규제(規制)의 절목(節目)만은 유학생(儒學生)과 약간의 차이는 두어야 할 것이다.
【문】: 무거(武擧)의 시규(試規 시험규정)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답】: 이 역시 당(唐)ㆍ송(宋) 이후 무거의 사례(事例)를 취해다가 참작하여 시행(施行)하되, 초장(初場)에서는 기사(騎射)를 시험하고 이장(二場)에서는 보사(步射)를 시험하고 삼장(三場)에서는 책(策) 1도(道)와 논(論) 2도를 시험하여, 무예(武藝)가 숙련되고 도략(韜略 육도(六韜)와 삼략(三略). 전하여 병법(兵法)을 가리킴)에 정통한 자여야만 합격할 수 있도록 하며, 제학어사(提學御史)가 시험을 주관하고 문무(文武)의 수령(守令)들이 시장(試場)에 참석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3차(次)에 걸쳐 합격한 자는 또한 문과(文科)의 사례에 의거하여 회시(會試)에 응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 만일 책(策)ㆍ논(論)을 시험한다면 그 누가 문과를 두고 무과를 하려고 하겠는가. 지금의 면강(面講)도 무인(武人)들은 극히 괴로워하는데 더구나 책ㆍ논이란 말인가.
【답】: 지금의 시험 규정은 전혀 모양이 갖추어져 있지 않는데 어찌 이 문제를 가지고 설난(設難)할 수 있겠는가. 예부터 명장(名將)치고 문(文)에 어두운 사람이 일찍이 없었으니, 책ㆍ논을 시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인재를 얻겠는가. ‘무과를 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란 말은 또한 매우 가소롭다. 예부터 거자(擧子)가 없어서 시장(試場)을 열지 못한 적은 없었다. 이 법(法)쯤 시행한다 해서 무거자(武擧子)가 없으리라고 걱정할 것은 없다. 여조(麗朝)의 무거(武擧)에서도 책ㆍ논을 시험하였는데, 지금에 어찌 시행할 수 없다고 하는가.
【문】: 영특하고 탁월한 인사 중에도 혹 문자(文字)의 지식이 짧아서 무거에 나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책ㆍ논을 시험한다면 이런 이들은 장차 발신(拔身)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답】: 이는 바로 우리나라 풍속이 비루한 데서 나온 소견이다. 어째서 비루한 소견이라고 하는가 하면, 문자를 너무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가 어찌 그토록 짓기 어려운 것인가. 그 사람이 진정 영특하고 탁월하다면, 그까짓 책ㆍ논쯤이야 어찌 짓지 못한단 말인가. 만일 참으로 이런 것도 짓지 못한다면 이는 곧 용렬한 사람이요, 영특하고 탁월한 인사는 아니다. 문(文)이란 곧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말하고 싶은 것을 글로 쓰는 것이다. 마음이 진정 사물의 이치에 밝다면, 글을 써서 말을 구하는 데 있어 자연히 볼만한 기상(氣象)과 견식(見識)이 있을 것이다.
만일 무생(武生)에게 훌륭한 시문(詩文) 같은 것을 지어내어도록 한다면, 영특하고 걸출한 인사라 할지라도 혹 탐탁찮게 여길 수 있지만 이른바 책ㆍ논이라는 것은 전진(戰陣)이나 병법(兵法) 등을 묻는 데에 불과한 것이니, 일에 따라 대답하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단 말인가. 옛날에도 혹 무예(武藝) 있는 장수로서 문자를 익히지 못한 자가 있기는 했으나 이는 모두 졸오(卒伍) 사이에서 출세한 자들이었지 끝내 대장(大將)의 재주는 아니었다.
【문】: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완력이 뛰어난 무리들은 혹 문자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할지라도 그들을 아주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답】: 중국(中國)에서는 무거(武擧)를 출방(出榜)한 후에도, 힘이 4백~5백 근(斤)을 들 수 있는 무예가 뛰어난 무리들을 각 성(省)에서 천거해 보내도록 하여, 이들이 고시(考試)에 합격하면 이들에게 교사(敎師)의 명색(名色)을 허여하여 이들에게 군중(軍中)에서 봉급을 받으면서 사졸(士卒)들을 교련(敎鍊)시키도록 하고, 또한 그들을 혹 변진(邊鎭)에 분송(分送)하여 집사(執事)의 무리에 충원시키기도 하였으니, 지금에도 이 제도를 모방하여 금군(禁軍) 등의 결원(缺員)을 보충한다면 안 될 게 무어 있겠는가.
【문】: 지금 군문(軍門)의 장교(將校)는 오로지 대장(大將)의 사정(私情)에 의해 임명되고 있으니, 이는 실로 마음 아픈 일인데 어떻게 변통해야 하겠는가.
【답】: 병제(兵制)를 변통한 후에는 이런 일들은 마땅히 하나하나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시험삼아 내삼청(內三廳) 및 군문(軍門)의 장교(將校)로 말한다면, 무과에 합격하자마자 곧장 문과의 사례에 의거하여 아울러 정직(正職)으로 등용하여 차례대로 전보(銓補)하면 경외(京外)에 있는 장교들의 입사(入仕)하는 길이 좁음을 걱정할 것이 없게 되고 ‘사정(私情)’ 두 글자도 저절로 베풀 곳이 없게 될 것이다.
【문】: 교련관(敎鍊官) 같은 무리는 본디 비천(卑賤)한 군교(軍校)인데 어찌 정직(正職)을 설치하기까지 해서야 되겠는가.
【답】: 귀천(貴賤)ㆍ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직사(職事)가 있으면 의당 정직이 되어야 한다. 이를 어찌 대장(大將)이 사사로 임명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런 무리들도 오랫동안 근속(勤續)하면 첨사(僉使)의 직책을 얻게 되는데, 첨사가 어찌 중한 직임이 아니겠는가. 군문(軍門)의 제도는 임시해서 잠정적으로 설치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이 구차스러운 것이 많고 전혀 법제가 없어서 모든 일에 이런 방자하고 외람된 폐단이 많으니, 어찌 비천한 직임이라 해서 덮고 가려주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습속을 모르는 척해서야 되겠는가.
[주D-001]내삼청(內三廳) : 조선조 시대 내금위(內禁衛)ㆍ겸사복(兼司僕)ㆍ우림위(羽林衛)의 총칭. 효종(孝宗) 3년에 이 셋을 합하여 금군영(禁軍營)을 설치했으므로 금군영을 내삼청이라고도 한다.
제3권 관제 총론(官制總論)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하였으니, 주공(周公)이 육전(六典)을 만들어, 총재(冢宰)이하 대소(大小)ㆍ고하(高下)의 관원들이 각기 그의 예속(隸屬)들을 거느리고 그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후세(後世)의 관제 연혁(官制沿革)은 비록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그 근원은 일찍이 이를 본받지 않은 것이 없고, 그 귀추는 일찍이 각각 격령(格令)을 두어 공능(功能)을 책임지우지 않은 것이 없다. 부주(敷奏)ㆍ명시(明試)로부터 출척유명(黜陟幽明)과 삼세계리(三歲計吏)는 《주관(周官)》에 자세히 나타나 있는데, 후세에는 이어 복관(服官)ㆍ전선(銓選)의 제도와 임사(任事)ㆍ고과(考課)의 법칙이 만들어져 각기 득실(得失)에 대해 할 말이 있기는 하나, 또한 이 모두가 다 품식(品式)을 두어 실효(實效)를 규정한 것 아님이 없었다.
우리 조선의 관제(官制)는 거의 고려조(高麗朝)의 옛것을 인습하여 참으로 의논할 곳이 많으나, 전선의 규정에 이르러서는 잘못된 규정이 더욱 많고 고과(考課)의 법칙에는 소략(疏略)한 것이 특히 심하다. 현재의 백 가지 폐단이 오로지 여기에서 나오는데, 통틀어 논한다면 ‘아무리 관아(官衙)는 설치되었지만 유명무실하다.’는 말에 불과할 뿐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한탄스러움을 어이 말하랴.
아, 인주(人主)가 비록 성심껏 나라를 다스리려 하더라도 한갓 오늘날의 치체(治體)와 정규(政規)를 ‘옛 전장(典章)이다.’ 하여 마치 금석(金石)처럼 견고하게 지킨다면 실정(實政)을 수명(修明)할 리가 만무하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정치 규정은 원래부터 실사(實事)가 없어 그 흐름의 폐단으로 만사가 번쇄해지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만일 우선 일개(一箇) 실(實) 자를 취하여 정치하는 근본을 세워서 조정(朝政)을 새롭게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밤낮으로 근심하며 애쓴다 할지라도 실상 치도(治道)에는 아무런 보탬이 없을 것이니, 이야말로 진정 맹자(孟子)가 이른바 ‘도선(徒善)은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예로부터 정권(政權)이 임금에게 있지 않으면 재상(宰相)에게 있었는데 임금이 권리를 손에 쥐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그 임금된 체통에 어두워지고, 재상이 권리를 쥐고 제멋대로 하면 그 신하된 분수를 범하게 된다. 역대 이래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 근심거리를 면한 자가 적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권은 그렇지 않다. 임금이 일찍이 정권을 쥐고 자기 마음대로 한 일도 없었고, 재상도 일찍이 정권을 쥐고 제멋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권리는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임금에게도 재상에게도 있지 않고 그때그때 조정의 논의를 주장하던 사람들의 손에 흩어져 있었으니, 그 근원은 실로 관제(官制)가 밝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문과ㆍ무과ㆍ음보(蔭補) 세 길로 사람을 등용하여 관제가 혼잡하여 밝지 못하다. 관제가 밝지 못하면 책임 역시 밝지 못하여 그 폐단이 백사(百事)가 부실(不實)하게 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하니 이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참으로 정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문】: 어째서 관제(官制)가 혼잡하다고 하는가.
【답】: 우리나라는 관계(官階)를 9등(等) 18급(級)으로 나누어 사람을 쓰고 있는데, 정1품(正一品)부터 종9품(從九品)에 이르기까지 9등급이 되고, 대광(大匡)부터 장사랑(將仕郞)에 이르기까지 모두 18급이 되니 이는 곧 문관(文官)과 음보의 품계이다. 무직(武職)은 종2품 이상은 모두 대부(大夫)로 칭하고 정3품 이하는 모두 장군(將軍)이나 교위(校尉)로 칭하는데, 이는 실로 의거한 바가 없는 것이다.
【문】: 어째서 의거한 바가 없다고 하는가.
【답】: 문관과 무관은 길이 서로 다르고 자급(資級)도 의당 같지 않은 것인데 어찌 분별없이 혼동해서야 되겠는가. 중국은 종1품 이상의 문관ㆍ무관에게는 모두 대부(大夫)라 칭하고 정2품 이하의 무직(武職)은 모두 장군이나 교위로 칭하기 때문에 관제(官制)가 질서 정연하여 문란하지 않다.
【문】: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의 자급이 혼동되어 분명하지 못한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답】: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문관과 무관은 스스로 각기 그 직(職)이 있는데 어찌 서로 혼동해서야 되겠는가. 아경(亞卿)ㆍ승지(承旨), 제시(諸市)의 정(正)ㆍ낭관(郞官) 같은 관직에다 무신(武臣)을 택차(擇差)하는 제도는 실로 의거한 바가 없는 것이며, 1품 이하의 모든 관직을 체직(遞職)하여 서반(西班)으로 보내는 것은 더욱 긴(緊)하지 않는 일이다. 아침에는 대총재(大冢宰)가 되었다가 저녁에는 사직(司直)이 되고, 아침에는 시종(侍從)이 되었다가 낮에는 장군ㆍ교위가 되니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인가.
이 밖에도 대가(代加)의 규정은 더욱 남잡(濫雜)하여 통훈관(通訓官)의 자(子)ㆍ서(壻)ㆍ제(弟)ㆍ질(姪)이나, 공신(功臣)의 적장자(嫡長子) 무리들이 모두 산계(散階)를 얻고 경외(京外)의 장교(將校)도 모두 군함(軍銜)을 얻어서 온 나라 가운데 낭계(郞階)와 군함이 한도도 없고 수도 없으니, 아무리 진흙인들 이처럼 천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의 관제(官制)를 두고 상고해 보건대 이와 비슷한 것이 또 어디에 있던가.
【문】: 이는 모두 유명무실한 헛호칭인데 무어 가석할 것이 있겠는가.
【답】: 오직 명(名)과 기(器)는 남에게 빌려줄 수 없는 것이다. 사용(司勇)이나 장사랑(將仕郞)은 명기(名器)가 아니란 말인가.
【문】: 은가(恩加)ㆍ대가(代加)는 모두 옛 제도가 아닌가.
【답】: 나라의 경사를 만나서 널리 관직을 더해 주는 것은 과연 무슨 의의이며, 한없이 많은 통훈대부ㆍ어모장군(禦侮將軍)의 자ㆍ서ㆍ제ㆍ질이 모두 대가를 얻는 것은 또한 무슨 사리인가. 만일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관제를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벼슬하고 있는 자에게 산관(散官)을 승수(陞授)하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 처음 입사(入仕)한 사람에게 각기 품계(品階)에 상당한 산관을 주고 그가 봉록(俸祿)을 받으며 일한 지 3년 만에 처음 고적(考績)을 하되, 여기서 소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는 산관을 승수하고 또 3년마다 이와 같이 하여, 일체 3년ㆍ6년ㆍ9년에 실시하는 고만(考滿 임기만료(任期滿了))의 제도로 표준을 삼는다면 산관을 승수하는 일에 있어 남잡(濫雜)의 걱정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문】: 고적(考績)할 당시 소임을 감당하지 못한 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답】: 소임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승과(陞科)에 들지 못할 것이니 무엇 하러 산관의 승수여부를 논하겠는가.
【문】: 품계가 1품에 이르러 더 이상 진취할 곳이 없는 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답】: 본디부터 음자(蔭子)로 이름을 아뢰는 제도가 있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다.
【문】: 만일 문직(文職)이 서반(西班)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한다면 체직(遞職)된 경재(卿宰) 이하 시종(侍從)에 이르기까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답】: 그대가 지금의 관직 체역(遞易)하는 어수선한 모양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물음이 있는 것이다. 만일 고적(考績)의 전례(典例)를 시행한다면 저절로 문직(文職)이 서반(西班)에 나아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죄(罪)가 있어 파직(罷職)당한 자는 워낙 의논할 여지도 없거니와, 비록 혹시 무고하게 체직되었다 하더라도 원관(原官)으로 후일 복관(復官)되기를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필 군직(軍職)으로 그를 얽어매겠는가. 무고하게 해관(解官)된 자는 전조(銓曹)에 그를 수차(需次 차기에 수용할 인재)의 적(籍)에 두어 후일의 등용에 대비하는 것이 옳다.
【문】: 그렇다면 군함(軍銜)은 긴요하지 않은 규정인가.
【답】: 전혀 긴요하지 않은 것이다.
【문】: 만일 군함이 없다면 비록 중앙 군문(中央軍門)의 장관(將官)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칭할 것인가.
【답】: 초관(哨官)도 사과(司果)라고 칭하며 행세(行世)할 수 있는 것인가. 정과(正科) 출신으로서 여러 해 동안 근속한 자도 자리를 미처 옮기지 못하고 파직되면, 다만 사과로 명정(銘旌)을 쓰게 되기 때문에 그들이 억울하다고 칭하는 것이다. 만일 장관(將官)으로 실직(實職)을 삼는다면 사리에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문】: 군문에 소속된 무리들이 군함을 돌려가면서 봉록을 받아 먹는 자가 많은데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답】: 이 또한 그들에게는 본디 직사(職事)가 차례대로 돌아가며 하는 예가 있으니, 일체 차례에 따라서 돌아가며 봉록을 받아 먹는 것이 옳다. 어찌 반드시 군함으로 체아직(遞兒職)을 만들어 봉록을 받아 먹게 할 것인가.
【문】: 나라의 경사(慶事)를 만나서 은가(恩加)하는 것도 사리에 해로울 게 없는데, 반드시 고만(考滿)으로 가자(加資)한다면 자급(資級)의 승수(陞授)가 너무 지체되지 않겠는가.
【답】: 통훈대부 이상은 자궁(資窮)이라 하여 대가(代加)하게 하는데, 이는 실로 아무 의의가 없는 제도이다. 자급이 설치된 것은 본디 오래도록 관직에 있으면서 노고가 많은 자에게 차례대로 계급을 올려주기 위한 것인데, 나라에 경사가 있다고 해서 널리 올려주는 것이 어찌 매우 남설(濫屑)한 것이 아니겠는가. 벼슬은 3품에 이르렀는데도 낭관(郞官)의 품계에 그대로 있는 자가 있고, 혹은 참봉(參奉)으로 벌써 통훈의 품계를 넘어선 자도 있으며, 심지어는 이조(吏曹)의 서리(書吏)가 임의대로 고신첩(告身牒)에다 이름을 써 넣기도 하여 그 그릇되고 외람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어째서 ‘사리에 해로움이 없다.’고 하는가. 자급을 올려주는 데 지체되는 것이 무어 그리 해로운가. 일체 고만에 따라 한다면 차례에 따라 오를 날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외람되게 올려주는 것이 무슨 소용 있다고 꼭 널리 가자하려 하는가. 이 밖에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우리나라는 자격(資格)으로 사람을 쓰지 않는 것이다.
【문】: 무엇을 자격이라 하는가.
【답】: 산관(散官)도 9등(等)이 있고 실직(實職)도 9등이 있으니, 이른바 자격이란 곧 정승(政丞)이 1품, 판서(判書)가 2품, 이런 식으로 5~6품 이하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하는 것을 말한다. 정3품 이상의 경관(京官)은 그런대로 자격을 중시한다고 하겠으나 4품 이하는 서로 혼동되어 전혀 분별이 없다.
시험삼아 삼사(三司)의 경우를 보면, 올리거나 내리는 일이 전혀 분별이 없어 아침에 3품에 제수했다가 저녁에는 6품으로 내리곤 한다. 이미 이렇게 자격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도 오르고 내리는 것을 가지고 영욕(榮辱)으로 삼지 않는다. 관제(官制)가 이처럼 무상(無常)하니 장차 무엇을 믿고 정치를 하겠는가.
【문】: 혹은 올리거나 내리는 것이 정치를 하는 데에 무어 해로울 게 있겠는가.
【답】: 심하다, 그대의 의혹됨이여! 과연 올리고 내리는 것을 무방하다고 여긴다면 관직을 설치하던 처음에 무엇하러 그 품계의 존비(尊卑)를 분별해 놓을 필요가 있었겠는가. 정사하는 체통으로 말하자면, 아무런 이유 없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올릴 만한 실상이 있기 때문에 올리는 것이요, 내리는 것도 아무런 이유 없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릴 만한 실상이 있기 때문에 내리는 것이다. 올리고 내리는 즈음에 출척(黜陟)이 있는 것이며, 출척하는 즈음에 영욕(榮辱)이 판가름되는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올라가도 영화롭게 여기지 않고 내려가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나라의 출척을 장차 어느 곳에 시행할 것인가.
그대는 역대(歷代)의 관제를 보지 않았는가. 대소(大小)의 직(職)을 막론하고 모든 벼슬아치에 대해 올리는 일은 있어도 내리는 일은 없었다. 굳이 혹 내리는 일이 있었다면 이는 반드시 죄를 짓고 좌천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자격(資格)의 근엄(謹嚴)하기가 이와 같아야만 출척을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문】: 상가(賞加)는 원래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나라의 길흉(吉凶)간의 대례(大禮)로 말하자면 그 예(禮)가 끝난 후에 어찌 시상(施賞)하는 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답】: 나라에 대례가 있으면 대소신공(大小臣工)이 각기 자기 임무를 맡아서 기예(技藝)를 발휘하며 분주하게 노력한다. 그러나 이는 곧 신자(臣子)의 직분(職分)인데 무슨 시상할 일이 있겠는가. 국가에서 굳이 그의 노력의 대가를 치르려 한다면 혹 속백(束帛) 같은 물품으로 사급(賜給)하는 것이 옳다. 어찌 천작(天爵)을 가지고 시상(施賞)의 도구로 삼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 상 받는 것을 보면 몇 구절의 문자(文字)를 제진(製進)하거나 혹은 전서(篆書)ㆍ예서(隸書) 몇 자 쓴 것, 혹은 며칠 동안 역사(役事)를 감독하기만 해도 문득 승진(陞進)의 상(賞)을 시행한다. 그러므로 낭료(郞僚)는 아무리 오늘 처음 벼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일 무슨 일에 감동(監董)만 하면 또한 6품으로 오르게 되기 때문에 금초(金貂)와 비옥(緋玉)이 진(晉) 나라 시대의 구미(狗尾)처럼 흔하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개탄하여 마지않을 일이다. 게다가 출세하기 좋아하는 무식배들은 국가의 사고(事故)가 있는 때를 기화로 청탁을 하여 벼슬자리 얻기를 도모하니 그 꼴이 매우 통탄스럽고, 선진(善賑)ㆍ착적(捉賊)ㆍ군기 별비(軍器別備) 같은 무리에 이르기까지 상가하니 더욱 비쇄(鄙瑣)하고 가증스럽다.
이를테면 노인(老人)에게 가자(加資)하는 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다. 그들이 장수하는 것이 국가의 명기(名器)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늙은이를 진휼(賑恤)하기 위해 물건을 내리는 것은 옛날의 좋은 법이었는데 이런 실사(實事)는 국가에서 애초부터 시행하지 않고서 다만 자급을 가지고 시혜(施惠)하는 물건으로 삼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사리인가.
이 밖에 착호(捉虎)ㆍ납속(納粟)ㆍ증사(拯死)ㆍ사진(私賑)ㆍ군교(軍校)ㆍ동역(董役)ㆍ역설(譯舌) 등에게 상가(賞加)하는 일은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다.
아, 국가가 신민(臣民)을 거느리는 것은 다만 이 명기(名器)뿐인데 명기의 남설함이 이와 같으니, 갑자기 국가에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장차 무슨 물건으로 사람을 통솔하고 격려하겠는가.
【문】: 시종(侍從)의 아버지에게 노직(老職)을 추은(推恩)하는 전례 같은 것이 막혀서야 되겠는가.
【답】: 다 똑같이 시종의 아버지인데, 꼭 나이가 70세가 되기를 기다려서 추은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관직이 비록 존비(尊卑)가 있고 나이가 비록 노소(老少)가 있다 할지라도 자식으로서 자기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은 다 같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혹은 허락해 주고 혹은 허락하지 않아서 간격(間隔)을 두는가. 1품의 아버지로 말한다면 그가 나이 70세가 못 되었을 경우 승자(陞資)를 받지 못하니 귀근(貴近 임금과 가장 친근한 신하)에게 추은하는 의의가 어디에 있는가.
봉증(封贈)하는 전례는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한데 우리나라 법은 전혀 근거한 바가 없다. 시험삼아 정3품으로 말한다면 이미 봉처(封妻 남편의 벼슬에 따라 아내가 봉작되는 것)와 음자(蔭子 아버지의 덕으로 자식이 벼슬을 받는 것)는 얻었으나 부모(父母)는 백신(白身 무위무관(無位無官)한 백두 선비)을 면치 못하니, 이는 무슨 윤리(倫理)인가. 그리고 잡기(雜岐)로 동지(同知)된 이들의 경우에도 모두 추증(追贈)을 얻는데, 정3품인 시종은 도리어 추증의 영광을 얻지 못하니 이는 무슨 정격(政格)인가.
그리고 아버지가 자식보다 직이 낮으면 자급을 올려주는 것은 혹 그럴 수 있겠지만 아버지의 직이 1~2품에 이르렀을 경우 문득 그의 아들이 시종(侍從)을 지냈다 하여 승자(陞資)를 허락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매우 외람된 일이 아니겠는가.
【문】: 그렇다면 추은의 전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 중국의 봉증(封贈)하는 전례로 말한다면, 1품일 경우는 3대(代)를 추증하고 2품ㆍ3품일 경우는 2대를 추증하고 4품에서 7품까지는 부모와 아내에게 추증하되 모두 자식의 현임 직사(見任職事)를 참조해서 한다. 아버지가 현임(見任)으로 있을 경우에는 봉증하지 않고 아버지의 직이 낮을 경우에는 자식의 관직에 따라 봉증하되 또한 반드시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야 허락해 주고 한가히 있다가 복직되어 자식보다 직이 높은 자는 품계의 봉증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남의 양자(養子)가 되어 재고(再考)에 이르러서 본생부모(本生父母)에게 이봉(移封)할 것을 요청한 자는 들어주는데, 여기서 이른바 1품ㆍ2품은 모품대부(某品大夫)의 품이 아니요, 곧 모아문(某衙門) 모품(某品) 모관(某官)의 품을 가리킨다.
그리고 봉증할 때도, 오늘 동지(同知)가 되면 명일에 곧바로 3대를 추증(追贈)하는 우리나라의 제도와는 같지 않다. 대소 관원은 반드시 고만(考滿)으로 한계를 삼고 있는데, 3년ㆍ6년ㆍ9년의 고만 때는, 고적할 때마다 승진이 있고 고명(誥命)의 봉증이 있어서 이것으로 격려수보(激勵酬報)하는 거전(鉅典)으로 삼았고, 그렇지 않으면 비록 특지(特旨)에 의해 고만 이전에 초탁(超擢)되어서 경상(卿相)에 제수된 자라 할지라도 그의 아버지에게 자식의 직과 같은 직으로 봉증할 수는 없다. 그런데 다만 임금이 자기 조상에게 진호(進號)하여 장락(長樂)할 때에는 특별히 신료(臣僚)들에게 봉증의 은전(恩典)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대개 그런 경사를 임금 혼자서만 누리고자 하지 않고 이를 신료들에게까지 석류(錫類)의 은혜가 미치게 하려는 것이다.
봉증을 신중히 하는 것이 이처럼 엄격하였으니, 지금 만일 이 제도를 토론하여 시행한다면 그 공(公)과 사(私)에 있어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문】: 자식의 직(職)으로 봉증된 사람도 직사(職事)가 있는가.
【답】: 추은(推恩)에 의해 봉직(封職)된 사람에게 무슨 직사가 있겠는가. 품(品)에 해당한 복색(服色)을 가지고 영광으로 여기는 데 불과할 뿐이다. 봉급도 없고 일도 없고 또한 숙은(肅恩)의 예(例)도 없는 것이다.
【문】: 무관(武官)의 자식이 문관(文官)이 되었을 경우는 무슨 직을 추봉(推封)하는가.
【답】: 해당되는 품(品)의 무직(武職)과 비등한 것으로 대신 추봉하는 것이 옳겠다.
【문】: 삼재 고적(三載考績)으로 말한다면, 벼슬하는 자가 33~34개월을 근무하고 고적(考績) 때가 되지 못하여 체직(遞職)되었을 경우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답】: 반드시 36개월을 근무하여야만 고만이 될 수 있는데, 고만의 법에는 봉증뿐만 아니라, 상고(上考)일 경우는 품계(品階)가 올라서 승진 발탁된다. 그러나 고만의 기한을 채우지 못한 자야 어떻게 봉증할 수 있겠는가. 고만으로 달수를 헤아릴 때에 36개월간의 봉록을 실제로 수령하지 못했으면, 전부(銓部)가 고공법(考功法)에 따라 다음으로 미루어서 진관(進官)시키는 것이니, 달수가 꽉 찬 사람은 먼저 오르고 병을 청탁하여 봉록(俸祿)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함께 오를 수 없는 것이다.
【문】: 36개월 내에 어찌 전혀 사고(事故)가 없이 나날이 직에 충실할 수 있겠는가. 질병(疾病)으로 인해 어느 기간 동안 몸을 조섭하는 일도 있을 것이고, 반드시 귀성(歸省)할 일이 있어 고향을 왕래하는 일도 있을 것이며, 반드시 자신의 정세(情勢)가 불안하여 짐짓 인입(引入)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유가 모두 승진하지 못하게 한다면 사도(仕途)가 장차 막히게 되는 걱정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답】: 이는 모두 벼슬아치들의 면치 못할 사단(事端)이어서, 고적(考績)의 법도 일찍이 이것에 구애되지 않고 모든 정격(定格)과 정례(定例)를 두어 사세(事勢)를 참작하여 인정(人情)을 융화시키게 하였으니 막히는 걱정은 없게 될 것이다. 뒤에 의논하여 열거할 터이니 그대는 잠자코 기다리라.
【문】: 그대가 자격(資格)으로 승직(陞職)시키는 것을 치치(致治)의 근본으로 삼는다 하였는데, 그 제도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답】: 이것이 곧 출척(黜陟)의 법이다. 지금 문과(文科)로 말한다면 급제한 처음에 여러 조(曹)에 나누어 예속시키기를 마치 중국(中國)의 부속(部屬) 주사(主事)의 제도와 같이 하되, 주사에 빈자리가 없으면 우선 육조(六曹)에 예속시켜 정사를 관찰하고 사무를 단련시키다가 자리가 비기를 기다려서 이들을 전보(塡補)하여 낭료(郞僚)의 직임을 나누어 주도록 하고, 3년 만에 그들의 성적을 고찰하여 상고(上考)인 자는 언관(言官)으로 승진시키는 것이 옳다. 그리고 문과에 급제하고서 곧장 자목(字牧 지방관을 말함)에 제수된 자는 그 치적(治績)을 고찰하여 치적이 훌륭한 사람은 불러서 언관을 제수(除受)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후 또 3년 만에 고적을 살펴 상고인 자는 3~4품의 당하관(堂下官)으로 올려서 마치 중국에서 4품 이상인 경당관(京堂官 중앙 각 관아의 관원을 말함)을 시정(寺正) 이하 3~4품 관직에 나누어 임명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후 또 3년 만에 고적을 살펴 상고인 자는 정3품의 내외직(內外職)으로 승진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 그 대강이다. 잠깐 이야기하는 사이라 낱낱이 다 들어 말할 수는 없으나 대체(大體)는 이와 같다.
【문】: 그렇다면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모두 6품직을 얻을 것인데, 정원(政院)의 가관(假官 임시로 임명하는 관원) 같은 경우에 사람이 모자라게 될 걱정이 있을 듯하다.
【답】: 가관에 무슨 난처한 일이 있겠는가. 중국에는 중서방 관원(中書房官員)이 있어 이를 사인(舍人)이라 칭하는데, 보직(補職)을 기다리고 있는 진사(進士)와 응시(應試)하기를 자원하는 거공(擧貢 거인(擧人)과 공사(貢士))ㆍ은음(恩蔭)들 중에서 교직(敎職)의 예(例)에 의거하여 원액(員額)을 정해서 서역(書役)에 이바지하게 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앞으로의 승직(陞職)에 있어서 거공(擧貢)의 예를 함께 적용받지만 진사의 경우는 부속(部屬)에 자리가 있으면 차례로 전보(銓補)된다. 그리하여 실관(實官)이 되며 사신(史臣)으로 입시(入侍)하여 충분히 기사(記事)할 수 있게 된다. 중서방 관원(中書房官員)이 서역만을 맡는다면 수다스럽게 체역(遞易)하는 폐단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주D-001]육전(六典) : 주 나라 때의 여섯 분장 업무. 즉 치전(治典 : 천관총재(天官冢宰))ㆍ교전(敎典 : 지관사도(地官司徒))ㆍ예전(禮典: 춘관종백(春官宗伯))ㆍ정전(政典: 하관사마(夏官司馬))ㆍ형전(刑典 : 추관사구(秋官司寇))ㆍ사전(事典 : 동관사공(冬官司空))이다.
[주D-002]부주(敷奏)ㆍ명시(明試) : 《서경》 순전(舜典)의 부주이언(敷奏以言)과 명시이공(明試以功)의 준말로, 부주이언은 정치에 대한 말을 왕에게 진주(陳奏)한다는 뜻이고, 명시이공은 신하의 공로를 밝게 상고한다는 뜻이다.
[주D-003]출척유명(黜陟幽明) : 불초(不肖)한 사람을 내쫓고 현명한 사람을 올려준다는 뜻으로, 역시 《서경》 순전에 있는 말이다.
[주D-004]삼세계리(三歲計吏) : 3년에 한 번씩 관리(官吏)의 현부(賢否)와 정사(政事)의 득실(得失)을 심사하는 일.
[주D-005]도선(徒善)은 …… 없다 : 도선은 한갓 착하기만 하여 주변성이 없다는 뜻인데,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주D-006]대가(代加) : 자궁(資窮 : 정3품 당하관에 이른 경우) 등의 이유로 본인에게 직접 가자(加資)할 수 없을 때 아들ㆍ사위ㆍ동생ㆍ조카 등에게 자기 대신 그 품계를 받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7]체아직(遞兒職) : 현직(現職)을 떠난 문무관(文武官)에게 계속해서 녹봉(祿俸)을 주기 위하여 만든 벼슬을 가리킨다.
[주D-008]석류(錫類) : 효자(孝子)의 덕행이 널리 퍼져 남에게 미쳐감을 말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기취(旣醉)에 “효성이 하도 지극하니, 길이 너의 족류(族類)에게 복이 미치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 하였다.
제3권 관제(官制)의 폐단을 논함
국초(國初)에는 의정부에서 서사(署事)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중간에 이를 시행하지 않게 되어, 지금까지 의논하는 자들이 이 서사의 규정이 혁파(革罷)된 것을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개 대신(大臣)의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기는 하지만 이는 이속(俚俗)의 논의이다. 서사의 규정은 원래부터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조(麗朝)의 문하성(門下省)에서 연서(連署)하던 규정을 인습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어찌 본받을 만한 것이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소로운 일이 있다. 즉 대신(大臣)과 이상(貳相)의 칭호를 분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분변하지 못한다고 하는가. 대저 지금의 육경(六卿)은 옛날 육관(六官)의 직(職)이다. 벼슬로 따져서 육경이라면 영(榮)과 귀(貴)가 지극한 것이니, 책임의 중대함은 또 어떠하겠는가. 이것이 참으로 옛날에 이른바 대신이다. 하필 장관(長官)뿐이겠는가. 그 좌이(佐貳)의 관(官)도 대신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벼슬이 반드시 대광(大匡)에 이르러야만 바야흐로 대신이라 칭하니, 이것이 어찌 옛날을 상고(詳考)하지 못함이 심한 것이 아니겠는가.
크고 작은 신하들은 각기 주직(主職)이 있어 다만 각자 지워진 임무에 충실할 뿐이다. 일찍이 육관의 장(長)이 성안(成案)을 부둥켜안고서 친히 상신(相臣)을 배알(拜謁)하고 평서(平署)를 받았다는 규례가 있음을 듣지 못했다. 보상(輔相)의 직임은 도의(道義)로써 군상(君上)을 보좌하는 데 불과할 뿐이요, 일찍이 세쇄한 직사(職事)로 삼공(三公)에게 책임을 지운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서사(署事)의 법은 육관(六官)이 일을 수행하지 못하여 삼공이 자신의 격(格)을 낮추어서 이직(吏職)을 몸소 다루는 데 불과한 것이니, 이야말로 벌써 크게 체통(體統)을 잃은 것이고, 게다가 삼공의 불초한 자들이 또 권리를 침해하고 제멋대로 일을 독단해도 그를 금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시행할 일이겠는가. 혁파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혁파하던 무렵에 잘 처리하지 못하고서 군더더기 같은 비변사(備邊司)를 더 설치하여 삼공과 육경이 모두 그 직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 삼공은 빈사(賓師) 같은 신하이니 잗단 직사는 원래 삼공의 임무가 아니다. 삼공보다 낮은 자는 육경(六卿)뿐인데 일국(一國)의 일이 아무리 천 가지 만 가지라 할지라도, 그 강령(綱領)을 총괄하여 보면 대개는 육경이 할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로 본다면, 올바른 육경을 얻으면 나라에 잘 되지 않는 정사가 없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만사가 다 퇴폐해지고 정리(政理)가 문란해져서 잘 다스려질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육경의 실상은 어떠한가. 공조 판서(工曹判書)나 형조 판서(刑曹判書)의 지망(地望)이 노직(老職)인 중추부(中樞府)의 지사(知事)와 다름이 거의 없다. 나이 80에 자헌(資憲)에 오른 늙고 피폐한 무리들이라도 다만 당품(當品) 2자(字)를 빙자하여 거개가 높은 지위를 욕되게 하고 있다. 그것이 이름은 비록 재상(宰相)이지만 어찌 일찍이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을 들어본 적이나 있었는가. 그 장(長)이 이 모양이니 좌이(佐貳)의 지망은 더욱 알 만한 것이다. 이름은 육경이라 하지만 위망(位望)의 가볍기가 이와 같으니, 그러고도 어찌 실정(實政)이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관(官)을 설치하고 직(職)을 나누는 뜻을 살펴보면, 경중(輕重)이 도치(倒置)되고 긴만(緊慢 긴급한 것과 완만한 것)이 타당성을 잃어 쓸데없는 관원(官員)과 남설(濫設)된 기관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내직(內職)은 너무 많고 외직(外職)은 너무 적은데다 한갓 부화(浮華)한 문예(文藝)의 직(職)만 숭상하고, 이치(吏治)ㆍ병제(兵制)ㆍ형옥(刑獄)ㆍ이권(利權) 등의 실사(實事)를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런 등의 병통을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다만 그 가장 드러나는 몇 가지만을 논한다면 그 나머지는 저절로 유추(類推)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관상감(觀象監)은 원래 대신(大臣)이 겸직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춘추관(春秋館)을 별도로 설치한 것은 더욱 불긴(不緊)한 것이니, 이미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했으면 유신(儒臣)이 당연히 이직(吏職)을 맡고, 대신이 총재(摠裁)할 것이지, 이 같은 관아의 설치는 쓸데없는 것이다. 그리고 예문관(藝文館)의 참하(參下 7품 이하 품계를 일컬음)는 또 무엇 때문에 사직(史職)이라고 칭하는가. 예원(藝苑)을 양관(兩館)으로 칭하는 것은 또한 매우 불긴한 것이다. 이미 홍문관이 있는데 이는 설치해서 무엇 하는가. 성균관(成均館)의 경우는 대사성(大司成) 1원(員)만으로도 사유(師儒)가 되기에 족한데, 지사(知事)ㆍ동지(同知)ㆍ사성(司成) 이하 학유(學諭)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그 인원수가 너무 많다. 이것이 어찌 지극히 쓸데없는 인원들이 아니겠는가.
승문원(承文院)은 비록 ‘오로지 사대문자(事大文字)만 만드는 곳이다’고 하기는 하나, 이미 홍문관에 문학(文學)하는 신하들이 있는데 이런 필요 없는 기관을 더 설치한 것은 또한 무슨 의도인가. 교서관(校書館)은 폐단이 끝이 없다. 하많은 재물만 축내므로 한미한 선비들도 이를 함정처럼 여긴다. 새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삼관(三館 홍문관(弘文館)ㆍ예문관(藝文館)ㆍ교서관(校書館)의 통칭)에 분차(分差)하는 것은 오로지 유품(流品)을 구별하기 위한 계책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인원이 이렇게 많다. 만일 분차의 규정을 혁파한다면 어찌 이런 용관(冗官)들이 있겠는가.
충훈부(忠勳府)는 또 무엇 때문에 설치한 것인가. 문무관(文武官)의 훈차(勳次)에 대한 장고(掌故)는 이조(吏曹)ㆍ병조(兵曹)에 귀속시키면 충분히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부(府)는 세워 무엇에 쓸 것인가. 종부(宗府)는 본디 종정부(宗正府)로서 예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돈령부(敦寧府)나 의빈부(儀賓府)의 경우는 본디 직사(職事)도 없는 것인데 무슨 일로 설립하였는가. 사옹원(司饔院)은 의당 광록시(光祿寺)처럼 정관(正官)으로 설립하고 경질(卿秩)을 설치해서 사체(事體)를 중히 해야 할 것인데, 또 무엇 때문에 제조(提調)를 많이 설치해서 일수(日數)를 나누어 감선(監膳)하는가. 군자시(軍資寺)ㆍ군기시(軍器寺) 등으로 말한다면, 이는 한낱 고관(庫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그를 영솔하게 하는가. 이런 유가 매우 많아서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그리고 장례원(掌隷院)의 설립은 더욱 불긴(不緊)한 것이니, 공천(公賤)은 이미 소속된 본아문(本衙門)이 있다. 그리고 형조(刑曹)나 한성부(漢城府)는 경성(京城)의 사송(詞訟)만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외방(外方) 사람은 각기 원 거주지의 관부(官府)가 있는데, 반드시 경외(京外)의 노비송(奴婢訟)을 아울러 경사(京司)로 모아들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전의(典醫)ㆍ혜민(惠民) 두 국(局)도 또한 불긴한 것이다. 의약(醫藥)은 모두 내국(內局)에 귀속시키는 것이 사리에 당연하다. 설사 신료(臣僚)나 유생(儒生) 등에게 급약(給藥)할 일이 있더라도 내국에서 그를 관장하여 지급하는 것이 무어 안 될 게 있다고 반드시 두 국(局)을 세웠단 말인가.
의금부(義禁府)는 다만 추국(推鞫)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니 자못 옛날 대리(大理)의 제도와 같은 것인데, 정관(正官)을 설치하지 않는 당상관(堂上官)으로 모두 겸대(兼帶)하게 한 것은 극히 사체(事體)를 잃은 것이요, 높은 직위를 경력(經歷)한 자가 한가롭게 지내는 것은 더욱 잘못된 처사이다. 그리고 대옥(大獄)이나 급변(急變)에 관계된 일은 금부의 책임이지만, 그 밖의 것은 아무리 대소신료(大小臣僚)의 여러 가지 죄명(罪名)이라 할지라도 형조(刑曹)가 주관하는 것이 무어 안 될 게 있겠는가. 중대한 사건의 경우는 삼법사(三法司 형조(刑曹)ㆍ한성부(漢城府)ㆍ사헌부(司憲府))의 예(例)에 의거해서 금부(禁府)ㆍ헌부(憲府)ㆍ형조의 당상(堂上)들이 한데 모여서 의계(議啓)하는 것도 해로울 것이 없는데, 아무리 권관(權管 각진(各鎭)에 속한 무관(武官))의 무리일지라도 반드시 금부로 돌려보내고 형조는 마치 천수(賤囚)나 주로 다스리는 관청으로 보니, 이것이 무슨 사리(事理)인가. 더욱 괴이한 일이다. 경외(京外)의 강상(綱常)에 대한 죄인이 아무리 중대하다고 할지라도 형조에서 이를 다스리기에 뭐가 부족해서 반드시 삼성(三省)에서 추국하게 하는가.
그 밖에 설치된 각사(各司)는 육조(六曹)의 직(職) 아님이 없다. 그런데 종묘(宗廟)의 경우는 정관(正官)을 세우지 않고 제조(提調)만을 설치하고 있다. 아, 종사(宗社)가 얼마나 존엄(尊嚴)한 곳인데 그를 제조로 한단 말인가. 명분과 사체가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밖에 사복(司僕)ㆍ상서(尙瑞) 등의 원(院)에도 경이(卿貳 판서와 참판을 가리킴)를 설립하여 그 일을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 제조의 직임이 이미 겸직(兼職)이기 때문에 어쩌다 혹 죄로 파직이라도 되면 반드시 그 대신을 내야 하므로 체역(遞易)이 무상하여 사무(事務)가 산만(散漫)해진다. 지금 만일 소각사(小各司)를 모조리 혁파하고 그 직(職)을 육조(六曹)에 귀속시켜서 육조의 낭관(郞官)을 적당히 더 설치하여 직사(職事)를 나누어 다스리게 한다면 어찌 그 일을 해내지 못하겠는가.
【문】: 용관(冗官)을 없애기만을 오로지 일삼는다면 모든 사무(事務)에 반드시 방애(妨礙)를 가져올 단서가 많아질 것이다.
【답】: 삼공(三公)의 밑에 모름지기 육부(六部)ㆍ구경(九卿)의 예를 의거하여 경이(卿貳)를 설치해서 아울러 당상관(堂上官)으로 만들고 그 밑의 요좌(僚佐)들에게 여러 가지 사무를 나누어 관장하도록 한다면, 명분이 바르고 사체(事體)가 높아져서 관제(官制)가 질서정연하여 문란해지지 않을 것이니, 이래야만 바야흐로 관리를 제어하여 일을 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구경(九卿)은 반드시 다 설치할 필요는 없으나, 봉상시(奉常寺)ㆍ사옹시(司饔寺)ㆍ태복시(太僕寺) 등의 경우는 긴만(緊慢)을 막론하고 소중한 것이 있으니, 별도로 관명(官名)을 설치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사무(事務)가 다망(多忙)하다는 설(說)은 곧 속인(俗人)들의 논설이다.
선혜청(宣惠廳)을 별도로 설치한 것은 극히 근거 없는 일이다. 삼공이 어찌 몸을 낮추어 유사들의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지부(地部 호조(戶曹))에 귀속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람들은 으레 호조(戶曹)는 사무가 다망하여 감당하기 어렵다고들 말하지만, 중국에서도 일개 호부(戶部)가 오히려 온 천하 금곡(金穀)의 사무를 다 감당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 같은 협소한 국가로서 경비(經費) 출납의 일에 무어 그리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있겠는가. 반드시 육조(六曹)의 낭서(郞署)로 하여금 나날이 부서(簿書)를 가까이하게 하여 그들의 근간(勤幹)함이 습성으로 된 뒤에야 국사(國事)를 바야흐로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제조(提調)란 송조(宋朝) 때의 제거 모관(提擧某官)이니 제점모관(提點某官)이니 하는 예(例)를 의방(依倣)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송(宋) 나라에서는, 축리(祝釐 신(神)에게 제사하여 복을 비는 일)하는 사관(祠觀)이 한가하여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직수(職守)가 없는 신료(臣僚)들에게 이 명칭을 붙여 그로 하여금 봉록(俸祿)을 받게 했을 뿐인데, 이것을 어찌 근거로 삼아서 관명(官名)을 지을 것이겠는가.
우리나라 소각사(小各司)는 모두 긴관(緊關)한 직장(職掌)인데도 겸대(兼帶)한 사람이 원래 실직(實職)이 아니기 때문에, 혹 시골에서 해를 넘기는 자도 있으나 본사((本司)가 포폄(褒貶)을 거행할 수 없으니, 어떻게 소각사의 낭관(郞官)을 고적(考績)하겠는가. 이는 모두가 국초(國初)의 재상(宰相)이 견식(見識)이 짧은데다가 관직을 처음 설치할 때 일찍이 고사(故事)를 깊이 상고하지 않고 다만 억견(臆見)으로 비루한 풍습을 인습하여 간편한 것만 따라 초솔(草率)하게 일을 한 소치이다. 그 가운데 비국(備局)은 더욱 치도(治道)의 큰 해가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대략 논하였지만, 삼공(三公)ㆍ육경(六卿)이 모두 그 직(職)을 잃게 되는 것이 오로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니, 만일 이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진실된 정사를 얻을 리가 만무할 것이다.
이 밖에 또 크게 개탄할 것이 있으니, 장무관(掌務官)ㆍ색랑청(色郞廳)ㆍ혜청랑(惠廳郞) 등을 획차(畫差)하고 계차(啓差)하는 따위이다. 대저 관직이라 명명하였으면 그 직책이 없을 리가 없는 것이요, 함께 낭료(郞僚)가 되었으면 마땅히 각기 직무(職務)를 주어 책임지고 일을 성취시키도록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지금은 곧 일조(一曹)ㆍ일사(一司) 가운데서도 거취(去取)를 편벽되이 하여 뜻에 따라 획정(畫定)하고 있으니, 이는 무슨 사리인가.
【문】: 이는 그 낭서(郞署) 가운데 재국(才局)이 있는 자를 선택하여 매우 바쁜 직무를 맡기는 데에 불과한 것이다. 무슨 편벽된 폐단이 있겠는가.
【답】: 그렇지 않다. 사람의 재국이 있고 없는 것은 반드시 벼슬에 당해서 일을 해본 뒤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새로 온 낭청(郞廳)의 재국이 있고 없음을 당상(堂上)이 어떻게 알겠는가.
지금 병조(兵曹)와 호조(戶曹)의 낭료(郞僚)로 말한다면 각기 해당 부서와 맡은 직책이 있으니, 전포(錢布)의 출납(出納)에 대해서는 해당 직책에 맡겨 그 직책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줄곧 검찰(檢察)하게 한다면 새로 온 자가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어떻게 단정하겠는가. 설사 감당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럴 때는 출척(黜陟)하는 즈음에 이것으로 척출(斥黜)하는 것이 옳다. 대저 그렇게 한다면 관원(官員)된 자로서 그 누군들 진심갈력(盡心竭力)하여 자기 직분의 일을 다스리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동에서 메우고 서에서 획정(畫定)해서 취사(取捨)를 편벽되게 하니, 장무관(掌務官)ㆍ색랑청(色郞廳) 외에도 혹 전혀 직사(職事)가 없는 관원이 있어서 팔짱끼고 물러앉아 마치 남의 집 일 보듯이 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는 실로 해괴한 일이다.
【문】: 그렇다면 전포(錢布) 출입(出入)의 책임을 각 해당 부서별로 나누게 한다는 것인가.
【답】: 나누어 준다는 것은 아니다. 시험삼아 금곡(金穀)으로 말한다면 모사(某司) 모랑(某郞)이 간검(看檢)할 관직을 정한다는 것이다.
계차(啓差)의 규정은 실상 택차(擇差)의 뜻에서 나온 것인데, 택(擇)한다는 한 글자가 도리어, 전혀 가리지 못하는 결과로 되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택(擇) 자의 명목은 아름다우나 그 만연한 폐단은 실로 행사(行私)의 한 묘책(妙策)이 되고 있다. 선혜청 낭관으로 말한다면 문과(文科)출신이나 음관(蔭官)을 막론하고 임의로 불러들이고 있다. 이것이 어찌 아주 신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마는 이 아문(衙門)의 경우는, 미포(米布)는 넉넉한데다 재간(才幹)있다는 명예(名譽)를 얻기가 쉬우므로 이 때문에 추비(麤鄙)한 무리들이 머리를 싸매고 서로 덤벼들어, 세력(勢力)이 아니면 은밀한 청탁이라도 있어야만 얻게 되니, 택차(擇差) 두 글자가 어찌 허공에 벗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만일 차서에 따라 옮겨지는 자리라면 그 채용된 사람들이 어찌 모두 추비(麤鄙)한 무리만 취하는 데에 이르겠는가.
지금 내가 논하는 것은 오로지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요, 정규(正規)의 구차함이 대체로 이와 같기 때문이다.
[주D-001]대리(大理) : 대리시(大理寺)의 준말로, 옛날 형옥(刑獄)을 맡았던 관서(官署)이다.
[주D-002]삼성(三省) : 강상죄인(綱常罪人)을 추국하는 세 아문, 즉 의정부(議政府)ㆍ사헌부ㆍ의금부(義禁府)를 말함.
[주D-003]소각사(小各司) : 각조(各曹)에 딸린 육시 칠감(六寺七監), 즉 사복시(司僕寺)ㆍ관상감(觀象監) 등을 말한다.
사람을 쓰는 도는 반드시 정격(定格)과 정제(定制)가 있은 뒤에라야 실정(實政)을 바야흐로 달성할 수 있고 부론(浮論)이 횡행하지 못할 것이다. 격례(格例)를 비록 다 논할 수는 없지만, 추승(推陞)의 대강(大綱)을 다음과 같이 대략 거론하고자 한다.
승진시키는 것은 반드시 고만(考滿)에 의해 하는 것이지만, 만일 결원(缺員)이 있을 때는 보결(補缺)하여야 하니 이때 고만을 기다리지 않고 승진시키는 것을 추승이라 한다. 무릇 육조의 정경(正卿)ㆍ좌이(佐貳)와 양사(兩司)의 장(長)과 성균관 등 아문(衙門), 지방관으로 3품 이상 관원은 정추(廷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추의 제도는 의정부와 이조(吏曹)ㆍ병조(兵曹)의 수당(首堂)이 여러 조(曹)의 3품 이상 관원 및 양사(兩司)와 모여 첨의(僉議)한 후에 이조가 추상(推上)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관계가 중대한 변방(邊方)의 관원 및 곤수(閫帥)의 경우는 역시 장신(將臣)들을 모아 함께 의논하여 추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무릇 고만(考滿)으로 승직(陞職)하는 것과 추승(推陞)하는 것은 아울러 각 아문의 자급 높은 관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그 추용(推用)은, 이를테면 모아문(某衙門) 모품(某品) 모관(某官)이 고만에 이르렀을 때 모아문 모품 모관으로 승진(陞進)시키는 것처럼, 모두 각각 순서에 의해 응당 승진할 과좌(窠坐)의 차례로 격례(格例)를 정하여 이를 준용(遵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험삼아 육조(六曹)의 경우를 논해보면, 좌랑이 다음 고만에 이르러서는 정랑(正郞)에 오르고, 정랑이 다음 고만에 이르러서는 또 모아문(某衙門) 종3품(從三品) 모등(某等)의 관직에 오르고, 종3품이 또 다음 고만에 이르러서는 정3품(正三品) 모등의 관직에 오르는 것인데 하나같이 이러한 예로 준칙을 삼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무릇 문무(文武)의 거공(擧貢)은 일체 모두 오르게 될 과좌(窠坐)를 작정(酌定)하여 천승(遷陞)하는 자리로 삼되, 정3품 이상에 이르러야만 정추(廷推)하고 그 이하는 이조(吏曹)가 소본(疏本)으로 제청(題請)하여 승용(陞用)하는데, 그 과좌의 긴만(緊慢)에 따라 유(類)별로 모아 소본(疏本)에 열거하고 아울러 품제(品題)를 써서 그의 연로(年勞 여러 해 동안 쌓은 관로)와 승진시켜야 할 사리를 적어서 청(請)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제청(題請)을 하는 데는 의당 품평(品評)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테면 ‘모관(某官)의 모(某)는 경력(經歷)은 어떻고 재지(才智)는 어떠하니 진실로 모직(某職)에 승용(陞用)함이 마땅하다. ……’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전조(銓曹)의 공평(公評)으로서 뒷날 보천(保薦)과 오거(誤擧)에 대한 문안(文案)도 되는 것이니, 그 일이 극히 중요한 것이다.
무릇 은음(恩蔭)으로 임관된 자는 또한 그 승진시켜야 할 격례(格例)를 정하되 모아문(某衙門) 모등(某等)의 관직에 이르러 그친다는 별도의 칙례(則例)를 만들어 준용(遵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 회추(會推)하는 뜻은 곧 오늘날 비국(備局)의 추천[薦]과 같은 것인데, 비국의 용사(用捨)는 천주(薦主)의 다과에 있지 않고 다만 시재(時宰 그 당시의 재상)가 쓰느냐 버리느냐에 있으니, 이 또한 이조(吏曹)가 추상(推上)한다면 비국의 추천 실효가 없을 듯하다.
【답】: 비국의 추천이 무실(無實)한 것은 승진시키는 격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제도는 그렇지 않다. 고만(考滿)으로 승진되어야 할 사람들이어서 그 실적(實績)이나 자격(資格)과 이력(履歷)이 이미 드러났고, 또 정의(廷議)에 의해 추천된 사람들이어서 공의(公議)가 모두 같았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상신(相臣)이나 이조(吏曹)가 어찌 제 마음대로 거취(去取)를 할 수 있겠는가.
【문】: 그대가 논한 대로라면 등제(登第)한 사람이 어찌 사관(四館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원ㆍ교서관)에 나누어 예속되는 일이 없겠는가.
【답】: 우리나라의 허다한 고질적인 폐단 가운데 나누어 예속시키는 것[分隷] 한 가지가 더욱 큰 해독이 되니, 새로 임용된 자가 염치없이 경쟁하게 하는 것이 그 첫째요, 재상(宰相)과 명류(名流)들로 하여금 서로 결탁하게 하는 것이 그 둘째요, 붕당(朋黨)이 흥행하여 조정(朝廷)을 편치 못하게 하는 것이 그 셋째이다. 만일 새로 과거급제한 사람을 관직(館職)에 선입(選入)하거나, 제조(諸曹)에 나누어 예속시키거나 현읍(縣邑)에 나누어 임명하는 데 있어 각각 격례(格例)를 만들어 놓으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고질적인 폐단이 저절로 모조리 없어질 것이다.
【문】: 우리나라 정규(政規)에 소중한 것은 통청(通淸 청관(淸官)이 될 자격을 얻는 일)인데, 지금 그대가 논한 대로라면 또한 통청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답】: 관(官)을 설치하고 직(職)을 나누는 것은 장차 그 직책을 완수하기를 책(責)하려는 것이다. 그 직책을 완수하도록 하면 마땅히 그에게 일을 맡기어 그의 실적(實績) 여부를 보아서 출척(黜陟)의 자료로 삼는 것이 옳다. 지금 이른바 통청이라는 것은 그 실적 여하는 불문(不問)하고 다만 한때의 주론자(主論者)들의 구두설(口頭說)만을 가지고 통청의 계제를 삼으므로 한번 입을 열고 한번 붓을 드는 사이에 현우(賢愚)가 판가름되고 승침(升沈 현달과 침체)이 구분된다. 실사(實事)는 묻지 않고 오직 부론(浮論)만을 중히 여겨 국사(國事)의 무실(無實)함과 세도(世道)의 괴패(壞敗)함이 전적으로 여기에서 나오니, 이것이 모두 ‘통청’ 두 글자의 해독이다. 반드시 이런 폐습을 깨끗이 쓸어버린 다음에야 바야흐로 실정(實政)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 그대가 논한 대로라면 전관(銓官)은 하나의 서리(胥吏)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 현우(賢愚)를 변별하고 용사(用捨)를 주장(主掌)하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답】: 명기(名器)는 전관(銓官)의 사사로운 물건이 아니다. 전관이 어찌 임의로 남에게 주고 빼앗을 수 있겠는가. 전관의 책임은 출척(黜陟)에 있는 것이니, 출척이 공명(公明)하면 사도(仕途)가 저절로 맑아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전조(銓曹)에서는 출척하는 일이 없고 오직 부론(浮論)만을 빙자하고 있다. 그대는 과연 부론만 가지고 현능(賢能)한 이를 진출시키고 불초(不肖)한 이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문】: 지금 관직(館職 관각(館閣)의 관직)과 제조(諸曹)의 낭(郞)과 수령(守令) 같은 관직들은 혹은 청요하기도 하고 혹은 긴요하기도 하여 당초부터 조심스럽게 간택해야 할 소임이다. 어찌 한때 등과(登科)한 것 때문에 그 과거 등수의 차례만을 가지고 현부(賢否)는 묻지 않은 채 쉽게 자리를 분배(分排)할 수 있겠는가.
【답】: 한조(漢朝)에서는 현량(賢良)과 고제자(高第者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사람)에게 곧장 어사(御史)를 제수 하였고, 당(唐)ㆍ송(宋)ㆍ명조(明朝)에서는 갑과(甲科) 3인 중에 한 사람도 한원(翰苑)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없었다. 지금의 관직(館職)은 비록 문직(文職)이라고는 하나 본디 하찮은 직책의 신하인데 무슨 특별히 어렵고 신중을 기할 일이 있다고 해서 괴과(魁科)의 선비에게 허락하지 않겠는가.
시험삼아 오늘날 한림(翰林)으로 말하면, 오늘 등과했는데 명일에 취강(就講)하는 자가 있고, 이미 출육(出六)된 신급제자(新及第者)로 말하면, 아침에 갓 과장(科場)에서 호명(呼名)된 자가 낮에 대관(臺官)으로 제수된 자도 있으며, 세력이 있는 음관(蔭官)으로 말하면, 겨우 참봉(參奉)의 명칭을 얻고서 이어 감조관(監造官)의 직임을 겸했는데 몇 달이 못되어서 수령(守令)이 되는 자도 있으니, 모르긴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과연 특별한 재행(才行)이라도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오랜 역시(歷試)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이른바 이들의 선택을 어렵게 여기고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설(說) 또한 편파적이고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아, 그대가 나의 말에 의혹을 갖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대가 익히 보아온 것은 오늘날 문과 출신들을 족히 믿고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시골 선비들의 강경급제(講經及第)로 말하면, 언문(諺文)으로 토가 달린 경서를 읽어서 등과하니 그 행동거지가 가소롭다. 정시(庭試)나 알성시(謁聖試)로 선비를 얻는데는, 비록 한강(漢江)을 넘지 않는다고 하나 한강 안에서 급제한 자라고 해서 모두 재사(才士)일 수 있겠는가. 혹은 집안이 한미(寒微)하고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고, 혹은 학문이 졸렬하고 사람됨이 아무 취할 게 없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 이들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야말로 한번 급제한 것만도 진정 외람된 일이다. 그런데 만일 다시 그 자격 여하를 막론하고 곧장 그들에게 청환(淸宦)을 제수한다면 관계(官界)에 효란(殽亂)이 극심해질 것이다. 그대가 염려하고 의혹을 갖는 것이 어찌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이는 곧 국량이 아주 좁고 비루한 견해이다.
만일 지금의 과제(科制)로 선비를 뽑는다면 그 가운데는 오부(五部)의 참봉(參奉) 자격도 없는 자가 또한 반드시 있을 것이요, 만일 내가 거론한 과제로 선비를 뽑는다면 문학(文學)이 뛰어나고 정신(精神)이 남달리 투철하여 집에 있거나 성균관(成均館)에 있거나 사평(士評)에 조금도 하자가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함부로 급제자 가운데 끼여들지 못할 것이다. 진실로 이러한 준재(俊才)를 뽑아서 여러 가지 직위에 널리 앉혀 놓는다면 과연 그 외람된 폐단을 감당하지 못할 걱정이 있겠는가.
【문】: 그대가 말한 것도 소견(所見)이 없지는 않으나 국가가 사람을 취하는 도리는 문학(文學)만을 가지고 취하는 것은 부당하다. 지금 관직(館職)으로 말하면 실로 보도(輔導)할 책임이 있으니 참으로 충직하고 단아한 선비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요, 대간(臺諫)으로 말하면 참으로 뼈대 있는 정직한 선비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제사(諸司)의 낭관은 반드시 사물(事物)을 처리하는 국량을 충분히 익힌 사람이어야 하고, 현읍(縣邑)의 장관(長官)도 반드시 인자하고 자상하며 화평하고 단아한 행검(行檢)이 있어야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새로 진출한 사람은 행실이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혹 심술(心術)이 사곡(邪曲)되고 언론이 부정할지라도 이부(吏部)가 미처 알지 못하고 군상(君上)도 미처 살피지 못하고서 한갓 과명(科名)만 가지고 문득 시종(侍從)의 직임을 제수하는 것이 옳겠는가. 낭서(郞署)와 자목(字牧)도 그 책임이 또한 중한데, 생소(生疏)한 신진(新進)이 혹 일을 그르친다면 어찌 치도(治道)에 누(累)가 되지 않겠는가.
【답】: 안에 쌓여 있는 것은 덕행(德行)이요 밖에 나타나는 것은 사공(事功)과 문장(文章)인데, 밖에 나타난 것은 알기 쉽지만 안에 쌓여 있는 것은 살피기 어려우니, 이는 본디 고금의 걱정거리이다. 지금의 사람을 쓰는 법이 과연 덕행(德行)과 천심(淺深)을 세밀히 조사하고 심술(心術)의 은미함을 살펴서 반드시 단아하고 정직한 사람을 뽑아 쓰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국가가 잘 다스려진 지 벌써 오래였을 것인데, 어찌하여 세도(世道)와 사풍(士風)이 날로 더욱 퇴패해지는가.
오늘날 선비들 가운데 비록 볼만하고 취할 만한 것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이름을 신적(臣籍)에 올리고 조정에 서게 된 다음 그 행실을 살펴보면 갑자기 딴사람이 되어서 이욕(利慾)의 소굴로 타락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의 주권자(主權者)나 주론자(主論者)들이 명기(名器)를 손아귀에 쥐고서 후진(後進)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진실로 우러러 그의 낯빛을 살피고 허리를 굽혀서 그의 영(令)을 듣지 않으면 영고(榮枯)와 출척(黜陟)에서 당장 그 보응(報應)을 받게 되니, 어찌 그 분위기에 휩쓸리어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본성(本性)을 상실하고 구차하게 관직을 얻는 습속은 실로 출신(出身)한 처음 분관(分館)하는 날로부터 비롯되어 통청(通淸)에 대한 여부를 판가름할 즈음에는 더러운 풍속이 날로 불어나고 달로 깊어지니, 단아하고 정직한 선비를 어느 곳에서 얻어 오겠는가.
지금 내가 논한 것은 그렇지 않다. 학교(學校)에 한층 더 힘써서 준수한 선비를 발굴해서 좋은 방법으로 양성하고 적당한 제도로 뽑은 다음 정격(定格)을 설치하여 제수할 만한 관직에 있게 하는 것이니, 이는 참으로 옛날 사람이 이른바, 장원급제(壯元及第)만 하면 영달이 이미 정해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시종(侍從)이라고는 하지만 직위는 하찮은 것인데, 현부(賢否)를 시험해 보지도 않고 문득 높고 현달한 지위에 승진시키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가 이미 남에게 힘입은 것 없이 관직을 얻었으므로 그 직책을 공손히 수행함은 물론 마음이 온화하고 편안하여 서로 다투어가며 출세하기를 일삼지 않을 것이고,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직언(直言)과 우뚝한 기절(氣節)을 가진 사람이 저절로 나오게 될 것이다. 어찌하여 그대의 견해는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내 말이 시행될 수 없다고만 의심하는가.
[주D-001]수당(首堂) : 한 관아(官衙)의 정3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 가운데 가장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주D-002]출육(出六) : 조선 시대 참외(參外) 품위(品位)에서 6품의 계급으로 오르는 것을 말한다.
제3권 승강(陞降)의 책임에 대한 조례를 논함
시종의 책임은 서로 같지 않은 것인데, 우리나라는 혼동하여 전혀 구별이 없고 이리저리 바꾸는 것이 무상(無常)하여 자못 아이들의 장난과 같으니, 실로 개탄할 일이다. 양사(兩司)의 직책은 의당 뒤에서 논하겠지만, 시험삼아 승강(陞降)의 범례(凡例)를 논하면 다음과 같다.
갑과(甲科) 3인에게는 중국에서 송(宋) 나라 이후로 으레 한림원(翰林院) 편수(編修)ㆍ검토(檢討) 이상의 관직을 제수했고, 그 나머지는 또 길사(吉士)를 선택하는 예가 있어서 이들에게는 어제(御題 임금이 친히 보는 과거 글제)를 내려 전정(殿庭)에서 시험한 뒤 몇 사람을 엄선한 다음 관중(館中)에서 독서(讀書)하도록 하였다. 이때 장원(掌院)의 신하가 그들의 교습(敎習)을 주관하는데, 국체(國體 나라의 체통)ㆍ치규(治規 정치의 규정)ㆍ이치(吏治 관리가 취급하는 정치)ㆍ민은(民隱 백성의 고통) 등과 함께 문장을 시험하여 고과(考課)하되 오랜 세월을 쌓아 고만(考滿)이 되면 승진시켜서 학사(學士)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리고 3~4품(品) 이상의 경우는 혹 제독학정(提督學政)을 임명하여 내보내기도 하고, 각부(各部)의 좌이(佐貳)로 임명하기도 하고,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의 별칭)의 빈료(賓僚)로 임명하기도 하고, 국자사유(國子師儒)로 임명하기도 한다. 이리하여 점차 실적(實績)이 드러나면 공경(公卿)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들의 직책으로 말하면, 경연(經筵)의 강관(講官)으로 윤차(輪差)하는 외에 기거주(記居注)의 직책이 있고, 정총재(正摠裁)ㆍ부총재(副摠裁) 이하 여러 직을 지니고 실록을 편찬하는 직책이 있으며, 국가의 모든 글을 짓는 직책이 있고, 문무과(文武科)의 과장(科場)에서 정(正)이나 부(副)로 고시(考試)를 주관하는 직책이 있다. 또 서상길사(庶常吉士)를 교습시키는 직책이 있고, 거인(擧人)ㆍ공사(貢士)ㆍ은음(恩蔭)의 유생을 고시하는 직책이 있으며, 큰 정사(政事)나 큰 전례(典禮)의 회의(會議)에 참여하는 직책 등이 있으니, 무릇 그들의 책임을 손꼽아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유신(儒臣)의 직임이 이와 같이 중대하고도 전문적인 것인데, 이를 어찌 아침저녁으로 바꾸어서 무상하게 왕래(往來)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문】: 그렇다면 유신(儒臣)의 직임은 다른 관원(官員)으로는 선차(選差)할 수 없단 말인가.
【답】: 출신(出身)하는 날에 이미 선차하였으면, 관각(館閣)에 두어 문자(文字)의 일을 시키는 것이 옳고 경악(經幄)에 오래 두어 책임을 전담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어찌 다시 다른 관원(官員)을 그 보도(輔導)의 사이에 섞어 둘 필요가 있겠는가.
【문】: 문학(文學)과 견식(見識)이 혹 취할 만한 사람인데도 끝내 관각(館閣)에 들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답】: 관직(館職) 외에는 달리 임금을 섬길 직책이 없단 말인가. 온갖 자리에 갖가지 직책이 따로 있으니, 진실로 그 직책에 사람을 잘 들어 쓴다면 국가에서는 인재를 버렸다는 탄식이 없게 될 것이고, 신하는 임금에게 보답할 곳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문】: 한번 관각에 들기는 하였으나 만일 불사(不似 자격이 부족함)한 사람이 있을 경우는 어찌할 것인가.
【답】: 이른바 불사한 것이 분명히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러 해 동안 시강(侍講)할 때에 그의 본말(本末)과 장단(長短)이 벌써 다 드러났을 것이니, 과연 그가 용렬(庸劣)하여 취할 것이 없고 강관(講官)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관각(館閣)에도 관을 맡을 신하가 있으니만큼 매양 고찰(考察)이 있을 때마다 그가 어찌 직책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품평(品評)을 면할 수 있겠는가. 혹 간사하고 부정하여 청의(淸議)에 죄를 얻어서 범행(犯行)이 뚜렷하게 드러난 자가 있으면 어찌 좌천시키거나 척출(斥黜)하는 법이 없겠는가.
【문】: 그대가 논한 대로라면, 관직(館職)에서 경재(卿宰)에 서승(序陞 관직에 있는 햇수를 따라서 품계나 벼슬을 올림)하기는 무려 20년이나 걸리게 될 것이니 엄체(淹滯)됨이 심하다 하겠다. 그리고 비록 양사(兩司)로 말할지라도 만일 이런 제도를 쓴다면 또한 거의 오랜 세월을 언지(言地 간관(諫官)의 지위)에서만 있게 될 것이니, 이것이 어찌 될 일이겠는가.
【답】: 유신(儒臣)은 비록 지위가 청요(淸要)하다고는 하나 별로 다망(多忙)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없으니 금림(禁林)에 오래 있은들 무어 그리 민망할 게 있다고 반드시 조급하게 뛰어오르려 하겠는가. 고만(考滿)이 되어 서승하는 것이 비록 지체(遲滯)되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 또한 어찌 죄를 지어 파직되거나 사망하는 사람으로 인해 추승(推陞)할 때마다 차차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없겠는가. 양사(兩司)로 말한다면, 당(唐) 나라의 양성(陽城)이나 우리나라의 양성지(梁誠之)가 모두 간관의 지위에 10년씩이나 있었지만, 전배(前輩)들은 이것이 국가(國家)의 원기(元氣)가 두터운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오랫동안 언관(言官)에 있는다고 해서 무어 안 될 게 있겠는가. 그대는 근세(近世)의 피혐소단(避嫌疏單)ㆍ위패(違牌)ㆍ체파(遞罷) 등의 잘못된 규례를 보고서 언관을 오랫동안 역임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인가. 이는 모두 근거 없는 규례들이니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 무릇 그런 것들을 바로잡아서 옳게 해나가는 데 대해 내가 대략 논하려 하니 그대는 시험삼아 관찰하라.
[주D-001]위패(違牌) :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 패초는 즉 승지(承旨)를 시켜 왕명(王命)으로 신하를 부르는 것이다.
제3권 직관(職官)을 선주(選注)하는 사례를 논함
【문】: 그대가 논할 관제(官制)는 고기를 꿰 놓은 듯 구슬을 엮어 놓은 듯, 기러기가 줄을 지어 나는 듯이 승진의 질서가 정연하여 마치 지금의 음관(蔭官)과 참하(參下)가 달수를 따져서 근무 일수를 채우는 규정과 같다. 벼슬하는 사람이 무고(無故)하게 파직(罷職)되는 경우는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르게 된 사람이라든지, 병이 위중하여 체직된 무리라든지, 또는 공사간의 잡범(雜犯)으로서 죄명(罪名)이 대단하지는 않지만 일시적으로 체직된 자라든지 하는 따위의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만일 서승(序陞)의 제도를 쓴다면 모두 복직(復職)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다.
【답】: 어째서 그렇단 말인가. 이조(吏曹) 고공사(考功司)가 의당 직관(職官)의 문부(文簿)를 비치하고 그 업적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으니, 재임(在任) 안에 고만(考滿)이 되었고 별다른 범죄(犯罪) 없이 부모의 상을 당한 자는 마땅히 그를 수차(需次)의 적(籍)에 넣어 그가 삼년상을 마친 뒤에 복직을 기다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죄를 짓고 파직된 무리로 말한다면 의당 그 죄의 경중을 헤아리고 조사를 명백히 하여, 탐장(貪贓)하거나 법을 어긴 사실은 없으면서 다만 사소한 잘못으로 실직(失職)된 자는 또한 마땅히 수차(需次)에 넣었다가 잘 헤아려서 기용(起用)해야 할 것이다.
관직을 주선(注選)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시사(時仕 현직에 있는 벼슬아치)와 기폐(起廢 면관(免官)된 사람을 다시 등용하는 것)의 두 항목(項目)으로 나누어 추승(推陞)ㆍ보궐(補闕)의 격례(格例)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매양 대정(大政 도목정(都目政)을 말한다) 때마다 시사로 승진되는 사람이 10분의 7~8이라면 기폐로 복직되는 사람은 10분의 2~3으로 하되 마땅히 수차(需次)의 구근(久近 시일의 오랜 것과 짧은 것)과 천장(薦章)의 다과(多寡)로 준칙을 삼아 취사해야 할 것이다.
수령 및 각 아문의 관원으로 말한다면 고만(考滿)이 되었을 때 현저하게 탐오(貪汚)ㆍ혹학(酷虐)ㆍ왕법(枉法) 등의 죄명으로 죄를 받은 자는 애초부터 수차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사 탄핵을 받았더라도, 대신(臺臣)이 연명(連名) 공소(公疏)하여 보천(保薦)하거나 세밀한 조사끝에 명백하게 신원(伸冤)된 사람은 또한 잘 헤아려서 복직시켜야 할 것이다.
무고하게 해관(解官)되어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들의 경우로 말한다면, 등용할 만한 재능이 있으면 그 도 관찰사나 본도(本道)의 어사(御史) 및 헌사(憲司)의 관원이 해마다 소천(疏薦)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이조(吏曹)는 그의 벼슬을 역임한 공로와, 수차의 구근과 천장의 다과로 준량(準量)을 삼아 몇 사람을 기용할 것을 계청(啓請)해서 교지(敎旨)를 얻은 뒤에 차례로 복직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시임(時任)이나 전임(前任)이 조금도 분별되지 않고 이조(吏曹)에서 임의로 용사(用捨)하고 있다. 그리고 탄핵을 받아 파직된 사람이나, 전최(殿最)ㆍ염문(廉問) 때에 벌을 받은 무리로 말한다면, 서용(敍用)한 후에 조금도 구애됨이 없어서 선악(善惡)의 분별이 없고 권징(勸懲)이 밝지 못하여, 시임(時任)과 산관(散官)이 그 수가 한도 없는데다 서로들 백 가지 계책으로 자기를 윗사람에게 남 먼저 소개하여 모두 벼슬을 얻으려 하므로, 사도(仕途)가 혼탁해지고 염치(廉恥)가 아주 없어져버렸다. 관제(官制)가 이와 같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실정(實政)을 할 수 있겠는가.
【문】: 그대가 논한 대로라면 정사하는 규례(規例)가 마땅히 정해진 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답】: 무릇 관직에는 급선(急選)ㆍ유선(類選)ㆍ대선(大選)ㆍ원선(遠選)ㆍ세공선(歲貢選) 등이 있다. 급선은 이를테면 매우 긴급한 직책으로서 잠시도 자리를 비워둘 수 없는 것 및 변지(邊地)에 해당하는 유(類)이고, 유선은 이를테면 한만(閑漫)한 각 아문 및 수령(守令)의 무리로서 유별로 자리를 모아 두었다가 일시에 전보(銓補)할 수 있는 것이고, 대선은 이를테면 고만(考滿)된 후에 출척(黜陟)을 크게 시행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도정(都政)과 같은 예이다. 그리고 원선은 이를테면 변지(邊地)는 아닐지라도 지방이 약간 멀어서 즉시 빈자리를 메워 차임해야 하는 것이고, 세공선은 곧 세공 유생(歲貢儒生)을 고시(考試)하여 학직(學職)에 주선(注選)하는 따위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날마다 정사를 실시하고, 심한 경우는 구전(口傳)으로 차출(差出)하기도 하여 매우 번거럽고 소란스럽기가 자못 아이들의 장난과 같다. 그래서 전사(銓司)가 전혀 모양을 이루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매우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문】: 수령(守令)은 본디 긴요한 자리인데, 어찌 오랫동안 지체해 두고 즉시 제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답】: 읍(邑)마다 본디 학직(學職)이 있으니만큼 이 사람들은 모두가 앞으로 자목(字牧)에 오를 사람이니, 예(例)대로 현승(縣丞)을 겸하여 읍인(邑印)을 대서(代署)하면서 새 수령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시급하게 차출(差出)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문】: 3품 이상의 경관(京官)은 그 숫자가 많지 않으니, 서승(序陞)의 무리들은 앞길이 너무 좁은 걱정이 있지 않겠는가.
【답】: 우리나라의 경관(京官)은 아무리 주(酒)ㆍ초(醋)ㆍ장(醬)ㆍ해(醢)를 관장하는 일일지라도 소각사(小各司)를 설치하여 놓았는데, 외관(外官)의 경우는 1도(道)에 감사(監司) 1인 외에는 다른 정관(正官)이 없으니, 이는 실로 개탄할 일이다. 감사 밑에는 의당 중국(中國)의 제도를 모방하여 마치 참의(參議) 따위와 같은 정관(正官) 1~2원(員)을 설치해야 할 것이요, 형명(刑名)에 이르러서도 별도로 마치 안찰사(按察使) 따위와 같은 3품 정관을 설치하여 서무(庶務)를 분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감사가 으레 순찰(巡察)의 임무를 겸하는데 이는 정히 안찰사의 임무이니, 책임을 나누어 주는 것이 실로 종핵(綜覈 사건의 본말을 종합하여 자세히 밝힘)의 정사에 합당할 것이다. 이 밖의 주부(州府)에도 의당 정3품의 자리를 설치하여, 고만(考滿)이 되어 응당 승진할 사람에게 대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 우리나라 벼슬아치들은 경성(京城)에 있거나 초야(草野)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오직 조명(朝命)에 응하지 않는 것을 고치(高致)로 삼으니 이는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다. 아무리 고만 서승(考滿序陞)의 제도를 행하려 한들 할 수 있겠는가.
【답】: 벼슬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억지로 시킬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대체로 사람의 진퇴(進退)는 마치 주리거나 배부른 것과 같아서 실로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니, 아무리 국가의 위력(威力)이라도 억지로 벼슬하게 할 수는 없다. 신하로서 임금을 섬길 때는 오직 의(義)만을 추구할 뿐이니, 나갈 만하면 나가고 물러가야겠으면 물러가서, 위에서는 그의 뜻을 억지로 꺾지 않고 아래서는 자기의 지조를 잃지 않아야만 염치(廉恥)가 조정(朝廷)에 행해질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억지로 끌어당겨서 속박(束縛)하고 독촉하여 얽어매어서 휴치(休致)도 허락하지 않고 물러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리인가. 아침에는 모관(某官)에 제수했다가 저녁에는 모사(某司)로 옮기기도 하며 금방 체직했다가 금방 다시 제수하는 등의 일이 끝없이 되풀이되어, 1년 동안에 무려 수십 차 관직을 거치는 자도 있으니 삼사(三司) 같은 곳이 특히 심하다. 이 또한 무슨 정격(政格)인가. 헛되이 직명(職名)만으로 얽어매어 일이 정체됨을 방임하니, 이는 또 무슨 국체(國體)이며 분의(分義)인가. 내가 주장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벼슬을 하지 않으려는 자는 반드시 억지로 시키지 말고 다만 체직을 허락하며 경솔하게 검거(檢擧)하지 말아서 그의 뜻을 이룩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문】: 그렇다면 쓸 만한 사람이 필연코 초야에 묻혀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는가.
【답】: 참으로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있을 뜻이 진심(眞心)에서 나왔다면 국가가 어찌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그의 지조를 꺾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재력(才力)을 헤아려서 결코 직책을 감당할 수 없어 사양하는 자도 반드시 있을 것이니, 무릇 이런 무리들은 강박하여 독촉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만일 내가 논의한 대로만 시행한다면 위저(位著)가 갖추어지지 못할 리 없을 것이다.
[주C-001]선주(選注) : 관직(官職)에 결원(缺員)이 있을 때 그에 상당한 자격자(資格者)를 골라서 그 자리에 보충시키는 일을 말한다.
제3권 직관을 구임(久任)시키는 사례를 논함
【문】: 그대가 논한 것을 들어보건대, 대체로 직책을 오래 맡기어 임무의 성취를 요구하는 계책이었다. 관원(官員)을 자주 바꾸는 것은 과연 고질적인 폐단이어서, 오래도록 맡긴다는 의논이 행해진 지 벌써 오랜데도 끝내 그 효험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이 폐단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답】: 천하 만사가 실(實) 자 한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 법인데, 우리나라는 모든 일이 다 실(實)이 없으니, 그대는 그 폐단의 근본을 아는가. 대저 관직이란 하늘을 대신하여 사물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그리고 사물을 다스리려면 반드시 실사(實事)가 있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사사물물이 제각기 그 직(職)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말하기를 ‘하늘의 직사(職司)를 사람이 대신한다[天工人其代之]’ 하였고, 또한 천작(天爵)이니 천직(天職)이니 일컬었으니, 이것이 어찌 한갓 그 이름만 설치해 두고서 그 실제를 책임지우지 않을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아침저녁으로 바꾸어서 한갓 명류(名流)들이 허명(虛名)만을 이력(履歷)하는 곳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지금 삼사(三司)와 육조(六曹) 이상의 관직으로 말한다면 그들의 직책이 과연 얼마나 중대한 것이겠는가마는 과연 그 직책에 오래 있었던 자가 있었는가. 오늘날의 정규(政規)로 말한다면 설사 고요(臯陶)ㆍ기(夔)ㆍ직(稷)ㆍ설(卨) 같은 인재가 있다 할지라도 어느 겨를에 자기가 맡은 일을 한 번이나마 간섭할 수 있겠는가. 아, 육조(六曹)는 조정(朝政)의 근본인데 근본이 진정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떻게 그 말폐(末弊)를 구하겠는가. 오늘날 정치를 논의하는 사람들은 조정의 폐단 근원을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은밀히 구임(久任)시키고자 하는 것은 오직 선혜랑(宣惠郞)ㆍ군색랑(軍色郞) 등 해조(該曹)의 소관(小官) 따위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매우 가소롭지 않은가.
아,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치적(治績)은 너무 오래되어 알기는 어렵지만, 과연 오늘날처럼 자주 관원을 갈았다면 고적(考績)하여 출척(黜陟)하는 법(法)을 그 누구에게 베풀 수 있었겠는가.
역대(歷代) 이래로 오직 송(宋) 나라가 가장 충후(忠厚)하여 신료(臣僚)를 예우(禮遇)하였지만, 조정(朝廷)의 기강(紀綱)과 신자(臣子)의 도리가 정숙하고 엄절하여 조금도 해이한 폐단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대소의 신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오직 일신을 편히 하는 것만을 고치(高致)로 삼아서 수십 차례 패초(牌招)하여도 꼼짝하지 않고 들어앉아 나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국가도 또 어쩔 수 없어 체직을 허락하고야 마니, 사첩(史牒)을 두루 상고해 보았으나 국체(國體)와 분의(分義)가 이에 방불한 경우는 보지 못하였다.
대저 임금은 통치(統治)의 대권(大權)을 손에 쥐었으므로 만기(萬機)가 지극히 번거로운데다 또 그 사이에 강연(講筵)을 열고 유신(儒臣)을 인접(引接)하여 치도(治道)를 논하기까지 하니, 진실로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이나 백성(百姓)의 휴척(休戚), 조정(朝政)의 시비(是非) 등과 같은 극히 사리(事理)가 긴중(緊重)한 것이 아니면, 그 밖의 미세하고 용잡한 일은 본디 유사(有司)가 책임질 일이지 결코 임금을 번거롭게 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정원(政院)에서 주야(晝夜)로 골몰하는 것이 패초에 대한 계사(啓辭)며 추고(推考)하는 전지(傳旨) 등이어서 어느 날 어느 때나 없을 때가 없으니 임금은 그런 일을 잘 수응(酬應)하지 않을 수가 없어 그 지루하고 번거로움이 날로 불어나고 달로 심하여져서 아무리 경적(經籍)에 마음을 깊이 쏟고 치도(治道)를 깊이 생각하려 해도 이런 따위의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가 좌우에서 모여드니 어찌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외관(外官)은 자주 체역(遞易)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경관(京官)을 자주 체역하는 것은 정사(政事)에 무방한 일이다.’ 하였으나, 이는 실로 근거 없는 논설이다. 경관이든 외관이든 다같은 신하(臣下)요 그 직책으로 말하자면 내관(內官)이 외관(外官)보다 중요한데 혹은 허락하고 혹은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이 무슨 국체(國體)인가. 지금은 외관이 직책을 버리고 가는 것이 마치 여관(旅館)을 들렀다 가는 것과도 같다. 다만 삼사(三司)만은 비록 오늘 파직이 되었다 할지라도 내일 다시 제수되기 때문에 그 습관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외관은 한 번 체역되면 읍재(邑宰)를 다시 얻기가 어려울 뿐만이 아니라, 또 그 녹봉(祿俸)에 연연하기 때문에 체역을 너무 자주 하지 않을 뿐이다. 만일 삼사의 예와 같이 외관도 오늘 직책을 버리고 돌아갈지라도 명일 다시 읍재로 제수되게 한다면 체역되어 돌아가는 수령(守令)들의 수레가 반드시 도로에 죽 연이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참으로 체역을 허락하지 않는 조령(朝令)을 두려워하고 꺼려서 그런 것이겠는가.
【문】: 신료(臣僚)를 예(禮)로 부리는 것은 구경(九經)의 명교(明敎)이다. 우리나라는 신하가 사직(辭職)하는 절차에 있어 비록 너무 자유롭게 관용을 베풀어서 조정의 체통이 엄숙하지 못한 듯하기도 하나, 그 본의를 따져보면 아랫사람을 감싸서 예우(禮遇)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일체의 법으로 이런 풍습을 엄격하게 막아 버린다면 사세(事勢)가 결코 행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또한 어찌 이것이 청조(淸朝)의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답】: 예로 부리는 것은 임금에게 있고 분의(分義 정당한 도리)는 신자에게 있는데, 신자가 분의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 집에 가만히 누워서 열 번을 불러도 나오지 않는다면 임금도 어찌 예사(禮使) 두 글자에만 구애되어 일체를 그가 하는 대로만 맡겨두고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일은 그만두고 다만 전관(銓官)의 경우만을 보아도 이미 직책에 제수 되어 사은(謝恩)하였으면 이미 공무(公務) 중인 것인데 무릇 개정(開政) 때면 삼당상(三堂上 육조(六曹)의 판서ㆍ참판ㆍ참의)은 꾹 처박혀 드러누웠다가 반드시 패초(牌招)를 기다려서 들어가니, 이는 과연 무슨 의리인가. 이미 그 직책을 수행하고 있으면 개정은 바로 그가 할 직분(職分)의 일이 아닌가.
정고(呈告)로 말한다면, 대관(臺官)이 날마다 정사(呈辭)하는 것은 또 무슨 의의인가. 무릇 제배(除拜)시킬 일이 있으면 국가(國家)가 기력(氣力)을 다해가면서 간신히 차출(差出)해 내는데 이미 차출된 후에는 설사 대단치 않은 병만 있어도 반드시 그 심단(尋單)을 한다. 그리고 아무리 정병(情病)은 없을지라도 몇 달씩을 경과하고 나서는 또한 반드시 ‘오랫동안 머물러 있기도 지루하고 염치(廉恥)에도 관계가 있으므로 사체(辭遞 벼슬을 내놓고 물러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다. 사체되지 않으면 벌써 다른 직책으로 이배(移拜)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해가 가고 달이 가도록 위와 아래가 서로 버티고 있어 모두 체직하기를 비는 일과 차출하는 일이며, 개정(開政)과 패초(牌招)하는 일일 뿐이니, 이것이 과연 국가의 대계(大計)나 백성의 고통에 털끝만큼이나마 도움이 되겠으며, 또한 직사(職事)에 마음을 쓸 틈이나 있겠는가. 이렇게 하고서도 실정(實政)을 이루려 한다면 이야말로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으려는 격이 아니겠는가. 그대는 이런 풍속을 일체의 법으로 엄격히 막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곧 나의 본의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어찌 금방(禁防)을 설치해서 사직(辭職)을 못하게 하는 국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국가의 처분으로 말한다면 아무리 정원(政院)에 신칙해서 혹 위패(違牌)한 사람을 책벌(責罰)한다고 할지라도, 내 생각에는 조금도 도움이 없을 것이다. 도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어째서 도움이 없다고 하는가. 이런 잘못된 습관은 어느 한때에 어떤 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조짐을 쌓아온 지 오래되어 어느 누구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그 앓고 있는 것을 논하면 속투(俗套)를 그대로 인습한 소치임에 불과하지만, 속투가 이미 이루어져서 문득 의리(義理)처럼 되어서 아무리 그 불안한 점을 아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또한 그 유속(流俗) 가운데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추고(推考)로써 죄를 주어도 추고가 아무런 이익됨이 없고, 파직(罷職)으로써 죄를 주어도 파직이 아무런 이익됨이 없으며, 금추(禁推 죄인을 의금부(義禁府)에서 심문하는 일)로써 죄를 주어도 금추 역시 아무런 이익됨이 없다. 그리고 이는 모두 사소한 과오에 불과한 것들인데, 파직이나 금추로 다스린다면 또한 벌(罰)이 너무 중한 것이다. 비록 정원(政院)에 신칙한다 할지라도 정원에서는 소단(疏單)을 막는 데 불과할 뿐이니, 어찌 한결같이 막기만 할 수 있겠는가. 사체(事體)에 있어 극히 미안(未安)할 뿐이다. 또 어느 누가 그 말을 듣고서 두려워하고 꺼릴 자가 있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신칙(申飭)이 아무런 이익이 없다.’ 고 한 것이다. 어째서 손해가 있다고 보는가. 그 가운데 더욱 심하게 위패(違牌)한 사람의 경우에는 엄준한 전교(傳敎)를 받기도 하는데, 이것이 본디 대단한 죄과(罪過)가 아니고 보면 도리어 중도에 지나친 거조임을 면치 못하게 된다. 따라서 엄준한 전교가 자주 내리게 되면 아랫사람도 습관이 되어 보통으로 여기게 되므로 더욱 두렵게 여겨 삼가는 행동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대저 임금의 말 한마디는 관계되는 바가 극히 중대하여, 한 사람을 상주고 한 사람을 벌주는 데 있어서도 온 천하가 서로 권계(勸戒)하게 된 뒤에야 조정(朝廷)의 체통이 일월(日月) 위에 어엿이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만일 사소한 일을 가지고 자주 책망(責望)하게 된다면 군신(群臣)이 무엇을 보고 두려워할 줄을 알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손해가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일체 내버려 두고 바로잡지 않는다면 끝내 정치를 도모할 수 없을 것이니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겠는가. 무릇 정치의 근본은 출척(黜陟)보다 나은 것이 없고 출척은 구임(久任)이 아니면 행할 수 없다. 구임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자주 체직하는 길이 매우 넓기 때문이다. 어째서 매우 넓다고 하는가. 예사(例辭)며 질병(疾病)이며 정세(情勢)며 이차(移差) 등이며 하는 것들이 실상(實狀)의 여부가 있기는 하나 모든 벼슬아치들이 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기 때문이며 또 이를 강압적으로 막으려 하면 국체(國體)와 사의(私意)에 모두 방해된 바가 있어 형세상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임금은 오로지 신하의 거역 행위만을 가지고 죄를 삼아서는 안 되고, 신하는 오로지 임금의 명에 따르는 것만을 공손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니, 반드시 잘 참작해서 처리하여 일정한 규칙을 만든 뒤에야 막혀서 행하기 어려운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다.
예사(例辭)로 말한다면 취직(就職)하기를 세 번 사양하는 것은 허식적인 사양이 아니라 당우(唐虞) 시대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예(例)에 따라 직(職)을 제수(除受)한 다음 사소(辭疏 사직하는 소장)에 대해서도 반드시 임금이 친히 비답(批答)을 내리니 실로 번거롭기 그지없다. 당송(唐宋) 시대로 말한다면, 모두 한원(翰院)에서 제서(制書)를 기초(起草)해 올리면 칙서(勅書)로 비답을 내리니 이는 진실로 일에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도 임금이 사소(辭疏)를 본 뒤에 유신(儒臣)에게 내려 두어 줄 글로 비답하게 하되, 불윤비답(不允批答)의 예에 의거하여 세 번의 사소에 대해 세 번 비답해서 그로 하여금 출사(出仕)하도록 한다면 대신(大臣)을 예우(禮遇)함이 지극할 것이다. 그리고 시종(侍從) 이하까지도 다만 이조(吏曹)에서 복계(覆啓)하도록 하여 출사하기를 요청하면 족할 것이요, 만일 그 사소 가운데 정치의 폐단이나 백성의 고통 따위를 언급했을 때는 마치 지금의 비국(備局)과 해조(該曹)에 하명(下命)하여 회계(回啓)하도록 하는 규정과 같이 해당되는 각 본조(本曹)로 하여금 참작 의논해서 복계하도록 하면 족할 것이다. 다만 사체(事體)가 중대한 것, 임금의 덕을 논열(論列)하거나 간사한 무리를 규탄한 내용이어서, 아랫사람으로서는 감히 제 마음대로 처리할 바가 아닌 경우에는 임금이 친히 가부를 결정해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대신(大臣)이나 경상(卿相)에게만 삼사(三辭 세 번 벼슬을 사양하는 것)를 허락하고 시종(侍從) 이하는 일사(一辭)로 한계를 삼으면 족할 것이다. 정단(呈單 서한을 관아에 제출하는 것)의 경우는 소(疏)도 아니고 계(啓)도 아니며 사체가 불경(不敬)스러우니, 길이 막아서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질병(疾病)에 대해 말한다면, 이는 본디 인간으로서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어찌 경중(輕重)과 허실(虛實)의 차이가 없겠는가. 높고 낮은 신료(臣僚)를 막론하고 날마다 소단(疏單)으로 임금을 번거롭게 하니, 그 신하의 도리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시험삼아 4품 이하 관원에 대한 조처를 말한다면, 병이 있을 경우 본아문(本衙門)에 정고(呈告)하면 관인(官印)을 맡은 당상관이 동료(同僚)의 결장(結狀 연명하여 증명하는 글)을 취하여 병의 실태를 열거한 후 이조(吏曹)에 보내면 이조가 비로소 제복(題覆)하여 체직하도록 한다. 그리고 숙병(宿病 오래 묵은 병) 같은 것으로 조리(調理)해 가면서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경우는 말미를 주어 병을 치료하도록 하고, 일시적인 사소한 질병의 경우는 애당초 거론(擧論)하지 못하게 한다. 사사로이 동료와 함께 왕복(往復)하면서 고치게 하고 그 정장(呈狀)을 허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상(堂上) 이상 경이(卿貳)에 이르기까지는 비록 소(疏) 올리는 것은 허락할지라도 또한 이조(吏曹)에 하명하여 제복하도록 하고, 총재(冢宰) 이하는 대신에게 하명하도록 할 것이다.
정세(情勢)에 대해 말한다면, 이른바 인언(人言)이니 물의(物議)니 하는 등의 일은 본디 쓸데없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야기인데, 국가가 어찌 이를 의거해서 체직할 수 있겠는가. 물의 두 글자는 영구히 사직(辭職)의 단서가 되지 않도록 하고, 반드시 탄핵을 받은 후에야 인혐(引嫌)을 허락하되 이조에 하명하여 시비를 평정한 다음 복계(覆啓)해서 체직하거나 출사하도록 한다. 그러면 공의(公議)가 벌써 아래에서 정하여졌고 군상(君上)은 이미 공직(供職)할 것을 명하였으니, 본인의 염치(廉恥)도 전혀 손상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 거듭 번거롭게 하겠는가. 거취(去就)의 여부는 일체 임금의 명을 따르되 재차 사면(辭免)하는 일은 허락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차(移差)에 대해서 말한다면, 인재(人才)가 이전만 못한 이러한 때를 당하여 비록 한 관직에 3년 동안을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직책을 다 수행할 수 없는데, 하물며 아침에 제수했다가 저녁에 옮기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경관(京官)ㆍ외관(外官)을 막론하고 반드시 3년을 사만(仕滿)의 제도로 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상신(相臣)이나 정경(正卿)은 이 제도에 구애될 수 없으니, 비록 10년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만의 여부를 의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 비답(批答)을 대신 기초하는 것은 미안한 일인 듯하다. 그리고 체직의 허락 여부는 오직 군상에게만 있는 것인데 이조(吏曹)가 어찌 감히 천단(擅斷)할 수 있겠는가.
【답】: 관직에 막 제수되어 사직하는 것은 예사(禮辭)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 일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유신(儒臣)이 비답(批答)을 대신 기초하여 출사(出仕)하기를 권면하는 것은 예로부터 모두 그러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특별히 총애(寵愛)하는 사람일 경우는 특별히 친히 비지(批旨)를 내리는 것도 무어 해롭겠는가. 언사소(言事疏 나라 일에 관한 상소)로 말하면 정사의 폐단과 백성의 고통이 모두 육관(六官)의 직(職)에 벗어나지 않은 것이니 해조(該曹)에 하명하여 복계(覆啓)하도록 하는 것이 진실로 국가의 체통을 보전하는 일이다. 또 해조에서 체직할 것을 요청하는 경우로 말한다면, 신하들의 질병(疾病)에 대해 임금이 어찌 그 병의 경중(輕重)을 환히 알겠는가. 해조에 하명(下命)하는 것은 진정 그들로 하여금 병세의 경중을 잘 참작하여 처분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세(情勢)가 불안한 자의 경우는 또한 해조로 하여금 공의(公議)를 정해서 임금에게 아뢰도록 하되, 해조의 복계(覆啓)가 혹 타당성을 잃었을 때는 특지(特旨)로 처치하는 것도 사의(事宜)에 마땅하다.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모든 정사(政事)의 권한이 임금에게 돌아가면서도 임금은 편안하고 신하는 힘쓰게 되어 모든 일이 저절로 아래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대체로 신하의 거취와 용사(用捨)는 일체 임금에게 달린 것이니, 불초(不肖)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탄핵하고 반박하며 죄상(罪狀)을 조사, 검거하여 임금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이른바 물의(物議)란 그렇지 않다. 어느 연석(筵席)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소장(疏章)에서도 진술되지 않은 채 사사로 사람을 논하여 출척(黜陟)의 바탕으로 삼으니, 분수를 초월하고 의리를 어그러뜨림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도 국속(國俗)은 그것을 마치 의리처럼 여기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가 ‘이것이 곧 아랫사람들의 청의(淸議 고상하고 깨끗한 언론)로서 정치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실로 되지 않는 말이다. 과연 청의가 있다면 어째서 군상에게 진술해 올리지 않고 반드시 제 집에서 소곤거려야만 마음이 상쾌하단 말인가. 이른바 물의란 어느 곳에서 일어난 것인지 또는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는 가운데 조정에 떠돌아다니면서 용사(用捨)의 권한을 독차지하고 있는데, 잡으려 해도 잡을 곳이 없고 황홀하여 헤아리기가 어렵다. 이는 매양 약간의 주론자(主論者)들 입에서 나온 것에 불과한 것인데, 부뢰배(附賴輩)들이 여기에 덩달아 장단을 맞추어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자를 진출시키려면 반드시 ‘물의(物議)가 허락한다.’ 하고, 자기가 미워하는 자를 제거하려면 반드시 ‘물의가 배척한다.’고 하며, 은밀히 진퇴(進退)의 권한을 잡고서도 겉으로는 천단하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 비록 상신(相臣) 이하 그 누구라 할지라도 감히 그들과 대적할 수 없으니, 국정(國政)의 크나큰 해독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만일 이 폐단을 개혁하려면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물의 두 글자로 말미암아 인혐(引嫌)을 할 수 없게 한 후에야 국사(國事)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문】: 정단(呈單)하여 말미를 받는 것은 본디 휴목(休沐)과 청급(請急)에서 생긴 제도인데, 어찌 길이 없앨 수 있겠는가.
【답】: 이른바 휴목은 일반적인 급가(給暇 휴가를 주는 것)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세 번만 정사(呈辭 벼슬아치가 사직이나 청가의 원서를 관부에 제출함)하면 문득 반드시 체직시키는 한계로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이 과연 휴목에 근사(近似)한 것인가. 사람의 질병과 사고(事故)는 본디 반드시 있는 일인데, 어찌 전혀 여기에 대해 급가의 명령이 없을 수 있겠는가. 1개월을 놓고 말한다면 각 아문(衙門)의 관원에게 각기 5일 간의 휴가를 주도록 하는데 아문에서는 마치 중국의 문적(門籍)의 규례(規例)와 같이 책자를 비치하여, 병고(病故)가 있게 되면 문적에다 모병(某病)이라고 기록하고 5일 간을 휴식시키도록 하되, 그 5일 동안에는 같은 요원(僚員)들이 모든 일을 대리(代理)로 보게 한다. 만일 병세가 침중하여 속히 쾌차하기 어려운 자에 대하여는 그의 요원들이 서로 결장(結狀)하여 당상(堂上)에게 올리면 당상이 몇 달이나 며칠 동안 조리(調理)할 것을 허락하도록 한다. 그리고 만일 병이 나았는데도 여러 달씩 출사(出仕)하지 않는 자나 사(司)의 모든 제원(諸員)이 함께 칭병(稱病)하는 경우도 대관(臺官)으로 하여금 규핵(糾劾)하게 하여 죄질이 가벼운 자는 봉급(俸給)에 벌(罰)하되 혹은 주봉(住俸 주던 봉급을 중지하는 것) 처분하고 죄질이 무거운 자는 혹 직(職)을 빼앗고 죄를 조사한다면, 아랫사람을 잘 용납하는 인자함과 근무에 충실하는 효과가 저절로 병행(竝行)되어 서로 해로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세 번 정사(呈辭)했다 해서 반드시 체직시켜야만 유쾌하겠는가.
지금 육조의 경우를 보면, 오직 낭관(郞官)만이 있고 순시(巡視)하는 대관(臺官)이 없으니, 아무리 직사(職事)를 폐기하고 아주 자리를 비워두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대관이 어떻게 일일이 파악하여 논박할 수 있겠는가.
지금이라도 중국의 육과(六科)의 예(例)에 의거하여 육조에 각기 대관 몇 원(員)씩을 설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해서 밝혀내도록 하되 본조(本曹)의 공사(公事)를 만일 질질 끌어서 미루거나 완전하지 못하게 하는 등의 폐단이 있을 때는 일일이 독촉해서 감단(勘斷)하여 즉시 탄핵하도록 한다. 그리고 병을 핑계하여 직무를 게을리 하는 무리에게는 그 문적(門籍)을 살펴보아서 문관일 때는 이과(吏科)에서 논핵(論劾)하고 무관일 때는 병과(兵科)에서 논핵하게 한다. 비록 총애를 받아 추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누차 규핵(糾劾)을 받아 3차(次) 이상에 이르렀을 경우는 이조(吏曹)ㆍ병조(兵曹)로 하여금 소론(疏論)하여 구분해서 처리하도록 하되, 감봉(減俸) 처분을 하거나 직을 빼앗거나, 직을 낮추어 외방(外方)으로 보임(補任)시키는 등의 벌칙이 있은 후에야 조정의 체통이 비로소 존엄(尊嚴)해지고 직을 비우는 탈이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대저 한 사람에게 한 직을 맡도록 할 경우, 여러 해를 경과하면 질병과 사고가 있게 되는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실병(實病)으로 직무를 수행하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이 아낄 만한 사람이라면 어찌 경솔하게 체직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질병이 있을 경우는 문득 모두 체직할 것을 허락하니, 이는 실로 악폐의 정치이다. 엊그제의 병이 훗날에 낫지 않으리라고 어찌 다짐하겠는가. 그런데도 반드시 체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반드시 한 사람에게 그 직을 전담하도록 하고 동료들 사이에 서로서로 돕는 의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중한 것은 수당(首堂 한 관청의 정3품 이상의 당상관 중의 우두머리)인데, 병조 이하 좌이(佐貳)의 관원은 마치 정원을 충당하기 위한 관원과 같으니, 이것이 어찌 정사를 하는 체통이겠는가. 각조(各曹)의 수당이 참으로 거리끼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할 경우에는 차당(次堂)이 전지(傳旨)를 받들고 우선 일을 처리하면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은 것이다. 어찌 한갓 관명(官名)만 채워두고서 공무(公務)를 대서(代署)하지 못한단 말인가.
【문】: 우리나라의 정규(政規)로 말하자면 수당(首堂)이 가장 중요한데 차당(次堂)이 대서하는 것은 혹 사체에 손상됨이 있지 않을까.
【답】: 어째서 그렇단 말인가. 오늘날의 차당은 곧 뒷날의 수당이다. 어찌하여 이조(吏曹)는 차당이 개정(開政)하고 다른 조(曹)에서는 대서를 할 수 없는가. 이는 여러 관원이 차당의 지위를 가벼이 여긴 데 불과한 것인데, 이런 풍습이 그릇된 규정이 되어 대서할 수 없어 그렇게 된 것이다. 참으로 실정(實政)을 하려면 각 조(各曹)의 좌이(佐貳)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반드시 이들이 대서하여 공무를 살펴나간 후에야 자주 체직하는 폐단이 없게 되고 육조의 사무가 잘 다스려질 것이다.
【문】: 육조에만 대서를 허락하는가.
【답】: 경이(卿貳)의 아문(衙門)은 모두 이와 같이 해야 하되, 이조가 사유를 갖추어 전지(傳旨)를 청한 후에 전지를 받들고서야 서사(署事)할 수 있을 것이다.
낭관(郞官)에 대해 말한다면, 1조(曹)와 1사(司)에 오직 1원(員)만이 있어 실로 변동할 만한 길이 없다. 지금 육조의 낭관을 새로 임명할 때에 반드시 모조(某曹) 모사(某司)의 낭(郞)으로 하비(下批)하는데, 낭관도 몇 원(員)씩을 더 설치하고 우위(右位)니 면신(免新)이니 조사(曹司)이니 하는 등의 잘못된 규례를 일체 혁파하되, 이를 어기는 자는 면직(免職)시켜 서용하지 말며, 선진(先進)이나 하위(下位)를 막론하고 똑같이 일을 다스려 노일(勞逸 수고로움과 안일함)을 균평하게 하며, 수당(首堂)이 병으로 사직하였으면 차당(次堂)이 일을 처리하고, 낭관이 병이 있으면 당상(堂上)이 같은 사(司)의 요원(僚員)들에게 일을 대신 관장하도록 한 후에야 구임(久任)의 바탕과 고적(考績)의 정사를 이룩할 수 있게 된다. 아울러 각 아문(衙門)의 공격(公格 공공격식(公共格式))과 공무(公務), 직장(職掌)의 체통, 교제(交際)하는 예수(禮數 의식의 등급), 치사(治事)의 조례(條例), 아문에 들어가는 차제(次第), 직숙(直宿)의 일정과 기한, 발락(發落 결정하여 끝냄), 휴가(休暇)의 기간 등을 편성(編成)하되 반드시 사의(事宜)를 바탕으로 삼고 공법(公法)과 사고(私故)와 인정(人情)과 사세(事勢)를 참작해서 적중하고 완벽하도록 하여야 하며, 아울러 이를 증거 하는 책을 각기 만들어 반포(頒布)하여 각 아문의 관원으로 하여금 밝게 알아서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되, 감히 법을 어기거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짓이 있을 때는 법규를 상고하여 논죄(論罪)해서, 동료끼리 서로 도와가면서 정성스럽게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 그렇다면 각 아문에서 모두 책자(冊子)를 만들 것인가.
【답】: 각 아문(衙門)마다 직장(職掌)에 대한 책자 하나를 만드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맨 처음 며칠 안에 모품(某品) 복장으로 숙사(肅謝)하는 것을 정하고, 그 다음 당상(堂上)에게 투자(投刺 처음으로 윗사람을 볼 때 미리 명함을 드림)하는 것을 정하고, 마땅히 예수(禮數)와 절차(節次)를 써야 한다. 그 다음 참알(參謁)할 동료 관원을 정하고, 또한 예제(禮際)를 쓴다. 그 다음 부좌(赴坐 부임한 자리)를 정하고, 직장(職掌)내의 어떤 일에 배치시키는 것인데, 형조(刑曹)로 말한다면 추열(推閱) 등의 일을 모두 나열하여 추문(推問)의 격식(格式)을 하나하나 다 갖추는 것이다. 그 다음 직숙(直宿) 등의 사례를 정한다. 그리고 아울러 기한을 쓴다. 이런 유를 미루어 모두 이전(吏典)에 나열된 사건과 함께 토론 첨삭(添削)하여 한 책을 편성해서 준용(遵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 병(病)이 있다고 핑계하는 자는 으레 목전의 안일을 꾀하는 것인데, 공무를 동료들에게 맡기고 한결같이 병이라고 핑계한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답】: 대저 병을 조리하기 위하여 말미를 받은 자는 그 말미 기간이 다한 뒤에도 다시 연장하여 병을 조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간이 한 달 이상 초과하게 되면 월봉(月俸)을 지급할 수 없어 일체 단절해 버리므로, 병이 있다고 말미 받는 일을 애당초 저지시킬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월록(越祿 감봉(減俸))에 대한 규례는 실제로 규제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요, 주봉(住俸)의 규례는 그렇지 않다. 즉 매번 임기(任期)가 다 될 무렵에는 반드시 실제로 받은 월봉이 몇 달인가를 기준으로 삼아서 벼슬을 승진시키는가 하면, 위로는 그 부모에게 증직(贈職)하고 아래로는 그 처자에게 음직(蔭職)을 내리는 데도 기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미 대신(大臣)으로서 더 이상 승진시킬 벼슬이 없을 경우에는 그 녹봉을 더 지급하기도 하고 혹 그 자손에게 음직을 추가 제수하기도 하는데, 이도 모두 그 임기가 다 될 때까지 실제로 받은 월봉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벼슬길에 뜻이 없어 애당초 나오지 않은 자는 말할 것이 없지만, 세상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뜻이 있는 자라면 어찌 공연히 병을 핑계하여, 임기가 다 될 때 사사건건 구애되는 처사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문】: 법령(法令)에는 한 벼슬 자리에서 오래 있도록 마련되어 있어도 3년 동안 그 관직에서 아무 탈없이 공무를 집행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남의 탄핵을 받은 자가, 이조(吏曹)의 권고 때문이라 칭하면서 겨우 한 차례 사양하는 소(疏)를 올리고는 의기양양하게 공무를 집행한다면, 이 또한 염치를 모두 잃게 할 것 같다.
【답】: 한 자리에서 3년 동안 있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마음대로 옮기게 하고자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음직(蔭職) 참하(參下 7품 이하의 품계를 일컬음)로서 달수만을 계산하고 있는 자는 어떻게 견뎌 내겠는가. 이 밖에도 미관 말직으로서 밤낮없이 바쁘게 뛰는 자도 얼마든지 많지만, 꼭 병으로 탈이 생겨서 마침내 체직되거나 면직당하는 예는 보지 못했다. 어찌 고관(高官)만이 견디어 내지 못하고 쉬 병이 생긴단 말인가. 그리고 탄핵을 받고도 출사(出仕)하는 것을, 염치가 전혀 없다고 한 말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탄핵을 받았다고 해서 그대로 물러나 버려야 한다면, 일생 동안 출사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리고 탄핵을 받았을 경우 다른 직책으로 옮겨 출사하는 것이 염치가 있다고 하면, 이는 무슨 생각에서인가. 날마다 소(疏)와 정단(呈單)을 올리고 날마다 인혐(引嫌 잘못을 책임지고 사퇴하는 일)하여 병록(病錄 병중의 상태를 기록한 것)이 날로 쌓이고 인혐의 단서가 끝없이 펼쳐지는 것이 오늘날 같은 때가 없으니, 나는 과연 염치를 아는 자가 누구인지 전혀 보지 못하였다.
【문】: 한 자리에 오래 두는 것이 어찌 치적(治績)을 도모하는 근본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리나라의 관제(官制) 중에서 승지(承旨) 같은 직책은 번거로움이 워낙 심하여 아무리 그 자리에 오래 두고 싶어도 형편상 어려우니 사실 시행해도 시행되지 못할 우려가 있다.
【답】: 어느 시대 어느 국가인들 어찌 왕명(王名)을 출납(出納)하는 직책이 없었던가. 하지만 체임(遞任)되는 빈도가 우리나라의 규례와 같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상(堂上)ㆍ가선(嘉善 문무관(文武官)의 종2품(從二品) 품계)은 물론, 시임(時任)ㆍ산관(散官 현재 한산한 직책에 있는 조정관원)을 임명하는 데에도 일체 의망(擬望 어떤 관직의 후보자로 추천하는 것)에 의해 결정되므로 승지가 자주 체임되는 것은 고사하고 육조(六曹)의 좌이(佐貳 육조의 참판과 참의)와 삼사(三司)의 장관(長官)들도 그 직책에 오래 있지 못하는 까닭이 모두 여기에 있다. 지금이라도 만약 오래 재임할 수 있는 규례를 시행한다면 육조의 서무(庶務)가 자연 말끔하게 처리될 것이고 출납의 번거로움도 10에서 6~7은 감소되어서 묘시(卯時)에 출근하여 신시(申時)에 퇴근해도 심하다 할 것이 없겠다. 그리고 만약 여러 승지가 번(番)을 두어 출입한다면 모든 것을 얼마든지 변통 조절할 수 있어서 자주 체임해야 하는 폐단이 별로 없을 것이다.
【문】: 여섯 승지에게는 제각기 해당 부서의 사무가 있으므로 이 점이 곤란한 문제이다.
【답】: 번(番)에 의해 입직(入直)한 자가 어찌 그 사무를 처리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육찰 대신(六察臺臣 육조를 제각기 담당하여 검찰하는 관원)의 봉박(封駁)하는 규례(規例)가 있으므로 승지(承旨)의 임무가 예전처럼 번거롭지 않을 것이다.
【문】: 벼슬살이하는 자에게 자신의 병 외에도 혹은 어버이의 병이나 혹은 처자식의 병, 혹은 집안의 꺼리는 병이 있을 수도 있고 또는 어버이의 혐의나 동료간의 원한이 있을 수도 있어 사단(事端)이 매우 많은 법이다. 이 같은 경우에는 다 직무를 맡을 수 없으므로 그 임기를 채우기란 어려운 일이다.
【답】: 질병(疾病)이나 사고가 전혀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목석과 같은 사람이라야 벼슬살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처자식의 병쯤으로야 어떻게 감히 말미를 청하여 번거롭게 하겠는가. 꺼림칙한 병으로 말미를 청한다는 것은 더욱 사소한 문제이다. 이 따위 사소한 문제쯤이야 동료끼리 서로 의논해서 적절히 해소시키면 된다. 어찌 소(疏)까지 올리도록 허용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리고 사소한 혐의는 본시 조정에서는 사피(辭避)하지 않는 법인데, 지금은 크고 작은 혐의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체직(遞職)되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저마다 마음대로 나아가고 마음대로 물러나게 될 터이니, 국가에서 어떻게 백관(百官)을 제어하여 조정의 체계를 세울 수 있겠는가. 다만 이조(吏曹)에 위임하여, 중대한 원한이나 혐의로써 의리상 서로 대면(對面)할 수 없는 자들만을 다른 직책으로 체임시키도록 하고 이 밖에는 일체 체임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
【문】: 그러나 적합한 직책들이 어떻게 매번 적기에 맞추어 비게 된다고 하겠는가.
【답】: 현직(現職)이 해임되면 수차(需次 결원의 보임(補任)을 대기하는 것)에 두었다가 결원이 생기는 대로 바로 보임시키면 된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모두 일정한 규례가 되어 있지 않으니 만약 규례를 정하여 조금도 변경하지 말고 그대로 시행해 나간다면 임기까지 채우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문】: 품계를 올리는 것은 본시 상전(賞典 공로에 따라 상을 내리는 격식)에 속하므로 끝내 아주 없앨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혹 어떤 경우에 품계를 올리게도 되는데 품계가 이미 높아졌다면 그대로 낮은 직책에 둘 수 없으므로 그 품계에 걸맞은 직책에 올려 주어야 될 것 같다. 그러면 소위 임기가 끝나야만 벼슬을 승진시키는 제도가 그대로 준행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대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대저 상(賞)으로 자급을 올려 주는 제도는 아주 나쁜 제도이니, 이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되겠는가. 설사 특이한 공로가 있어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자에게는 다만 품계와 봉급만을 올려 준 다음, 품계보다 낮은 원래의 직책을 그대로 맡기는 것이 옳다. 품계와 걸맞은 직책은 그 관계가 매우 중대한데, 어찌 경솔히 임명할 수 있겠는가. 지금 잡기(雜岐 문무 이외의 의(醫)ㆍ역(譯)ㆍ율(律)ㆍ산(算) 등) 출신의 숭록(崇祿 문무관(文武官)의 종1품 품계) 품계가 많이 현령(縣令)으로 나가고, 일찍이 정경(正卿 정2품 품계)을 지낸 자도 목사(牧使)나 부사(府使)로 나가고 있으니, 품계가 높고 직책이 낮다 해서 무엇이 방해되겠는가.
【문】: 그러면 품계는 높으나 이전의 직책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자는 그 관호(官號)를 어떻게 칭해야 하는가.
【답】: 먼저 아무 품 대부(大夫) 아무 직책이라 쓰고 다음에 승진된 품계인 아무 품 대부를 쓰면 된다.
【문】: 외직(外職)으로 나가는 문무관(文武官)들은 임금 앞에 나와서 하직하는 규례가 있는데, 그때에 만약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옆에서 말하여 부임시키지 말도록 한다. 그리하여 이로 말미암아 생기는 빈자리도 꽤 많을 터이니, 임기가 끝나는 시기에 벼슬을 승진시키는 규례가 어찌 모두 준행될 수 있겠는가.
【답】: 사람의 적격 여부를 어떻게 한번 보아서 알 수 있겠으며, 대신 경재(大臣卿宰)와 삼사(三司)의 수많은 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는 인재를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국가에서 임명한 사람을 사사로이 말하여 부임하지 말도록 한다면 그것이 무슨 도리란 말인가. 이미 그 직책에 임명했으면 서서히 그 능력 여하를 보아 내쫓거나 승진시킨들 뭐가 늦겠는가. 괜히 억측하거나 경솔히 꺾어버리지 말고 그 맡은 바 직책을 완수하도록 요구한다면 누가 정력을 다하여 당연히 해야 할 것에 힘쓰지 않겠는가. 이와 반대로 겉만 보아 그 인격 여하를 늑정(勒定)하여 부임하지 말도록 한다는 것은 거의 조잔한 무변(武弁)이나 음관(蔭官) 등 형세없는 무리들이다. 이러고서야 인심을 어떻게 복종시키겠는가. 한갓 부마(夫馬)나 소모시키는 폐단만 끼칠 뿐, 책임지우는 도리에 어긋난 바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문】: 이조(吏曹)에서 복계(覆啓)하는 소(疏)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 이는 그 안건에 따라 참작해서 조사(措辭 말을 만드는 것)하면 된다. 병(病)에 관한 소장을 들어 말한다면, 아무 신하는 나이가 늙고 병이 깊어 체력이 미칠 수 없으니 그의 사퇴를 수리하고 한가로이 조리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쓰며, 병이 중하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 신하는 병으로 인한 사퇴를 간절히 청하고 있으나 잘 조리하면 효과를 얻어 직무를 맡을 수 있으니 경솔히 면직을 윤허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쓰며, 병은 사실 중하나 그 재주를 놓치기 어려울 경우에는, 그 병이 매우 중하고 사퇴가 매우 간절하니 본직(本職)을 그대로 띠고 집에 돌아가 조리하도록 하였다가 병이 나은 뒤에 다시 기용(起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쓴다. 파직된 자를 기용시키자는 데 대한 소장을 들어 말한다면, 맨 처음에는 전임(前任) 무슨 벼슬 아무가 무슨 일로 파직되었다고 전제하고 그 사람 재임 당시 공사간의 범죄 유무를 자세히 열거한 다음 맨 나중에는 무슨 벼슬 신 아무 등이 아무를 기용할 만하다고 추천하니, 그윽이 살피건대, 아무의 재품(才品)이 어떠하고 경력 또한 어떠한데, 오래도록 초야에 묻혀 있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니, 원래의 관직으로 기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쓰면 된다. 만약 기용하라는 명을 받았을 경우에는 그 자리에 후임(後任)으로 왔던 자를 해임하고 기용하되, 결국 그 후임 되었던 자와 대등한 직책이 되더라도 그대로 보임(補任)시켜야지, 후임자와 대등할 수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제멋대로 다시 좋은 자리에 보임 시킴으로써 사사로이 은혜를 팔아서는 안 된다. 탄핵을 받은 데 대한 소장에 대해 말한다면, 그 탄핵이 과연 무고(誣告)한 것이었으면 해당되었을 경우에는, 대간(臺諫)에서 논박한 바는 법사신(法司臣) 아무 등의 손을 거쳐 사실이 아니었음이 규명되었다고 쓰며, 사건이 애매할 경우에는 정확한 근거가 없으므로 지레 면척(免斥)할 수 없으니 이전대로 직무를 맡기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쓴다. 대간의 말이 너무 과격하거나 탄핵을 받아도 억울하지 않을 경우에는, 대간의 논척으로 인해 재직할 수 없을 것이라고 쓰기도 하고 혹은 수차(需次)에 두어 다음의 논정(論定)을 기다리기를 청해도 좋고, 혹은 본인의 사퇴를 윤허하여 그 체면을 유지시키기를 청해도 좋다.
【문】: 이조 판서가 탄핵당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 출사(出仕)에 대한 권고 여부는 임금에게 달려 있지만, 보신(輔臣)을 시켜서 출사를 권유해도 된다.
【문】: 보신이 탄핵을 당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 위에서 직접 처분을 내리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문】: 복계(覆啓)하는 소(疏)를 올릴 때 사(私)를 두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 이조 판서는 대신이요 사람을 진퇴(進退)시키는 임무를 지닌 자리이다. 참으로 사(私)를 두었을 경우에는 죄를 주어도 되지만, 어찌 억측을 두어 불신임할 수야 있겠는가. 또한 문관(文官) 2~3품 이상은 모두 시종(侍從)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분이다. 그들의 현사(賢邪)가 반드시 임금의 마음속에 감별되었을 것이므로 해조(該曹)에 넘길 적에 어찌 비답(批答)으로서 결정하는 것이 없겠는가. 그런데 해조의 낭관(郞官)들로 말하면 당상관(堂上官)이 마음대로 체임(遞任)시키고, 시종(侍從) 이상으로 말하면 정원(政院)에서 그 사건의 경중(輕重)을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사퇴서를 접수하면서 체면을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라고 하니, 자주 체임되는 폐단이 전적으로 여기에서 생긴다. 더욱이 벼슬길을 막거나 외직에 보임(補任)시키는 일을 당상과 낭관들이 멋대로 처리하며, 임금의 처결을 거치지 않으니, 사(私)를 두어 협잡질하기가 이보다 더 편리한 것이 없다. 그러나 복계를 올리는 규례는 일체 사리를 분명히 들어서 낱낱이 품청한 뒤에 시행하게 되므로 이 규례를 시행한다면 주권(主權)이 높아지고 국체(國體)가 존중되어 백관(百官)이 다스려질 수 있고 백사(百事)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니, 현재의 격식도 없고 법칙도 없는 관제(官制)에 비교한다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문】: 지색(枳塞)과 출보(黜補)하는 일을 멋대로 처리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아무리 공의(公議)를 들어서 지색ㆍ출보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사유를 갖추어 품계해야 하지 않겠는가.
【답】: 만약 드러난 범죄 사실이 없다면 어찌 사담(私談)을 공의라 하여 저지시키거나 내쫓기를 멋대로 계청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한 사람이 소를 올려 죄주기를 청하는 시기를 기다려서 사건을 정식으로 해조(該曹)에 내려서 그 시비가 분명히 밝혀진 뒤에야 그 품계에 걸 맞은 외방으로 보내기를 청하거나 품계를 강등하여 외직으로 보임시키기를 청하는 것이 옳다.
【문】: 소를 올려 죄주기를 청하는 사람은 없더라도 진정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벌을 주어야 되는가.
【답】: 과연 중죄를 범하여 탄핵에 해당되는 자는 이조(吏曹)에서 직접 소를 올려 논죄하는 것이 옳고, 만약 긴급한 사건이 아니면 서서히 사실을 심리한 뒤에 소를 올려 사실을 열거하여 죄벌을 청하는 것이 옳다.
【문】: 수령(守令)에 대한 대간의 탄핵이 매우 빈번하다. 그러므로 한 자리에 오래 재임하는 데에 아무래도 방해가 되는 것 같은데, 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 이는 잘못된 규례이니 시정되어야 한다.
【문】: 치도(治道)에 능하지 못한 수령을 어찌 논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말이 너무 괴이하다.
【답】: 이는 다 인습(因襲)에서 온 잘못된 규례인데, 도리어 나의 말을 괴이하다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서울에 있는 대간이 언제 수령을 논박한 적이 있었던가. 내직이나 외직에 각기 상하(上下)와 정부(正副)로 규찰(糾察)하고 검독(檢督)하는 직임(職任)이 있어, 외부의 방백(方伯)은 내부의 당상관(堂上官)과 같고 외부의 어사(御史)는 내부의 대관과 같으니, 고적(考績 관리의 성적을 상고하는 것)하는 일은 방백에게 맡기고 규탄하는 권한은 어사에게 맡기면 충분하다. 그리고 유약한 자가 원한을 회피하고 사은(私恩)을 팔기 위하여 그 비판을 엄격히 하지 못한 자는 바로 내쫓아도 되는 일인데, 어찌 대간으로 하여금 이 소문을 듣고 논박을 벌이도록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문】: 대간의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답】: 대간의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대간의 사람됨에 따라 사정(邪正)이 있고 말에 시비가 있는데, 어찌 대간의 말이라 해서 경솔히 믿겠는가. 더욱이 서울에 있는 대간이 어떻게 수령의 치불치(治不治)를 정확히 알 수 있겠는가. 소위 풍문이란 혹은 토호(土豪)나 관리들의 훼방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혐의를 품었거나 사(私)를 둔 자들의 충동에서 나오기도 하며, 심지어는 돈을 싣고 상경(上京)하여 자기네 고을의 수령을 쫓아내려 하는 무리들도 있어서 탄핵이 끊임없으니, 이를 시정시키지 않는다면 참으로 오래 재임하여 치적(治績)을 이룰 수 없다.
【문】: 그렇다면 수령의 치불치를 모두 감사(監司)에게 맡기면 그만이니, 어사를 따로 내보냈자 아무 도움이 없을 것 같다.
【답】: 감사가 그 치불치의 줄거리는 알 수 있으나 혹 궁벽(窮僻)한 지역에서 멋대로 구는 불법의 관리가 있을 경우에는 감사가 낱낱이 규찰하기 어려우므로 불시로 드나들면서 탐문하는 직임(職任)이 없다면 반드시 수령들의 외집(畏戢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하는 마음이 적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어사를 내보내는 전례를 보면 가소로운 일이 너무도 많다. 즉 초선(抄選 의정(議政) 대신과 이조(吏曹) 당상(堂上)이 모여서 특별히 어떤 벼슬에 적합한 사람을 뽑는 것)하면서 발령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한 가지요, 추첨(抽籤)된 고을만을 시찰하게 하는 것이 두 가지요, 사건의 허실을 조사해 보기도 전에 미리 봉고(封庫)시키게 하는 것이 세 가지이다. 심지어는 각 도에 원래 정해진 어사 한 명씩을 차출시켜 본도에 오래 머물러 있게 하니, 고금에 없던 규례로 도리어 두 명의 감사(監司)가 있게 된 셈이다. 어사를 차출하는 규례에 대하여는 그 대강을 하면(下面)에 논하겠다.
[주D-001]하늘의 …… 대신한다 : 《서경(書經)》 고요모(臯陶謨)에 보인다.
[주D-002]패초(牌招) : 조선 시대 승지(承旨)를 시켜 왕명으로 신하를 부르던 일. 명(命)자를 쓴 목패(木牌)에 부르는 신하의 이름을 써서 승정원(承政院)의 하례(下隷)를 시켜 보냈다.
[주D-003]정고(呈告) : 관아(官衙)에 소장(訴狀)을 올리는 것, 곧 정소(呈訴)와 같은 뜻이다.
[주D-004]휴목(休沐) : 관리의 휴가(休暇). 한(漢) 나라 때에는 5일 만에 하루, 당(唐) 나라 때에는 10일 만에 하루씩 집에서 쉬며 목욕을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5]문적(門籍) : 궁내(宮內)에 출입(出入)하는 자의 신분(身分)ㆍ주소(住所)ㆍ씨명(氏名) 등을 기입(記入)하여 궁문(宮門)에 걸어두는 필찰(筆札)을 말한다.
[주D-006]육과(六科) : 육과급사(六科給事)의 준말로, 청(淸) 나라 시대 이과(吏科)ㆍ호과(戶科)ㆍ예과(禮科)ㆍ병과(兵科)ㆍ형과(刑科)ㆍ공과(工科) 등 각과에 급사중(給事中)을 두고서 행정(行政)의 사무(事務)를 분장(分掌)시키는 것을 유과급사라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7]면신(免新) : 관아에 새로 출사(出仕)하는 관원이 허참례(許參禮)로 예를 닦은 뒤 다시 구관원(舊官員)을 청하여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 일. 이로부터 비로소 동석(同席)을 허락하였다.
[주D-008]조사(曹司) : 관직ㆍ계급ㆍ재능 같은 것이 가장 말단이 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