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환경은 매우 불결했고, 음식도 조잡해 사람들의 면역력이 약했다.
피부 질환은 아주 흔했고, 장티푸스, 말라리아, 천연두, 이질이 주기적으로 들이닥쳤다.
특히 페스트, 기근으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어 나갔기 때문에,
세상의 종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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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인들은 사탄과 악마를 굳게 믿었고, 질병, 기근, 죽음, 전쟁의 원인이 마법, 마녀라고 생각했다.
출산하다가 아기가 사망하면, 산파에게 마법을 부렸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기도 했다.
마법과 사탄, 악마는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중세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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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인들은 질병, 기근의 책임을 문둥병환자, 동성애자, 이단자, 성매매 여성에게 뒤집어 씌웠다.
가난한 사람들은 영양 상태가 나쁘고 불결한 환경에 사는 관계로
문둥병에 걸리기가 더욱 쉬웠고, 당시에는 진단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피부병에 걸린 사람들도 문둥병 취급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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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는 문둥병이 불치병이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질병이 문둥병(나병)이다.
성경 레위기 13장 45~46절에는 문둥병 환자는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하고 외쳐야 하고
주민들과 따로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구걸하는 문둥이 - 벵상 드 보베(Vincent de Beauvais)(1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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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문둥이는 예수처럼 이승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고,
이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가르치기는 했으나, 국가와 함께 문둥이를 사회에서 추방하는데 앞장섰다.
문둥이들은 대부분 성 외곽에 쫓겨나 병원에 갇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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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기독교 성인의 행적에는 문둥이를 도와준 업적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문둥병은 기적이 아니면 치료가 불가능하고,
일반 사람들은 문둥이를 끔찍이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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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는 교회에서 문둥이에게 성수를 뿌린 후, ‘죽은 사람과 다름없다’고 선포하고,
빵집이나 가게에 출입을 못하고, 문둥이 옷을 입지 않으면 외출도 못하고,
사람들과 마주치지도 못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만져서는 안 된다고 일러주었다.
문둥이는 사람들과 어울려 음식, 술을 마실 수도 없었다.
딸랑이를 들고 있는 여자 문둥이 (14세기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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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이는 죽은 사람 취급당했다.
실제로 12~13세기에는 문둥이를 파놓은 무덤 안에 들어가게 하고
삽으로 흙을 퍼서 몸에 뿌리는 섬뜩한 의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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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이도 계급 차별이 있었다. 부잣집 문둥이들은 자택이나 병원의 특별실에서 따로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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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와 중세에는 문둥병의 원인을 지나친 성욕과 음란 행위라고 보기도 했다.
특히 여성이 문둥병의 주범으로 몰렸고, 여성은 열등한 존재라는 고정관념도 강해졌다.
여성은 문둥병을 갖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전염시키는 존재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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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1년에는 문둥이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헛소문이 퍼지곤 했다.
대수롭지 않은 질병이 발생한 것인데, 문둥이들이 건강한 사람들을 감염시키려는 음모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문둥이들이 일제히 잡혀가 화형을 당하곤 했다. 이때, 유대인들까지 죄인으로 몰려 함께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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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소외 집단 가운데 문둥이만큼 사람들의 광적인 증오와 공포를 불러온 존재는 없었고,
질병이나 기근, 소동이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의 문둥이, 유대인, 무슬림, 여성, 동성애자들에게 화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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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고정관념을 만든다. 그것 없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고정관념은 절박한 공포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고정관념은 유치하지만, 자신과 타자를 영구적으로 구분한다 . p.40
/ 제프리 리처즈 ‘중세의 소외집단’
문둥병은 나균(Mycobacterium leprae)에 의해 감염되는 '한센병(Hansen Disease)'으로
알려져 있는데, 1940년대부터 특효약이 발명되었고,
지금은 초기에 치료하면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다만, 치료를 안 하고 놔두면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눈이 감기지 않으며 시력이 손실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에는 격리말고는 대책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중세인들은 문둥병 환자들을 추방하고 살해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지금 인생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든다면, 중세에 문둥이로 태어나 평생 왕따 당하다가
누명을 뒤집어쓰고 화형당했던 사람들을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여기서 화형은 물론 나무에 묶여 산 채로 물에 타 죽는 것을 말한다.
중세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화형’이다.
살아있는 여성을 마녀로 몰아 화형시키는 장면 (1571년. 암스텔담)
당시에 사진기나 캠코더, 유투브가 없었던게 다행이다.
17세기 영국의 마녀 처형.
오른쪽에는 마녀를 고발한 남자가 수고비를 받는 모습이 보인다.
그림의 수레차는 마녀 재판에 자주 사용되던 장비였는데,
이런 식으로 고문해 마녀라는 자백을 받아냈다고 한다.
참으로 잔인한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