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왕기상 강해 제 11장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본장은 솔로몬의 통치를 소개하는 마지막 장이다. 불행하게도 솔로몬의 타락과 몰락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야기된 하나님의 심판을 밝히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본격적인 심판은 다음 세대로 미루어졌지만 솔로몬 당대에도 그에게 고통을 준 대적들의 반란과 반역이 잇따르고 있다. 봄의 찬란함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등장했던 솔로몬은 여름철의 풍성함을 거쳐 늦가을의 조락과 함께 차디찬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1. 솔로몬의 호색과 우상 숭배 (11:1-3절)
솔로몬은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고 타락함으로써 그 시대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저주를 불러온다. 이 반전의 첫 걸음은 솔로몬이 이방 여인을 탐하는 데서 시작한다. 솔로몬은 국가 부강을 위하여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추진했으나 나중에는 솔로몬 자신이 성욕에 이끌려 이방 여인들에게 집착했던 것이다. 그 결과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일찍이 솔로몬은 애굽과 동맹을 맺고 그 증표로서 바로의 딸과 혼인하였다. 당시 애굽의 공주가 다른 나라로 시집을 간 것은 극히 드문 일로서 이는 솔로몬의 지위가 어떤가를 짐작하게 한다. 바로의 딸은 솔로몬의 정실부인이었고 솔로몬은 그녀를 위해 궁을 지었다. 그러므로 바로의 딸을 이방 여인들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을 사랑했다고 하는 말 ‘아하브’는 상대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진 사랑을 말한다. 즉 그 대상을 소유하거나 곁에 두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사랑은 ‘집착과 욕망’으로 대변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략적인 결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여인을 탐하고 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취한 이방 여인들은 우호 관계에 있던 나라들이 아니라 주로 적대 관계에 있던 나라들이다. 모압과 암몬, 에돔과 시돈, 그리고 가나안 족속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통혼을 금지하신 나라들이다. 모세의 율법에는 가나안 족속들과 잡혼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이 율법은 비단 가나안 족속뿐만 아니라 여호와 신앙을 변질시킬 수 있는 이방의 모든 족속이 다 포함되는 것이다. 솔로몬은 이러한 율법의 정신을 무시하고 국력의 강화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족속들의 여인을 취한 것이다. 이는 합리주의를 채택한 실정이며 하나님 앞에 완전한 범죄였다. 하나님께서 이방 족속들과 통혼하는 것을 금지하신 가장 큰 이유는 저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변질시키고 우상을 숭배하게 만들기 때문인데 솔로몬은 오히려 그 여인들을 사랑했던 것이다. 1절에 나오는 ‘아하브 사랑’이 강한 집착을 의미한다면 2절에 나오는 ‘다바크 사랑’은 강령한 감정적 애착을 의미하는 것으로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과의 애정에 탐닉했다는 것이다. 이는 솔로몬의 지혜로운 통찰과 분별력을 흐리게 하였다.
고대 왕들에게 있어서 처첩이 많은 것은 부와 권세를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솔로몬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다른 나라의 왕들보다 훨씬 더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는 안목의 정욕에다 부와 권세의 과시라는 이중적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아가서에는 왕후가 60이요 첩이 80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솔로몬 자신이 가까이 한 처첩들이며, 열왕기 기자는 모든 처첩을 총칭하여 기록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신정 왕국의 왕에 대한 권면과 경고의 말씀이 있다. ‘왕이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라.’는 세 가지이다. 솔로몬은 이 세 가지 명령을 모두 범하고 말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솔로몬이 어렸을 때에는 나단 선지자를 통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지만 그가 장성한 후에는 그의 곁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없었고 자기의 지혜를 지나치게 과신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멀리한 까닭 때문이었을 것이다. ‘후궁’으로 번역된 ‘사라’는 ‘왕비’의 지위이며 이들은 대개 이웃나라의 공주들이었고 ‘첩’으로 번역된 ‘필레게쉬’는 후궁들이며 주로 이웃나라에서 차출한 미모의 여인들이었다. 솔로몬의 마음을 돌이킨 여인들은 주로 이웃 나라의 공주들이었으며 이들은 솔로몬의 왕비로서 자신들의 우상을 가지고 와서 숭배했다. 왕비들은 솔로몬을 회유했으며 솔로몬 역시 그러한 신들 숭배를 허용하게 되었고 저들을 위해 산당까지 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솔로몬의 종교 혼합주의는 이방 국가들의 호의를 얻어 동맹을 굳게 했을지는 모르나 엄히 경고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으로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솔로몬의 말년에 자리 잡은 우상의 산당들은 왕국시대 전반에 걸쳐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마침내 왕국 분열의 주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라는 말 ‘지크나’는 그의 노후를 말하는데 당시 장년과 노년의 구분 점은 60세 전후였으므로 솔로몬의 나이가 60세 쯤 되었을 것이다. ‘노년’은 축복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고결함과 경건의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솔로몬의 노년은 우상 숭배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되는 부정적인 노년으로 무기력함과 판단력의 쇠퇴 등으로 나타난다. 즉 그의 통치 말기에 타락의 징조가 나타났던 것이다. 솔로몬의 타락이 많은 처첩들로 인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왕비들이 솔로몬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유혹했기 때문이다. 가나안 진입 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인들과 간음하다가 우상 숭배에 빠졌고 그로 인해 하루에 23,000명이 죽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솔로몬은 이러한 역사적 교훈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물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스다롯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이며 성적인 사랑과 다산의 여신이다. 이 여신을 위한 제사에는 음란한 행위가 의식의 순서에 있었다. 여신의 우상은 유방과 음부를 크게 만들었으며 당시 일반 가정에서도 이 우상이 있었다. 밀곰은 암몬 민족의 신으로 인신 제사로 유명하며 몰록, 몰렉 신과 동일하다. 다윗은 항상 여호와 앞에서 살았으나 솔로몬은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지 못했는데 6절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했다고 한다. 죄악으로 눈이 가려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존재가 간과되기 쉽다. ‘눈앞에서’라는 말 ‘베아인’은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즉 솔로몬의 행위는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과, 어떤 요설로도 자신을 합리화 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아스다롯과 밀곰을 섬기면서 동시에 여호와께 제사를 드림으로 종교 혼합주의를 행했던 것이다. 다윗은 비록 그의 생애 중 간음과 살인 교사, 교만 등의 죄악을 범하기는 했으나 우상 숭배의 죄는 짓지 않았지만 솔로몬은 살인 교사와 같은 죄는 짓지 않았으나 우상을 숭배하고 수많은 간음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모압 민족의 신은 ‘그모스’인데 이는 전쟁의 신이다. ‘그모스’라는 말은 ‘정복자’이며, 이 신은 암몬의 신 몰록과 쌍둥이 형제라고 한다. 이 신에게 드리는 제사는 매우 잔인하며 음란했다. 솔로몬은 그모스와 몰렉을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는데 이 산은 감람산을 말한다. 나아가 이방 모든 왕비나 후비들을 위하여 자기 신들의 제사를 허용하였고 그들의 신을 모실 산당을 건축하게 하였다. 이러한 종교 혼합주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주변의 산들은 거의 우상을 위한 산당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왕비들은 각자의 신을 섬기는데 열심이었지만 반대로 솔로몬은 왕비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소개하지는 않았다. 이는 솔로몬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게을리 했으며 그의 통치 방향이 주변 국가들의 문화를 수용하는 혼합주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9절에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버렸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는데 ‘진노하시니라.’에 해당하는 말 ‘아나프’는 하나님의 특별한 분노로서 언약 백성이 언약을 깨뜨린 범죄에 대하여 발하시는 분노이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두 번 나타나셨는데 기브온 산당에서 나타나신 것보다 두 번째 묵시는 좀 더 경고의 성격을 띠었다. 특히 우상 숭배는 파멸로 가는 지름길임을 경고하신 것이다. 물론 우상 숭배가 여호와께 드리던 제사를 폐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솔로몬의 혼합주의에 대해 성경은 ‘그가 여호와를 떠났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전부를 원하시기 때문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 여호와 유일 종교의 특색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명하신 명령과 법도는 지키기 어려울 정도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솔로몬의 우상 숭배는 안일과 교만에서 온 불신앙이다. 이는 여호와의 마음을 이중적으로 상하게 했으며, 사랑했던 종으로부터 배신을 받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여호와를 떠난 인간의 부귀영화는 다 헛되고 헛된 것이며 이 고백은 진실한 솔로몬의 신앙 간증이다. 솔로몬은 죽기 전에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전도서를 저술했는데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여호와 신앙을 회복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세 번째 말씀을 주셨는데 두 번에 걸친 현현은 직접적이었지만 이번에는 어느 선지자를 통한 전달 방식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아히야 선지자일 가능성이 높다. 여호와의 축복과 후손들의 왕위 계승은 오직 여호와의 언약과 법도를 지키는 조건 하에서만 보장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조건을 지키는데 실패했고 따라서 축복과 약속은 철회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솔로몬에게서 빼앗아 그의 신하에게 주는 것이며, 그러나 다윗을 위하여 솔로몬의 손에서 빼앗지는 않고 그의 아들의 손에서 빼앗을 것이며, 오직 한 지파만 그의 아들에게 준다는 것이었다. ‘빼앗다’라는 말 ‘카라’는 ‘찢다’ ‘쪼개다’라는 말로 솔로몬 왕국 전체를 멸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이 분열 왕국이 된 것은 솔로몬의 타락과 우상 숭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의 신하는 구체적으로 ‘여로보암’이다. 그는 솔로몬의 노역 감독관이었다. 과거 소돔과 고모라 멸망 시에 롯은 그의 삼촌 아브라함을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 이와 같이 솔로몬도 아버지 다윗으로 인하여 당대의 심판을 모면한 것이다. 다만 솔로몬의 왕위가 대를 끊기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예루살렘의 가치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도성으로서 다윗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실 장소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행위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 자신의 언약과 선택을 위하여 하나님은 유다의 주권을 박탈하지 않으셨다.
2. 솔로몬의 대적들 (11:14-25절)
솔로몬의 대적들은 모두 세 사람이다. 그 중에 첫째 사람은 에돔 족속 하닷인데 ‘하닷’은 ‘태양’ ‘호통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유명사가 아니고 에돔인들이 단지 자기들의 왕을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시리아의 왕의 이름은 벤하닷, 하닷에셀 과 같이 하닷이 결부되어 있다. 솔로몬 당시 에돔 왕 하닷은 에돔의 왕족으로 일찍이 요압과 아비새의 휘하의 다윗 군대가 에돔을 진멸시키기 위해 학살 작전을 감행했을 때 애굽으로 도피하여 살아남았던 유일한 생존자이다. 솔로몬에 대한 그의 대적은 하닷 편에서 보면 독립운동이나 솔로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이었다. 다윗이 생존 시에 에돔을 정복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염곡 전투라 부른다. 당시 다윗의 군대가 에돔에 의해 전사가가 많이 발생했으며 이에 대한 보복전으로 요압이 에돔 남자들을 많이 죽였다. 15절에 ‘다 쳐서 죽였다.’라는 표현은 진멸시킨 것이 아니라 복종시키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던 것이다. 잔인한 성격의 요압은 6개월간 그곳에 머물면서 많은 살육을 감행했었다. 이때 어린 나이의 하닷은 요압의 학살을 모면했으며 왕손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애굽으로 망명하는 길에 미디안을 거쳐서 갔다. 애굽에 도착했을 때 애굽 왕 바로는 그에게 집과 먹을 양식을 주고 토지도 주었으며, 바로가 그의 처제를 그의 아내로 주어 특별한 은총을 베풀었다. 왕비 다바네스의 아우가 하닷에게 아들을 낳았으며 그 이름은 그누밧인데 이 아이는 바로의 궁에서 바로의 아들 가운데 있었다. 이는 그누밧이 다바네스의 양자로 입양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닷은 다윗과 요압 장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할 엄두를 내고 에돔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닷이 애굽에 거한 기간은 근 30년이었으며 오랜 기간 동안에 설욕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바로는 하닷의 귀국에 대해 서운함을 표했지만 애굽이 제공하는 모든 특권과 안락함으로도 그를 붙잡을 수 없을 만큼 하닷의 복수심은 깊고 불타올랐다. 이처럼 강렬한 복수심은 솔로몬의 통치에 우환이 되었고 솔로몬의 일평생에 그를 괴롭혔다.
두 번째 사람은 소바 사람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이다. ‘르손’은 족장이라는 뜻이며 소바 왕 하닷에셀의 신하라는 사실 외에는 그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소바는 아람족에 속한 나라로 레바논 지역에 있는 도시 국가이다. 이 나라는 사울 왕 시대부터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었으며 다윗은 이 여러 나라들과 싸운 적이 있다. 아람의 여러 소국 중에서 가장 큰 나라로 성장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도시는 다메섹이다. 과거 소바 왕 하닷에셀이 세력을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진군하는 것을 다윗이 기습하여 대패시킨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사람은 그의 왕을 버리고 도망하여 산적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솔로몬의 통치 기간 중에 다메섹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르손이 이를 점령하고 세력을 증가시켜 결집함으로써 아람 국가들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솔로몬의 통치 말년에 하닷이 반기를 들어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그를 대적하였으며, 항상 게릴라 전투를 통하여 솔로몬을 괴롭혔다. 또한 르손이 수리아 왕이 되어 솔로몬을 대적하고 그의 통치를 거부했으며 솔로몬의 파멸을 바랐던 것이다.
3. 여로보암의 반란 (11:26-40절)
솔로몬에 대한 하나님의 주된 심판인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이 어떻게 발단하게 되었는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여로보암이라는 인물의 등장이다. 이 사람은 에브라임 출신으로 솔로몬이 그를 감역관으로 세웠으며 지파 중에서 지지 세력이 상당수 있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이 북쪽 이스라엘 10지파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은 속국들의 독립운동과는 달리 혁명적 성격을 띠었고 이스라엘 왕국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 사람은 왕국을 분열시킨 후에 큰 해악을 이스라엘에게 끼쳤는데 그것은 우상 숭배이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금송아지 우상을 부활시켰다. 그리하여 열왕기서 기자가 악한 왕들을 평가할 때 언제나 여로보암에 견주어 평가했던 것이다. 즉 여로보암은 다윗과 정반대의 성격으로 열왕의 표준이 된 것이다. 에브라임 지파는 인구의 수효나 이스라엘 내의 위치 면에서 항상 유다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광야 생활을 할 때에도 유다가 동편의 주도적인 세력이라면 에브라임은 서편의 주도 세력이었고 가나안 정복 전쟁의 영웅 여호수아도 에브라임 지파였으며 왕정 시대에도 예루살렘이 종교의 중심지가 되기 전까지는 에브라임 지파의 실로가 중교의 중심이었다. 이처럼 왕국의 분열 이면에는 그러한 반목을 낳을 뿌리 깊은 경쟁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솔로몬 사후에 에브라임과 유다의 반목과 질시는 표면화 되었고 대다수의 지파들은 여로보암을 후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훗날 에스겔은 이러한 지파간의 반목과 질시를 근원적으로 종식시키고 참된 단합과 화해의 왕국을 건설할 왕이 다윗의 가계로부터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족속이며 스레다 사람인데 ‘스레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솔로몬 왕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선지자 아히야를 통한 여호와의 말씀 때문이었다. ‘손을 들었다.’라는 말은 ‘복종하기를 거부했다.’라는 뜻이다. 솔로몬이 유다 지파의 성읍이라 할 수 있는 다윗 성의 보수공사를 유다 지파가 아닌 에브라임 지파에게 맡겼으며 공사의 감독관으로 여로보암을 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유다 집에 대해 불만이 있던 에브라임 지파는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던 것이다. 여로보암은 사울처럼 ‘큰 용사’였다. 이런 사람은 군사 행동의 의무와 책임을 지게 되는데 솔로몬이 이 사람의 부지런함을 보고 요셉 족속의 부역 책임자로 선임했던 것이다.
아히야는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인 실로의 제사장 가문 출신 예언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여로보암에게 전했는데 아히야는 나단 선지자 이후에 솔로몬과 르호보암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자로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여로보암을 길에서 만났을 때 아히야는 새 의복을 입었는데 그 의복을 열두 조각으로 찢었다. 새 의복을 입은 것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아직은 신흥 제국이라는 의미이며, 옷을 찢은 것은 왕권의 분열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는 사울이 사무엘의 옷을 잡았을 때 옷이 찢어졌던 경우와 동일하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에게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고 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라를 솔로몬에게서 빼앗아 열 지파를 자신에게 주신다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지파는 유다와 베냐민인데 아히야는 한 지파라고 했다. 그 이유는 두 지파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나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며, 사사시대 이후로 인구가 격감한 베냐민은 유다에 의존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분열시킨 이유는 솔로몬이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족속의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며 ‘버리다’에 해당하는 말 ‘나타쉬’는 상대방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는 강경한 단절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켰으므로 하나님은 다윗을 위하여 솔로몬 생전에는 나라를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저주를 부른 솔로몬이 그의 생전에 보응을 받지 않은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가 그의 아들의 대에 이루어진다는 것도 아비의 죄가 후손에게 전가되는 모순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나라가 분열된 것은 르호보암의 실정 때문이었다. 다윗에게는 한 등불이 항상 하나님 앞에 있게 한다는 것은 한 등불이란 한 지파를 말하는 것이며 결코 부강한 번영은 아니지만 명맥은 유지한다는 의미이다. 즉 유다 지파만이라도 왕조를 계승하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드디어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택하심이 전개된다. ‘내가 너를 취하리니’라는 말에서 ‘취하다’는 말 ‘라카흐’는 ‘붙잡다’라는 말이다. 이는 여로보암이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을 선택했을 때 사용한 말 ‘바하르’가 사용되지 않고 이 말을 사용하신 것은 여로보암이 왕이 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리라.’는 말은 평소 여로보암의 소원이 왕이 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 왕국의 정통성은 다윗의 후손들에 의해 계승되어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요셉의 후손인 에브라임 지파 역시 장자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여로보암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축복을 보장하시겠다는 것이다.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길로 행하며 하나님의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다윗처럼 율례와 법도를 지키면 다윗의 집과 같이 그에게도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하시겠다는 언약을 주신 것이다. 즉 여로보암의 가문이 계속해서 왕위에 오르도록 한다는 것인데 정작 여로보암 왕조는 그 아들 나답 대에 이르러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 까닭은 저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행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을 세우신 목적은 저가 신실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저를 통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하여 겸손하게 하고 낮추게 하시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괴롭게 하시는 이유는 다윗의 자손들이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처럼 여로보암의 순종에 대한 축복이 주어졌어도 다윗 가문과 같은 영원한 약속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는 영원한 메시야 왕국이 오직 다윗의 후손을 통해 도래할 것과, 이스라엘이 영구히 분열 상태로 있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암시한다.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전달 받은 여로보암은 그 후에 그의 역심이 노출되는 어떤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솔로몬은 이 사실을 알고 여로보암을 징벌했으며 여로보암은 솔로몬을 피하여 애굽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애굽 왕 바로는 시삭이라는 사람으로 솔로몬의 장인은 아니었을 것이며 그는 여로보암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죽기까지 여로보암이 애굽에 있었던 것이다.
4. 솔로몬의 최후 (11:41-43절)
솔로몬의 죽음을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별다른 솔로몬의 임종의 장면이나 유언도 전혀 소개되지 않고 있는 것은 한 인생의 낙조가 쓸쓸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솔로몬의 사적은 실록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사적’이라는 말 ‘다바르’는 한 사람의 개인적 행적이 아닌 공적 활동에 대해 정리한 기록을 말한다. 솔로몬은 20세 전후에 즉위하여 사십 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며 60세 즈음에 죽었다. 열왕기서는 솔로몬에 관한 기록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더구나 솔로몬이 죽을 때 어떤 내적 변화가 있었는지 일체 언급이 없다. 그러나 역대기는 솔로몬이 생애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전도서는 자신의 인생을 총 결산한 책으로 간주되는데 이 책의 결론을 보아 그는 진심으로 회개했을 것이며, 다윗 언약은 다윗의 후손을 징계할지라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