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 인증 숏을 보내온 벗에게/ 김선우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 보낼 답장
1
민주주의 꽃이 선거,라는 표어 앞에서 멈칫한다. 그런가?
풀 한포기가 견뎌내는 불과 얼음의 바닥
어디쯤을 안다고 덜컥 꽃인가?
독재자에 의한 독재자를 위한 선거가 있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지금도 반복된다.
그보다 흔한 것은 상전만 바뀌는 선거
국민이 주인이라고 예의 바르게 말하면서
주인들의 합법적 상전이 되기 위해 치르는 절차
정말 그런가? 선거가 민주주의 꽃인가? 그렇다면
꽃을―― 따러 오는,
꽃만―― 따러 오는,
줄 댄 채 차례 기다리는 저 예비 상전들로부터
어떻게 꽃을 지킬 것인가?
2
압니다. 불경한 질문이죠. 투표 후 인증 숏을 교양이라 여기는 시절이니까요. 민주시민의 교양―― 이제 싫습니다. 돌이켜보니 방만 바꾸면서 육십년이군요. 지지하는 정당이 없어도 투표는 해야 하고, 최악보다 차악이 낫고……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차악과 최악 사이를 오가는 일은 결국 최악의 되풀이로 돌고 돌더군요. 육십년을 겪었으면 이제 다른 정치를 상상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모두가 투표를 안 해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한 들풀들 등골만 휜다면 정당 정치가 아니 다른 정치를 꿈꾸어야 하지 않나. 정당 몇개가 핑퐁 하며 챙겨가는 거액의 국조 보조금이면 훨씬 가치 있는 새 판을 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꽃을 품은 풀들이 저마다의 향기로 대화하는 들판의 정치를. 깔린 판 위에서 합법적으로 놀아야 민주시민이라고요? 내 직업이 시인이라 다행입니다. 직업병이려니 하세요. 나는 이제 깔린 판에서 내려갈 거니까. 그런데 말이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합법한 그 판은 애초에 누구의 이익을 위해 누가 깔았습니까? 합법의 꼭짓점엔 누가 있습니까?
3
벗이여, 이제 내게 인증 숏 보내지 말아요
들풀의 일렁임이 새 상전 모시기에서 끝나는 걸 보는 일이 이제 너무 괴롭습니다
들판의 정치가 시작될 때까지
나는 꽃에게 투표할래요
나무에게 강에게 바다에게
태어나 누구에게 한번도 피해 주지 않고 죽어선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는 돼지에게 소에게 닭에게
가진 것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진짜 사랑을 실천하는 개와 고양이에게 투표할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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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시에 투표하고자 합니다. ^^
사실 내용이야 뻔한 것인데........
시적으로 이렇게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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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구장창 시골이야기만 나오는 박성우 시집을 두 권 읽고나서
김선우 시인의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을 읽는데........
구수한 된장찌개 먹다가 기발한 서양음식 먹는 느낌이랄까,
두 시인의 시풍이 너무나 다른 느낌이라.......
시가 시인에 따라 이렇게나 다를 수 있구나 새삼 느끼게 됩니다.
김선우 시인은 언어를 사용하는 감각이 참 재기발랄하네요.
거침없는 당당함과 용기도 느껴지고,
문제의식과 반골의 기절도 있어보이고, 불교 공부도 좀 한 것 같습니다.
제게 없는 것, 제가 배울 게 있는 것 같아 차차 그녀의 시집을 다 읽어보려 합니다.
첫댓글 비판시 재미있게 쓰셨네요 저도 이 시에 한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