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절 욥도 이전에는 고난당한 사람을 만나면 ‘불행은 죄의 결과’라고 가르쳤고, ‘회개하면 고통이 사라지고 회복될 것’이라고 격려했습니다. 도덕질서가 공고하고 보응의 법칙이 어김없이 작동하는 세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까닭 없이 재난을 겪으면서 기존의 신념과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오는 당혹감이 생일을 저주하고 죽음을 동경하는 말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욥에게 기존 신념에 머물라고, 자신에게 불행을 초래한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것만이 ‘경외함’이고 ‘온전한 길’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경험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좁은 식견으로 욥의 삶을 규정하려 했습니다. 이는 욥을 더 괴롭게 할 뿐이었습니다.
7-11절 엘리바스는 보응의 법칙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망하는 경우가 없고, 악인은 제아무리 사자처럼 위세를 떨쳐도 하나님의 징벌에 허망하게 꺾인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자연재해, 질병, 폭력에 의해 까닭 없이 희생되는 욥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예외를 지우고 제 생각대로 세상을 단순화했습니다. 일종의 ‘확증 편향’(確證偏向)입니다. 예외성을 알지 못하고 특수성에 주목하지 않으면 세상도,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도 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12-21절 엘리바스는 환상 중에 받은 계시를 들려주는데, ‘사람이 하나님보다 의롭거나 깨끗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천사보다도 못한 인간을 신뢰하거나 존중하지 않으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의로운 체하지 말고, 재난을 징벌로 받아들이라’는 압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시는 온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께 비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욥을 믿으셨듯이(1:8; 2:3) 사람을 믿으시며, 인과율에 갇힌 하루살이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창 1:27)으로 여기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십니다’(시 8:4,5). 엘리바스가 본 환상은 자기 생각을 투영하여 왜곡한 반쪽 진리였습니다.
첫댓글 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욥에게 정죄하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모습이 딱 저의 모습입니다 친구의 환난을 두고 그의행실을 비난했고 내가보기에 안좋은 일들을 행하고 있을때 분명 하나님께서 다스리실꺼라 속으로 확신하고는 했습니다 그친구의 아파트시세가 한없이 치솟자 반값으로 떨어질것을 예상하곤 했었습니다 아버지 이게 나의 모습입니다 그친구도 아버지가 무지하게 사랑하는 자녀인데 아버지께서는 돌이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중인데 저는 아파트매매가가 내려가길 바랫고 사업이 곤란에 빠지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내가 그친구의 엘리바스같은 친구였네요
아버지 저는 진흙입니다 만들어지다 잘못되면 다시 만드셔서 아버지나라에 쓰임받는 그릇으로 잘 다듬고 잘 만들어 주옵소서 강도 맞은 자의 진실된 친구로 살수있게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