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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에서 조국 독립 이끈 정치가로 활약
피아노를 연주하는 파데레프스키. |
폴란드의 자유화 여정
지정학적으로
중부 유럽에 위치한 폴란드는 주변 열강의 침략과 전쟁을 많이 겪으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해온 나라다. 특히 독일·소련과의 악연은 우리와
일본의 관계에 견줄 만하다. 대체로 약소국 이미지가 강하나 꼭 그랬던 건 아니다. 한때 중세의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인
‘그룬발트(Grunwald) 전투’에서 튜턴 기사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둬 일대에서 강력한 맹주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폴란드의 역사는 기구했다. 13세기 몽골·스웨덴 등의 침략을 받았고, 18세기에는 불안한 정국과 질서 회복을 빌미로 프러시아·오스트리아·러시아
3국에 분할 통치를 받는 암흑기를 거쳤다. 20세기 들어 나라를 되찾았지만 이 또한 잠시였다. 곧 독일과 소련의 군화에 짓밟힌
것이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수도 바르샤바는 무려 다섯 번이나 불길에 휩싸이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은
격렬하고도 끈질긴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잿더미 속에서 바르샤바를 다섯 번 모두 재건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폴란드가 자랑하는 피아니스트 3인방. 왼쪽부터 쇼팽·파데레프스키·루빈스타인. |
조국의 독립을 이끈
피아니스트
폴란드의 자유화 과정에서 반드시 조망해야 할 위대한 음악가가 있다. 대부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피아노의 시인 ‘쇼팽(Chopin)’을 떠올릴 것이다. 쇼팽은 러시아의 억압에 항거하는 폴란드의 민족정신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몸은
프랑스에 있지만 심장만은 폴란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조국을 끔찍이 사랑한 음악가로도 유명하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쇼팽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조국의 독립을 직접 이끈 피아니스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다. 천부적인 작곡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자선가에 독립운동가였으며, 정계에 진출해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러시아에 시달리는 국민을 보며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12살이 되던 해 바르샤바음악원에 입학해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고, 동시에 강사로 활동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결혼 후 부인의 돌연사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작곡 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이때 러시아의 피아노 거장 안톤 루빈스타인을 만나 많은 영감을 받는다. 이후 비엔나·파리에서 내공을 쌓고, 영국으로 건너가 여왕으로부터 ‘신성한
연주’라는 극찬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미국으로 진출한 후에는 카네기홀을 필두로 전국 순회공연을 하며 부와 명성을 얻었고,
재혼에도 성공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거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공연하던 중 1908년 백악관의 초대로 루스벨트 대통령과 만났고, 이는 훗날
정치·외교적인 감각과 재능을 키운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10년부터는 자선기금 마련을 위해 유럽 콘서트를 다녔다. 같은 해 사재를
털어 폴란드 크라쿠프시에 기증한 ‘그룬발트 전투 기념비 제막식’에서 15만 청중에게 한 연설을 시작으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그룬발트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는 그가 고통받는 국민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이후 콘서트 때마다 조국 독립과 구제기금 조성을 위한 연설을
병행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스위스로 건너가 ‘범폴란드구제위원회’를 이끌었고, 영국·프랑스·미국 등지에서
로비·공연·연설을 이어갔다. 1916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초청으로 백악관 공연 당시에는 혼이 담긴 연주와 연설로 청중을 매료시켰고, 그
자리에서 윌슨으로부터 폴란드의 전후 처리 자문을 요청받았다. 그리고 1918년 윌슨은 ‘폴란드 재건’이 명문화된 14개 조항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했다.
조국으로 금의환향, 다시 피아니스트로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123년 동안 애타게 원했던 독립을 맞이했다. 조국으로 돌아온 파데레프스키는 국민 영웅으로 칭송됐고, 국무총리와 외무장관 직책을
수락했다. 1919년 전후 처리를 담은 베르사유 조약에 최종 사인을 한 뒤 “맡은 바 사명을 다했다”고 판단해 정부 요직을 사임한 그는
피아니스트로 돌아갔다.
1923년 다시 선 카네기홀은 물론 세계를 순회하며 자선공연을 재개했는데 가는 곳마다 뜨거운 찬사와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폴란드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강점됐다. 그는 다시 스위스에서 망명정부의 수장이 돼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했다.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그해 6월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거행됐고,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리고 유언에 따라 조국이 독립을 되찾은 이듬해인 1992년 바르샤바 왕궁 성당의 납골당으로 옮겨졌다. 사후 51년
만의 일이었다.
1910년 그룬발트 전투 기념비 제막식에서 연설하는 파데레프스키. |
조국을 사랑한 피아니스트의 나라
사실
폴란드는 피아노와 아주 관련이 깊다. 정확히 말하면 ‘조국을 끔찍이 사랑한 피아니스트의 나라’다. 19세기엔 쇼팽이 그랬고, 파데레프스키가
그랬다.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추앙받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Rubinstein)’ 역시 나치에 입당·협력했다는 이유로 지휘자
‘카라얀(Karajan)’과의 협연을 죽을 때까지 거부했다. 사진=필자 제공
<윤동일 북극성안보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