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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구세주의 찬란한 별빛을 뵙고자 한다면...
다들 요즘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으십니까?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니 서민 경제도 바닥이고,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자영업자들, 서민들 다들 힘들어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언제 어디서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만사형통할 때도 함께 하시지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때도,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토록 어려운 국면에 처한 우리 현실 안에도 주님께서는 반드시 함께 하시며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끌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꼭 그렇게 될 것을 믿고, 기도하는 대림시기 보내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 아래쪽 숙소 거실 천장에 배관에 문제가 생겨서, 수리를 끝낸 다음, 도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 부르면 인건비 엄청나서 혼자서 살살 하고 있었는데, 늦게 피정에 도착하신 분이 문을 확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열심히 도배하고 있는 저를 보신 형제님이 대뜸 묻습니다. “관리장님 되시나요? 제가 좀 늦었는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제가 활짝 웃으면서 “네, 잘 오셨습니다. 제일 꼭대기 성당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강의 시간이 되서 대충 일 마무리 하고 옷 갈아입고 강의하러 갔더니 아까 그 형제님 깜짝 놀라시며 미안해하셨습니다.
저는 올해로 수도 생활 40년 째인데...돌아보니 수도원 안에서 늘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쾌적한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주로 일을 했고, 매일 하는 일이 회의하고 결재하고 6개년 계획 짜고..
그런데 5년 전부터 피정 센터 와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궂은 일들, 잡일들을 기쁘게 하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높은 곳에만 있었던 것에 대해, 하느님께 형제들께 송구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가장 힘든 일을 찾고, 공동체 안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있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은혜로운 일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인생의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청소노동자들의 고충도 알게 되고 주방 노동자들의 노고와 그런 일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다시 성탄 준비하고 있습니다. 탄생하실 주님을 더 깊이 뚜렷이 뵙고 싶다면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휘황찬란한 밝은 곳이 아니라 심연의 어두운 아래로 내려서야 합니다.
구세주의 찬란한 별빛을 뵙고자 한다면,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번화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어두운 밤길을 지속적으로 걸어야 합니다.
깊어가는 대림 시기 흥청망청 술잔치, 말잔치을 줄이고 좀 더 자제하고 좀 더 청빈한 삶을 추구하고, 그래서 생긴 여유분을 가난한 이웃과 적극적으로 나눌 때, 아래에 있는 이웃들을 기쁘게 찾아나설 때, 그 자리에 아기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탄생하실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물의 세례를 받지 않고 불의 세례를 받으면 벌어지는 일>
복음: 루카 3,10-18
어떤 사람이 그릇 빚는 노인의 숙달된 솜씨와 작업대 위에 얹혀있는 갓 빚은 옹기들에 대하여 감탄하면서 감상했습니다. 모두가 근사하고 멋있는 모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옹기장이의 그 모든 수고가 헛되이 끝나 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옹기들이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 일부 그릇들이 금이 가고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왜 어떤 것들은 금이 가고 깨어지는지 알기 위해 옹기장이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습니다.
“같은 흙을 사용하면서 당신이 어느 것은 잘 빚고 어느 것은 못 빚었습니까? 아니면 어느 것에다가는 더 수고를 기울이고, 어느 것에는 수고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릇 만드는 과정에서 어느 것에는 어떤 재료가 부족했습니까?”
옹기장이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옹기가 손상되는 이유는 그 그릇들이 불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물의 세례와 성령의 불의 세례를 말합니다. 물의 세례란 무엇일까요? 그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와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올바른 삶을 일일이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물의 세례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께 파견된 자에게 순종하려는 의지’.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불의 세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루르드에서 성모님은 베르나데트를 당신 대리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베르나데트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면 그들이 베르나데트가 손으로 파서 솟아 나오는 기적수의 효과를 볼 수 있었을까요? 믿음이 없어서 그 물을 마셔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의 능력을 믿지 않고 교회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성체성사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교회를 믿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밀떡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오게 될 것임을 믿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성체성사를 하더라도 효과가 없습니다. 효과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가리옷 유다처럼 그 불을 감당할 수 없어 몸이 터져버릴 수 있습니다.
전에 하루도 빠짐없이 뽀뽀하고 자려는 의지로 80년 결혼생활 동안 한 번도 싸우지 않은 부부의 사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의지 없이 결혼이라는 불의 세례는 오히려 두 사람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에 먼저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체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1943년, 미시시피의 한 감옥에서 클로드 뉴먼이라는 청년이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죄목은 매복하여 한 남성을 총으로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형을 앞두고 그는 다른 죄수의 목에 걸려 있는 메달을 보게 되었습니다. 클로드는 그 메달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 죄수는 화를 내며 메달을 땅바닥에 던지며 말했습니다. “가져가라.”
그 메달은 기적의 메달이었고, 클로드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는 누구를 상징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메달을 집어 기 목에 걸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손목을 누군가가 건드리는 것 같은 느낌에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그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빛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은 두려움에 떨던 클로드를 진정시키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어머니로 모시고, 내가 너의 어머니가 되길 원한다면, 가톨릭 신부를 부르도록 하여라.”
클로드는 자신이 유령을 본 것으로 생각하며 곧바로 가톨릭 신부를 불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튿날 교정 사목 신부인 로버트 오리어리가 클로드를 만나러 왔습니다. 오리어리는 문맹이었던 클로드가 이미 성모님께 배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성모님께 서약했던 내용까지 알고 있음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클로드는 세례를 받고 사형당했지만, 기쁘게 주님 곁으로 갔고 이후 기적과 같은 일들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는 클로드를 사제에게 보내 당신에 대해 더 알게 하시고 교회를 통해 성사에 참여하며 당신께 나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현대의 세례자는 가톨릭교회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3,10-18: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엄격한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키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즉 오시는 분은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16절)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16절)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을 맞이하는 것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 ‘손에 키를 드시고’(17절) 심판하시는 ‘심판관’이시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심판이란 말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야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이다(참조: 요한 3,17).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엄한 윤리적인 경고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 그리고 많든 적든 우리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고 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11절).
군인이든 세리이든 어떤 사람이건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행동하느냐, 특히 사랑으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매일 행동하고 말하는 가운데 항상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마음을 밝혀주고 있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매 순간의 생활에서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순수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무슨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며 활동하는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즉 그분의 대림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제2독서: 필립 4,4-7: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필립비서는 처음부터 함께 사는 기쁨,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하는 기쁨, 그리고 믿음에 관한 기쁨 등에 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진다(필립 1,4.18.25; 2,2.17.18.28.29; 3,1; 4,1.4,10 참조). 그것은 주님께서 ‘오심’이 내가 당하는 고통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통’안에 이미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고통 중에 있는 바로 그 때가 내 옆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고통과 궁핍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6절)아뢸 때,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7절)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스며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쉽게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극적인 사건이나 고통을 통해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자신을 잊어버릴 줄 아는 능력에서 생겨난다. 특히 고통 속에서 우리는 그 때를 바로 은총의 때로 체험하는 경우가 많다. 그 때가 은총의 때이기 때문에 고통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당에는 다닌다고 하여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다는 말만 한다. 성당에서 또 피정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강론을 많이 듣는다고 하여도 그래서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구체적인 나의 삶 속에서 그것이 의미를 갖고 실천되지 못하면 우리의 귀는 한없이 수준이 높아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기쁨을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쁨이나 행복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줄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만들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항상 기쁨을 만들려 노력하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쁨은 기도이고 굳셈이고 사랑이며 사랑에 대한 갈증이다. 기쁨으로 우리는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의 표시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은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를 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망각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슬픔도 여러분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십시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지금은 본당신부라서 외부 강의를 나가지 않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강의 청탁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돈이 없어서 강사료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오시는 분들 생각해서 강의해 주십시오.”
갈까요? 안 갈까요? 당연히 갑니다. 제가 필요하다는데 당연히 가야 합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가고, 또 즐겁게 강의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소품을 준비하거나, 선물 같은 것은 준비하지 않습니다(무조건 나눠주기에는 제가 그렇게 부자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희가 신부님 강사료로 ***원 잡았습니다. 강의해 주시겠습니까?”
강사료 액수가 상당히 컸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 갖가지 배려를 해 주십니다. 갈까요? 안 갈까요? 역시 당연히 갑니다. 이 강의를 위한 준비를 아주 열심히 합니다. 이런 강의를 해달라면서 부탁하면 어떤 부탁이든 다 맞춰줍니다. 또 어떻게 하면 강의 듣는 분에게 도움이 될지 오랫동안 준비합니다. 완전히 다른 강의를 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돈 때문일까요?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강의했다고 저에게 특별한 이득이 있지 않습니다. 강사료는 강의 때 나눠드리는 선물값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어려운 곳이나 필요한 곳에 모두 보냅니다. 특별히 돈 쓸데도 없고, 가지고 있어 봐야 욕심만 커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 경우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를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인정한다고 생각하니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상대가 인정하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고 있다는 것만 해도 우리를 사랑하고 인정하신다는 표시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하시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면서 배려해 주시는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고 있나요?
벌써 대림초의 불이 세 개나 켜졌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모든 이를 위한 정확한 규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고자 한다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며, 아무에게도 빼앗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면서 겸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 인정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그 인정에 보답하기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끊임없이 요구만 하면서, 주님의 인정과 사랑에 반대되는 행동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우리는 우리가 행복해지려고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에이브러햄 링컨).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우리가 실천하지 않는 자비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의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척도는 자비입니다.
자비로운 사람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여정을 걷게 됩니다.
자비야말로 수많은 덕들의 기본이며 핵심입니다.
자비롭지 않으면서 정의로운 사람이라 말하지 마십시오.
정의 실천도 자비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먼저 자비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면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 못됩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은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자신의 안위와 기득권만 생각하고
자비와는 거리가 멀고
불의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의로 가득 찬 사람은 사악한 사람입니다.
더러운 영으로 더럽혀진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곳간에 들어가는 알곡은 되지 못해도
불에 태워질 쭉정이 처지는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주님께서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4-18ㄱ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4,4-7
형제 여러분,
4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0-18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10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