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우크리아나 대통령은 7일 파리에서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식 참석 직전, 마르롱 대통령의 배려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와 만났다. 세 사람은 30분간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솔직히 30분간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심도있게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시간이 짧다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하고 헤어지지 않았을까. 또 각자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선택적으로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파리에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제의로 3자 회담을 갖기 전 악수를 나누는 트럼프 당선자와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사이트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9일 지나간 주말을 정리하는 기획 기사 중 '우크라이나에 관한 트럼프의 첫 발언. 무슨 뜻인가요? (Первые заявления Трампа по Украине. Что они означают?)라는 코너에서 "짧은 만남(30분)에서 어떤 중요한 것도 논의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얼굴에서 특별한 열정을 찾아볼 수 없었고, 서방 언론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자는 애초에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그를 설득했다"고 전했다.
만남은 짧았지만, 그 후유증은 길게 이어지는 것 같다. 스트라나.ua는 "트럼프가 미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처음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정책 구상을 여러 가지 밝혔다"며 상반되는 두 사람의 발언을 비교, 분석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이 처음에는 다소 절제된 표현으로 트럼프 당선자와의 만남을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우크라이나) 국민, 최전선 상황, 우크라이나의 정의로운 세계에 대해 (트럼프 당선자와) 이야기했다. 우리는 모두 이 전쟁을 가능한 한 빠르고 공정하게 끝내기를 원한다. 트럼프 당선자는 늘 그렇듯이 결단력이 있고, 우리와 계속 함께 하기로 했다".
이같은 그의 조심스런 언급과는 달리, 트럼프 당선자는 특유의 공격적 자세를 내보였다. 이튿날(8일) 그는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인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을 통해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는 거래(협상)하고, 이 미친 갈등(전쟁)을 멈추고 싶어한다"며 "그들은 40만 명의 군인과 더 많은 민간인을 잃었다. 즉각적인 휴전과 협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러시아를 향해 "나는 블라디미르 (푸틴)를 잘 알고 있는데, 이제 그가 행동할 때"라고 촉구했다.
즉각 휴전이 필요한 명분으로는 "너무 많은 생명이 헛되이 죽어가고, 너무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있으며, 이게 계속된다면 훨씬 더 크고 끔찍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는 또 “세상이 지금 좀 미쳐가고 있다. 인명 손실이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40만명, 러시아 측에서는 60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전세계 주요 언론은 트럼프 당선자의 발언을 바탕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려고 한다고 타전했다. 우크라이나인들도 그렇게 알아 들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우크라이나의 대(對)러 강경 세력(전쟁 지지파)도 놀랄만큼 차분하게 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협상은 곧 부끄러운 항복' '마이단으로 가자(반대 시위)' '협상 내용을 모두 공개하라' 등 협상에 반대하는 선동 발언이 강경 활동가들과 민족주의 성향의 군부 내에서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대러 강경파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1991년 국경(크림반도 수복 등 소련 해체 당시의 국경/편집자)을 회복하지 않고 전쟁을 끝내기로 한다면, 당장 그의 퇴진을 요구할 것이라는 전망이 그동안 유력했다.
젤렌스키-마크롱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자/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반발?
극적 반전은 젤렌스키 대통령에 의해 이뤄졌다. 그는 이날 SNS에 “(푸틴 대통령도 말했듯이) 보장 없는 휴전은 언제든지 다시 불 붙을 수 있다"며 "(트럼프 당선자가 지적한) 우크라이나인의 손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막으려면, 세계가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외면하지 말고, 신뢰를 줘야 한다"고 썼다. 그는 러시아와 '협상'하고 전쟁 종식 준비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날(9일)에는 작심한 듯, 트럼프 당선자와의 만남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숄츠 총리보다는 우크라이나 지원에 더욱 적극적인 독일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의 총리 후보인 프리드리히 메르츠와 회담 후 기자들과 가진 자리에서다.
“우리는 세계 어느 누구보다도 전쟁의 종식을 원한다. 외교적 종식도 가능하고, 그것을 원한다. 그러나 나는 마크롱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자에게 푸틴 대통령이 전쟁 종식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강조했다. 협상을 하기 전, 전장에서는 강력한 군대와 무기들이 필요한데, 바로 에이태큼스와 (독일의) 타우러스, 스톰 섀도 등과 같은 장거리 미사일이다. 우리는 이 무기들이 정말 정말 필요하며,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우리에게는 나토 가입과 같은 안보 보장도 필요하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는 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문제가 된다면, 마크롱 대통령과 다른 유럽 정상들이 이전에 언급한, 서방 군대의 우크라이나 배치 문제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후 그는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바이든 미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초청을 요청할 것"이라며 "트럼프 당선자는 아직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썼다. 트럼프 당선자에게는 도발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발언이다. 트럼프 당선자에게 영향력이 큰 것으로 알려진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즉각 그의 발언에 뚱한(?) 이모티콘으로 응수했다.
나토 가입 초청을 바이든 대통령에게 요청하겠다는 젤렌스키 대통령 발언에 일론 머스크 태슬라 CEO가 응답한 이모티콘/캡처
파리 3자 회동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의 언행을 보면, 트럼프 당선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젤렌스키 대통령의 본심이 드러난다. '평화적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지만, 국가 안전 보장이 전제 조건'이라는 것. 안보는 나토에 가입하거나 서방 군대의 우크라이나 배치로 확보된다는 주장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그동안 주창해온 우크라이나 평화안과 별로 다를 바 없다. 트럼프 당선자로서는 헛물(?)만 켠 것으로 보인다.
스트라나.ua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파리 3자 회동에서 전쟁을 동결(휴전)하지 말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늘리고 공식적으로 나토에 초대할 것을 제안한 것"으로 해석했다. 겉으로는 우호적이지만, 파리 회동이 그런 분위기로 일관되게 흐른 것 같지는 않다고 짚었다.
파리 회동 이후, 러시아는 트럼프의 발언을 신중하게 연구하겠지만, '푸틴 대통령과의 협상을 금지하는' 우크라이나의 법령을 취소하는 게 먼저라고 주장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또 우크라이나의 중립화를 명시한 (2022년 3월의) 이스탄불 협정을 근거로 협상이 진행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외국 군대의 우크라이나 주둔에는 거듭 반대 입장을 밝혔다.
러시아의 협상 조건은 지난 6월 푸틴 대통령이 직접 제시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중립화및 비나치화, 러시아에 합병된 4개 주(도네츠크 루간스크 자포로제 헤르손)에 대한 국제적 인정, 서방의 대러 제재 해제 등이다. 당시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를 최후통첩이라며 거세게 반발한 바 있다.
◇더욱 분명해진 트럼프의 대우크라 정책
파리 회동으로 트럼프 당선자의 대(對)우크라 정책은 보다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내년 1월 20일 트럼프의 취임 뒤에는 미국의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뀔 전망이다.
그는 당선후 처음으로, 또 자신의 목소리로, '즉각 휴전'을 통해 전쟁을 끝내는 게 자신의 목표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전쟁 종식에는 최전선에서 휴전하더라도, 지루한 협상과 구체적 합의가 필요한데, 그는 '즉각적인 휴전'을 강조했다.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지원국인 미국의 차기 지도자가 1991년 국경으로 러시아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우크라이나측 평화안을 첫 단계부터 거부한 것이다.
특히 트럼프 당선자는 전쟁을 시작한 푸틴 대통령을 대놓고 비난하지 않고, '미쳤다'는 두루뭉실한 표현을 쓰고,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에만 주목했다. 우크라이나 측의 손실을 '어리석은 일'이라고도 했다. 그는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를 따지지 않고 전쟁 중인 양쪽을 동일시한 것이다. 트럼프 당선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는 시각을 단적으로 내보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트럼프 당선자와 마크롱 대통령, 젤렌스키 대통령 간의 3자 회동/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그의 이같은 정책 방향성은 최근 워싱턴을 방문한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장이 트럼프 팀(정권 인수위)와 가진 협상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협상에서 예르마크 실장은 우크라이나군이 전쟁 전인 2022년 2월 국경에 도달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이뤄질 때가지 계속 싸울 것을 제안했지만, 트럼프 팀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는 게 미국 언론의 보도다. 두 가지 제안 모두, 러시아가 받아 들이지 않으니, 수용할 수 없다고 선을 그은 셈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팀은 러-우크라가 수용할 수 있는 전쟁 종식 방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어느 정도 하고 있을까? 또 양측이 끝끝내 트럼프 측의 조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 수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할까? 중단할까?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까? 달랠까?
이에 대한 해답은 NBC 방송과의 8일 인터뷰에서 엿볼 수 있다. 트럼프 당선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수 있느냐'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물론이다"라고 대답했다.
당장 우크라이나 안팎에서는 트럼프의 취임 전에 휴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아레스토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고문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현 상태라면 이르면 1월 25일(취임 닷새후)에 휴전이 선언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당선자는 파리 회동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취임 전까지 (영토를) 원하는 만큼 가져가라, 대신 그 이후에는 중단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 것으로 그는 해석했다. 나아가 미국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 양측에 강력한 압력을 가할 것이기 때문에 늦어도 내년 봄까지 휴전이 이뤄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친러시아적인 트럼프 당선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30분간의 짧은 만남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전쟁 종식안에 대해 운명적인 '선택'에 쫓기는 처지에 더 빠져든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