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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묵상글 ( 부활 제4간 화요일. - 문을 넓혀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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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부활 제4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문을 넓혀야
뜬금없는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유대교 신자가 결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구약성서가 훌륭하고 그 성서가 얘기하는 하느님이
저의 신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해도 유대교 신자는 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이 되지 않겠다는 뜻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극단적인 선민사상과 시오니즘의 유대인과 유대교는 글러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신 것은
이사야서가 얘기하듯 모든 민족을 당신께 모아들이기 위해서인데
잘못된 선민사상과 시오니즘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하느님의 백성이고,
다른 족속은 하느님 백성이 아니기에 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것이 드러난 것이 어제 사도행전의 얘기입니다.
베드로가 할례받지 않은 이들과 식사를 한 것을 두고 비난을 한 것 말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어제 이런 말씀들로 아주 적절한 대처를 하였지요.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올바른 유대교는 같은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엘닷과 메닷은 70인 장로가 아니고 그리고 만남의 장막 밖에 있었는데도,
다시 말해서 만남의 장막 안에 장로들과 같이 있지 않았는데도
주님의 영을 받았고 그래서 여호수아가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자
모세는 그것을 질투해서는 안 된다고 한 다음
차라리 모든 사람이 주님의 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제 베드로 사도도 같은 맥락으로 사람들의 말문을 막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의젓하고도 올바른 대처 덕분에
그리고 이 말은 들은 사람들의 동의 덕분에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갇히지 않고 그리스도교가 될 수 있었는데
오늘 사도행전은 초대 공동체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되는 과정을 얘기합니다.
스테파노의 박해로 흩어진 이들이 안티오키아의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합니다.
이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 사도들의 교회가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파견하고,
바르나바는 타르수스로 가 사울을 데리고 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데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라고
오늘 사도행전은 전합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니다.
흩어져 안티오키아에 간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그리스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전히 유대교로 머물러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를 극복한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을 우리가 나만 또는 우리만 드나드는 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문을 열어야 하고 닫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교황님께서 동성 커풀을 비전례적으로 그러니까 사목적으로 축복하는 것을
허용하신 것 때문에 비판과 반대를 하거나 혼란을 겪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 의미는 축복을 청하는 이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교회가 열려있어야 하고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결합이 정상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축복을 청하는데도 너희들은 비정상적이기에 축복해줄 수 없다고,
반대로 너희들은 축복 대신 저주받아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합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결합을 전례적으로 축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원하고 청하는 사람을 사목적으로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라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리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며 좋다고 축복하신 피조물을 누구도
축복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우리는 이해의 폭을 넓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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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순시기에 정말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외부 강의도 많았고, 특히 본당에서 성삼일을 보내면서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활 대축일 성야 미사를 끝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딱 일주일만 아프고 싶다.’
놀라운 것은 다음 날부터 아픈 것입니다. 우선 고개를 돌리기 힘들 정도로 목이 너무 아팠습니다. 아파서 좀 쉬어야겠다 싶었지만, 계속 일정이 있어서 쉴 수 없었습니다. 아픈 목을 부여잡고 억지로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괜찮겠지’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 금요일부터는 목감기가 찾아왔습니다. 말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몸 곳곳에 찰과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일주일만 아프고 싶다는 말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파도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더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자.”
우리 신앙인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주님께 하는 헛된 맹세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주님께서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내게 필요한 대로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당신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을 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양이 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주님의 양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주님을 이끄는 것이 아닌, 주님이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뜻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주님을 뜻을 먼저 찾고 실천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때 영원한 생명을 받을 자격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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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모두를 믿지 말고 가치 있는 이를 믿어라. 모두를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고 가치 있는 이를 신뢰하는 것은 분별력의 표시이다(데모크리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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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성전봉헌축제’ 때 벌어진 유다인들과의 논쟁을 들려줍니다. 이날 벌어진 논쟁의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성전 안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신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라고 도전적인 태도로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그러나 그들은 믿기를 원하지 안했으며, 예수님의 양들이 되기를 원하지 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여기에서, 양의 특성을 ‘듣다’, ‘알다’, ‘따르다’, ‘준다.’ 라는 네 개의 동사를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듣다”라는 말에는 ‘더 깊이’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곧 ‘마음으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듣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인 내면적인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인격적인 교류를 뜻합니다.
그리고 “알다”라는 단어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성소의 길은 말씀을 듣고 ‘체험’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을 바꾸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를 넘어서, ‘곁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곧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동사는 모두가 관계를 깊이 맺는 진실 된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듣고 순명하는 진정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그렇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곧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채 갈수는 없지만, 자칫 스스로가 자유로이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주님!
오늘도 당신은 제 온 몸에 당신 손 떼를 묻히십니다.
제 손을 꽉 붙들고 놓치지 않으시려 손깍지를 꼭 끼십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허리를 감싸 안으십니다.
제가 당신께 소중한 존재인 까닭입니다.
진정, 저는 당신의 것이며,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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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담는 그릇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입니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릇의 이름이 달라집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앎의 또 다른 시작입니다.
유다인들은 눈앞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메시아 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메시아다, 구세주다’라는 생각이 그릇된 ‘메시아 상’을 만들고 결국은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때로는 아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설명이 분명할수록 그들의 고집은 더욱 굳어질 따름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가고, 유다인들은 유다인들의 길을 갈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농사를 짓는데도 ‘농사법’을 끊임없이 개선하지 않으면 더 큰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 방법을 고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패를 통해서 다시 방법을 얻게 될 것입니다. 품종개량도 하고 거름을 주는 시기도 바꿔보고....새 방법을 시행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게 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순종으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5,8).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된 예수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사도들이 말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5,29).
시편을 보면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139,2-3).라고 적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는 분에게 나를 온전히 맡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1,7).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아는 바가 주님을 섬기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예수님께대한 신앙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남아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은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잘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 일치를 이루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구원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지니셨지만 하느님이십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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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부활 대축일 미사 때입니다. 3시 미사를 마치고 한숨을 돌리려고 했습니다. 한 자매님이 아이 셋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들이 첫영성체는 했는데 아직 첫 고백을 못 했다고 합니다. 제게 고백성사를 줄 수 있는지 부탁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고백성사를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고백성사를 주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젊은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고백성사를 보는 줄 알고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젊은 부부는 다른 사연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개신교회에 다닌다고 합니다. 시어머니는 한국에서 성당에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사연은 ‘아이’였습니다. 시어머니는 성당에 찾아가서 신부님에게 안수받으라고 했습니다. 젊은 부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거절할 수 없었고,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성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저는 젊은 부부를 위해서 안수를 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와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젊은 부부도 성당이 밝고, 깨끗해서 좋다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어머니와 젊은 부부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신앙은 ‘갈망’에서 시작되고, ‘감사’에서 성장하고, ‘기도’로 꽃을 피우고, ‘나눔’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 시작은 ‘갈망’입니다.
속담에 ‘평안감사도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돌보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계명을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잘못된 길을 갈 때는 ‘예언자’를 보내 주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유대인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공정과 정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을 위해서 ‘외아들’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제 외아들의 말을 듣고, 외아들을 믿으면 유대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거지가 동냥 통을 버린다는 말처럼 계명을 어겼고,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평안감사도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처럼 유대인들은 굴러들어 온 복을 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메시아이심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말하였다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 주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말씀을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178년 전입니다. 관리들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당신이 천주교인이요?”라고 물었습니다. 천주교인이라고 인정하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길 수 있었습니다. 박해를 받아서 감옥에 갇힐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까지 모진 고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당당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요.” 조선의 첫 번째 사제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천주교인이라고 말하였고, 사제생활 1년 만에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신부님의 나이는 25살이었습니다. 천주교인이라고 이야기하였던 신부님은 이 세상에서는 비록 짧은 삶을 사셨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말과 행동으로 천주교인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모진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연 우리는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주교인으로서 말과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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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그분과 나는 하나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한 자부심과 긍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광과 기쁨만을 함께한 관계가 아닌, 고통과 고난의 길도 함께 걸은 관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부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라는 말의 의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서로의 영광만을 보는 사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혼인 전에는 서로의 영광만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좋은 것을 보여 주려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혼인 후에는 다릅니다. 혼인이라는 문을 통과하면 영광도 함께 고난도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난을 원하지 않고 영광만을 원한다면 그래서 상대의 고난을 외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혼인은 분열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 주님께서 계시고 주님의 모든 것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것이 고난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표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랍니다. 부활이라는 선물을, 영원한 생명을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없습니다.
고난에 참여하십시오. 주님의 고난의 길을 기꺼운 마음으로 걸어가십시오.
그때 서야 비로소 주님과 우리가 하나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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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땡나
어느 날 미사가 끝났습니다.
그날은 유독 피곤해 보였나 봅니다.
오늘은 조금 피곤해 보이시네요.
성당 입구에서 인사를 하는 저에게
자매 한 분이 움켜쥔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안에 있는 것을 받아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두 손을 움켜쥔 손 아래로 펼쳤습니다.
이내 움켜쥔 손은 열렸고
그 안에는 신맛 가득한 비타민
‘레땡나’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신맛이 단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꼬깃꼬깃한 맛이 마음 활짝 펴는 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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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중심의 내적일치의 공동체 삶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공동의 집, 지구 만세!”
제 좋아하는 만세칠창으로 시작한 하루입니다.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이 한창인 요즘, 때가 되니 어김없이 밤마다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강론을 씁니다. 노래보다는 울음소리처럼 들립니다. 어제 4월22일은 “지구의 날(Earth Day)”이었습니다. 세기의 예언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공동의 집과 세계 평화를 위한 담대한 행위의 긴급한 호소를 반복하셨습니다. 참으로 생태적 회개가 절박한 시점입니다.
“우리 세대는 많은 부요함을 남겼으나, 우리는 지구를 보호하는데 실패하고 있고 평화를 안전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파멸로 치닫는 지구이자 우리 공동의 집의 장인들이, 관리인들이 되라는 불림을 받고 있다.”
뜬구름 잡는 막연한 영성이 아니라 발딛고 있는 땅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성찰도 밑받침해야 건전하고 건강한 영성이겠습니다. 교황님의 관심사는 하늘과 땅 전분야를 망라하고 있고 특히 공동의 집인 지구에 대한 관심은 남다릅니다. 옛 어른의 말씀도 우리의 구도 여정에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고되더라도 힘주어 뻗은 걸음이 발자국이 깊고, 느리더라도 우직한 걸음이 가장 먼곳을 간다.”-다산.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뤄지고(대기만성大器晩成)’ 큰 소리는 듣기 어렵고,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도덕경
진리 추구의 구도자라면 한결같이 소리없이 묵묵히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로 겸손히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함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삶의 중심, 공동체 중심을 새로히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사제생활 초기부터 35년동안 한결같이 강론시 강조해온 주제 말마디가 ‘삶의 중심’,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였습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를,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저절로 이뤄지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의 영원한 중심인 파스카의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공부중의 공부가, 평생공부가 이런 공동체의 중심인 예수님 공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알아가고 닮아가는 공부와 더불어 겸손과 온유가 따르고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내적일치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추구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고맙게도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통해 예수님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생략할 수 없는 내용들이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혼자는 추상이요 환상입니다. 공동체와 격리된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인 예수님이요, 혼자가 아닌 더불어 착한목자 예수님을 따르는 더불어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따르지만 획일적이 아니라 각기 고유의 자리에서 고유의 모습으로 따릅니다. 획일성의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일치임을 깨닫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에 예닮의 여정은 하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예수님을 향하지만 삶의 자리는 다 다릅니다. 내 삶이나 공동체의 내적일치는 이런 예수님과 일치와 더불어 함께 갑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내적일치와 더불어 이웃형제들과의 관계도 날로 깊어집니다. 바로 이런 심정의 고백이 요즘 자주 부르는 성가 61장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이 세상 부귀 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이 세상 모든 영예와 행복도 슬픔과 괴로움 밀려와도
영원히 주님만 의지하리.
세상 즐거움 다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
주 예수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이런 성가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래로 고백할 때 주님과의 관계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수행을 주님 사랑의 표현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삶이 영원한 생명의 삶이요, 결코 누구도 우리를 빼앗아갈 수 없는 평화와 안정(安靜)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무지와 허무로부터,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점차 해방되어 참 자유인의 삶이겠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삶의 빛나는 모범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입니다. 그가 얼마나 좋은 품성을 지닌 교회공동체의 바람직한 인물인지 다음 묘사가 입증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는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사절로 파견됩니다. 다음 단락의 묘사가 바르나바가 얼마나 사심없는 아름다운 품성에 주님과 깊은 친교의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자, 교회의 사람인지 잘 드러납니다.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주님 사랑에 기인한 꾸밈없는 순수와 열정에서 샘솟는 기쁨의 사도 바르나바요, 이런 삶자체가 그대로 사랑의 주님의 현존이요 빛나는 복음 선포가 됩니다. 이어 소외되어 외톨이가 된 사울을 타르수스에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끌어 올리니 그의 적극적 동료애, 형제애가 감동적입니다.
사울과 함께 만1년동안 안티오키아 교회에 머물며 신자들을 가르치니 바르나바는 명실공히 그리스도의 사람이자 교회의 사람임이 입증됩니다. 이때부터 안티오키아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됐다니 괄목할 만한 사건입니다. 당시 그리스도교의 4대 중심지는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로마였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의 선물과 더불어 당신 중심의 내적일치를 견고히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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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무도 빼앗지 못할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아무도
빼앗지 못할
나에 대한
당신의 믿음 앞서니
아무도
빼앗지 못할
당신께 대한
나의 믿음 따르네
아무도
빼앗지 못할
나에 대한
당신의 희망 앞서니
아무도
빼앗지 못할
당신께 대한
나의 희망 따르네
아무도
빼앗지 못할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 앞서니
아무도
빼앗지 못할
당신께 대한
나의 사랑 따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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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부활 제4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그리스도의 손이 지닌 막강한 힘
믿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도움도 있습니다. 그리고 악마는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선한 일들에서 끝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손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에서 아무도 그들을 채 가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형벌이나 고통속으로 집어 던지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손안에 있는 이들이 누구에게 채여 가 벌을 받게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손’은 권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손이 아무것도 그에 대적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하느님은 영혼을 위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일을 하시고, 그 일에 푹 빠져 계십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영혼이 숭고하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얼마나 숭고한지 주목하십시오. 나는 편지를 작성할 때, 내 영혼 자체를 본떠서가 아니라, 내 안에 떠오른 상, 곧 내 영혼 안에 떠오른 상을 본떠서 작성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그분 자신을 본떠서가 아니라,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계신 상을 본떠서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선이라든가, 지혜라든가, 우리가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속성들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을 본떠서 특별한 방식으로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영혼은 그분 안에 있는 상을 본뜸은 물론이고, 그분 자신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을 본떠서 지어졌습니다. 영혼은 실로 하느님 자신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영혼은 그분의 본성, 그분의 존재, 그분의 흘러 나옴과 동시에 안에 머무름, 그분이 거주하시는 터전을 본떠서 그분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하느님이 외아들을 낳으시고, 성령이 꽃피어납니다. 하느님은 이 흘러 나옴과 안에 머무름에 의하여 영혼을 지으셨습니다.(158)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당신은 저희 기족, 곧 남편과 아내, 자녀와 부모, 노인과 젊은이가 펑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저희가 평화에 이르는 조건을 받아들여 사랑으로 서로 희생할 때 평화는 임할 것입니다. 평화 속에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든 가족과 함께 당신을 찬미하며 감사드립니다. 그들을 축복하여 지치지 않게 하소서!
이혼과 폭력은 한창 커가는 어린이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청년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며 영적 가치가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합나다. 당신은 그런 혼란을 체험하는 이들에게 평화의 길을 가르쳐 주시나이다. 당신의 사랑은 사람들을 평화의 길로 이끌며, 당신의 능력으로 정의와 평화가 서로를 감싸 안게 되오니 감사드립니다!
(침묵 가운데 당신의 가족과 공동체, 특히 평화를 잃어버린 이들을 봉헌한다)(248)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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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3. 부활 제4주간 화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 독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기원을 전하여 줍니다.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안티오키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파견합니다.
그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나자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성장하고 생활하셨지만(인성) 동시에 그리스도이신 하느님(신성)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밝히시도록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시며 무기력한 불통을 지적하십니다.
서로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통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으며, 견제와 위협만 되풀이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상대의 소리를 알아들어야 하고(어제 복음), 그 소리를 따라야 하며(오늘 복음), 그 따름으로 상대방의 진정성과 아름다움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듣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믿고 따르며, 그 관계성을 증언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때,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처럼 아무리 “분명히” 말한다 하여도 다시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며 똑같은 의심만 되풀이하게 됩니다.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니 아무리 말하여도 알아듣지 못하고, 의심을 붙잡고 있으니 믿음도 생겨날 리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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