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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고려 高句麗/高麗 ↓ 기원전 37년 ~ 서기 668년 ↓
國旗(국기)4世紀(세기)
고구려의 군기 (쌍영총 연도동벽화, 5세기 말) / 高句麗의 軍旗 (雙楹塚 羨道東壁, 五世紀 末)
標語(표어)我是皇天之子(아시황천지자)
(天帝(천제)의 子孫(자손), (廣開土大王碑(광개토대왕비)
首都(수도) :卒本(졸본) ~(紀元前(기원전) 37년 ~ 3년)
國內城(국내성)·丸都城(환도성)~(3년 ~ 427년)
平壤(평양)(大城山城(대성산성)·長安城(장안성)~(427년 ~ 668년)
政治(정치) ~ 政府(정부) 形態(형태)~ 君主制(군주제)~(紀元前(기원전) 37년 ~ 642년)
軍事政(군사정) ~ (642년 ~ 668년)
國王(국왕) ~紀元前(기원전) 37년 ~ 紀元前(기원전) 19년, 371년 ~ 384년, 392년 ~ 413년, 642년 ~ 668년.
高句麗(고구려)를 세운 東明聖王(동명성왕)
東明聖王(동명성왕)(初代(초대)
小獸林王(소수림왕)
廣開土王(광개토왕)
寶藏王(보장왕)(末代(말대)
國相(국상) ~ 166년 ~ 179년, 294년 ~ ?
大莫離支(대막리지)~642년 ~ 665년, 666년 ~ 668년.
명림답부(明臨答夫)(初代(초대)~倉助利(창조리)(末代(말대)
淵蓋蘇文(연개소문)(初代(초대)~
연남건(淵男建)(末代(말대)
國姓(국성)~橫城(횡성) 高氏(고씨)
歷史(역사)
• 賑貸法(진대법) 實施(실시)
• 高魏(고위)戰爭(전쟁) [高句麗(고구려)-魏(위) 戰爭(전쟁)은 242년, 244년, 245년, 259년에 高句麗(고구려)와 魏(위),사이에 벌어진 戰爭(전쟁)이다.
• 漢四郡(한사군) 逐出(축출)
• 광개토경태왕비(廣開土太王碑) 建立(건립).
• 平壤(평양) 遷都(천도)
• 忠州高句麗碑(충주고구려비) 建立(건립)
• 살수대첩(薩水大捷)
• 莫離支(막리지)의 亂(난)
• 駐蹕山 戰鬪(주필산 전투)
• 安市城(안시성) 戰鬪(전투)
• 蛇水(사수) 戰鬪(전투)
• 平壤城(평양성) 陷落(함락)
194년.~242년 ~ 259년.~314년.~414년.~427년.~495년?~612년 1월.~642년.
645년 6월 20일.~645년 9월 6일.~662년 2월.~668년 9~월.
人文(인문)~公用語(공용어)~高句麗語(고구려어).
民族(민족).~濊貊(예맥).~한(韓).~靺鞨(말갈).~契丹(거란).~
人口(인구)~668년 어림, 69萬戶(만호).
宗敎(종교). 國敎(국교),佛敎(불교)(372년 ~ 643년),
道敎(도교)(643년 ~ 668년)
其他(기타) 宗敎(종교)
샤머니즘(Shamanism:病(병)든 사람을 고치고 저 世上(세상)과 意思疏通(의사소통)을 하는 能力(능력)을 지녔다고 믿어지는 샤먼을 中心(중심)으로 하는 元始(원시) 宗敎(종교)
토테미즘(Totemism:未開(미개) 社會(사회)에서 動植物(동식물)이나 自然物(자연물)을 신성시(神聖視:거룩하고 聖(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다,함으로써 形成(형성)되는 宗敎(종교) 및 社會(사회) 體制(체제以前(이전) 國家(국가) 다음 國家(국가)
夫餘(부여),沃沮(옥저),東濊(동예),樂浪國(낙랑국),東扶餘(동부여),北扶餘(북부여),北燕(북연),漢四郡(한사군),靺鞨(말갈),室韋(실위, 병음:Shìwéi)
비려(碑麗:또는 패려(稗麗)는 契丹(거란)의 한 갈래라고 여겨지는 염수(鹽水, 시라무렌 강:Shiramuren河) 流域(유역)의 遊牧民(유목민) 集團(집단)이다. 395년, 高句麗(고구려)의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이 直接(직접) 軍事(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征伐(정벌)하여 3個(개)의 부락(部洛)과 6~700個(개)의 영(營)을 무찔렀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 · 말 · 양 等(등)의 家畜(가축)을 鹵獲(노획)하였다.
지두우(地豆于)는 5世紀(세기)경 대흥안령(大興安嶺 山脈) 山脈(산맥)에서 내몽골(내몽골 자치구(몽골어: ᠥᠪᠥᠷᠮᠣᠩᠭᠣᠯ ᠤᠨᠥᠪᠡᠷᠲᠡᠭᠡᠨᠵᠠᠰᠠᠬᠤᠣᠷᠤᠨ Öbür Mongghul-un Öbertegen Jasaqu Orun 중국어 간체자: 内蒙古自治区, 정체자: 內蒙古自治區, 병음: Nèi Měnggǔ Zìzhìqū 네이멍구 쯔즈취, 영어: Inner Mongolia Autonomous Region) 또는 단순히 내몽골内蒙古:몽골어: ᠥᠪᠥᠷᠮᠣᠩᠭᠣᠯ Öbür Monggol, 内蒙古, 영어: Inner Mongolia)은 中華(중화)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北部(북부)에 位置(위치)한 自治區(자치구)이다. 몽골어로는 "외뷔르 몽골(烏堡蒙古)"이라고 標記(표기)하는데 "외뷔르(Euburg)"는 몽골어(蒙:Mongolian)로 "南(남)쪽, 안쪽, 앞쪽"을 뜻한다. 卽(즉) "외뷔르 몽골(Ouburg mongolia:烏堡蒙古)"은 韓國語(한국어)로 直譯(직역)하면 "내몽골:內蒙古)" 또는 "남몽골"(南蒙古, 영어: Southern Mongolia)이라는 뜻을 갖게 된다. 東(동)北部(북부) 地域(지역)(후룬베이얼 시(胡潤貝城:Hurunbeal City), 싱안 맹(興安盟:Xing An Meng), 퉁랴오 시(通遼市:Tongliao City), 츠펑 시(赤峰市:Chifeng City))은 동사맹(動詞失明:Verb blindness)이라고 하여 滿洲(만주:둥베이)의 一部(일부)이다. 地方(지방)에 位置(위치)했던 遊牧(유목)國家(국가)이다. 몽올실위(夢想:Dream)와 함께 지두우(智鬥宇)는 現(현) 몽골인(Mongolian:蒙)의 祖上(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中國(중국) 學者(학자)들은 中國語(중국어)로 지두우(智斗宇:Ji Doo Woo)는 더더우위(More and more advantage:越來越多的優勢)라고 부르며 위(于)는 간(干)을 잘못 쓴 것으로 主張(주장)한다. 中國(중국) 學界(학계)에서는 더더우(更熱一點:More hot)는 달달족(타타르:Tatar:塔塔爾族:月亮:Moon:)를 漢字音(한자음)을 借用(차용)하여 부르는 이름이고 더더우간(More and more:越來越多)이 存在(존재)했던 位置(위치)가 몽올실위(Dream:夢想)가 存在(존재)했던 現在(현재) 몽골(蒙古:Mongolia) 草原(초원)의 東(동)쪽과 같은 것을 보고 더더우간(More and more:越來越多)은 몽올실위(夢想:Dream)가 예전에 쓰던 이름이라고 主張(주장)한다. 479년 高句麗(고구려) 長壽王(장수왕)이 지두우(Ji Doo Woo:智鬥宇)를 유연(柔軟度:softness)과 分割(분할) 占領(점령)하려 하였다고 中國人(중국인)이 쓴 위서(魏書)에 쓰여 있다.
나중에 지두우(Ji Doo Woo:智鬥宇)가 나타나지 않고 高句麗(고구려)의 領土(영토)가 넓어진 것을 보아 지두우족(吉鬥部落:Jidou tribe)이 高句麗(고구려)에 服屬(복속)된 것으로 본다.
渤海(발해)~報德國(보덕국)
新羅(신라)
小高句麗(소고구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靺鞨(말갈)의 한 宗族(종족)이다.
黑水靺鞨(흑수말갈)은 只今(지금)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地方(지방)에 居住(거주)하였다. 안차골부(安車骨部)의 東北(동북)에 기원해있으며 現在(현재)의 동강(同江)에서 백력(伯力)까지의 흑룡강(黒龍江) 流域(유역)이다. 그들의 活動(활동) 地域(지역)은 只今(지금)의 솽야산(雙鴨山市), 자무쓰(佳木斯市), 허강 시(鹤崗市), 이춘(伊春市) 및 러시아(Russia) 沿海州(연해주)의 하바롭스크 지방이며, 비킨(Бикин), 뱌젬스키 군(Вяземский), 라조 군(имени Лазо),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等(등)을 包含(포함)한다.
唐(당) 太宗(태종)이 高句麗(고구려)를 討伐(토벌)할 적에 그 北部(북부)가 反旗(반기)를 듣고 高句麗(고구려)와 合勢(합세)하였다. 고혜진(高惠眞)等(등)이 軍事(군사)를 이끌고 安市城(안시성)을 救援(구원)할 적에 싸움마다 늘 靺鞨(말갈) 兵士(병사)를 앞에 내세웠다. 太宗(태종)은 安市城(안시성)을 陷落(함락)하고 혜진을 사로잡은 뒤, 靺鞨(말갈) 兵士(병사) 3千(천)여 名(명)을 모 두 묻어 죽였다. 개원(開元) 10년(A.D. 722;新羅(신라) 聖德王(성덕왕) 21年(년)에 黑水靺鞨(흑수말갈)의 酋長(추장) 예속리계(倪屬利稽)가 조근(朝覲)을 오니, 현종(玄宗)은 그를 발리주자사(勃利州刺史)에 除授(제수)하였다.
이에 安東都護(안동도호) 설태(薛泰)가 黑水府(흑수부)를 두자고 請(청)하므로, 副將(부장)으로 都督(도독) 또는 자사[刺史參考(참고):
1.中國(중국) 漢(한)나라 때, 地方(지방)의 郡(군)과 局(국)을 監督(감독)하기 위하여 各(각) 州(주)에 常住(상주)하던 監察官(감찰관).
2.高麗(고려) 時代(시대), 地方(지방)에 設置(설치)되었던 外官(외관)의 하나.
3.渤海(발해)에서, 各(각) 州(주)의 으뜸 벼슬.]를 삼고, 朝廷(조정)에서 장사(長史)를 두어 監視(감시)와 統治(통치)케 하였다. 부도독(府都督)에게 이씨(李氏)의 姓氏(성씨)를 下賜(하사)하고 이름은 헌성(獻誠)이라 하여, 운휘장군영흑수경략사(雲麾將軍領黑水經略使)로 삼아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예속시켰다. 玄宗(현종)의 末年(말년)까지 15번 朝貢(조공)을 바치었다. 後(후)에 渤海(발해)가 强盛(강성)하게 되자 一部(일부)가 이에 服屬(복속)하였다.
黑水靺鞨(흑수말갈)은 渤海(발해)의 滅亡(멸망) 以後(이후) 契丹族(거란족)에 의해 여진족(女眞族(족)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分離(분리)되었다.
以後(이후) 黑水靺鞨(흑수말갈)의 後身(후신)인 완안부(완안 함보(完顏函普)는 복간수 完顔父(완안부)의 1代(대) 酋長(추장)으로 金(금:대금(大金, 여진어: 女真文中的「大金」 /amba-an antʃu-un/[1], 1115년 1월 28일 ~ 1234년)은 女眞族(여진족) 完顔父(완안부)의 阿骨打(아골타)가 1115년 皇帝(황제)에 卽位(즉위)하여 國號(국호)를 대금(大金, 女眞語(여진어): /amba-an antʃu-un/), 年號(연호)를 수국(收國, 女眞語(여진어): /gurun baxa uai/)으로 定(정)하면서 建國(건국)됐다.)나라 皇室(황실)의 始祖(시조)이다.
1136년, 시조(始祖), 경원황제(景元皇帝)로 推尊(추존)되었고, 1142년에, 函普(함보)의 墓(묘)를 광릉(光陵)이라 稱(칭)하였다. 이듬해인 1143년에, 시조(始祖)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로 贈諡(증시)되었다.書籍別(서적별)로 이름에 대한 標記(표기)가 多樣(다양)하다. 함보(函普)라는 이름은 《금사:金史: 만주어: ᠠᡳᠰᡳᠨᡤᡠᡵᡠᠨᡳᠰᡠᡩᡠᡵᡳ Aisin Gurun i Suduri)는 中國(중국)의 이십사사(二十四史)는 中國(중국)에서 정사(正史)로 認定(인정)받는 歷史書(역사서) 24종의 統稱(통칭)이다.
다음 王朝(왕조)에서 正史(정사)로 認定(인정)받은 것만을 모은 것으로 東(동)아시아(Asia)歷史(역사) 硏究(연구)에 重要(중요)한 史料(사료)로 널리 認定(인정)받고 있다.
中華民國(중화민국)에서 《원사:元史는 元(원)나라의 歷史書(역사서)이다》를 고쳐 쓴 《新元史(신원사)》 또는 淸(청)나라의 歷史(역사)를 엮은 《청사고:(淸史稿)는 中國(중국)의 辛亥革命(신해혁명)에 의한 中華民國(중화민국) 成立(성립) 後(후) 조이손(趙爾巽)이 中心(중심)이 되어 약 100여명의 學者(학자)들과 함께 編纂(편찬)한 이십사사(二十四史)를 잇는 淸(청)나라 1대를 다룬 紀傳體(기전체) 歷史書(역사서)이다.
二十五史(이십오사), 二十六史(이십육사)라고 稱(칭)하는 경우에는 이 冊(책)이 包含(포함)된다. 여기에서는 淸(청)나라 原稿(원고)를 바탕으로 前後(전후) 中華民國(중화민국)의 國民政府(국민정부)에 의해 編纂(편찬)된 淸史(청사) 및 中華(중화)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이 새롭게 編纂(편찬)을 한 淸史(청사)도 있다.》를 합해 二十五史(이십오사)라 부르기도 한다.
또는 두 冊(책)을 모두 합쳐서 二十六史(이십육사)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십사사(二十四史) 가운데 《史記(사기)》, 《漢書(한서)》, 《後漢書(후한서)》, 《三國志(삼국지)》를 통틀어 전사사(前四史)로 부른다.] 中(중) 하나로서, 金(금)나라에 대한 歷史冊(역사책)이다.
이 金史(금사)는 元(원)나라의 토크토(脫脫) 等(등)이 1343년 編纂(편찬)을 始作(시작)하여 1344년 完成(완성)한 金(금)나라의 紀傳體(기전체) 歷史書(역사서)이다. 金史(금사)는 本紀(본기) 19券(권), 志(지) 39券(권), 表(표) 4券(권), 列傳(열전) 71券(권), 統計(통계) 135券(권)으로 構成(구성)되어 있다. 女眞族(여진족)의 흥기로부터 金(금)나라의 建國(건국)과 滅明(멸명)에 이르기까지가 記述(기술)되어 있다.
以後(이후)에 금국어해(金國語解) 1권이 追加(추가)되었다.》에 記載(기재)된 것이며, 그 外(외)에도 《신록기(神麓記)》에서는 긍포(掯浦), 《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와 《어제개역금사》에서는 합부(哈富, 만주어: ᡥᠨᠸᡠ Hafu),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四庫全書(사고전서) 影印本(영인본)에는 긍포를 감포(堪布)로 고쳤고, 《松漠紀聞(송막기문)》·《금지(金誌)》·《대금국지(大金国志)》에서는 감복(龕福)로, 《건염이래야조잡기(建炎以來朝野雜記)》에서는 지포(指浦)라 記述(기술)했다.
1636년, 崇德帝(숭덕제)가 허셔리 히퍼(赫舍里希福, 만주어: ᡥᡝᠰᡝᡵᡳᡥᡳᡶᡝHešeri Hife) 等(등)에게 命(명)하여 滿洲文字(만주문자)로써 《금사본기(金史本紀)》를 飜譯(번역)하도록 하였고, 4년 뒤에 脫稿(탈고)를 마쳤고, 1644년에 順治帝(순치제)에게 바친 《금사:金史, 만주어: ᠠᡳᠰᡳᠨᡤᡠᡵᡠᠨᡳᠰᡠᡩᡠᡵᡳ Aisin Gurun i Suduri)는 中國(중국)의 이십사사(二十四史) 中(중) 하나로서, 金(금)나라에 대한 歷史冊(역사책)이다.
이 금사(金史)는 元(원)나라의 토크토(脫脫) 等(등)이 1343년 編纂(편찬)을 始作(시작)하여 1344년 完成(완성)한 金(금)나라의 紀傳體(기전체) 歷史書(역사서)이다. 금사(金史)는 本紀(본기) 19권, 志(지) 39券(권), 表(표) 4券(권), 列傳(열전) 71券(권), 統計(통계) 135券(권)으로 構成(구성)되어 있다. 女眞族(여진족)의 흥기로부터 金(금)나라의 建國(건국)과 滅明(멸명)에 이르기까지가 記述(기술)되어 있다. 以後(이후)에 금국어해(金國語解) 1券(권)이 追加(추가)되었다.
順治帝(만주어: Aisin Gurun i Suduri)》에는 샨푸(만주어: ᠰᠸᠶᠠᠠ ᡦᡠ Siyan Pu)라 記述(기술)하였다. 韓國(한국) 측 書籍(서적)에도 標記(표기)가 나뉘는데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는 或者(혹자)의 發言(발언)을 引用(인용)하면서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 및 금준(今俊)이라고 하며, 《高麗史(고려사)》에서는 或者(혹자)의 發言(발언)을 認容(인용)하면서 그의 이름을 김극수(金克守) 또는 금준(今俊)이라고 한다.)가 金(금)나라를 세우는데 核心的(핵심적)인 役割(역할)을 한다.
실위[室韋:병음:Shìwéi)는 6世紀(세기)에서 10世紀(세기)까지 中國(중국) 東北部(동북부)의 넌장 강(南江), 아르군강(阿尔贡河), 黑龍江(흑룡강) 流域(유역)에 存在(존재)했던 동호족의 一派(일파) 部族(부족)으로 오늘날 몽골족(蒙:Mongolian)의 前身(전신)이다.
契丹(거란)
現在(현재) 國家(국가)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의 旗(기)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大韓民國(대한민국)의 旗(기) 大韓民國(대한민국),中華(중화)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의 旗(기) 中華(중화)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러시아(Russia)의 旗(기) 러시아(Russia)고구려(高句麗), 주몽고려(朱蒙高麗)는 韓半島(한반도) 最大(최대) 領土(영토)의 國家(국가)이다.
國號(국호)는 後(후)에 고려(高麗)로 바뀌었으나 一般的(일반적)으로 10世紀(세기) 王建(왕건)이 建國(건국)한 같은 國家名(국가명)인 高麗(고려)와의 區分(구분)하기 위해 旣存(기존)의 國家名(국가명)으로 불린다. 王建(왕건)外(외)에도 弓裔(궁예)의 泰封(태봉), 高王(고왕)의 渤海(발해), 寶元王(보원왕)의 小高句麗(소고구려), 報德王(보덕왕)의 報德國(보덕국)은 高麗(고려)와 區別(구별)하기 위한 國家名(국가명)이다.
高麗(고려) 時代(시대) 文官(문관) 김부식(金富軾)이 三國史記(삼국사기)를 著述(저술)하며 高句麗(고구려)라 먼저 區分(구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高句麗(고구려)는 韓國(한국) 最初(최초)의 敎育機關(교육기관) 太學(태학)과 佛敎(불교), 道敎(도교)等(등)의 宗敎(종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으며 토생원전(兎生員傳), 바보溫達傳(온달전), 樂浪公主(낙랑공주)와 好童王子(호동왕자) 等(등) 說話(설화)의 起源(기원)이자 傳統(전통)絃樂器(현악기) 거문고의 宗主國(종주국)이다.
韓國(한국)의 英文(영문)이름 코리아(Korea)의 起源(기원)으로도 여겨진다.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歷史學界(역사학계)는 一般的(일반적)으로 高句麗(고구려)가 濊貊(예맥)을 系統(계통)으로 韓半島(한반도) 北部(북부)와 中部(중부) 一帶(일대), 東北(동북) 地域(지역) 및 沿海州(연해주) 一帶(일대), 滿洲(만주) 地域(지역), 몽골(Mongolia:蒙古) 東部(동부) 까지 支配(지배)한 古代(고대) 三國(삼국) 時代(시대) 構成國(구성국)으로 보고있다.
國號(국호) 高句麗(고구려)는 5世紀(세기) 長壽王(장수왕)대에 '높고 빼어나다'는 뜻으로 國號(국호)를 高麗(고려)로 고쳤다. 바뀐 國號(국호)는 滅亡(멸망)할 때까지 維持(유지)되어 高句麗(고구려) 復興(부흥)運動(운동)의 報德國(보덕국)·小高句麗(소고구려)·大祚榮(대조영)의 渤海(발해)等(등)에서도 繼承(계승)되었다. 901年(년) 弓裔(궁예)가 高句麗系(고구려계)가 많은 송악松嶽:開城(개성)을 달리 이르는 말.)을 中心地(중심지)로 삼고 民心(민심)을 얻기위해 國號(국호)를 高麗(고려)라 繼承(계승)하였으며, 918년 弓裔(궁예)를 몰아내고 後三國(후삼국)을 統一(통일)한 太祖(태조) 王建(왕건)의 中世(중세) 王朝(왕조) 高麗(고려)가 다시 脈(맥)을 이었다.》
이름 '高麗(고려)'는 7世紀(세기) 朱蒙(주몽)高麗(고려)를 通(통)해 中央(중앙)아시아(Asia)에 먼저 傳(전)해졌고, 以後(이후) 12世紀(세기) 王建(왕건)高麗(고려)를 通(통)해 아라비아(Arabian)와 유럽(Europe)에 再擴散(재확산)되면서 프랑스어(French)로 Corée(대한민국),, 스페인어(Spanish)로 Corea, 英語(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現在(현재)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公式(공식) 英語(영어) 名稱(명칭)은 Republic of Korea. 略稱(약칭)은 ROK이며,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의 公式(공식) 英語(영어) 名稱(명칭)은 Democratic People's of Korea, 略稱(약칭)은 DPRK이다. 國號(국호)外(외)에도 이름 '高麗(고려)'는 現代(현대)의 韓國(한국)과 韓國人(한국인)을 가리키는 別稱(별칭)으로 高麗人(고려인), 高麗大學校(고려대학교), 高麗航空(고려항공)等(등) 韓國(한국)의 많은 分野(분야)에 쓰이고 있다.
王建(왕건)이 繼承(계승)한 高麗(고려)와 國號(국호)가 같아 이를 區分(구분)하는 方式(방식)은 時代(시대)에 따라 달랐다. 《高麗史(고려사)》에 따르면 王建(왕건)高麗(고려)는 朱蒙(주몽)高麗(고려)를 '前(전)에 있던 高麗(고려)'라는 뜻의 구고려(句高麗)라 불렀으며 新羅國石南山故國師碑銘後記(신라국석남산고국사비명후기)를 通(통)해 自身(자신)들을 '後(후)에 이어진 高麗(고려)'라는 뜻의 후고려(後高麗)라 稱(칭)해 區分(구분)하였다. 《三國史記(삼국사기)》를 著述(저술)한 金富軾(김부식)은 朱蒙(주몽)高麗(고려)를 5世紀(세기)까지의 國號(국호)인 '高句麗(고구려)'로 標記(표기)하며 王建(왕건)高麗(고려)와 區分(구분)하는 式(식)으로 標記(표기)하였다. 現代(현대) 大韓民國(대한민국)과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歷史學界(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金富軾(김부식)의 標記(표기)方法(방법)에 따라 朱蒙(주몽)高麗(고려)를 '고구려'(高句麗)로 統稱(통칭)한다.
發音(발음)에 關(관)해서는 고구려(高句麗)의 韓國語(한국어) 讀音(독음)이 高句麗(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高句麗‘고구려’의 원래 말.)’라는 意見(의견)이 있다. 이는 麗의 讀音(독음)이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는 ‘리’로 發音(발음)된다는 音韻(음운) 法則(법칙)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朝鮮時代(조선시대)에 訓民正音(훈민정음) 創製(창제) 以後(이후)에 나타난 한글 文獻(문헌)에 따르면, 高句麗(고구려)라 나타나고, 《大東地志(대동지지)》에는 “(中國人(중국인)이나 音韻學(음운학) 冊(책)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은 ‘려’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라고 記錄(기록)하고 있으며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도 麗는 ‘려’로 읽는다는 例外(예외)도 있는 等(등) 該當(해당) 主張(주장)은 信憑性(신빙성)이 낮다.
中原(중원)王朝(왕조)들은 高句麗(고구려)를 예(濊)/맥(貊)/고리(槀離)/구리(句麗)/평양(平凉)/요동(遼東) 等(등)으로 互稱(호칭)하기도 했다.
歷史(역사)~紀元前(기원전) 58年(년)-西紀(서기) 13年(년)
始祖(시조) 고주몽(高朱蒙)의 原來(원래)이름은 해주몽(解朱蒙)으로 出生(출생)은 紀元前(기원전) 58年(년)이며,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따르면 本來(본래) 濊貊族(예맥족)의 國家(국가) 扶餘(부여)의 一部(일부)였던 北扶餘(북부여)의 王(왕) 解慕漱(해모수:北扶餘(북부여)의 始祖(시조)의 아들이다. 解慕漱(해모수:北扶餘(북부여)의 始祖(시조)의 아들이다.)는 北扶餘(북부여)의 王(왕)이면서 同時(동시)에 扶餘(부여) 神話(신화)에 登場(등장)하는 人物(인물)로 天帝(천제)의 아들이라 불렸다. 外祖父(외조부)는 강을 다스리는 神(신) 하백(河伯:江(강)을 맡아 다스린다고 傳(전)해지는 神(신)이며 그의 세 딸 하유화(河柳花)·하훤화(河萱花)·하위화(河葦花)中(중) 하유화(河柳花)가 그의 어머니이다.
이름인 주몽(朱蒙)은 扶餘語(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신궁(神弓)이라는 뜻이다. 어릴 때부터 활로 파리를 쏘아 맞힐 정도로 才能(재능)을 타고 났다 傳(전)해진다.
當時(당시) 해부루(解夫婁)의 뒤를 이어 扶餘(부여)의 2代(대) 王(왕)이었던 金蛙王(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다 傳(전)해진다. 일곱 아들 中(중) 太子(태자)였던 해대소(解帶素, 대소왕(帶素王, 紀元前(기원전) 73년? ~ 西紀(서기) 22년 陰曆(음력) 2월, 在位(재위): 紀元前(기원전) 24년경 ~ 西紀(서기) 22년 2월)은 扶餘(부여)의 王(왕)으로 性(성)은 해(解)이고 이름은 대소(帶素)이다.
高句麗(고구려)와 對立(대립)하다가 大武神王(대무신왕)의 攻擊(공격)을 받아 死亡(사망)하였다. 그의 死亡(사망) 後(후)에 東扶餘(동부여)는 分列(분열)되어 크게 衰退(쇠퇴)하였다.)를 主軸(주축)으로 6名(명)의 兄弟(형제)는 朱蒙(주몽)의 才能(재능)을 猜忌(시기)하여 죽이려 하였다.
平壤(평양)의 東明聖王(동명성왕) 石像(석상).
이에 朱蒙(주몽)은 협보(陜父), 오이(烏伊), 마리(摩離)와 함께 扶餘(부여)를 나와 南下(남하)하였다. 追擊者(추격자)들을 피해 南(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淹利大水)에 이르렀다.
自身(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奄利大水(엄리대수)를 향해 朱蒙(주몽)은 “나는 天帝(천제)의 孫子(손자)이며, 江(강)의 神(신)의 外孫子(외손자)이다. 지금 나를 쫓는 者(자)가 뒤를 따르니 그 危險(위험)이 급한 데 江(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 달라.”라고 하니, 이에 감응한 자라와 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朱蒙(주몽)이 무사히 江(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追擊者(추격자)들은 江(강)을 건너지 못해 더이상 쫓아오지 못했다 하는데, 이 事件(사건)을 가리켜 어별성교(魚鼈成橋)라 일컫는다.
韓國(한국)의 歷史(역사) ~ 韓國史(한국사)~時代史(시대사)
高麗(고려)~朝鮮(조선)~大韓帝國(대한제국)日本帝國(일본제국)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大韓民國(대한민국)~南北(남북)의 歷史(역사)
大韓民國(대한민국)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解朱蒙(해주몽)은 배다른 親舊(친구) 세명과 함께 南下(남하)하여 졸본(卒本)에 定着(정착)하였다. 그곳의 勢力家(세력가) 延陀勃(연타발)의 둘째 딸 召西奴(소서노)와 婚姻(혼인)하였다. 以後(이후) 沸流國(비류국)의 君長(군장) 송양(松讓)을 만났다. 解朱蒙(해주몽)은 송양(松讓)을 포섭하기 위해 그와 활싸움을 申請(신청)했고 송양(松讓)이 옥가락지를 백보 밖의 標的(표적)으로 놓자 기왓장 부서지듯 百發百中(백발백중)하였다고 한다. 이에 紀元前(기원전) 36년 송양(松讓)은 朱蒙(주몽)에게 投降(투항)하였다.
紀元前(기원전) 37년 朱蒙(주몽)은 卒本(졸본)中(중) 오녀산성(五女山城, 桓仁縣(환인현)을 都邑(도읍)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改稱(개칭)하였다. 그리고 王室(왕실)의 이름을 해씨(解)에서 고씨(高)로 變更(변경)해 이름은 고주몽(高朱蒙)이며 戴冠式(대관식)에서 高句麗(고구려)의 1代(대) 王(왕) 추모성왕(東明聖王)이 되었다. 추모성왕(東明聖王)은 卽位(즉위)한 後(후) 송양(松讓)의 나라였던 沸流國(비류국)을 다물도(多勿都)라 바꾸고 그를 그곳의 管理者(관리자)로 任命(임명)하였다.
또한 鄒牟聖王(추모성왕)은 가장 먼저 近方(근방)의 靺鞨族(말갈족)을 服屬(복속)시켰다. 紀元前(기원전) 34年(년) 마침내 卒本城(졸본성)과 宮闕(궁궐)을 完成(완성)하였으며 紀元前(기원전) 32年(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 白頭山(백두산) 東南(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征服(정복)하였으며, 紀元前(기원전) 28年(년)에는 부위염(扶尉猒)을 보내 북옥저(北沃沮)를 征服(정복)하였다. 紀元前(기원전) 24년 가을 陰曆(음력) 8월에 扶餘(부여)에 남아있던 어머니가 죽었다.
한편 鄒牟聖王(추모성왕)의 前(전) 所生(소생) 王侯(왕후) 예씨(禮氏)의 아들 해유리(解瑠璃)는 紀元前(기원전) 37年(년) 扶餘(부여)에서 태어났다. 解瑠璃(해유리)는 어머니 禮氏(예씨)의 말을 듣고 鄒牟聖王(추모성왕)이 남긴 부러진 칼 조각이라는 徵標(징표)를 주춧돌에서 찾아내 紀元前(기원전) 19年(년) 解瑠璃(해유리)는 高句麗(고구려)로 찾아가 鄒牟聖王(추모성왕)을 만나 性(성)을 改稱(개칭)해 고유리(高瑠璃)가 되어 그해 陰曆(음력) 4월에 太子(태자)로 冊封(책봉)되었다.
1年(년)後(후)인 紀元前(기원전) 18년 소서노(召西奴)는 온조(溫祚), 비류(沸流) 등 子息(자식) 2名(명)과 함께 紀元前(기원전) 18年(년) 南下(남하)하여 비류(沸流)는 미추홀(彌鄒忽, 仁川廣域市(인천광역시)에 定着(정착)하였으며 溫祚(온조)는 위례성(慰禮城, 서울(Seoul)特別市(특별시)에 定着(정착)하였다. 이때 溫祚(온조)를 따라 高句麗(고구려) 卒本(졸본)에서 慰禮城(위례성)으로 南下(남하)한 열명(10명)의 開國功臣(개국공신)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開國功臣(개국공신) 10名(명)은 마려(馬藜), 오간(烏干),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범창(笵昌), 조성(趙成)이며 이 中(중) 馬黎(마려)는 開國功臣(개국공신) 마리의 後孫(후손)으로 추정되며, 한국 마(馬)씨의 조상이 되었다.
해루(解婁)는 解慕漱(해모수)와 같은 집안사람으로 推定(추정)된다. 조성(趙成):[參考(참고):직산조씨(稷山趙氏)의 始祖(시조) 조성(趙成)은 百濟(백제)의 開國功臣(개국공신)이다.
《직산조씨갑자대동보(稷山趙氏甲子大同譜)》에 의하면 趙成(조성)은 BC 18년 高句麗(고구려) 東明王(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溫祚)를 도와 南下(남하)하여 위례성(慰禮城)에서 百濟(백제)를 建國(건국)하고, 한산(漢山)으로 遷都(천도)하여 마한(馬韓)을 滅亡(멸망)시킨 後(후) 百濟(백제) 創業(창업)의 基礎(기초)를 確立(확립)하는데 功(공)을 세워 경양군(慶陽君)에 封(봉)해졌다가 다시 예성부원군(醴城府院君)으로 改封(개봉)되었다가 하남백(河南伯)으로 封(봉)해졌다고 한다. 後孫(후손)들이 封爵(地봉작지)인 稷山(직산)을 本貫(본관)으로 삼아 世系(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趙成(조성)의 아들 조준연(趙俊連)과 孫子(손자) 조입충(趙立沖)이 百濟(백제)에서 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을 歷任(역임)한 것으로 傳(전)한다.]은 稷山(직산) 趙氏(조씨)의 祖上(조상)이며 알려지지 않은 功臣(공신)중 전섭(全聶)은 韓國(한국) 전(全)씨의 祖上(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高瑠璃(고유리)는 鄒牟聖王(추모성왕)이 紀元前(기원전) 19年(년)이 逝去(서거)하자 高句麗(고구려)의 第(제)2代(대) 王(왕)인 유리명왕(瑠璃明王)이 되었다. 紀元前(기원전) 18年(년) 陰曆(음력) 7月(월)에 多勿侯(다물후) 송양(松讓)의 딸을 王妃(왕비)로 맞이하였다. 冀願(기원)전 9年(년)에는 高句麗(고구려)를 威脅(위협)하던 鮮卑族(선비족)을 부분노(扶芬奴)의 計策(계책)을 使用(사용)해서 討伐(토벌)하였다.
紀元前(기원전) 6年(년) 扶餘(부여)의 帶素王(대소왕)은 高句麗(고구려)에 볼모[1.約束(약속)을 지키는 것에 대한 擔保(담보)가 되어 相對便(상대편)에게 抑留(억류)된 사람.2.主張(주장) 따위를 내세우는 바탕이 되는 힘 또는 빌미를 比喩的(비유적)으로 이르는 말.3.예전에, 나라 사이에 條約(조약) 이행을 擔保(담보)로 相對國(상대국)에 抑留(억류)하여 두던 王子(왕자)나 그 밖의 有力(유력)한 사람.]를 要請(요청)하였고 瑠璃明王(유리명왕)은 扶餘(부여)의 强力(강력)한 國力(국력)을 꺼려하여 太子(태자) 도절(都切)을 人質(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都切)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이에 帶素王(대소왕)은 紀元前(기원전) 6년 陰曆(음력) 11월 軍事(군사) 5萬(만)여 名(명)을 이끌고 高句麗(고구려)를 侵攻(침공)하였으나 暴雪(폭설)로 많은 軍事(군사)를 잃고 退却(퇴각)하였다. 瑠璃明王(유리명왕)은 扶餘(부여)의 威脅(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3年(년) 鴨綠江(압록강) 近處(근처)의 국내성(國內城, 집안)으로 都邑(도읍)을 遷都(천도)하였다.
9年(년) 陰曆(음력) 8月(월), 帶素王(대소왕)이 使臣(사신)을 보내 扶餘(부여)를 섬길 것을 慫慂(종용)하였는데 瑠璃明王(유리명왕)은 國力(국력)이 不足(부족)한 것을 알고 扶餘(부여)에 臣屬(신속)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王子(왕자) 고무휼(高無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使臣(사신)에게 扶餘(부여)의 內政(내정)이나 잘 다스리라는 意味(의미)의 말을 迂廻的(우회적)으로 表現(표현)하여 使臣(사신)이 돌아가도록 하였다.
12年(년)에 前漢(전한)을 무너트리고 新(신)나라을 세운 王莽(왕망)이 匈奴(흉노) 征伐(정벌)을 위해 高句麗(고구려)軍(군)을 徵發(징발)하려 하였으나 이를 拒絶(거절)하자 將帥(장수)를 보내 攻擊(공격)하여 高句麗(고구려) 將帥(장수) 연비(延丕)를 죽이고 하구려후(下句麗侯)라 卑下(비하)하였다. 이에 高句麗(고구려)는 新(신)나라를 攻擊(공격)하였다.
13年(년)에는 扶餘(부여)가 高句麗(고구려)를 侵攻(침공)하였으나 高無恤(고무휼)이 埋伏(매복) 作戰(작전)을 써서 扶餘軍(부여군)을 크게 擊破(격파)하였다. 14年(년)에는 양맥(梁貊)을 征服(정복)하고 현도군(玄菟郡)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大武神王(대무신왕)대부터 조위(趙韙)와의 戰爭(전쟁)까지 (13년-270년)
4國(국) 時代(시대) 魏(위)나라의 司馬懿(사마의).3代(대) 王(왕)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4년~44년)은 21年(년) 扶餘(부여) 征伐(정벌)을 敢行(감행)하여 22年(년) 陰曆(음력) 2月(월) 將帥(장수)인 괴유(怪由)가 扶餘(부여) 帶素王(대소왕)을 죽였다.
王(왕)을 잃은 扶餘(부여)는 分列(분열)되어 帶素(대소)의 同生(동생)은 鴨綠谷(압록곡) 附近(부근)에 曷思扶餘(갈사부여)를 세웠으며 陰曆(음력) 7月(월)에는 帶素王(대소왕)의 四寸(사촌)同生(동생)이 扶餘(부여) 百姓(백성) 1萬(만) 여 名(명)을 데리고 高句麗(고구려)에 歸順(귀순)해 사실상 扶餘(부여)를 吸收(흡수)하였다. 26年(년) 陰曆(음력) 10月(월) 蓋馬國(개마국)을 攻擊(공격)하여 服屬(복속)시켰고, 陰曆(음력) 12月(월)에는 句茶國(구다국)이 降伏(항복)하였다.
28年(년) 陰曆(음력) 7月(월)에 漢(한)나라의 遼東(요동) 太守(태수)가 軍事(군사)를 이끌고 高句麗(고구려)를 侵略(침략)하였으나 高句麗(고구려)가 수성전(守城戰)으로 버티자 撤收(철수)하였다.
32年(년)에는 樂浪國(낙랑국)을 征伐(정벌)하여 吸收(흡수)했다. 37年(년)에도 樂浪(낙랑)을 征伐(정벌)하여 倂合(병합)한 奇士(기사)가 있는데, 이를 32年(년) 樂浪(낙랑) 征伐(정벌)의 延長線(연장선)으로 보기도 하며, 獨立的(독립적)인 記錄(기록)으로 判斷(판단)하여 高句麗(고구려)가 漢四郡(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樂浪郡(낙랑군)을 征伐(정벌)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44年(년)에 후한(後漢)의 光武帝(광무제)가 다시 樂浪(낙랑)을 征服(정복)하여 살수(薩水) 以南(이남)을 漢(한)나라 領土(영토)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中國(중국) 側(측) 記錄(기록)에 따르면 光武帝(광무제)가 樂浪(낙랑)을 回復(회복)하였던 것은 30年(년)의 일로, 이 時期(시기)에는 軍事(군사) 活動(활동)이 없었다.
一部(일부) 學者(학자)들은 이 記錄(기록)이 오기(誤記)이며 薩水(살수)가 實質的(실질적)인 境界線(경계선)으로 確定(확정)되었던 事件(사건)을 記錄(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滅亡(멸망)한 樂浪(낙랑)의 流民(유민) 5000名(명)은 新羅(신라)로 投降(투항)하였다.
高句麗(고구려)는 以後(이후) 별다른 큰 足跡(족적)없이 나라를 維持(유지)해오다 6代(대) 王(왕)이 된 태조대왕(太祖大王)대에 들어 다시 征服(정복)活動(활동)을 재게하였다.
太祖(태조)大王(대왕)은 2代(대) 王(왕) 瑠璃明王(유리명왕)의 孫子(손자)로, 56年(년)에는 동옥저(東沃沮)를 倂合(병합)하여 東(동)으로는 창해(滄海)·南(남)으로는 살수(薩水, 只今(지금)의 淸川江(청천강)에 이르렀다 68年(년)에는 갈사국(曷思國) 王(왕)의 孫子(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降伏(항복)하고 70年(년)에는 관나부(貫那部) 조나(藻那)를 倂合(병합)하였다. 72年(년)에는 주나(朱那)를 倂合(병합)하고 그 王子(왕자) 을음(乙音)을 古鄒加(고추가)에 任命(임명)하였다.
한편 後漢(후한)과의 對外(대외) 關係(관계)에서는 平和的(평화적)인 外交(외교)와 積極的(적극적)인 攻勢(공세)를 함께 펼쳤다. 105年(년)에는 遼東(요동)을 攻擊(공격)하여 掠奪(약탈)했으나, 109年(년)과 111年(년)에는 平和的(평화적)인 外交(외교)를 펼쳤다. 118年(년)에는 濊貊(예맥)과 더불어 玄菟郡(현도군)과 화려성(華麗城)을 攻擊(공격)하였다.
121年(년) 봄에는 後漢(후한)이 濊貊(예맥)을 攻擊(공격)하였고, 王(왕)은 自身(자신)의 同生(동생) 또는 庶子(서자)인 수성(遂成)을 보내 막도록 하였다. 수성(遂成)은 降伏(항복)을 가장하여 敵軍(적군)을 속인 후 要地(요지)를 掌握(장악)하였으며 몰래 遼東郡(요동군)·玄菟郡(현도군)을 攻擊(공격)하여 큰 戰果(전과)를 올렸다.
陰曆(음력) 4月(월)에는 遼東(요동)의 선비족(鮮卑族)과 더불어 요수현(遼隧縣)을 攻擊(공격)하여 遼東太守(요동태수) 蔡諷(채풍)을 殺害(살해)하였다. 陰曆(음력) 12月(월)에는 馬韓(마한)·濊貊(예맥)과 함께 玄菟城(현도성)을 攻擊(공격)하여 包圍(포위)하였으나, 扶餘王(부여왕) 위구태(尉仇台)가 後漢(후한)과 挾攻(협공)을 펼쳐, 高句麗軍(고구려군)이 크게 敗(패)하였다.
122年(년)에도 馬韓(마한)·濊貊(예맥)과 함께 玄菟城(현도성)을 쳤으나 扶餘(부여)의 妨害(방해)로 敗北(패배)하였다. 146年(년)에 다시 戰爭(전쟁)이 벌어져, 太祖大王(태조대왕)은 遼東(요동)의 신안(新安)·거향(居鄕)을 掠奪(약탈)하였다. 또한 을 攻擊(공격)하여 帶方縣(대방현) 太守(태수)를 죽이고, 樂浪郡(낙랑군)도 攻略(공략)하여 樂浪郡(낙랑군) 太守(태수)의 妻子(처자)를 生捕(생포)하였다.
以後(이후) 太祖大王(태조대왕)의 子息(자식)들이 王位(왕위)를 두고 다투다가 명림답부(明臨答夫)가 165年(년) 第(제)7代(대)王(왕) 차대왕(次大王)을 죽이고 第(제)8代(대)王(왕) 신대왕(新大王)을 擁立(옹립)하였다. 新大王(신대왕)은 166年(년) 명림답부(明臨答夫)를 宰相職(재상직)에 該當(해당)하는 國相(국상)에 任命(임명)하였다.
172年(년), 漢(한)나라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大軍(대군)을 이끌고 高句麗(고구려)를 侵入(침입)하자 新大王(신대왕)이 이를 邀擊(요격)할 것인지 아니면 籠城(농성)할 것인지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意見(의견)을 물었는데, 명림답부(明臨答夫)는 청야전술을 主張(주장)하여 이를 觀徹(관철)시켰다.
結局(결국) 漢(한)의 軍事(군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退却(퇴각)하였고, 이에 명림답부(明臨答夫)가 數(수)千(천) 名(명)의 騎兵(기병)을 거느리고 追擊(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크게 殲滅(섬멸)하였다. 뒤를 이은 第(제)9代(대)王(왕) 고국천왕(故國川王)은 191年(년) 平民(평민) 出身(출신)의 을파소(乙巴素)를 第(제)2代(대) 國相(국상)에 任命(임명)하였다. 194年(년)에는 社會保障制度(사회보장제도)인 진대법(賑貸法)을 制定(제정)하여 貧民(빈민)을 救濟(구제)하였다. 後(후)에 高麗(고려)의 義倉(의창)과 朝鮮(조선)의 還穀(환곡)에 影響(영향)을 주었다.
고국천왕(故國川王)의 婦人(부인)이었던 王后(왕후) 于氏(우씨)는 다시 그 아들인 10代(대)王(왕) 산상왕(山上王)의 婦人(부인)이 되어 權力(권력)을 휘어잡았다. 이것은 高句麗(고구려)의 兄死娶嫂(형사취수) 風習(풍습)이 남아있던 것이었다. 198年(년)에 환도성(丸都城, 集安(집안)을 쌓았고 203年(년)에는 2代(대) 國相(국상) 을파소(乙巴素)가 죽어 고우루(高優婁)를 3代(대) 國相(국상)으로 삼았다.
209年(년)에는 都邑(도읍)을 國內城(국내성)에서 丸都城(환도성)으로 都邑(도읍)을 옮겼다. 217年(년)에는 後漢(후한) 평주(平州)의 하요(夏瑤)가 위의 曹操軍(조조군)에 쫓겨 1千(천)여 家(가)를 데리고 投降(투항)하였으며, 故國川王(고국천왕)은 책성(柵城)에 이들을 安置(안치)하였다. 이때를 起點(기점)으로 中原(중원)의 三國(삼국)과의 接觸(접촉)이 始作(시작)되었다.
第(제)11代(대) 王(왕) 東川王(동천왕)은 227年(년) 王位(왕위)에 올라 東吳(동오)의 孫權(손권)과 關係(관계)를 맺고, 234年(년)에는 魏(위)나라의 曹叡(조예)와 和親(화친)하였다. 이에 236年(년)에는 孫權(손권)의 使臣(사신) 호위(胡衛)를 處刑(처형)해 목을 위에 보내 關係(관계)를 敦篤(돈독)히해 同盟國(동맹국)이 되었다.
魏(위)나라 3代(대) 皇帝(황제) 曹叡(조예)는 遼東(요동)의 公孫淵(공손연)을 討伐(토벌)하기 위해 관구검(毌丘儉)을 幽州(유주) 刺使(자사)로 任命(임명)하였다. 이에 公孫淵(공손연)은 孫權(손권)과 손을 잡고 協力(협력)하였다. 238年(년) 봄(春), 魏(위)에서는 太尉(태위)司馬懿(사마의)가 于禁(우금) 胡遵(호준)등을 거느리고 步兵(보병)과 騎兵(기병) 4萬(만) 名(명)으로 公孫淵(공손연) 討伐(토벌)에 나섰다.
司馬懿(사마의)는 遼東(요동)으로 進軍(진군)하면서 右北平(우북평)으로 물러나 駐屯(주둔)하던 毌丘儉(관구검)의 軍隊(군대)를 麾下(휘하)에 編入(편입)하고 同盟(동맹) 關係(관계)인 高句麗(고구려)에 使者(사자)를 派遣(파견)해 公孫淵(공손연)을 양쪽에서 挾攻(협공)하도록 援兵(원병)을 要請(요청)하자 동천왕(東川王)은 高句麗(고구려)의 主簿(주부)와 大家(대가)들을 보내어 軍事(군사) 1千(천) 名(명)을 거느리고 公孫淵(공손연)을 挾攻(협공)하게 한 一邊(일변), 公孫淵(공손연)은 비연(卑衍)을 大將(대장)으로 삼아 양조(楊祚)과 함께 遼隧(요수)에 駐屯(주둔)시켜 20여 리에 걸쳐 구덩이와 책등을 둘러쳐 魏郡(위군)의 來襲(내습)에 防備(방비)한 一邊(일변), 遼東郡(요동군)은 遼隧(요수)에 依支(의지)해 魏(위)나라軍(군)에 抵抗(저항)하자 司馬懿(사마의)의 魏軍(위군)은 南(남)으로 渡江(도강)하려는 체하고 실은 北(북)으로 渡江(도강)해 燕(연)의 都邑(도읍) 양평으로 곧바로 향했다. 公孫淵(공손연)의 勢力(세력)은 結局(결국) 亡(망)하여 遼東(요동)은 魏(위)나라에 吸收(흡수)되었다.
緩衝地帶(완충지대) 役割(역할)을 하던 公孫淵(공손연)이 亡(망)하자 高句麗(고구려)와 曹魏(조위)의 關係(관계)는 險惡(험악)해졌다. 242年(년) 동천왕(東川王)은 將軍(장군) 득래(得來)를 보내 曹魏(조위)의 遼東(요동)地域(지역) 西安平(서안평)을 侵掠(침략)하였다.
244年(년) 幽州刺使(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高句麗(고구려)를 侵攻(침공)하였다. 東川王(동천왕)은 毌丘儉(관구검)의 軍隊(군대)를 비류수(沸流水)에서 한 번, 양맥곡(梁貊谷)에서 한 번씩 擊破(격파)했으나, 그 다음 벌어진 戰鬪(전투)에서 我軍(아군)이 패해 1萬(만) 8千(천) 名(명)이 죽었다. 同年(동년) 10月(월) 毌丘儉(관구검)은 환도성(丸都城)을 攻擊(공격)하려 陷落(함락)시키고 사람을 죽였으며,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도망친 王(왕)을 追擊(추격)했다.
東川王(동천왕)은 劉遺(유유)의 計策(계책)으로 魏(위)나라 將帥(장수) 하나를 죽여 敵(적)을 昏亂(혼란)시킴으로써, 王基(왕기)의 軍隊(군대)를 물리치는 데 成公(성공)하였다. 首都(수도)로 歸還(귀환)한 東川王(동천왕)은 丸都城(환도성)이 전화(戰火)를 입어 都邑(도읍)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여겨, 247年(년)에 臨時(임시)로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首都(수도)를 臨時(임시)로 옮겼다. 이때의 平壤城(평양성)은 只今(지금)의 平壤(평양)直轄市(직할시) 一帶(일대)가 아니라 독로강(禿魯江: 將子江) 流域(유역)의 江界(강계) 地域(지역)으로 보거나 지안(集安)의 平地(평지) 地帶(지대)로 보는 見解(견해)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248年(년)에 東川王(동천왕)이 죽었으니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者(자)가 많았다고 한다.
以後(이후) 249年(년) 司馬懿(사마의)가 高平陵(고평릉)의 變(변)을 일으켜 高句麗(고구려)와 魏(위)의 戰爭(전쟁)은 一段落(일단락)되었다. 10年(년)後(후)인 259年(년) 曹魏(조위)의 將軍(장군) 울지해(尉遲楷)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자 12代(대)王(왕) 중천왕(中川王)이 騎兵(기병) 5千(천) 名(명)을 이끌고 양맥(梁貊)에서 싸워서 이들을 무찌르고 8千(천)여 名(명)을 목베었다.
한편 당시에 活動(활동)했던 蜀漢(촉한)의 宰相(재상) 諸葛亮(제갈량)이 高句麗(고구려)에 대해 評價(평가)하였는데 사람은 好戰的(호전적)이고 地形(지형)은 險峻(험준)하며 團合力(단합력)이 높아 侵攻(침공)해 服屬(복속)시키기 어렵다 說明(설명)하였다. 때문에 먼저 내부의 葛藤(갈등)부터 만드는 것이 于先(우선)이며, 이를 위해 工作(공작) 活動(활동)으로 내부의 葛藤(갈등)을 增幅(증폭)시키고 外交(외교)나 軍事(군사) 作戰(작전)을 通(통)해서 屈伏(굴복)시킬 것을 提示(제시)하였다.
前燕(전연)의 侵掠(침략)과 漢四郡(한사군) 逐出(축출) (270년-371년)
第(제)13代(대) 王(왕) 서천왕(西川王)은 280年(년) 숙신(肅愼, 靺鞨(말갈)이 쳐들어오자 同生(동생) 달가(達賈)를 보내 이를 擊退(격퇴)하게 했다. 달가(達賈)는 단로성(檀盧城)을 빼앗아 酋長(추장)을 죽이고, 6百(백)여 家口(가구)를 扶餘(부여) 南(남)쪽의 오천(烏川)으로 移駐(이주)시켰으며 部落(부락) 예닐곱 곳을 服屬(복속)시켰다.
292年(년) 西川王(서천왕)의 아들 第(제)14代(대) 王(왕) 暴君(폭군) 봉상왕(烽上王)이 뒤를 이어 卽位(즉위)하였다. 어려서부터 驕慢(교만)하고 放蕩(방탕)하며 疑心(의심)과 猜忌心(시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王位(왕위)에 오른 烽上王(봉상왕)은 王權(왕권)을 强化(강화)하기 위해 叔父(숙부)인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를 陰謀(음모)로 殺害(살해)하였다. 또한 293年(년)에는 同生(동생) 高咄固(고돌고),에게 逆謀罪(역모죄)를 씌워 自殺(자살)하게 하였으며 도망친 高咄固(고돌고)의 아들 고을불(高乙弗, 美川王(미천왕)을 追擊(추격)하게 하였다.
陰曆(음력) 8月(월)에 前燕(전연)의 모용외(慕容廆)가 侵入(침입)하였다. 이봉상왕은 신성으로 待避(대피)하려 하였으나 適(적)이 追擊(추격)해 왔다. 이때 新城(신성)의 재(宰)인 北部(북부)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00名(명)의 騎兵(기병)을 거느리고 王(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모용외(慕容廆)의 軍(군)을 만나 擊破(격파)하였다. 봉상왕(烽上王)은 고노자(高奴子)를 대형(大兄)으로 삼고 곡림(鵠林)을 食邑(식읍)으로 주었다.
296年(년) 陰曆(음력) 8月(월) 모용외(慕容廆)가 다시 侵入(침입)하여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西川王(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돌아갔다. 294年(년)에는 6代(대) 國相(국상) 상루(尙婁)가 죽어 南部(남부)의 대사자(大使者) 창조리(倉助利)를 7代(대) 國相(국상)으로 임명하였다.
모용외(慕容廆, 269년 ~ 333년)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時代(시대)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守將(수장) 298年(년) 陰曆(음력) 9月(월)에 凶年(흉년)이 들었으나 烽上王(봉상왕)은 宮闕(궁궐)을 增築(증축)하는 工事(공사)를 强行(강행)하여 百姓(백성)들의 怨聲(원성)이 높았다. 烽上王(봉상왕)은 臣下(신하)들의 諫言(간언)을 듣지 않고, 百姓(백성)들을 살피지 않았다.
300年(년)에도 凶年(흉년)이 들었으나 다시 宮闕(궁궐)을 增築(증축)하니 百姓(백성)들이 흩어졌다. 이에 國相(국상) 창조리(倉租利)가 王(왕)에게 百姓(백성)을 돌볼 것을 諫言(간언)하였으나 烽上王(봉상왕)은 오히려 王權(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하며 창조리(倉租利)를 威脅(위협)하였다. 300년 이에 倉助利(창조리)는 여러 臣下(신하)들과 謀議(모의)하여 烽上王(봉상왕)을 廢位(폐위)하고 鴨綠江(압록강)에서 소금장수 였다던 高乙弗(고을불)을 맞이하여 王(왕)으로 삼았다.
第(제)15代(대) 王(왕) 美川王(미천왕)이었다. 烽上王(봉상왕)은 禍(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 自決(자결)하였다. 봉상의 들에 葬事(장사)지내고 王號(왕호)를 奉上(봉상)이라 하였다. 美川王(미천왕)은 卽位(즉위) 初(초)부터 中國(중국) 郡縣(군현) 勢力(세력)과 치열하게 對立(대립)하였다.
302년에는 玄菟郡(현도군)을 攻擊(공격)하여 敵(적) 8千(천)여 名(명)을 사로잡았으며 311년에는 서안평(西安平)을 占領(점령)하여 낙랑군(樂浪郡) 및 대방군(帶方郡)의 보급로를 끊는 데 成功(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313년에는 樂浪郡(낙랑군)의 軍閥(군벌) 장통(張統)이 遼東(요동)으로 退却(퇴각)하였으며 314년에는 帶方郡(대방군)을 倂合(병합)하여 中國(중국) 郡縣(군현) 勢力(세력)을 逐出(축출)하였다. 315년에도 다시 玄菟城(현도성)을 攻擊(공격)하여 韓半島(한반도)에서 漢四郡(한사군)을 모두 逐出(축출)하였다.
뒤를 이어 王(왕)이 된 第(제)16代(대) 王(왕) 故國原王(고국원왕)대에 339년에 前燕(전연)이 쳐들어와 신성에 이르렀다. 故國原王(고국원왕)이 同盟(동맹)을 請(청)하자 前燕(전연)은 물러갔다. 이때 맺은 同盟(동맹) 關係(관계)에 따라, 340년에 前燕(전연)에 朝會(조회) (政治(정치)하기도 하였다. 342년 겨울에 모용황(參考(참고):연 태조 문명황제 모용황(燕 太祖 文明皇帝 慕容皝, 297년 ~ 348년, 在位(재위): 337년 ~ 348년)은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時代(시대) 前燕(전연)의 第(제)1代(대)(初代(초대) 皇帝(황제)로, 字(자)는 원진(元眞)이다.
生前(생전)에는 王(왕)을 稱(칭)하였으나, 모용준(慕容儁:[參考(참고):연 열조 경소황제 모용준(燕 烈祖 景昭皇帝 慕容儁, 319년 ~ 360년, 在位(재위): 348년 ~ 360년)은 中國(중국)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 時代(시대) 전연(前燕)의 第(제)2代(대) 皇帝(황제)이다.] 卽位(즉위) 後(후) 皇帝(황제)로 追尊(추존)되었다.)은 용성(龍城)으로 遷都(천도)한 後(후), 大軍(대군)을 이끌고 高句麗(고구려)로 쳐들어왔다.
慕容皝(모용황)은 왕우가 이끄는 1萬(만) 5千(천)의 小數(소수) 軍隊(군대)를 平坦(평탄)한 北(북)쪽 길로 보내고, 自身(자신)은 한수와 함께 5萬(만) 大軍(대군)을 이끌고 험난한 南(남)쪽 길을 택해 攻擊(공격)하는, 欺瞞(기만)戰術(전술)을 썼다.
하지만 이를 알아채지 못한 故國原王(고국원왕)은 北(북)쪽으로 王弟(왕제) 무(武)가 이끄는 正兵(정병) 5萬(만)을 派遣(파견)하고, 自身(자신)은 小數(소수)의 軍隊(군대)로 南(남)쪽을 지켰다. 結局(결국), 南(남)쪽 戰鬪(전투)에서 크게 敗(패)한 高句麗軍(고구려군) 中(중)에서 將軍(장군)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가 戰死(전사)하고, 丸都城(환도성)(尉那巖城(위나암성)이 陷落(함락)되었으며, 故國原王(고국원왕)은 單身(단신)으로 단웅곡(斷熊谷)으로 避身(피신)하였다.
故國原王(고국원왕)을 追擊(추격)한 前燕軍(전연군)은 母后(모후) 주씨(周氏)와 王妃(왕비)를 捕虜(포로)로 잡았으나, 北(북)쪽 길에서 故國原王(고국원왕)의 同生(동생) 무(武)의 軍隊(군대)를 만나 크게 敗(패)하여 퇴각하였다.
前燕軍(전연군)은 退却(퇴각)하는 길에 高句麗(고구려) 百姓(백성) 5萬(만) 名(명)을 잡아갔을 뿐만 아니라, 故國原王(고국원왕)의 부왕(父王)인 美川王(미천왕)의 美川王陵(미천왕릉)을 파헤쳐 美川王(미천왕)의 屍身(시신)까지 가져가는 蠻行(만행)을 저질렀다.
343년에 故國原王(고국원왕)은 同生(동생) 武(무)를 보내 前燕(전연)에 臣下(신하)의 禮(예)를 갖추고, 父王(부왕)인 美川王(미천왕)의 屍身(시신)을 돌려받았으며, 그 해 平壤(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居處(거처)를 옮겼다. 345년에 前燕(전연)이 慕容恪(모용각)을 보내 남소(南蘇)가 陷落(함락)되었으며, 349년에는 前燕(전연)의 亡命者(망명자)였던 송황(宋晃)을 前燕(전연)으로 送還(송환)하였다.
355년에 故國原王(고국원왕)은 前燕(전연)에 懇請(간청)하여 母后(모후) 周氏(주씨)를 돌려받는 한편, 前燕(전연)으로부터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고구려왕(征東大將軍 營州刺史 樂浪公 高句麗王)에 冊封(책봉)되었다. 以後(이후) 前燕(전연)은 前秦(전진)의 攻擊(공격)을 받아 衰退(쇠퇴)하였으며, 370년에 滅亡(멸망)하였다.
이때 故國原王(고국원왕)은, 高句麗(고구려)로 도망쳐온 太傅(태부) 慕容評(모용평:[參考(참고):모용평(慕容評, ? ~ ?)은 中國(중국)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 時代(시대) 전연(前燕)의 政治家(정치가)이자 武將(무장)으로, 모용외(慕容廆)의 아들이자 모용한(慕容翰)과 모용황(慕容皝), 모용인(慕容仁)의 同生(동생)이다.]을 逮捕(체포)하여 前秦(전진)에 送還(송환)함으로써 友好(우호)관계를 樹立(수립)하였다.
369년에 百濟(백제)가 馬韓(마한)을 征服(정복)하러 간 틈을 타, 故國原王(고국원왕)은 步(보) 卽(즉) 步兵(보병)·騎兵(기병) 2萬(만) 名(명)을 이끌고 치양성(雉壤城, 現(현) 黃海南道(황해남도) 白川郡(배천군), 舊(구) 모로성)으로 進擊(진격)하였다.
그러나 近肖古王(근초고왕)의 말 말굽을 상하게 한 罪(죄)를 짓고 高句麗(고구려)로 달아났던 百濟人(백제인) 사기(斯紀)가 다시 百濟(백제)에 投降(투항)하여, ‘高句麗(고구려)의 軍事(군사)가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 채운 허세일 뿐 날래고 용감한 者(자)들은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라는 高句麗(고구려)의 軍事情報(군사정보)를 百濟(백제)의 近仇首(근구수) 太子(태자)에게 알려주었다.
이에 高句麗軍(고구려군)의 主力部隊(주력부대)는 百濟軍(백제군)의 集中攻擊(집중공격)을 받고 무너져 내려 5000여명의 被害(피해)를 입고 故國原王(고국원왕)은 目的(목적)을 達成(달성)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百濟(백제)에게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黃海道(황해도) 新溪郡(신계군)까지 領土(영토)를 내주고 말았다.
371년에 故國原王(고국원왕)은 復讐(복수)를 위해 軍事(군사)를 일으켜 百濟(백제)에 再侵攻(재침공)하였다. 하지만 패하(浿河; 大同江(대동강) 江(강)가에 軍事(군사)를 埋伏(매복)한 近肖古王(근초고왕)이 奇襲的(기습적)으로 攻擊(공격)하자, 高句麗軍(고구려군)은 크게 敗(패)하고 말았다. 氣勢(기세)를 탄 近肖古王(근초고왕)은 同年(동년) 10月(월)에 精銳(정예) 軍事(군사) 3萬(만)을 이끌고 平壤城(평양성)으로 進擊(진격)해 왔고, 高句麗軍(고구려군)은 이를 어렵게 물리쳤으나 故國原王(고국원왕)이 戰死(전사)하고 말았다. 故國原王(고국원왕)은 고국(故國)의 들(原)에 葬事(장사)지내졌다. 이때부터 百濟(백제)와의 惡緣(악연)이 始作(시작)되어 百殘(백잔)이라 부르게 되었다.
中央集權制(중앙집권제)의 完成(완성)과 大國(대국)으로의 발돋움 (371년-413년)
故國原王(고국원왕)의 맏아들 第(제)17代(대) 王(왕) 小獸林王(소수림왕) 諱(휘): 고구부(高丘夫)는 高句麗(고구려) 歷史(역사)에서 가장 많은 業績(업적)을 남긴 聖君(성군)中(중) 한명으로 當時(당시)의 强大國(강대국)이자 先進國(선진국)이었던 前秦(전진)과 交流(교류)하여 韓國(한국) 最初(최초)로 佛敎(불교)와 道敎(도교)等(등)을 導入(도입)하고 韓國(한국) 最初(최초)의 敎育機關(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받아들여 儒敎(유교)의 理念(이념)을 받아들이고 人才(인재)를 育成(육성)해 官吏(관리)를 뽑았다. 또한 中央集權(중앙집권)國家(국가)의 土臺(토대)인 律令(율령)을 頒布(반포)하여 高句麗(고구려)를 中央集權(중앙집권)國家(국가)로 完成(완성)하였다.
小獸林王(소수림왕)이 닦아놓은 이러한 制度(제도)들을 바탕으로 後任(후임)인 高談德(고담덕)과 長壽王(장수왕)이 强力(강력)한 國力(국력)으로 征服(정복)戰爭(전쟁)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구리의 廣開土太王(광개토태왕) 石像(석상).
지안의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
小獸林王(소수림왕)의 孫子(손자)이자 故國壤王(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난 고담덕(高談德, 광개토태왕)은 只今(지금)도 中國(중국)과 日本(일본) 等地(등지)에서 호태왕(好太王)으로 傳(전)해지며, 耶律阿保機(야율아보기)와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Nourhachi和Aishingio) 以前(이전)에 堂代(당대) 東(동)아시아(亚洲:Asia) 最古(최고)의 征服者(정복자)였다.
高談德(고담덕)은 17살에 나이에 391년 王位(왕위)에 올라 卽位(즉위)하면서 韓國(한국) 最初(최초)의 年號(연호)를 頒布(반포)해 영락(永樂)이라 命名(명명)하고, 또한 君主(군주)를 王(왕)에서 태왕(太王)으로 格上(격상)해 부르게 하였다. 그 後(후) 바로 征服(정복)活動(활동)에 나섰다.
高談德(고담덕)은 18살이던 392년 7월 軍事(군사) 4萬(만) 名(명)을 거느리고 百濟(백제)의 北(북)쪽 邊境(변경)을 侵掠(침략)하여 石峴城(석현성) 等(등) 10여 個(개) 城(성)을 陷落(함락)시켰다. 百濟(백제)의 王(왕) 辰斯王(진사왕)은 高談德(고담덕)이 軍事(군사)를 부리는 데 能(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北(북)쪽의 여러 部落(부락)들이 다수 陷落(함락)되었다.
勝機(승기)를 탄 高句麗(고구려)는 10月(월)에 百濟(백제) 北坊(북방)의 天惠(천혜)의 要塞(요새)이자 重要地(중요지)인 關彌城(관미성)을 20일에 걸친 包圍(포위) 끝에 쳐서 陷落(함락)시켰다.
395년에는 浿水(패수)에서 百濟軍(백제군) 8000여 名(명)을 生捕(생포)하거나 죽이는 大勝(대승)을 거두었다. 396년 高句麗(고구려)는 大大的(대대적)으로 百濟(백제)를 攻擊(공격)하여 阿利水(아리수) 以北(이북)의 58個(개) 城(성), 700여 個(개) 村落(촌락)을 占領(점령)하고 慰禮城(위례성)을 包圍(포위)하였다.
이때 百濟(백제) 阿莘王(아신왕)에게서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降伏(항복)을 받아 阿莘王(아신왕)의 同生(동생)과 百濟(백제)의 大臣(대신) 10名(명)을 人質(인질)로 잡고 百濟(백제)를 事實(사실)상 屬邦(속방)으로 만들어 凱旋(개선)하였다.
契丹(거란)을 征伐(정벌)하여 小獸林王(소수림왕) 8년(378년)에 契丹(거란)의 侵入(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名(명)의 百姓(백성)들을 되찾는다.(392년 9월)395년에는 염수(鹽水)로 進出(진출)하여 契丹族(거란족) 패려(稗麗)를 征伐(정벌)하여 服屬(복속)시키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들을 鹵獲(노획)하였다.
一部(일부) 學者(학자)들은 《三國史記(삼국사기)》의 契丹(거란) 征伐(정벌)(392년)과 廣開土王陵碑(광개토왕릉비)의 卑麗(비려) 征伐(정벌)(395년)을 同一(동일)한 事件(사건)에 대한 記錄(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398년에는 肅愼(숙신)을 征伐(정벌)하여 東北(동북) 國境(국경) 地帶(지대)를 安定(안정)시켰다.
高談德(고담덕)은 399년에 평양(平壤)으로 巡幸(순행)하였다. 百濟(백제)와 倭(왜)는 新羅(신라)를 攻擊(공격)하고, 新羅(신라)는 平壤(평양)으로 使臣(사신)을 보내 救援(구원)을 請(청)하였다. 高談德(고담덕)은 400년에 新羅(신라)에 5萬(만) 大軍(대군)을 派遣(파견)하여 倭軍(왜군)을 물리쳤다.
이때 倭軍(왜군)은 金官伽倻(금관가야) 從拔城(종발성)까지 退却(퇴각)하였고, 高句麗軍(고구려군)은 金官伽倻(금관가야) 地域(지역)까지 쫓아가 倭軍(왜군)을 擊退(격퇴)시킨다.
學界(학계)에서는 이때 金官伽倻(금관가야)의 勢力(세력)이 急速度(급속도)로 弱(약)해져, 金官伽倻(금관가야)가 主導(주도)하던 前期(전기) 伽倻(가야) 聯盟(연맹)이 崩壞(붕괴)하고 大伽倻(대가야)가 主導(주도)하는 後期(후기) 伽倻(가야) 聯盟(연맹)이 始作(시작)되었다고 본다.
高談德(고담덕)은 400년에 新羅(신라)를 救援(구원)하면서 新羅(신라) 王(왕)을 奈勿(내물) 麻立干(마립간)에서 實聖(실성) 麻立干(마립간)으로 交替(교체)한다. 以後(이후) 高句麗軍(고구려군)은 백여 년 동안 新羅(신라) 땅에 머물려 新羅(신라)에 影響力(영향력)을 行事(행사)하였고, 新羅(신라)는 高句麗(고구려)에게 朝貢(조공)하는 保護國(보호국)이 된다. 404년에는 대방(帶方) 地域(지역)으로 쳐들어 온 百濟(백제)와 倭軍(왜군)을 潰滅(궤멸)시켰다.
400년 2월에 高句麗(고구려) 主力軍(주력군)이 新羅(신라)에서 倭軍(왜군)을 擊退(격퇴)하고 있을 때 後燕(후연) 王(왕) 募容盛(모용성)은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攻擊(공격)한다. 이에 高談德(고담덕)은 報復戰(보복전)을 펼쳐 402년에 後燕(후연)의 숙군성(宿軍城)을 攻擊(공격)하여 陷落(함락)시켰으며 404년에도 後燕(후연)을 征伐(정벌)하였다,
비슷한 時期(시기)에 연군(燕郡)까지 攻擊(공격)하여 陷落(함락)시켰다. 연군은 只今(지금)의 베이징(北京) 近方(근방)에 位置(위치)한 地域(지역)으로 이 記錄(기록)에 따라 베이징(北京) 一帶(일대)까지 征服(정복)했다는 主張(주장)이 있다.
이를 回復(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後燕軍(후연군)을 405년 遼東省(요동성), 406년 목저성(木抵城)에서 擊破(격파)하여 遼東(요동) 占領(점령)을 確固(확고)히 하였다. 또한 407년에는 5萬(만) 軍隊(군대)를 動員(동원)하여 後燕(후연) 軍隊(군대)를 擊破(격파)하여 막대한 戰利品(전리품)을 鹵獲(노획)하고 돌아오는 길에 後燕(후연)의 6個(개) 城(성)을 占領(점령)하였다.
後燕(후연)을 牽制(견제)하기 위하여 남연(南燕)과 友好(우호)關係(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後燕(후연)이 滅亡(멸망)하고 高句麗系(고구려계)인 고운(高雲)이 北燕(북연)을 建國(건국)하자 408년에 友好(우호)關係(관계)를 맺음과 同時(동시)에 사실`상의 屬邦(속방)으로 삼아 西(서)쪽 國境(국경)을 安定(안정)시켰다. 410년에는 이미 高句麗(고구려)의 屬邦(속방)이던 동부여(東夫餘)를 완전히 屈伏(굴복)시켰다.
高談德(고담덕)은 內治(내치)에도 힘썼다. 평양(平壤, 平壤(평양)直轄市(직할시)을 크게 重視(중시)하여 393년에는 9個(개) 절을 平壤(평양)에 創建(창건)하고 399년에는 王(왕)이 直接(직접) 平壤(평양)에 行次(행차)하기도 하였다. 409년에는 나라 東(동)쪽에 禿山城(독산성)等(등) 6個(개) 城(성)을 쌓고 平壤(평양)의 民戶(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으며 다시 南(남)쪽으로 巡幸(순행)하였다.
또한 歷代(역대) 王陵(왕릉)의 整備(정비)에 힘써 수묘인(守墓人) 制度(제도)를 整備(정비)하고 實施(실시)할 것을 長壽王(장수왕)에게 遺言(유언)하였다. 이러한 內治(내치)로 廣開土大王碑(광개토대왕비)에는 “나라가 富强(부강)하고 百姓(백성)이 便安(편안)하였으며 五穀(오곡)이 豊盛(풍성)하게 익었다”라 稱頌(칭송)하는 記錄(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南進(남진)政策(정책)과 平壤(평양)遷都(천도) (413년-531년)
長壽王(장수왕)은 高談德(고담덕)의 아들로, 諱(휘)는 고거련(高巨連)이다. 연가(延嘉), 연수(延壽), 건흥(建興) 等(등)의 年號(연호)가 새겨진 遺物(유물)이 一部(일부) 發見(발견)되고 있어 獨自的(독자적)인 年號(연호)를 使用(사용)하였을 것으로 推定(추정)된다.
414년에 廣開土太王碑(광개토태왕비)를 建立(건립)하여 廣開土太王(광개토태왕)의 業績(업적)을 기렸으며, 423년(추정)에는 忠州(충주)에 忠州(충주) 高句麗碑(고구려비)를 세워 征服(정복)活動(활동)을 기리었다.
長壽王(장수왕)은 內部的(내부적)으로 王權(왕권)의 位相(위상)을 높여서 국내성(國內城, 집안)의 貴族(귀족)勢力(세력)을 弱化(약화)시키고, 南進(남진)政策(정책)을 效率的(효율적)으로 運營(운영)하기 위하여 427년 宗廟社稷(종묘사직)을 韓半島(한반도) 北部(북부)의 평양(平壤, 平壤(평양)直轄市(직할시)으로 遷都(천도)하였다.
長壽王(장수왕)은 대성산성(大城山城, 平壤(평양)直轄市(직할시) 大城山(대성산)을 쌓고 안학궁(安鶴宮, 平壤(평양)直轄市(직할시) 안학동)을 建設(건설)해 王室(왕실)의 威嚴(위엄)을 높이고 王權(왕권)을 强化(강화)하였다.
476년경 삼국 시대(三國時代) ~ 지안(集安)의 將軍塚(장군총).
[中國(중국) 吉林省(길림성) 集安縣(지안현) 동구 龍山(룽산)에 있는 代表的(대표적)인 高句麗(고구려) 基壇式(기단식) 돌방돌 무지무덤(石室積石塚) 1,100 개 화강암 장대석[長臺石:직사각형 입방체]를 쌓아 만든 7층 피라미드형 무덤이다.
무덤 1층의 평면은 정사각형으로 각 변의 길이 29.34m 높이 11.28m 이며, 면적은 860평방미터로 太王陵(태왕릉) 千秋塚(천추총) 다음으로 큰 무덤이다. 年代(연대)는 大略(대략) 4世紀(세기) 後半(후반)에서 5世紀(세기) 前半(전반)으로 推定(추정)된다.
將軍塚(장군총)의 主人公(주인공)에 關(관)해서는 廣開土王陵(광개토왕릉) 이라는 說(설)과 그의 아들 長壽王(장수왕)의 陵(능)이라는 說(설)로 나누어지지만 平壤(평양)의 學者(학자)들은 大槪(대개) 太王陵(태왕릉)을 廣開土王陵(광개토왕릉)으로, 將軍塚(장군총)을 長壽王(장수왕)의 陵(능) 推定(추정)하고 있다.
平壤(평양)直轄市(직할시) 안학동의 안학궁터.
435년, 北燕(북연) 皇帝(황제) 馮弘(풍홍)이 密使(밀사)를 보내 亡命(망명)을 要請(요청)하였으며, 長壽王(장수왕)은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 北燕(북연)이 北魏(북위)에 의해 滅亡(멸망)당할 때 軍隊(군대)를 보내 馮弘(풍홍) 및 그 一族(일족)들을 救出(구출)하였다.
高句麗(고구려)로 도망쳐온 馮弘(풍홍)은 스스로의 勢力(세력)을 믿고 行悖(행패)를 부렸으며 이에 長壽王(장수왕)은 馮弘(풍홍)의 太子(태자)를 人質(인질)로 잡고 侍中(시중)드는 人員(인원)도 沒收(몰수)하였다. 이에 馮弘(풍홍)은 宋(송)나라에 亡命(망명)을 要請(요청)하였으며, 이 事實(사실)을 알게 된 長壽王(장수왕)은 軍隊(군대)를 보내 馮弘(풍홍)을 殺害(살해)하였다.
이때 宋(송)나라 使臣(사신) 王白駒(왕백구)가 軍事(군사)를 이끌고 高句麗軍(고구려군)을 攻擊(공격)하여 將帥(장수) 고구(高仇)가 죽고 손수(孫漱)가 生捕(생포)되었는데, 長壽王(장수왕)은 다시 王白駒(왕백구)를 붙잡아 宋(송)으로 押送(압송)하였다.
高句麗(고구려)와 外交(외교) 關係(관계)를 망칠 수 없었던 宋(송)나라에서는 王白駒(왕백구)를 監獄(감옥)에 가둬 高句麗(고구려)의 눈치를 본 後(후) 釋放(석방)하였다.
中國(중국)과의 外交(외교) 關係(관계)가 安定(안정)된 가운데 長壽王(장수왕)은 百濟(백제)를 征伐(정벌)하는 南進(남진) 政策(정책)을 推進(추진)하였다.
그러나 百濟(백제)와 新羅(신라)가 同盟(동맹)을 맺어 對抗(대항)하였기 때문에 454년부터 新羅(신라)와 敵對關係(적대관계)가 되었다. 468년에는 新羅(신라)의 悉直州城(실직주성)을 攻擊(공격)하여 占領(점령)하였으며, 이듬해에는 百濟(백제)가 南(남)쪽 邊境(변경)을 侵攻(침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幽燕(유연)과 只今(지금)의 내몽골(内蒙古) 대흥안령(大兴安岭) 山脈(산맥) 隣近(인근)에 位置(위치)한 地豆于(지두우)를 分割(분할) 占領(점령)하려 하였다.
472년, 百濟(백제) 蓋鹵王(개로왕)은 北魏(북위)에 使臣(사신)을 보내 高句麗(고구려)를 攻擊(공격)해 줄 것을 要請(요청)하였는데, 北魏(북위)는 이 事實(사실)을 高句麗(고구려)에 알려주었다.
이에 高句麗(고구려)는 百濟(백제)와 全面戰(전면전)을 準備(준비)하는 한편 僧侶(승려) 도림(道琳)을 諜者(첩자)로 보내 百濟(백제)의 內情(내정)을 偵探(정탐)하였다.
도림(道琳)은 바둑으로 蓋鹵王(개로왕)의 歡心(환심)을 사고 蓋鹵王(개로왕)에게 無理(무리)한 土木工事(토목공사)를 일으키게 使嗾(사주)하여 百濟(백제)의 國力(국력)을 消耗(소모)시켰다.
이러한 물밑작업을 마친 長壽王(장수왕)은 475년에 百濟(백제)를 攻擊(공격)하여 首都(수도) 慰禮城(위례성)을 陷落(함락)시키고 蓋鹵王(개로왕)을 사로잡아 殺害(살해)하는 큰 勝利(승리)를 거두고 百濟(백제)를 다시 屬邦(속방)으로 만들었다.
489년에는 新羅(신라)를 攻擊(공격)하여 狐鳴城(호명성) 等(등) 7個(개) 城(성)을 陷落(함락)시키고 彌秩夫(미질부)까지 進擊(진격)하였다. 이러한 征服(정복) 戰爭(전쟁)을 通(통)해 高句麗(고구려)는 漢江(한강)周邊(주변)(現(현) 首都圈(수도권)을 確固(확고)하게 掌握(장악)해 551년까지 이곳을 약 80여년동안 支配(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475년 忠州(충주) 地域(지역)까지 征服(정복)하여 국원성(國原城)으로 命名(명명)하여 重要(중요) 據點(거점)으로 삼았다. 국원(國原)이라는 말은 '나라의 根源(근원)이 되는 땅' 또는 '나라의처음, 본디가 되는 땅'이라는 意味(의미)를 갖는다. 그곳에 남아있는 代表的(대표적)인 遺蹟(유적)은 忠州(충주) 高句麗碑(고구려비)가 있다.
또한 長壽王(장수왕)은 國號(국호)를 고구려(高句麗)에서 고려(高麗)로 縮約(축약)해 改稱(개칭)하였는데, 이는 忠州(충주) 高句麗碑(고구려비)에 記錄(기록)이 남겨져있다.
末年(말년)의 長壽王(장수왕)은 征服(정복) 戰爭(전쟁)을 그만두고 內治(내치)에 힘썼으며, 中國(중국)과의 外交(외교) 關係(관계)도 繼續(계속) 友好的(우호적)으로 維持(유지)하여 安定(안정)을 謳歌(구가)하였다. 그리고 491년 陰曆(음력) 12월, 98歲(세)를 一期(일기)로 死亡(사망)하였다. 이 消息(소식)을 들은 北魏(북위) 孝文帝(효문제)는 特別(특별)히 直接(직접) 哀悼(애도)를 表(표)했으며 官爵(관작)을 追贈(추증)하고 강왕(康王)이라 諡號(시호)를 내렸다.
長壽王(장수왕)의 뒤를 이은 文咨明王(문자명왕) 諱(휘) 고나운(高羅雲)은 494년 扶餘(부여)의 王(왕)이 妻子(처자)를 데리고 高句麗(고구려)에 降伏(항복)하여 扶餘(부여)를 服屬(복속)시키는 等(등) 長壽王(장수왕)의 政策(정책)을 이었으며 文咨明王(문자명왕) 治世(치세)에 高句麗(고구려)는 最全盛期(최전성기)를 謳歌(구가)하였다. 文咨明王(문자명왕)의 뒤를 이은 安臧王(안장왕)대까지 高句麗(고구려)는 太平聖代(태평성대)를 이뤘으나 安原王(안원왕)대에 이르러 紀綱(기강)이 흔들리기 始作(시작)하였다.
高(고)隨(수)戰爭(전쟁)과 薩水大捷(살수대첩) (531년-618년)
高句麗(고구려) 第(제)25代(대)王(왕) 平原王(평원왕)은 559년 卽位(즉위)하여 都邑(도읍)을 대성산성(大城山城, 平壤(평양)直轄市(직할시) 대성산)에서 평양성(平壤城, 現(현) 平壤(평양)直轄市(직할시) 平壤驛(평양역) 周邊(주변)로 移轉(이전)하였다. 한편 북주의 우문옹이 侵掠(침략)해오자 平原王(평원왕)의 부마(駙馬:예전에, 皇帝(황제)나 임금(王(왕)의 사위(壻(서)에게 주던 稱號(칭호)인 온달(溫達)이 막아냈다. 溫達(온달)은 後(후)에 韓國(한국) 온(溫)씨의 祖上(조상)이 되었다.
수 양제(隋 煬帝).
한편 북주(北周)에서는 568년 양견(楊堅):[수 문제(隋文帝, 541년 7월 21일 ~ 604년 8월 13일)는 隋(수)나라의 第(제)1代(대) 皇帝(황제)(在位(재위): 581년 3월 4일 ~ 604년 8월 13일)이다.
姓名(성명)은 양견(楊堅), 諡號(시호)는 문황제(文皇帝), 廟號(묘호)는 고조(高祖)이다. 소자(小字)는 나라연(那羅延, 산스크리트어(Sanskrit)로 金剛不壞:Geumgang Indestruction)를 의미함)이고, 鮮卑(선비)로서의, 姓(성)은 보륙여(普六茹)인데, 보륙여(普六茹)는 父親(부친)인 楊忠(양충:507년 ~ 568년)은 中國(중국) 섬서(陝西) 화음(華陰)사람으로 南北朝(남북조) 時代(시대) 北朝(북조)인 西魏(서위)와 北洲(북주)의 大臣(대신)으로 隋(수) 文帝(문제) 楊堅(양견)의 父親(부친)이다.
12代(대)將軍(장군) 中(중) 한 사람으로서, 大司空(대사공)과 수국공(隨國公) 爵位(작위)를 받았으며, 아들인 楊堅(양견)이 隋(수)나라를 建國(건국)하자, 太祖(태조) 무원황제(太祖 武元皇帝)에 推尊(추존)되었다.)이 西魏(서위) 恭帝(공제)로부터 下賜(하사)받은 姓(성)이다.
北周(북주)를 滅亡(멸망)시키고 隋(수)나라를 建國(건국)하였으며, 以後(이후) 中原(중원) 大陸(대륙)을 물려받게 되었다. 楊堅(양견)은 우문옹(周 宇文邕:[주 고조 무황제 우문옹(周 高祖 武皇帝 宇文邕, 543년 ~ 578년)은 中國(중국) 南北朝(남북조) 時代(시대) 北周(북주)의 第(제) 3代(대) 皇帝(황제)(在位(재위):560년 ~ 578년)이다. 西魏(서위)의 實權者(실권자) 宇文泰(우문태)의 넷째 아들이다.]과 뒤를 이은 우문윤宇文邕:[주 고조 무황제 우문옹(周 高祖 武皇帝 宇文邕, 543년 ~ 578년)은 中國(중국) 南北朝(남북조) 時代(시대) 北周(북주)의 第(제) 3代(대) 皇帝(황제)(在位(재위):560년 ~ 578년)이다.
西魏(서위)의 實權者(실권자) 宇文泰(우문태)의 넷째 아들이다.]의 寵愛(총애)를 받았으며 우문윤(宇文毓);이 죽자 權力(권력)을 獨占(독점)하였다. 이미 北周(북주) 宇文邕(우문옹)이 中國(중국) 統一(통일)을 進行(진행)했었으나, 愼重(신중)한 楊堅(양견)은 細密(세밀)하게 準備(준비)했고, 長城(장성)을 復舊(복구)하여 北(북)쪽 突厥(돌궐)에 대한 防禦(방어)를 强化(강화)했고, 한구(邗溝) 개착(開鑿)으로 回收(회수)와 長江(장강) 連結(연결)해서 補給路(보급로)를 確保(확보)한다.
뒤이어, 곧 北朝(북조) 傀儡政權(괴뢰정권)인 後梁(후량)을 倂合(병합)하여 前哨(전초)基地(기지)로 삼았고. 588년 文帝(문제)는 기어코 秦(진)나라에 遠征軍(원정군)을 派遣(파견)하였다. 이 時期(시기) 遠征軍(원정군) 總司令官(총사령관)은 次男(차남) 秦王(진왕) 楊光(양광)(後(후)에 隋(수) 煬帝(양제)이었고, 誇張(과장)이지만 51萬(만) 8千(천)이라는 大軍(대군)으로 다음해(589년) 秦(진)나라의 首都(수도) 健康(건강)을 손쉽게 陷落(함락)했다.
秦(진)나라 皇帝(황제) 陳叔寶(진숙보)는 우물에 숨지만 잡혔다. 秦(진)나라 滅亡(멸망) 以後(이후)(184년 黃巾賊(황건적)의 亂(난) 때부터로~ 약 405년) 기나긴 分列(분열) 時代(시대)가 終結(종결)되었고, 隋(수) 文帝(문제)는 마침내 中國(중국)을 統一(통일)하였다. 社會(사회)가 安定(안정)되자 人口(인구)는 2千(천)600餘萬(여만)名(명)(滅亡(멸망) 무렵)에 이르도록 增加(증가)했다.
그 해 말에 楊堅(양견)은 隨國公(수국공)에서 수왕(隋王)의 자리에 오른 뒤, 이윽고 다음해 우문천(宇文阐)으로부터 禪讓(선양)을 받아 隋(수)나라를 建國(건국)해 隋(수) 文帝(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隋(수) 文帝(문제)의 治世(치세)를 當時(당시) 年號(연호)에 依據(의거)해 개황(開皇)의 치(治) 라고 불렀다. 隋(수)는 邊方(변방)을 安佺(안전)시키기 위해 突厥(돌궐)과 高句麗(고구려)를 牽制(견제)하였다.
隋(수)나라는 高句麗(고구려)에 使臣(사신)을 보내 高句麗(고구려)의 領土(영토)를 廉探(염탐)하였고, 그 後(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使臣(사신)을 보내 地形(지형)을 알아보게 하였다. 이에 平原王(평원왕) 亦是(역시) 隋(수)나라에 使臣(사신)을 보내 動態(동태)를 살폈으며, 마침내 隋(수) 文帝(문제)가 高句麗(고구려)를 攻擊(공격)하기 위해 秘密裏(비밀리)에 軍隊(군대)를 養成(양성)하고 있다는 消息(소식)을 접하자, 平原王(평원왕)은 이에 對備(대비)하여 防禦(방어) 準備(준비)를 하였다.
隋(수) 文帝(문제)는 이 事實(사실)을 듣고 글을 보내 이를 꾸짖었다. 隋(수) 文帝(문제)는 그해 陰曆(음력) 6월에 漢王(한왕) 楊諒(양량)과 王世績(왕세적)을 大元帥(대원수)로 任命(임명)하고, 周羅睺(주라후)에게 水軍(수군)을 맡겨 水陸軍(수륙군) 30萬(만) 名(명)을 動員(동원)하여 水陸(수륙) 竝進策(병진책)으로 高句麗(고구려)를 征伐(정벌)하고자 하였다. 周羅睺(주라후)의 水軍(수군)은 東萊(동래)에서 出發(출발)하여 平壤(평양)으로 向(향)하였으나 途中(도중)에 爆風(폭풍)을 만나 大部分(대부분)의 兵力(병력)을 잃고 撤收(철수)했다.
을지문덕(乙支文德) 將軍(장군).
隋(수)나라가 實際(실제)로 30萬(만)의 大軍(대군)을 動員(동원)한 것에 衝擊(충격)을 받은 嬰陽王(영양왕)은 隋(수)나라에 使臣(사신)을 보내어 謝罪(사죄)하고 표를 올리어 “遼東(요동)分土(분토)의 臣下(신하) 아무개”라고 일컬으니 隋(수) 文帝(문제)는 이에 軍事(군사)를 撤回(철회)하고 처음과 같이 待遇(대우)하였다. 文帝(문제)가 604년 죽자 뒤를 이어 隋(수) 煬帝(양제)가 卽位(즉위)하였다.
煬帝(양제)는 卽位(즉위)하자마자 大大的(대대적)인 土木(토목) 工事(공사)를 일으켰다. 萬里長城(만리장성)을 새로이 쌓게 하였으며, 아버지가 中斷(중단)시킨 大運河(대운하)의 工事(공사)를 再改(재개)시켰다. 이 大運河(대운하)는 北京(북경베이징(北京, Beijing)에서 항주(杭州, Hangzhou)까지 짓는 大工事(대공사)로, 이에 百姓(백성)들의 不滿(불만)이 커져 갔지만 그것도 모자라 楊光(양광)은 首都(수도) 長安(장안) 代身(대신) 洛陽(낙양)에 동경(東京)을 쌓게 하여 百姓(백성)들의 勞苦(노고)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大運河(대운하)는 以後(이후) 南(남)쪽의 長江(장강)과 北(북)쪽의 黃河(황하)를 連結(연결)시켜서 南北(남북) 融合(융합)에 크게 이바지하기도 했다.
煬帝(양제)는 對外的(대외적)으로 강경한 입장을 取(취)했다. 北坊(북방)에서 中國(중국)을 넘보는 突厥(돌궐)과 吐谷渾(토욕혼)을 攻略(공략)하는 데 成功(성공)하여 領土(영토)는 넓어졌다. 그러나 煬帝(양제)는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고, 高句麗(고구려)에 使臣(사신)을 보내 朝貢(조공)을 要求(요구)했으나 高句麗(고구려)의 嬰陽王(영양왕)은 이러한 要求(요구)를 不當(부당)하다 생각하고 拒絶(거절)하였다.
그 後(후) 數(수)차례 使臣(사신)을 보내 朝貢(조공)과 入朝(입조)하라고 壓力(압력)을 넣었지만 高句麗(고구려)는 이에 전혀 應(응)하지 않았다. 이에 煬帝(양제)는 아버지 文帝(문제)가 縮積(축적)한 모든 富(부)를 蕩盡(탕진)해서 高句麗(고구려)를 攻擊(공격)하고자 했다. 煬帝(양제)는 總(총)3번에 걸쳐 高句麗(고구려)를 攻擊(공격)하였다.
612년 正月(정월) 隋(수) 煬帝(양제)는 113萬(만) 3800名(명)을 이끌고 大大的(대대적)인 高句麗(고구려) 攻擊(공격)에 나섰다. 出發(출발)만 해도 40일이 걸렸으며 그 行列(행렬)이 자그마치 1千(천)여리(400km)가 되었다. 左將軍(좌장군) 宇文述(우문술)의 軍事(군사) 45萬(만)名(명), 右將軍(우장군) 于仲文(우중문)이 이끄는 軍事(군사) 45萬(만)名(명)의 大規模(대규모) 出征(출정)이었다.
그리고 隋(수) 煬帝(양제) 自身(자신)이 이끄는 軍事(군사) 數(수)만해도 26萬(만)名(명), 行列(행렬)이 200(73km)여리에 달했다. 거기다 兵站(병참)支援(지원)까지하면 約(약) 300萬(만)名(명)에 달했다. 그러나 隋(수) 煬帝(양제)의 大軍(대군)은 高句麗(고구려)의 守成戰(수성전), 淸野戰(청야전)과 遼東(요동)의 酷毒(혹독)한 氣候(기후)等(등)으로 事實(사실)상 瓦解(와해)되었으며, 612년 陰曆(음력) 7月(월) 高句麗(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 現(현) 總理(총리) 乙支文德(을지문덕)이 살수(薩水, 淸川江(청천강))에서 宇文述(우문술), 于仲文(우중문)에 30萬(만) 5000名(명)을 壞滅(괴멸)시키고 이어 강이식(姜以式), 고건무(高建武, 榮留王(영류왕)등 高句麗(고구려) 名將(명장)들의 猛活躍(맹활약)으로 遠征(원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戰爭(전쟁)을 通(통)해 高建武(고건무)는 그 功勞(공로)를 認定(인정)받아 嬰陽王(영양왕)의 뒤를 이어 榮留王(영류왕)이 되었다. 以後(이후) 乙支文德(을지문덕)의 남은 後孫(후손)들은 韓國(한국)의 목천 돈씨(木川 頓氏)가 되었고 姜以式(강이식)의 後孫(후손)들은 韓國(한국)의 진주 강씨(晉州 姜氏)가 되었다.
견벽청야(堅壁淸野), 청야수성(淸野守城)
以後(이후)에도 隋(수) 煬帝(양제)는 高句麗(고구려)를 3次(차), 4次(차) 侵入(침입)하였으나 隋(수)나라 內部(내부)의 反亂(반란)으로 撤收(철수)하거나 撫摩(무마)되었다. 高句麗(고구려)와의 戰爭(전쟁)에 必要(필요) 以上(이상)의 國力(국력)을 몰아넣은 隋(수)나라는 617년 이연(李淵, 唐(당) 高祖(고조)等(등)의 反亂(반란)으로 滅亡(멸망)하였다.
淵氏(연씨) 執權(집권)과 高(고)唐(당)戰爭(전쟁)의 勃發(발발) (618년-668년)
高句麗(고구려)-隋(수) 戰爭(전쟁)에서 2인자에 해당하는 莫離支(막리지)에 있던 乙支文德(을지문덕)과 함께 戰爭(전쟁)을 勝利(승리)로 이끈 一等功臣(일등공신) 榮留王(영류왕)은 强硬路線(강경노선)이었던 嬰陽王(영양왕)에 뒤를 이어 卽位(즉위)한 後(후) 줄곧 親黨(친당) 路線(노선)을 維持(유지)해왔다.
王(왕)을 中心(중심)으로 國內城(국내성)과 穩健派(온건파)들이 得勢(득세)하여 여론을 左之右之(좌지우지)하였다. 榮留王(영류왕)은 唐(당)나라와 高句麗(고구려)-隋(수) 戰爭(전쟁) 當時(당시) 잡혀갔던 兩國(양국)의 捕虜(포로)들을 交換(교환)하고 道敎(도교)를 輸入(수입)하는 等(등) 多方面(다방면)에서 서로 交流(교류)하였다.
624년에는 唐(당)나라로부터 上柱國(상주국) 요동군공고구려왕(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王)에 冊封(책봉)되기도하여 平壤城內(평양성내)의 强硬派(강경파)들의 反感(반감)을 샀다.
626년 皇太子(황태자) 李建成(이건성)을 죽이고 唐(당) 高祖(고조)를 壓迫(압박)해 禪位(선위)로써 簒奪(찬탈)한 唐(당) 太宗(태종) 李世民(이세민)이 帝位(제위)에 오르자 榮留王(영류왕)은 발맞춰 使臣(사신)을 보내 交流(교류)하였다.
百濟(백제)와 新羅(신라)가 唐(당)에 高句麗(고구려)가 唐(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다고 呼訴(호소)하자, 唐(당)은 高句麗(고구려)에 百濟(백제)와 新羅(신라)와 和親(화친)하라고 慫慂(종용)하였다. 榮留王(영류왕)은 唐(당) 太宗(태종)이 한 要求(요구)를 受容(수용)해 百濟(백제)와 新羅(신라)와 和親(화친)하였다.
淵蓋蘇文(연개소문) 莫離支(막리지).
641년 唐(당) 太宗(태종)은 王太子(왕태자)의 예방에 답하고자 職方郎中(직방낭중) 陳大德(진대덕)을 高句麗(고구려)에 보내겠다는 書信(서신)을 보낸 問題(문제)로 强硬派(강경파)와 穩健派(온건파)는 再對立(재대립)하였다. 唐(당)의 職方郎中(직방낭중) 陳大德(진대덕)은 高句麗(고구려)에 들어와 요수에서 平壤城(평양성)까지 高句麗(고구려)의 地理(지리)를 자세히 觀察(관찰)하고 各(각) 城(성)에 配置(배치)된 軍事力(군사력)까지 綿密(면밀)하게 照査(조사)하는 等(등) 間諜(간첩)으로서 活動(활동)하였다.
使臣(사신) 陳大德(진대덕)은 高句麗(고구려)에 머물며 隋(수)나라와의 戰爭(전쟁)에서 高句麗(고구려)가 이긴 事件(사건)을 記念(기념)하는 勝戰塔(승전탑)을 허물고, 戰死者(전사자)의 遺骨(유골)을 모아 葬禮(장례)를 치러서 高句麗(고구려)의 民族感情(민족감정)을 刺戟(자극)하고, 高句麗軍(고구려군)에 잡힌 隋(수)나라 軍事(군사)들을 만나며 高句麗(고구려)의 實情(실정)을 면밀히 照査(조사)하였다.
榮留王(영류왕)은 이에 抗議(항의)하거나 追放(추방)을 하지 않고 陳大德(진대덕)에 대한 强硬派(강경파)들의 不滿(불만)을 無視(무시)했다. 唐(당)에 歸國(귀국)한 陳大德(진대덕)은 곧바로 唐(당) 太宗(태종)에게 高句麗(고구려)를 攻擊(공격)하라고 諫言(간언)하였다.
高句麗(고구려)는 隋(수)나라를 뒤이은 唐(당)나라와도 對峙(대치)하였다. 高句麗(고구려)는 唐(당)의 攻擊(공격)에 對備(대비)하여 千里長城(천리장성)을 쌓았는데, 淵蓋蘇文(연개소문)은 이 工事(공사)를 監督(감독)하면서 勢力(세력)을 키웠다.
이에 威脅(위협)을 느낀 中央(중앙) 貴族(귀족)이 淵蓋蘇文(연개소문)을 除去(제거)하려 하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은 642년 10월 莫離支(막리지)의 亂(난)을 일으켜 榮留王(영류왕)을 비롯한 貴族(귀족)을 모두 殺害(살해)하고, 寶藏王(보장왕)을 王(왕)으로 세운 뒤 2인자였던 莫離支(막리지)보다 더 높은 事實(사실)상의 1인자 大莫離支(대막리지)라는 職位(직위)를 新設(신설)하고 그 자리에 올라 政權(정권)을 簒奪(찬탈)해 以後(이후) 642년부터 668년까지 26년간 연남생(淵男生), 연남건(淵男建)등이 代代(대대)로 權力(권력)을 世襲(세습)하는 淵氏政權(연씨정권)을 樹立(수립)하였다. 642년 安市城主(안시성주)(楊萬春(양만춘)이 反旗(반기)를 들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이 軍隊(군대)를 보내 攻擊(공격)하였다.
高句麗(고구려)는 4世紀(세기)경 小獸林王(소수림왕)대에 佛敎(불교)를 導入(도입)하고 6世紀(세기)경까지 國敎(국교)로 維持(유지)해왔으나 7世紀(세기)경 淵蓋蘇文(연개소문)이 佛敎(불교)를 彈壓(탄압)하고 僧侶(승려)들을 追放(추방)하여 한편으론 唐(당)나라로부터 道敎(도교)를 輸入(수입)하여 道敎(도교)를 國敎(국교)로 壯麗(장려)하였다. 643년(寶藏王(보장왕) 2年(년) 3월 淵蓋蘇文(연개소문)이 王(왕)에게 아뢰기를, “삼교(三敎)는 比喩(비유)하자면 솥의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只今(지금) 儒敎(유교)와 佛敎(불교)는 모두 興(흥)하는데 道敎(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이른바 天下(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請(청)하오니 唐(당)나라에 使臣(사신)을 보내 道敎(도교)를 求(구)하여 와서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大王(대왕)이 매우 그러하다고 여기고 표(表)를 올려서 道敎(도교)를 要請(요청)하였다. 唐(당) 太宗(태종)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8名(명)을 보내고, 이와 함께 老子(노자)의 道德經(도덕경)을 보내주었다. 王(왕)이 기뻐하여 佛敎(불교) 寺刹(사찰)을 빼앗아 이들을 머물도록 하였다.
唐(당)나라에서 高句麗(고구려)로 들어온 8學士(학사)의 後孫(후손)들은 各自(각자) 韓半島(한반도) 各地(각지)에 定着(정착)하여 宜寧(의령) 玉氏(옥씨), 南陽(남양) 洪氏(홍씨) 唐洪系(당홍계: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唐洪系)는 홍천하(洪天河)를 始祖(시조)로 하고, 京畿道(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을 本貫(본관)으로 하는 韓國(한국)의 姓氏(성씨)이다.), 南陽(남양) 房氏(방씨), 原州(원주) 元氏(원씨), 晉州(진주) 邢氏(형씨)等(등)이 되었다.
淵蓋蘇文(연개소문)이 佛敎(불교)를 彈壓(탄압)한 것에 대해선 여러가지 시각이 있으나 4世紀(세기) 小獸林王(소수림왕)이 佛敎(불교)를 들여오고 300년의 期間(기간)동안 高句麗(고구려)의 國敎(국교)였기 때문에 그 勢力(세력)이 强(강)하고 政界(정계)에도 그 힘이 깊숙히 뿌리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淵蓋蘇文(연개소문)은 道敎(도교)를 通(통)해 佛敎(불교)勢力(세력)을 牽制(견제)하려하였고, 이에 650년 高句麗(고구려)의 盤龍寺(반룡사) 僧侶(승려) 보덕(普德)이 百濟(백제)로 移民(이민)가는等(등) 高句麗(고구려)에서 佛敎(불교)勢力(세력)이 逐出(축출)되었다.
以後(이후) 高句麗(고구려) 歷史(역사)에서 佛敎人(불교인)이 登場(등장)하는 것은 淵氏政權(연씨정권)의 3代(대) 大莫離支(대막리지)였던 연남건(淵男建)의 策士(책사)(軍事(군사)로 活動(활동)한 신성(信誠) (僧侶(승려)이 있다.
당 태종(唐太宗)
以後(이후) 淵蓋蘇文(연개소문)은 對外(대외) 强硬策(강경책)을 펼쳐 648년 新羅(신라)와 唐(당)나라가 聯合(연합)하는 빌미를 提供(제공)하였다. 645년 唐(당) 太宗(태종)은 옛 漢郡縣(한군현)을 되찾고 亂臣賊子(난신적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을 치겠다며 11월, 水陸(수륙) 兩面(양면)으로 約(약) 50萬(만) 名(명)에 달하는 大規模(대규모) 遠征軍(원정군)을 編成(편성)해 攻擊(공격)을 始作(시작)했다.이때 唐軍(당군)은 各宗(각종) 공성용(攻城用) 機具(기구)를 總動員(총동원)했다.
唐(당) 太宗(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出發(출발)하여 直接(직접) 遠征(원정)길에 올랐다. 李世勣(이세적)이 이끄는 先發隊(선발대)와 唐(당) 太宗(태종)이 直接(직접) 指揮(지휘)하는 親征軍(친정군), 그리고 張良(장량)이 指揮(지휘)하는 水軍(수군)으로 크게 3갈래로 侵入(침입)해 왔으며 遼東省(요동성)을 占領(점령)한 뒤 安市城(안시성) 方面(방면)으로 進軍(진군)하였다.
645년 6월 20일 高句麗(고구려)는 고정의(高正義), 고연수(高延壽) ,고혜진(高惠眞)이 이끄는 15萬(만)의 大軍(대군)을 駐蹕山(주필산)에 보내 唐(당) 太宗(태종)의 10萬(만) 大軍(대군)과 싸우게 하였다. 그러나 唐(당) 太宗(태종)의 戰術(전술)에 속아 高句麗軍(고구려군)이 敗北(패배)하여 3萬(만)여 高句麗軍(고구려군)이 投降(투항)하였다. 唐(당) 太宗(태종)의 都合(도합) 20萬(만) 大軍(대군)은 駐蹕山(주필산) 戰鬪(전투)에서 勝利(승리)한 後(후) 安市城(안시성)으로 進軍(진군)하였다.
그러나 安市城(안시성) 戰鬪(전투)에서 安市城主(안시성주)(楊萬春(양만춘)에게 가로막혀 失敗(실패)하였다. 이날 土山(토산) 戰鬪(전투), 그리고 그 뒤 펼쳐진 土山(토산) 爭奪戰(쟁탈전)에서 唐軍(당군) 數萬名(수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高句麗(고구려)의 被害(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또 3일간의 土山(토산) 爭奪戰(쟁탈전) 以前(이전)의 석달간 攻防戰(공방전)에서 唐軍(당군)은 하루 2~3千(천)의 被害(피해)를 입었다고 傳(전)해진다.
하루 被害(피해)人員(인원)을 平均(평균) 2500이라 쳐도 無慮(무려) 20萬(만)이 넘는 死傷者(사상자)를 낸 것이었다. 高句麗(고구려)측도 安市城(안시성) 軍事(군사) 中(중) 妖書傳(요서전)에 따라갈 수 있을만한 人員(인원)이 3萬(만)이 채 안되었다고 한다. 戰鬪(전투)는 그만큼 치열했는데, 唐(당) 太宗(태종)이 安市城主(안시성주) 楊萬春(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野說(야설)도 있다.
唐(당)의 攻擊(공격)을 막아낸 安市城(안시성)의 城主(성주)에 대하여 歷史書(역사서)에는 어떠한 資料(자료)도 없이 그냥 "安市城(안시성)의 城主(성주)"로만 記錄(기록)되고 있었다. 특히 《三國史記(삼국사기)》의 著者(저자) 金富軾(김부식)은 安市城主(안시성주)에 대해 크게 稱頌(칭송)하면서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恨歎(한탄)하였다.
그러나 朝鮮(조선) 時代(시대) 송준길(宋浚吉)의 《同春堂(동춘당)先生(선생)別集(별집)》과 박지원(朴趾源)의 《熱河日記(열하일기)》에는 安市城(안시성) 城主(성주)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밝히고 있다.
中國(중국) 요서(遼西) 地域(지역)에 보이는 百濟(백제)의 實體(실체) - 東北亞(동북아)歷史(역사)論叢(논총) ...
以後(이후)에는 唐(당)나라가 消耗戰(소모전)으로 持續的(지속적)으로 高句麗(고구려)를 攻擊(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擊退(격퇴)하였다. 하지만 同盟國(동맹국)인 百濟(백제)가 新羅(신라)·唐(당) 聯合軍(연합군)에게 敗(패)하였고 高句麗(고구려)는 國際的(국제적)으로 孤立(고립)되었다. 百濟(백제)를 滅亡(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寶藏王(보장왕) 20年(년)에 唐(당)나라는 高句麗(고구려)를 攻擊(공격)하였고 平壤城(평양성)이 包圍(포위)되는 危機(위기)를 처했으나 唐(당)나라군을 敗亡(패망)시키고 高句麗(고구려)는 勝利(승리)하였다.
高句麗(고구려)의 國力(국력)은 衰退(쇠퇴)해 가고 있었고 武天鎭(무천진) 鮮卑族(선비족)이 漢族(한족)들을 예속시켜 세운 唐(당)나라는 國力(국력)이 세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隋(수)·唐(당)과의 戰爭(전쟁)으로 百姓(백성)의 生活(생활)은 破綻(파탄)에 直面(직면)했고, 國家(국가) 財政(재정)은 破綻(파탄)하였다. 그 위에 同盟國(동맹국)인 百濟(백제)의 滅亡(멸망)과 高句麗(고구려) 支配層(지배층)의 內紛(내분)은 더욱 그 國力(국력)을 弱化(약화)시키고 있었다.
664년에서 666년 사이, 寶藏王(보장왕) 23년 ~ 25년 淵蓋蘇文(연개소문)이 죽고 맏아들 연남생(淵男生)이 父親(부친)을 代身(대신)하여 莫離支(막리지)가 되었다. 연남생(淵男生)은 아버지의 代(대)를 이어 大權(대권)을 掌握(장악)한 뒤, 地方(지방)의 여러 城(성)을 巡視(순시)하였다. 이 틈을 타 同生(동생) 2남 연남산(淵男産)·3男(남) 연남건(淵男建)이 政變(정변)을 일으켜 首都(수도)를 掌握(장악)하였다.
이후 兄(형) 연남생(淵男生)의 아들 淵獻忠(연헌충)을 죽이고 王命(왕명)을 빌려 召喚(소환)하자, 연남생(淵男生)은 國內城(국내성)으로 달아났다. 그 곳 勢力(세력)을 糾合(규합)해 高句麗(고구려) 中央(중앙)政府(정부)에 대한 反擊(반격)에 나섰다. 먼저 오골성(烏骨城)을 치는 한편 唐(당)나라에 대형(大兄) 불덕(弗德)을 보내 救援(구원)을 要請(요청)하려 하였으나 遼東(요동)을 通過(통과)하지 못하였다.
高句麗(고구려) 平壤(평양) 中央(중앙)政府(정부)의 壓力(압력)이 가해지자, 연남생(淵男生)은 南(남)으로 내려가 高句麗(고구려) 首都(수도) 平壤(평양)을 치는 代身(대신) 西北(서북) 遼東(요동)方面(방면)으로 進路(진로)를 바꾸었다. 연남생(淵男生)은 또다시 大兄(대형) 염유(冉有)를 다시 唐(당)나라에 보내 救援(구원)을 請(청)하였으나 回答(회답)이 없자, 이번에는 아들 연헌성(淵獻誠)을 唐(당)나라에 보내어 거듭 救援(구원)을 請(청)하였다.
666년 6월, 마침내 唐(당) 高宗(고종)이 左驍衛(좌효위) 大將軍(대장군) 契苾何力(계필하력)으로 하여금 軍事(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연남생(淵男生)을 맞이하게 하였다. 연남생(淵男生)은 이에 高質(고질), 高玄(고현), 柵城都督(책성도독) 이타인, 高足酉(고족유) 등 國內城(국내성)의 貴族(귀족)들 및 部下(부하)들을 데리고 脫出(탈출)하여 唐(당) 나라로 逃走(도주)하였다. 666년 6월 7일, 右驍衛大將軍(우효위대장군) 契苾何力(계필하력)을 遼東都按撫大使(요동도안무대사)로 任命(임명)하여 兵士(병사)를 이끌고 연남생(淵男生)을 支援(지원)한다.
연헌성(연헌성)을 右武衛將軍(우무위장군)으로 任命(임명)하여 길안내를 맡게 한다. 한편 高句麗(고구려)에서는 666년 8월, 寶藏王(보장왕)이 연남건(淵男建)을 大莫離支(대막리지)로 삼아 內外(내외)의 軍事(군사)에 대한 職務(직무)를 兼職(겸직)하도록 하였다.
666년 12월, 高句麗(고구려)가 兄弟間(형제간) 內部(내부) 權力鬪爭(권력투쟁)이 發生(발생)하는 동안 淵蓋蘇文(연개소문)의 同生(동생)이자, 연남생(淵男生)·연남건(淵男建) 兄弟(형제)의 叔父(숙부)인 高句麗(고구려)의 大臣(대신) 淵淨土(연정토)가 高句麗(고구려) 南(남)쪽의 12城(성), 763호, 3,543名(명)을 데리고 新羅(신라)에 投降(투항) 해 버렸다.
北(북)쪽에서는 연남생(淵男生)이 唐(당)에게, 南(남)쪽에서는 淵淨土(연정토)가 新羅(신라)에게 各各(각각) 投降(투항)하여 高句麗(고구려) 심각한 內部(내부) 分列(분열)로 危機(위기)를 맞게 된다. 結局(결국) 668년 高句麗(고구려)는 羅(나)·唐(당) 聯合軍(연합군)에게 滅亡(멸망)하였다.
669년 唐(당)나라는 高句麗(고구려) 支配層(지배층)을 中心(중심)으로 約(약) 3萬(만)戶(호)를 中國(중국)의 오르도스(鄂尔多斯:Ordos) 地域(지역) 等(등)으로 集團(집단) 移住(이주)시켰다, 그 痕迹(흔적)이 실크로드(Silk road:丝绸之路)에 남아 있다.
高句麗(고구려) 王室(왕실)과 復興(부흥)運動(운동) (668년-820년)
거문고(七弦琴:lyre)
668년 高句麗(고구려)가 亡(망)한뒤 高氏(고씨) 王族(왕족)들은 高句麗(고구려) 復興(부흥)運動(운동)을 일으켜 高句麗(고구려)를 이었다. 寶藏王(보장왕)의 子息(자식)중 한명인 王族(왕족) 高安勝(고안승)은 高句麗(고구려)의 將軍(장군)이었던 검모잠(劍牟岑)과 손잡고 高句麗(고구려)의 副都(부도)였던 한성(漢城, 黃海道(황해도)를 本據地(본거지)로 삼아 活動(활동)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 사이의 內紛(내분)이 일어나 高安勝(고안승)이 劍牟岑(검모잠)을 죽이고 高句麗(고구려) 百姓(백성) 4千(천)戶(호)(推算(추산) 2萬(만)名(명)와 함께 新羅(신라)에 歸順(귀순)하는 事態(사태)가 벌여졌다.
新羅(신라)의 文武王(문무왕)은 高安勝(고안승)과 高句麗(고구려) 流民(유민)들을 金馬渚(금마저)(全羅北道(전라북도) 益山(익산)으로 옮겨 살게하였다. 高安勝(고안승)은 674년 益山(익산)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우고 다시 高句麗(고구려) 復興(부흥)運動(운동)을 展開(전개)하였다.
報德國(보덕국)은 新羅(신라)의 保護國(보호국)으로 있으면서 高句麗(고구려)와 同一(동일)한 5部(부)와 官等(관등) 體系(체계)를 갖추고 羅(나)唐(당) 戰爭(전쟁)에 參戰(참전)하거나 日本(일본)과는 견고려사(遣高麗使)라는 이름으로 使臣(사신)을 주고받는등 對內外的(대내외적)으로 活潑(활발)한 活動(활동)을 벌였다. 約(약) 10年(년) 間(간) 나라가 持續(지속)되다 報德王(보덕왕)의 조카 大文(대문)의 亂(난)이 일어나고 新羅(신라)에 鎭壓(진압)되어 吸收(흡수)되었다.
報德國(보덕국)의 滅亡(멸망)後(후) 高句麗(고구려) 貴族(귀족)과 流民(유민)들은 新羅(신라)의 9州(주)5小京(소경)中(중) 하나인 南原京(남원경)(全羅北道(전라북도) 南原(남원)으로 移轉(이전)되었다. 이 過程(과정)에서 高句麗(고구려)의 絃樂器(현악기)인 거문고(七弦琴:lyre)가 傳來(전래)되었다.
韓國(한국)의 橫城(횡성) 高氏(고씨) 族譜(족보)에 依(의)하면 寶藏王(보장왕)에게는 4男(남) 명승, 덕승, 인승, 安勝(안승)이 있었으며 이 中(중) 인승이 報德國(보덕국)을 세운 安勝(안승)의 兄(형)이자 동국 고씨(東國 高氏)의 始祖(시조)이며 中始祖(중시조) 인승으로부터 12世(세) 孫(손)인 민후(旻厚)가 橫城(횡성)에 定着(정착), 橫城(횡성) 高氏(고씨)의 始祖(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고마 신사(高麗神社).
한편 唐(당)나라은 高句麗(고구려) 遺民(유민)의 反撥(반발)을 막기 위해 寶藏王(보장왕)을 安東都督(안동도독)으로 派遣(파견)했다. 그의 死後(사후) 686년 孫子(손자) 高寶元(고보원)을 朝鮮君王(조선군왕)에 封(봉)하고 698년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에 派遣(파견)했지만 高寶元(고보원)이 叛亂軍(반란군) 勢力(세력)에 投降(투항)하자, 699년 唐(당)나라의 則天武后(측천무후)는 高句麗(고구려) 寶藏王(보장왕)의 3번째 아들이었던 고덕무(高德武)를 안동도독(安東都督)에 任命(임명)하여 遼東(요동)을 支配(지배)하도록 命令(명령)하였고, 이에 高德武(고덕무)는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을 提唱(제창)하였다.
이는 唐(당)나라가 大祚榮(대조영)이 세운 渤海(발해)를 境界(경계)하기 위하여 高德武(고덕무)를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으로 封(봉)하고 세운 屬國(속국)이었다. 756년, 唐(당)나라가 安東(안동)都督府(도독부)를 廢止(폐지)하면서 屬國(속국)에서 벗어나 獨自的(독자적)인 勢力(세력)이 되었다. 818년, 당회요(唐會要)에 高麗國(고려국)이 唐(당)나라에 使臣(사신)을 보내고 樂工(악공)을 바쳤다는 記錄(기록)이 나타난다.
이때까진 國家(국가)를 維持(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820년대에 渤海(발해) 선왕(宣王)에게 倂合(병합)을 당해 滅亡(멸망)하고 말았다. 이들의 後孫(후손)은 現在(현재) 랴오닝성(Liaoning Province:辽宁)을 本貫(본관)으로 하는 요양 고씨(遼陽 高氏)가 되었으며 約(약) 2,000名(명)이 살아있다.
約(약) 1,799名(명)의 또 다른 高句麗人(고구려인)들은 日本(일본)으로 亡命(망명)했다.
다이호(大保:Daiho) 3年(년)(703년)에 日本(일본) 朝廷(조정)은 高句麗(고구려)의 王族(왕족)으로 여겨지는 高句麗(고구려)의 옛 使臣(사신)이자 寶藏王(보장왕)의 아들인 고약광:Plasterer:プラスター光:泥水匠:(고마노 잣코:高瑪瑙ジャトコ:小野佳子:Komano Jakko)에게 고마노고키시(高麗王)라는 가바네(Gabane:カバネ:加班)를 주었다.
덴표쇼호(天平勝寶) 2年(년)(750년)에는 高句麗(고구려) 廣開土太王(광개토태왕)의 5代(대) 孫(손)배내복덕 (ベネ福徳)의 後裔(후예) 다카쿠라노 후쿠노부(高倉ノ福ノブ) 等(등)의 一族(일족)에게 고마노아손(高麗朝臣)의 가바네(カバネ)를 내렸는데, 兒孫(아손)이라는 가바네(カバネ)를 도래인에게 내리는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 뒤 후쿠노부는 다시 성을 다카쿠라(高倉)로 고쳤다. 또한 약광(高麗若光)의 子孫(자손)은 代代(대대)로 고마 신사(高麗神社)의 궁사(宮司)를 맡아 오늘날까지 이어져 現代(현대)의 고마 씨(高麗氏)가 되었다.
한편 고약광(プラスター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고마 신사(高麗神社)는 "出世(출세)하고 싶으면 고마 신사(高麗神社)에 가서 빌라"는 俗說(속설)이 있을 정도로 日本(일본)에서는 名所(명소)이다.
와카쓰키 레이지(若槻禮次郎)로, 사이토 마코토(斎藤誠),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시데하라 기주로(デせよキジュに),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가 參拜(참배)한 뒤에 總理(총리)에 任命(임명)되었기에, 출세명신(出世明神 슛세이묘진)이라 하며 崇尙(숭상)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큰 事件(사건)이 있을 땐 고마 신사(高麗神社)에 가서 빌어야 수사가 잘 풀린다"는 얘기가 퍼져, 도쿄지검(東京地検)·도쿄고검(東京高等検察庁) 檢事(검사)들이 줄줄이 參拜(참배)하기도 했다. 年間(연간) 40萬(만)名(명)의 參拜客(참배객)이 거쳐갈 정도이며, 그 中(중)에서도 많은 有名人士(유명인사)와 演藝人(연예인)들이 자주 參拜(참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大氏(대씨)·金氏(김씨)·王氏(왕씨)의 高麗(고려)와 코리아(Korea:韩国) (820년-)
高氏(고씨) 王族(왕족)들의 復興(부흥)運動(운동)은 820년 小高句麗(소고구려)가 渤海(발해)에 編入(편입)됨으로서 끝났으나 高句麗(고구려)의 百姓(백성)이었던 者(자)들이 高句麗(고구려) 復興(부흥)運動(운동)을 이어갔다.
大祚榮(대조영)은 舊唐書(구당서)에 依(의)하면 高麗(고려) 별종(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이며, 아버지인 乞乞仲象(걸걸중상)과 함께 영주에서 高句麗人(고구려인)과 靺鞨族(말갈족)들을 이끌고 勢力(세력)을 糾合(규합)하였다.
698년 大祚榮(대조영)은 乞四比羽(걸사비우)와 함께 東牟山(동모산)에 나라를 建國(건국)하여 나라 이름을 진국(振國)이라 하였다. 《續日本記(속일본기)》에 依(의)하면 內部的(내부적)인 名稱(명칭)은 진국(振國)이나 對外的(대외적)인 名稱(명칭)은 朱蒙(주몽)의 고려(高麗)를 繼承(계승)해 高麗(고려)라 하였으며, "高句麗(고구려)의 옛 領土(영토)를 回復(회복)했다[復高麗之舊居]"라며 繼承(계승)을 闡明(천명)하였다.
또한 天孫(천손)思想(사상)을 이어받아 獨自的(독자적)인 年號(연호)를 指定(지정)하였다. 渤海(발해)는 698년 建國(건국)되어 926년까지 228년간 維持(유지)되었으며 總(총) 15名(명)의 國王(국왕)이 卽位(즉위)하였다. 대광현(大光顯)은 百姓(백성) 數萬戶(수만호)를 데리고 後三國(후삼국)을 統一(통일)한 王建(왕건)의 高麗(고려)에 歸順(귀순)하였으며 그 後孫(후손)들은 韓國(한국) 太氏(태씨)와 密陽(밀양) 大氏(대씨)가 되었다.
이규보(李奎報)
한편 新羅(신라)가 高句麗(고구려)로 부터 編入(편입)한 黃海道(황해도) 地域(지역)의 土着民(토착민)들은 大部分(대부분) 高句麗人(고구려인)을 祖上(조상)으로 둔 者(자)들로 高句麗(고구려)에 대한 繼承(계승)意識(의식)을 잃지 않고, 維持(유지)하여, 統一(통일)新羅(신라)가 무너지고 群雄(군웅)時代(시대)가 到來(도래)하자 新羅(신라)王族(왕족) 出身人(출신인) 弓裔(궁예)에 加擔(가담)하여 그의 最側近(최측근)이 되었다.
代表的(대표적)으로 弓裔(궁예)의 婦人(부인)인 강비(康妃) 康氏(강씨)는 高句麗系(고구려계) 新羅(신라) 豪族(호족)인 강호경(康虎景)을 始祖(시조)로 하며 黃海道(황해도) 信川(신천)을 本貫(본관)으로 삼는 信川(신천) 康氏(강씨) 사람이었다.
弓裔(궁예)는 自身(자신)의 側近(측근)과 根據地(근거지)의 人望(인망)을 얻고, 國家(국가) 建立(건립)의 正當性(정당성)을 說破(설파)하기 위해 901년 朱蒙(주몽)高麗(고려)를 繼承(계승)해 國號(국호)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以後(이후) 摩震(마진)·泰封(태봉)등으로 바꿨으나 918년 弓裔(궁예)의 手下(수하)였던 王建(왕건)이 그를 몰아내고 다시 國號(국호)를 高麗(고려)로 還元(환원)하니 바로 高麗(고려) 王朝(왕조)가 되었다.
高麗(고려) 의종(毅宗)때 김관의(金寬毅)가 王建(왕건)의 族譜(족보)를 採集(채집)해 記錄(기록)한 고려편년통록(高麗編年通載)에 依(의)하면 王建(왕건)의 曾祖母(증조모) 정화왕후 강씨(貞和王后 康氏) 亦是(역시) 高句麗系(고구려계) 新羅(신라) 사람인 강충(康忠)의 曾孫女(증손녀)이자 高句麗(고구려) 出身(출신)의 新羅(신라) 將軍(장군) 강호경(康虎景)이 그女(녀)의 曾祖父(증조부)이다.
太祖(태조) 王建(왕건)은 집안 家契(가계)상 高句麗人(고구려인)을 祖上(조상)으로 둔 人物(인물)에 該當(해당)한다.
高麗(고려) 王朝(왕조)는 朱蒙(주몽)高麗(고려)와 新羅(신라)를 統合(통합) 繼承(계승)하여, 新羅(신라)의 制度(제도)와 文化(문화)를 잇는 반면, 建國(건국) 理念(이념)과 國號(국호)·首都(수도)·領土觀(영토관)·歷史觀(역사관)等(등)은 朱蒙(주몽)高麗(고려)를 繼承(계승)하였다.
王建(왕건)은 朱蒙(주몽)高麗(고려)의 首都(수도)였던 平壤城(평양성)을 서경(西京)이라 하고, 분사 제도(分司制度)라 하여 開京(개경)과 유사한 機構(기구)와 體制(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歷代(역대) 임금王(왕)들이 풍수(風水)·도참설(圖讖說)에 따라 자주 行次(행차)하였으며, 門閥(문벌) 貴族(귀족)들에 依(의)해 王權(왕권)이 挑戰(도전)받을 때마다 西京(서경) 遷都(천도)를 計劃(계획)할 정도로 開京(개경) 다음의 都市(도시)로 여겼다.
또 朱蒙(주몽)高麗(고려)가 지내던 "同盟(동맹)"의 祭祀(제사)를 팔관회(八關會)를 通(통)해 그대로 傳承(전승)하였다. 또한 平壤城(평양성)에 始祖(시조) 鄒牟聖王(추모성왕)을 기리는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를 지내고 王(왕)이 直接(직접) 參拜(참배)하기도 하였다.
對外的(대외적)으로도 朱蒙(주몽)高麗(고려) 繼承(계승)을 闡明(천명)하여 太祖(태조) 王建(왕건)의 遺志(유지)에 따라 北伐(북벌)을 建國理念(건국이념)으로 삼고 遼東征伐(요동정벌)을 두 차례나 시도하였다.
遼(요)나라의 1次(차) 侵入(침입)때 外交官(외교관) 徐熙(서희)에게 遼(요)나라의 蕭遜寧(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新羅(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高句麗(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契丹(거란)의 것이다"라고 하며 侵掠(침략)名分(명분)을 밝히자, 徐熙(서희)는 "그렇지 않소.
우리 高麗(고려)는 바로 高句麗(고구려)를 繼承(계승)한 나라요. 그래서 나라이름을 高麗(고려)라고 부르고 西京(서경)을 國都(국도)로 定(정)한 것이오."라 말하였다.
또한 高麗(고려) 文臣(문신) 이규보(李奎報)는 《東國李相國集(동국이상국집)》을 通(통)해 朱蒙(주몽)高麗(고려)를 '아고려'(我高麗, 우리 高麗(고려))라 일컫어 朱蒙(주몽)高麗(고려)와 王建(왕건)高麗(고려)를 同一(동일)하게 봤을 뿐 아니라 朱蒙(주몽)高麗(고려)를 推尊(추존)해 始祖(시조)인 鄒牟聖王(추모성왕)을 기리는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어 後世(후세)에 傳(전)하는등 繼承(계승)意識(의식)을 뚜렷이 했다.
한편 高麗(고려)는 商業(상업)을 獎勵(장려)해 碧瀾渡(벽란도)를 據點(거점)으로 아라비아(Arabian)等(등)과 對外貿易(대외무역)을 行(행)하였는데, 이것을 契機(계기)로 5世紀(세기) 長壽王(장수왕)이 改稱(개칭)한 고려(高麗)라는 이름이 유럽(Europe)等地(등지)에 알려지면서 現代(현대) 韓國(한국)의 이름인 코리아(Korea)가 되었다.
主要(주요) 人物(인물)
고노(河野),대걸걸중상(大快活重傷),도절(盗窃),咄固(돌고),발기(發岐),楊萬春(양만춘),女眞(여진),淵蓋蘇文(연개소문),연남건(淵男建),乙密(을밀),乙支文德(을지문덕),再思재사,助多(조다),태양,解明(해명).
政治(정치)
高句麗(고구려)가 部族(부족) 聯盟體(연맹체)적인 支配(지배) 體制(체제)에서 벗어나 古代(고대) 國家(국가)로서의 官僚(관료) 組織(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大體(대체)로 律令(율령) 政治(정치)가 始作(시작)된 小獸林王(소수림왕) 때의 일이며, 그것이 더욱 整備(정비)된 것은 高句麗(고구려)가 首都(수도)를 平壤(평양)으로 옮긴 이 後(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高句麗(고구려)의 中心(중심) 勢力(세력)은 本來(본래)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의 5部族(부족)으로 形成(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王(왕)은 部族(부족) 聯盟長(연맹장)이 되었다. 王(왕)은 選出(선출)에서 世襲制(세습제)로 變(변)하였는데 初期(초기)는 消奴部(소노부)에서 東明聖王(동명성왕) 以後(이후)는 桂婁部(계루부)에서 世襲(세습)하였다 한다.
初期(초기)에는 國王(국왕) 밑에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주부(主簿)·우대(優台)·승(丞)·사자(使者)·조의(皁衣)·선인(先人) 等(등)을 두었는데, 이 관계(官階)는 그 後(후) 發展(발전) 過程(과정)을 通(통)하여 427년 平壤(평양)遷都(천도) 以後(이후)에 再整備(재정비)되었다.
官僚(관료)의 等級(등급)은 대체로 12等級(등급)으로 分化(분화)·發達(발달)되었는데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울절(鬱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대사자(大使者)·소형(小兄)·제형(諸兄)·선인(仙人) 等(등)으로 나뉘었다.
‘형’은 年長者(연장자)로, 가부장적(家夫長的) 族長(족장)의 뜻을 나타내며 部族(부족) 聯盟(연맹)에서 古代(고대) 國家(국가)로 轉換(전환)하면서 여러 族長(족장) 勢力(세력)을 이러한 官等(관등)에 吸收(흡수)한 것 같다. ‘사자’가 붙은 것은 氏族(씨족)원으로부터 登用(등용)된 것으로 공부(貢賦) 徵收(징수)의 직역(職役)을 뜻하는 것 같다.
代代(대대)로와 막리지(莫離支)는 수상격인 高句麗(고구려) 最古(최고)의 官職(관직)으로 代代(대대)로가 平時(평시) 行政(행정) 擔當(담당)의 수상이다. 莫離支(막리지) 밑에는 고추대가(古雛大加)·중외대부(中畏大夫)·대주부(大主簿)等(등)을 두었는데 각각 내정(內政)·외정(外政)·재정(財政)을 맡아보았다.
地方(지방)은 東(동)·西(서)·南(남)·北(북)·中(중)의 5부(部)로 나누고, 5部(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부왕(副王)급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라는 行政官(행정관)이 派遣(파견)되었다. 이들은 각 內部(내부)의 여러 성주(城主)를 統率(통솔)하여야 했다.
原來(원래) 部族(부족) 勢力(세력)의 根據地(근거지)였을 여러 城(성)은 高句麗(고구려) 王國(왕국)의 事績(사적)·行政的(행정적) 單位(단위)로 統合(통합)되어 있었고 또 부세(賦稅) 等(등) 地方民(지방민)에 대한 統治(통치)가 行(행)해지기 마련이었다. 高句麗(고구려)에는 貴族(귀족) 會議(회의)의 하나인 諸家(제가) 會議(회의)도 있었다.
行政(행정)~行政(행정) 組織(조직)
初期(초기)의 5部族(부족)은 그대로 行政區域(행정구역)으로 發展(발전), 首都(수도)와 地方(지방)을 5部(부)로 나누었다. 계루부(桂婁部)는 내부(內部)·소노부(消奴部)는 서부(西部)·절노부(絶奴部)는 북부(北部)·순노부(順奴部)는 동부(東部)·관노부(灌奴部)는 남부(南部)라 하였다. 5部(부) 밑에는 성(城)이 있었다.
部(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라는 行政官(행정관)이 派遣(파견)되었고, 이들은 각 部(부) 內(내)의 여러 성주(城主)를 統率(통솔)했다.
그 밑에 各(각) 이원(吏員)이 있어 事務(사무)를 分場(분장)하였다. 文武(문무)의 區別(구별)이 體系化(체계화)되지 못하였던 高句麗(고구려)는 部族(부족) 勢力(세력)의 根據地(근거지)였던 여러 城(성)을 行政的(행정적)·軍事的(군사적) 單位(단위)로 編成(편성)하였던 것같다.
5部(부)를 中心(중심)으로 하여 기내(畿內)의 뜻인 듯한 내평(內評)과 기외(畿外)의 地方(지방)을 意味(의미)하는 외평(外評) 制度(제도)가 있었다. 또한 平壤(평양) 遷都(천도) 後(후)에는 平壤(평양) 以外(이외)에 국내성(國內城, 통구)과 한성(漢城, 재령)의 별경(別京)이 있어 삼경제(三京制)가 完成(완성)되었으며, 南進(남진)政策(정책)을 運營(운영)하며 국원성(國原城)같은 據點(거점) 都市(도시)를 設置(설치)하였다.
軍事(군사)집안통구12호분(集安通溝十二號墳)
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와 유사한 形態(형태)로서 國王(국왕)이 最古(최고) 司令官(사령관)으로 軍事(군사)組織(조직)도 一元的(일원적)으로 編制(편제)되어, 國內城(국내성)·平壤(평양)·한성(漢城: 재령)의 3경(三京)과 各(각) 城(성)에 常備軍(상비군)을 두고, 邊方(변방)에 巡邏軍(순라군)을 두었다. 軍官(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等(등)이 있으며, 常備軍(상비군)의 補充(보충)은 경당(扃堂)이라는 靑年(청년) 團體(단체)가 맡았다.
軍事(군사) 武器(무기)
主要(주요) 發射(발사) 武器(무기)로는 高句麗(고구려)에서 國弓(국궁)과 角弓(각궁)을 使用(사용)했다. 또한 釋宮(석궁)을 使用(사용)하기도 하였다. 城(성)을 防禦(방어)할 때는 投石兵(투석병)이 있었다. 도끼창(미늘창)을병이했다. 高句麗(고구려)의 步兵(보병)은 창과 칼 두 가지 武器(무기)를 使用(사용)했다. 첫 번째는 짧은 양날 변형으로 생긴 창으로 대부분 던지기 위해 使用(사용)되었다.
다른 하나는 단일 양날 검으로 漢(한)나라의 影響力(영향력)을 받은 칼자루 안에 있었다. 투구는 中央(중앙) 아시아(Asia)民族(민족)이 使用(사용)하는 날개 달린 가죽 및 말꼬리 裝飾(장식)과 유사했다. 갑옷은 미늘갑옷이라 軍人(군인)이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신발은 밑에 뾰족하게 된 송곳이 박혀있어 적을 밟을 때 使用(사용)했다.
社會(사회) 및 經濟(경제)
人口(인구)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高句麗(고구려) 69萬(만) 戶(호)라고 되어 있고, 滅亡(멸망)할 當時(당시)에는 약 200萬(만) 名(명) 정도`로 推定(추정)된다.
刑法(형법)
高句麗(고구려)에서 統治(통치) 秩序(질서)와 社會(사회) 紀綱(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刑法(형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反逆(반역)을 꾀하거나 反亂(반란)을 일으킨 者(자)는 火刑(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家族(가족)을 奴婢(노비)로 삼았다.
敵(적)에게 降伏(항복)한 者(자)나 戰爭(전쟁)에서 敗(패)한 者(자) 亦是(역시) 死刑(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은 12倍(배)를 물게 하였다. 1책12法(법)이라고도 하며 부여와의 共通點(공통점)이다. 高句麗(고구려)에서 犯罪(범죄)가 적고 監獄(감옥)이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남의 家畜(가축)을 죽인 者(자)는 奴婢(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者(자)는 그 子息(자식)을 奴婢(노비)로 만들어 辨償(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重大(중대)한 犯罪者(범죄자)가 있으면 諸家(제가)가 모여서 論議(논의)하는 諸家(제가) 會議(회의)를 通(통)하여 處罰(처벌)하였다.
이렇게 嚴格(엄격)한 刑法(형법)을 適用(적용)하였기 때문에 法律(법률)을 어기거나 社會(사회) 秩序(질서)를 해치는 者(자)가 극히 드물었다.
身分制(신분제)
高句麗(고구려)의 社會(사회) 階級(계급)은 貴族(귀족)·平民(평민)(豪民(호민), 下戶(하호)·奴婢(노비)로 構成(구성)되어 있었다.
政治(정치)를 主導(주도)하며 社會的(사회적)으로 높은 地位(지위)를 누린 階層(계층)은 王族(왕족)인 高氏(고씨)를 비롯하여 5部(부) 出身(출신)의 貴族(귀족)이었다. 이들은 그 地位(지위)를 世襲(세습)하면서 높은 官職(관직)을 맡아 國政(국정) 運營(운영)에 參與(참여)했다. 또한 各其(각기) 넓은 土地(토지)를 所有(소유)하였으며, 조의·선인·대사자·상가·고추가 等(등) 官吏(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一般(일반) 百姓(백성)인 平民(평민)은 邑落(읍락)의 支配(지배)階層(계층)인 호민(豪民)과 彼(피)支配(지배)階層(계층)인 하호(下戶)로 區分(구분)되며, 이들은 大部分(대부분) 農民(농민)이었고, 土地(토지) 耕作(경작)과 함께 納稅(납세)와 兵役(병역)의 義務(의무)를 지며, 土木工事(토목공사)에도 動員(동원)되었다. 高句麗(고구려)의 賤民(천민)인 奴婢(노비)는 捕虜(포로)·罪人(죄인)·債務者(채무자)·歸化人(귀화인) 또는 沒落(몰락)한 平民(평민)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身分(신분) 階級(계급)에 따라 집과 의관(衣冠)에 差異(차이)가 있었다.
下戶(하호)의 境遇(경우) 主(주)로 生産(생산) 活動(활동)에 從事(종사)한 彼(피)支配層(지배층) 下戶(하호)는 高句麗(고구려) 본족(本族) 中(중)의 犯罪者(범죄자)·落伍者(낙오자)도 있었으나 大部分(대부분)이 彼(피)征服民(정복민)이었으며 戰爭(전쟁) 때 捕虜(포로)가 된 漢族(한족)도 있었다. 이들 下戶(하호)는 身分的(신분적)으로 奴隸(노예)와 區別(구별)되었으나 社會(사회) 經濟的(경제적) 位置(위치)는 奴隸(노예)에 준하는 예속민으로서 대부분 征服(정복)당한 원주지에 살면서 農耕(농경)을 包含(포함)한 生産(생산) 活動(활동)을 거의 專擔(전담)하였고, 一部(일부)는 高句麗(고구려)에 移住(이주)되어 土地(토지)의 開拓(개척)과 農耕(농경) 等(등)에 사역(使役)되었다. 또 戰時(전시)에는 支配者(지배자)의 私兵(사병)으로 動員(동원)되기도 하였다.
土地(토지) 制度(제도)
영역 내의 모든 土地(토지)는 왕토(王土)라는 意味(의미)에서 土地(토지) 國有(국유)의 原則(원칙)이 세워지고, 이 原則(원칙)에 입각하여 土地(토지)는 分配(분배)되었다. 王室(왕실) 직속령(直屬領)이었던 것은 물론 戰爭詩(전쟁시)의 뛰어난 勳功(훈공)에 依(의)해서 國王(국왕)으로부터의 상사(賞賜) 形式(형식)으로 授與(수여)되는 사전(賜田)이나 식읍(食邑)은 貴族(귀족)의 大土地(대토지) 所有(소유)의 원천이 되었다.
사전(賜田)은 世襲的(세습적)인 相續(상속)이 認定(인정)되었고, 食邑(식읍)은 子孫(자손)에게 相續(상속)될 수 없었으며, 이들 土地(토지) 수급자(受給者)는 國家(국가)에 조세(租稅)를 納賦(납부)하였다. 貴族(귀족)에 依(의)한 土地(토지)의 私的(사적)支配(지배)(私有化(사유화) 過程(과정))는 族長(족장)(貴族(귀족))·사원(寺院)을 中心(중심)으로 장원(莊園)이 擴張(확장)되었다. 그리하여 貴族(귀족)은 土地(토지)뿐 아니라 耕作(경작)하는 예민(隸民)까지 마음대로 支配(지배)하였다.
經濟(경제)
高句麗(고구려)의 産業(산업)은 農業(농업)을 爲主(위주)로 했으며, 國家(국가)에서는 農業(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農事(농사)를 擔當(담당)한 것은 彼(피)支配階級(지배계급)인 一般(일반) 農民(농민)이었다.
高句麗(고구려)의 稅金(세금)制度(제도)는 세(稅)와 조(組)가 있었는데, 人頭稅(인두세)에 該當(해당)하는 세로 布木(포목) 5匹(필)에 穀食(곡식) 5섬을 받았고, 조는 민호(民戶)를 3等級(등급)으로 나누어 上戶(상호)가 1섬·中戶(중호)가 7말·下戶(하호)는 5말을 내었다.
風習(풍습)
高句麗(고구려) 三足烏(삼족오)
高句麗(고구려)는 鴨綠江(압록강) 中流(중류) 流域(유역), 卒本(졸본)에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山間(산간)地域(지역)으로 食糧(식량) 生産(생산)이 充分(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對外(대외) 征服(정복) 活動(활동)에 눈을 돌렸고 社會(사회) 氣風(기풍)도 씩씩하였다. 그리하여 高句麗(고구려) 사람은 절할 때에도 한쪽 다리를 꿇고 다른 쪽은 펴서 몸을 일으키기 쉬운 姿勢(자세)를 취하였고, 걸을 때도 뛰는 듯이 行動(행동)을 빨리 하였다.
高句麗(고구려) 支配層(지배층)의 婚姻(혼인)風習(풍습)으로는 兄死娶嫂制(형사취수제)와 함께 壻屋制(서옥제)(데릴사위제)가 있었는데, 3世紀(세기) 들어 사라졌다. 兄死娶嫂制(형사취수제)는 扶餘(부여)와의 共通點(공통점)이다.
初期(초기)에는 男子(남자)가 妻(처)가 옆에 마련한 壻屋(서옥)(사위집)에 들어갈 때에 돈과 옷감 等(등)을 禮物(예물)로 妻家(처가)에 주었으나, 그 以後(이후) 男女(남녀) 間(간)의 自由(자유)로운 交際(교제)를 通(통)하여 結婚(결혼)했는데 南子(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禮物(예물)은 주지 않았다.
萬若(만약) 新婦(신부) 집에서 財物(재물)을 받은 경우 딸을 팔았다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建國(건국) 始祖(시조)인 東明聖王(동명성왕)과 그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을 祖上神(조상신)으로 섬겨 祭祀(제사)를 지냈고, 10月(월)에는 秋收(추수)感謝祭(감사제)인 同盟(동맹)이라는 祭天(제천)行事(행사)를 盛大(성대)하게 열었다.
《三國志(삼국지)》〈魏書(위서)〉東夷傳(동이전) 高句麗朝(고구려조)에 따르면, 同盟(동맹) 때에는 “나라 東(동)쪽에 큰 수혈(隧穴)이 있어, 10月(월)에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고 수신(隧神)을 祭祀(제사)지내며, 목수(木隧)를 신좌(神座)에 모신다.”라고 記錄(기록)되어 있다.
隧神(수신)은 朱蒙(주몽)의 어머니로 民族的(민족적)인 信仰(신앙)의 대상이며, 목수는 나무로 만든 곡신(穀神)을 意味(의미)한다. 全(전) 部族的(부족적)인 제례(祭禮)였던 이 儀式(의식)에서는 部族員(부족원)이 무리를 지어 연일 歌舞(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高句麗(고구려)에서는 恒常(항상) 봄春(춘) 3月(월) 3日(일)이면 樂浪(낙랑)의 언덕에 사람이 모여 사냥을 하고,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山川(산천)의 神(신)에게 祭祀(제사)를 지냈다.
文化(문화)~外交(외교).~文化遺産(문화유산)
高句麗(고구려) 古墳群(고분군)
高句麗(고구려) 고분군(高句麗 古墳群)은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의 高句麗(고구려) (unesco) 世界(세계)流産(유산)이다. 平壤(평양)直轄市(직할시)와 平安南道(평안남도) 남포, 黃海南道(황해남도) 안악등에 位置(위치)한다.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unesco) 世界(세계)流産(유산) 委員會(위원회) 쑤저우(宿苏州) 會議(회의)에서 世界(세계)流産(유산)으로 登錄(등록)되었다.
高句麗(고구려)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東明王陵(동명왕릉),호남리 사신총,덕화리 古墳群(고분군),강서삼묘,덕흥리 古墳(고분),약수리 古墳(고분),
수산리 古墳(고분),룡강대총,안악 1,2호분,안악 3호분,유네스코(UNESCO),指定(지정)番號(번호),寫眞(사진),登錄名(등록명),所在地(소재지).
東明王陵(동명왕릉)과 진파리 古墳群(고분군),平壤(평양)직할시 력포구역, 호남리 사신총, 平壤(평양)직할시 삼석구역, 덕화리 古墳群(고분군) (1,2,3호), 平安南道(평안남도) 대동군, 백호 朝鮮(조선)古跡(고적)圖譜(도보). 강서 삼묘. 남포 特別市(특별시) 강서군. 덕흥리 古墳(고분). 약수리 古墳(고분). 수산리 古墳(고분). 룡강대총. 남포 特別市(특별시) 룡강군. 쌍영총. 안악 1호분. 黃海南道(황해남도) 안악군. 안악 2호분. 안악 3호분.
古代(고대) 高句麗(고구려) 王國(왕국) 首都(수도)와 墓地(묘지)
古代(고대) 高句麗(고구려) 王國(왕국) 首都(수도)와 묘지(高句丽王城、王陵及贵族墓葬)는 中華(중화)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지린성 지안시와 요령성 환런 만족 자치현 두 곳에 位置(위치)하는 遺蹟(유적)이다.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 世界(세계)流産(유산) 委員會(위원회) 쑤저우(宿苏州) 會議(회의)에서 世界(세계)流産(유산)으로 登錄(등록)되었다.
高句麗(고구려)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國內城(국내성),위나암성,오녀산성,유네스코(UNESC),指定(지정)番號(번호),寫眞(사진),登錄名(등록명),所在地(소재지), 將軍塚(장군총), 지린성 지안시, 廣開土王陵碑(광개토왕릉비), 太王陵(태왕릉), 위나암성, 천추총, 서대총, 임강총, 國內城(국내성), 각저총, 무용총, 오녀산성,랴오닝성, 환런, 만족, 자치현, 國原(국원), 高句麗碑(고구려비),국원 고구려비(國原 高句麗碑)는 2006년 忠州市(충주시) 次元(차원)에서 유네스코(UNESC) 世界(세계)流産(유산) 委員會(위원회)에 登載(등재)를 構想(구상)했었던 高句麗(고구려) 테마(主题:theme) 遺蹟(유적)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忠淸北道(충청북도) 忠州市(충주시)에 位置(위치)한다. 現在(현재) 이름은 忠州(충주) 高句麗碑(고구려비)이다.
高句麗(고구려) (大韓民國(대한민국)國原城(국원성),遺蹟(유적)番號(번호),寫眞(사진),登錄名(등록명),所在地(소재지),國寶(국보) 제205호, 忠州(충주) 高句麗碑(고구려비), 忠淸北道(충청북도) 忠州市(충주시),
高句麗(고구려)와 現代(현대)의 歷史(역사) 紛爭(분쟁)
中國(중국)은 2002년부터 이른바 東北(동북)工程(공정)이라는 國家的(국가적) 프로젝트(project)를 推進(추진)하여 高句麗(고구려) 等(등)의 歷史(역사)를 中國(중국) 歷史(역사)의 一部(일부)로 包含(포함)하려는 偏向(편향)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中國(중국) 東北(동북)3城(성)의 歷史(역사) 文化(문화)를 硏究(연구)하는 프로젝트(project)로 始作(시작)된 東北(동북)
工程(공정)은 事實(사실) 少數民族(소수민족)의 分利(분리) 獨立(독립)을 憂慮(우려)하는 中國(중국)이 朝鮮族(조선족) 離脫(이탈)과 國境線(국경선) 紛爭(분쟁)을 막기 위해 만든 國家(국가) 戰略(전략)으로, 代表的(대표적)인 歷史(역사) 歪曲(왜곡) 事例(사례)다.
이에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도 高句麗(고구려)의 歷史(역사)의 繼承(계승)을 立證(입증)하기 위한 프로젝트(project)의 一環(일환)으로서 2004년 高句麗(고구려) 硏究財團(연구재단)을 設立(설립)하였으나, 2006년에 外交(외교)를 뒷받침하기 위해 設立(설립)된 東北亞(동북아) 歷史(역사)財團(재단)에 統合(통합)되었다.
中國(중국)의 東北(동북)工程(공정)이 韓國(한국) 社會(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朱蒙(주몽)》·《淵蓋蘇文(연개소문)》 等(등) 高句麗(고구려)를 主題(주제)로 한 多樣(다양)한 歷史(역사)드라마(drama)가 放送(방송)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 後半(후반) 以後(이후), 中國(중국)의 攻擊(공격)은 高句麗(고구려)에서 빗겨난 渤海史(발해사)에 集中(집중)되었다.
심지어 中國(중국)은 東北(동북)工程(공정)을 通(통)해 高句麗(고구려)·渤海(발해) 歷史(역사)를 中國(중국) 歷史(역사)로 編入(편입)시킴으로써 朝鮮族(조선족)도 中國人(중국인)이라는 論理(논리)를 펴고 있다. 그 一環(일환)으로 中國(중국)은 옌볜(延边:Yanbian) 朝鮮族(조선족)自治州(자치주)에 中國(중국) 朝鮮族(조선족) 愛國(애국)詩人(시인) 윤동주(尹東柱) 生家(생가)`라고 대문짝만하게 表誌石(표지석)까지 세우며 윤동주(尹東柱) 詩人(시인)을 中國人化(중국인화)하고 있다.
參考資料(참고자료)
《三國史記(삼국사기)》〈高句麗本紀(고구려본기)〉
《三國遺事(삼국유사)》
같이 보기
高句麗(고구려)의 歷代(역대) 國王(국왕)
高句麗(고구려)의 官職(관직)
三國時代(삼국시대),朱蒙(주몽),가우리,고구리,小高句麗(소고구려),報德國(보덕국),渤海(발해),後高句麗(후고구려),高麗(고려),1冊(책) 12法(법),
高句麗(고구려) 復興(부흥)運動(운동),5世紀(세기)의 政治的(정치적) 國家(국가) 目錄(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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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월 2021-01-18 오후 9:45~참 귀한 자료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