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27]아름다운 사람(40)-그 이름, 김민기
어제 오전 약국에서 <가수 김민기 별세. 향년 73세>라는 ‘굿긴 뉴스’를 TV로 들은 후 하루종일 가슴이 먹먹했다. 아니, 너무 많이 슬펐다. 명복을 빈들 무슨 소용이랴. 일면식도 없었지만, 문화계의 거목이라는 말이 어디 가당키나 한가? 그는 우리 시대의 ‘숨은 스승’이었다. 장일순, 법정, 전우익, 권정생 선생님들과 같은 선상에서 하는 말이다. 그가 노래로 연극 등으로 소리소문없이 조용조용 위로해줘 삶의 나침반을 새로이 한 노동자와 어린이, 민주화투사들이 무릇 기하였을까? 오죽하면 그 이름 자체를 한 시대를 풍미한 ‘시대時代’라고 할까?
이 새벽, ‘뒷것 김민기’의 73세라는 짧은 한뉘를 생각하며, 그처럼 마음결이 고왔던 고귀한 삶을 기리는 글 한 줄 남기는 것은 나의 알량한 의무라고 생각하기에 책상 앞에 앉은 까닭이다.
‘배움의 밭’이라는 뜻의 <학전學田>은 이 땅에 수많은 배우 등을 배출하고 양성한 ‘못자리’(모를 논에 심기 전에 모를 키우는 곳)와 이음동의어였다. 어쩌면 극단 이름도 <학전>이라고 ‘김민기스럽게’ 지었을까? “나는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할 때의 ‘뒷것’은 또 무엇인가? 그는 음악과 연극을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제일 가는 ‘문화의 나라’로 만드는데 최적의 수단으로 썼다. 누구누구를 배출한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불멸의,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노래 <아침이슬> <상록수> <공장의 불빛> 등은 진작에 ‘못되고 나쁜 정치’를 뛰어넘었다. 이 땅에 민주화를 앞당겼다고 해도 눈곱만큼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을. 그 훌륭한 일을 그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뒤에서 묵묵히 해나갔다. 그의 몸이 좀먹는 줄도 모르며, 그는 엄청난 업적을 쌓고 햇빛에 금세 사라지는 ‘아침이슬’처럼 사라졌다. 그는 사는 동안 끊임없이 슬퍼했으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기에 바쁜, 마음이 100% 짜-안한 사람이었다. 말투조차 어눌했고 말수 자체가 적었다. 그러고도 죽음을 앞두고 “그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가) 할 만큼은 했다”고 말했다던가.
‘뒷것’만큼 어울리는 그의 호號가 있을까? 세상엔 이런 '뒷것'의 인물이 있으니 굴러가는 것이다. 저 천박한 '앞것'들을 보아라. 눈곱만큼도 부럽지 않은 인간들은 저리 가라. 지난 3월 <학전>이 문을 닫는다는 뉴스는 문화계의 빅뉴스였다. 이를 계기로 SBS가 제작한 3부작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는 울림이 커도 엄청나게 컸다. 대충은 알고 있었다해도, 그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난 것은 처음이 아니었을까? 그는 아무것도 아닌 나조차 고맙다는 말을 절로 나오게 했다. 우리는 그 이름 석 자, 김, 민, 기를 기억해야 한다. 30대 후반인 아들에게 김민기를 아느냐고 물었다. 잘 모른다한다. 아침이슬 노래는 아느냐고 물었다. 양희은이 부른 노래 아니냐며 알기만 한다고 했다. 아들이 어떻게 <늙은 군인의 노래>나 <친구>라는 노래를 알겠는가? 그래도 마음 한켠은 서운했다. 40, 50대들은 어떨까? 그들도 대부분 모를까? 20대, 10대들은 <아침이슬>조차 모를 것은 뻔한 일. 우리가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구가하는데(하기야 듣보잡의 ‘검찰공화국’ 시대도 오긴 했지만), 마음의 빚을 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사상가’가 된 시인 박노해에게도, 영원한 재야투사 백기완 선생에게도 빚이 있다. 열심히 살아도 그 빚을 영영 갚기는 어려운 이름없는 풀에 지나지 않지만, 알 것은 알아야 하고, 기릴 것은 기려야 하고, 그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도 ‘알량한 의무’일 터.
‘유튜브 세상’이 된 지 오래이다. 유튜부가 ‘저널리즘의 희망’임을 알자.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3부작은 검색만하면 언제 어디서든 다 볼 수 있다. 가능하면 많은 젊은 친구들이 시청했으면 좋겠다. 보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되게 된다. 그때 사랑하는 것은 모를 때와는 천지차이라는 게 나의 오랜 지론인 것을, 김민기는 감히 말하건대, 중국의 성인 노자老子처럼 살았다. 아니, 그가 바로 ‘노자’였다. “선행무철적善行無轍迹”(착하고 올바른 행동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이거나 “생이불유生而不有”(살아있는 것은 소유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업적을 이룬 후에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후 당신의 이름으로 어떤 행사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지요. 마치 법정스님의 법문과 같은 삶. 그는 멋지게 고귀한 삶을 살다 가셨다. 당신은 천재였습니다,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줄이은 조문을 받으며, 사모님과 두 아들은 남편이,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새삼 서러움에 목이 매이겠지만(자랑스럽기도 하겠지요), 이타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삼가, 옷깃을 여미며 영원히 '행복한 뒷것‘이었던, 참으로 아름다웠던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언젠가 전직 대통령이 시위하다 쫓겨 대학 뒷산에서 신새벽 불렀다(그런데, 그는 돈을 벌려고 대권을 거머쥐었으니, 참 알다가도 모를 세상입니다)는 <아침이슬>을 눈물을 글썽이며, 이 아침 불러봅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양에/서러운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1971년에 김민기가 작사작곡하여 양희은이 부른 노래입니다. 이미 레전드와 신화가 되었지요. 아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너무 빨리 가신 ‘바보 음악인’입니다. ‘바보대통령’처럼요. 하긴 ‘바보 추기경’도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