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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이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인 마더 테레사는
1910년 8월 26일 마케도니아 스코페 지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의 영향을 받아
그녀는 18세 때 수녀회에 입회하며 종교인의
길을 가게 됐습니다.
그 후 1929년, 인도로 건너간 테레사 수녀는
많은 사건을 겪으며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사명을
깨닫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어느 날, 밤길을 가다가 한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됩니다.
즉시 병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위험한 환자였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급히 그 여인을 데리고
근처의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찾아간 병원은 돈 없는 환자는
받아줄 수 없다며 테레사 수녀와 여인을 쫓아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테레사 수녀는 여인을 데리고
조금 더 먼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병원은 그녀의 계급이 낮아서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두 곳에서나 문전박대를 당하고,
세 번째 병원으로 가는 도중 결국 그 여인은
테레사 수녀의 품에서 숨을 거둡니다.
자신의 품 안에서 죽어가는 여인을 보면서
테레사 수녀는 결심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서 있을 곳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곁이다.'
진정한 향기는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처럼..
마음을 나누고 또 나눌수록 사람의 향기는
모든 사람들의 따뜻한 행복을 위해
퍼져 나갈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가난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달까지라도
찾아갈 것입니다.
- 마더 테레사 -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질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1979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남긴 말.
Saint Mother Teresa(성녀 테레사 수녀원장).
본명은 알바니아어로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이다. 오스만 제국 치하의 위스퀴프(اسکوب / Üsküb, 현 북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인이었던 니콜러 보야지우(Nikollë Bojaxhiu)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가족관계로는 큰언니와 오빠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집안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현지에서 소수 종교였던 가톨릭을 믿고 있었으며, 특히 어머니 드라나필레가 독실한 신자였다고 한다. 아버지 니콜러는 1919년 시의원으로 정치 행사에 참석한 후 독살되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1910년대의 혼란스러웠던 당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비극적 단면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더욱 서로를 아끼게 되었으며 결속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마더 테레사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으나 우등생이었고, 가톨릭 성당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한 후 성장한 후에는 가톨릭 청년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28년 아일랜드 더블린에 가서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고, 인도 제국으로 떠나 인도의 로게토 성모 수녀회에서 수녀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는다.
1937년 로게토 성모수녀회의 수녀로서 종신서원을 한다. 이때부터 '테레사'라는 수녀로서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는데, 19세기 말 활동했던 프랑스의 수녀이자 성인인 리지외의 테레사를 본받겠다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직후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교사로 일한다. 1946년, 대피정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 약자들을 도우며 살라는 소명을 받는다. 직후 수도회 밖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까지 2년의 세월이 지나간다. 1948년에 수도복을 벗고 흰 사리를 입고 수녀회를 떠나 기초 간호학을 속성과정으로 수료한 후,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집안으로 불러와 먹을 것을 주고 돌보아주는 일을 시작한다.
마더 테레사의 봉사 방향성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 해에 테레사 수녀는 인도 시민권을 요청하는데, 곧 평생 인도 시민권자로서 살 수 있게 된다. 1949년부터 성 마리아 학교의 제자들이 테레사 수녀를 따라 모여들어, ‘사랑의 선교회’라는 수도회가 자연히 형성되었다. 1952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연다. 이 집은 가톨릭 신자인 마이클 곰스가 제공한 셋집이었다.
사랑의 선교회는 점점 더 커져갔고, 모인 기부금으로 선교회 지부로 쓸 집을 살 수 있었다. 이 수도원은 사랑의 선교회 본원으로 쓰이게 되고, 같은 거리에 임종의 집에서 죽은 사람들의 아이들을 포함하는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도 설립한다. 이들의 활동은 나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나, 전염을 우려한 사람들의 반대로 이동병실을 우선적으로 만들었다가 후에 시 외곽에 나환자들의 자립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설립한다.
15년간 활동한 이후 인도에서 활동하는 사랑의 선교회의 수도자들은 300명이 넘었다. 주교들이 청원을 올리자, 교황은 사랑의 선교회가 전 가톨릭 교회 내에서 일할 수 있도록 승인한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의 선교회'의 새로운 분원들이 문을 열어 활동하게 된다.
인도로 떠난 이후 수녀회의 사도직 활동에 전념하며 평생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가 임종할 때는 알바니아로 돌아가려 했으나 정부에서 입국 허가를 거절했다.[12] 1981년 5월 3일, 1982년 4월 28일, 1985년 1월 26일에는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말년에 심장병을 얻어 2번의 심장마비를 겪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받을 의료적 행위를 자신이 돌보는 가난한 이들은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2번째 발작 이후에는 정부의 지속적인 요구와 교황의 요청으로 수술을 받게 된다. 1991년에는 걸프 전쟁 중지를 호소하고, 조지 H. W. 부시와 사담 후세인은 요청을 받아들여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물론 테레사 수녀의 요청만으로 전쟁이 멈춘 것은 아니다.
1991년에서 1993년 사이 2번의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몸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계속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평화와 나눔을 호소했다. 자신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사랑의 선교회의 회원을 실제로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만으로 한정한다. 말년에는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는데, 이것이 폐까지 침범하였다. 선교회에서 죽고 싶다고 말해 선교회로 되돌아왔고, 1997년 9월 5일에 향년 87세를 일기로 선종한다.
장례식은 9월 13일에 국장으로 거행되었는데 시신은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의 시신을 운구했던 포가(砲架)로 운구되어 인도 정부가 나타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와 애도를 표했다. 유해는 생전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테레사 수녀의 집에 안장되었으며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평생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일해왔기 때문에 고령이 된 후에는 허리가 펴지지 않았고, 세계를 돌아다닐 때는 한쪽 귀가 멀고 심장이 약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헌신적인 빈민 구제 활동을 하여 살아있을 때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79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수상축하연에 사용될 돈을 빈민구제기금으로 써달라고 요청한 일화가 있다. 자선가에게 주어지는 각종 상과 선량한 종교인이 받는 각종 상들을 수상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다음해인 1980년에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받았다.
2003년 10월 19일 시복식
성 베드로 대성당 강복의 발코니에 걸린 마더 테레사의 상본(像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