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01
12월11일[대림 제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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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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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wDL18-Yv1k
[서울대교구 나충열 요셉 신부님 집전(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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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폐기 문화와 맞서 싸우십시오!>
인생을 정리해야 할 무렵,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 아버지인 교황으로 새로운 부르심을 받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낙담하고 좌절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의 지평을 열어주는 말씀입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더는 새로운 일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은퇴할 나이에 로마 주교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하시며, 그분 역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은퇴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이제 연세가 만만치 않은 노인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동료 노인들에게 건네는 바람직한 노인 신앙인으로서의 이정표가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노인 여러분! 지혜와 풍요로움의 원천이 되십시오. 세상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는 예언자가 되십시오. 노인의 삶도 충만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드러내십시오. 죽음은 끝이 아니라 통로요, 과정이며 완성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시대 노인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또 한 가지를 간곡히 요청하십니다. “이 비정한 시대, 폐기 문화, 즉 버리는 문화와 결연히 맞서 싸우십시오!”
정말이지 우리 시대는 폐기 문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충분히 쓸만한데도 무조건 폐기 처분입니다. 조금만 손보면 십년 이십 년 잘 사용할 수 있을 텐데도 미련없이 폐기 처분합니다.
물건만 폐기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반려동물도, 더 나아가서 사람까지도 폐기 처분합니다. 더 이상 생산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너무 짐이 되고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병이 길어진다는 이유로, 가장 가까운 가족들까지도 폐기 처분하는 문화가 우리 안에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그들’의 행동은 가슴에 손을 얹게 만듭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사람들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을 만나뵙게 하려 했으나, 엄청난 군중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풍 병자의 치유라는 간절한 목표 앞에 포기할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신 집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냈습니다. 중풍 병자가 누워있는 평상에 줄을 매달아,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그들로 인해 예수님의 심기가 불편하셨을 텐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강한 믿음을 보시고, 즉각적인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틈만 나면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인간 존재를 자신들의 눈앞에 안 보이게 하려는 우리입니다. 더 이상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어떻게 해서든 폐기해버리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서 데려온 ‘그들’의 행동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자기 앞가림이나 제대로 하지, 오지랖도 넓다.’고 비아냥대는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금 이순간 큰 고통 속에 있는 중풍 병자를 향한 강력한 측은지심, 그것이 예수님의 자비와 은총을 불러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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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w-AB38aF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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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서 신비로운 존재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한 중풍 병자를 고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중략)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주는 것을 ‘성사’(sacramentum)라고 합니다. 성사 중의 성사는 성체성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신성을 눈에 보이는 밀떡 형상으로 내주시는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이런 것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신비’롭게 보입니다.
세상이 밀떡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믿으며 우리가 2천 년 동안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사는 다 ‘신비’(mysterion)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신비로운 광경을 보고 교회 안에 죄의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것까지 믿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도 다 성사이고 신비롭게 보여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것을 보여주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신비롭게 보이려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예상을 뛰어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그 기적의 신비를 보고 믿음을 얻어 죄를 용서받습니다.
아르헨티나 사람인 라울 소사(Raoul Sosa)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5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뛰어난 음악성을 보였던 10대 초반에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들과 다양한 실내악곡들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스무 살 때 그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그리고 지휘자로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청천벽력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1979년 불의의 사고로 오른손 셋째와 넷째 손가락이 마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유명한 라울 소사가 이제 피아노 인생은 끝이 날 것이라 믿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이 언제나 그러하였던 것처럼 라울 소사도 절망을 딛고 더 큰 거목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왼손 하나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가락을 놀리는 날렵한 핑거링(fingering)은 청중들을 압도하며 큰 감동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손 피아노에 압도된 청중들은 그를 ‘기적의 피아니스트’라 부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참 신기하다!’라는 인상을 줍니다. 이런 인상을 주려면 반드시 그 사람 안에 ‘믿음’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네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이희아 씨가 있습니다. 의사의 유산권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우갑선 씨의 강력한 출산 의지로 태어난 아기가 ‘희아’ 씨입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10살에 세상을 떠난 성녀 히야친타의 세례명을 따 ‘희아’란 이름을 주었고 ‘세상의 기쁨의 싹’이 되라는 의미도 함께 주었습니다. 희아는 말합니다.
‘나는 손가락을 두 개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내 손을 생각해 보면 아주 귀한 보물의 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희아 씨가 피아노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에 하루 10시간이 넘는 맹훈련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 그렇게 고된 훈련에 작은 몸은 서서히 지쳐갔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피아노를 보기만 해도 경기를 하고, 피아노 선생님을 보면 숨어버리는 등 ‘피아노 거부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했고 어머니도 자신의 욕심을 접으려고 했습니다.
기적은 병상에서 일어났습니다. 1979년 불의의 사고로 오른손가락이 마비되는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피아니스트, 장애를 뛰어넘는 열정으로 지휘와 작곡을 비롯해 왼손만을 위한 작품을 작곡한 것뿐만 아니라 한 손만으로 연주하는 놀라운 기교를 개발해 청중을 압도하는 감동을 보여준 ‘기적의 왼손 피아니스트’ 라울 소사를 만난 것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장애가 있는, 어쩌면 자신보다 피아니스트로서 더 큰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와의 짧은 만남이 그를 다시 피아노 앞으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5년 동안 자신을 힘들게 했던 ‘즉흥 환상곡’을 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대표곡으로 전 세계 수많은 사람에게 터질 듯한 감동과 용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IMF 사태에 빠졌을 때 전 국민이 금붙이를 모아서 전례가 없이 빨리 그 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런 일이 신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뭉치면 못 할 게 없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기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태석 신부나 마더 데레사 성녀처럼 믿음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도 교회 안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있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 한 분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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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LA에 머물 때입니다. 수도원 미사에 함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사 신부님과 교우들 10명이 함께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강론을 부탁하였고, 저는 ‘갈망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 속담에 ‘우는 아이 떡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말씀을 아주 멋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복음서를 보면 갈망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하혈하는 여인, 가나안 여인, 소경, 나병환자, 중풍병자, 회당장 야이로, 백인대장, 자캐오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던 따뜻한 이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이 있다면, 그 갈망을 삶으로 드러낼 수 있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길을 보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미사를 마친 후, 신부님과 함께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는 ‘죽비’가 되어 지친 나의 마음을 깨워 주었습니다. 젊은 날에 한창 혈기가 왕성했을 때에 뜻하지 않게 ‘암’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다행히 암은 치유되었지만 심적인 근심과 두려움이 커서인지 ‘공항장애’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가족력이 있어서인지 ‘성인병’도 찾아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원망스러웠고, 괴로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런 아픔들이 있었기에 더욱 열심히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픔들이 있었기에 다른 이들의 아픔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픔들이 있었기에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기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저도 체질적으로 약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잇몸이 좋지 않아서 질긴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혈압이 높아서 약을 처방 받아야 합니다. 머리카락이 일찍 하얗게 되어서 염색을 하곤 했습니다. 잇몸이 좋지 않지만 치아관리를 꾸준히 하여서 아직은 임플란트를 하나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혈압이 높지만 꾸준히 운동해서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로는 염색하지 않고 하얀 머리로 지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얀 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거울에 비친 하얀 머리가 좋습니다. ‘아픔만큼 성숙해지고’라는 노래 제목처럼 아픔은, 고독은 때로 우리를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갈망과 따뜻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갈망과 따뜻한 마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의심과 교만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배움이 많았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았지만 율법의 정신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안에 있는 교만함을 겸손으로 바꿀 수 만 있다면, 내 안에 있는 욕망을 비움으로 바꿀 수 만 있다면, 이웃의 아픔을 가슴으로 공감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적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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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17-26: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모습을 본다. 중풍 병자는 주위의 사람들의 믿음과 노력과 희생으로 예수께 인도되었고, 은총을 받는다. 모든 병자와 죄인들에게는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갈 천사가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환자를 침상에 달아 당신 앞으로 내려보낸 그들의 믿음을보시고 그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0절) 하신다. 예수님은 환자의 영을 먼저 고쳐주신다. 그냥 걷게 되면 다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신 그분은 그를 내적으로 먼저 치유하신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21절)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단죄하며 판단한다. 이 판단이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나의 이웃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나의 잣대로 재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23-24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죄를 용서하는 것과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 중 어느 것이 더 쉬냐냐고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다. 두 행위 모두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심으로써 밝혀주신다.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이려고 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있었고, 군중들은 그 기적을 보고 두려움에 싸이지만,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26절). 오늘이란 루카가 구원의 미래가 아닌 현재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지상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구원을 체험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어야 한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예수께 갔던 친구들의 희생으로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도 받은 만큼 남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신앙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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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기적 이야기에서 설화적 긴장은, 보통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가 예수님께 다가와 치유를 청할 때 생깁니다. 질병이 이야기 안에서 해결되어야 할 어려움인 셈입니다.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과연 그 환자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인가?’ 또는 ‘예수님께서 그 병을 고쳐 주실 능력을 지니고 계시는가?’ 하는 긴장 속에서 이어지는 장면을 기대하며 지켜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기적 이야기에서는 질병 말고도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는데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정황상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십니다. 그분을 보려고 군중이 몰려들어 집 안팎에는 빈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군중은 마치 중풍 병자와 예수님 사이를 갈라놓는 커다란 장벽처럼 보입니다.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병자는 치유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중풍 병자를 데려온 이들은 이러한 난관에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묘안을 생각해 내어 그가 장벽을 넘어설 수 있도록 끝까지 애써 줍니다.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겠다는 그들의 강한 의지에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중풍 병자의 딱한 사정을 마치 자기 일처럼 여길 줄 아는 뛰어난 공감 능력을 지녔습니다.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가 함부로 기와를 벗겨 내는 일이 오지랖 넓은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 이들, 그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준 사람들은 그런 곱지 않은 시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 병자에게 구원을 안겨 주실 분을 만나게 하여 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자기 일만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요즘 시대에, 우리는 이웃의 어려움에 공감할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까?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그러한 능력을 키워 나갑시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공감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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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5,20-26)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 즉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대림 시기의 미사 때 이 이야기를 복음 말씀으로 듣는 것은,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더욱 깊이 새기기 위해서입니다.>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이나 장면들은, 이 증언을 좀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배치한 무대 장치 같은 것이고, 부수적인 내용일 뿐입니다. 이야기의 앞부분에 있는,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낸 이야기”는 메시아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심정을 상징하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의문을 품었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반감과 적대감을 나타내고, 이야기에 나오는 ‘군중’의 모습은 남의 일에 관심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놀라기는 하는데 믿음을 갖지는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나는 너를 구원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사람아’라고 부르신 것은, 그 병자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얘야’라고 부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9,2; 마르 2,5) ‘얘야’는 ‘아들아’로 번역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사람아, 얘야, 아들아’는 모두,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엾게 여기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말씀이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또는 “나는 너를 구원한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들었고, 그들은 그 말씀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반감과 적대감을 품게 됩니다. <본문에는 ‘의아하게 생각하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반감과 적대감입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라는 말은, 여기서는 “사람이 감히”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사람’일 뿐이었고, ‘사람’이면서 감히 하느님 흉내를 내는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즉 “둘 다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을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으로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즉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 또는 사람을 구원하는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은 ‘눈에 보이는’ 권능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권한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이 전혀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들의 불신과 반감과 적대감이 해소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군중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한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일이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놀라기는 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하느님이신 분’이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행사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놀라운 일, 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냥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인가?”
만일에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만 믿고, 하느님으로는 안 믿는다면, 굳이 예수님을 찾을 필요 없이, 하느님만 잘 섬기면 그만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ㄱ) 만일에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 아니라면, 이 말씀 자체가 ‘신성 모독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목숨을 전부 다 예수님께 맡겨 드립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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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하루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그곳에는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습니다. 그때 남자 몇 명이 중풍에 걸린 사람을 평상에 누여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개인의 고통이나 중풍과 같은 병은 그가 지은 죄의 결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와 고통의 인과 관계를 따지지 않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고 해방시켜 주십니다.
죄는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느님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기에, 죄인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악마의 지배 아래에 놓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분의 치유 은혜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치유 선언 대신 사죄를 선언하심으로써 바로 당신만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참된 메시아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특별히 우리를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죄악들을 더 깊이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두가이들로부터 ‘분리된 사람들’로서 주로 정결례 규정을 지키는 데 열성적인 평신도들이었습니다. 그 법들을 더 잘 지키도록 강요하며, 이를 잘 지키지 못하는 유다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유배 이후 이스라엘에서 율법 해설에 전념한 상류 계층의 율법 전문가들로, 성경의 가르침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성경 밖의 전통을 발전시켰고, 소송 문제에서 재판관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이들 안에서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하느님을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 것을, 돈을 섬기는 우상 숭배를 봅니다.
사람들이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간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를 뚫고 하느님께 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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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17-26)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예수님께서는 ‘함께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ㅠ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루카 5,24)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4-25)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치유 받았어도 ‘들 것’을 여전히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몸을 버려두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이요, 이미 용서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들것'에 메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들것'을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할 뿐 아니라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 할 일입니다. 마치 성모님(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 우리의 죄와 인류를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다닙니다. 용서받고 치유 받았음의 표지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치유 입었습니다. 이토록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습니다.(마태오 5,26) 신령스런 주님의 사랑을 말입니다. 아멘.
하오니 주님! 평상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평상을 들고 가게 하소서. 평상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저도 십자가에서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당신께서는 치유 받은 이에게 평상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나
평상을 가지고 가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지니신 십자가의 상처처럼,
구원의 표시로 들고 가라 하십니다.
하오니 그 상처를 더 이상은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그 구원의 샘에서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픈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평상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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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처럼 혼자 하는 것보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함이 훨씬 존재의 기쁨과 보람을 더 강렬하게 느끼게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세상은 물론 수도원도 이젠 ‘함께함보다 혼자’ 즐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요즘 자주 듣는 ‘혼술, 혼밥’이란 표현을 통해서 세상의 흐름을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함께함보다 혼자’가 대세인 듯싶지만, 본디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존재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랫동안 중풍으로 고생한 이웃을 안타깝게 돌보아 준 이웃들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마을 근처에 머무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군중들로 인해 ‘아파하는 이웃’을 예수님 가까이에 데려갈 수 없었지만, 그를 낫게 해주고 싶은 간절함에서 발상을 전환합니다. 출입구가 아닌 지붕을 덮고 있는 것을 벗겨내어 마침내 주님 앞, 사람들 가운데로 내려보냈습니다. 이를 본 군중은 물론 예수님도 놀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은 어쩌면 중풍 환자의 낫고자 하는 간절함보다 그를 돌봐왔던 이웃들의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당신께 대한 믿음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에 탄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5,20)라고 파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곧 중풍 병자나 그의 병을 낫게 해주고 싶은 이웃들, 더 나아가서 군중들 그리고 이를 지켜보고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 모두에게 향한 파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래도록 그들 모두는 ‘인과응보因果應報(=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름)라는 틀’에 속박되어 살아왔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중풍은 바로 그가 지은 죄의 결과이며 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내 예수님의 말씀이 뜻밖이어서 이상하게 여기고 의심하며,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5,21)라고 웅성거렸던 것입니다. 이는 지금껏 그들이 믿어 온 것과 살아 온 것과 전혀 다른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온 진리는 그들이 표현한 대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단 한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아닌 예수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발설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5,24)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실 요령要領으로 그들 앞에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5,24)라는 말씀 한마디로, 그를 육체적으로 치료하고 영적으로 치유하십니다. 이 모든 치료와 치유는 예수님께서 손수 하신 일이었지만, 이 일이 일어나게 한 계기는 바로 중풍에 걸린 이를 측은히 여긴 이웃들의 믿음과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바로 이웃들과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사람을 살리길 바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 내가 모르지만, 나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하고자 하는 이웃이 있음에 감사하고, 아울러 우리 또한 어느 때 어떤 곳에 머물던 지 나의 도움을 필요한 이웃의 아픔을 함께 할 마음으로 ‘평상’의 한 모서리를 들도록 합시다. 단지 나의 도움을 받는 사람만이 아니라 나 또한 그 일로 보람과 행복을 느끼고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의 시선을 끄는 대목은 예수님께서 그 중풍에 걸린 이를 치료와 치유하시면서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가거라.’라고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치료와 치유를 받았음에도 남은 세월 동안 ‘누워 있던 것’을 들고 집으로 감으로써 그것은 평생 그가 살고 있는 곳에 고이 모셔두었으리라 봅니다. 많은 성지 순례지엔, 성지마다 치유 받은 이들이 버리고 간(?) 목발이며 여러 가지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쉽게 보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평상’을 집으로 가져가게 하신 것은 그것을 볼 때마다 그것이 더 이상 과거 상처의 표식이 아닌 용서와 구원의 표식으로 여기며 어제가 아닌 현재와 미래에 깨어 살도록 하기 위한 표지로 삼고 살아가길 바라신 게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 가정마다 십자가가 달려 있듯이 말입니다. 은총을 기억하고 사랑을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우리 또한 어떤 의미에서 ‘평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5,26)라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처럼 우리도 이를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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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장자’에 유명한 거목 이야기가 나옵니다. 쓸모 있는 나무는 베여서 대들보나 서까래로 사용되지만, 쓸모없는 나무는 베이지 않고 거목으로 자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실패했거나 낙오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삶을 새롭게 긍정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형제님이 있습니다. 공부도 잘했고, 운동이나 기타 예능 쪽에서도 남들과 달랐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그곳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능력 많은 그에게는 너무 많은 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말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했습니다. 건강은 점점 나빠졌고, 어느 순간 공황 장애가 찾아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재능으로 좋은 직장, 안정된 부를 누릴 수 있었지만, 건강을 잃고 나서는 그 모두가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반드시 능력과 재능이 많아야 좋을까요? 또 부와 세상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면 행복할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스스로 거목이 될 수 있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사랑 타령이었습니다. 돈 버는 법, 높은 지위를 얻는 방법, 그리고 병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이야기해 주셨다면 지금의 교회를 크게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스스로 성장시켜 큰 거목이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신체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체적인 고통 자체는 도덕적 악의 상징이고, 악에 그 이유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럴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때, 사람들 사이로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지붕의 기와를 벗겨 내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당시의 사람들 시선은 마치 죄인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에 맞춰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 5,20)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죄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그 용서를 받는 영광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살 수 있도록 건강까지도 부수적으로 받습니다. 만약 그가 중풍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의 친구들이 지붕의 기와를 벗겨 내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내지 않았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거목이 되는 길을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진짜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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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런 것이라네>
루카 5,17-26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그런 것이라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루카 5,24)
하느님의 사람이니
오롯이
하느님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니
비로소
하느님의 사람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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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좋은 이웃이 되어라>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모습이 멀리 있는 사촌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살아가면서 이웃을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잘 만나 복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웃에게 복이 되어주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 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복을 지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가 천정을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 한 가운데로 내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육체적인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병과 허약함 뿐 아니라 그 속을 고쳐 주셨습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고 판단했지만 주님께서는 속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영혼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의 뿌리를 다스리시고 부족함을 충만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명의는 원인을 치료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중풍병자는 군중이라는 장벽과 지붕이라는 걸림돌을 넘어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넘어야 할 산을 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풍병자는 이웃을 잘 만났습니다. 그는 이웃이 있었기에 능력의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모두를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잘 만난 이웃사촌이 복덩이입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이웃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믿음을 보고도 은총을 허락하시니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도 다 복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큰 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미심쩍어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용서를 하시는데 사람은 용서보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판단하고 심판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마음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을 드러내셔서 믿도록 해주셨습니다. 판단과 심판에 앞서서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두려움에 차서 신기한 일을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은 오늘도 믿는 이들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신부님 고맙습니다. 제가 성경에 맛들이게 되었습니다.”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날, 몸이 매우 아픈데도 불구하고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안수를 받으며‘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몸이 많이 아팠지만 아픈 것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가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밥 대신 성경을 챙겼고 성경을 읽는데 말씀이 꿀같이 달았습니다.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저는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성경을 읽게 되었고 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대단한 학자가 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날 이후로 성경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습니다.”
큰 믿음에 바탕을 둔 행동에 신기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이고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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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향(歸鄕)의 여정>
-“날마다 좋은 날, 행복한 날입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리라.”(시편85,11)
요즘 많은 형제자매들을 만나면서 50-60대 가장의 수난시대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도중에 쓰러지는 분들도 많고 존재감없이 참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생활력 약한 형제들도 많습니다. 반면 자매들은 책임감이 강하고 지혜롭고 강인하여 가정과 자녀들을 잘보며 가정의 중심이 되어 튼튼히 살아가는 분들이 태반입니다. 여자는 약해도 한국 어머니들은 얼마나 강인한지요! 남녀 형제자매들 모두가 분발하여 주님의 믿음의 전사로 참으로 충실히 살아가야할 때 같습니다.
새벽 화장실에 들렸다가 선반에 가득 쌓인 화장지들에 눈길이 갔습니다. 편안해 보이는 화장지뭉치 마다 글귀가 선명했습니다. 영어로 “해피데이(happy day)”, 그냥 우리말로 “행복한 날”이라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누구나 원하는 행복한 삶입니다. 언젠가 살아야 할 행복한 삶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바라는바 행복한 삶입니다. 더불어 생각난 두달전 써 나눴던 “모든 날이 다 좋다”라는 짧은시입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주님 함께 계시기에”-2023.10.21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참 좋은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날마다 좋은 날, 행복한 날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화답송 시편 두 구절입니다. 성가정 축일 미사 때마다 흥겹게 부르는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시편 화답송 후렴을 기억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산티아고 800리 2000km 순례여정, 신비롭게도 산티아고 대성전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도 가볍게 나는 듯 걷게 한 시편 한 구절도 그립게 떠오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뻣노라.”(시편 122,1)
그러니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 사는 우리 수도자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요 행복한 날입니다. 영혼의 고향같은 주님의 집 수도원이기에 고향집을 찾듯 주님의 평화를 찾아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는 발길들입니다. 어제 영문주석을 보면서 반갑게 와닿은 “리터닝 홈(returning home)”, 귀향(歸鄕)이란 글귀였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 영혼의 고향이시고 대림시기는 성탄의 주님을 향한 귀향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 귀향의 치유와 구원이 이루어지는 참 좋은 날이요 참 행복한 날이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이 주님을 만난 귀향의 기쁨과 행복을 신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야말로 하느님의 시인이요 신비가요 영성가입니다. 저는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보다 더 좋은 시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처음 읽듯이 늘 새롭고 좋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너희는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자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 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대림시기 오늘 이때가 치유와 구원의 그때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귀향의 기쁨과 행복을, 귀향의 치유와 구원을 체험하는, 그대로 주님의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영혼의 고향인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요 참 기쁨에 참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절망의 현장에서 하늘 나라의 희망과 꿈을 노래한 위대한 희망의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우리를 용기백배 힘을 내어 살게 합니다. 바로 이 귀향의 희망과 꿈이, 치유의 구원이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역시 “더불어(together)”의 구원입니다. 참 좋은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주님을 만나 치유받으니 말 그대로 귀향의 치유와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궁즉통이라, 중풍병자 동료들은 믿음의 눈이 열려 구원의 통로를 찾아냈고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평상에 누인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냅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감격한 주님의 치유와 구원의 선언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동료들의 지극 정성의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케 했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입니다. 이어 곧 이어지는 육신의 치유, 전인적 치유의 구원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중풍병자는 물론 동료들도 더불어 내적치유와 구원을 받았을 참 좋은 날, 참 행복한 날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평상을 가지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가니 그대로 부활체험이요,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아름답게 묘사하는 귀향歸鄕의 실현입니다.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치유받은 중풍병자와 네 동료들의 분위기가 분명 이러했을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하늘나라의 희망과 꿈은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고, 지금도 대림시기를 통해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안에서 계속 실현됩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전인적 치유와 구원의 참 좋은 날, 참 행복한 날을 살게 하시고 한결같이 귀향의 여정을 충실히 살게 해주십니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85,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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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느닷없이 ‘관상’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관상 타령을 할까 합니다.
관상은 하느님 관상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하느님뿐 아니라 나도 보고, 이웃도 보고, 다른 자연도 보는 것이라고 저는 자주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주장합니다.
나를 보더라도 나의 고통을, 욕망을, 갈망을, 보고, 나의 고통을 보면서도 고통만 보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도 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도 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보고, 나의 고통만 보지 않고 이웃의 고통까지 사랑으로 보는 것, 뭐 이런 것이, 관상이고 진정한 관상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관상이 아니고, 사랑으로 보는 것이 관상이라고도 얘기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라 고통에 나의 시선을 빼앗긴 것이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실은 관상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관상도 하느님을 보는 것이지만 하느님만 보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사로잡힘이지 진정한 관상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얼마 동안 완전히 하느님께 몰입되고 성인들이 탈혼 상태에 있듯이 하느님께 사로잡힐 수는 있어도 계속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런 관상을 진정한 관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느님 관상은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라고 제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오늘 관상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 때문입니다.
Say to those whose hearts are frightened:
Be strong, fear not!
Here is your God.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러므로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보면/관상하면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는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 병자와 동료들은 바로 이렇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어느 마음에 들어오셨을 때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은 주님께서 어쩌시나 보려고 왔지만, 이들은 치유를 받기 위해 옵니다.
중풍 병에 맥없이 주저앉아있지 않고 어떻게서든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왜? 물론 치유 받기 위해서지만 그 이전에 주님의 능력을 보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 이들이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고, 그런 주님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치유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관상이 치유와 구원까지 이르는 것을 본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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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5,20)
<그들의 믿음!>
오늘 복음(루카5,17-26)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실 때,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군중 때문에 그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른 말씀들'입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만으로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백인대장의 믿음'(마태8,8)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야이로의 한 회당장의 믿음'(마태 9,18)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는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한 여인의 믿음'(마태 9,21)입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17,20)
단순한 믿음, 작은 믿음이면 충분하다는 말씀이고, 이 믿음으로 나와 너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땀을 흘리셨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셨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매일 성직자들의 손을 통해 제대 위로 내려오신다.'
이것이 바로 내가 믿어야 할 '믿음의 본질이며,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본질과 핵심'이 나를 살리고, 또한 너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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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mnlszHcr3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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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마태 8, 7)
믿음이
가고자
하는 길은
내어맡기는
겸손의 길입니다.
올바른 믿음은
인격으로
드러납니다.
자신과 주위를
할퀴고 무는
인격체는 결코
올바른 인격체가
아닐 것입니다.
믿음의 자세는
그야말로
겸허함이어야
합니다.
백인 대장의
믿음은
실속 없고 헛된
자기과시의
태도가 아닌
바로 겸허함
그 자체인
것입니다.
믿음의 삶에서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의 길을
만납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믿음의 본질인
겸허함에서
빗나갔던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부작용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망치는
불량품같은
요소들을
제거합니다.
모든
악조건들을
극복하며
발전하여
나가는 모습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건강한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어려운 문제들을
지혜롭게
잘 해결하는 것은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기도와
내어드리는
겸허함에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찾아가는 길은
세상의 유행에
역행하는
길입니다.
자아도취와
자기과시가
아닌
겸손한 믿음이
순리입니다.
자기 교만으로
신앙의 순리에
역행하지 않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자기중심적
자기견해를
안 붙이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좋은 날입니다.
본연의 자세
본연의 자리
겸허함에서
이루어지는
성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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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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