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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8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지금 태풍으로 인하여 이곳 베트남 하이퐁이 다 날아갈 것 같습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대낮에도 어두컴컴해서 해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람은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킬 것처럼 아주 강력한 태풍이었습니다.
교회 주변 공터에 쳐놓은 울타리가 태풍으로 다 넘어졌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센 지 그 소리가 금방이라도 집을 넘어뜨릴 것 같은 위력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정전으로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없는데 문이란 문은 다 닫았기 때문에 바람이 넘치는데 정작 실내는 바람이 없어 땀을 뻘뻘 흘리며 지냈습니다.
이 시간 조용히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세상이 난리와 난리의 소문처럼 흉흉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님의 긍휼을 구하오니 이 종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5:1-13
제목 : 너희의 좋지 못한 소행으로 인하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라.
1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2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3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4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빝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5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6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7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8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9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10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11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1/100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12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고
13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 나의 묵상
BC 537년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제1차 귀환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 예루살렘을 비롯한 가나안에 재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기간 동안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에 의해 침략과 약탈을 당해 왔다.
이러한 고통스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절실한 것이었다.
3장은 느헤미야의 주도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데 공로를 세운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였고, 4장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데 외부적 위험 요소에 대하여 스스로 방어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비록 산발랏 도비야 게셈과 같은 자들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를 방해하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귀환민들은 혼연 일체가 되어 성벽 재건 공사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진행하였다.
어떤 면에서는 이와 같은 외부적 위험 요소는 내적 결속력을 한층 강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성벽 재건 공사는 착수한지 52일 만에 완공하게 된다.
5장은 이러한 외부적 위협과는 또 다른 내부적 위기를 다루고 있다.
조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외부적 위협은 오히려 공동체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내부적 위기는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사실 4장과 5장은 시간적 배경이 다르다.
4장은 느헤미야가 귀환한 해인 BC 444년에 있었던 일이지만, 5장의 배경은 1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후의 사건이다.
비록 시간적 배경이 다르긴 하지만 이 사건을 5장에서 기록한 이유는 이 사건이 4장의 외부적 위협과 마찬가지로 선민 공동체의 회복과 재건 과정에 닥친 심대한 위기라는 측면에서 그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부적 위협은 성벽 재건 공사 기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성벽 재건은 공사를 시작한지 이미 52일 만에 완공하였으며,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가 총독이 된지 12년이 지난 시점이었음을 14절에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14)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20년부터 제32년까지 12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선민 공동체의 내부적인 위협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대두되고 있다.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다수의 평민 백성들은 그들의 아내들과 함께 그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부르짖으면서 원망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귀족들이나 관리들이 일반 평민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형편상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 밭과 포도원을 저당 잡히고 곡식을 얻는가 하면, 페르시아 왕에게 세금을 내기 위하여 밭과 포도원을 저당 잡혀서 빚을 내고 있는 형국이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먹고 살기 위하여 자식들을 남의 집 종으로 팔 수 밖에 없는 처참하고 절박한 위기 상황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이러한 절규를 듣고 분노하였지만, 그는 심사숙고한 후에 귀족들과 관리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비공개적으로 꾸짖어 이르기를 “어떻게 너희가 너희 형제들에게 고리대금업을 할 수 있느냐?”
그 후 느헤미야는 공동체 전 백성들을 상대로 공개적인 큰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고리대금업을 한 귀족들과 관리들, 즉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해 준다.
8절에서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느헤미야를 비롯하여 뜻을 같이 하는 형제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이방인들에게 팔린 동족들을 그 압제에서 자유케 하기 위하여 애를 썼고 또한 그들을 속량했는데, 부자들인 너희 귀족이나 관리들은 어떻게 같은 동족인 형제들을 같은 동족에게 팔아 넘겨서 종으로 삼고 고리대금을 받느냐고 책망한다.
부자들의 그런 행동은 그들의 대적인 이방사람들의 비방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했다(9절).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써 행동을 해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느헤미야와 그의 형제들 역시 가난한 백성들에게 돈과 양식을 꾸어주었지만 이들은 그에 대한 이자를 받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것을 이야기 하면서 이제 부자들이 저당 잡았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 그리고 꾸어 준 돈이나 양식, 새 포도주나 기름의 1/100을 돌려보낼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는 돈이나 양식, 새 포도주나 기름을 빌려주면서 저당 잡았던 밭과 포도원 그리고 감람원 같은 부동산은 곧바로 돌려줄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빌려준 돈이나 양식, 새 포도주나 기름에 대해서 받은 이자 1/100에 대해서도 돌려 줄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리대금업을 한 부자들은 느헤미야의 말대로 순종할 것을 약속하고 더 이상 가난한 자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 약속에 대해 확증을 시킨다.
그리고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그 집과 산업이 핍절하게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느헤미야의 강력한 경고에 모든 회중이 아멘으로 화답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였으며 모든 백성이 이를 그대로 행하였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작금의 한국 교회를 돌아본다.
한국 교회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큰 양적 부흥을 이루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고, 기도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당시는 한국이 경제적으로도 고도성장을 이루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와 맞물려 교회까지 성장을 넘어 엄청난 부흥을 이루면서 마치 한국의 경제성장을 교회가 주도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결코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대부분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기도원에 찾아가서 부르짖는 것은 부자 되는 것, 가정의 행복, 소원 성취, 자녀들 대학 입시 문제 등이었다.
이를 놓고 금식하고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하였다.
이런 모습은 점점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기 시작하였다.
적어도 세상은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감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래도 세상 사람들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기대감이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똑같이 좋아하고,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 똑같이 원하며,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똑같이 가지고 싶어한다.
그러면서 그것을 취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기보다는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께 가서 기도하여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뭔가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그들을 섬기고자 조금은 손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보도 없고 손해도 보려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도하여 더 많이 취하려고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에 치를 떠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오늘 본문 9절에 나오는 부자들이 대적 이방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행동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 하나님을 이용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취하려고 하는 모습에 세상은 믿는 자들을 향하여 비방과 손가락질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급기야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비방하고 손가락질 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제는 교회를 걱정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결코 누구를 탓할 수 없다.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 각자가 나로부터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며 바르게 믿었다면 세상의 비방을 받는 차원을 넘어 이처럼 세상의 근심과 걱정거리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모태 신앙인이며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라고 교회가 나의 놀이터였다.
즉 교회가 나의 삶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의 삶과 밀접하였다.
이처럼 교회에서 먹고 자라고 생활을 했다면 나의 삶이 변화되고 세상을 섬기는 그런 자가 되었어야 하는데, 나는 전혀 그러지 못하였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했으며, 더 멋지고 보란 듯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였다.
예수 믿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더 큰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라 배웠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런 나는 점점 괴물로 변해 갔다.
그 이유는 교회가 나의 삶의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하고 자랐으며, 복음이 없으니 생명으로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복음이라고 들은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니 이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도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자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부활에 대한 소망도 없었고, 죄사함에 대한 기쁨도 없었다.
그 이유는 부활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지 않아도 그냥 죽어서 영혼만 천국에 가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진짜 예수 믿는 자가 아니었다.
창세전의 세계, 만물 위의 세계는 전혀 알지도 못하였고, 어느 누구도 그 세계에 대하여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내가 젊어서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의 목사님들조차 그러하였다.
단지 천국은 죽어서 가는 좋고 아름다운 곳쯤으로 치부하였다.
이런 나는 죄에 대한 갈등도 별로 없었고 점점 양심은 화인 맞는 자처럼 변해만 갔다.
그야말로 괴물이 되어 갔던 것이다.
목사가 되어서도 복음을 모르니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였고,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복음이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 착각하였다.
목사의 성공은 교인들 많이 모아서 성전(?) 크게 짓고 노회나 총회에 가서 정치 하다가 은퇴 후에는 거액의 은퇴금을 받아서 여행다니면서 노후를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도 목회에 성공하기 위하여 선배 목사님들이 걸어갔던 그 영화로운 길을 걷고자 무진 애를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의 목회의 길은 기쁨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았으며, 심장이 끊어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만 계속되었다.
그래서 나는 목회를 그만 두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그 때마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고통의 순간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왔고 이 통합복음을 들은 나는 영적으로 완전히 살아났으며, 복음이 무엇인지,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복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어 그 생명으로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복음의 목적이다.
그런 영생을 맛보고 누리는 것이야 말로 믿는 자의 본질이다.
이 땅 위에서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나, 더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 그리고 더 멋지고 화려하게 보란 듯이 사는 것이 결코 목적이 아니다.
나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상황 속에서 자족하고 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자체가 기쁨이요 행복임을 안다면 그것이 바로 영생인 것이다.
영생은 곧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인데, 아는 것이란 그저 지식적이거나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인격적으로 만나서 매일 교제와 사귐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곧 말씀 묵상이며, 이를 통하여 참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자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자이다.
그런 사람은 환난을 당해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환난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오늘도 예수님 때문에 환난 중에도 솟아나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느헤미야 시대 귀족과 관리들인 부자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면서도 자신들을 자칭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는 그 모순에 대하여 이방 사람들이 조롱하였나이다.
오늘 내 안에 그런 모습이 있음을 봅니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자요,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음행을 저지르는 나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아 마땅한 자요 하나님 앞에서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이오니 나를 심판하소서.
주님의 심판은 항상 옳습니다.
그 심판이 나를 살립니다.
하오니 모래 위에 지은 나의 집이 공의로 무너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제는 더 이상 세상적으로 과욕을 부리지 않게 하시고, 더 낮아지고 겸손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세상을 섬기는 자 되게 하소서.
복음을 몰랐던 자가 복음을 듣고 아들의 생명을 얻어 모든 일에 자족하며 영생을 살게 하셨사오니 그 은혜 무한 감사합니다.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생명으로 이제 참된 영생을 누리게 하소서.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이전에는 세상 사람들의 비방을 받던 자였으나 이제는 내 가까운 자로부터 비방을 받는 자 되게 하소서.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 방탕 향락 무법한 우상숭배를 끊으므로 이제 이 모든 이방인의 삶은 지나간 때로 족하오니 오직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나도 걸어가며 내 주변에서 나를 이상하게 여기며 비방하는 그 비방을 달게 받게 하소서.
그것이 내게 면류관임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