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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9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제 안에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비존재 세력이 있습니다.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나이다.
주의 보혈로 나를 덮으소서.
보혈의 능력으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죄로 가득한 이 종에게 주의 분노로 마시고 주의 긍휼하심으로 품으소서.
내 영혼이 평안을 얻도록 허락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는 목자이나 선한 목자가 아니라 악한 목자요 그것도 삯군에 불과한 자입니다.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주의 공의로 나를 심판하소서.
그리하여 생명이신 주의 말씀을 양식으로 날마다 먹게 하소서.
오늘도 그 생명을 유지하고자 주의 말씀을 홀로 얻어먹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푸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5:14-19
제목 :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14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부터 제 32년까지 12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5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40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16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17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150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18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6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 나의 묵상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으로 세움 받은 때로부터 지금까지 12년 동안 총독으로서 일을 하였지만, 그에 대한 급여를 받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으므로 총독으로써 예루살렘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였으며, 사리사욕을 위하여 땅을 사지 않았고, 느헤미야의 부하들 역시 함께 모여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
게다가 느헤미야는 유다 사람들이나 관리들 그리고 그들에게 와서 함께 일하는 이방인들을 매일 먹였다.
그들이 매일 먹는 양식은 소 한 마리, 살진 양 6마리, 닭도 여러 마리, 그리고 열흘마다 각종 포도주를 주었다.
하지만 총독으로써 마땅히 받아도 될 급여를 요구하지 않고 그들을 섬긴 이유는 백성들이 감당하는 이 공사가 너무 고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이 백성을 위하여 섬긴 모든 일을 기억하시고 자기에게 은혜를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느헤미야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양식과 포도주 그리고 은 40세겔을 백성들에게서 빼앗고, 또한 그들의 부하들 역시 백성을 못살게 굴면서 압제하였다.
느헤미야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구약의 인물이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며, 또한 양들이 자신을 내어 맡기고 의탁하는 목자이시다.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그래서 예수님은 실제로 양들인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다.
그 분은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기꺼이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셨으며 심지어 무덤에 장사되셨다.
게다가 그의 영혼은 지옥에까지 들어가셨다.
하지만 주님의 영혼이 지옥에 들어간 것은 승리의 선포를 위함이다.
(벧전 3:19) 그(예수 그리스도)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중요한 것은 그 십자가는 내가 져야할 십자가요, 그 무덤은 내가 들어가야 할 무덤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날 대신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장사 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셨다.
(요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나 지금이나 ‘자칭 예수’라고 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세우고 살리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와 같은 자들이다.
자기들에게 있는 것만으로도 풍족한데, 자기의 것을 쓰는 것이 아까워서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도 팍팍한 백성들의 양식과 포도주를 빼앗고, 은 40세겔을 착취하는 것이다.
당시 1세겔이 노동자 4일 품삯에 해당하므로 40세겔은 160일의 품삯에 해당한다.
사실 각 사람에게 이런 엄청난 돈을 가져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은 40세겔을 착취하였다는 것은 아마도 매일 백성들이 40세겔을 모아서 총독 한 사람에게 바쳤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어찌됐든 느헤미야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이런 금전만 아니라 곡식과 물품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에게서 세금으로 받는 등 착취를 일삼았던 것이다.
총독뿐 아니라 그의 신복인 부하들까지 이런 압제를 서슴지 않았으니 관리들은 날이 갈수록 살이 찌고,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그 삶이 팍팍하고 피폐해져만 갔다.
BC 537년에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1차 귀환한 이후로 느헤미야까지 거의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예루살렘 성벽 하나 세우지 못하고 백성들의 삶은 환난과 능욕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이민족의 침입이나 공격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총독이나 그의 신복들로부터 행해지는 착취 행위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것이 만연하였기 때문에 5장 전반부에서 귀족이나 민장들이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백성들의 피를 말리고 심지어 먹고 살기 위하여 그들의 자식들까지 종으로 팔아야 하는 끔찍한 일이 자행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 이런 악한 관행들은 다 쓰레기 정리하듯이 정리가 되었다.
게다가 느헤미야는 무거운 부역을 담당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섬김의 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15b)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를 말한다.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는 또한 백성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자요 그들을 섬기는 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양의 문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들어가며 나오며 양식을 얻는다”라고 하셨다.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러나 삯군은 그렇지 않다.
양들에게 꼴을 나누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양들을 잡아먹는 자가 바로 삯군이다.
(요 10;12) 삯군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느헤미야 이전에 있던 총독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돈과 양식 그리고 물품들을 착취하는 삯군들이었던 것이다.
이들 밑에서 매일 살아가야 하는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고 힘들었을 것인가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 온다.
이처럼 나의 가슴이 답답하며 저며 오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내가 바로 그런 삯군이었기 때문이다.
삯군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
그저 양을 치고 그에 대한 품삯만 받으면 된다.
그런데 품삯만 받는 것이 아니라 양을 치다가 배가 고프거나 돈이 필요하면, 자기가 치던 양을 잡아먹거나 또는 그 양을 팔아서 자기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그런 자는 목자, 선한 목자가 아니라 삯군, 그것도 아주 악한 삯군인 것이다.
그러나 목자, 그것도 선한 목자는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인의 뜻에 따라 양을 치는 자이다.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주인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잘 파악하고 헤아려서 그 뜻대로 행한다.
나는 자칭 목자라고 하는 목사이다.
이처럼 나는 양을 치는 목사이면서도 양도 모르고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도 모르는 무식쟁이 목사였다.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 양을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이끌어갈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니 그 양들을 푸른 초장과 맑은 시내로 인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풀도 물도 없는 황량한 사막으로 끌고 가서 양들이 빼빼 마르도록 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가 목자인 자신도 먹을 것이 없으니까 결국 애매한 양을 잡아서 먹어치운다.
내가 바로 그런 자였다.
이 땅에서 목양을 하면서도 주인의 뜻을 모르니 만물 위, 창세전의 세계는 고사하고 땅의 것, 만물 안에 있는 존재물에 천착하여 그것들을 풍성하게 주려고 몸부림치곤 하였다.
그렇다고 그것이라도 풍성히 주었으면 모르겠거니와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주지 못하는 악한 삯군이었다.
그러다가 나도 배가 고프면 내가 키운 양이나 잡아먹는 그런 자였던 것이다.
내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왔고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에서 목회를 그만두려고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 친구의 권유로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 복음은 내게 생수가 되었다.
목사가 생수를 마시고 살아나니까, 양들도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땅의 것에만 천착하여 그것이 전부인줄만 알았던 목사인 나나, 양들인 성도들도 이제는 땅에서 하늘 곧 만물 안에서 만물 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만물 안에서 만물 위로 올라가는 자들이 되었다.
만물 안에 갇혀 있던 하나님을 신앙하던 자들이 이제는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들이 된 것이다.
나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은 영생이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요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게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아버지의 명령과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영생을 위하여 일하시고 영생의 삶을 사셨다.
이제 나는 주님의 종으로 그분의 명령과 뜻을 받들어 선한 목자로 살기를 소원한다.
양들에게 하나님과 아들의 뜻인 영생을 누리도록 하고자 애쓴다.
복음을 통하여 아들의 생명을 얻어 누리는 영생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리고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그런 하늘의 기쁨이다.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복음을 알기까지 삯군이요 그것도 괴악한 삯군이었음을 고백하나이다.
양을 치고 먹이라고 하셨건만, 나는 그 양을 키워서 잡아먹는 도둑이요 강도였나이다.
그러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도 없이 그런 악을 행하였습니다.
양들에게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땅의 것, 이 세상 만물 안에 있는 존재물에 천착할 뿐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을 얻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 영광인줄 알고 그것에 몸부림 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절도와 강도로 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님과 함께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내 안에 여전히 죄성이 있기에 나도 모르게 순간순간 넘어지고 자빠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아들을 힘입어 파레시아로 아버지 품으로 나아갑니다.
주님의 생수는 더 이상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샘물임을 믿습니다.
오늘도 그 생수로 하루를 살아가오니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