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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향하여->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제7장 1편 영적 주의성이 생겨남>
누구라도 할 수 있는 觀想 祈禱 入門書
의지의 행위 중에 가장 으뜸가는 행위는 노력이 아니라 동의(同意)하는 것이다.
관상 기도(觀想 祈禱) 중에 일어나는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 비결은,
그 어려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지란 유효성이라기보다는 정서성이다.
어떤 일들을 의지의 힘으로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은 거짓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적절한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기적인 습관들이 의지 속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빠져 나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적 자유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심에,
그리고 은총이 흘러 들어옴에 대해 더욱 동의(同意)하도록 의지는 활동한다.
하느님이 더 활동하시고 당신이 덜 활동할수록 기도(祈禱)는 더 잘 된다.
처음에는 거룩한 단어를 자꾸만 반복하여야 함을 의식할 것이다.
이것을 더 잘 표현하려면, 이러한 의지의 활동은 단지 거룩한 단어로 돌아 가는 것,
혹은 인식 속에 거룩한 단어를 살짝 얹어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한 단어는 의지가 섬세하게 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상징한다.
기도(祈禱) 중에 하느님의 현존에 계속 동의(同意)하기만 하면 된다.
그분이 이미 내 안에 현존하시므로 그분을 잡으려고 에쓸 필요는 없다.
거룩한 단어는 하느님의 현존에 동의(同意)하는 상징이다.
결국에 가서 의지는 그 상징이 없이도 동의(同意)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기도(祈禱)중에 의지가 하는 일은 받아들이는 일을 하는 것 뿐이다.
받아들임은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임,
이것이 관상 기도(觀想 祈禱) 중에 하는 가장 으뜸가는 일이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의 방법은 360도로 하느님께 우리를 열어 드리는 방법이다.
자신을 하느님께 승복시키는 일은 동의(同意) 중에서도 더욱 발전된 동의(同意)라 할 수 있다.
변형(變形)은 완전히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 변형(變形)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일은 할 수 있다.
이 기도(祈禱)가 습관화되면, 신비스러우며 분간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평화스런 하느님의 현존이 당신 내면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이 자신 안에 살아 계시다고 말한다.
일단 한번 형성되면 그 고요한 현존은,
항상 거기 머물러 계시며 그 현존이 바로 기도(祈禱)의 방법이 된다.
처음에는 우리는 기도(祈禱)를 할 때 기대감과
선입견을 가진 우리의 거짓 자아를 기도(祈禱) 속에 불러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기도(祈禱)를 가르치면서 노력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노력(effort)이라는 단어는,
즉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의 기준이 애써서(try) 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해 버린다.
애쓴다(try)함은 관상 기도(觀想 祈禱)의 성장에 있어서 필요한
수용성(受容性,receptivity이라는 기본적 조건을 무산시켜 버린다.
수용(受容)은 무위(無爲,inactivity)가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활동이지만 통상적 의미로 생각하는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닌 활동이다.
당신이 이것을 구태여 노력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이 노력은 다른 종류의 노력과는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이것은 '절대 신비이신 분'을 기다린다는 단순한 태도이다.
당신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믿음이 순수해지면 이것을 알려고 들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은 죽도록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인간의 어떠한 기능으로도 그분을 알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무엇을 기대하는 일이 소용없음을 알게 된다.
당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여정은 무지(無知, unknown)로 가는 여정이다.
이것은 모든 정신 구조와 심리적 안전 장치와, 심지어
지주(支柱)노릇을 하던 영적 수련도 떠나서 예수를 따르라는 부름이다.
거짓 자아 체제를 구성하는 것 모두를 뒤로 남겨 두고 떠나는 여정이다.
겸손(謙遜)이란 자신을 잊어버림이다.
자신을 잊는 것이 이 땅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은 열심히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거짓 자아를 끝나게 해 주실 수 있다.
거짓 자아(自我)는 허상(虛像)이다.
이것(거짓 자아)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
그리고 이 세상은 어떠한 것인가를 인지(認知)하는 방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그것을 완전하게 얻을 것이다."(마태 10,39)라고 하셨으며,
또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즉 거짓 자아)을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24)고 하셨다.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는 것일까?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서 가셨다.
거기서 그분은 자신의 신인적 자아(Divine-Human Self)마저 희생하셨다.
크리스찬이 그리스도와 개인적 결합을 이루는 것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길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나머지 여정을 이끌어 가실 것이다.
크리스찬의 영적 훈련은 먼저 거짓 자아를 부숴 버리려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진지한지를 하느님께 보여 드리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 같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정화(淨化)를 손수 다루시고,
깊이 뿌리 박은 우리의 거짓 자아를 불러내어 우리가 그것을 버리도록 초대하신다.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그분은 그것들을 거져가시고 당신의 덕(德)으로 우리를 채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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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2편 영적 주의성이 생겨남>
[ 하느님을 향하여->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
누구라도 할 수 있는 觀想 祈禱 入門書
인생(人生)의 어떤 발달 단계에서 인간(人間)은 위기(危機:crisis)를 경험(經驗)한다.
예를 들면 이른 사춘기(思春期)에서 청년기(靑年期) 바로 前까지를 들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 발전에서 우리가 더 높은 차원의 의식으로 넘어가려 할 때 우리는 위기를 경험한다.
위기가 시작할 때 삶의 애착 때문에 거짓 자아에 매달리게 된다.
그 때에 우리가 만일 영적 성장의 길을 저항하면
더 낮은 수준의 상태로 후퇴하게 되거나,
당분간 그 상태를 맴돌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성공하거나 실패하게 되며,또는 성장하거나 후퇴하게 될 것이다.
만일 후퇴하게 되면 거짓자아는 더 강화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힘을 주실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다행하게도 그분은 당신대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쉽게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당신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에서 그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그와 비슷하게 다루신다.
가나안 여인의 경우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감각의 어두운 밤>을 거치는 사람의 훌륭한 예(例)이다.
이 위기는 감각과 이성에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성령(聖靈)에의 순화(馴化)에로 움직여 가기 시작하게 한다.
다른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이 여인도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하려고 예수께 다가간다.
이 여인은 어떤 어려움이 있으리라고 예측하지 않았다.
이 여인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이 여인은 이번에는 얼굴을 흙에 묻은 채 몸을 땅에 엎드렸다.
그런데도 별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아무도 이 여인처럼 예수께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땅에 엎드려 비굴하게 청하는 이 여인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였다.
이 말씀의 뜻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놀랍게도 "당신의 말씀은 참으로 옳습니다.,주님.
그렇지만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를 먹지 않습니까?"(마태 15,27)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는 감동하셨다.
그분의 이 이상한 행동은 그 여인의 믿음의 수준을 높이려는 것이었다.
대화의 끝에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의 믿음은 참으로 놀랍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으리라!"
우리도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여는 하느님으로부터
질책,무응답, 혹은 분명한 거부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아무 응답이 없다고 불평을 한다.
왜 하느님께서 응답하시어야만 하는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심으로 해서 그분은 우리의 가장 큰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
즉 우리의 변형이라는 응답을 실제로는 해주시는 것이다.
그 변형이 가나안 여인에게 일어났던 것이다.
<질문 1> 어떤 때는 아무런 사고도 없다.
다만 나의 자각만 있었을 뿐이다.
이것을 떠나 보내야 하는지,
그 자각을 그냥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답변 1> 그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당신이 아무 사고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면
그것도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사고였다.
그 때에 당신이 아무런 사고가 없다는 그 인식마저도 잊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여 [순수한 의식(pure consciousness):거기에서는 자신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다]
으로 바뀌어 진다.
당신의 일상적인 심리적 기능들이 되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평화로운 기쁨의 감각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신이 자고 있지 않았다는 좋은 표시이다.
우리가 가는 곳을 아는 자, 알고 있는 자, 알려지는 자,
이 모두가 하나인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곳에서는 인식(awareness)만 남는다.
인식하는 자는 사라지고 이와 함께 의식의 대상도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신적 일치(神的 一致)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에 대한 성찰(省察)이 없다.
이 경험은 일시적이지만 이 경험이 당신을 관상 상태로 이끌어 간다.
당신이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다고 느끼는 한
당신은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니다.
어떤 사고가 있는 한 그것은 완전한 일치가 아니다.
완전한 일치의 순간에는 아무런 사고(思考)가 없다.
당신이 거기에서 빠져 나올 때까지 당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경험이 너무 희미해서 당신은 잠자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느끼는 감각과 같은
자아 성찰(自我 省察)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수준에서 일치를 이룸은 순수한 의식의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지식의 유입(流入,infusion:하느님에 의한 것:역자 주)이며
그것이 일어나는 동안 거기에는 성찰(省察) 같은 것은 없다.
우리 마음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다라는 인식을 갖고 싶어하는 무엇이 있다.
우리 자신을 떠나 보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계속해서 어떠한 사고도 떠나 보내려고 하지 않고는 떠나 보냄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성찰하면 우리는 관상에서 떠나 관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적인 일치가 겁나는 일처럼 보인다.
이러한 일치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의식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일 의식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면 떠나 보내는 과정을 억제하는 것이 된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는 떠나 보내는 수련(修練)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 는 어떤 사고든지 옆으로 제쳐놓는 것이다.
한번 하느님과 일치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당신은 세상의 모든 즐거움도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다.
영적인 소통에 대해 성찰하게 되면 신적 일치가 사라지게 된다.
'금강경(Diamond Sutra)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떠한 것에도 매달리지 않는 정신을 길러라."
거기에는 환시, 탈혼, 내적 음성, 영적 교감, 심령 선물 등이 포함된다.
이것들은 순수한 의식보다 가치가 덜한 것들이다.
영적 위로에 대해 성찰하지 않기란 매우 힘들다.
특히 당신이 그러한 것들에 대한 경험이 적을 때 그렇다.
그러나 당신이 내적침묵에 접근하고 충분한 시간 수련하면,
당신은 매달리는 방법(떠나 보냄과 반대되는)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용기를 잃거나 죄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실패는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길을 열어 준다.
당신에게는 언제든지 억만의 기회가 있음을 기억하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의 기회를 없애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다가오신다.
우리에게 미끼를 던지시고, 잡아당기시고,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시고,아니면 우리를 밀어 주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그분이 바라시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점차로 당신은 내적 침묵에 익숙해질 것이다.
관상 기도(觀想 祈禱)의 초기 단계에서
당신이 느꼈던 기쁜 평화는 점차 정상적인 경험이 된다.
인생(人生)의 어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관상 기도(觀想 祈禱)에 익숙해져서,
당신이 받은 커다란 선물까지도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당신은 습관적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침묵 속에 들어가고,
그러면 모든 것이 습관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말은 당신이 더 이상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그러한 침묵의 기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사고들이 지나가는데도 당신이 그것들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침묵의 기도 속에 들어 갔다고 확신할 수 있다.
모든 기능들이 하느님에게 맡겨졌을 때 온전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영적 여정(靈的 旅程)의 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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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3편 영적 주의성이 생겨남>
[ 하느님을 향하여->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
누구라도 할 수 있는 觀想 祈禱 入門書
< 질문 2 > 관상 기도(觀想 祈禱)와 여타의 일상 생활과는 어떠한 관계성이 있는가?
< 답변 2 > 기도 중에 이루어졌던 일치는 현실의 다른 부분 안으로 융화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 모든 삶에서 하나의 4차원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3차원적 세상은 참된 세상이 아니다.
그 이유는 가장 중요한 차원이 빠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의 매 찰나적 순간에 그 차원으로부터
모든 존재들이 생겨나고 돌아가는 그러한 차원(次元) 말이다.
이것은 무성 영화(無聲 映畵)에 음성(音聲)을 싣는 것과도 같다.
그림은 똑같지만 음성(音聲)이 가해짐으로써 좀더 생생하게 된다.
관상 기도(觀想 祈禱)가 경험하는 단계에서 하느님의 내재를
의식하는 단계로 옮겨 갈 때 관상 상태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관상(觀想) 상태에 이르면 우리는 쉬면서 동시에 행동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쉼이면서 행동인 한 원천에 뿌리 박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적 일치의 전주곡을 경험하고는 어느 기간 동안
그 경험(經驗)을 잃어버려서 다시 그곳으로 향해야 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영적 여정의 어떤 지점에서부터도 시작해 주실 수 있다.
당신이 출발점보다 앞선 지점에서 시작했다면
당신은 출발점으로 돌아가 그 갭을 메워야 한다.
어떤 사람들이 6,7세에 환시를 보았다고 해서
그들이 행운아라고 부러워하지 말라.
이러한 사람들도 어렸을 때에 가졌던,
정서 프로그램을 헐어 버리기 위해 투쟁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하느님에 의해 잠시 잠재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에게 큰 장점은
그들 자신의 삶에 무엇이 빠졌는가를 경험으로 알고 있으며,
또한 하느님 아니고는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길을 부러워하는 것은 잘못이다.
당신은 당신에게도 신적 일치를 위하여 필요한 무엇이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어떠한 기대도 방해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집착의 한 형태이며,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조종하고 싶은 욕망이기 때문이다.
감각적이거나 영적인 위안을 받고 싶은 마음을 떠나 보내라.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에게로 흘러 들어옴을 느낀다면 그것은 하나의 일치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치는 당신이 인식하는 일치일 뿐 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순수한 일치도 아니요 완전한 일치도 아니다.
영적인 위안은 너무나도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에,
인간(人間)의 본성으로 그것을 열심히 찾고 싶어한다.
한번 그 경험을 하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마치 언제나 위안을 받는 것처럼 위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전 존재로 그것을 찾으려고 애쓰며 이렇게 외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이루었었는지 그 방법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당신이 이와 같은 욕망으로 움직이고 있는 한
당신은 하느님을 조정하려 드는 것이다.
당신이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잊어버려라.
그저 거룩한 단어로 돌아오라.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적 소통은 당신이 그것을 성찰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전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당신이 그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선물의 완전한 이익을 이미 받았다.
영적 선물에 대한 기대를 떠나 보내는 것이 그 선물을 받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당신이 집착을 버리면 버릴수록 더 많이, 아니, 더 잘 받을 수 있게 된다.
아주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일들을 떠나 보낸다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 질문 3 > 왜 기도에는 위안과 쓸쓸함, 내적 고요와 잡다한 분심,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부재가 교차하면서 나타나는가?
< 답변 3 > 우리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부재와 현존이
바뀌는 것은, 우리가 몹시 사랑하는 사람과 갖는 것과는 다르다.
솔로몬의 노래(雅歌)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로 비유(比喩)한다.
교부들은 이 구절을 특히 좋아한다.
"한 팔로는 팔 베개해 주시고 한 팔로는 나를 끌어안아 주십니다."(아가 2,6).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하느님은 두 팔로 우리를 안아 주신다.
왼팔로는 우리를 낮추시며 잘못을 고쳐 주시고,
바른팔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으로 우리를 위안해 주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끌어안으시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의 두 팔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 팔은 우리의 정화를 위해 주시는 고통이며, 다른 팔은 일치의 기쁨을 주신다.
당신이 신체적 고통이나 심리적 고난이 당신을 괴롭힌다고 느낄 때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더욱 힘주어 끌어 안으신다고 생각해야 한다.
시련은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지 그분의 거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관상 기도(觀想 祈禱)에서 하느님의 부재로 인해
절망했다가도 그분과 일치하는 경험으로 보상받게 된다.
당신이 하느님을 더욱 더 그리워 할수록,
하느님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일 때 더욱 고통스럽다.
고통은 삶의 굴곡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큰 사랑을 받기 위하여 지불하는 대가의 일부이다.
하느님의 사랑이건 인간적인 사랑이건,
사랑은 당신을 상처받기 쉽게 만든다.
기쁨과 슬픔의 교차는 우리가 영적 여정을 하면서
우리를 심리적 체험에 집착하지 않도록 도와 준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그들이 끌어안는 것보다는
사랑받는다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
하느님의 사랑도 이와 같다.
우리가 어떠한 경험을 하든지 간에,
그분은 그분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를 원하신다.
사랑의 댓가, 즉 사랑을 대가로 받으려는 것은 자연적인 경향이다.
우리의 심리적인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가 하느님을 그대로 사랑할 것을
이러한 기복(起伏)을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신다.
이러한 종류의 자유는 영적인 여정을 안정시켜 준다.
그로부터, 영적 여정이 부침(浮沈)하는 사이에,
표면상으로는 고통을 받더라도,
하느님 사랑에 뿌리를 둔 가슴을 흔들리지 않게 한다.
기쁨이 괴로움이고 괴로움이 기쁨인 영적 수준이 있다.
그곳에서는 기쁨인가 괴로움인가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문제가 되는 지점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볼 때 괴로움은 기쁨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완전히 희생하는 길이다.
이것은 우리의 괴로움을 줄여 주지는 않지만 ,
이 괴로움은 일상적 괴로움과는 다른 질(質)을 가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 괴로움 속에서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는 그러한 온전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 각자에게 주시었는데,
이로써 하느님의 사랑이 무한하시고 조건 없음을 우리에게 증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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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4편 영적 주의성이 생겨남>
[ 하느님을 향하여->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
누구라도 할 수 있는 觀想 祈禱 入門書
< 질 문 4 > 일상 작업 중에 내적 매력에 이끌린다고 생각이 들 때 기도해도 좋은가?
< 답 변 4 > 물론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운전 중에는 눈을 뜨고 있을 수 있을 때에만 그러라고 권한다.
이러한 상황이 아니고 좀 여유 있는 시간이라면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런데 이것을 정도가 지나치게 할 수도 있다.
기도의 즐거웠던 부분이 우리 기도의 목표는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기도의 전주(前奏)와도 같다.
만일 당신이 어느 중개적인 감정이나 사고 없이도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으면, 거기에는 하느님과 떨어짐 같은 감각은 없다.
영적 위안은 우리의 정신 기능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여러 가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이다.
당신이 하느님을 선과 악, 옳고 그름, 상찬과 처벌 등과 같은
수준에서 다루는 것과는 아주 다른 하느님에 대한 관점을 갖게 해 준다.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가 깊어지면 당신은 필요 이상으로 기도를 오래 끌 필요가 없다.
당신이 당장 해야 할 직무가 있을 때는,
내적 침묵으로 가고 싶은 매력을 잠시 희생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급히 해야 할 일이 없다면,
시간이 있는 대로 5-10분간 내적 침묵으로 들어감도 무방하다.
관상 수도회에서는 개인의 관상 생활의 표현을 아주 존중해야 한다.
각 사람의 발전 단계에서 각각 다른 때에
어느 때는 공동생활로 더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어느 때는 고독(孤獨)으로 하느님이 더 부르신다.
공동체 생활만 있거나 고독의 생활만 주어지는 공동체에서는
관상적 소명을 완전히 드러내도록 이끌어 주는 상황이라 볼 수 없다.
수도원들이 아주 좋은 곳이라도 한계가 있다.
때때로 하느님은 그러한 제한 된 상황에서
어느 사람을 더 완전(完全)하게 하시지만,
현대는 개인적인 요구에 일반적으로 더 민감해진 때이므로,
관상자들도 필요한 요구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점과,
그것을 지원하며 동정심을 가져야 함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관상 기도자들에게 어떤 고통이
하느님께로부터 오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기도 한다.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는
예수의 성심 환시를 볼 때에
그녀는 황홀 상태에 들곤 하였다.
다른 수녀들이 성가대 자리를 뜨라는 손짓을 받고 일어날 때 그녀는 일어날 수 없었다.
그녀의 장상들은 그녀가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불순명이라고 질책하였다.
어떤 수녀들은 그녀가 마귀에 사로 잡혔다고 생각해서
자신들과 다른 수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성수를 뿌리곤 하였다.
가련한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서 악마를 쫓아내려고 하는
그 수녀들의 얼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마르가리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기도 생활은 아주 정상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감각들은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주시는
강한 은총을 붙잡아 둘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뒤에 그녀가 영적으로 더 성숙해졌을 때,
그녀는 자신의 감각 상태를 잘 유지하게 되었고,
그녀의 기도 상태는 더 이상 눈에 뜨이지 않게 되었다.
영적 위로가 감각과 신체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일은
관상 기도(觀想 祈禱)의 성장에 따라 일어나는 하나의 단계이다.
체질에 따라서 더 영향을 받는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일을 경험하지 않는다.
만일 이것이 특히 강할 때면,
몸은 근육을 움직일 수 없고 ,
시간은 모르는 사이에 흘러 간다.
향심 기도(向心 祈禱)를 하다 보면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희미하게 알게 되기도 한다.
기도의 기간이 아주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당신의 기도가 조금만 더 깊어졌더라면 시간 개념이 전혀 없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일 누가 다가와 당신을 건드리면 당신은 깜짝 놀라 깨어날 것이다.
만일 한 공동체에서 이러한 현상을 위험한 것, 악마로부터 온 것,
혹은 겸손한 수도자에게는 일어나면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이러한 공동체는 영성 생활의 발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과거 수백년 동안에 있었던
反 觀想的인 태도 때문에 이러한 태도들이 보편적이었었다.
신비주의가 잘못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극단적으로는 종교 재판까지 가게 되었고,
아빌라의 데레사나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글들을 의혹의 눈으로 보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십자가의 성 요한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신비가로 인정받고 있다.
만일 그가 종교 재판의 의혹을 샀다면 더군다나 다른 일반 수도자들이
자신들은 신학자도 아니고 영적 지도자도 아니면서 그러한 경험을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처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내적 기도의 은총과 그것을 소통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것들은 항상 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때때로 진정한 관상의 경험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표현하면 좀 보수적인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일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을 힘겹게 표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한다.
신비가의 언어는 신학적인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침실의 언어요, 사랑의 언어이며,
그대로 과대, 과장의 언어이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숭배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아내를 여신으로 모신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그가 느낀 사랑을 어찌 달리 표현하지 못하고 과장해서 말한 것 뿐이다.
만일 당신 주위의 사람들이 그러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당신이 아마 마귀에게 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o----------o----------<제7장 4편 영적 주의성이 생겨남>끝 ----------o---------o---------
곧 이어 제7장 <영적 주의성이 생겨남>5편이 연재 되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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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年4月6日(月)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하느님의 어리석은 從
'베드로 문' 옮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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