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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성경의 중심사상 - 창세기(보충편) 1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성경의 중심사상 P.31 [ 1. 창세기 1장 ]
⊙ 성서의 중심사상을 하나로 잡는다는 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만큼 다양한 경험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 성경은 통일성이 있는데,
그래서 그 다양한 경험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작업을 해야 되는데,
이렇게 안 하게 되면
각자 사람의 구미에 맞추어서 설교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 본문, 저 사람은 저 본문', 라는 식으로 말이다.
기도회를 할 때, 군대에 갈 때, 시험 칠 때에,
그 설교하는 본문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만약에 이렇게 되어 버린다면,
성경을 모독해도 보통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 전체를 부정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어떤 종교적 행태나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인간의 삶을 긍정하는 성경구절은 없다 !!
* 십자가
- 그래서 이렇게 인간의 삶을 부정하는 것을
성경의 중심으로 잡아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이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15층에서 1층으로 내던져버린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 앞에서
어떤 인간도 의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내던져진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우리들의 잘남을 나타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 성경의 중심은 십자가 사건이다 !!
* 그래서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만나게 되고,
이 약속에 들어간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 약속 하나만을 믿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금식이나 전도를 하고,
구제를 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들이 이렇게 나왔으면
끝까지 약속을 밀고 나가야 하는데,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멸망당한 이유가
이 약속을 포기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동체 운동이나
전도와 선교와 헌금을 안 해서가 아니고 말이다.
* 그런데 문제는
이 약속이 인간의 능력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인간은 자기 한계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만이 지킬 수가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 나라는 약속의 나라인데,
하나님만이 이룰 수가 있는 나라가
약속의 나라이다 !!
*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킬 수가 없는 약속을 던져주신 것은,
이것은 바로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구원을 받는 인간들이 생긴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시켜주셨기에,
그런 사람들이 모인 나라는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 흔히 성경의 중심을 '신앙'으로 보는데,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 신앙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신앙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다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믿으면서도 믿음이라고 우기는 것이 인간이기에 말이다.
* 이것이 창세기 1장부터 나오는데,
무엇을 믿어야 하는고 하니,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은 제일 마지막에 창조를 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에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에덴동산의 특징 -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인간이 만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 이렇게 순수하게 인간이 아무런 것도 한 것이 없는 상태가
바로 '에덴동산'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다 따먹으라는 것이다.
최고의 극락을(?) 주셨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냥 따먹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냥 말이다.
- 그냥 따서 먹어라 !!
* 인간이 로봇이 아니라 나름대로 움직였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긍정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밭을 경작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서 무엇을 했다고 의미를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무슨 일을 해도,
공로가 인간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이다.
* 여기서 시편 65편을 한번 보자.
(시 65:9)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시 65:10)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주시나이다
(시 65:11) 주의 은택으로 연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시 65:12)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시 65:13)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 물을 대시고, 곡식을 주시고, 단비로 부드럽게 하고,
싹을 나게 하는 것을 누가 하셨다고 하는가?
인간이 땀을 흘려서 물을 대고, 농사를 지었지만,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겸손한 표현이 아니고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손발을 묶어놓고 시작을 한다는 것이다.
손과 발의 역할은 인간이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신학은 하나밖에 없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일종의 '무속신앙' 이라는 것이다.
◈ 한국교회 신학 - 지성이면 감천이다 !!
* 그러니 백날 예수님과 성령님을 동원해도,
그러나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속에는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면 일을 못하신다' 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
* '사람이 살다보면, 햇볕이 들 날이 있고 구름이 낄 날이 있으니,
용기를 가져라' 라는 말이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구속사를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구속사에서는 지금이 종말이기에,
햇볕이 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항상 구름 낀 날이라는 것이다.
* 사실은 구름 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어둠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말에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잘 참고 견딘다고 해서
해결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종말의 특징 - 항상 구름 낀 날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
* 총신원보에 보니까,
서울 창신교회 신세훈이라는 목사가 말하기를,
'목회란 참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자기자신부터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참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회개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십니다 !!
* 이렇게 인간들이 참고 또 참아서 만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교회가 아니라 종교단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람을 이렇게 비판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교회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 목회는 참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분을 증거해야 한다 !!
* 목회란, 참는 것이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고,
여자를 멀리하고,
돈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조심해서 지옥 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나 목회는 참는 것이 아니고, 증거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말이다.
* 이런 사고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하면 기존 교회를 보다 잘 부흥시켜 볼까?'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부흥되고 아름다운 교회를 통해서,
자기가 한번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인간의 교만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1장부터
인간이 제일 마지막에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만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 여기서 역대상 29장을 한번 살펴보자.
(대상 29:11)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대상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대상 29: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 마지막에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돌려드린다는 것이다.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시편 50편을 한번 보자.
(시 50:8)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시 50: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시 50: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시 50:11)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시 50: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시 50: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시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자신의 것이기에,
내가 너희들에게서 재물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무엇을 갖다준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창세기 1장의 원칙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 솔로몬이 성전을 만드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무엇을 하려고 만드느냐?' 라는 것이다.
일단 내가 그 성전에 머물러주겠지만,
그러나 말씀을 어기면 성전을 부수어 버리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제 아무리 아름다운 집을 지어도
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서 집을 지어주겠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런 창조가 깨어졌다면,
인간 스스로가 회복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
창조가 말씀으로 되었다면,
그 회복도 인간의 손을 떠나 있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도 세상을 하나님의 만족하시는 상태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 안식일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 완성되어야 안식일인 것이다.
집도 짓기 전에 축하주를 돌리면 되겠는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려서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했다는 것은,
'너희들이 아무리 안식일을 지키려고 해봐라, 되는가?' 라는 것이다.
안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만족한 상태가 되었을 때,
감리가 충실하고,
모든 것이 다 제대로 되었을 때,
건물 사용허가를 내어줄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는 교회나 건축이나 부실하기는 어찌나 그리 똑 같은지 말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런 모든 것이 제대로 되고,
아름답고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안식일을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
주일날에 공부를 안 하고 TV도 안 보는 것이,
과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인가?
◈ 안식일을 지켜라 !
- 장차 다가올 미래의 나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그 나라를 바라보라 !!
* 십계명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장차 다가올 미래의 나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그 나라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다시 말해서, 창조가 깨어졌을 때,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를 회복해서
영원한 안식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가 깨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왜 이렇게 세상이 무질서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다.
즉, 말씀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대로, 말씀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창조가 회복될 것이 아닌가?
* 이렇게 말씀을 제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
죄가 사라지게 되고 의(義)가 나타나는데,
이런 의(義)를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나라가 의의 나라이며,
이 의의 나라가 바로 하나님께서 원했던 바로 그 창조의 세계라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이다.
* 여기에서 의(義)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적극적으로 바르게 산다는 의미도 있고,
다른 하나는 죄악을 철저하게 영원한 형벌에 처넣는 것인데,
이것도 공정한 심판의 의미에서는 의(義)라는 것이다.
* 그래서 요한 계시록 20장에 보면,
생명책에 기록이 된 사람은
온전한 의(義)의 나라에 가고,
그리고 사탄과 적 그리스도와 거기에 뒤따르는 수많은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행위자들은
유황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또 다시 의를 받는다는 것이다.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하고, 회복하는 그 과정 속에 이스라엘이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시범조교로서 말이다.
인간은 이렇게 악하다고 하는 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도록 충만하다는 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이 두 가지 면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악(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다는 것이다.
그 악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 ① 인간은 악하다 ② 하나님은 은혜롭다 !!
* 다시 한번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만든 창조물이 아니면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만족상태에 인간의 죄가 들어와서 깨어졌다는 것이다.
죄란 말씀을 어기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한 것이다.
말씀대로 시행하면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이렇게 시행을 하는데,
인간은 안 되고,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최종 만족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이고,
그것은 말씀에 기초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 3장에 지혜로 온 세상을 세운다고 하는 것이다.
(잠 3:19)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 처음에 말씀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었는데,
그러나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지고
아담의 형상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원래 말씀대로 창조된 상태,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 형상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이 등장할 차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재창조가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 형상이란? - 인간으로 보자 !!
* 그렇다면 하나님 형상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얼굴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상당히 미남자가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형상으로 보면,
그러면 천사들이 하나님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천사들이 그런 영광의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 그래서 일단(?) 하나님 형상을 인간으로 보자는 것이다.
인간 속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보지를 말고 말이다.
만약에 인간 속에 있는 그 무엇으로 보게 되면,
인간이 둘로 쪼개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을 둘로 나누어버리면
둘 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두 사람이 '한 몸' 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 성경의 중심사상 P.33 [ 2. 창세기 2장 ]
* 창세기 2장에 보면,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왜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죄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냥 여자가 선악과를 주어서 먹었다고 해도 뭐 한데,
꼭 그 앞에 '하나님께서 주신' 이라는 말을 붙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핑계를 대는 것이다.
자기를 변명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를 지은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주어진 자기의 배필을 보고 아담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당신은 완벽한 또 하나의 나요]
그는 그녀를 타인으로 간주할 수 없었다.
또 미완성된 나의 반쪽도 아니었다.
여기서 그는 은혜의 결과로 생긴 새로운 인간형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몸]이라는 개념이다.
육은 멸하여도 몸은 영원하다.
* 여자라는 말의 그 의미 자체가,
'남자에서 나온' 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완벽한 나' 라는 것이다.
미완성이라든지, 부족한 나의 모습이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여자가 해도 그것은 바로 남자가 했다는 것이다.
전혀 남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 육(肉)은 멸하여도 몸은 영원하다 !!
* 여기서 '육은 멸하여도 몸은 영원하다' 라는 어려운 말을 적어놓았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원래 창조하신 그 몸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불멸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영원한 몸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몸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형상이기에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성경의 중심사상 P.34 [ 3. 창세기 3장 ]
* 벌거벗었다 !
- 죄를 짓고 난 뒤에 제일 먼저 일어난 현상이
'부끄러움' 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부끄러움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왜 부끄러워하지 않았는가?
한 몸이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한 몸인데 부끄러운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한 몸' 사상이 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아담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핑계한다는 말은
이제 서로 남남이라는 것이다.
여자는 이제 남자와 한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가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것이다.
◈ '효(孝)' 라는 개념에 대해서
* 제 아무리 효도를 외치고 설쳐대지만,
그러나 인간에게 효도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원래 효도라는 것은 같이 일을 하는 '공동노동' 체제를 두고서 하는 말인데,
과거 우리같이 농경국가에서는 어른이 없으면 작업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어른이 있어서 일사분란하게 일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지배를 하는 쪽과 그 지배를 받는 쪽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야 질서가 유지되는데,
이것을 두고서 '효(孝)'개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효(孝)란, 과거 농경시대의 효과적인 작업을 위한 질서체제이다 !!
* 그러니 이것이 오늘과 같은 산업시대에 그대로 적용이 되는가?
나름대로 효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하는가? 사장에게 말이다.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이다. 생
명의 면류관을 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도 부모는 자기에게 효도를 안 한다고 자꾸만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모만이 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 어느 대학교수가 자기 아버지를 죽여서 사회에 무리를 일으켰는데,
그러나 대학 총장에게는 효도를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나이 많은 부모님은? 천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돈이 안 되니까 말이다.
과거에는 농사라도 지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슈퍼에서 쌀을 돈주고 사다가 밥을 해서 먹여드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돈은 누가 주는가?
자기 회사의 사장님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사장님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충성도 사실 효와 같은 개념이고 말이다.
◈ 최고의 효의 법칙은, '고려장 제도' 이다 !!
* 과거 우리나라에 최고의 효의 법칙이 있었는데,
바로 '고려장 제도' 라는 것이다.
가시는 길에 고이 뿌려드리는 것이다.
정말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힘이 없어지고 때가 되면,
자기 누울 자리에 찾아가서 알아서 그냥 눕는다는 것이다.
물론 자식에게 부탁을 하지만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자식 사랑이라는 것이다.
* 이것은 과거 우리나라에만 있는 제도가 아니고
전 세계에 다 있었다는 것이다.
농경시대에 말이다.
그때에는 농사에 전혀 도움이 안 되면 자진해서 퇴장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를 묻어놓고 자기는 미안하니까
3년 동안 금식을 하면서 양식을 줄이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양식을 줄여나간다는 것이다.
* 그리고 요즘은 어떠한가?
가끔 부모님 생각이 나면 노래방에 가서 노래나 한 곡조 부르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살아있으면 결코 이러한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 불효자는 웁니다 !!
* 그러므로 노인네들은 새벽기도시간에 나와서 다른 엉뚱한 소리를 하지 말고,
'그냥 자는 잠에 가게 하소서!' 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비행기타고 가다가 떨어져서
자식에게 보상금이나 물려주든지 말이다.
이것이 부모로서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인 것이다.
* 이렇게 해야 경제가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젊은 아이들이 돈을 벌어서
어떻게 그 많은 노인들을 먹여 살린다는 말인가?
일본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경제대국이면서도
얼마나 이 노인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는가를 말이다.
다 같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암에 결려서 병원에 한번 입원해 보라.
자식이 과연 계속해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가?
계속해서 항암 치료를 하면
한 달에 기본이 100만원이라는 것이다.
* 부모님에 대한 효행으로
대통령상을 받은 어느 고등학교의 지구과학 선생님이 있는데,
그런데 그 선생님 때문에 주위의 동료 교사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말이다.
그 선생님의 보직에 관한 업무를 도와준다고 말이다.
학교에 그런 선생님이 둘만 더 있었다가는
학교가 제대로 안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직장 일을 제대로 하면서
어떻게 부모님을 돌볼 수가 있는가?
* 인간에게 있어 진리란 무엇인가?
일단 내 배가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道可道 比常道' 가 아니고 말이다.
사람이 기도를 해도 배가 불러야 기도가 되고,
아니면 자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고 싶어도
기본적인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일단 배가 불러야 시작된다 !!
* 그러니 인간이 아무리 효도를 외치고,
사랑과 봉사를 외쳐도,
자기가 우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선 전제되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 만약에 전쟁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군인들이야 직업상 총 들고 나가겠지만,
그러나 국민들은 외국으로 도망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쳤다고 전쟁터에 남아 있다가 개죽음을 당하겠는가?
설령 무공훈장 하나 받아보았자,
그것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삶아먹을 수도 없고 말이다.
* 그러니까, 인간은 이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는
완전히 독자적으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싶어도
사실 효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라는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이 없기에 말이다.
죽을 때까지 욕망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 자식이 없는 부모의 희망사항이 무엇인가?
한 달에 한번이라도 전화만이라도 왔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일주일에 한번, 매일 전화를 하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직접 찾아오고 말이다.
그 다음에는 같이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실버타운인가?
이렇게 인간의 욕심은 끝도, 한도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진정한 효도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그리고 지금 고생하는 것은 죄 값으로 너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회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이 사랑만을 모든 것을 다 덮고 남음이 있다는 것이다.
* 이것을 오늘 한국교회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효도대학이나 열고 말이다.
성균관에서나 하는 짓이지,
교회가 그것이 무슨 꼴이냐는 것이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해야지 말이다.
성경을 모르고, 언약을 모르니
어떻게 이것을 알겠는가?
* 이렇게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의 특징은 무엇인가?
바로 '수치심'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어떤 식으로 이 인간을 구원하는가?
이 수치를 가려주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수치를 어떤 식으로 가리워주는가?
(수 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 여호수아 5장에서, 수치를 굴러가게 했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굴러가게 했는가?
수치가 무슨 돌맹이인가? 굴러가게 말이다.
이 수치를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
할례를 행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창세기 3장에서는,
그 수치를 어떻게 가렸는가?
하나님께서 가죽옷으로 치마를 만들어서
가리워 주었다는 것이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 그런데 만약에 이런 방법이 지금도 유효하다면?
아마 짐승들의 가죽이 남아있지를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안 믿고 그렇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얼마나 쉬운가?
개 한 마리 잡아서
가죽으로는 치마를 만들어 입고,
고기는 먹고 말이다.
◈ 계시는,
가면 갈수록 확대가 되고 세밀화 된다 !!
*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히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면 갈수록 계시가 확대가 되고 세밀화 된다는 것이다.
* 처음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런데 두 번째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인 노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노아는 에녹처럼 죽지를 않고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명을 부여해준다는 것이다.
* 처음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
노아에게 와서는 어떻게 세밀화 되는고 하니까,
방주를 만드는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둘 다 똑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모세에게 와서는 어떻게 되는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저주에서 건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은,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늘 나라로 올라가는 것과 동일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지금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하는가?
역시 어린양의 피를 바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이제는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짐승의 피를 지성소의 법궤를 넣어두는 증거궤의 뚜껑 위에다 뿌려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시은좌' 혹은 '속죄소' 라고 하는 것이다.
상자가 아니고 그 뚜껑을 말이다.
* 이것도 역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과 동일한 사건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과 동행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상자를 만들어 그 위에 피를 뿌리는가?
역시 아니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은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동일한 차원이라는 것이다.
* 다시 한번 정리하면,
처음의 수치는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가죽 치마로 수치를 가렸는데,
그 다음에는 할례를 행해서 수치를 물러가게 했고,
그 다음인 노아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하체를 드러냈을 때,
가나안과 함은 '얼렐리 꼴렐리' 라고 놀리다가 그만 저주를 당했고,
그러나 셈과 야벳은 수치를 덮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골로새서 3장을 한번 보자.
성경을 이렇게 갈수록 확대를 해서 보아야지
문자적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 여기서 할례를 무엇이라고 했는가?
육적 몸을 벗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몸 껍데기를 벗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동대문 시장에서 '골라, 골라' 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성경을 너무 엉터리로 보니까,
이런 우스개 소리를 하지만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이것이 바로 진짜 할례라는 것이다.
◈ 진짜 할례 -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
*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참는 것이 목회인가?
돈과 여자를 조심하는 것이 목회인가?
회개하는 것이 참 목회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니까,
'나는 그냥 죽자. 쓸모 없는 인간이다' 라는 고백이
날마다 터져 나와야 하는 것이다.
◈ 목회자의 각오 - 그냥 죽자. 나는 쓸모 없는 인간이다 !!
* 이렇게 자꾸만 계시가 확대되는데,
땅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처음에 성경에서 말하는 약속의 땅은 가나안 땅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신약에서 땅은 구약에서 말하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골로새서 3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이렇게 바뀐다는 것이다.
부동산 투기를 해놓고 약속의 땅이니, 하나님의 축복이니 하는데,
누가 이런 생각을 했는가?
* 유명한 콜럼버스라는 것이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서 남의 땅에 들어가서,
'이것은 약속의 땅이다!' 라고 외치면서, 마구 박살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치 돈키호테처럼 말이다.
청교도들은 골로새서도 안 보았는가?
아메리카가 무슨 약속의 땅인가?
그러면 '아메리카나'는 무엇인가?
* 그래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하면서,
탐심은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구약 때의 우상은 어디에 심기어져 있었는가?
가나안 땅이라는 것이다.
이방 종교인들이 가나안 땅에 심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땅에 심는 것은 모조리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이것이 '탐심' 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야고보서 4장에 보면,
어디 가서 장사했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돈을 좀 벌었다고 그런 것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인생은 바로 사라지는 안개라는 것이다.
설치더라도 이렇게 뭔가 좀 알고 설치라는 것이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안개를 두고서, '축축하다, 뿌옇다' 라고 하면서
무슨 의미를 두려고 하는데,
그러나 안개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이다.
도무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 땅의 개념도 이렇게 바뀐다는 것이다.
탐심이 바로 우상숭배인데,
여기서 탐심이라는 것은
땅에다 기대를 거는 모든 마음이라는 것이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그렇다면 영생을 낳는 것은 무엇인가?
탐심이나 죄가 아닌 것을 추구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위의 것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세상과 벗된 것은 하나님과 원수라는 것이다.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 그러나 현대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도 믿어서 천국에 가고,
그리고 이 땅에서는 세상 사람들과도 한번 잘 지내보자는 것이다.
- 선진조국 만드세, 그러세 !!
*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것하고,
교인들이 생각하는 것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새벽기도시간에 도대체 무엇을 기도하는가?
시키는 데로 살면 되는데,
자꾸만 엉뚱한 것을 구한다는 것이다.
한번 더 살아보려고 말이다.
*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그 고통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먹든 날에 죽는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 죽음이라는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앞서서 살펴본 대로, 수치나 땅의 의미가 달라지듯이 말이다.
죽음이라는 의미가 확대가 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이 죽음이라는 의미가 어떻게 확대되는가?
처음에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마귀가 활동하는 영역을 두고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저주받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어두움' 이라고 하고 말이다.
빛과 어두움의 새로운 차원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 행복 - 고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서 !!
* 그러니 인간에게 괴로움이 있고 고통이 있는 것은,
인간에게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고생이 없는 것이 아니고,
고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다.
* 의사로서 외딴 섬에서 섬사람들을 돌보며
초등학교 선생님과 연애하면서 살아가는 것하고,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의사로서 살아가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행복한가?
서울에서 의사생활을 한다고 해서 힘이 들지 않는가?
섬에서 보다 과연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좋은 아파트에는 살지만,
그러나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는 사람에게 물어 보라.
좋은 집이 있다고 해서 과연 행복하겠는가?
집에서 몸부림 만부림을 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몸이 편하다고 해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행복하다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 생명나무가 없는 세계는
몽땅 죽음의 세계이다 !!
* 아담과 하와가 죄의 도구가 되기 때문에,
그들을 추방해버리는 것이다.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그냥 죽이면 되는데 왜 안 죽이는가?
죽이지 않고 생명나무에서 추방시킴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가 없는 세계는 몽땅 다 죽음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긴다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점점 더 넓혀진다는 것이다.
생명나무, 즉 영생이 없는 세계는 죽음의 세계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불독(?)이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뭐라고 하는가?
있다는 것이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분명히 차단되었는데,
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 전도하기, 봉사하기, 새벽기도하기 등으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자질만 있고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말이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가?
그러나 과연 이러한 종교적인 테크닉으로 가능한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생명나무가 너무나 없기 때문에 몸부림을 친다는 것이다.
*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어떠했는가?
그들이 왜 그런 자학하는 행동을 했는가?
생명나무에 대한 갈망이 아닌가?
그러나 과연 그들이 구할 수 있었는가?
그들의 어떤 노력과 행동으로도 생명나무는 제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종교적인 엑스타지한 상태에 들어갈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말이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한국교회가 이단인 가장 분명한 이유는 무엇인가?
촐랑거린다는 것이다.
받은 사람은 고맙고 또한 미안해서 그냥 가만히 있는데,
꼭 못 받은 사람들이 설친다는 것이다.
- 나는 없습니다. 주세요 !!
* 예를 들어서, 어제 한화하고 삼성이 붙어서 삼성이 6:1로 졌는데,
그러면 그냥 6:1이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꼭 '주여 6:1', '주여 6:1' 이라고 설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6:1이 8:6으로 바뀌는가?
* 성경의 밋밋함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세가 산위에서 십계명을 받아왔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거기 십계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밑에서 무슨 짓을 했는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이상한 짐승의 상을 만들어놓고
춤을 추면서 난리를 피웠다는 것이다.
이런 자체가 바로 무슨 행동인고 하니,
'나는 영생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라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 '생명나무가 차단되었다' 라는 이 한마디로서,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는 부정이 된다는 것이다.
가인의 제사는 받지를 않겠다는 것이다.
아벨의 제사도 안 받는데,
그러나 받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아벨의 제사가 뛰어나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아벨이 착한 인간이기에 받는 것이 아니고,
아벨이 양을 치는 목동으로서,
하나님은 이러한 아벨이 바친 양의 제물을 이용하셨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노력한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내 쪽에서 너희들에게 다가갈 때만
그러한 죽음의 세계에서도 생명이 피어난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벨의 제물을 이용하셨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가인은 화낼 필요가 없이,
'아,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믿으면 되는데,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기의 동생 때문에
자기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 들통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을 죽여버리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