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은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白),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문헌에 나타난 백두산 최초의 이름은 〈산해경 山海經〉에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백산(白山) 등으로 불렸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 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 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白)자를 취하여 이름 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 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 (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690m의 백운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백두산의 범위는 천지 중심의 마그마 활동에 따른 화산암의 분포지로 한정해보면 현재 북한 측의 면적은 8,000㎢로 전라북도의 면적(8,052㎢)과 비슷하고 개마고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중국 측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 까지 합하면 3만㎢에 이른다. 또한 해발고도 1,800m 까지는 완만한 경사(8~12°)를 나타내어 방패 모양의 순상화산이나, 1,800~2,500m까지는 급경사로 종 모양의 화산을 이룬다.
[지질과 화산활동 및 지형]
백두산은 지질 시대에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이 있었고, 역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1413년, 1597년, 1660년, 1702년, 1900년 등 5차의 화산 폭발이 있어 지금도 화산 활동 후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 전형전인 것이 온천 군이다. 백두산내 온천은 해발 1,756미터 이상 되는 곳에서 나타나는데 모두 30여 곳이 있다. 그 가운데서 천지 내에 두개의 분수구가 있고, 장백폭포 북쪽에 13개의 분수구가 있다. 최고 수온은 82도에 달하여 이 온천물에서는 달걀도 삶아진다. 일본의 온천 군에서 삶은 달걀의 판매액이 엄청난 것처럼 이곳 역시 마찬가지이다.
백두산 지역은 강수량이 비교적 많다. 그 원인은 해양과는 거리가 가까우며, 삼림지역이어서 수증기가 많고 지세가 높기 때문이다. 천지 주변의 연평균 강수량이 1,340.4mm 이며, 연 강수일수는 209일쯤 되고, 특히 우기는 7, 8월로 거의 매일 비가 내려 맑은 날은 불과 며칠 되지 않는다.
백두산은 구성암석과 지질구조에 의해서 크게 5부문의 수직구조로 파악된다. 백두산의 밑바닥은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류이며, 그 위에 제3기말의 현무암대지, 제3기말의 경사 현무암고원, 제4기의 알칼리 조면암류, 부석의 순서로 덮여 있다. 백두산의 밑바닥을 이루는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류는 평안북도에서 함경북도에 걸치는 평북육괴· 함북육괴로 백두산의 지표에서는 극히 일부분의 침식산지를 빼고는 노출되어 있지 않다. 제3기에 들어서 지표로부터 60~70㎞ 깊이의 지하에서 상부 맨틀을 구성하는 암석 가운데 방사능원소들이 붕괴되면서 열점이 만들어졌다. 이의 영향으로 당시의 지표암석인 화강편마암류에 수직방향의 쪼개진 틈(열곡구조)이 만들어졌다.
[등산 및 조사활동과 교통]
백두산에 관한 최초의 등산기록은 1764년(영조 40) 함경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이 쓴 〈백두산유산록〉이다. 그는 5월 14일 함경북도 경성을 출발하여 5월 23일 백두산 꼭대기에 오른 후, 6월 2일에 돌아와 18일간에 걸쳐서 백두산을 등산했다. 최남선은 1926년 7월 24일부터 8월 7일까지 동아일보사의 백두산 탐험대에 동행하여 백두산 정상까지 오른 후, 1927년에 기행문인〈백두산근참기〉를 발표했다. 이는 백두산의 지리·역사·민속뿐만 아니라 백두산 문화론, 민족정기의 고취, 조국애의 고창 등을 내용으로 한 웅대한 기행문학이다. 더구나 1931년에 행방불명된 백두산정계비의 자세한 내용과 그것을 세울 때의 자세한 상황을 기록하여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1936년 8월 7일부터 18일까지의 12일 동안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조사한 후, 그 탐험대원들이 펴낸 ≪아아! 천지다≫는 쉽게 씌어져서 일반인들이 백두산을 인식하기에 적절한 책이다. 겨울철의 등산기록으로는 〈백두산-교토제국대학 백두산원정대 보고〉가 있다. 1934년 12월 20일 일본 교토를 출발하여 다음해 1월 21일 교토에 돌아오는 등산보고서로, 겨울철 등산의 어려움과 당시까지의 백두산에 대한 문헌, 등산 중의 사진 등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최근의 조사보고로는 1989년 8월 2일부터 6일까지 백두산 식물을 조사한 〈백두산의 꽃〉이 있다. 중국측의 조사뿐이지만, 백두산 식물의 천연색 사진과 생물학 분야의 조사가 요약되어 있어서 생생한 자료가 된다. 북한은 백두산의 일부를 1959년에 '백두산 자연보호구'로 지정했으며, 1976년에는 이 구역을 확장했다. 중국은 1958년 천문봉(2,650m) 부근에 기상대를 설치하고, 1960년에는 2,100㎢를 '창바이 산 자연보호구'로 지정했다. 북한과 중국 측의 자연보호구는 1980년에 '국제생물권보호구'로 지정되었다.
백두산의 교통로는 북한이나 중국을 통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북한에서는 평양에서 백두산 입구인 삼지연까지 비행기·열차·자동차 편이 있다. 삼지연에서 백두역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이며, 백두역에서 향도역까지는 케이블카로 10분 걸린다. 향도역에서 장군봉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이다. 중국 쪽에서는 연변 조선족자치주 내의 얼다오바이허가 백두산 입구가 된다. 이곳까지는 옌지[延吉]나 안투[安圖]에서 열차나 자동차 편이 있다. 얼다오바이허에서 창바이 폭포 입구까지는 50㎞의 거리로 버스를 이용하며, 버스 종점에서 창바이 폭포를 지나 천지 물의 단 한곳의 유출구인 달문까지는 2㎞의 거리로 걸어서 오른다.
[한민족과 백두산]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 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읍루족·말갈족·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뼈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인식했다. 그밖에 청나라의 번영도 태산(泰山)·장백산(長白山) 지맥설(支脈說)을 통해서 풍수지리상으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백두산 관광]
한국 관광객들이 가는 코스는 보통 2가지이다. 천지 가는 길은 천문봉까지 지프차를 타고 가는 것과 도보로 장백폭포 옆 돌계단을 오르는 길이 있다. 천문봉까지 지프차를 타고 가는 코스는 장엄한 백두산맥을 볼 수 있지만 천문봉에 내려 천지를 볼 수 있는 시간이 30분정도이다. 너무 촉박해서 감상할 여유가 짧아 아쉬움이 남는다. 장백폭포로 가는 도보 길은 천지의 물에 손을 담가보고 마실 수도 있다. 시간도 자유로워 백두산 천지에서 마음껏 보낼 수 있다. 지프 1대에 4-6명이 같이 탑승해서 정상까지는 지프차로 20-30분 걸린다. 백두산 천지는 하루에 12번 날씨가 변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백두산 천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이 아주 적다. 백두산 천지를 보러 간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맑은 천지를 볼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백두산 천지]
백두산 천지의 둘레는 13.11km 이고 동서길이는 5.3km 남북길이는 4.85km 평균수심 204m 최고깊이가 373m로 알려져 있다. 물은 용천수로서 지하에서 나오며 산천어 등 다양한 어류도 서식하고 있다. 백두산은 여름이라도 기온 차가 있어 긴 팔 옷을 준비하면 좋다. 초가을 느낌이고, 갑자기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우비도 준비해야 한다. 백두산 천지에서 태극기를 내놓고 사진 찍는 것을 못하도록 한다. 사복(검은 양복)을 입은 중국 공안원의 감시가 심하다. 국경 수비대도 있지만 그들은 별로 제지하지 않는 것 같다. 참고로 백두산 천지에서는 사진 촬영은 가능하지만 비디오 촬영은 하지 못하게 한다. 걸리면 카메라 압수다. 국경선에서는 보통 비디오카메라 촬영에는 제약을 받는 것 같다. 공안원이 많지 않아 몰래 촬영할 수는 있다.
백두산정계비 <白頭山定界碑>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워진 경계비.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 와서 압록강과 토문강의 두 물이 강원(江源)에서 '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곳의 바위를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고 세웠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2.55척, 너비 1.83척이며 비면에 '대청'이라 행서하고, 그 아래에 "烏喇摠官穆克登奉旨査邊至比審視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라고 종서(縱書)하고 청의 필첩식(筆帖式), 조선의 군관· 차사관· 통관의 성명을 각서(刻書)했다.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西爲鴨綠東爲土門)를 근거로 해서 간도는 조선의 땅임을 주장. 청일전쟁 후 일본이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없어졌다.
[산행코스]
백두산 중국지역은 크게 북파와 서파로 나뉜다. 천지를 중심으로 북파는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며 서파는 완만한 고산지대를 이루고 있다. 아직 덜 알려진 서파지역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광활한 초원지대와 지천에 야생화가 흐드러져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고산지대를 비롯해 신비한 연못으로 알려진 왕지, 천지가 용암을 분출하며 만들어낸 금강대협곡, 거대한 용암이 지하로 흘러 생겨난 제자하, 높이 80m의 금강폭포, 진주온천 등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2시간정도의 가벼운 트레킹으로 멋진 풍광을 맘껏 즐길 수 있다.
중국 측은 지프차와 버스 등을 통해 단체관광객이 접근을 하던 북측 코스와는 달리 서파는 트래킹 코스로 개발하고 있다. 백두산 서쪽지역을 관리하는 중국길림성 장백산 국가급 자연보호구 서파 여유국이 이곳을 세계적인 생태관광지역으로 보호하고 있다.
중국 당국이 1995년부터 개발에 착수했으나 생태계 및 등산 전문가 등에 한해 접근을 제한적으로 허용해오다 98년부터 일반 관광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서쪽 백두산은 천문봉이 위치한 북쪽 백두산과 달리 보호구역을 설치하고 호텔 등 휴양시설이나 콘크리트 도로 등을 개설하지 않는 등 환경보전에 주력한다.
백두산 서파 탐방코스는 중국 길림성 안도현 이도백하진에서 출발해 해발 1,500m의 백두산 서쪽 산문을 거쳐 청석봉, 용문봉으로 올라가는 곳곳에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온갖 야생화가 만발해 장관을 이룬다. 고산화원으로 불리는 야생화 군락지에는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큰원추리, 금매화, 노란만병초, 하늘매발톱, 바이칼꿩의 다리, 산용담, 개불알꽃 등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고 다양한 1,800여종의 야생화가 자태를 뽐내며 백두산을 수놓는다.
백두산 서편에서 즐기는 트레킹의 묘미는 천지 봉우리에서 뻗은 완만한 초원(수목생장선 위편)의 꽃 대궐 구릉을 걸어 천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청석봉 능선까지 초원에 지천으로 피어난 들꽃을 보며 걷는 것. 누구나 오를 수 있을 만큼 경사가 완만하다. 백두산의 아름다움을 온 종일 감상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들꽃 트레킹 코스.
이밖에도 서편 청석봉에서 시작, 오른편으로 천지를 내려다보면서 북쪽으로 5개 연봉의 능선을 걷는 외륜봉 트레킹, 기묘한 용암지형으로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금강 대협곡과 고산연못 왕지, 그리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금강폭포를 찾아가는 고산화원 트레킹도 있다. 이 서쪽 고산지대에서 생태관광이 시작된 것은 98년. '걸어서 천지까지'라는 들꽃트레킹 코스가 개발됐고 이때부터 6~8월에 한정된 인원이 서파여유국의 허가 아래 생태탐사가 시작되었다. 서파지역 트레킹은 서파여유국과 한국백산기획이 생태탐사 및 여행을 위한 상품개발에 합의돼 있다.
천문봉 코스
백두산 북파는 천지와 장백폭포 가는 삼거리에서 지프차로 기상관측소까지 올라 5분이면 천문봉에 오른다. 천문봉에서 천지를 관광한다. 이 천문봉 코스는 관광코스.
달문과 장백폭포
천문봉에서 오른쪽으로 철벽봉과 용문봉사이 천지 물이 유일하게 흘러내리는 계곡입구를 달문이라 한다. 이 달문 아래 장백폭포가 있고 장백폭포 아래 장백산국제호텔과 대우호텔 등 몇 개의 숙박시설이 있다. 장백폭포에서 흐르는 물은 송하강으로 흘러간다.
장백폭포 주차장에서 내려 폭포까지 걸어가는 길에 산삼, 인삼, 기념스카프 등을 파는 보따리 장사들이 늘어서 있다. 가격을 물어보거나 어쩌다 눈길이라도 주면 사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끈질기게 달라붙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물건도 비싸고 살만한 게 없다. 아예 가격을 물어보지 않는 게 좋다. 폭포 올라가는 길에 조그만 옹달샘 같은 곳에 85도 이상의 온천수가 솟는 곳에 달걀을 담가 삶는다. 온천수에 삶은 달걀은 비싸지도 않으니 기념으로 사 먹어 볼만하다.
[연길/용정]
연길 시에서 버스를 타면 약2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연길 못지않게 우리나라 역사와 연관이 있는 용정시가 있다.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 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투띠)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은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의 많은 싸움터중의 하나이다. 용정시에서 연길로 조금 나오면 낮은 산이 있는데 그 정상에 작은 정자가 있다. 이 정자가 선구자라는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一松亭, 이쑹팅)이다. 이 일송정에서 보면 해란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이 보이는데 자신의 나라를 떠나와 외로운 싸움을 했던 이들의 깊은 서러움이 느껴지는 듯 하다. 용정에서 처음으로 조선족마을이 조성된 해는 1877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함경북도 회령의 리재민, 장인석, 박윤언 등과 평안북도의 김인상 등이 처음으로 14호를 거느리고 와집령(흔히 오랑캐령이라고 부른다)을 넘어 륙도하와 해란강 함수목(지금의 용정시 시교)에 이르러 강변의 황무지를 개간함으로 하여 첫 마을이 시작 되였다고 한다. 이것이 용정의 시초라 할 것이다. 용정은 우리 민족이 개척한 우리의 도시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지금도 70퍼센트 이상이 조선족이므로 한족이 오히려 우리말을 배우는 현상이 많다. 또한 용정은 우리 민족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라고도 한다.
용정 제일중학교 (대성 중학교)
1946년 은진, 대성, 광명 등 6개교를 통합하여 만든 대성중학이 후일 용정중학교로 개칭되었다. 약 2만 5천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로 약 70여명의 抗日열사를 배출하였다. 윤동주 시인이 광명 중학교 졸업생으로 용정중학교 교정에 詩碑와 연합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윤동주 기념관에는 윤동주 시인의 사후에 나온 시집, 사진, 학교생활을 담은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일송정
가곡 <선구자>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일송정이 있는 곳으로 일송정이란 원래 소나무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지만, 노래를 통해 비암산 기슭에 있는 일송정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용정 외곽에 있으며 소나무는 남아있지 않고 흔적만 있다.
[문화의 차이일까?]
중국인들의 화장실은 문이 없다. 옆 담장도 얼마나 낮은지 대략 1m정도 이다. 볼일을 보면서 옆 사람과 대화를 한다. 상상 해 보라! 급해서 공중 화장실에 갔는데 옹기종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일 때를... 한국 사람들은 적응이 안 되어서 처음 무척 고생한다. 그리고 또 하나 중국은 참 가짜가 많다. 먹는 생수도 가짜가 있다 하루 자고 나면 불순물이 뿌옇게 떠 있다. 또 왜 그렇게 산삼은 많은지 산삼이라며 구입을 강요하고 따라오는 잡상인들도 많고. 백두산 근처에서 온천을 할 수 있는 온천장이 많이 있다. 숙박시설은 우리의 중 하급 여관정도이다. 또한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식당도 있어 우리의 입맛에 맞아 맛있다. 한국 텔레비전(KBS)이 아주 잘 나온다.
중국인들도 한국에서 방송하는 쇼프로를 즐겨본다. 우리의 소주인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고량주는 도수가 높아 한 모금 마시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맥주도 12도 이다. 술이 독하다 보니 중국엔 기름진 음식이 많은 걸까? 맥주 맛은 우리 것과 비슷하다. 초고추장과 일회용 커피를 가져가면 좋다. 입맛 없을 땐 밥에다 초고추장 비벼 먹으면 그 맛을 따라올 것이 없다. 중국음식은 특유의 향신료 냄새(고량주 먹을 때 풍기는 냄새) 때문에 적응이 안 되는 사람이 많다.
연길지역 등 조선족 거주지엔 가면 개고기가 주요 먹거리다. 귀한 손님이 오면 대접한다고 탕으로 내놓곤 한다. 희고 묽다. 개고기를 못 먹는다면 뭐냐고 물어봐야 한다. 개탕이라고 하면 개고기를 뜻 한다" 중국에서도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은 물가가 비싸다. 우리 돈의 가치가 있다는 것은 옛날 말이다. 한 끼 식사 값은 여기랑 똑 같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작은 농촌 시장에 가면 우리 돈의 값어치를 실감한다.
<준비물 등 알아두어야 할 사항>
1. 백두산은 여름이라도 기온 차가 있어 긴 팔 옷을 준비하면 좋다.
2. 기상의 심한 변동으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오는 경우가 많으므로 필히 우의 준비.
3. 벌레나 모기 등으로 인한 전염병 예방에 도움을 줄 수 있게 긴 바지, 긴 팔 옷, 모자 등으로 가급적 노 출을 최소화 시킨다.
4. 음식이나 물에 의해 발생하는 질병으로 여행자 설사, 세균성 이질, 장티푸스, 콜레라 등 예방을 위해
날고기나 생선회, 식당에서 제공되는 샐러드, 껍질이 이미 벗겨져 있는 과일 등, 식당에서 제공되는 얼음 ․ 물 등은 피하고 /// 잘 익히고 요리된 고기, 본인 직접 껍질을 깐 과일, 끓인 물이나 뜨거운 음료(커피, 차 등) 캔이나 기타 밀폐된 용기에 들어있는 생수(중국은 믿기가 좀 어려움), 청량음료, 탄산음료, 맥주나 와인 등은 안심해도 된다.
5. 상비의약품
① 외상처치용품 : 소독약, 거즈, 붕대, 반창고, 면봉 등]
② 피부 외용 연고 : 항생제 연고, 스테로이드 연고
③ 멀미약 : 키미테, 등 패취제
④ 해열 진통제 : 타이레놀
⑤ 항 히스타민제 : 지르텍 등(가려움증, 콧물, 알레르기)
⑥ 지사제 : 로페린 등
⑦ 말라리아 예방약 : 의사 처방
⑧ 항생제 : 의사 처방(여행자 설사, 세균 감염)
⑨ 자외선 차단제 : 피부 화상 방지
⑩ 곤충 기피제 : DETT 함유, 페메트린
6. 상비금은 미화나 여행자 수표를 가지고 가면 편리하다. 우리나라 화폐도 웬만한 곳에서는 다 통용이 되므로 일부 가지고 가도 요긴하게 쓸 수 있다.
첫댓글 백두산은 언제 가실려구요 ?
7월 31일 부터 5박 6일동안 갑니다. 전광현이도 8월초에 간다고 하던데...
좋겠다, 부러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