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에서 복음적 가치 전하는 ‘활동하는 관상가’
학교 숙소에서 생활하며 늘 학생들과 만나 소통
신자유주의 맞서 인간 중심의 삶 알리려 노력
발행일 : 2015-04-05 [제2938호, 9면]
새 학기가 시작된 서강대 캠퍼스(서울 마포구 신수동) 곳곳에 인턴 채용 설명회, 각종 공모전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몇몇 학생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현수막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요즘 대학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낭만’으로 상징되던 대학 생활은 이제 취업과 미래를 준비하는 각박한 ‘현실’로 변해가고 있다. 학생들은 좋은 학점을 따내기 위해서라면 친구와의 경쟁을 불사하고, 학교는 명성을 얻고자 학생 취업률에만 열을 올린다. 성과주의, 물질만능주의로 집약되는 신자유주의가 ‘지성의 요람’인 대학에까지 뿌리내린 것이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을 통해 지적한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톨릭 지성으로 대표되는 예수회(관구장 정제천 신부)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현실이 각박하고 치열할지라도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고 미래를 꿈꾸면서 ‘신앙의 빛’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예수회가 운영하는 서강대에서 학문을 탐구하고 하느님의 진리를 추구하면서 세상을 향해 정의를 외친다. 그 현장 한가운데 서강 예수회 공동체(원장 기수현 신부)가 있다.
■ 모든 것에서 하느님 찾기
오전 9시, 수업종이 울렸다. 강의실에는 이제 갓 입학한 1학년 학생 50여 명이 자리 잡고 앉아 있다.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 김치헌 신부(예수회)의 ‘영문학 개론’을 듣는 학생들이다.
기자가 방문한 3월 16일 수업 중에 3명의 학생이 과제발표를 했다.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발표과제에 긴장한 학생들을 풀어주는 것은 김 신부의 몫이다. 그는 학생의 의견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대신 이해하고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김 신부가 강조하는 교육지침이다.
“저는 영문학 교수이면서 동시에 수도자예요. 전문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학생들이 복음적 가치를 배워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서강대에서 강의를 하는 다른 예수회원들도 마찬가지지만, 교수라는 직업은 김 신부에게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마지스, Magis)을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이다. 2014년 처음으로 강의를 맡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고민은 강단 위에서 복음적 가치를 어떻게 실현하고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였다. 그의 고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서강대는 가톨릭 신앙과 예수회의 교육 이념으로 운영되지만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는 학생보다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 선포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 신부는 “학생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 질문을 받으면서 복음을 인용해 답해줄 수 있지만 종교적인 색채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며 교수이자 사제로서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그는 예수회 영성의 핵심인 ‘모든 것에서 하느님 찾기’를 바탕으로, 종교적인 색채를 지워내고도 복음적 가치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늘 고심했다. 그 결과가 배려와 수용으로 표현된 것이다. 김 신부는 학생들의 실수에 관대했고, 자신을 희생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보여줬다. 그러면서도 신앙을 가지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학생들에게 통했다.
지난해 김 신부의 강의를 듣고 예비자교리를 시작했다는 대학원생 오수미(예비신자·28)씨는 “수업 가운데 종교 관련 내용이 나오더라도 신앙을 강요하시기보다는 학문적으로 설명해주셨기에 더 존경심이 생기고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 주님 안의 벗, 학생들의 벗 되다
예수회 한국관구 공동체 중 하나인 서강 예수회 공동체에는 김 신부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교수 신부 15명을 포함한 29명이 살고 있다. 영문학, 종교학, 철학 등을 담당하는 교수 사제들은 학교 본관 바로 옆 숙소에서 생활하면서 언제든지 학생들을 만나고 소통한다. 때문에 이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고통과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서강 예수회 공동체는 학생들이 직면한 문제를 곧 자신들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 최근 이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신자유주의와 그로 인해 힘겨운 청춘을 보내는 학생들이다. 효율성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학생들에게 인간 중심의 삶이 주는 가치와 의미를 알려주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이어오고 있다.
공동체는 무엇보다 학생들의 행복을 위해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2년 전부터는 ‘또래동반과정’을 실험적으로 도입, 학부생들이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전인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서강대가 개교 당시부터 강조해 온 ‘퍼스널 케어’(personal care)에 학생들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봉사 프로그램도 마련해 학생들의 인성과 영성적인 측면을 강화하는 동시에 경력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
13년 동안 서강대 교수로 재직한 김용해 신부(교목처장)는 “시대적인 어려움은 늘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서강 예수회 공동체는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고 신앙적 이상을 현실에 구체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 활동하는 관상가
예수회는 교육사도직, 매체소통 사도직, 영성사도직, 사회사도직, 청년·청소년사도직, 해외선교 등 다양한 사도직에 매진하고 있다. 공동생활을 하지만 서강 예수회 공동체처럼 사도직에 따라 작은 공동체로 생활하고 있다. 예수회는 설립 당시부터 파격적으로 성무일도를 바치지 않았다. 대신 ‘사도직’의 특징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에 무게를 둔다.
각 공동체는 한 달에 한 번씩 ‘공동체 날’을 진행한다. 공동체 날만큼은 모두가 함께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삶을 공유한다. 외부에서 강사를 초빙해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과의 소통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서강 예수회 공동체는 얼마 전 프랑스 삐에르끼비르 수도원에서 수행하고 「그래, 종파와 상관없이 나는 수도원 체질이야!」를 집필한 향적 스님을 초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예수회는 또 ‘사도직’이라는 울타리에 갇히지 않으려고 세상 속으로 한 발 더 다가간다. 도시 빈민 공부방에 가서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고 양로원에 가서 어르신들을 돌본다. 예수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다.
수도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보는 봉헌 생활의 해, 예수회는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관상가로서, 진리탐구자로서의 역할에 더욱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사회와 청춘들의 행복하고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이 글의 전문은 <가톨릭신문>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266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