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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장정
분단장을 끝낸 기화는 서의돈 머리맡에 살포시 앉았다. 배를 깔고 누워서 담배를 피우던 서의돈이 "기화야." "예." "기어 전주로 내려가려느냐?" "예." "기어?" "..." "보고 싶어 어떡허지?" "설마., 그럴라구요."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겠어?" ".." "보고 싶지 않느냐 말이야." "그건 가보아야 알지 않겠사옵니까?" "으음... 거짓을 아니 해서 좋았다." 서의돈은 담배를 눌러끄고 재떨이를 밀어내며 바로 눕는다. 한동안 서로 침묵이다. 분위기는 차츰, 차츰 팽팽해져서 하마 터질 듯. 두려운 생각은 없으나 기화는 답답증을 느낀다. "날샌 지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서방님." "..." "댁에 가보셔야지요." 노려본다. 서의돈 눈에 증오심이 이글거린다. "잔말 말구 가만히 거기 앉아 있어!" "예." 서울엔 아직 늦더위가 남아 있었다. 밤은 서늘하여 솜이불이 살갗에 싫지 아니했고 훤해진 수풀엔 아침저녁 선들바람이 불었으나, 남색 수단치마와 옥색 반회장의 생고사 저고리를 입은 기화는 참을성 있게 앉아 있다. 햇살은 마루끝에 왔는가 장지문이 눈에 부시게 밝다. "기생의 법도를 알어? 아느냐구!" 별안간 서의돈이 소리를 지른다. "잘못했습니다." "뭘 잘못했다는 게야?" "..." "어떤 경우에도 사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기생이다! 그게 너의 천진이란 말이야!" 순간 서의돈의 얼굴이 파아래졌다. 벌떡 일어나 앉는다. 기화는 고개를 수구린다. "기분대로 살 양이면 왜 기생이 됐냐? 왜! 왜 기생이 되었느냐구. 나쁜 계집 같으니라구," 기화는 서의돈이 어째 화를 내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돈에 팔렸음 돈값을 해야 하는 거구 정에 팔렸음 정의 값을 해야 하는게야! 얼굴만 반반하면 제일이야? 가무에 능하면 그게 기생인 줄 알았더냐? 당돌한 계집년!" 서의돈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욕설은 차츰 고조되어 나중에는 그야말로 지랄발광이다. 기화가 초여름 간도에서 돌아온 후 상현과의 관계는 최서의화의 주종 관계에서 빚어진 인연이라는 것을 알 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서의돈은 그렇게 못 잊어 생각이 나면 일본까지 상현을 쫓아갈 일이지 왜 안 가느냐는 둥 전주로 내려간다는 것도 소리 공부가 목적이 아닐 것이며 그 팔도 오입장이 운삼이놈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때문이 아니냐는 둥 생트집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보고 싶지 않겠느냐고 묻는 말의 대답을 가지고 따지려 하지는 않는다. 분명 화근은 그것이었는데 억설을 했음 했지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 때문이겠다. 기화는 말없이 겪는다. 순종한다기보다 서의돈의 성미를 알기 때문이다. 그 성미가 두려워서 그런것도 아니다. 언젠가 추산이 들려준 말은 "말도 말어. 순 개고기야. 술은 말술이 여기 쑤시고 저기 쑤셔대고 장사는 끝장날 것이다.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히는구나. 그래 어딜 보구 반했냐? 응?" "누가 그분한테 반해서 그랬나요, 뭐?" "허허어 이 말 좀 듣게? 안 반했으면 만석지기 땅문서 갖다바치더냐?" "그분, 볼품없지만 사내다운 데가 있어요." "뭇 잡놈들 거느리고 다닌다구? 아니면 길바닥이든 남의 집 처마밑이든 술 처먹고 나자빠져 잔다구?" "어머니도 참, 기생 팔자... 의지할 곳이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랬다 그 말이냐?" "저도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 "하기야... 결국은 재수가 없었던 게야. 그 망나니가 너한테 눈독을 들인 것부터가. 황부자네 아들이야 가슴이 쓰리고 아리더라도 친구지간에..." 황태수에게 화살을 꽂았던만큼 추산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추산은 꾸욱 참을 수밖에. 그런 북새통에 일본글을 함께 배운 이상현 이홍종 두 사람은 팔월 말께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서의돈은 기화를 못 잊어 그랬던지 그 자신이 말했듯이 공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람하기 위한 것이어서 시기를 늦추었는지 모를 일이나 그들과 동행하지 않았다. 한편 옛날의 정인 소화의 부탁을 받고 기화를 추산에게 천거한 운삼은 명창 하나 만들어보겠다는 기왕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여자관계로 경력이 화려했던 운삼도 이제는 오십줄, 타다 남은 불씨처럼 기화에 대한 상심 같은 것 없지 않았으나, 그런 정감은 기화의 소질을 길러주자는 집념으로 변해갔다. 서의돈과의 관계에 대해서 일말의 질투도 있었으나 서의돈의 광기에 먹혀 기화가 자라지 못하게 될 것을 더 두려워했다. 해서 서둘렀던 것이다. 당대의 명창이었고 이젠 늙어서 전주에 은거하고 있는 권봉득에게 기화를 맡길 것을. 그 일에 대해선 추산도 찬성이었다. 어차피 서의돈이 기화 뒤에 버티고 있는 이상 골칫거리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주행은 기화, 추산, 운삼, 이 세 사람 사이에서 합의를 보았다. 한동안 분탕을 치던 서의돈은 제풀에 지치고 만 것 같았다. "술상차려와!" "예." 급히 술상은 방안으로 들여졌다. "뭘 하고 있는 게야? 술상 왔으면 술잔에 술을 쳐야 할 거 아냐?" "예." "예 귀신이 붙었나? 예말곤 할말 없어?" 서의돈의 음성은 누그러져 있었다. 술을 들이켜고 술잔을 상 위에 놓으며 서의돈은 한탄하듯 말했다. "팔자야, 팔자." "...?" 안주를 어적어적 씹으면서 "내가 평생 널 데리고 살겠냐? 너도 마찬가지, 날 따라 평생을 살겠냐? 어차피 우린 스쳐가는 인연인데 사내새끼, 나도 딱한 놈이긴 하지. 안그러냐?" "이젠 제발 역정 그만 내셔요." "말인즉슨 장안 갑부 황부자 아들도 아니겠고 옥골선풍 이상현도 아니겠고, 일본 유학하고 돌아온 하이카라 임명빈도 아니겠고, 아닌터수에 네가 나르 받아주었다는 것만도 고마운 얘기 아니겠느냐? 그렇지?" 울퉁불퉁한 얼굴에 스스로 비웃는 웃음이 지나간다.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셔요? 아니어요 서방님." "뭐가 아니라?" "전 서방님을 좋아하거든요." "뭣이라구? 아깐 거짓말을 아니하더니 내가 또 야단치까봐서 그러느냐?" "서방님께서 제게 한살림을 차려주시어서 허신하였습니까?" "그건 아니지." "그렇담 서방님께서 저를 겁탈하시었습니까?" "그, 그것도 아니지." "비록 노류장화일지라도... 재물도 강제도 아닌 바엔 정 없이 몸을 맡겼겠사옵니까?" "그, 그런가?" 별안간 서의돈의 눈빛이 환해졌다. 순간 기화는 울퉁불퉁한 서의돈이 예쁘다고 생각한다. 망나니가 수줍음을 탄 것이다. 어린 소년같이. 그는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치하게 한숨을 토하고 슬픈 눈이 되고 그런가 하면 득의에 차서 빙글빙글 웃기도 했다. 잔소리는 일체 없었다. 그리고 종내 전주에는 아니 가겠다는 말을 기화는 하지 않았고 서의돈 역시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가겠네." "술이 남았습니다." "아니야. 추산의 박대가 좀 하겠냐? 미안하네." "그렇진 않습니다. 그보다 소세도 아니 하시구 가시려구요?" "세수하면 못난 얼굴에 광이 나겠느냐? 괘념 말어." 두루마기를 기화가 입히고 옷고름을 여며주는데 갑자기 서의돈은 기화의 두 손을 꽉 잡는다. "기화!" "..." "내가 왜 이러는지 참말 모르겠다.!" "서방님!" 울음을 터뜨린다. 무슨 까닭의 울음인지 기화 자신 알지 못하고서 눈물을 쏟는다. 문간에서 만리성이라도 쌓으로 가는 사람처럼 침통한 이별을 했는데 저만큼 길모퉁이를 돌려다 말고 서의돈은 대문간으로 되돌아 왔다. "참, 혜관이란 중 산으로 돌아갔나?" "예. 어제 떠났습니다." "그럼 그 노인은?" "여숙에 묵고 계시지요." "그래... 그러면은 오늘밤, 늦게 한번 들르지." 방으로 돌아온 기화는 두뺨을 싸안고 쪼고린 채 방바닥을 내려다본다. '왜 울었을까... 생남을 하셧다구? 애기씨가 생남을... 애기씰 닮았을까 길상일 닮았을까...' "아씨." 행랑어멈이 문밖에 와서 불렀다. '애기씰 닮았을까 길상일 닮았을까...' "아씨, 술상 내갈깝쇼?" "응 그, 그래줘요." 방문을 열고 들어온 행랑어멈은 "혼났었죠?" "흐음." 눈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기화는 픽 웃는다. "서참봉네 서방님도 너무하시지. 달덩이 같은 우리 아씰 왜 울리씰까." 이불을 개키면서 어멈은 기화의 울어서 부은 눈을 힐끗 살펴본다. "어이구 딱도 하시지. 쇤네야 뭘 알겠습니까만 기화아씨도 허다하게 많은 양반 다 두시고," "말 말아요 어멈." "예, 예, 쇤네야 뭐," 이불을 개켜놓고 술상을 내간 어멈은 걸레를 들고 다시 들어왔다. 방도 닦아야겠지만 할 얘기도 있는 것 같다. 어멈은 걸레질을 하면서 "아까 운삼어른이 두 번이나 다녀갔었죠." "그 어른이 왜요?" "글쎄... 서참봉네 서방님이 계시다 했더니 그냥 돌아가셨다가 조금 전에 다시 오셨습죠." "무슨 일일까?" "아마 함춘관 마님이 가보시라 했나부지요." "또 어머니 심화 끓이셨겠군." "왜 아니겠소? 황부자네 서방님 생각을 하시면은, 쇤네도 억울한 뎁쇼. 아씨 생각을 해서 말입니다." "그런 말 하지 말래두," "예,예, 쇤네야 뭘 압니까마는 굴러온 복을," "그만두래두, 사람의 인연을 누가 장담하겠수?" "그야 그렇습지요.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도시 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어멈은 방문을 열고 문지방을 닦는다. "함춘관 마님만 해도, 지금은 비 오신 뒤 땅처럼 단단해졌죠만 젊은 시절엔 운삼어른 땜에 속 무던히도 썩이셨소. 그땐 물불 안 가리는 외곬로만 흐르는 성미였으니까... 세월이란 일장춘몽이라든가 이제는 모두 오십줄 사십줄을 나서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 싶게 무관한 벗님같이 지내시니, 하기는 화류계의 인연이란 노상 그런 거지만요." 일어서서 문기둥을 닦는다. "어멈은 어찌 그리 옛일을 잘 알아요?" "예?" 기둥을 닦다 말고 돌아본다. "아 예, 쇤네야 뭐 소싯적부터 이 바닥에서 살아왔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일 아니겠소? 별의별 일이 많았습죠. 함춘관 마님께서도 죽는다구 소나무에 목을 매지 않았겠소? 그때 새파래졌던 운삼어른의 얼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요." 효자동 집으로 돌아온 서의돈은 한숨 늘어지게 잠을 잔 뒤 하인을 불렀다. "너 임역관댁에 가보고 오너라." "예." "임역관께서 계시는지 그리고 임선생도 계시는지 여쭈어보아라." "예." 하인은 이내 돌아왔다. "계시더냐?" "예, 계신다 하더구만입쇼." "알았다. 세숫물 떠오고 안에 가서 은년이더러 내 갈아입을 옷 내오라고 일러." "예."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서의돈은 임역관 대문 앞에서 큰기침을 했다. "일오너라아!" 하인이 달려왔다. "서방님 계시냐?"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큰기침을 하고 작은사랑 쪽을 들어간다. "임공 계신가?" "어이구, 또 무슨 꿍꿍이속인고." 고수머리에 큰 두상, 임명빈이 싱긋이 웃으며 내다본다. "허허허. 보리죽 마시던 창자에 쌀밥 들어가면 설사를 한다던가? 공대받다가 설사나면 어쩌누. 그래 명빈아, 그새 밥 잘 먹고 잠잘 잤느냐?" "스승을 보고서 저눔의 버르장머리,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지? 지척이 천리라더니, 그새 말 늘었군." 방에 들어가 앉은 서의돈은 구러련을 붙여문다. "기화아씨께서도 기체 마강하옵시고?" "지랄하네." "지랄이야 자네 특허 아니던가?" "그새 말 늘었다니까," "요즘 소문 듣자니 침소는 하늘천정 아래가 아니라더구먼. 한 여인의 힘이 실로 위대한 거라구." "이거 참말 말 늘었네? 그새 이인직일 따라다녔나?" 이인직이 얘기를 왜 하느냐는 의돈의 저의를 아는 명빈은 한마디쯤 실토를 해야겠다 생각했던지, "아닌게아니라 나도 이야기꾼 한번 되어볼까 싶어서... 목하 심사숙고중이라구." "기가 차네. 살다 보면은 서쪽에서 해가 떠오른다던가? 허허어...뭣이 어쩌구 어째? 이야기꾼?" "이야기꾼이 어때서?" "야바위꾼도 난감불락일 터인데 허허허헛... 이야기꾼이라?" 명빈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심각하게 토론으로 들어갈 준비인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별수없는 거라구. 겸양의 미덕을 보이기 위해서 이야기꾼이라 하기는 했으되 소위 그 소설가라는 게 얼마나 도도한 직업인지 알기나 아나?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말할 것도 없는 일이고 바다 건너 일본의 실정만 하더라도 세상에서 존경받는 그 처지가 고관대작 유가 아니라구. 내 농담하는 것도 아니구 일시적 생각도 아니구 단단히 결심을 했어, 우선 시작은 번역부터 해보려해. 다행히 일본말엔 자신이 있고 남의 나라 좋은 소설들을 골라서 시작해볼 참인데, 그러니까 일본에서 진작부터 해외의 문학작품들이 번역되어 널리 소개돼 있으니까 그런 것 중에서 좋은 거를," "경사났구먼." "남의 얘기 끝까지 듣기나 하구서 말하라구. 나느 아무튼 상당히 신념을 굳혔다. 그 애기부터 하고 싶은 거라구. 물론 글을 모르는 사람이야 별 문제겠으나 글줄 읽는 사람이면은 위아래 부담없이 읽혀지는 게 소설이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몇몇 식자들이 새로운 문명을 두고 왈까왈부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 일반 대중이 짧은 시일에 눈을 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 얘기라구. 우물 안에서도 한 권의 소설을 통해서 그 나라의 풍습이며 새로운 사상, 그네들의 생활방도 종교 윤리관을 싹 훑을 수 있다면은 그런 작품의 소개란 상당히 시급한 일일게고 몇 사람은 선구자가 있어야잖겠어? 물론 지금까지의 얘기를 번역하는 일인데 그런 다음," "관두어." "이거 참, 침침절벽이군 그래." "관두란 말이야. 뭐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명? 소설이란 걸 가지고 전달을 한다구?" "그렇지 않구?" "이봐 명빈이, 이야기란 건 말이야, 단군 할아버지적부터 있어온게야. 사람은 이미 그때부터 개명을 했구. 자네 같은 보리죽 대가리 때문에 빌어먹을! 그래서 개명 소리가 자꾸, 자꾸 나오는 게야. 번역이니 뭐니 하니까 하는 얘긴데 대포나 군함 만드는 서적이면 모를까 그까짓 왜나막신 소리가 나구 양고기 누린내가 물씬 나는 그따위 사상이고 개나발이고 일벗어! 눈깔이 두 개, 입 코 있고 두짝 귀가 잇고 두 발로 걷는 사람의 새끼면은 다아, 다 옛날 고릿적 부터 머리 싸매고 꿍꿍거리며 할 얘기 다 해놨는데 그까짓 양고기 누린내 나는 것들 새삼스럽게, 아서어. 그만두란 말이야. 그렇잖아도 자네 대가린 남보다 무거워서 뛰기가 불편한 터수에," 하다말고 서의돈은 말을 뚝 끊는다. 천장을 올려다보켜 목의 복숭아뼈를 슬슬 만진다. "더하지 왜 그만두나," "생각 고쳤네." "뭐?" "널 상대로 무슨 얘길 하겠냐. 여보게 명빈, 굴원의 그 회사가 뭐 그리 좋은고? 물에 빠져 죽을 사람이 과연 시 쓸 생각이 날까? 하던 멍청한 그자 얼굴이 생각나서 입맛 떨어진다. 뭐 소설을 쓰겠다구? 삼대 구년 묵은 소리." 다소는 무안스러웠던 임명빈은 멋쩍은 웃음을 띤다. "임명빈은 이인직에 따라갈려면 허리굽는다구. 잘난 소리 말라구! 선생질 하는 게야. 교장까진 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임명빈은 몹시 충격을 받는다. 모욕감도 있었지만 사실 명빈은 바로 오늘 아침 큰사랑에 불러 갔었다. 불려가서 부친한테 들은 얘기가 바로 그 말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질이나 하는 게야. 얘길 들으니까 공연한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쓸데없는 짓 그만두구. 자고로 무사는 가난하다는 게 통념인데 그나마 저저이 다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천부의 자질이 있어야, 선생으로 취직하도록 해. 장차 교장까진 될 수 있겠지." 명빈은 부친의 말을 덤덤하게 들었다. 으레 그러려니 생각한 때문이다. 부친의 평소 지론이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해서 되지 안 될지 모르는 일엔 애당초 손을 대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었으니까. 사실 재능에 관하여는 자를 대어서 재볼 수 없는 것이요 성공에 관해서도 도장 찍어놓고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명빈은 부친의 말로 하여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해볼 거라구." 얼굴을 붉히고 말한 임명빈은 그 자신의 결심을 나타낼 양인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 점심 싸가지고 다니며 말릴걸." "엿장수 마음대로?" "아암 엿장수 마음대론 안 되지. 임명빈 마음대론 안 돼." 약이 목구멍까지 오른 임명빈 한다는 말이 "의리 없는 인간이구먼. 나도 점심 싸가지고 다니며 기화하곤 살림 못하게 할 거야." 농담이 아니라 심각한 표정으로, 좀더 흔들어대면은 울기라도 할 상호가 아닌가. "그건 두고보아야만 알 일이고," 의돈은 킬킬대고 웃는다. "긴 소리 할 것 없어. 오늘 나한테 온 용무가 뭐야?" 아무리 신경질을 부려보려 해도 신경질이 되어지지 않는, 시무룩한 음성으로 묻는다. "실은 임명빈 선생을 만나러 온 것은 아니고오 임역관을 뵈올까 해서 왔는데, 그래 자네 춘부장께서는 지금 댁에 계신가?" 서의돈의 놀려대는 품은 변한이 없다. "무슨 일로 그러는 게야. 그건... 그렇지. 그건 차차 알게 될 거구. 날 안내 좀 해주게." 명빈이 일어섰다. 그들은 함께 큰사랑으로 건너갔다. "아버님." 명빈이 문밖에서 불렀다. "음." 차분한 음성이었다. "의돈이가 만나뵈려고 왔습니다." "그래?" 임역관이 방문을 열었다. "들어오시오, 서공." 아들의 친구지만 지체가 다른 까닭으로 임역관의 태도는 매우 정중하다. "안녕하십니까. 문안드리옵니다." 방안으로 들어온 의돈은 깍듯하게 인사를 했고 명빈은 시무룩해진 채 작은 사랑, 자기 처소로 돌아간다. "서참봉께서도 안녕하시구요." 앞뒷집이면서 짐짓 안부를 모르는 듯 묻는다. "네. 노인장, 매우 왕성하십니다." "다행이오." "그보다 그 뭡니까, 명빈이가 지지리 궁상, 문사가 되겠다기에 지금 막 야단을 쳐주었습니다." 임역관은 빙그레 웃는다. 신분은 중인이지만 과거의 직위가 임역관인만큼 사람을 대하는 품이 옹생스럽지 않다. 몸가짐도 세련되었으며 흰 머리칼 하나 눈에 띄지 않는 초로, 젊었을 시절에는 아들보다 풍채며 용모가 월등 잘났을 성싶다. 막내딸 명희가 미인인 것도 아버지를 닮은 때문인지. 방안이 으리으리할 리가 없겠으나 조촐하여 살림의 풍도는 넉넉한 듯 싶다. "한데?" 무슨 일로 왔느냐 묻는 투다. 그러나 서의돈은 내의를 말하지 않고 연신 임명빈의 흉허물만 늘어놓는다. "덩치만 컸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왜 아니겠습니까." "명빈이는 그렇다 치고 서공도 경륜과 포부가 클 터인데," "네, 요즘엔 하늘천정 밑이 침소가 아니옵니다." "지난달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가실 걸 그랬구먼." "그들이 다녀와서 그곳 형편 소상하게 알아본 뒤 갈 작정입니다." "그 생각도 나쁘진 않소." "요즘도 그 조씨네댁에 출입하십니까?" "가끔 들르지요." 약간 당황한 듯 임역관은 서의돈의 눈치를 살핀다. "네에..." "..." "황춘배 노인에게 땅을 잡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이번에는 당황하는 빛을 감추지 못한다. "어째 그걸 물으시오?" 서의돈은 씩 웃는다.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땅을 잡히고 빚을 냈지요." "이득은 결국, 빚돈이 나올 가망 없는 땅문서고 보면 황춘배 노인이 보게되는 거구 폐광을 처분한 그 모대감이" 임역관 얼굴에 의혹이 피어오른다. 말하자면 음모는 또 음모였으니까. 또 대체 이자는 극비에 부쳐지고 있는 폐광을 어디서 알았으며 그 말을 꺼내는 저의는 무엇인가. 임역관은 아무 대꾸 없이 서의돈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다름이 아니오라 그 빚을 황노인보다 싼 이자로 대봉하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되면 어느편이 이득을 보게 되는지요." "..." "누구의 손에 가든 그 땅문서는 떠내려가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좀 자세한 애길 해주시오." "폐광을 처분한 그 막대한 돈이 어디로 갔는지 소생도 짐작됩니다. 해서 모대감을 존경하는 바이고," "허 참," 임역관은 할 수 없이 웃어버린다. "아무튼 그런 경위와는 상관없는 일이겠습니다만 내일 공과 성을 가진 노인이 찾아오면 만나 주십시오." 사뭇 우격다짐이다. "그건 또 어째서요?" "간도에서 불언천리 온 사람이니까 자세한 얘기는 그 노인이 할 것입니다." 간도에서 왔다는 말에 임역관은 긴장한다. "몇 시쯤, 보내면 되겠습니까?" 허락 같은 것은 받으나마나 혼자 결정하고 서둘러 댄다. "언제라도, 종일 집에 있겠소." "알았습니다. 하면은 물러가겠습니다." 서의돈 역시 서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사랑 작은사랑으로 건너오는데 열려진 중문 안에 얼른거리는 명희 눈과 서의돈의 눈이 부딪친다. 명희는 눈을 흘기며 급히 몸을 숨기다. 지난 이월이던지, 황태수 집에서 생일 술을 먹다가 술을 못하는 임명빈이 과음하여 쓰러져 자는 것을 본 서의돈이 상현을 데리고 나와서 오라버니한테 변괴가 생겼노라 거짓을 하여 명희를 놀라게 한, 그때 일을 두고 명희는 아직 노여움을 풀지 않았던 모양이다. 서의돈은 작은사랑 쪽을 넘겨다본다. "명빈이!" "왜 그래." "나 가네." "들어왔다 가게." "내일 밤 함춘관에서 만나자구." 의돈은 대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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