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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만명의 뼈로 장식한 쿠트나호라 해골성당
글/사진:이종원
체코의 골고다 언덕,쿠트나 호라 해골성당
무려 4만명의 뼈를 사용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도, 촛대도, 성작도 해골이다. 갈비뼈로 피라미드 탑까지 쌓아 놓고 있다. 영혼을 위해 기도를 바치는 신성한 성당에서 이런 괴기스런 장식을 만났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조상의 유골을 산사람의 목숨만큼이나 귀하게 여겼던 동양인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신성하게 모셔야 할 유골로 흔들거리는 샹들리에 장식까지 했으니 고인에 대한 모독은 아닐까. 성당을 접하기도 전에 이미 난 불쾌한 선입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두려움 반 호기심 반. 막상 성당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는 그리 혐오스럽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절대자를 향한 최상의 봉헌으로 이해하고 싶다. 죽음의 흔적들이 한낱 티끌에 불과하며, 찰나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자신의 인생을 한번쯤 관조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11~13세기는 유럽인들이 이슬람교도들로 하여금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위해 십자군 원정을 벌였던 때다. 종교를 매개로 유럽인이 하나가 되었고 이스라엘 땅을 밟는 것이 카톨릭교도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1270년 마지막 8차 십자군 원정이 끝났고 짧은 시간이지만 평화가 찾아왔다. 1278년 보헤미아 왕은 공식사절로 세들레츠 수도원장을 이스라엘로 보냈고, 그는 예루살렘의 성지들을 둘러보고 골고다 언덕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이곳 성당 공동묘지에 뿌렸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님의 흙이었으니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그 흙에 묻히면 다시 부활 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소문은 보헤미아와 중부유럽에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부유한 사람들은 이 성당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했다. 더구나 14세기말과 15세기초 흑사병이 창궐했고 휴즈전쟁까지 일어나자 사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더 이상 시신을 묻을 곳이 없자 일반인들의 무덤에서 뼈를 빼내 그곳에 귀족들을 묻어 버렸다.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유골을 수도원 주변에 쌓아 두었고 후에 안으로 옮겼다고 한다. 산더미같은 유골을 어떻게 해야 할까? 1511년 반 봉사인 수도사는 그 뼈들을 모아 성당의 장식으로 사용하게 된다. 어쩌면 신을 향한 최선의 선택일지 모른다.
성당 정식이름은 코스트니체 세드렉 성당인데 해골성당으로 더 알려져 있다.. 무덤으로 둘러 싸인 작은 성당이다.
성당 입구. 해골로 십자가를 만들었다.
성당 옆면에는 성작 장식을 하고 있다. 주님의 피를 담는 그릇.
아주 정교하게
지하 채플로 들어가게 된다.
머리위로 해골 하나가 뚝 떨어질까봐 조마조마
귀족들의 문장도 해골로만들었는데 위쪽에 왕관도 보인다. 그 뒷편으로 해골피라미드가 자리한다.. 의인에게는 하늘로 올라가는 특권을 주기에 왕관을 그려 넣었다.
수천 기의 해골을 볼 수 있다. '프란티색 린트 1870년'이 새겨져 있다. 체코의 유명한 조각가인 그는 뼈를 서로 묶지 않고 쌓았다고 한다. 하느님 앞에서는 인간의 뼈는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죽음앞에서는 누구나 공평하며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는 것이 부활이며 그때가 되서야 예수의 구원작업이 완성한다고 보고 있다.
중앙 제대 앞 해골 샹들리에가 가장 놀랍고 경이롭다. 신체의 모든 부위의 뼈를 하나도 빠짐없이 엮어 만들어다고 한다. 샹들리에 아래쪽에 지하 납골소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고 하는데 그곳에는 귀족둘의 유품이 있다고 한다.
촛대에도 해골이
장식장에는 후즈전쟁때 용사들의 해골이 전시되어 있는데 칼이나 도끼에 의해 살해된 유골이란다.
해골 촛대
2층 성당은 해골 하나 없는 단아한 분위기
유네스코 문화유산- 성바르바라 대성당
탄광도시 경북 문경. 탄광산업이 잘 나갈 때는 강아지도 1만원짜리 지폐를 물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아마 프라하에서 동쪽 60km 떨어진 쿠트나호라가 그런 도시다. 13~14세기 이곳에 은광이 발견되면서 프라하 다음으로 큰 도시로 발전했으며 15~16세기에는 보헤미아 왕이 머물렀던 수도로 커갔다. 유럽의 조폐국까지 자리해 이곳에서 주조된 은화는 국제통화로 인정되었다고하는데 오늘날 유로화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200년도 되지 않아 더이상 채굴할 은이 없자 도시는 서서히 쇠퇴하고 만다.
어쨌든 돈이 있을 때 기념비적 건물을 세워야 후대인들이 먹고 살 수 있다. 지금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중동의 산유국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바이에 160층 건물을 세우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르바라 대성당은 바로 쿠트나호라가 가장 번성했을 때 지은 성당으로 제후들의 뭉텅이 돈으로 성당을 건립한 것이 아니라 광부들이 갹출해서 만든 성당이다. 그래서 더욱 정감이 간다.
땅속 500m, 어둠과 공포속에서 은을 채굴한 광부들은 그들의 수호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성 바르바라가 바로 광부들의 수호신이다.
체코를 대표하는 후기고딕 양식 성당으로 1388년에 착공해 1512년에 완공했으니 무려 125년이 걸린 셈이다. 건설 당시 은을 캘 수 없어 여러번 공사 중단 등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가운데 신랑과 4개의 측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문은 격자무늬의 파사드창문
좌우 끄트머리에 가느다란 탑들이 솟아 있는데 본 건물과 탑을 연결해주는 아치모양의 팔이 플리잉버트레스다. 본체 볼트의 무게를 분산해주며 하늘 향해 공간이 열려 있기에 빛이 건물로 들어올 있도록 했고 고딕 건물을 화려하게 꾸미는 역할을 맡고 있다.
성당 입구는 화려한 파사드문
중앙제단. 높이 33m 돔형 천장을 가지고 있다.
중앙제단에는 최후의 만찬 조각이 최후의만찬 오른쪽 책과 탑이 있는 여인이 바로 광부의 수호성인인 바르바라 성녀가 모셔져 있다. 제단 뒤는 포도나무가 부조상
보헤미아왕가, 귀족의 문장, 길드(조합)의 문장, 폴란드 왕국의 문장 등 보헤미안의 위세를 보여준다.
서로 교차되어 꽃잎모양을 만들어내고있다. 길이는 70m
7백개의 파이프를 가진 바로크식 오르간. 천사가 연주하는 모습
측면 회랑에 3개의 바로크형 소성당을 갖추고 있다.
가운데는 1830년에 만들어진 성모상
모자이크가 아니라 유리에 직접 그림으로 그렸다고 한다.
빛의 예술. 천천히 감상해 볼 만한 명품이다.
15세기 말 후기 고딕 프레스코화. 창문 아래는 성전건축의 총 책임자인 스미쉑의 가족들. 왼쪽은 십자라 달린 예수님
남쪽회랑벽에 작업대애 앉아 동전을 주조하는 벽화.
밖을 나가면 13기의 체코의 성인들 조각상을 볼 수 있다.
마치 프라하의 카를교처럼
고딕식 성바르바라 성당과 잘 어울린다.
성당 옆은 포도밭, 아래는 중세의 마을
체스키크롬로프에서 워낙 멋진 건물들을 만났기에 그저 그렇다.
점심은 치킨. 석쇠에 굽는 요리가 발달. 맥주는 역시 하우스 흑맥주
맥주소비량 세계 1위. 고유브렌드만 300여 가지가 넘는단다. 어디를 가든 맥주 맛이 다른데 개인 취향에 따라 맥주를 고를 수 있다. 좋은 보리를 써서 그런지 맛이 진하고 향이 깊다. 한국의 맥주는 싱거워서 맛이 별로다. 그래서 폭탄주를 타 먹는가보다. 쿠트나호라는 체르나다차라는 맥주가 고유브랜드가 있다.
프라하로 가는길. 눈물 겹도록 아름다운 유채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
첫댓글 삶과 죽음을 다 자연의 일부로 본다면 해골 성당의 장식물들을 편안하게 볼 수 있을까요? 자꾸 보면 그럴것 같기도 하고 . . .
화려하게 장식된 성당들을 많이 보아서인지 광부들의 땀이 배인 성바르바라 성당의 아름다운 장식들과 그림들이 참 소박하고 정겹게 다가옵니다.
대장님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언제나 가보나....
건강하게 회원모두가다녀오세요
구경 한번 잘하네요 덕분에....
으시시 하네여~~~~그래두 가보고 싶습니다!!!
해골성당이 아주 인상적이면서도 조금은 충격적입니다 기하학적인 숫자를 나열한것 같은 기교와 정교함에
놀랄 따름입니다 꿈속에서나 동화에서나 볼 듯한 풍경들 두루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대장님!!!!
내생에 가볼수 있을런지요 ,,,,
너무나 우와하고 우와합니다 , 집짓는데 참고가 되겠네요 ,,,
체코의 해골성당과 바르바라 대성당은 사진으로 처음 봅니다. 너무 멋져요. 감사합니다.
해골로 장식된 건축물에는 으시시 살기가 느껴집니다.기교와 정교함이 정말 놀랍고 멋진 사진을 감상하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다음기회엔 꼭 동참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