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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양이 미국 학생들도 어려워한다는 SATⅡ 작문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영어작문 실력을 갖출 수 있었던 건 영어 회화 공부와 함께 시작한 영어일기 쓰기 덕분이다.
“처음엔 ‘I’m going to institute(나는 학원에 간다)’처럼 간단한 몇 문장으로 시작했어요. 하루는 영어일기를 쓰고 그 다음날은 한글일기를 썼지요. 6학년이 되어서는 일어로 일기를 썼고요. 그 무렵 ‘체리’나 ‘세일러 문’ 같은 일본만화를 읽고 싶어서 일어 공부를 시작했거든요.”
원희양의 영어 발음은 거의 원어민 발음에 가깝다. 국내에서만 자랐다고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 이같은 결과는 6학년 때 ‘영어 스피치 대회’에 나가기 위해 학원에서 발음 교정을 철저히 한 덕분이라고 한다. 대전 전민중학교 시절부터 연극반 활동을 하며 영어 연극을 한 것 또한 그의 영어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 원희양은 지난해 자신이 대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으로 천안외국어대 주최로 열린 전국고교영어역할극대회 등 3개 영어연극대회에서 대상·금상·은상 등을 수상했다.
대전 전민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도맡아했던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시험과 수학경시대회, 영어연극대회가 비슷한 시기에 치러지는 바람에 딱 한 번 1등을 놓쳤다고 한다.
“아는 선배가 영어연극대회에 나가자고 해서 매일 수업 끝나고 모여 오후 6, 7시까지 연습을 계속했어요. 그러고는 학원에 가서 수학경시대회를 준비했고요. 그랬더니 기말고사 성적이 뚝 떨어져 3등을 하고 말았어요. 친구들이 ‘쟤, 공부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 하는 소리를 하니까 정말 억울하더라고요. 난 다른 것들을 준비하느라 그랬던 건데….”
아직도 아쉬움이 남은 듯한 그는 “하지만 바로 다음번 시험에서 1등을 되찾았다”며 웃었다. 옆에서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머니 이씨에 따르면 원희양은 당시 수학경시대회에서는 동상, 영어연극대회에서는 1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는 “제 딸이지만 승부욕이 정말 대단하다”며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한꺼번에 세 가지 일이 닥치자 세 가지 모두 잘 하려고 무척 노력하더라고요. 연극 연습이 끝나면 서둘러 밥을 먹고 학원에 가서 수학경시대회 수업을 들었어요. 그런데 저녁 8, 9시면 졸음이 쏟아질 때잖아요. 원희는 졸지 않으려고 샤프 펜으로 손톱밑을 ‘콕콕’ 찌르며 졸음을 참더라고요. ‘그러면 파상풍에 걸릴 수 있다’고 주의를 줬더니 이번엔 주먹으로 허벅지를 때려가며 공부를 했어요.”
그는 또 “본래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그때만은 학원에서 돌아와 새벽 3, 4시까지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원희양은 이때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자정 무렵에 잠들어 등교시간이 다되어 일어날 정도로 잠을 충분히 잤다고 한다. 잠을 실컷 자는 대신 일단 책상에 앉으면 집중해서 공부했다고.
“공부를 할 때는 누가 옆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몰라요. 입을 벌리고 공부를 하다가 침이 흘러서 떨어져도 잘 모를 정도죠. 공부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침을 뚝 흘려 얼른 휴지로 닦곤 했어요(웃음).”
민족사관학교에 진학한 건 부모의 권유 때문이었다. 딸이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면 ‘다음번에는 대전시에서 1등을 해보라’며 늘 보다 큰 꿈을 꾸도록 조언했던 어머니 이씨가 딸에게 ‘세계 무대를 겨냥해 공부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권했던 것.
민족사관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밥 먹는 시간도 아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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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민족사관학교에 가서 미국 명문대에 진학하면 어떻겠냐고 하셨을 때 잘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어요. 중학교 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해도 민족사관학교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잖아요. 하지만 제가 민족사관학교에 들어가면 엄마도 생활한복을 입고 지내고, 아빠도 1주일에 하루는 생활한복을 입고 진료를 하시겠다고 해서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죠.”
예상했던 것처럼 민족사관학교에서의 공부는 쉽지 않았다. 민족사관학교를 목표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혼자 공부해 무난히 합격은 했지만 막상 입학하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2시간 만에 읽는 영어 원서를 원희양은 꼬박 일주일이 걸려야 뗄 수 있었다.
“전 줄곧 ‘꼴찌 3형제’ 중 한 사람이었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잠을 줄이고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헤밍웨이 등의 작품을 원서로 읽기 시작했어요. 이해가 될 때까지 매일 반복해 읽었어요. ”
1학년 말부터는 점심시간마다 밥을 먹기 위해 기숙사에 다녀오는 시간이 아까워 도시락을 쌌다. 민족사관학교는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원희양은 보온도시락을 준비해 아침마다 식당에서 점심에 먹을 밥을 챙겨 담았다. 그리고 친구들이 점심을 먹으러 기숙사에 간 사이 교실 밖에 나와 혼자 도시락을 먹고 교실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처음엔 이 유별난 행동으로 친구들의 눈총을 받았지만 곧 그의 공부법에 동참한 친구들이 늘어나 ‘도시락 클럽’까지 생겼다고 한다. 전국의 수재들이 몰린다는 민족사관학교에서 2년 만에 수석 졸업하는 영예를 안을 수 있었던 건 이같은 끈질긴 노력과 악바리 같은 근성 덕분이다.
원희양은 자신의 경험상 “영어 공부는 단어를 무조건 외우기보다 영어로 된 세계 명작을 많이 읽는 게 더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며 자신의 영어 공부 노하우를 들려주었다.
![]() ![]()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선 순위는 꼭 지키도록 한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그러나 늘 숙제와 공부를 마쳐야만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낮에 실컷 놀고, 밤에 눈 비비며 숙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일에 우선 순위를 정하고, 중요한 일을 먼저 마쳐야 놀 수 있다는 것을 몸에 배도록 한다. 아이가 관심 가지는 책은 모두 읽도록 한다 원희가 어렸을 때 남편은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두 아이를 혼자 돌봐야 했던 나는 안방을 서재로 꾸몄다. 4개 벽면을 책으로 가득 채우고, 방 한가운데에 큰 탁자를 놓았다. 거기에 세 식구가 앉아 책을 읽었다. 방안엔 아이들 책부터 남편의 전공 서적까지 다양한 책이 꽂혀 있었는데 아이들이 원하는 책을 모두 읽게 했다. 짜증이 날 정도로 질문을 많이 해도 다 받아준다 원희는 어려서부터 정말 성가실 정도로 ‘이게 뭐야?’ ‘저게 뭐야?’ 하고 질문을 해댔다. 귀찮을 때가 많았지만 성실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아이 아빠도 시간이 나는 대로 아이들을 데리고 유적지 탐방을 다니며 안내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줬다. 아이가 매일 일기를 쓰면 소감을 달아준다 원희의 감성과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는 데는 일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아이의 일기를 읽고, 나의 의견을 짧게 덧붙였다. 이것이 아이의 작문 실력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일단 학원을 선택하면 다른 학원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원희는 개인 과외는 거의 하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 괜찮은 학원 한 곳을 정해 줄곧 그 학원을 다녔고 그곳을 중심으로 생활이 이루어졌다. 학교에서 돌아와 오후 5시30분에 이른 저녁을 먹고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자정 무렵까지 학원 자습실에 남아 공부를 했다. 학원 수업이 없는 주말에도 학원에서 공부가 더 잘 된다며 학원에 가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