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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오늘 누가복음의 강렬하면서도 동적인 이야기에서는 삭개오라는 이름의 한 부자 세리가 예수의 부름에 응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는 <자신의 소유를 팔기를 거절한 부자 관리>와 <조건 없이 그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려고 하는 삭개오> 간의 대조를 인식하기 위해 누가의 넓은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키가 작아서” 예수를 보려고 군중에 앞서 재빠르게 달려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삭개오에게 대부분 연민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구절에 기독론적인 핵심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누가의 이야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잃은 자를 찾고 구하는” 선교적 주제가 강조되어 있다. 신학적인 키포인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뚜렷한 사명감을 갖고 그의 선교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삭개오가 예수를 단지 관찰하기 원했는지 아니면 예수를 직접 영접하길 원했는지 여부는 본문에서 분명치 않다. 어느 쪽이든 그의 가는 길에서 그는 장애물과 부딪힌다. 몇몇 학자들은 삭개오의 키에 대한 언급이 아마도 그의 실제 키보다 그의 직업과 더 관련되어 있다는 제안을 했다. 군중은 아마도 삭개오가 행한 일 때문에 그의 길을 막고 바리케이트를 치려 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삭개오의 예수를 보기 위한 시도는 방해를 받았다.
그러나 누구도 예수가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로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예수가 삭개오와 시선을 맞추고 그를 불러 내려오게 하며 그의 집에 초대되어 가는 것을 아무도 방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서는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거나 경험하는 것과 관련하여 방해를 받는다. 우리의 타락한 상태는 하나님의 빛이 우리 삶에 비치는 것을 가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의 마음에 빛으로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을 우리에게 주신다.(요 1:5, 고전 4:6, 엡 5:8)
예수가 오늘 본문에서 잃어버린 자 일반을 찾은 것뿐 아니라, 특별하게 삭개오라는 한 사람을 찾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하늘이 주도한 신성한 부름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예수는 군중으로부터 개인들을 뽑아, 제자가 되도록 부르신다. 하나님 나라에로의 부름은 이런 방식으로 시작된다. 삭개오는 또 하나의 딱 들어맞는 사례다.
예수에 의한 이런 신적인 부름은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로 가득한 인간을 당신의 영광의 빛으로 불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를 이러한 방식으로 마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빛과 친밀하게 교통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오늘 본문이 “소명”(call)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삭개오를 불러내고, 그러한 행함 안에서 예수는 구원 사역을 착수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한다. 예수가 “삭개오”라는 이름을 부른 데서 우리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것처럼 이름을 부르신다. 이것이 구원의 주로 오신 그리스도의 선교적 사명이다. 예수가 신적인 섭리에 따라 주도권을 갖고 다가오신다는 것에서 우리는 구원은 항상 하나님에 의해 시작됨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우리가 스스로를 구할 능력이 없어서 우리와 함께 있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롬 7:19)
칼 바르트는 예수를 우리의 부름과 소명을 시작하게 하고 유지하게 하는 분이라고 묘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부름을 받는다. 예수는 구원이 삭개오의 집에 임했다고 말함으로 삭개오의 부름과 구원을 선포한다. 삭개오는 진실로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은 취소불가라는 바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롬11:29)
예수는 인성에 갇혀 있는 순간에도 선교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신적인 예지를 드러낸다. 신적인 예지는 만나거나 발생하기 전에 사람이나 사건을 아는 능력이다. 이 때문에 예수는 삭개오를 전에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와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 8:29)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과의 구원의 관계로 부르시고, 우리는 응답한다. 오늘 본문은 메시아의 부르심에 대한 삭개오의 응답을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주 신속하게 그는 나무에 있는 그의 안전한 피난처에서 내려와 기쁘게 그를 맞이하는 예수와 함께 선다. 신학자와 설교자는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 후에는 인간의 응답이 따라야 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응답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내적 존재가 개조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이는 더 깊은 통찰과 윤리적 방향전환(즉 회개)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삭개오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누가 시키거나 강요한 것도 아닌데 그는 자발적으로 그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그가 불법적으로 재산을 빼앗은 사람에게 4배의 배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삭개오가 “늑대에서 양으로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목자로까지 변화했다”고 말한다. 삭개오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삶을 살게 된다. <예수를 멀리서 바라보는 자>에서 <예수의 충실한 제자>로 바뀌는 삭개오의 구원적 경험을 친근한 이야기 속에 담았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가진 매력이다.
주석적 관점
- 삭개오 이야기는 누가복음의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국외자(outsider)에 대한 예수의 환영, 믿음과 회개의 성격, 돈과 소유의 바른 사용,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현존 등이다. 또한 이 본문은 바리새파사람과 세리의 비유(지난 주 복음서 본문)을 상기시키는데, 회개한 세리가 그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에 비추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제시하고 있다. 삭개오도 역시 그 세리가 간구했던 자비를 경험했고, 그도 의롭다 함을 받았다.
- 예수는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세관장인 삭개오를 만났다. 모든 세리들은 부자였는데, 그들은 세금을 모으는 권리를 사서 제국에 바쳐야 할 액수보다 더많이 거두어 사리사욕을 챙겼다. 어떤 세리가 세례요한에게 “선생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라고 답했는데(3:12-13), 이는 실제적으로 그들의 사업을 망치는 것이었다. 삭개오는 대단히 성공한 부자였다. 여리고는 헤롯의 큰 궁전이 있는 큰 도시였고, 그래서 세수 중심지 중의 하나였다. 삭개오는 자신을 대신하여 세금을 거두는 수많은 부하들이 있었다. 그의 번창함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 삭개오가 돈이 많긴 했지만 키는 작았다. 작은 키 때문에 무리에게 가려서 방랑하는 설교자(예수)를 볼 수 없었기에 뽕나무에 올라갔다. 그는 단지 호기심으로 그랬을까? 아니면 예수에게서 그를 움직이는 무엇인가를 느꼈을까? 아무튼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앞서 달려갔다”(4)라고 말한 것은 그의 열성을 보여준다.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의 주의를 끌었고, “삭개오야, 어서 내려 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5)고 말했다.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며 예수를 모셔 들었다.(6)
- 예수는 세리의 집에 초대 받았는데, 이는 깜짝 놀랄 관례의 위반이요, 국외자와 함께 어울리는 그의 평판을 여지없는 보여준 것이다. 종교적 순결주의자들은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거요?”(5:30)라고 물었는데, 예수는 이를 인용하여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한다”(7:34)라고 했다. 그들이 세례요한에게 접근했듯이(3:12),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의 주의를 끌었고, 예수는 그들은 반겨 주었다(5:29;7:29;15:1).
-그들과 함께함으로 더렵혀지기 보다는 도리어 예수는 온전함과 환영을 보여주었다. 사람들도 바리새인과 같이 충격을 받고,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7)고 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식탁을 함께하는 것이 단순히 친밀함을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동등함과 수용을 의미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을 나타내기에, 예수가 삭개오의 죄 많은 삶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의 견해는 삭개오가 여기에서 예수를 받아들였고 그것이 그의 삶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 누가복음에서 믿음과 회개의 성격은 단연코 윤리적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메시야임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 인간의 삶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반영해야만 한다. 삭개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8) 지난 주 본문의 자부심 강한 바리새파사람은 하나님에게 성실한 십일조를 바친다고 말했는데(18:12), 삭개오는 그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다. 그는 구약이 요구한 배상을 했다. “어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그것을 잡거나 팔면, 그는 손 한 마리에는 소 다섯 마리로, 양 한 마리에는 양 네 마리로 갚아야 한다”(출22:1). 그래서 삭개오는 그의 이웃에 대한 갈취를 세금이 아니라 도적질로 정의하고 그에 대해 회개한 것이다. 그의 돈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아주고 나면 삭개오는 더 이상 그전같이 부자는 아닐 것이다.
- 누가의 부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관심은 단지 부자들에 대한 기소장이거나 가난에 대한 금욕적 선호가 아니다. 그것은 분배의 정의문제이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 그의 어머니는 배고픈 자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고 부자들은 빈손으로 가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1:53). 예수가 가난한 자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부자들에게는 화가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위안을 받았기 때문이다(6:24).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3-21), 불의한 청지기비유(16:1-13),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6:19-31) 모두는 개인적 부가 a) 쉽게 우상이 된다는 것과 b)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빼앗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강조했다.
- 안식일 혼인잔치는 예수의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가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14:12-14)”라는 말로 끝난다. 하나님은 부를 나누도록 디자인했는데, 18:18-23의 돈 많은 관리가 큰 근심가운데 알게 된 사실이다. 이는 예수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18:25)고 말한 이유이다.
- 마지막으로, 삭개오의 회개는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현존을 나타낸다. 예수는 세리와 함께하는 그를 비판하는 군중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삭개오(히브리어로 “깨끗한” 혹은 “순진한”이란 뜻)는 마침내 구원받았다고 선포된다. 그가 회개하고 그의 길을 바꾸고 예수를 따랐기에 구원이 그의 집에 온 것이다.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삶과 사역의 목적이다.
목회적 관점
키작은 삭개오는 유별나게 작은 사람이다. 그를 스코틀랜드 방식으로, 혹은 남부에서 아이들 이름을 부모 이름을 따라 “작은 월터”나 “작은 앤”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작은” 이라고 부르는 건 적당한 것 같다. 그는 자기 시대에 사회적 소외자였지만, 키 작은 삭개오를 초대교회의 위대한 성인들과 사도들과 나란히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단체사진을 찍는다면 삭개오는 단체의 맨 앞줄에 앉거나 아니면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직도 나무에 매달려 있을 것이다. 불과 열 개의 절에서 여리고에 사는 작은 남자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부자일 뿐만 아니라, 세리장으로서 동료 유대인에게 특별히 멸시를 받았다. 세리장은 로마와 결탁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몫을 탈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부패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리인들을 생각해 보라.
만약 누가복음을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읽고 있다면, 이 이야기가 삭개오를 위해서 행복하게 끝날 거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는 이 이야기 앞서서 부자들에게 가혹하게 말해 왔다. 복음서 초반부에서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하고 부자들에게 경고하며 말했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6:24) 12장에서 예수는 곡식을 저장하기 위해 더 큰 창고를 지으려는 부자 농부의 비유를 이야기했는데, 그날 밤에 그는 하나님의 셈에 따라 하나님께 불려갔다. 몇 장 뒤에서 예수는 천국에 간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에 관한 비유를 말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18장에서는 부자 청년 지도자가 슬퍼하면서 예수에게서 떠났다.
예수가 비난할 거라고 예상되는 이 사람을 만났을 때, 예수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다. 예수는 언제나 죄인을 환영했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만약 키 작은 삭개오가 지난 주 읽었던 비유(18:9-14)에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 같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잘난 척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는 아마 그를 지나쳐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싫어하는 공동체 사업가는 뭔가 특별했다. 그는 도시를 가로질러 오고 있는 예수라는 사람에 관해서 분명히 뭔가 들은 것이 있었다. 그는 직접 보고 싶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방해가 되었다. 그는 겉옷의 뒷면과 바닥을 보는 데 지쳤을 것이다. 그래서 잘 보이는 곳을 차지하려고 자존심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는 예수보다 앞서 달려가서 플라타너스 나무에 올라갔다. 낮은 가지는 키가 작은 사람이 오르기에 좋았다.
“아, 이제 보인다.” 예수가 멈춰서 그날 밤 삭개오의 집에 머물 거라는 영광을 주다니 얼마나 충격적인가? 사회에서 소외된 이 사람은 그 제안을 큰 기쁨으로 응답한다! 예수가 죄인의 집에 머무는 것을 선한 교인들이 불평할 때, 삭개오는 짧은 다리로 서서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길게 몸을 뻗고는, 그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선언한다. 그뿐 아니라, 그가 사기친 것은 어떤 것이라도 4배를 갚겠다고 한다. 이것은 유대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삭개오는 이 약속을 얼굴을 찡그리며 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한다. 예수는 그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9절)고 선포했을 때 독자들이 이미 짐작했을 것을 확인한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실제로 불평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삭개오 이야기는, 복음이 하나님께 대한 진지한 헌신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기쁨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같이 좋은 교인들은 항상 기뻐하는 걸 잘 못한다. 삭개오의 작은 키와 환한 미소는 더 잘하라고 우리를 고발한다. 교제는 진지하게 할 일이지만, 동시에 축하이기도 하다. “유카리스트(성찬)”라는 단어는 감사를 의미한다. 빵과 포도주를 서로 공유하고 “하늘의 빵”과 “구원의 잔” 같은 용어를 말할 때, 좋은 응답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이다. 우리는 성찬의 식탁에 초청하시는 예수의 초대에 기쁨으로 응답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또한 예수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찾는 것처럼 예수를 찾는 일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는 것은 위로가 된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절).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런 안심은 우리가 전적으로 수동적인 채로 있으면서, 예수가 시시때때로 수 마일을 걸어서 우리를 찾으신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예수께 가까이 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각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서 아론에서 삭개오로 이어지는 이야기보다 더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삭개로로부터 몇 가지 팁을 얻을 수 있다. 삭개오는 나무로 달려가서 기어 올라가서 자신을 낮추었다. 삭개오는 겉모습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를 생각했다. 그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려고 했다. 그는 예수를 보기만을 원했다. 군중들이 방해가 되었고, 그래서 그는 나무로 올라갔다.
우리가 예배에서, 직장에서, 혹은 시장에서 예수를 따르려고 하면, 교회의 행복한 성인, 키 작은 삭개오를 기억할 수 있다. 우리는 군중들의 위에서 예수를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가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예수가 우리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군중들의 등을 보는 것에 지쳤다면, 올라갈 나무를 찾으라. 만약 하나님과 잊지 못할 만남의 은혜를 입었다면, 당신의 응답은 삭개오의 기쁨만큼 기쁠 것이고, 그 기쁨은 당신을 정의를 향한 당신만의 즐거운 헌신으로 이끌 것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설교적 관점
-키가 작은 나는 예수께서 부유하고 키가 작은 세관장 삭개오를 만난 이 매력적이고 또 친근한 이야기로 인해 늘 기쁘곤 하였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메시지로 바꾸어야 하는 부담을 갖는다. 적어도 세 가지 가능한 주제를 제안하고 싶다: (1)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사랑 (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관심 그리고 (3) 관대함과 구원사이의 관계.
하나님의 과도한 행동 (Divine Extravagance)
이 이야기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은 인물들이 연출하는 지나친 행동들(extremes) 특히 삭개오로 대변되는 과도한 행동이다. 삭개오는 지나치게 작고 지나치게 부유하다. 그는 잽싸게 지나가는 예언자를 보기 위해 한 나무 위로 뛰어오른다. 예수는 갑자기 삭개오의 집으로 방문한다. 그 방문에 대한 응답으로 삭개오는 가난한 자에게 소유의 절반을 기부하고 속여서 빼앗은 사람에게는 4배나 갚겠다는 약속을 한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구원을 선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도한 행동이라는 상황 속에서 일어난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죄인인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언하는 것은 그 중에서 가장 과도한 행동이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관심 (God’s Relentless Desire)
예수는 삭개오가 집에 초대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방문한다. 삭개오는 적어도 초기에는 호기심으로 마음이 움직였지만 예수는 사랑으로 그랬다. 예수는 삭개오의 호기심에 스스로의 방문으로 후에는 그의 집에 구원을 선포함으로 응답한다. 삭개오의 구원에 대한 예수의 바램은 군중들의 일반적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삭개오같은 악명높은 죄인의 집에 예수께서 손님이 되는 것에 대해 투덜거린다. 하지만 예수의 행동은 누가복음에서 항상 나타나는 일관된 것이다. 예수는 지속적으로 소외되거나 정결하지 못한 사람들로 여겨지는 사람들과 함께 함으로써 사회적 기대와 종교적 규율에 거스려 행동한다. 삭개오를 찾아내면서 예수는 잃어버린 자 곧 우리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보여준다.
관대함과 구원 (Generosity and Salvation.)
삭개오가 후한 보상에 대한 모델이라는 점이 이 이야기에서 분명한 것 같다. 그는 예수 앞에 서서 가난한 자들에게 소유의 절반을 주고 속여 빼앗은 것에 대해 4배를 보상하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관대함을 넘어 지나친 것이다. 이 보상의 행동은 예수의 구원선포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누가복음 18:9-14에 나오는 성전에서 겸손한 기도를 드린 세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여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내려간다”. 삭개오의 구원은 그의 선행과 자신의 삶을 바꾸려는 열심에 놓여있다.
-설교자는 또한 삭개오의 관대한 행동선언에 대한 NRSV번역이 그가 미래의 실천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으로 잘못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몇몇 성서학자들의 지적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삭개오가 말하는 동사가 그가 이미 이러한 일 즉 가난한 자들에게 절반을 주고 보상을 하는 일을 하고 있는 중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면 다른 설교가 생겨난다. 만일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주제는 삭개오의 회개가 아니라 삭개오를 죄인으로 생각한 군중들의 공정하지 못한 가혹한 판단이 된다.
-누가가 이전에 예수를 소개하는 것처럼,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종교적 역할에 대한 기대는 뒤바뀌어져서 소외된 자들이 하나님께서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나타난다. 이 이야기에서 비슷한 소외된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눅 13:10-17에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치유한 등이 굽은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딸” (눅13:16)이라 불러서 병으로 인해 소외되었던 자리에서 나와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 내로 옮겨지게 된다. 여성으로 또 심각한 육체적 질병을 지닌 사람으로 그녀는 이중으로 소외되어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삭개오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소외되어있다. 비록 그가 분명히 상당한 재산과 세관장으로서 어느정도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안식일에 여인을 치유해주었다고 또 악명높은 세리의 집으로 들어간다고 예수를 비난했던 바로 그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죄인으로, 소외된 자로 취급받고 있다. 설교자는 오늘날 다른 형태의 배타적 행위가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에서 자행되고 있음을 일깨워주어야 할 것이다.
-예배라는 상황에서 이 설교가 지닌 퍼포먼스를 생각하면서 몸으로 움직이는 역동성을 고려하면 좋을 것 같다. 삭개오는 앞으로 달리고 나무에 오르고 떠 서둘러 내려와 예수 앞에 선다. 설교가 퍼포먼스를 통하여 이 에너지를 담을 수 있다면 가장 효과적이 될 것이다. 이 퍼포먼스는 예배를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몸을 강조한다. 삭개오의 작은 키, 그가 뛰고 오르고 내려오는 일 또 드라마틱하게 예수 앞에서 (그리고 그를 시기하는 자들 앞에서) 자신의 바른 행동을 선언하는 일등은 신앙이 체화된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설교와 예배를 통하여 회중들은 몸을 움직여 이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신나는 음악과 움직임으로(energetic music and movement), 몸으로 하는 행동으로 (physical action), 우리의 체화된 신앙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참여하는 것이고 그러한 형태는 이 이야기가 지닌 공동체와 전통 그리고 특성과 연속선 상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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