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일기 1
대보름 전날 밤엔 불을 놓았다
날이 새면 다시는 불을 지를 수 없다기에
방패연 홍어연 모두 날려버린 마을 아이들은
대낮부터 깡통에 못구멍을 내었다
사내아이들은 쥐불을 돌리며 갈마리 쪽으로 가고
패쌈 소리만 씩씩대며 미루나무 흔드는데
발썰매를 못 타 논두렁에 웅크렸던 나는
누나 같은 계집애들 틈에 섞여 눈총 먹으며
빨간 볼 비비면서 군불이나 지폈다
누나들은 내가 크면 술을 잘 마실 거라고도 하고
장가를 두 번 가거나 늦바람을 피울 거라고 하여
우우, 보름달 아래서 기어코 울리곤 했다
아이들 함성이 마른 잔디를 적시면
눈썹이야 새건 갈건 일찌감치 자러 갔다
이튿날 나는 아무도 모르게 연을 띄웠다
밤에는 조바심하며 불을 놓았다
첫 시집 『유년일기』의 시이다. 85년 그해 여름, 『민중교육』 필화사건에 연루되면서 나는 교단을 쫓겨났다. 고즈넉하던 소도시가 홍두깨 한 방에 뒤집어졌고 삘기꽃 시골 소녀들은 순박한 총각 선생의 날벼락 해직 사태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세상의 경계가 선과 악으로 진하게 구분되던 격랑의 타이밍이다. 밤마다 어금니 갈아대던 그 노여움을 다스리기 위해 서정시를 선택한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유년의 벗들과 서해의 낙조를 바라보던 기억들을 오소소 되살리면서 세모가 지나기 전에 스무 편 가량의 유년일기를 생산했다. 특히 마지막 두 줄 ‘이튿날 나는 아무도 모르게 연을 띄웠다/ 밤에는 조바심하며 불을 놓았다’를 끄집어내며 ‘구원의 끈’이라도 잡은 듯이 설레던 게 기억난다. 서슬 퍼런 5공화국 신군부시대, 해직동지들과 굳은 결의를 다짐하고도 혼자만의 밤마다 ‘유년일기’ 시리즈를 생산했으니 쬐끔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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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부석면은 서해안 격렬비열도에서 가까운 리아스식 해안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도비산 상봉 그 정상에 올라서면 3면으로 출렁이는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이따금 안면도나 남면에서 통통배 타고 바다를 건너오는 풍경에 하염없이 빠지기도 했다. 그랬다. 이 세상 마을에는 모두 바다가 붙어있는 줄 알던 그런 유년이었다. 마을마다 초가집이 있고 할아버지와 누렁소, 개울과 대밭과 미루나무가 있듯이 언덕을 넘으면 모든 마을에 백사장이 깔려있고 파도가 출렁이는 줄 알았다. 썰물 때 개펄에서 농게나 박하지를 잡던 수심이 낮은 바다였는데 동해바다처럼 맑고 푸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가없이 푸른 망망대해가 아니라 무인도와 언덕으로 꾸불텅꾸불텅 둘러싸인 저수지처럼 흐린 물결들인데 특히 천둥 치는 장마철의 물결은 거뭇거뭇 으스스했다. 어른들은 중국 양자강 물이 흘러온 탓에 황해라고 부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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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로 흐르는 개울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폭이 넓어지다가 하천의 끝물에 마침내 바다로 연결되었다. 적돌만에 진입하기 50미터 이전의 진둔벙은 민물과 바닷물이 반반씩 섞여서 숭어 떼와 붕어들이 함께 헤엄치는 곳이기도 하다. 저물녘 백사장에 어슬렁거리면 저만치 어둠 속에서 벗들의 하얀 이빨이 빙긋빙긋 웃으며 나타나곤 했다. 그 순박한 갯마을 아이들도 대보름만 되면 패싸움의 긴장감으로 갈마리 아이들과 대치를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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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들의 초겨울 놀이는 자치기에서 시작되었는데 겨울이 깊어가면서 팽이치기로 바뀌다가 썰매타기를 지나 연날리기로 변신했는데 겨울놀이의 절정은 쥐불놀이였다. 철사끈 연결한 깡통에 못 구멍을 내어 바람을 통하게 한 다음 마른 소똥 불씨를 넣고 쉥쉥 돌리며 불붙은 깡통을 논두렁에 올려놓을 때마다 마른 잔디가 쭈르르 타면서 까만 재를 남긴다. 그러다가 땅거미가 번지면 하천을 사이로 양쪽 동네의 불꽃 깡통들이 패싸움 대치했으니 두근두근 서스펜스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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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봤자 이튿날 학교에서 만나면 빤히 아는 얼굴이어서 실제 패싸움이라기보다는 대보름 치르는 긴장과 스릴의 의례적 행사 정도였다. 그렇게 하천 건너 양측 진영의 조무래기끼리 욕설도 주고받고 작은 흙덩이도 던지며 낄낄대는데, 웬걸 중학생 같은 선머슴 하나가 작대기 들고 나타나면서 판이 완전히 깨졌다. 게다가 입에 담배 연기를 뻑뻑 뿜어댔으니.
“정달이 성이닷.”
대밭집 아들 민구였다. 솔직히 징검다리 건너 그 마을 얼굴도 막연하나마 끼리끼리 아는 얼굴이었지만.
“잡히먼 대가리 뽀개진다.”
염전집 덕호의 외마디 소리가 터지자마자 꽁무니 칠 준비를 서둘렀다. 아닌 게 아니라 고무신 밑창으로 담뱃불을 박박 비벼 끈 정달이 형이 징검다리 건너 멧돼지처럼 돌진하면서 산지사방으로 돌멩이 쏟아지는 소리가 우당탕탕 난리가 아니다. 우리들은 사타구니에 방울소리 나도록 풍비박산 도망쳤고 갈마리 아이들의 배꼽 잡는 웃음소리만 뒤통수에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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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정달이 형은 돈이 없어 중학생에 못 들어갔는데 그냥 교복 바지에 박박머리로 중학생 복장을 흉내 냈을 뿐이란다. 그는 신작로 이발소 조수로 몇 달 따라다니다가 고향에 내려와 다시 농사를 배운다고 했다. 마루 아래에 굴을 파서 저장된 생강이 겨울을 지나면 값이 두세 배로 뛸 수 있다며 희망에 부풀기도 했단다. 나중 얘기지만 하천 건너 머슴살이 온 정달이 형과 나는 친해지면서 장기도 두고 오이도 나눠먹었다.
“생강 팔아 돈 벌면 스산 가서 서커스 구경 시켜줄게.”
그건 진짜 신나는 일이어서 정달이 형이 돈 벌 날짜만 손꼽았다. 그건 그렇고.
아이들이 나를 왕따 시켜서 외로웠다. 도망친 조무래기끼리 민화투 치러 민구네 사랑방으로 옮길 때에도 하필 나만 뚝 떼어놓고 가는 것이다. 외톨이가 된 나는 울멍울멍 징검다리 건너 둔치에서 모둠불 놓는 여자들 틈에 끼었다. 동급생 계집애들이 눈을 흘기기도 했으나 다섯 살 더 먹은 현자누나가 감싸줘서 그나마 다행인 줄 알았는데.
“얘는 나중에 장가를 두 번 갈 관상이다.”
놀려대는 동갑내기 계집애들을 막아주는 현자누나의 봉긋한 가슴을 처음 발견한 순간 나는 숨이 콱 막혔다. 이상하다. 그날 밤 천장에 현자누나의 얼굴이 떠도는 것이다. 이듬해 서울 돈암동 탁구장 식모로 떠날 때까지 그 누나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사무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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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있다. 그 정달이 형은 대밭집 머슴살이 새새틈틈이 갈마리 생강굴도 관리하더니 아, 생강굴에 떨어져 죽은 것이다. 바닥 습기로 생강이 상하면서 가스가 꽉 찬 걸 깜빡하고 사다리 타고 내려가다가 굴러 떨어지더니 다시는 올라오지 못했다. 스산 서커스 구경 시켜주겠다는 약속도 그렇게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더 진한 외로움에 시달리던 어느 신새벽 나 혼자 울멍울멍 연을 날렸던 것 같다. 밤에는 아무도 모르게 굼불을 놓고 몸을 데웠다. 그렇게 나는 그렇게 열한 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