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례
1. 청계천이라는 이름
2. 청계천의 정비와 준설
3. 가산(假山)
4. 청계천의 생활 문화
5. 청계천의 하수도화
6. 청계천본류의 다리 위치와 그에 얽힌 이야기
《청계천이라는 이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성부 산천 개천조(開川條)에 '백악(白岳) · 인왕(仁王) · 목멱(木覓)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합쳐져 동류(東流)해서 도성을 옆으로 관통하여 세 개의 수구(水口)로 빠져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가는 흐름이다.'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으며, 개천을 삼각산 · 백악 · 인왕산 등과 동렬(同列)에 두어 하나의 고유명사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한경지략((漢京識略)』산천 개천조에도 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설명과 같이 서울 안팎의 다른 산천들과 개천을 동렬에 다루면서 '송경지천수(松京之川水) 역명개천(亦名開川) 사시이기명이(似是移其名耳) '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 즉 개성의 천류(川流)도 개천이라 했으니 서울의 개천이란 이름은 개성에서 옮겨온 것이리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조선시대 모든 고을에서 개천이란 낱말을 썼으며 아직도 쓰이고 있으니 개천은 결코 서울에서만의 고유명사가 아니며, 배수가 잘 되도록 어느 정도의 인공이 가해진 천류(川流) 즉 큰 규모의 인공하수도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순전한 자연천류(自然川流)는 이를 개천이라 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사람의 이 '(開)'한 '천(川)'이어야 하고 구거(溝渠:도랑)보다는 규모가 큰 것을 표시하는 낱말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청계천(淸溪川)이라는 이름은 일제 초(1910년대)에 서울의 지명을 개정할 때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시대 때는 단순하게‘개천(開川)'으로 불리었으며, 모든 공문서에도 개천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조선하천령(朝鮮河川令)'이 제정되면서 상류인 경복궁 서북의 청풍계에서 흐르는 '청풍계천(淸風溪川)'을 줄여서 청계천이라 한 것으로 생각된다.
《청계천의 정비와 준설》
한성의 가장 큰 지형적 약점은 남산이 높기 때문에 빗물이 한강으로 잘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큰비만 내리면 개천의 물이 범람하여 다리가 떠내려가고, 이재민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태종은 한성에 환도한지 3개월 후인 6년 정월에 궁궐 건설에 동원된 장정 3,000명 중 600명을 한성부에 나누어 개천 굴착공사에 종사시켰다 . 이어 9월에도 중앙정부의 관리들로 하여금 과품(科品)에 따라 일꾼 수명씩을 출역(出役)하게 하여 개천을 정비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정비가 되지는 못 했다. 태종 7년 5월부터 다시 수해를 입기 시작하여 거의 매년 되풀이되었다.
태종실록에「큰비로 도성 안에 물이 넘치고 종루(鐘樓)의 이동(以東)에서 흥인문까지 사람의 통행이 막혔다」는 등의 기사가 보인다. 태종 10년의 경우 한 해 동안에 5월, 7월, 8월의 세 차례에 걸쳐 큰 홍수 피해를 겪었다.
그리하여 태종 11년(1411) 말에 개천의 대공사 계획을 수립하고 정부에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여 다음 해 정월부터 공사를 착공하였다. 군사들과 충청·강원·전라도 일대에서 동원한 사람들 및 부근의
백성들을 포함하여 약 52,800여명의 인원을 동원, 만 1개월만에 하상을 파내고 하폭을 넓혔으며, 돌과 나무로 제방을 쌓아 도읍지로서의 환경조성을 새롭게 하였다.
당시의 공사내용으로는 첫째, 장의동에서 종묘 입구까지의 제방 축조공사로 문소전 앞과 창덕궁 앞에는 석축제방을, 종묘 입구에서 수문동[창덕궁 궐문 앞]까지는 목축제방을 축조하였다. 둘째, 대광통교·소광통교·혜정교를 돌로 교체하는 교량공사 및 호안공사(護岸工事)이며 셋째, 치수 및 범람을 방지하는 일대 준설공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태종 때의 개천대역(開川大役)이 있은 지 10년 만인 世宗 3년(1421) 6월 7∼9일 물을 퍼붓는 듯한 큰비가 계속 내려 많은 익사자를 내었는데, 6월 12일에도 큰비가 내려 개천이 범람했다. 세종은 한성의 배수시설을 보완하는 공사를 해 나갔다. 세종 16년(1434)에 이현로(李賢老)가 풍수설을 이용하여‘왕도의 명당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개천을 청결하게 하여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오염물을 투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고, 또한 집현전 교리 어효첨(魚孝瞻)도 상소를 올려 준설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다시 한차례 준설공사를 단행하였다. 세종은 태종 때와는 달리 일시에 큰 공역을 일으키지 않고, 세종 4년 1월부터 16년 2월까지 12년간에 걸쳐 농한기만 이용하여 꾸준히 보수·확장을 거듭함으로써 개천의 배수기능을 완비했던 것이다.
이후 330여 년간 도성내의 유일무이한 하수로인 청계천은 개수되지 않고 방치되어 영조 때에 이르러서는 물길에 쓸려 내려와 매립된 토사가 거의 양안 도로와 수평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장마 때는 오염된 물이 주택가로 범람하며 청계천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명과 가옥의 피해가 극에 달하였다. 나아가 영세민들이 시체를 개천에 버려 시신이 그대로 부패하여 악취가 멀리까지 이르는 등 위생상으로도 불결하기가 상상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영조 36년(1760) 2월 18일 개천에 대한 준설공사를 전격적으로 실시하였는데 이 때의 공사는 규모 면에서나 비용 면에서 조선이 창건 된 이후 가장 큰 준설공사였다. 당시에 인부 5만 명과 평민 15만 명이 동원되어 돈 35,000여 냥, 백미 3,300여 석의 큰 자금을 들여 57일간 공사를 실시하여 같은 해 4월 15일 완성하였다. 이때 장기간에 걸쳐 수해의 참화를 겪고 불결함을 지켜보았던 도성의 주민들도 1만여 명이 자원하여 참석하였고, 양반들도 일꾼들을 스스로 보내왔으며, 경기도 주민과 각 지역의 승려들까지도 부역에 참가하였다. 이 공사는 조선이 개창된 이래 도성의 축조와 궁궐 건립 이후 최대 규모의 공사였다. 영조는 당시의 준천 과정을 직접 참관하여 살펴볼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의 두드러진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공사가 완료된 후 영조는 상설기관인 준천사(濬川司)를 수표교와 화교 중간 개천 북쪽에 설치하여 개천의 개수와 준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청계천변에 가설된 수표교의 교각에‘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글자를 각인하여 차후 개천을 준설할 때는 반드시 이 글자가 완전히 보이도록 하였다. 홍수가 발생할 때 이 글자가 보이지 않으면 인근의 주민들을 대피시켜 인명피해를 줄이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준설공사 이후에는 석축공사를 시작하여 13년 만인 영조 49년(1773) 8월 6일에 준공을 보았는데 이 공사는 조선 건국 초기 도성 축조에 비유될 만한 일대 토목공사였다. 이 석축공사가 완성된 이후에 준천사에서는 목편[木片:나뭇조각)을 세워 매년 보수를 단행하였으나 견디지 못하였으며, 개천 양 둑에 수양버들을 심어 호안(護岸)을 시도하기도 했다.
영조 때의 청계천 개수공사는 호안과 준설에 역점을 두어 실시되었으며 아울러 유로(流路) 변경공사도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공사가 실시되기 22년 전인 영조 27년(1751) 제작된 도성도에는 개천이 자연유세에 따라 다소의 굴절이 있었으나 본 석축공사 이후의 각종 도면에는 직류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순조 33년(1833) 2월 22일에 다시 준설공사에 착수하였는데 이해는 마침 흉년으로 민폐를 피하여 각 군영에서 공사를 담당하였다. 철종 및 고종시대의 준설상황을 보면 철종 7년(1856)에 경복궁 앞을 흐르는 물줄기를 개축하였으며, 고종 26년(1889)에 또 다시 왕명으로 준설공사를 실시하였다. 이때는 준천사가 폐지된 후이므로 한성의 별영(別營)으로 공사진행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갑오개혁 이후 정식으로 한성부에 준천의 업무가 이관되었으며, 1897년에는 마차회사(馬車會社)가 설립되어 준천의 업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1908년 한성부의 주관하에 마지막으로 준천이 실시된 뒤 일제강점기로 넘어간다.
한성부 시대의 하수시설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을 성 밖으로 배출시키기 위하여 동대문 근처에 세 군데의 수구를 설치하였다. 첫째는 청계천 본류의 물을 배출하기 위하여 설치된 다섯 개의 수문을 가지고 있는 아치형 교각인 오간수다리이고, 둘째는 남산 동쪽의 장충단 방면에서 동대문운동장의 북서쪽으로 유입하는 물을 처리하기 위해 을지로 6가 18번지 부근에 있었던 이간수다리이며, 셋째는 동대문 바로 남쪽 부분에 설치된 수문이다. 오간수다리는 광무 11년(1908) 당시 토목국장이었던 유맹(劉猛)이 청계천을 흘러 내려오는 토사와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는 미명하에 헐어버리고 신식 다리를 놓아 홍예문으로 다섯칸이나 되는 아름다운 자태는 이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가산(假山) 》
개천(開川)을 준설(濬渫)하는데 따라서 생기는 토사(土砂)는 이를 한두 군데에 모아 쌓아 둘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처럼 대량 운반용 차량같은 것이 있었다면 그 때마다 운반해서 버릴 수도 있고 또 저습지(底濕地)를 메워 택지(宅地)로 개발하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운반해 가려고도 했겠지만, 당시의 사정은 그렇지가 못했으니 준설로서 생기는 토사는 그 근처에 모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작은 고을의 경우는 그 양도 적을 수 있지만 서울 개천의 경우는 모아 둔 토사만으로 몇 개의 산더미를 이루었는데 이것을 가산(假山) 혹은 조산(造山)이라고 불렀다.
조선왕조 전기에도 도성(都城) 수구내(水口內) 훈련원(訓練院) 동북에도 수북(水北) · 수남(水南)에 각각 한 개씩의 조산(造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왕조 전기에 있었다는 조산은 그것을 소개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지기(地氣)를 모아두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듯이 풍수지리설의 이른바 비보(裨補)인 듯 하며 조산한 흙은 개천공사 때 나온 토사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후기에는 이런 조산이 남아 있었다는 기록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아마 나지막한 소조산(小造山)이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퇴락해서 평지화(平地化) 된 것으로 생각된다. 개천변의 가산은 영조(英祖) 경진년(庚辰年) 후의 그것이 규모도 크고 그 수도 여러 개나 되어 장안주민(長安住民)들이 가산 또는 조산(造山)이라 불렀던 것이었다.
영조 36년 4월 10일 개천 준설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왕이 봉조하(奉朝賀:조선시대 전직 관원을 예우하여 종2품의 관원이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 유척기(兪拓基)에게 이 공사의 성과를 묻자, 그는 준설로 생긴 토사를 지금과 같이 개천의 양안(兩岸)에 방치해 두었다가 비가 내리게 되면 이것이 무너져 천거(川渠)와 도로에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모처럼 실시한 역사(役事)도 헛되이 되어 버리므로 거액을 들여서라도 이 토사를 다른 곳으로 운반해야 된다고 대답하였더니 왕이 이를 듣고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로는 영조 경진년의 준천시에 처음에는 준설로 인한 토사를 처리할 계획은 세우지 못했고 따라서 개천의 양안에 무질서하게 쌓아 모아 둔 것 같다. 그런데 봉조하 유척기의 지적에 접하자 왕은 거액을 들여서 원거리로 운반해 갈 수도 없고 해서 이들을 수구문(水口門) 근처에 크게 한 두 군데로 집중시키도록 함으로써 가산처럼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가산은 특별히 축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고 풍우(風雨)를 맞으면서 토사가 흐르고 날려서 약간씩 허물어지고 낮아졌을 것이며 그 다음 준천 때 다시 그 자리에 토사를 모아 종전의 그것보다 좀더 큰 산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순조 32년 9월의 기록에 비변사(備邊司)에서 다음해 봄에 실시할 준천계획을 보고받고 왕은 모든 것을 경진년의 준천사목(濬川司目)을 참고하여 그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한 구절 중에 '어디에 조산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도 경진사목을 참고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라고 해석된다.
이렇게 개천의 준설을 할 때마다 그 토사를 쌓아 올려 이것이 완만하나 비교적 큰 언덕을 이루었으니, 오늘날의 청계천6가의 양측, 남측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국립의료원을 거쳐 방산동 일대에 걸쳐서 하나의 산 언덕이 생겼고 그 맞은 편 즉 개천의 북측에는 동대문종합상가가 입지하고 있는 일대에도 생겼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이 조산을 나지(裸地)로 두면 보기가 흉하기 때문에 나무와 화초를 심게 되었다. 1914년에 서울의 지명을 새로 정할 때 속칭 조산동(造山洞)이라고 불려 오던 지구의 조산에 심어놓은 꽃 향기가 좋아서 이 곳을 방산동(芳山洞)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북측의 조산은 광무(光武) 2년(1898)에 그 자리에 전차 차고를 세우면서 대부분 철거했으며 남안의 것은 1918년경에 현 국립의료원 자리에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전신)를 짓고 1921년 그 서편에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를 세울 때에 모두 헐어버렸고 그 흙은 훈련원 마당에 뿌리기도 하고 종로의 도로 개수 때 성토용으로도 썼다고 한다.
《청계천과 생활 문화》
한편 조선시대 청계천은 도성 문화의 중심지로서, 생활터전으로서도 그 역할을 다하였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각종 문화는 다리에서 행한 답교놀이와 편싸움·연등행사 등이 성행하였고, 생활터전으로서는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던 하층민과 거지들의 거주지로서, 개천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던 아낙네들의 빨래터로서, 어린이들의 목욕장소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한경지략』 교량조에 의하면 서울의 거지움집이 대개 종루거리의 대광통교에서 태평교에 이르는 사이에 있는 여러 다리 밑, 즉 대광통교·장통교·광제교·수표교·하랑교·새다리·효경교·태평교 등 청계천 본류 상에 놓여진 다리 밑에 있었다. 그러므로 해마다 섣달 추울 때가 되면 임금께서 친히 선전관(宣傳官)을 보내는 한편 호조에 명하여 쌀과 포목을 나누어 주어 위로하곤 하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잘 지내고 따뜻한 봄을 맞게 한 은혜’라고 임금의 은덕을 찬양하였다. 청계천 다리의 거지떼는 비단 조선시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으며,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 거지들의 집합장소가 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청계천이 장마로 인해 한차례 물이 불어나고 난 이후 오물이 씻겨 내려가 물이 맑아지면 동네 아낙네들이 빨래를 가지고 개천으로 모여 들었다. 물론 서울 시내에 청계천에서만 빨래를 한 것은 아니고, 청계천의 지류로서 북악과 인왕산 및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에서 서민들이 소규모의 빨래를 하던 곳은 많다. 그러나 비교적 큰 빨래는 주로 청계천과 도성 밖의 성북천 등지로 모여들었다.
《청계천의 하수도화》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서구 열강들의 침입과 조선 내부의 급진적인 변화로 자주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일본제국주의가 총칼을 앞세운 상태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억지로 맺은 조약이란 뜻으로 1905년 11월 9일에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을 말함)을 체결하였고, 식민지로 전락된 후 한성(漢城)을 저들 마음대로 일본의 동경(東京)의 꼬리글자인 경(京)자를 떼어다가 경성(京城)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을 하게 된다.
개항 이후 서울에서 서구 열강들과 동아시아의 중국 및 일본이 주로 거주하였던 곳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그 남쪽 일대와 서쪽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그 북쪽 지역은 조선의 문화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그 남쪽은 외래문화가 정착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후 일제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많은 전각을 헐어버리고 조선총독부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청계천을 경계로 한 문화의 양극현상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 생계를 위해 농촌을 떠나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은 도시빈민층을 형성하면서 청계천 제방을 중심으로 무허가 건물을 짓고 생활하였다. 특히 광교에서 수표교 사이의 청계천 남쪽 지역은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하천변의 인구 증가는 하천의 오염을 가중시키고, 생활하수의 무단 배출로 인해 여름이면 하수가 주거지로 역류하여 전염병 발생의 근원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변 위에 누상가옥을 짓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이들은 홍수 때면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일제는 영원한 조선 지배를 위해 청계천을 하수도 기능으로 전락시키고, 홍수로부터 일본인들의 재산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 1918년부터 청계천과 그 지류에 대한 준설작업에 착수하였다. 따라서 당시 준설의 중심이 되었던 곳은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청계천 남쪽 일대의 지류에 집중되었다. 예를 들면 청계천 지류 이외에는 용산의 만초천[옛날에 덩굴풀이 많아 만초천(蔓草川)이라고 했음] 일대에 대한 개수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당시 주요 역점사업은 청계천 본류의 복개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청계천의 지류들을 개거식 또는 암거식으로 개수함으로써 원활한 하수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1918년부터 1937년까지 서울시내에서 청계천을 중심으로 추진한 하천 개수현황은 총 연장 225,024m이며, 이 가운데 암거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10만 6,629m, 개거식으로 개수된 것은 11만 8,394m이다.
일제강점기 청계천 본류에 대한 복개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37년부터이다. 이 시기는 일제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에 한 축을 담당하던 때였으므로 조선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고 나아가 서울을 대륙 침략의 중심적 병참기지로 육성하고자 하던 때이다. 따라서 군수물자의 신속한 이송을 위한 교통로의 확보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도성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복개하여 도로를 확장함으로써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37년부터 광화문우체국 앞의 대광통교에서부터 청계천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류되는 삼각지점인 광통교까지 복개공사가 추진되어 1942년에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이후 나머지 구간에 대한 복개와 개수공사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전쟁이 패망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는 정치적 혼란기로 건설 전반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따라서 서울시 하수로는 거의 방임상태였으며 하수로 유지사업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의 재정상태였다. 이어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역사상 유래 없는 참화를 당하였고, 12,400m의 하수로 시설도 피해를 보았다. 청계천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를 전후하여 근 10년간을 방임상태로 두어 토사의 매몰이 극심하였다. 이에 1949년에 광교에서 영미교까지 연장 13Km를 3개 공구로 분할하여 9월 30일 동시에 하도 개수공사를 착수하였으며, 1950년 3월중에 준설을 완료하여 계획하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해에 한국전쟁의 발발로 모든 건설사업이 중단되었으며, 1950년 170만명이었던 서울시 인구가 1951년에는 불과 60여만명에 이르러 계획적인 하천 개수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53년 환도한 이후에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현실적으로 하천정비와 복개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4년에는 5,256만환을 투입하여 청계천을 포함한 하수도 개수를 추진하였고, 1955년에는 광교 상류의 135.8m의 청계천 암거공사를 실시하여 일제강점기에 종로구 계동에서 광교 사이의 일부를 복개한 후 첫 번째 복개공사를 실시하였다.
이후 청계천에 대한 본격적인 복개공사는 1958년 5월 25일에 착공하여 1961년 12월에 완공하였다. 당시의 청계천 복개공사는 광교에서 동대문 오간수다리(평화상가측)까지 시내 한복판을 가로 흐르는 길이 2,358.5m, 폭 16∼54m의 청계천을 철근 콘크리트로 복개하였다. 간선도로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청계천 복개도로는 서울시정이 이룩한 건설사업 중 획기적인 성과의 하나였다. 이 방대한 공사는 완성되기까지 총 16억 6,170만환의 공사비가 소요되고 연 24만 2천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이 공사는 약간의 기자재를 제외하고 모두 국내 자재로 충당하여 국내 기술진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한 때 청계천 주변에 있던 판자집 철거가 지연되어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시민들이 서울시 건설시책에 적극적으로 호응
하여 짧은 시일 내에 완성을 볼 수 있었다.
그 후 1965년부터 1966년까지 동대문의 오간수다리에서 제2청계교까지의 구간이 복개되었고, 오늘날 마장철교까지의 복개구간은 1978년에 성되었다. 그리고 마장철교 부근의 복개지에 조성된 주차장 견인소에서부터 중랑천과 합류되는 지점까지는 복개되지 않은 채 흘러가고 있다.
《청계천 본류의 다리 위치와 그에 얽힌 이야기》
1) 모전교(毛廛橋)
서린동에서 무교동으로 통하는 네거리 지점 곧 무교동 3번지 북쪽에 있던 다리이다. 이 다리 모퉁이에 토산(土産) 과일을 파는 가게가 있었으므로 모퉁이가게다리, 한자로 우전(隅廛)다리라고 하였으며, 달리 모전교·모교(毛橋)라고도 했다. 태종 10년(1410)에 돌다리로 가설하였으며, 당시에는 신화방동 입구교(神化坊洞入口橋), 즉 신화방 동구다리라고 불렀다가 영조년간에 작성된 「도성지도(都城地圖)」에 모전교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한성부가 상업도시로 발달하면서부터 모전교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광통교(廣通橋)
서린동 124번지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지금의 보신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 네거리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에 놓여 있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광통방(廣通坊)에 있던 큰 다리였으므로 대광통교(大廣通橋)라 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북광통교(北廣通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대광통교,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광통교, 「수선전도」에서는 대광교(大廣橋) 등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같은 다리를 나타내는 말이며, 일상적으로 대광교 혹은 광교라고 불러왔다.
이 다리에 놓여진 돌들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묘를 황화방 정동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기고 당초 묘에 썼던 돌들을 옮겨 다리를 건설하는데 사용하였다. 왕비의 묘에서 잘 다듬어진 돌들을 다리를 건설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조선초기의 정치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즉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에게 넘겨 주려 하자 전처 소생인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방석을 죽이는 사건인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이 자신의 계모인 강씨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묘에 사용되었던 돌들을 다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당시 이방원의 강씨에 대한 미움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광교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는 많은 상가들이 있어 서울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즉 닭과 계란을 파는 가게, 갓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대나무를 파는 가게, 갓을 파는 가게, 부인의 머리 장식을 파는 가게, 부인들의 패물과 가락지 등을 파는 가게, 신발을 파는 가게, 물감과 중국 과실을 파는 가게, 칠 목기와 장롱을 파는 가게, 잔치 때 그릇을 세 놓는 가게, 채소를 파는 가게, 솜을 파는 가게, 말총·가죽·초·실·휴지·책 등 잡화를 파는 가게, 말안장·등자·굴레 등을 파는 가게, 서화와 책을 파는 가게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항상 광통교 주위에 모여들어 생필품을 팔고 사곤 하였다.
1958년 광통교를 복개한 이후 다리의 돌에 새겨진 문양을 볼 수는 없지만 매우 정교한 구름무늬와 당초(唐草)무늬, 그리고 한가운데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에 관을 쓴 신장상(神將像)을 돋을새김한 돌들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문양의 돌을 복개된 청계천 내부로 들어가면 아직도 그래도 남아있어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조흥은행 앞에 옛다리를 축소복원한 모형이 있다.
3) 장통교(長通橋)
중구 장교동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이다. 이 근방이 조선시대 장통방(長通坊)이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이 다리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 하여 장창교(長倉橋)라고 불렀고 달리 장찻골다리라고도 불렀으며, 장통교를 줄여서 장교(長橋)라고도 불렀다. 다리 서쪽 기둥에 '신미개조(辛未改造)'와 '기해개조(己亥改造)'의 8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내리는 창동천과 회현동을 거쳐 내려오는 물줄기가 소광통교에서 만나고 다시 남산동천의 물줄기와 합하여져 이 다리 앞에서 청계천의 본 물줄기와 합하여 진다. 따라서 장통교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삼각주를 이루어 넓은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 일대는 일찍부터 도성 안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며,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 보던 경주인(京主人)들의 본거지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중인으로서 개화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선각자적 역할을 수행한 유대치(劉大致)가 장통방 지금의 보신각 뒤편에 살았었다.
4) 광제교(廣濟橋)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광통교와 수표교(水標橋) 사이에 위치했던 교량으로 나와 있어 지금의 장교동 20번지 부근에 있던 다리로 생각된다.
5) 수표교(水標橋)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20번지 사이 청계천 위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세종 2년(1420)에 놓았으며 당시는 근처에 말을 매매하던 마전(馬廛)이 있어 마전교라고도 불렸다. 영조 36년(1760)에 하천 바닥을 파내고 수표교 돌기둥에 '경진지평(庚辰地平)' 넉자를 새겨 준천(濬川)의 표준을 삼고 또 따로 수표석(水標石)을 세워 장마철에 물이 불어나는 상황을 수시로 적어 홍수에 대비하였으며, 수표교란 이 수표석에 유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계천 복개공사 때 철거되어 현재 장충단공원 내에 보존되어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 같이 놓여 있던 수표석주(手標石柱)는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어 청량리 세종기념회관 뜰 안으로 옮겨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수표교 건너에 왕의 영정을 모셔 놓았던 *영희전(永禧殿)이 있었기 때문에 국왕들이 설날·한식·단오·추석·동짓날·섣달 그믐 등 여러 차례 이 다리를 건너 왕래하곤 하였다. 오늘날 장충동에 옮겨져 있는 수표교를 보면 매끈한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엮어 놓았고, 돌난간도 아름답게 꾸며 놓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다리이다.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자연재해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던 도성 사람들에게 강수량의 정도를 미리 알아 대피하도록 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한 다리라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이 다리와 얽힌 이야기로는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장통방에 있던 여염집에서 문 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 궁으로 불러 들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장희빈이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영희전(永禧殿)
남부 훈도방(薰陶坊), 지금의 저동2가에 있었다. 처음 세조의 장녀 의숙공주(懿淑公主)의 저택이었으며 중종 원년(1506)에는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가 출궁 거처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2년(1610)에 개수하여 공
빈김씨(恭嬪金氏)(광해군 생모)의 사당으로 하고 이름을 봉자전(奉慈殿)으로 하였으며 11년에는 태조 · 세조의 어진(御眞)을 남별전(南別殿)에 봉안하였다. 인조 15년(1637)에 중수하고 다시 원종(元宗)의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숙종 3년(1677)에 증건(增建)하고 16년에는 영희전(永禧殿)으로 이름을 고쳤다. 영조 24년(1748)에 다시 숙종의 어진을 제4실에 봉안하고 정조 초년에는 또 영조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철종 초년에 증축하고 또 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매해 오속절(五俗節)(정초 · 한식 · 단오 · 추석 · 동지)\과 납일(臘日)에 제사드렸다.
6) 하랑교(河浪橋)
입정동 6번지와 장사동 208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이다. 이 다리 근방에 하랑위(河浪尉)라는 임금님의 사위가 살았다 하여 하랑교라 불리워졌으며, 후에는 그 언저리에 화류장(樺榴欌)을 파는 가게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면서 화류교(樺榴橋)다리라 하였다. 이를 달리 하리굣다리 또는 하랑교(河浪橋)·하교(河橋)·화교(花橋)라고도 불렀다.
7) 신교(新橋)
장사동 250번지와 중구 입정동 201·211번지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로 하랑교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다리 이름은 『한경지략』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창덕궁과 남산에 있었던 조선총독부를 직선으로 연결하는 다리였다. 새로 놓은 다리라는 의미의 이 다리는 1900년대 이후 서울에서 돌다리를 콘크리트 다리로 바꿀 때 가장 먼저 시행된 다리이다.
8) 효경교(孝經橋)
장사동 153번지와 주교동 125번지·산림동 30번지 사이에 놓여져 있던 다리이다. 이 다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풍교(永豊橋)라 기록되어 있으며, 부근에 눈 먼 장님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속칭 소경다리라고 했고, 이것이 또 변하여 새경다리라고도 불리었다. 또 효경다리라고 불리었으며, 줄여서 효교(孝橋)로 명칭되기도 하였다. 다리의 서쪽 기둥에 '정사금영개조(丁巳禁營改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금위영 군사들이 한 차례 보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9) 마전교(馬廛橋)
종로5가 416번지와 을지로6가 17번지 사이에 놓여져 있던 다리이다. 태종 때는 창선방교(彰善坊橋)라 불렀으며, 성종 때는 태평교(太平橋)라 했다가 영조 때부터 부근에 말과 소를 팔고 사는 가게들이 있었기 때문에 마전교라 하였다. 이는 세종 때 말과 소를 파는 가게들이 수표다리에 집중되어 있어 한 때 수표다리를 마전교라고 불렀음을 상기할 때 조선후기에 이르러 이 가게들이 점차 도성의 중심부에서 변두리로 이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순조 때 이후로는 태평교와 마전교가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또 시장이 주로 한 낮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교(午橋) 또는 오굣다리라고도 불렀다.
10) 오간수교(五間水橋)
이 다리는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즉 서울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으로 된 구멍을 만들었고, 그 위로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가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을 설치한 다리이므로 오간수다리라 불렀다.
이 오간수문은 물길이 잘 빠져가기 위해 가설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예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었다.
11) 방목교(方木橋)
창신동 323번지와 숭인동 83번지 사이에 있던 다리이다. 『대동지지』에는 동대문 밖의 첫 번째 다리로 기록되어 있다.
12) 영도교(永渡橋)
숭인동 234번지와 상왕십리 748번지 사이 현 동묘(東廟) 남쪽 청계천 하류에 있던 다리이다. 영미동에서 내려오던 하천 끝에 놓인 다리였으므로 영미(永尾)다리라고 불렀다. 이 다리에는 단종에 얽힌 슬픈 사연이 남아 있다. 즉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향갈 때 단종의 비(妃)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 다리까지 배웅나와 서로 이별한 뒤에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성종 때 살곶이다리와 함께 이 다리를 보수하고 왕이 영도교라 하였다. 이 후 고종 때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이 다리를 헐어버리고 그 돌을 석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뒤 나무로 다리를 놓았으나 장마에 떠내려 갔고 개천 바닥에 큼직한 돌을 놓아 징검다리와 같이 이것을 밟고 건너 다녔다고 한다.
청계천 본류에는 앞에 열거한 12개의 다리 이외에 위치와 다리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크고 작은 다리가 10여 개가 더 있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많은 이름은 배다리로 처음에 다리를 놓지 않고 작은 배를 이어 다리를 놓은 것에 연유해 후에 그 곳에 다리를 놓고는 배다리라고 했다. 더불어 둥네 이름도 주교동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