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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안동땅 서미동(西薇洞) 가는길
매화 추천 0 조회 8 12.03.20 00: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미동(西薇洞) 

34번 국도가 지나가는 굴다리
서미동(西薇洞)가는길 풍산읍사무소에서 서미동까지는 7.2km이다 만운리와 신양리로 가는 길로 접어들어 34번 굴다리를 지나 왼쪽으로 100여미터 가면 매곡교가 나오고 매곡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 한다.
어란으로 가지말고 신양으로 조파라는 표지석 쪽으로 들어서지 말고 곧장 바로 정면으로 중앙고속도로가 하늘에 걸려 있는데 그 밑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영의정문충공서애유선생유적비
임란을 극복한 유성룡선생이 낙향하여 1606년3월 서미동에 초가인 농환재弄丸齋를 완성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그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 이곳 서미동 입구에 유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유적비를 지나면 신양못이 보이고 개울에 걸린 다리 끝에서 왼쪽은 오치동 가는길이고 오른쪽 언덕길은 서미동 가는길이다. 서미동 가는 산길로 접어들자마자 오른쪽 아래의 논둑에 커다란 바위 몇개가 눈길을 끄는데....
은자암(隱者巖)이라는 글씨가 가로로 새겨져 있는 바위, 은절 바우 은隱 자와 암巖 자는 초서, 자者 자는 해서이다.
경진춘부사김학순서(庚辰春府使金學淳書) 경진년은 1820년으로 김학순은 안동부사로 재직중이었다. 그는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서미동을 찾았다가 김상헌의 정신을 오래도록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 바위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김학순은 청음 김상헌의 7대손이고, 김조순과 사종간四從間이다. 해동수양(海東首陽) - 백이 숙제(이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먹으며 연명하다 굶어 죽었다는 고사에서 이제의 지조와 절개를 본받고 실천하기 위해 이땅에 들어 왔으므로 이곳은 해동(우리나라 곧 안동을 지칭)의 수양산임을 비유한 글 산남율리(山南栗里) -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연명(도잠)의 집이 평택 율리이고 산남山南은 교남嶠南과 같은 뜻으로 영남을 가리킨다.
느티나무가 있는 서미동 삼거리
오지중에 오지, 하늘아래 첫동네인 서미동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산마루의 중대 바위이다.
중대(中臺)바우
50여 년 전만 해도 마을 뒷산의 중대 바위 아래에 중대사가 있었다고 한다. 절집 네 채에 누각 한 채가 있었으나, 이 고을의 어느 유력자가 불당 마루를 헐고 그의 조상의 무덤을 조성하면서 절이 뜯겨 나갔다고 한다. 부처가 앉은 자리가 명당이란 소문을 듣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절은 헐려지고, 그 곳에 묘를 쓴 사람도 명당의 덕을 입기는커녕 오히려 집안이 망하는 꼴이 되고 말았단다. 중대사가 있었다는 중대 바위는 마치 사람의 머리에 쓰인 무슨 관(冠)처럼 마을 뒷산 마루에 불쑥 솟아 있다. 그 바위는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호령하는 장수처럼 위엄 있는 모습을 하고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을 안으로 작은 개울이 흐르고 개울을 따라 나있는 길을 올라가다 보면..... 조를 말리는 할머니의 손길이 한가롭고 그리고 서간사西磵祠가 나온다.
서간사(西磵祠)
서간사가 청음 김상헌과 관련이 있지만,김상헌이 지은 것은 아니다.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의 굴욕으로 안동으로 내려와 소산의 청원루에 거처했다. 그러나 망국의 선비가 사는 마을이 너무 번화하고 거처하는 집 역시 너무 화려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이곳에 두어 칸의 초가를 엮어 목석거(木石居),만석산방(萬石山房)이라 이름짓고 나라를 잃은 분노를 달랬다.
서간사 표시판
"경북마을지"에 따르면 헌종10년(1669) 지방 사림에서 선생을 추모하고 제향하기 위해 서간사를 세워 위패를 봉안 했다고 한다. 정조 10년(1786)에 서간사라는 사액이 내려졌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강린당(講麟堂)
서간사에는 편액도 걸려 있지 않고 사당도 없으며 강당인 강린당만 날로 퇴락해가며 외로이 서 있다. 강린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대청을 두고 좌우로 1칸의 방이 있으며 전면은 툇마루로 되어 있다.
청음김선생목석거유허비(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
빗집 바우 위에 우뚝하게 솟은 물체, 바로 비각이다. 높이 171cm , 넓이 72cm, 두께 21cm인 비석은 숭정崇禎(1628!1644) 기원후 83년(숙종 36년,1710) 경인庚寅 3월에 세워 졌다고 기록, 1710년(숙종 36년) 봄에 안동부사 이정신(李正臣)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인 지촌 이희조(芝村 李喜朝)가 지었다. 김상헌 사후 불과 58년, 김상헌은 일찍부터 존숭받았던 것이지 장동 김씨가 실권을 잡아 세도정치를 함으로써 높임을 받게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석거(木石居)
경진중춘선생칠대손본부사학순근서(庚辰仲春先生七代孫本府使學淳謹書) 1820년, 경진년 봄이 한창일 때 선생의 7대 손인 안동 부사 학순이 삼가 씀 바위와 비각이 그려내는 모습은 산마루의 중대 바위를 아래로 옮겨 놓은 듯한 형상이다. 비각은 사방 한길이 넘는 바위 위에 있기 때문에 사다리가 없으면 볼 수 없다. 처음부터 비석을 바위 위에 세운건 확실한데, 언제쯤 비각이 세워졌는 지는 알 수 없다.
서간사 전경
서미는 처음에 서미西美 였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극복한 유성룡선생이 서미동에 들어와 징비록을 집필하면서 이화梨花로 바꾸었는데, 그 뒤 40여 년이 지나 이화동에 들어온 김상헌 선생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뜯던 백이 숙제의 정신을 기린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서미西薇 로 바꾸었다 한다.
국도변의 억새 소산리의 청원루 <참고자료 : 안동 풍수기행, 돌혈의 땅과 인물 - 이완규 지음> 청계천의 밤 / 남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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