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은 월정사에 보관되어 있는 사적기(事蹟記)로서 2종씩 갑(甲)ㆍ을본(乙本), 병(丙)ㆍ정본(丁本)의 전체 4종류가 전해진다.
갑ㆍ을본에는 고려시대와 관련된 사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서 오대산 및 월정사에 관한 기록을 옮긴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민지(閔漬)에 의해 고려 태조와 관련된 사적을 조선 초기에 그대로 옮긴 내용도 함께 싣고 있다. 특히 을본은 갑본을 바탕으로 하여 1902년 당시 주지인 현오(玄午) 스님의 주관에 의해 만화관준(萬化寬俊)ㆍ낭응경왕(郎應鏡王) 스님이 기존의 사적에 내용을 더하여 편찬하였다.
이『오대산사적』에는 「사리를 봉안하고 사찰을 창건한 제일조사 자장율사」ㆍ「오대산의 성적과 신라 정신태자 효명태자의 전기」ㆍ「오성을 친견한 신효거사의 사적」ㆍ「고려 민지(閔漬)의 월정사 1차 사적기의 발문」ㆍ「조선조 본산사적」ㆍ「선원보략 봉안사적」ㆍ「산중산기」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1) 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
삼가 『석보상절(釋普詳節)』을 살펴보니 “위대한 성인 석가모니불이시여! 그 성인다우신 바는 실로 성인 가운데 성인이시고 하늘 가운데 하늘이시로다. 자비의 마음을 가지시고 중생을 제도함으로써 법을 삼아 육도(六途) 사생(四生)을 제도하시고자 중천축(中天竺) 가위국(迦衛國) 정반왕궁(淨飯王宮)에 나타나시니, 곧 3천대천세계의 하나로서 염부제(閻浮提)의 한가운데가 된다”고 하였으며, 『보료경(普耀經)』에서는 “부처님께서 2월 8일에 무우수(無憂樹) 아래에 내리시어 두루 일곱 걸음을 걸으신 후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에 오직 내가 홀로 높다’고 사자후를 토하셨다” 한다.
이 때문에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소왕(昭王) 24년 갑인 4월 8일 밤에 오색 기운이 청홍색을 이루자 소왕이 태사(太史) 소유(蘇由)에게 물었다. ‘이 무슨 상서인가?’ ‘서방에 대성인이 태어나셨습니다’고 대답하였다” 하며, 또 『열반경』에서는 “여래께서 구시라국(拘尸羅國) 발제하(跋提河) 쌍수(雙樹)의 사이로 나아가 2월 15일 열반에 드셨다” 한다.
따라서 『주서』에 이르기를 “목왕(穆王) 53년 임신 2월 15일에 흰 무지개 11줄이 남북으로 관통하자 목왕이 태사 호다(扈多)에게 물었다. ‘이 무슨 상서인가?’ ‘서방에 대성인이 열반에 드신 것입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1천년 후에 불교가 중국에 전해질 것입니다.’ 이에 돌에 새기어 동교(東郊)에 묻었는데 한 명제 때에 이르러 그 돌이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부처님께서는 주 소왕 24년 갑신년에 나타나셨고 목왕 53년 임신년에 열반에 드셨다. 또 열반에 드실 즈음에 만수실리(蔓殊室利:문수보살의 별명)를 돌아보면서 명하셨다.
“너는 나의 정골(頂骨) 사리와 염주와 가사 등의 신표를 가지고 중국의 청량산(淸凉山)으로 들어가 기다리도록 하라. 그러면 1천년 후에 푸른 옷을 입은 사미승 자장(慈藏)이 동쪽에서 올 것이니, 그때 이 신물을 전하도록 하라. 그가 이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면 복이 되고 세상에 도움이 되어 일체 중생이 이로움과 안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중천축국(中天竺國)이라는 나라는 섬부주(贍部州)의 한 가운데 있기에 삼세여래께서 모두 그 곳에 나타나시어 보고 듣는 이로움을 지어 주신 후에 중생의 기연에 따라서 법을 전하는 데 더디함과 빨리함이 있었다.
동토에 불법이 전해진 연원을 논하면 처음엔 미세하였다가 점차 현저하기에 이르렀다. 진시황 때 서역 스님인 실리방(失利防) 등이 불경과 사리를 받들고 찾아와 진시황에게 올렸는데, 진시황은 크게 노하여 실리방 스님 등을 옥중에 가둬버렸다. 이에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옥을 깨뜨려 스님을 구하자 진시황은 몹시 놀랐다. 이에 황금과 옥을 주어 스님들을 다시 돌려보냈으며, 한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서는 위청(衛靑) 곽거병(郭去病)이 곤야왕(昆倻王)을 정벌하면서 12분의 금인(金人)을 노획하여 올리자 한 무제는 감천궁(甘泉宮)에 봉안하여 제사를 올렸으며, 성제(成帝) 때에 이르러 유향(劉向)이 불경 10여 책을 얻어 선전(仙典)에 넣었다. 이것이 곧 불법이 흥성할 조짐이었다.
한 명제(明帝) 영평 11년(68) 어느 날 밤 , 1장(丈) 6척(尺)의 키를 가진 신인(神人)이 일월광(日月光)을 목에 차고서 대궐 뜰로 날아오는 꿈을 꾸었다. 그 이튿날 명제가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이는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질 길몽”이라 답하여, 중랑장ㆍ채암 등을 서축으로 보내서 불법을 물어오도록 하였다. 이에 법란ㆍ마등 두 법사를 만나 낙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마(白馬)에 석가모니불의 탱화와 42장의 불경을 싣고 이르렀다. 채암 등이 돌아와 명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명제는 크게 기뻐하여 절을 세우고 스님에게 도첩을 내려 마침내 불교가 성행하게 되었다. 이는 별전(別傳)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로부터 제왕들이 불교를 높이 받들었고 재상들이 흠양하였다.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양(梁)나라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신라에 보내오자 백관들이 교외로 나아가 맞이하였다. 그 이후로부터 사찰이 즐비하였고 불상이 찬란하였으며 신승(神僧)이 사이사이로 태어났다. 빼어난 스님들이 줄이어 배출되어 불법을 전파함으로써 불교가 성행하여 나라의 복이 되고 세상의 도움이 되어 그 이익이 한량없었다.
2) 사리를 봉안하고 사찰을 창건한 제일조사(第一祖師) 자장율사의 전기
조사의 속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자장(慈藏)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선종(善宗)이다. 신라 무림공(武林公)의 둘째아들로서 선덕왕(善德王)의 친척이다. 집안은 대대로 정승과 장군으로서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않았으며, 모친이 자신의 품에 유성(流星)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평소부터 불법을 믿어왔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여의었으나 예의를 다해 장례를 치렀으며 3년상을 마친 후에는 높은 산등성이에 머물면서 뜻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 무렵 꿈속에서 두 명의 인도스님이 찾아와 오계(五戒)를 주면서 말한 후 사라졌다.
“우리는 스님을 위하여 계를 주고자 영취산(靈鷲山)에서 왔노라.”
조사는 유발(油鉢)을 떠받드는 것처럼 계를 받들었는데 문득 공중에서 한 소리가 들려왔다.
“홀로 한 몸을 닦는 것이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것만 같겠는가.”
이후로 산에서 내려와 남녀를 묻지 않고 모두 계법(戒法)을 전하여 주었다. 선덕여왕은 선사가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서 재상을 삼으려고 하였으나 조사는 견고한 뜻으로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여왕은 심기가 몹시 상하여 사신에게 칼을 전해 주면서 명하였다.
“만일 명을 따르지 않으면 머리를 잘라 오도록 하라.”
이에 조사는 사신의 앞에 목을 길게 빼면서 말하였다.
“계율을 어기고 사는 것보다는 계율을 지키고 죽은 것만 못하다.”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는 조사를 보고, 사신은 차마 목을 베지 못한 채 돌아와 여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여왕은 태산처럼 변함없는 조사의 뜻을 장하게 여겨 조사의 뜻대로 하기를 허락하였는데, 당시 조사의 나이는 25세였다.
조사는 “피안(彼岸)이 멀지 않는데 어찌 구태여 고국만을 연연할 수 있겠는가”라 생각하고 선덕왕 즉위 7년(638)에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서 위태로운 배에 운명을 맡긴 채, 마음은 먼저 보주(寶州)로 치달리어 당나라에 들어갔다. 중국을 두루 행각하면서 선지식을 모두 친견하였다.
그 후 비로소 오대산 북대에 들어가 제석천왕이 세운 문수상 앞에 풀을 깔고 앉아 열흘 동안 정진하자, 꿈속에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조사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며 범어의 게송을 한 수를 전해 주었다.
발라구자나 / 부리치가나 / 낭가휴사남 / 치리노사나
조사는 게송을 받고서 잠을 깨어 저녁 내내 끊임없이 게송을 외웠는데, 그 이튿날 뜻하지 않게 한 인도스님이 찾아와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문수보살께서 범어로 된 게송을 전해 주었지만 그 뜻을 알지 못하여 매우 한이 되고 있소."
이에 인도스님이 그 게송을 번역하여 주었다.
了知一切法 일체 법을 알고자 한다면
自性無所有 자성은 있는 바 없다
如是解法性 이와 같이 법성을 깨달으면
卽見盧舍那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또한 인도스님은 이어서 말하였다.
“불법을 구하고자 하면 이 게송 한 수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시 부처님의 비라금점(緋羅金點) 가사 한 벌, 백옥 바리때 한 벌, 주패금엽경(珠貝金葉經) 5첩, 부처님의 전신사리 100매, 정골(頂骨), 불지(佛指), 절골(節骨) 사리 등을 전해주면서 말하였다.
“이는 모두 석가모니불의 신물(信物)이니 삼가 잘 보호하도록 하시오. 스님의 고국에 있는 황룡사는 세존과 가섭존자께서 법좌를 마련하여 설법한 곳이오. 숲과 연못에 법좌의 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스님은 이를 알고 있는가. 부처님의 현기(懸記)한 바와 같이 마땅히 탑을 조성하고 불상을 세울 인연이 있을 것이오(위는 원효대사가 지은 本傳에서 나왔음).”
또 말하였다.
“스님의 고국 명주(溟州:옛 강릉) 땅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이 상주하는 곳이라오. 스님은 본국에 돌아가거든 그곳에 찾아가 몸소 친견하도록 하시오(이상은 오대산 本記에서 나왔음). 후일 태백산 칡넝쿨이 얽혀 있는 곳에서 스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오.”
그 말을 마치고 사라져 버렸는데, 인도스님은 바로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 추모하는 마음을 마지못해 이에 태화지(太和池)를 찾아가니 태화지 곁에 정사(精舍)의 석탑이 있었는데, 이는 태화지의 용이 창건한 곳이다. 선사가 탑 앞에 앉아 있으려니, 한 노인이 땅속에서 뛰어나와 말하였다.
“도인은 무슨 일을 구하려고 하는가.”
조사는 말하였다.
“보리(菩提)를 구하려는 것이오.”
노인은 바로 태화지의 용이었는데, 노인은 곧 일어나 예배를 올리고 물었다.
“탑에 관한 일이냐? 황룡사 호법신장은 나의 장자(長者)이시다. 부처님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스님이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세우면 나라의 태평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노인은 말을 마친 후 주옥(珠玉) 등 보물을 받들어 올려, 조사는 이를 가지고 돌아왔다(원효대사가 지은 記文에서 나옴).
일설에 의하면, 태화지의 용이 나와 말하기를 “게송을 해석해준 인도스님은 문수보살이시다. 얼마 전 우리에게 공양을 주어 바다 위 동경(東京)을 다녀왔다. 원컨대 조사 또한 우리에게 7일 동안 공양을 받도록 하라”고 하여 그 청을 따라 공양을 받은 후에 귀국하였다 한다(오대산 本傳記에서 나옴).
643년(선덕여왕 12) 계묘년에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대국통합(大國統合)으로 봉하여 분황사에 주석하도록 하였고, 645년(선덕여왕 14)에 태화지 용의 말을 따라 황룡사에 주석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 명주(현 강릉) 오대산을 찾아가 지로봉(地爐峰)에 올라 부처님의 두뇌사리와 정골사리를 봉안하고 가라허(伽羅墟)에 비석을 세웠다(비석은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그 사적을 기록하고 이어 월정사(月精寺)를 창건한 후 13층 석탑을 세워 사리 37매를 탑심(塔心)에 봉안하였다(전래하는 말에 의하면 優婆國多의 사리탑이라 하지만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다. 이 말은 원효대사가 지은 전기에서 나왔다).
일설에 의하면, 선사가 귀국하면서 인도스님이 전해 준 부처님의 뇌골사리 등은 황룡사에 봉안하고 그 절에 머물면서 공양하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얼마 후 명주 오대산을 찾아가 월정사의 터에 이르러 임시 초막을 세워 3일 동안 머물렀다. 이때 온 산이 음침하여 날이 개이지 않아 산의 모습을 살필 수 없었다. 떠나간 후에 다시 그곳을 찾아와 여덟 자의 방을 창건하고 7일 동안 머물었다고 한다.
큰 소나무 아래 우물을 파니, 한 거사가 갑자기 현신하여 조사와 오랫동안 청담을 나누다가 말하였다.
“스님은 지난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 말을 마치고 곧 사라져 버렸다. 조사는 이에 스스로 꾸짖었다.
“거사는 지난 날 오대산에서 현신하였던 인도스님이다.”
조사는 공중을 향하여 예배를 올리고 곧 태백산을 향하여 칡넝쿨이 얽혀 있는 곳을 찾아가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나무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곳은 문수보살께서 가르쳐 준 곳이다.”
시자에게 말한 후 곧 계를 받아 산 아래로 구렁이를 옮겨 주고 암자를 창건하여 그곳을 살나암(薩那庵)이라 하였다(오늘날의 淨岩寺가 바로 그곳이다). 그 암자를 따라 남쪽으로 1천 보 거리에 신선동(神仙洞)이 있다. 또 다시 암자를 창건하여 상살라암(上薩那庵)이라 하였다.
조사는 두 암자를 왕래하면서 문수보살의 친견을 기다렸는데, 어느 날 비승비속(非僧非俗)의 한 노거사가 떨어진 가사를 걸쳐 입고 칡넝쿨로 짠 삼태기에 죽은 개 한 마리를 담아 가지고 찾아와 시자에게 말하였다.
“자장스님을 찾아보러 왔노라.”
시자는 노거사가 조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 하여 성을내며 지팡이로 내쫓으려고 하자, 거사가 말하였다.
“너의 스님에게 말을 전하고 떠나갈 것이다.”
시자가 들어가서 조사에게 고하니 “미친 사람인데 어째서 쫓아내지 않느냐”고 하였다. 이에 시자가 나와 말을 전하고 내쫓으니 거사가 말하였다.
“돌아가야지! 이제는 돌아가야겠다. 아상(我相: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진 자가 어떻게 나를 볼 수 있겠는가.”
말을 마치고 삼태기에 담긴 개를 땅바닥에 떨어뜨리자 사자법좌(獅子法座)로 변하였고, 그 법좌에 앉아 눈부신 광명을 쏟아내며 허공을 타고 떠나갔다. 시자가 들어와 조사에게 고하자 조사는 법복을 갖추고 그 방광을 바라보니 허공을 날아 만쪽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선사는 열반한 후에 이를 계기로 그곳에서 다비를 하고 돌무더기에 사리를 안치하였다.
3) 오대산의 성적(聖跡)과 신라 정신태자(淨神太子)ㆍ효명태자(孝明太子)의 전기
오대산 자락은 백두산에서 비롯하여 쭉 뻗어 남쪽으로 흘러오면서 굽이굽이 일백 번을 휘감아 돌아 금강산과 설악산을 이루고, 또 다시 굽이쳐 백여 리를 치달려 내려오다가 우뚝하게 하늘로 솟구쳐 마치 훤출한 대장부가 백만 대군을 호령하는 듯 서 있다. 그것이 곧 비로봉(毘盧峰)이다. 그 아래에 수많은 봉우리들이 펼쳐져 있어 마치 성내고 포효하는 듯 빼어난 경치들을 이루 다 셀 수 없다. 대충 들어 말하면 동쪽으로는 만월대(灣月臺), 서쪽으로는 장령(長嶺), 남쪽으로는 기린봉(麒麟봉), 북쪽으로는 상왕봉(象王峰), 가은데는 지로봉(地爐峰)이 있다. 이 때문에 오대산이라 이름하며 그곳에는 모두 제불 보살이 상주하신 곳이다.
옛적에 자장법사가 부처님의 두뇌사리와 정골을 받들어 중대(中臺) 지로봉에 봉안하였다. 그 후로 신령스러운 상서가 사이사이로 일어나 그 가호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어, 혹 재를 올리는 날(齋日)이면 때로는 광명이 쏟아지기도 하였다.
신라의 왕자 정신(淨神)ㆍ효명(孝明) 두 태자가 유람하는 길에 하서부(河西府:현 강릉)에 이르러 대대로 벼슬한 각간(角干)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이튿날 큰 재를 넘어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을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 정유 8월 초5일 형제 두 사람이 함께 이 산으로 들어와 은둔하였다. 그를 따르던 무리 1천 명이 두 태자를 잃어버리고 모두 경주로 되돌아갔다.
정신태자는 중대 남쪽 기슭 진여원(眞如院)의 터에 이르렀을 때 동남쪽에 푸른 연꽃이 피어있는 것을 보고서 그곳에 초막을 엮어 거주하였고, 효명태자는 진여원으로부터 동북쪽으로 600여 보 거리 북대(北臺)의 남산 아래에 이르러 푸른 연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 또한 초막을 지어 거주하였다.
형제 두 사람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공경히 받들다가 동대(東臺)에 올라 가보니 아촉불을 위수로 하여 1만 관세음보상의 진신이 상주하고, 남대(南臺)에 올라가 보니 8대 보살을 위수로 하여 1만 지장보살 진신이 상주하고, 서대(西臺)에 올라가 보니 무량수불을 위수로 하여 1만 대세지보살의 진신이 상주하고, 북대(北臺)에 으르러 보니 석가여래를 위수로 하여 1만 미륵보살의 진신과 5백 대아라한(大阿羅漢)의 진신이 상주하고, 중대(中臺)에 이르니 비로자나불을 위수로 하여 1만 문수보살의 진신이 상주하고, 또 진여원의 가운데에는 문수보살이 매일 인시(寅時)에 출현하여 36가지의 신통 변화를 보여주었다.
때로는 부처님 얼굴의 모습으로,
때로는 부처님의 눈의 모습으로,
때로는 부처님 손의 모습으로,
때로는 부처님 발의 모습으로,
때로는 1만 부처님의 모습으로,
때로는 1만 등불이 빛나는 광채의 모습으로,
때로는 보탑의 모습으로,
때로는 황금 북의 모습으로,
때로는 황금 범종의 모습으로,
때로는 황금 바퀴의 모습으로,
때로는 황금 누각의 모습으로,
때로는 황금 다리의 모습으로,
때로는 황금 동이의 모습으로,
때로는 황금 칼의 모습으로,
때로는 황금 밭의 모습으로,
때로는 은빛 밭의 모습으로,
때로는 황금 방망이의 모습으로,
때로는 보배 구슬의 모습으로,
때로는 오색 원광의 모습으로,
때로는 오색 광명의 모습으로,
때로는 상서로운 풀의 모습으로,
때로는 푸른 연꽃의 모습으로,
때로는 우레가 솟구치는 모습으로,
때로는 집에서 쌀알이 솟아나는 모습으로,
때로는 집에서 오색 광채가 쏟아지는 모습으로,
때로는 지신(地神)이 솟아 나오는 모습으로,
때로는 신통을 부리는 모습으로,
때로는 황금 봉황의 모습으로,
때로는 황금 새의 모습으로,
때로는 참새의 모습으로,
때로는 푸른 뱀의 모습으로,
때로는 하얀 코끼리의 모습으로,
때로는 달리는 멧돼지의 모습으로,
때로는 말이 새끼 낳는 모습으로,
때로는 소가 사자를 낳는 모습으로,
때로는 닭이 봉황을 낳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두 왕자가 이 신통변화를 보고서 아침마다 통에 깨끗한 물을 길어다가 차를 끓여 1만 문수보살에게 공양하였고 밤이면 각자가 자기의 암자로 돌아와 도를 닦았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신라사람들은 두 왕자가 머문 곳을 알게 되었고, 성오평(省烏坪)의 이름을 경평(京坪)으로 바꿨다.
702년(성덕왕 1)에 신라 효소왕(孝昭王)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다. 신라의 사람들이 두 왕자를 맞이하고자 장군 4인을 먼저 보내어 효명태자의 앞에서 만세를 부를 때 오색의 구름이 나타나고 나라에 밝은 빛이 7일 밤낮으로 연이었다. 많은 신하들은 그 빛을 따라 찾아가 오대산에 으르러 두 태자를 맞이하려고 하자, 정신태자는 울면서 청하여 그곳에 남아 있게 되었고, 효명태자는 마지못해 왕위를 계승하였다[신라본기에 의하면 효소왕은 아들이 없는데 나라 사람들이 신문왕의 둘째 아들 金志誠을 36년 元年 壬寅에 왕으로 세웠다 한다]. 그가 바로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이다.
705년(성덕왕 4) 8월 초3일에 왕이 친히 군사와 백성을 거느리고 오대산에 이르러 맨 처음 진여원을 창건하고 문수보살 니소상(泥塑像)을 봉안하고 비구스님 다섯 사람으로 길이 『화엄경』을 읽도록 하여 화엄결사(華嚴結社)라 하였다. 그리고 매년 춘추로 각각 창조(倉租) 1백 석, 등불에 사용되는 기름 한 섬을 시주로 바치도록 하였고, 또 본원의 부지 2결(結) 이외에 다시 모니침(牟尼砧)ㆍ점이침(占伊砧)을 바친 이외에도 땔나무를 할 수 있는 산 50결, 잣나무밭 6결이 본원 서쪽으로부터 6천 보 거리쯤에 있다.
정신태자는 그곳에 머물러 도를 닦으면서 항상 죽통(竹筒)의 영수(靈水)를 마셨다. 이 때문에 육신이 허공을 날아 유사강(流沙江)을 건너 울진대국(鬱珍大國)에 이르러 장천굴(掌天窟)로 들어가 밤에 수구다라니(隨求多羅尼)를 염불하자, 장천굴의 신이 현신하여 말하였다.
“내가 이 굴에 머문 지 3천 년인데 오늘에야 처음으로 수구다라니경을 들었습니다. 원컨대 보살계를 받고자 합니다.”
정신태자가 그의 청을 따라 보살계를 전해 주었다. 그 이튿날 굴이 갑자기 사라져 몹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로 인해 20일을 머문 후에 그곳을 떠나 다시 오대산으로 돌와 신성굴(神星窟)로 들어가 50년 동안 정진 수도하였다. 이에 33천(三十三天)의 수많은 신들이 매일 내려와 법문을 들었고 정거천(淨居天)의 여러 부처 또한 찾아와 차를 올렸으며, 40 성상(聖象)이 10자 높이의 허공에서 태자를 호위하면서 그가 가진 석장으로 매일 삼시(三時)로 소리를 울리며 태자가 주석한 집을 세 차례씩 맴돌았다. 이 때문에 종치는 소리로 시간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수보살께서 물로 이마에 관욕(觀浴)을 해주어 도과(道果)를 얻었다.
성덕왕은 또 다시 동대 북쪽 모서리 아래에 관음암(觀音庵)을 창건하여 그곳에 원상(圓像)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또 푸른 바탕에 1만 관세음보살을 봉안하였으며, 또 푸른 바탕에 1만 관음보살을 탱화로 그려 항상 정진하는 다섯 스님에게 낮에는 8권의 『금광명경』과 『인왕반야대비심주』를 읽도록 하고 밤에는 관세음보살 예참(禮懺)을 염불하여 원통결사(圓通結社)라 하였다.
남쪽에 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여 그곳에 원상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또 붉은 바탕에 8대 보살을 위수로 하여 1만 지장보살의 탱화를 완성하였으며, 이 역시 정진하는 다섯 스님에게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읽도록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염불하여 금강결사(金剛結社)라 하였다.
서대 남쪽에는 미타암(彌陀庵)을 창건하여 그곳에 원상 무량수여래를 위수로 하여 1만 대세지보살을 탱화로 완성하고 이 역시 정진하는 다섯 스님에게 낮에는 『법화경』을 외고 밤에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염불하도록 하여 수정결사(水情結社)라 하였다.
북대 남쪽에는 나한암(羅漢庵)을 창건하여 그곳에 원상 석가여래를 봉안하고, 또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위수로 1만 미륵보살과 5백 대아라한의 탱화를 조성하여 이 역시 정진하는 다섯 스님에게 낮에는 『불보은경』과 『열반경』을 읽도록 하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염불토록 하여 백련결사(白蓮結社)라 하였다.
중대 진여원에는 여전히 앞에 모셨던 문수보살 니소상을 후벽에 봉안하고 또 노란 바탕에 1만 문수보살과 아울러 36신통 변화의 모습을 탱화로 조성하여 이 역시 정진하는 다섯 스님에게 낮에는 『화엄경』과 『대반야경』을 읽도록 하고 밤에는 화엄예참(華嚴禮懺)을 염불하도록 하여 화엄결사(華嚴結社)라 하였다.
보질도방(寶叱道房:寶叱道는 淨神太子의 아명)을 화엄사(華嚴寺)로 개명하여 그곳에 원상 비로자나 삼존불과 『대장경』을 봉안하고 이 역시 정진하는 다섯 스님에게 여러 해 동안 돌아가면서 『대장경』을 읽도록 하였으며, 밤에는 신중(神衆)을 염불하도록 하였다. 또 해마다 백일 화엄법회(華嚴法會)를 거행하여 이를 법륜결사(法輪結社)라 하고 오대산 오사(五社)의 본사(本社)로 삼았다.
또 문수갑(文殊岬)에 부처님을 배열한 아래 사원(下院)을 더하여 산내 육사(六社)가 모두 모이는 도회처(都會處)로 삼아 이 역시 정진하는 일곱 스님에게 밤낮으로 길이 신중(神衆)에게 예배 염불하도록 하였다.
하서부(河西府) 도내(道內) 8주(州)의 세(稅)를 위 각 사찰과 암자의 복전(福田)으로 삼고 모두 37인이 사사(四事)의 공양을 돕도록 하였다.
이에 군주의 만수무강과 문무백관의 화평과 만백성의 안락과 백곡의 풍년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는 바 없었다
4) 다섯 성인[五聖]을 친견한 신효거사(信孝居士)의 사적
신효거사는 고려시대 공주(公州) 사람이다. 세상사람들은 그를 유동(幼童)보살의 화신이라 하였다. 집에 있을 적에는 효성으로 어머니를 받들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를 위하여 고기를 구하고자 활을 들고 밖으로 나아가 다섯 마리의 학을 발견하고 활을 쏘았다. 이에 다섯 마리 학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오직 깃털을 주워 돌아오면서 깃털을 눈에 대고 바라보니 모든 행인들이 축생의 모습으로 보였다.
이에 짐승을 더 잡을 수 없어 걱정을 하다가 멀찌감치 떨어져 자신의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리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사는 곧바로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도려내었다. 너무나 많은 피가 흘러 시냇가로 나아가 씻었는데, 때마침 사신이 지나가다가 하천의 물이 붉은 것을 보고서 마침내 그 원류를 찾아 거사를 발견하고 물으니, 거사가 그 연유를 모두 말하였다.
사신은 그 일을 기록하여 왕에게 알렸다. 왕 또한 그의 간절한 효성을 가상히 여겨 관리에게 명하여 해마다 쌀 1백 석을 주어 부모를 받들도록 하되 부모가 죽으면 3년 상(喪)을 마칠 때까지 도와주도록 하였다.
거사가 3년 상을 마치고 집을 보시하여 절을 지으니 이를 효가사(孝家寺)라 이름하였다. 출가하여서는 두루 행각하면서 경주(慶州)에 이르렀지만 살 만한 곳을 찾지 못하였다. 바다를 따라 길을 가다가 명주(溟州)에 이르러 그 새털로 눈을 가리고 보니 사람들의 모습이 짐승으로 변하지 않은 자가 더욱 많았다. 마침내 그곳에 머물고자 길가는 한 노파를 만나 물었다.
“이곳은 살만한 곳입니까.”
“서령(西嶺)을 넘어가면 북쪽으로 향한 동네가 있다.”
그 말을 마치고서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후에야 노파가 관음보살의 화신인 줄 알았다. 노파의 말에 따라 성오평(省烏坪) 동네를 찾아 자장조사가 일찍이 주석했던 곳에 이르렀다. 그곳이 바로 월정사이다. 그곳에 머문 지 얼마 안 되어 문득 다섯 스님이 함께 찾아와 물었다.
“네가 가지고 간 가사 한 폭은 어디에 있는가?”
거사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자 다시 말하였다.
“일찍이 깃털로써 사람을 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그 깃털을 내어 주니 한 스님이 받아 가지고서 떨어진 가사 한 곳에 맞추자, 그것은 깃털이 아니라 바로 베였다. 떨어진 가사 폭에 넣어 가지고 다섯 스님이 떠나간 후에야 비로소 다섯 대성인의 화신인 줄 알았다. 다섯 대성인은 북대의 석가모니불, 동대의 관세음보살, 중대의 문수보살, 서대의 대세지보살, 남대의 지장보살이 바로 그분들이다. 이 때문에 월정사에는 오존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가장 기묘한 일이다.
뜰 가운데에는 8면 13층 석탑이 있다. 그 안에는 세존의 사리 37매가 봉안되어 있다(통도사 戒塔記에서 나왔으며 또 事林廣記에도 나와 있다). 그리고 13층탑 앞에는 약왕보살의 석상이 있는데, 손에 향로를 받든 채 13층 석탑을 향하여 꿇어 앉아 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약왕보살의 석상은 절 남쪽 금강연(金剛淵)에서 솟아나온 것이라 하며, 탑 또한 제작이 매우 정교하여 비교할 만한 게 적고 영험이 많았다. 오늘날 산중의 새들까지도 감히 그 위로 날아가지 않는 것으로 보면 이는 많은 신령들이 보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거사가 열반한 후에 신의(信義)스님이 뒤를 이어 중창하였다. 신의스님은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십성제자(十聖弟子) 가운데 한 분이시다. 그 후 오랫동안 황폐하였었는데, 수다사(水多寺) 장로 유연(有緣)스님이 다시 중건하였다. 유연스님 또한 보통사람이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사람들은 모두 사성(四聖)이 머무신 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5) 고려 민지(閔漬)의 1차 사적기 발문(跋文)
오대산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상주한 곳이며 월정사는 다섯 대성인이 현신한 곳이다. 더군다나 월정사는 또한 오대산의 목에 해당하므로 고려 태조가 처음 왕업을 개창하였을 때 옛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매년 춘추로 각각 백미 200석, 소금 50석을 올리고 별도로 공양을 갖추어 복전(福田)을 삼아 마침내 역대 군주들의 일정한 법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전화(戰火)를 겪은 이후로 국운에 어려움이 많아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은 여러 차례 끊기게 되었고 사찰 역시 너무 심하게 퇴락하였다. 스님들이 이를 보고서 개연히 탄식하여 모든 힘을 다 기울여 중수하였다. 그리고서 나를 찾아와 말하였다.
“이 오대산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 있는 옛 기록들이 모두 신라시대의 향언(鄕言:방언)으로 쓰여 있기에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볼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아무리 모든 사람이 이 산의 영험스러움을 알고자 해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만일 훗날 중국 사신이 이곳에 이르러 고기(古記)를 보려고 하면 장차 무엇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원컨대 경이 문장을 바꾸어 이 기록을 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대성인의 영험 있는 발자취를 태양과 달처럼 빛나게 알 수 있도록 해 달라.”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서 옳다고 생각한 나머지, 나의 문장이 비록 그들의 뜻에 부합되지 못할 줄 알며 또 그들의 청을 거듭 저버릴 수 없어 위와 같이 정리한 것이다.
1307년(충렬왕 33) 2월일에 선수조열대부(宣授朝列大夫)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광정대부(匡靖大夫) 자의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 연영전(延英殿) 대사학(大司學) 제수사(提修史) 판문한서사(判文翰署事) 민지(閔漬)는 기록하다.
6) 조선조 본산(本山) 사적
나옹(懶翁)스님은 영해사람으로 속성은 아씨(牙氏)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랐으며 장성해서는 큰 뜻을 품고 세간을 싫어하므로 출가하여 선종을 깨치고 일찍이 중국을 행각하였으며, 그의 도는 중국 제왕을 진동하였고 명성을 중국 천지에 드날렸다. 원나라 지정(至正) 연간(1341~1367)에 돌아왔을 적에 고려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였다.
고려가 멸망하자 스님은 오대산 북대에 은둔하여 불상을 조성하고 사찰을 창건하였다. 태조가 등극한 처음에 세 대신을 보내어 간절한 마음으로 거듭 맞이하려고 청하였으나 조사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대왕과 인연을 맺는 것은 스님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마침내 산문 밖을 나아가 왕의 정치를 도왔다. 태조가 상왕으로 있을 때 사자암을 위하여 전답의 패(牌)를 하사하였다. 그 문안(文案)은 아래와 같다.
사자암 지음(持音:住持)에게 내장고(內藏庫)에 속한 강원도 연곡현(連谷縣)의 전답 모두 20결(結) 58복(卜) 8속(束)을 법당에 공양하는 것을 법으로 하여 원컨대 길이길이 올릴 것이다.
1401년 신사(辛巳) 11월 24일, 태상왕(太上王) 수결(手訣)
세조 즉위 초에 이르러서는 오대산이 천하명산인데 그 중에서도 중대ㆍ상원암ㆍ 지덕암은 더욱 빼어났다 하여 즉위 8년(1464)에 쌀 수천 곡(斛), 돈 수만 금을 하사하여 상원사를 중수하였다. 세조는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선사에게 명하여 권선문(勸善文)을 짓도록 하였다. 그 권선문은 아래와 같다.
우리 성상(세조)께서 천명을 받아 다시 우리나라를 창조하시어 억조의 백성들이 편안하고 온 누리가 안녕하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천지의 은혜를 얻으니, 어리석은 중생과 스님인들 그 누가 은혜에 보답하려는 뜻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돌이켜 보면 태산처럼 은혜가 중하지만 터럭 끝처럼 힘이 미약할 뿐입니다.
강릉 오대산은 천하명산으로서 문수보살께서 상주하신 곳이며 영험있는 현신이 자주 있어왔으며 상원사는 더더욱 훌륭한 곳입니다. 저희들은 의발(衣鉢)에 담긴 것을 모두 털어 상원사를 중창하여 성상의 만수무강을 빌 곳을 삼으려고 했는데, 양위 전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특별히 어명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스님들이 나를 위하여 가람을 창건하려 하니, 내 마땅히 그들을 도와 나라 백성들에게 널리 이익을 줄 것이다.”
이에 어의(御衣) 몇 벌을 하사하시고, 이어 쌀과 무명과 토목의 비용을 보내주어 우리로 하여금 특별히 남다른 은혜를 받았기에 작은 정성이나마 만수무강을 빌고자 합니다.
어쩌다 이 사실이 성상의 귓전에까지 알려져 이러한 큰 보시를 주시니, 삼보는 이로써 더욱 높아지고 법륜은 이로써 다시 구르게 되었습니다. 널리 원하옵건대 여러 선하신 시주들은 견문의 미친 바에 모두 환희하고 모두 보리(菩提)를 내어 다함께 덕의 근본을 세워, 위로는 끝없는 성상의 만수무강을 빌고 아래로는 억만년에 큰 복이 전하여 한량없는 복으로 현재와 미래에 모두 유익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신미(信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행담(行湛), 성민(性敏)
이에 세조는 친히 어필로 공덕소(功德疏)를 써 주었다. 그 공덕소는 아래와 같다.
“세간에는 일곱 가지의 중한 것이 있다. 불ㆍ법ㆍ승(佛法僧) 삼보(三寶)와 아버지ㆍ어머니, 그리고 임금과 선지식이다. 삼보는 출세간의 종주이며, 부모는 나를 낳아 주신 종주이며, 임금은 나의 몸을 보전해 주신 종주이며, 선지식은 혼미한 중생을 제도해 주는 종주이다.
나는 태자가 된 이후로 일찍이 우리 혜각존자를 만나 도가 계합되었다. 존자는 마음이 다하여 항상 세속에까지 나를 찾아와 나로 하여금 청정한 생각을 품게 하고 욕심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었다. 오늘날이 있기까지는 선사의 공이 아니겠는가. 이는 영겁에 숙인(宿因)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처럼 만날 수 있겠는가.
얼마 전 나의 몸이 불편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법상에서 내려와 주야로 수 백리 길을 달려왔다. 비록 벼슬하지 않은 고상한 스님이라 하지만 이는 중생을 제도하는 대자비심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감격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렀다. 또 듣자니 혜각스님과 학열스님이 나를 위하여 옷과 재물을 모조리 팔아 가람을 중창한다 하니, 스님들이 나를 위하여 마음 씀씀이가 이와 같다.
내, 스님들의 은혜에 감격함은 사람으로서 모두 서술할 수 없다. 나는 이 때문에 스님들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조금이나마 중창비용을 도와 구경(究竟)의 정인(正因)을 삼고자 하니, 이른바 직심보리(直心菩提)라 하겠다. 이에 후사(後嗣) 태자에게 부촉하는 것이다.
불제자 승천체도 열문영무 조선국왕 이유(佛弟子 承天體道 烈文英武 朝鮮國王 李 王柔) 수결(手訣)
위와 같이 임금의 이름(御 言韋)까지 친히 쓰고 몸소 수결을 했으며 체천지보(體天之寶)라는 어보(御寶)를 찍어 보내 주었다. 그리고 쌀과 무명베에 대한 물목(物目)을 친히 열거하여 주었다. 물목은 아래와 같다.
채색(彩色), 쌀 5백석, 무명베 5백필, 정포(正布) 5백필, 정철(正鐵) 1만5천근
자성(慈聖)왕비 윤씨(尹氏) 역시 "자성왕비지보(慈聖王妃之寶)"라는 어보(御寶)를 찍어 물목을 보내주었다.
채색(彩色), 쌀 5백석, 무명베 5백필, 정포(正布) 5백필, 정철(正鐵) 1만5천근
세자와 종친, 그리고 문무백관들에게 이를 나누어 보여주고 각기 소유한 재물을 보시하도록 하였다. 이에 먼저 세자와 종친의 보시자는 아래와 같다.
세자 신 광(世子 臣 珖) 인장(印章) 세자지인(世子之印)
정경부인 김씨, 정빈 한씨, 최씨 혜월, 정의공주 이씨, 정씨 묘련, 의숙공주 이씨, 박씨 해련, 예성부부인 최씨, 이씨 묘월, 제안부부인 최씨, 정부인 심씨, 영가부부인 신씨, 김씨 해월, 대방부부인 송씨, 정경부인 고씨(이상은 세자. 이하 종친명단 생략)
이에 세조는 학열스님에게 중창불사를 주관하도록 명하였다. 학열스님은 왕명을 받아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생각하여 몸소 이를 독려하여 1465년(세조 10)에 사작하여 1466년(세조 11)에 준공을 고하였다.
세조는 내사(內司)에 명하여 재(齋)를 올릴 쌀ㆍ돈ㆍ무명포와 의발ㆍ좌구ㆍ의약품을 하사하여 사사(四事)를 모두 갖춘 뒤 수행이 뛰어난 50여 큰 스님을 모아 낙성법회(落成法會)를 크게 베풀었다.
세조는 친히 금강산에 거동하여 담무갈(曇無竭)스님을 찾아뵙고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10월 초5일에 친히 본사에 이르렀으며, 그 이튿날 대중 300여 명을 청하여 공양하였고 여러 암자와 두 사찰에 보시를 하였다. 그 날 재를 마친 세조는 친히 사자암에 이르러 곤룡포를 입고 보궁에 올라 향을 올리고 예배를 올렸으며 공양과 보시를 하였다. 그 날 밤 방광(放光)으로 땅이 진동하여 상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세조는 깜짝 놀라고 기뻐하여 7일에 이르러 친히 상원사에 거동하여 공양과 보시를 였고 상원사에 머물며 산 주위에 봉표(捧標)의 패(牌)를 하사하였고, 또 전답 노비 15구를 하사하고 잡역 염분(鹽盆) 등을 하사하였다(강릉군 자가곡면 國農所 신석평 소재 전답, 모두 12결 9부 3속). 아울러 왕패(王牌)를 내려 모두 면세를 하게 하였고 요역을 경감하였으며 교지를 하사하였다. 그 교지는 아래와 같다.
강원도 강릉땅 수정암(水精庵)을 감사수령은 일찍이 내린 교지에 따라 다시 살펴서 더욱 완전히 보호하고 잡역을 없앨 것
국왕 수결(手訣)
1457년 8월 14일 어보(御寶)
오대산 아래 10리 거리인 성오평(省烏坪) 동쪽 작은 봉우리에 올라 크게 문무과를 거행하니 이처럼 성대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과거를 끝마친 세조는 마침내 대궐로 돌아갔다. 1475년(성종 6) 을미(乙未)에 이르러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 신(臣) 김수온(金守溫)에게 명하여 이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그 기문(記文)은 아래와 같다.
오대산은 강원도 경계에 걸쳐 있다. 300여 리를 쭉 뻗어 내려와 그 웅장한 산봉우리와 깊은 계곡은 풍악산(楓岳山:금강산)과 우열을 다투고 있다. 오대산 산자락에 있는 고을들은 무려 10여 고을이나 된다.
오대산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다. 높낮이가 고루 똑같고 크고 작음이 비슷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것처럼, 누각이 허공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이를 오대산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 중대(中臺)의 남쪽에 절이 있다. 그곳을 상원사라 한다. 두 차례 화재를 겪었는데 그때마다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 있어 퇴락하는 족족 다시 창건ㆍ중수하였다. 그러나 사찰의 규모가 낮고 비좁아 스님들이 편히 거처할 수 없었다.
1464년 8년 4월에 세조대왕이 몸이 편치 아니하여 열흘 남짓 그곳에 머물렀을 적에 대왕대비전하가 이를 걱정하여 내관을 보내 혜각존자와 신미선사와 학열스님등에게 물었다.
“안팎의 사찰로서 법을 올려 성상(세조)의 장수를 축원하는 사찰이 어디든지 있으나 나는 명산과 좋은 터에 하나의 가람을 중창하여 특별히 기원도량으로 삼아 나라에 기도할 일이 있을 때 그곳에 나아가 기도하고자 한다. 스님들은 사방을 두루 행각한 사람들이라, 반드시 그만한 곳을 알 것이니, 사실대로 알리도록 하라.”
신미대사 등이 이에 대해 대답하였다.
“오대산은 우리나라의 명산일 뿐 아니라, 중대 상원암은 지덕(地德)이 더욱 빼어나 승려들이 결제(結制)할 때면 반드시 베갯머리에 깜짝 놀랄 영험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부엌살림하는 사람의 실화로 화주(化主)의 힘이 미약하여 이를 우선 갖춰놓기에 급급한 나머지 겨우 사람만 가릴 정도입니다. 만일 그 옛터에 다시 규모를 확대하여 일산(一山)의 명찰을 삼아 기도처로 삼으시고 특별히 향과 폐백을 내려 불사를 짓는다면 이만한 절이 없을 것입니다.”
대왕대비 전하는 교지를 전하여 “스님들의 말씀이 마땅하다”고 하여 곧바로 세조에게 계(啓)를 올려 학열스님을 명하여 상원사 중창의 일을 주관토록 하였으며, 경상감사에게 어명을 내려 쌀 5백석을 실어 강릉으로 운반토록 하였고, 제용감(濟用監)에서는 무명 1천 필을 내어 중창을 돕도록 하였다.
이윽고 세조의 병이 차도가 있어 점점 회복을 되찾자, 대왕대비 전하는 깜짝 놀라고 기뻐하여 그 산이 신령스럽고 부처님의 도움으로써 말 한 마디에 영감이 있는 것이라 하여 세조는 친히 공덕소(功德疏)를 지어 종친과 재상들에게 이를 보였다. 그리고 성지(聖旨)에 따라 가지고 있던 재물을 보시하였고, 인수왕대비전하(仁粹王大妃殿下)가 양위 전하의 신심의 두터우심을 받들어 쌀 500석을 더 보시하여 그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었다.
이에 학열스님 등이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몸소 이를 독려하고 힘써 1465년 3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병술년에 준공을 보았다. 불전(佛殿) 동서에 모두 상실(上室)이 있었는데, 스님은 각별히 모든 생각을 다하여 상실의 양 벽을 가리개로 대신하여 정진할 때면 두 개의 가리개를 들어 부처님 앞까지 하나로 통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남쪽 행랑 사이에는 누대 5칸을 지어 종과 범종 등의 도구를 두었고, 그 아래는 문을 내어 출입하게 하였다. 동쪽 상실의 동에는 나한전을, 서쪽 상실의 서편에는 청련대(靑蓮臺)를, 청련대 서편에 다시 부엌ㆍ승당(僧堂)ㆍ선당(禪堂)ㆍ창고ㆍ목욕실을 두어 모두 그 적절함을 얻지 않은 바 없었다. 기둥수효를 헤아려 보면 모두 56개이다. 창고의 곁에 바위를 파서 구유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 통을 만드니 차가운 물이 세차게 흘러 내려와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었으며 일상생활의 모든 도구가 다 갖춰지지 않은 바 없었다.
강릉에 예부터 나라에서 수백 결을 봉해 준 땅이 있었다. 혜각존자가 절에 귀속시키기를 청하여 수전(水田)으로 바꾸어 해마다 곡식 수백 석을 추수하여 상주하는 스님들의 살림을 도왔고, 인수대왕대비 전하는 사유(寺有)를 위하여 부처님 탱화를 조성하기를 원하면서 이에 150석의 공양미로 올렸고, 선고비(先考妃)를 위하여 매일 저녁마다 시식(施食)을 하고자 60석을 올렸다.
세조는 상원사의 중건이 모두 끝났음을 듣고 또 다시 쌀 500석, 베 1천필을 하사하여 의발ㆍ좌구ㆍ탕약 등 사사(四事)를 모두 갖추게 하였고, 운율을 아는 스님 52인을 모시고 크게 낙성법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그 해에 세조는 강원도를 순행하다가 오대산 아래 성오 뜰에 머물고 대왕대비전하, 왕세자, 호종(扈從) 문무백관들과 함께 몸소 상원사를 행차하였다. 그날 때마침 낙성식을 하고 법당을 여니, 산수는 빼어나고 골짜기는 맑고 그윽하였다. 이에 사찰은 보기에 좋고 스님들은 많았으며 모든 법기(法器)를 올리고 모든 범패를 울렸다.
이에 세조는 몸소 부처님 앞에 나아가 3번 향을 올리고 큰절을 하였으며 시종백관으로 하여금 큰절을 올리도록 하였다. 이어서 학열스님 등을 불러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학열스님 등은 산중의 고사와 본사 흥망의 시말과 부처님이 동서로 은밀히 심법의 요체를 전한 것을 이야기했는데, 그 이야기가 예리하고 이치가 깊어 말마다 세조의 뜻과 일치하였다. 세조는 이에 크게 기뻐한 나머지 내탕(內帑)의 비단을 하사하여 법회를 빛나게 하여 주었다. 세조가 되돌아간 그 이튿날 학열스님 등은 대중스님들을 거느리고 행재소로 나아가 그 은혜에 감사하였다.
1470년(성종 원년)에 우리의 주상 전하(성종)께서 상원사는 세조대왕의 원찰(願刹)이요, 또 옛적에 세조를 모시고 갔었던 곳이라 하여 특별히 내수노비(內需奴婢) 15인을 하사하고, 노비잡역과 사찰에 속한 토지세를 감면한 외에도 염분세(鹽盆稅)까지도 왕패(王牌)를 내려 모두 길이 면제하여 주었다.
그 후 1477년에 학열스님은 절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아뢰면서 이 일을 그만두고 마음대로 산천을 행각하겠다고 청하자, 성종은 특별히 윤공납의(允公衲衣)을 하사하였다. 이에 학열스님은 미련없이 남쪽으로 길을 떠나면서 기문(記文)을 청하여 멀리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金守溫)에게 명하여 이를 기록하게 한 것이다.
신은 들으니, 어진 임금이 천하 국가를 다스릴 적에 인의의 덕을 다하여 교화의 본원을 세우지 않음이 없으며 또한 청정의 도를 높이어 무위(無爲)의 정치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 한다. 우리 세조대왕은 몸소 대란(大亂)을 평정하고 국가를 안정시켜 몸을 살피고 덕을 닦아 선을 하려는 데 힘썼으며 법과 기강을 세워 만세에 가르침을 전해주었다. 이에 교화의 근본이 섬으로써 정치하는 도구가 이미 베풀어지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마침내 동방에 일찍이 없었던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불도는 자비와 청정으로 고귀함을 삼아 그 이로움을 중생에게 미루어 주고 또 나라와 집에 복이 되고 임금과 어버이의 장수를 빌어주었다. 하늘이 내려주신 성인으로서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나셨으며 그 삼장(三藏)과 구부(九部)의 문장, 일심만법(一心萬法)의 종지를 깊이 연구하여 마음과 정신으로 이해하였다.
오대산은 멀리에 있고 상원사는 외진 곳에 있으나 도인들이 모여드므로 반드시 이를 개조하고자 그 비용을 넉넉히 하사하여 처음을 경영하였고, 준공을 고함에 미쳐서는 내탕금의 보배를 크게 보시하여 낙성법회를 베풀어 불교의식을 크게 떨치고 법계에 널리 전하여 주었다.
이에 정식(情識)이 있는 모든 생명체는 다함께 끝없는 이로움과 즐거움의 은혜를 입었으며 친히 발걸음을 들어 산곡에 임하시니 바람과 구름도 색이 변하고 초목은 빛났다. 천지가 갈라지고 이 산이 생긴 이후 앞으로 천백년 이전과 뒤로 천백년 이후에도 일찍이 이처럼 성대한 일은 다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멀리 외진 곳에 사는 사람으로서 어쩌다 다행히 임금의 수레와 말 달리는 소리를 들었고, 아름다운 깃발을 보고서 양위 전하의 은택을 입어 미담으로 남기어 억만년에 전하고자 한다. 이는 마땅히 아름다운 문장으로서 바위에 새겨 불후하게 전해야 할 것이다. 신의 어리석음으로 큰 아름다움을 모두 다 펼칠 수는 없으나 영광스럽게 성지를 받들어 감히 문장이 용렬하다 할지라도 사양하지 못하겠다.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綠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 신 김수온(金守溫)은 절을 하고 교지를 받들어 삼가 쓰다.
1475년(성종 6) 정월
7) 선원보략(璿源寶略) 봉안사적(奉安事蹟)
만력(萬曆) 34년(1606) 병오(丙午)는 선조대왕이 즉위한 지 39년이다. 오대산은 천하 명산일 뿐 아니라, 실로 우리나라의 원맥이며 문수보살이 상주하신 곳으로서 신령스러운 현신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오대산의 신령함과 부처님의 교화를 힘입어 홍복(洪福)을 멀리 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선원보략(璿源寶略)』(璿源譜略과 같음. 璿源系譜紀略 의 약칭으로 왕실의 계보를 간략하게 기록한 책)과 사고(史庫)를 중대 남쪽 호령봉(虎嶺峰) 아래에 세우고 인하여 인신(印信)을 하사, 총섭을 설치하여 길이 이를 수호토록 하고 산 주위에 봉표(封標)로써 패를 하사하고 전답을 하사하여 무궁히 전하도록 하였다. 그 땅은 아래에 열거한 바와 같다.
남쪽으로는 월정(月精)거리, 동쪽으로는 병내동(屛內洞)ㆍ내구숙(內狗宿)ㆍ외구숙(外狗宿)ㆍ소학동(巢鶴洞)ㆍ회덕동(檜德洞)ㆍ사령동(四嶺洞)ㆍ상송천(上松川)ㆍ상부연(上釜淵)ㆍ백산동(白山洞), 서쪽으로는 동산동(洞山洞)ㆍ탑동(塔洞)ㆍ자내동(字內洞)ㆍ준일동(浚日洞)ㆍ가리동(加里洞)ㆍ대소한리(大小閑里)ㆍ울수동(鬱水洞), 북쪽으로는 청두동(靑頭洞)ㆍ약수동(藥水洞) 등지 주위 사방 40리는 모두 사고(史庫)에 속하고, 근동은 연례로 동포잡역(洞布雜役)을 모두 감면하고 화재를 금하며 가축 방목을 금지하는 법을 오로지 거행하였으며, 해당 각 동내에서는 감관(監官) 다섯 사람을 가려 서로 경계하라는 뜻으로써 예조에 명하여 완문(完文)을 내려 각별히 가축 방목을 금지하였다. 또 양양(襄陽) 사현면(沙峴面) 벽암원(霹岩員) 결자(結字)ㆍ상자(箱字)ㆍ금피(金被)ㆍ양자(兩字) 등지에 소재한 논 여덟 뜰, 모두 40두락 총 69부 5속을 하사하였다.
8) 산중산기(山中散記)
중대 지로봉의 생김새는 비로봉의 원맥이 오대산 한 가운데에 있어 동서남북 4대(四臺)가 서로 바라보고 있다. 아무리 지리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깜짝 놀랄 정도로 훌륭한 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영농(穎農) 이철현(李喆鉉)은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西竺前緣竟海東 (서축전연경해동) 서축의 옛 인연 마침내 해동으로
地爐峰上梵王宮 (지로봉상범왕궁) 지로봉 정상 부처님의 법당이여
藏幻骨巖苔生碧 (장환골암태생벽) 사리 모신 바위엔 푸른 이끼 돋아나고
榻設虛筵錦佛紅 (탑설허정금불홍) 참선하던 빈자리엔 비단만이 붉어라
應有精靈通帝座 (응유정영통제좌) 산 정기는 제석천 자리까지 통하여
庶看形影下天風 (서간형영하천풍) 그 모습 하늘에서 내려온 듯 하여라
諸山還識宗尊意 (제산환식종중의) 산들도 부처님 높힐 줄 아는 양
環向中臺盡구躬 (환향중대진구궁) 중대를 향해서 모두 허리 굽혔어라
연파(蓮坡:惠藏 兒菴)선사의 시는 다음과 같다.
南明太白月 (남명태백월) 남녘엔 태백산 달빛 밝고
北覆衆香雲 (북복중향운) 북쪽엔 수많은 향기구름 덮였어라
天地間空裸 (천지간공라) 이 세상천지에
此山第一云 (차산제일운) 이 산이 으뜸일래라
중대 아래 사자암이 있다. 자장법사가 당나라에 있으면서 사자 한 마리를 얻어 부처님 정골사리를 싣고 돌아와 오랫동안 그곳에 주석하였다. 이 때문에 사자암이라 이름하였다. 사자암 곁에 석굴이 있다. 세상사람들은 그곳을 사자굴이라 하며, 그 아래에 갈대밭 몇 이랑이 있는데 그곳은 사자가 살던 곳이라 한다. 북대 상왕산(象王山)과 동대 만월산(滿月山)은 모두 신라 때 육결사(六結社)가 있던 옛 터전이다.
조선 초, 나옹화상이 주석할 즈음에 북대의 도솔암과 동대의 관음암을 중건, 보수하여 보찰(寶刹)로 삼았다. 모두 드높은 산봉우리 정상의 칡넝쿨이 얽혀 있는 가운데 있으므로 도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면 감히 그곳에 머물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서산대사는 ‘관음암으로 돌아가는 감선자를 전송하는 시(送鑑禪子 歸觀音庵詩)’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洗鉢梵香外 (세발범향외) 바리때 씻고 향불 올린 이외엔
人間事不知 (인간사부지) 인간사 알지 못할래라
想師樓身處 (상사루신처) 생각하니 스님이 머무시는 곳
松檜括?? (송회괄양시) 소나무 전나무에 바람이 스치겠소
菜根兼葛衲 (채근겸갈납) 나물뿌리에 낡은 갈포장삼이여
夢下到人間 (몽하도인간) 꿈속에서도 인간세계 이르지 않으리
高臥長松下 (고와장송하) 고고히 낙락장송 아래 누우니
雲閑月亦閑 (운한월역한) 구름도 달도 한가하여라
서대 장령산(長嶺山)와 남대 기린산(麒麟山) 또한 모두 육결사의 유허지이다. 서대 미타암은 영조 때 화순옹주(和順邕主)가 사원을 중창하고 특별히 원당(願堂)으로 정하여 전답 얼마쯤을 오려 부처님에게 향을 올리는 보시로 삼았다.
남대 보리암 곁에 종봉암(鐘峰菴)의 옛 터가 있다. 선조 때 사명대사가 주석하였던 곳이다. 대사의 이름은 유정(惟政)이며 송운(松雲)ㆍ이환(離幻)ㆍ종봉(鐘峰)은 모두 법호이다. 속성은 임씨(林氏)이며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본래 영남 밀양사람이다. 나이 16세에 삭발 출가하였고, 30세에 서산(西山의) 회하(會下)에 들어가 심인(心印)을 전수받아 동쪽으로 여러 산을 행각하다가 오대산의 웅장함을 보고서 남대 기린봉 정상에 암자를 세우고 그곳을 종봉이라 하였다. 때로 그곳에 거처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곳을 떠나 선관(禪關)만을 닦았는데, 임진왜란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고 종묘사직을 안정시켜 만세에 공을 전한 바 있다.
오늘날 월정사는 옛 수정암 자리이다. 『선원보략』을 수호하는 중대한 터와 적멸보궁의 향불을 올리는 곳은 더욱이 산수가 수려하기로 으뜸이어서 국내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이는 실로 불가(佛家)의 종주이다.
지난 1833년(순조 33) 계사(癸巳)에 뜻하지 않은 화재로 1천300여 칸이 일시에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에 본관(本官)이 영문(營門)에 이 사실을 급히 알리고 관찰사가 조정에 아뢰었다. 때마침 홍순대(洪淳大)가 1년에 한 차례씩 『왕조실록』의 햇볕 쪼이는 명을 받들어 본사에 왔다가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열성조(列聖朝)의 어필(御筆)을 봉안하고 선원각(璿源閣)을 수호해야 할 곳이 영원히 황폐한 연못처럼 곤명지(昆明池)가 되었고 스님들이 모두 흩어져 부처님이 노지에 계시니 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그는 조정에 돌아간 날로 곧바로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성상(순조)께서 공명첩(空名帖) 400장을 내려주어 법당ㆍ어실각(御室閣)ㆍ대루각(大樓閣)ㆍ요사채를 중건하여 모든 곳을 다시 복원하였다. 이에 사찰의 규모가 비로소 갖춰지게 되었다. 산문은 빛나게 되었고 수호신들은 이로써 환희심을 내고 스님들은 다시 모여들어 향을 올려 경하하며 축원하였다.
“성상의 흉복은 강물이 마르고 태산이 닳도록 길이 보전하시고 성상의 만수무강은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길이 푸르시며 금지옥엽 같은 자손들은 길이 푸르시며 금지옥엽간은 자손들은 길이 바다 언덕에 춤추고 길이 한양의 푸르며 언제나 부처님의 햇살은 널리 비추고 법륜은 거듭 구르게 해주소서!”
9) 발문(跋文) 1
나라에 사관(史官)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일이다. 천하 후세의 사람들이 비록 백세 이전의 제왕, 천년 이전에 있었던 성왕들의 정치와 어진 재상들이 보좌하여 이로써 백성의 마음에 이르게 했던 일들을 마치 눈으로 목격한 것처럼 훤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실로 사관의 공인 것이다.
크고 작은, 그리고 경중의 차이는 있으나 산사(山寺)에 사적(事蹟)이 있다는 것도 매한가지이다. 이를 통하여 그 산의 영험과 사찰의 시종 전말을 알 수 있다면 이것은 곧 기록한 자의 공일 것이다.
오늘날 오대산은 강원도의 경계를 널리 가로질러 있다. 천하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실로 문수보살께서 상주하신 곳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명산고찰은 한 군데가 아니며 기이한 경관과 성스러운 발자취 또한 많다. 하지만 영험있는 현신이 나타나고 보궁(寶宮)의 창건, 제왕의 출입, 어필이 남아 있는 곳으로 오대산만이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그 발자취를 계승하도록 후생들에게 경계시키지 않는다면 이는 태양과 달이 서쪽으로 기울어 비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는 사실을 기록한 자의 공이 없었기 때문이다.
1902년(광무 6) 임인(壬寅) 가을에 운암(雲巖) 대준(大俊) 선사의 부탁을 받아 만화(萬化) 관준(寬俊) 선사와 함께 그 고적의 타당성을 고증하여 진실된 전기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후일 이를 읽는 사람들에게 이바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본래 문장이 뛰어나지 못한 사람이다. 일을 서술함에 있어 미진함은 마치 하늘 끝에 걸린 어설픈 속눈썹 같은 달처럼 그 모습이 원만하지 못하고, 문장의 서술 역시 정밀하지 못하여 실꼬투리를 잃은 것처럼 뒤엉켜 차례가 없다. 후생들이 배꼽을 움켜주고 고소를 금치 못할 것이 두려우나, 이를 한번 보고서 성왕의 은총이 유독 이 산의 이 월정사에 있었음을 안다면 이는 기록하지 않은 자보다는 오히려 작은 도움이 된다고 할 것이다.
광무(光武) 6년(1902) 중추(仲秋)에 건봉산인(建鳳山人) 낭응(郎應) 경왕(鏡王)은 삼가 기록하다.
10) 발문(跋文) 2
듣자니 세존께서 중천축국에 나타나 세상에 머물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동토에 불법을 전하며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여 왕의 다스림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성왕과 훌륭한 재상들이 뒤를 이어 마음을 기울였고 더욱이 전신사리를 명산에 나누어 봉안함으로써 나라에 복이 되고 임금님의 장수를 누릴 수 있었다.
오늘날 오대산의 중대는 바로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봉안한 곳이다. 이로 말미암아 역대 임금들이 상원사에 머물렀다. 이 어찌 여느 절과 함께 말할 수 있겠는가.
옛적에 부처님은 혜안으로서 문수보살에게 고명(顧命)을 내렸고 문수보살의 큰 지혜로 오랫동안 자장율사를 기다려 왔으며, 빼어난 기개의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에 친히 정골사리를 받아 본국으로 돌아와 탑과 절을 세우고 여러 명산에 나누어 봉안할 적에 맨 먼저 이 절을 창건하였다. 이 때문에 오대산은 불국토의 종찰(宗刹)이라 말한다. 신라ㆍ고려 이후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임금과 왕비가 조정의 기도도량으로 정하여 높이 받들고 경건히 믿어 왔다. 이는 자장율사가 탑을 세운 공로이다.
나는 올 봄에 외람되게도 원장의 소임을 맡아 삼가 사적을 살펴보니, 책이 흩어지고 글자가 마모되었을 뿐 아니라 전기 또한 완전하지 못하였다. 이를 다시 중수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대선사 낭응강백(郎應講伯)을 만나 기록을 모아 서로 토론한 끝에 한 권의 책으로 엮어 후세에 전하기로 했다. 이 책이 완성되어 나에게 글을 적어 권미(卷尾)에 붙이기를 청하였다. 이미 선사의 부탁을 중히 여겼던 터라 문장의 용렬함을 돌아보지 않고 이처럼 권말에 쓰는 바이다.
광무(光武) 6년(1902) 중추(仲秋)에 적멸보궁(寂滅寶宮) 수호원장(守護院長) 만화(萬化) 관준(寬俊)은 삼가 발문을 쓰다.
11) 발문(跋文) 3
부처님은 곧 무위진성인(無爲眞性人)이시다. 무위진성의 속을 향하여 간파하면 설령 도(道)라는 한 글자를 일컫는 것만으로도 벌써 공성(空性)과는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오대산의 신령스러움과 성스런 발자취의 아름다움은 참으로 천진불(天眞佛)의 일이다. 더구나 그 사이에 무얼 쓸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부처님의 뜻을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면 문자 또한 도외시할 수 없다.
내, 두 큰스님께서 옛 기록을 정리할 적에 친견하여 일찍이 이를 보지 않은 바 없다. 나에게 이처럼 막중한 발문을 부탁하니 이를 사양하기 어려워 먹을 적셔 이를 기록하는 것이다.
사법계(事法界)와 이법계(理法界)가 모두 원만함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다행하게도 오늘날 오대산에는 이러한 문장이 있다는 것은 사법계와 이법계가 모두 원만한 것이다. 사법계와 이법계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영공(靈空)의 뼈 가운데 감춰져 있으니 정안(正眼)을 갖추고 보도록 하라.
광무(光武) 6년(1902) 중추(仲秋)에 건봉산인(建鳳山人) 회명(晦溟) 일승(日昇)은 삼가 발문을 쓰다.
(월정사,『오대산 월정사?상원사』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