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은 해방 전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물맛이 좋다는 연유로 술 공장이 많았다. 소주와 청주, 탁주 등 여러 종류의 술을 만드는 양조장이 여러군데 있었다. 연세가 50대 이상 되시는 분들은 어렴풋이 기억이 날것이다.
1) 마산은 한때 전국 생산량 1위를 차지한 청주(정종; 일본 사케) 주조장이 많아 유명세를 탔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부터 1980년대 사이에 대부분의 청주 주조장은 없어졌다.
2) 최초의 청주공장이 1904년에 세워진 이후, 일제는 근대식 설비를 동원한 대규모 소주공장을 건설했는데, 1929년 9월 마산부 본정(本町: 현 창포동 1가 20번지, 현재 창포 한백아파트 위치) 해안 매립지에 일본에 본사를 두고 있는 소화(小和)주류가 들어왔다. 소화주류는 소주만 생산한 것이 아니라, 청주, 미린주, 포도주 및 기타 위스키와 브랜드 등을 생산한 종합주류회사 형태였으며, 규모가 상당히 컸다.
<1960년대 전경: 해안가에 큰 굴뚝이 있는 공장건물>
3) 일제 강점기 청주 및 소주공장은 한국인들에게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재래식으로 생산하는 막걸리 공장만 허용해 주었다. 일제 강점시기 마산의 소주공장은 거의 소화주류에 의한 일사 독점체제로 유지되었다.
4) 해방과 함께 적산 소주공장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공장) 들은 미군정청에 의해 접수되었고, 미 군정청은 이들 적산공장을 과거 일본인 공장에 종사했던 종업원이나 주류제조에 경험이 있는 자나 그밖에 관리 운영할 능력이 있는 한국인을 선정하여 관리 운영을 맡겼다. 해방과 함께 적산공장의 불하에 의해 탄생된 소화 주류와 야마무라 주조 외에도 1951년 강남소주(장군동 5가7, 대표 김행윤)가 장군동에서, 1961년 마산양조공업사(장군동 5가1-3,대표 남병주)에서 소주와 약주를 함께 생산하였다.
5) 1961년 유원(有元), 무학(舞鶴), 마산, 강남(江南) 등 4개의 소주공장에서 소주를 제조하고 있었으나 소주 수요가 늘어나면서 1970년에는 무학, 강남, 백광 삼천리, 영진(永進) 등 5개 공장으로 늘어 났다. 후발업체인 백광소주(부림동 104-8,대표 문삼찬)가 1969년에, 삼천리와 영진소주는 구순기에 의해 회원동과 오동동에 설립되었다.
야마무라 주조는 해방이후 상호를 무학주조로 개칭하고 소화주류와 경쟁관계에 들어섰다. 1960년에 동양주정(소화주류의 상호변경)과 합병을 통해 유원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60년대 초반에는 소주 백매(白梅)를 생산하였다.
영진소주, 삼천리 소주공장터 현재전경
<오동동 4거리 아래편>
1965년부터 유원산업은 주정회사만 운영을 하다가 우여곡절을 겪는 속에 마산항 서항지구매립사업이 완공되어 공장앞 바다는 육지로 변했고 공장주변이 주택지 등으로 변모하자 80년대 후반 함안군의 칠서 지방공단에 이전하여 주정을 생산하였으나 그 이후 공장은 운영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진다. 70년대 당시만 해도 유원산업은 마산에서 아주 큰 그룹형태의 회사였다. 유원연료산업에서 유원연탄을 만들기도 하였고, 부산의 대선주조도 인수하고, 경우상호신용금고와 유원개발에서 부곡골프장 건립공사를 하기도 하여 70년대 마산에서 알아주던 기업이었으나, 지금은 명맥을 찾기 힘들다.
야마무라(산읍)주조, 해방후 유원산업
6) 1965년 1월부터 시행된 양곡관리법 시행으로 소주의 원료 대체가 불가피하게 됨에 따라 전국의 수많은 증류식소주 업체들이 희석식소주로 전환하여 생산하였다. 그 후 필요이상으로 난립상태였던 소주제조장을 국세청은 1973년 7월부터 본격적인 통합작업에 착수하였다. 각도에 1사씩 전국 10개 업체만 존속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무학주조는 경남지역 36개회사를 통폐합, 무학주조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신창동으로 이전하였다.
7) 신창동 무학주조 공장은 원래 일본인이 경영한 청수(淸水)라는 청주공장이 있던 자리인데 해방과 함께 대동주조로 상호를 변경한 뒤, 73년 무학이 경남소주공장을 독점하면서 무학주조 공장으로 사용되었다. 1984년 무학주조 공장이 봉암동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옛 공장부지는 무학아파트가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3년 신창동 무학주조공장)
(84년 봉암동 이전후 현재 무학빌라가 들어서 있다.)
60년대 생산 무학소주 상표
8) 마산에는 옛날에 청주 (정종) 공장이 여러개 있었으나 대부분 1960년대 이전에 문을 닫았고 삼광, 백광 2개 회사가 쭉 영업하다가 그나마 이 두 회사도 정리되었다. 아래 사진은 1925년 청주양조면허를 얻어 마산부 통정(장군동)에서 창립한 千島園 주조장으로, 창업주는 遠勝豊吉, 명주 彌生의 생산량은 연간 500석 내외였다고 한다. ( 마산상공 회의소 100년사)
삼광청주 공장전경 (출처 : 마산시청 포토자료실/역사)
(위 사진에서 모서리 가로수를 지우면 정확히 같은 각도에서 본 사진이 된다. )
삼광청주 상호 (사진출처 : 마산문화원 전시사진)
9) 1971년도에 청주 제조업체는 백광, 부용, 교해, 관해, 삼광 등 양조장이 향토 명산의 청주를 제조하였으나, 1973년 정부의 군소 주조업체의 통합조치 이후 삼광주조장 등 대부분이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백광 양조장 하나만 생산을 계속 하다가 이마저 생산을 중단하고 문을 닫게 되어 酒都馬山의 명성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무학소주가 명맥을 이어왔으며, 독일자본의 이젠백 맥주가 들어왔다가 크라운으로 합병되어 현재의 하이트맥주 마산공장이 가동중이다.
10) 1999년 경남신문에 인터뷰한 손삼권씨는 45년 10월 지시마엔 양조장을 당시 일본인 사장이던 엔도(遠藤豊吉)로부터 인수, 장군동 3-13번지 공장에서 삼강(三江)양조장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본공장 이름을 그대로 쓰고 술 이름도 「무궁화」로 정했으나 「나라 꽃을 마시면 되느냐」는 주변의 지적에 따라 공장은 「三江」(대동강 한강 압록강), 술 이름은 「三光」(해 달 별)으로 바꿨다. 45년 11월부터 청주를 만들기 시작했으니 광복이후 한국사람으로서는 가장 먼저 청주를 만들었다 한다.
11) 마산 출신의 화가 겸 조각가 문신씨는 어려서부터 삼촌 집에서 자랐다. 형편이 좋았던 삼촌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그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삼촌 문삼찬은 자유당 시절 마산시당 부위원장을 했고 마산문화협의회를 만들어 문화 활동에도 참여했다. 당시 서성동에서 대흥주조장을 운영했는데 술 이름이 '부용청주'였다. 마산은 물 좋은 고장이라해서 당시에 양조장이 많았는데, 그 중에도 부용, 교해, 관해, 삼광이 4대 명주로 꼽혔다.
부용청주 술통은 항아리에 짚으로 만든 두루미 뚜껑을 덮었다고 한다. 판매장은 여기저기 있었는데, 대부분 도·소매를 겸해서 했고 요정 거래를 많이 했다. 당시 요정은 지금의 불종거리 코아 제과 뒷편에 많았다. 어린 시절 문신은 청주를 자전거에 싣고 배달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부용청주 공장은 현재 서성동 덕천아파트 부지 전체에 걸칠 정도로 컸다. 일본에서 귀국 후 왕성한 미술작품 전시회를 하는 동안 문신은 양조장에 아틀리에를 마련해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문신은 친구들이 놀러 오면 큰 술통에서 바가지로 술을 퍼와 함께 마시곤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 현재 경남에는 함안군 칠서면에 금관 청주 (이화) 공장이 있다.
** 위 내용은 지역신문, 관련 홈페이지, 향토사 연구하시는 분들의
자료집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첫댓글 참 대단한 기사입니다. 두고두고 읽고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