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적는데, 이 글에서 별도로 표시 안 한 모든 내용은 위 링크의 글에서 복사해서 온겁니다. 제가 쓰거나, 그린게 아닙니다.
주의 - 원본 글을 쓴 이도 100%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음을 경고했음.
크룸Krum
803 - 814
불가르 제국의
칸, 크룸
CE 805, 크룸은 아바르 칸국의 패배(791년에 프랑크 제국의 샤를마뉴에게 당한 패배. 이 이후 아바르는 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각주:1] - 옮긴애)와 붕괴(앞선 패배 이후 아바르인들은
795년에 프랑크 통치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피핀에 의해 796년 수도가 점령당하고, 805년에 완전히 멸망
당했다.[각주:2] - 옮긴애)를 이용해 아바르의 영토 약간을 손에
얻으며 권위를 키웠다.
CE 809, 크룸은 세르디카Serdica(소피아 Sofia)를 포위하고 항복을 권고했다. 비잔티움의 수비대는 항복시 안전을
보장한다는 그의 약속을 믿고 항복하였으나, 모두 학살 당했다.
CE 811 초기, 니케포로스 1세가 불가르에 대한 대규모 원정군을 추진, 곧 마르켈래Marcellae로 진군했다. CE 811
6월 11일에 크룸이 협상을 시도했으나, 니케포로스는 무시했다. 그의 군대는 발칸 산맥the Balkan Mountains에
매복한 불가르인들을 피해서 진군, 모에시아Moesia에서 원정대를 막아선 12,000명의 불가르인들을 격파하였다. 급히 소집된
50,000명의 또 다른 군대가 불가르의 수도 플리스카Pliska의 성벽 앞에서 스러졌고, 6월 20일 황제는 플리스카를
점령했다.
니케포로스 1세와 그의 군대는 불가르의 수도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크룸은 그의 백성을 동원하여(여성들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제국군이 진군할 산맥에 매복하였다.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던 도중, 전투 직전에야 이를 알아차렸다. 충격받은 황제는
근위대에게 "우리에게 날개라도 있지 않다면, 이 위험에서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는 말만 반복했다. 6월 26일의 해가 뜰 무렵,
비잔티움 군대는 버르비카 언덕the Vărbica pass에서 해자와 목재 성벽을 마주하고서는 그들이 매복에 걸려들었음을
알아챘다. 니케포로스는 그의 병사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전투의 와중에 죽임을 당했고, 그의 아들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는
목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뒤에 제국 근위대에 구조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크룸은 황제의 두개골을 은으로 도금해 술잔으로 사용했다 한다. 이런 이야기는 그의 잔학성과 그 이후에 그가
비잔티움의 영역에 대해 취한 원정과 약탈을 통해 강화되었고, 그에게는 "새로운 센나케립New Sennacherib(아시리아
왕[제위 기원전 705~681]. 구약성서에 '산헤립'이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성경에서는 그의 최후에 대해 유다 왕국의 공격했다가
왕 히스기야와 예언자 이사야에 의해 크게 패한 뒤 그가 모시는 신아헤에리바 신의 신전에서 군사 2명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각주:3] 원정 직후[크룸은 직전이지만]에 갑자기 죽었다는 점이
크룸과 공통점인듯 하다. - 옮긴애)"라는 별명을 주었다.
CE 812, 크룸은 비잔티움의 트라케 지방을 침공하여 데벨트Develt를 점령하였다. 그 주변의 주민들은 겁을 먹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쳤다.
위와 같이 힘을 확고히 한 크룸은 716년과 같은 평화를 제안했다. 새 황제 미카일 1세의 권력이 당시에 미약했기 때문에 그는 이
제안을 수락하지 못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CE 812 가을, 크룸은 황제를 압박하기 위해 메셈브리아를 포위, 점령했다.
CE 813 2월, 불가르인들이 트라케를 약탈하였으나 황제의 군대에 의해 격퇴당했다. 이 성공에 힘을 얻은 미카일 1세는
결정적인 승리를 기대하며 제국 전체의 군대를 모아 북쪽으로 향했다. 크룸 역시 군대를 모아 남쪽의 하드리아노폴리스로 향하다가
베르시니키아Versinikia에 야영지를 세웠다. 그 해 6월 22일, 마침내 비잔티움 군대가 공격을 가했으나 갑자기
도망쳤다(사실 비잔티움인들의 작전 결여와 내부 불화 때문이다.[각주:4] - 옮긴애). 크룸의 기병이 이를 추격했고, 미카일
1세의 패배는 명확해졌으며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새 황제(위의 패배로 미카일은 실각했다.[각주:5] - 옮긴애) 아르메니아인 레온 5세(위의 전투에서
미카일을 버리고 후퇴한 인물이다.[각주:6] - 옮긴애)는 협상을 제의하여 크룸과 회담 약속을
잡았다. 크룸이 도착하자 매복중이던 비잔티움의 궁수들이 그를 향해 활을 쏘았다. 크룸은 약간의 상처를 입었지만 겨우 탈출했다.
분노한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을 황폐화시켰고, 하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했다. 그 와중에 그는 그 주변의 주민들(이중에는 미래의
황제인 바실리우스 1세의 부모도 있었다)을 다뉴브 강 너머로 이주시켰다.
크룸은 그 해 겨울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을 준비하며 보냈다. 소문에 의하면 이 때 그가 준비한 공성병기들을 운반하는데 우마차
5,000여대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는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인 814년 4월 13일에 죽어버렸고, 그의 권력은 그의
아들인 오무르타그Omurtag가 계승했다.
오무르타그 칸
814 - 831
오무르타그
크룸 칸의 급작스런 죽음 이후 많은 수의 불가르 병사들이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트라케로 돌아갔다. 비잔티움 황제
아르메니아인 레온 5세는 814년 여름의 짧은 위기를 잘 이용해 불가르인들에 대항했다. 부르토디조스Burtodizos 마을(현재의
바배스키Babaeski로 생각된다) 부근의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815년에 오무르타그가
비잔티움과 30년간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에 관한 내용이 새겨진 비석이 슈멘Shumen 지방의
셀츠시Seltsi 마을 부근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비석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트라케 국경은 데벨트 근처의 흑해안에서 시작되어 에르케시야Erkesiya의 흙 장벽과 마리티사 강the Maritsa
river의 마크리 리비다the Makri Livada(현재의 하스코보 지방)을 지나 로도페 산맥the Rhodope
mountains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필리포폴리스Philippopolis(플로브디프Plovdiv)는 아직 불가르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다.
비잔티움에 남은 슬라브인에 관해서는, 불가르인들이 비잔티움 포로들과 그들을 교환할 것을 제안했다.
전쟁을 통해 생긴 기타 포로들의 교환.
CE 823, 슬라브인 토마스가 비잔티움 황제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고, 스스로 황제의 관을 썼다.
오무르타그 칸은 마카일 2세를 돕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CE 818, 슬라브 부족 티모차니Timočani, 아보드리테스Abodrites, 브라니체브키Braničevci가 계속해서 중앙
집권화 되는 불가르의 종주권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프랑크 황제 루도비쿠스 경건왕Louis the
Pious의 지원을 받았다. 824년과 826년 사이, 오무르타그는 프랑크 왕궁과 접촉해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해보려 했다.
프랑크인들의 협력을 얻어내는데 실패한 오무르타그는 결국 다뉴브 강을 통해 함대를 드라바Drava로 보내 남동부 판노니아에 대한
불가르인들의 통치를 복구했다.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에서는 프랑크인들이 패배했다. 짧은 대치기를 보낸 두 국가는 곧 관계를
회복했고, 오무르타그는 슬라브인들의 족장을 그의 사람으로 교체했다.
불가르의 오무르타그로부터 독립하려는 몇몇 슬라브 족장들의 실패 이후 이
광대한 국가에 존재했던 슬라브인들의 자치권은 결정적인 파멸을 맞았다. 그는 행정적인 개혁을 해서 이 지방을
콤미타티comitati(단수형은 콤미타트comitat)라 불리우는 거대한 지역 단위로 나누어 카나수비기Kanasubigi(금석문에
세겨진 불가르 지도자의 호칭. 대충 칸이라는 의미로 생각하면 되겠다.[각주:7] - 옮긴애)에게 직접 임명된 지방관을 보내 다스렸다.
이 지방관은 군권과 민사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군대는
통합되었다. 이제 더 이상은 슬라브 보병과 불가르 기병이 구분되지 않았다. 카나수비기의 재상들, 카브칸kavkhan(제1차 불가르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를 보는 관직으로, 그 위계는 칸 바로 다음이였다. 불가르 군대의 총사령관이며, 외교 업무도
담당하였고, 보야르 회의의 일원이기도 하다.[각주:8] - 옮긴애)과
이치르구-보일ichirgu-boil(제1차 불가르 제국의 카브칸 다음가는 지도자. 수도의 수비대를 지휘한다. 평시에는 외교 업무를
보고, 전시에는 400명의 중기병을 지휘한다.[각주:9] - 옮긴애)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 개혁 덕분에
불가르 제국은 한층 더 강력해지고 중앙 집권화되었다.
고향에서 오무르타그는 거대한 건축물들을 플리스카에 세웠는데, 이는 811년에 비잔티움 군대에 의해 파괴된 것을 복구하기
위함이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많은 수의 종교 건물, 왕궁과 요새를 만들었다. 그의 건축 활동은 플리스카-프리슬라브 문화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오무르타그는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의 아버지인 크룸이 불가르에 정착시킨 포로들을 제어하기
위해서였다.
말라미르 칸
831 - 836
CE 831, 오무르타그가 죽자 아들 말라미르가 그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는 오무르타그의 장남이 아니였는데, 이는 오무르타그의
장남인 엔라보타Enravota(보인Voin)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계승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말라미르가 즉위했을ㅤㄸㅒㅤ
그는 어리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국정은 그의 재상(카우카노스kaukhanos)인 이스불Isbul이 국정을 이끌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CE 836, 비잔티움과 불가르 사이에 맺어진 20년간(820년에 미카일 2세가 비잔티움 황제로 즉위하면서 양국은 평화 조약을
재확인하는데, 아마 이때 조약을 좀 조절한 것이 아닌가 싶다.[각주:10] - 옮긴애)의 평화 조약 기간이 끝나자 비잔티움 황제
테오필로스는 불가르의 변경 지역을 황폐화했다. 이스불이 이끄는 불가르인들은 그 보복으로 하드리아노폴리스까지 들어갔다. 이 ㅤㄸㅒㅤ-이
이전일지도 모른다- 불가르인들은 필리포폴리스와 그 주변 지역을 합병했다.
CE 836, 말라미르가 죽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이는 그가 그의 형을 처형(833년, 말라미르는 형 엔라보타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형했다.[각주:11] - 옮긴애)한데 대한 천벌이라고 한다.
프레시안 칸
836 - 852
프레시안
비잔티움의 사료들을 조합해보면, 프레시안 1세는 오무르타그의 아들인 즈비니카Zvinica(즈버니츠저스Zbēnitzēs)의 아들인
것 같다.
프레시안이 즉위했을때, 그는 어리고 경험이 없었기에 그의 삼촌인 말라미르와 마찬가지로 국정은 그의 장관(카우카노스)인 이스불이
책임졌던 것 같다. 프레시안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된 837년, 테살로니카Thessalonica 부근의 슬라브인들이 비잔티움 황제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테오필로스 황제는 불가르인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동시에 그의 함대를 다뉴브강의 삼각주로 보내 비밀리에
크룸에게 끌려가서 다뉴브강 넘어에 강제로 정착한 비잔티움인들을 탈출시켰다.
그 보복으로 이스불은 트라케와 마케도니아의 에게 해안을 따라 원정을 행하여 필리피Philippi를 점령했다.
그 후에 불가르 인들은 현재의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프레시안의 통치 기간은 불가르인들이 마케도니아 방면으로 확장해 그 주변의 슬라브 부족들을 통치하던 시기와 분명히 일치한다.
하지만 839 - 842년의 세르비아에 대한 프레시안의 원정은 실패했다. 프레시안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세르비아와 불가르인들의
관계는 불편했다.
이 시기 불가르 제국 주요 관직의 명칭들
("이치르구ichirgu"는 투르크-알타이어에서 왔으며 "내부의internal"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고, 카우카서스쪽의 언어의
"이처르호ichirho"에서 왔으며 "궁수archer"를 의미한다는 이야기도 있다.[각주:12]
또, "Boil"이라는 칭호는 동유럽에서 봉건 귀족을 의미하는 "보야르boyar"의 어원이다. - 옮긴애)
(맨 밑에 있는 상자에 "어미로 Ichorgu-가 붙는다"
는 부분은 "앞 부분에 Ichorgu-가 붙는다"를 잘 못
입력한 것 입니다.)
원본 글을 쓴 사람은 크룸 이전의 불가르 제국 지도자들을 "중요하지 않다"면서 생략(……)했기에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프레시안 이후의 불가르 제국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는데, 이건 아마 프레시안이 죽은 뒤에 그를 계승한 보리스
1세가 그리스 정교로 개종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투르크에 대한 유일한(……) 책인 대한교과서 주식회사의
터키사에서도 이 ㅤㄸㅒㅤ 이후의 제 1차 불가르 제국에 대해 "이후
역사에서 기독교인으로 활약하게 된다. … 불가르 투르크국은 완전히 비잔틴-슬라브 문화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각주:13]"다면서 생략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제 1차 불가르
제국에 대한 약간의 정보겠지요.
그건 그렇고, 외국 인터넷도 우리나라와 비슷한지 이런 글을 쓰고 나서 참고한 글들 소개를 안 해주더군요. 게임 사이트라
그런가…. 그래도 모르는 부분들을 찾아본다고 인터넷에 검색을 좀 해보니, 대부분 위키 백과에 있는 내용들이더군요. 몇몇 문단은
아예 복사 -> 붙여넣기 했고요.
하긴, 그 글을 불펌한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쨋든 저도 양심은 있으니 걸리면(……) 글 싹 다 지우고 잠수타겠습니다. 물론 안 걸릴꺼 아니까 이런 말 하는겅미.
'카나kana'가 '칸khan'의 옛 형태라고 추측된다. 그 어원과 의미에 대해서는
고대 투르크어에서 왔고, 의미는'군대의 주인'(고대 투르크어)라는 설도 있고, 인도-유럽어족에서 왔고 의미는 '신이 보낸
(지도자)'이라는 설도 있다. 위키 백과의 "Kanasubigi" 항목.
첫댓글아바르족의 붕괴는 샤를마뉴 이전 그러니까 프랑크제국이 들어서기전 헤라클리우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바르족의 대칸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우 2세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플을 앞뒤로 협공하기로 했는데 페르시아해군은 모두 절멸당했다고 육지에서공성전을 벌이던 아바르족과 그떨거지부족들은 패퇴 이 패배이후로 아바르족칸이 지배하던 슬라브족의 영향력이 쇠퇴하기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헤라클리우스 이후 불가르족이 스클라바니아로 들어와 슬라브족과 함께 살며 옛 모에시아의 엉덩이를 깔려고하자 헤라클리우스의 증손되는 콘스탄티누스 4세가 원정을 행하지만 대패하고말지요. 이 전투를 현불가리아 공화국에서
네 아마 그렇게생각되어야 할것같습니다; 이미 아바르족은 그때 패배이후로 칸의 권위가 실추되서 근근히 버티다가 프랑크와 불가르의 협공에 나가 떨어진것 같더군요. 후에 보리스 1세가 개종하던 그 시대상황과 모라비아에서 비잔티움에게 요청한 선교사업의 면면을보면. 보리스1세는 처음에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모라비아를 두고 프랑크와 손잡고 압력을 가해서 모라비아왕국에서 비잔티움에게헬프를 요청했고 이에 비잔티움은 보리스의군대가 북쪽변경지대 즉 모라비아부근에 나가잇는것을 이용해 불가리아로 쳐들어가서 무력시위를 해서 강제개종을 시켜버렸죠
저 베르시니키전투만해도 불가르족의 장기인 산악전을 포기하고 정면으로 제국군과 붙었는데 승기가 비잔티움쪽에잇다가 후에 레오 5세가 되는 그작자가 군대로 하여금 후퇴를 하도록 미리 지시했기에 도주. 결국 미카엘 랑가베는폐위되고 목숨만은 보전되었으나 그 자식들은 모두 곶아가 되어야햇지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스트라테고스가 불가르 제국군을 공격하는 동안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 아르메니아인 레온이 본대를 따르지 않고 갑자기 후퇴했죠. 저도 그런식으로 정확하게 적고 싶었는데, 왠지 주객이 전도되는듯 해적지 않았습니다. 아리우스님 덕에 준비한거 하나 써먹어보네요ㅎㅎ
바실리우스 2세에게 편입된후 150여년간 비잔티움제국에 속박되어있었다가 앙겔로스 왕조 성립후 독립합니다. 그 뒤 이반 아센 2세때 다시 부흥을 맞이했다가 아센 2세가 어린아들을 남겨놓은채 죽고 또 몽골군이 대거 침입해서 금장한국의 속국이 되지요. 금장한국의 어느 몽골왕자가 도주해서 잠시 불가리아 차르도 해먹기도했죠
첫댓글 아바르족의 붕괴는 샤를마뉴 이전 그러니까 프랑크제국이 들어서기전 헤라클리우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바르족의 대칸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우 2세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플을 앞뒤로 협공하기로 했는데 페르시아해군은 모두 절멸당했다고 육지에서공성전을 벌이던 아바르족과 그떨거지부족들은 패퇴 이 패배이후로 아바르족칸이 지배하던 슬라브족의 영향력이 쇠퇴하기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헤라클리우스 이후 불가르족이 스클라바니아로 들어와 슬라브족과 함께 살며 옛 모에시아의 엉덩이를 깔려고하자 헤라클리우스의 증손되는 콘스탄티누스 4세가 원정을 행하지만 대패하고말지요. 이 전투를 현불가리아 공화국에서
아바르인들의 국가라는게 명확하게 존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가가 끝장난 시점은 그쪽인가 보군요. 그렇다면 위 글에서 아바르족이 패배했다는건 프랑크 제국 변경이 아바르인들에 의해 황제가 개입할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찌그러졌다고 봐야하는 걸까요?
네 아마 그렇게생각되어야 할것같습니다; 이미 아바르족은 그때 패배이후로 칸의 권위가 실추되서 근근히 버티다가 프랑크와 불가르의 협공에 나가 떨어진것 같더군요. 후에 보리스 1세가 개종하던 그 시대상황과 모라비아에서 비잔티움에게 요청한 선교사업의 면면을보면. 보리스1세는 처음에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모라비아를 두고 프랑크와 손잡고 압력을 가해서 모라비아왕국에서 비잔티움에게헬프를 요청했고 이에 비잔티움은 보리스의군대가 북쪽변경지대 즉 모라비아부근에 나가잇는것을 이용해 불가리아로 쳐들어가서 무력시위를 해서 강제개종을 시켜버렸죠
보리스 1세는 비잔티움의 라이벌인 신성로마제국이나 교황과 정치적 동맹을 맺으면서 비잔티움사이를 왓다갓다하면서 이익을 취하려고 노력했죠;
칸의 영광이라고 영화로까지만들었지요.
저 베르시니키전투만해도 불가르족의 장기인 산악전을 포기하고 정면으로 제국군과 붙었는데 승기가 비잔티움쪽에잇다가 후에 레오 5세가 되는 그작자가 군대로 하여금 후퇴를 하도록 미리 지시했기에 도주. 결국 미카엘 랑가베는폐위되고 목숨만은 보전되었으나 그 자식들은 모두 곶아가 되어야햇지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스트라테고스가 불가르 제국군을 공격하는 동안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 아르메니아인 레온이 본대를 따르지 않고 갑자기 후퇴했죠. 저도 그런식으로 정확하게 적고 싶었는데, 왠지 주객이 전도되는듯 해적지 않았습니다. 아리우스님 덕에 준비한거 하나 써먹어보네요ㅎㅎ
제 1차 불가르제국은 후에 비잔티움의 영향력에 놓이면서. 보편제국이념사상도 흡수해서. 보리스1세의 차남인 시메온 대제만 해도 콘스탄티노플에서 공부를 했기에 스스로가 로마황제가 되기를 원했지요. 뭐 결국실패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노플 3단셩벽 앞에 무릎꿇은 제국.(...) 그 성벽은 중세시기엔 참 사기입니다.
그 위치도 사기죠. 성벽이 3단에 삼면이 바다에 면해 있으니 이건 뭐….
시메온 대제는 나름 파티마조와 손을잡고 파티마조에 해군병력을 빌려서 앞뒤로 협공하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
은근히 도스시절이 생각나는 그림들
좀 듣보 국가라 그런지 이미지 파일도 가뭄임여(....)
ㅋㅋㅋ
코에이 고전명작들이 생각나능
13세기 무렵에 불가르 왕국이 다시 부흥하지 않았나요? 그 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있던 라틴 제국과 싸웠다고 하던데...
그렇지만, 그떄 불가르 왕국과 위에서 다룬 왕국은 다릅니다. 주변의 국가, 민족에 동화되버렸거든요. 처음 이슬람 세계에 발을 내딪은 투르크인들과 지금의 터키 사람들이 다르듯이, 유럽에 처음 온 마쟈르인들과 지금의 헝가리인들이 다르듯이요.
바실리우스 2세에게 편입된후 150여년간 비잔티움제국에 속박되어있었다가 앙겔로스 왕조 성립후 독립합니다. 그 뒤 이반 아센 2세때 다시 부흥을 맞이했다가 아센 2세가 어린아들을 남겨놓은채 죽고 또 몽골군이 대거 침입해서 금장한국의 속국이 되지요. 금장한국의 어느 몽골왕자가 도주해서 잠시 불가리아 차르도 해먹기도했죠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 황제의 전처가 불가르족 왕녀입니다;
ㅍㄱㅇ
어디로 퍼간다는 말씀이신지?
링크 좀 쎄워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