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장1-11절 *천국의 종려주일!
오늘도 예배의 자리로 인도해주신 하나님 아버지 경배하며 찬양한다!
[우리 서로 인사하자.] -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오늘은 [천국의 종려주일]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한다.
*종려주일
: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의와 아름다움, 승리 등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날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다.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그대로였으며, 그래서 '호산나주일'이라 불리기도 했다.
종려주일의 주인공은 물론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주목을 받은 스타가 있는데 바로 나귀새끼이다. 오늘의 본문 2절은 나귀새끼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본래 과거 역사에서 전쟁에 승리한 장군이나 방문중인 대국의 황제는 잘생긴 군마를 타고 도시에 입성하곤 했다. 그러나 인류의 메시아로 예언된 주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함이 정말이지 신기한 구경꺼리였을 것이다. 정녕 그분은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한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지도자였다.
이 어린 나귀 새끼입장에서 보면 이날은 그의 생애 최고의 날이었을 것이다.
메시야를 태우고 들어올 때 들려오는 군중들의 환호성, 박수갈채는 그의 가슴을 얼마나 설렘으로 들뜨게 했을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리는 감격, 그가 느낀 감격의 본질은 바로 쓰임받는 감동이었을 것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을 출발한 장소가 벳바게 마을이었다고 증언한다.
예루살렘 동쪽에서 시내로 입성하려면 3km떨어진 베다니 쪽에서 감람산 남쪽 정상에 위치한 마을 벳바게를 지나 감람산을 넘어가야한다. 벳바게: [덜 익은(이른) 무화과의 집]이란 의미인데 이곳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지역이었으며, 예수님께서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일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금은 “엣두아르”마을로 불리우는 곳으로 여기에 예수님 종려주일 입성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 아담한 교회당 내부의 전면에는 예수님이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성화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지금도 해마다 종려주일이 되면 이 교회에서 출발하여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행렬이 재현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이 종려주일 어린 나귀가 겪은 위대한 체험의 교훈은 무엇이었을까요?
1. 존재적 의미의 체험이다.
세상에 그 많은 나귀 중에 나같이 어린 나귀가 메시아의 예루살렘입성을 위해 선택되었다는 사실, 이것은 그 무엇보다 이 나귀에게 특권이었고 기쁨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이 어린 나귀가 벳바게 건너편 마을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메어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이미 알고 계셨다. 본문 2절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 자신이 이 나귀의 궁극적인 주인 되심을 선포하신다. 이어지는 3절을 보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어린 나귀가 이렇게 쓰임 받을 일이 예수님 태어나기 약 520년전 구약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어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스가랴 9:9~10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런 사실을 가르쳐 총체적으로 ‘선택의 교리(doctrine of election)라고 말한다. 주님이 ’미리 정하시고‘(예정) ’미리 아시고‘(예지) 그가 사용하실 대상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 나귀는 그렇게 선택될만한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적 선택‘이었다. 그래서 이런 선택을 다른 말로 ’은혜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여러분, 나귀새끼 한 마리도 이렇게 쓰임받을 계획으로 예정되고 선택되어 태어난 것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무런 의미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그런 존재이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인생이 어떤 목적도 의미도 없이 우연히, 내가 원치 않았는데 그냥 아무렇게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고 믿고 산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과 인생의 가치는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다는 것을 철학/ 인문학/ 내 자신에 대해 조금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심오한 도를 터득한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부여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존재적 가치와 의미를 망각!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그러면 당신은 깨닫습니까?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그는 나를 사용하실 놀라운 계획을 만세전부터 정하시고 나를 이 땅에 보내셨고 존재케 했음을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선택의 확신을 갖는 것이 믿음의 승리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베드로후서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확신하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삶으로, 행동으로, 열매로, 거듭남의 변화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것을 확실하게 행하는 성도는 절대로 죄로 인해, 아무리 많은 물질과 명예를 소유했어도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인생으로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유와 목적과 가치는 바로 하나님이 나귀새끼와 같은 나를 택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을 태운 나귀새끼와 태우지 않은 평범한 나귀새끼는 그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완전 다름!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주님과 떨어져있거나 주님없는 나의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고백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이것도 부족해서 그는 또 이렇게 선포했다.
로마서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나귀새끼와 같은 모습? 화려하지도, 위엄차지도 못한 존재? 그러나 주님을 태운 나귀!
오늘 종려주일예배 – 주님을 태운 나귀새끼와 같이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성도들!
2. 영광으로의 행진.
이 날 별로 일도 해본 적이 없는 이 어린 나귀새끼에겐 생애 최고로 힘든 날이기도 했다. 적어도 2km 이상의 거친 비탈길을 이 나귀새끼가 소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벳바게에서 예루살렘 시내까지는 비탈길과 언덕 그리고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다른 나귀새끼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내가 선택되어서 이런 고생을 하는지!
그러나 이 어린 나귀가 이날 걸어간 길은 고생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간 길은 고난과 동시에 영광의 길이기도 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시자 사람들은 그들이 입고 있던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8-9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무리가 소리 높에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렇다. 우리가 평생 나귀처럼 예수님 태우고 살면 예수님 고난이 내 고난도 되지만 예수님 영광의 자리에 나 또한 참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하소서) 구원의 주님을 찬양하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평화의 왕을 높이는 행진의 걸음 걸음에 나귀는 힘들었겠지만 나귀새끼 평생에 가장 큰 영광으로의 행진이었다!
사실 이 광경은 장차 우리가 완성된 천국에 입성할 때, 천국의 큰 잔치에 참여할 때 일어날 일들의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7:9-12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그날은 이 땅에서의 종려주일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스케일의 축제가 될 것이다.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 모든 백성들 중에 예수님을 자기 인생에 태우고 살았던 모든 사람들 모든 백성들이 우리를구원하신 주님을 함께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 영광으로의 행진, 영광으로의 참여, 천국의 큰 잔치에 모두 참여하는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그러나 그 영광의 축제에 자랑스럽게 참여하기 위해서 아직은 우리에게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날 그 영광의 자리에 부끄럼이 없도록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고난, 사명의 성취를 위해 걸어야 할 길이 남아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17-18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한다. 그 고난은 내가 스스로 자초한 죄의 삯으로서의 고난이 아닌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고난이어야 한다. 이런 고난을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스티그마(stigma)’ 곧 예수님의 흔적이라고 불렀다. 이런 고난의 상처는 그날 우리의 영광의 훈장이 될 것이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영국의 참전 용사들이 고국귀환 환영축제 퍼레이드가 준비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런던의 중심가는 사람들의 물결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정해진 시각 영국의 상하원 의원들, 그리고 여왕폐하가 자리를 잡자 개선 군인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한 부대, 한 부대가 거리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우렁찬 함성과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부대가 중앙 무대가 있는 거리로 들어서자 여왕을 비롯한 모든 시민들은 기립하여 끝나지 않는 박수와 경의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상이용사들, 전장에서 부상당한 이들이었다. 팔을 잃고, 다리를 잃고 어떤 이들은 들것에 실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그날의 hero 영웅들이었다. 그들의 상처는 곧 그들의 훈장이었다.
*종려주일은 2천년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회적 사건이나 벳바게에서 매년마다 하는 행사가 아닌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말씀의 증거이며 마침내 나귀새끼와 같은 우리들이 모든 신앙의 여정을 마친 후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이루어질 바로 그 영광의 종려주일을 예시하는 또 한번의 체험이며 성경말씀의 실제적 성취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주일 천국의 축제를 이곳에서 1,2부 연합예배로 드릴 것이다.
그날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지만 부활 승리하신 만왕의 왕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며 찬양하는 부활절 예배를 드릴 것이다. 이날은 우리 가족들, 형제와 친척과 이웃들을 초청하셔서 죄사함을 받은 성도들이 누리는 천국의 기쁨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하고 왜 우리가 주님을 믿는지, 나귀새끼와 같은 우리들에게 어떤 체험들과 영광이 임했는지를 나누고 그들도 부활의 주님앞으로 초청하고 인도하는 귀하고 복된 예배가 되길 축원한다.
오늘 종려주일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기억하자!
1. 존재적 의미의 체험이다.
2. 영광으로의 행진.
찬양하고 기도하자.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