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따라 달라진 세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이희석
까치설날 아침이다. 양력 1월 1일 신정이 어제 같은데, 벌써 구정을 코앞에 두고 있다. 아니다. 구정이 아니라 설날이라고 해야 옳겠다.
시간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어른들의 생각일 뿐이다. 마냥 즐거운 우리 아이들의 시계는 하루가 길기만 하다. 1년 단 한 번의 세뱃돈을 기대하며 설날이 얼른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한층 더 지루하리라.
요즈음 아이는 세배 자체보다는 세뱃돈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하다. 설날이 되면 우리 집 아이들도 세뱃돈 받을 생각에 설레며 ‘올해는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세뱃돈 받으면 뭐하지?’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 것이다. 나는 세뱃돈을 줘야 할 처지이다. 주고 싶은 대상이 많다 보니 은근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남들은 세뱃돈 지출에 보통 얼마나 쓸까? 얼마가 적정한 세뱃돈일까? 언제까지 줘야 하나? 스스로 묻다가 은행에 가서 수십만 원을 찾았다. 옛날에는 설빔과 음식 장만에 들어갈 비용이 주된 걱정거리였으니, 금석지감이 든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세뱃돈을 받아 본 적이 거의 없다. 설날이나 정초에 이웃 어른들은 물론 형제자매나 동년배끼리도 세배를 했다. 세배를 하면 주로 어른들께서 덕담을 들려주셨다.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자라서 그런지 세뱃돈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동무들도 보지 못했다. 세배를 다니며 음식을 배부르게 얻어먹었던 기억만 남아 있다. 온 동네 어른들을 다 찾아가 세배를 마치려면 하루도 모자라기 일쑤였다.
나는 그동안 설날에만 세배하는 것으로 알았다. 최근 들어서야 우리 윗세대들이 섣달 그믐날에 저녁을 먹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가까운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옛 어른들은 묵은세배를 하지 않은 채 세배하러 찾아다니는 이가 있으면
“아무개는 묵은세배도 모르면서 세배는 곧잘 하는구먼!”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묵은세배는 그 동안 무사히 잘 보냈다는 것을 알리는 한 해의 마지막 세배이다. 설날 세배와 달리 어머니나 아주머니는 잘 참여하지 않았고 주로 아버지 세대가 조부모 세대를 대상으로 드렸다. 하지만 설빔을 입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먼 친척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드린 뒤에 집으로 돌아와서 마지막으로 자기 집 어른들께 드렸다. 설날 세배와는 달리 형이나 오빠들에게 묵은세배를 하지 않는데 심술궂은 형들은 묵은세배를 하라고 거들먹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묵은세배는 세뱃돈이 없다. 행여 세뱃돈을 받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세배를 드리고 용돈을 넣은 봉투를 드려야 한다. 다음날 손자 손녀들에게 줄 세뱃돈을 아버지가 챙겨 드리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이러한 조상들의 배려와 숨은 지혜가 존경스럽다.
최근에는 연말의 맨 끝 의례인 묵은세배 풍속이 거의 사라졌다. 연초 맨 처음 의례인 세배만 있을 따름이다. 송년회는 잘 챙기며 묵은세배는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무식이 있으면 종무식이 있고 신년회가 있으면 송년회가 있기 마련이다. 묵은세배 없이 설 세배만 하는 것은 종무식 없이 시무식만 갖는 맥락과 닿아 있다.
묵은세배를 알고 나서 우리 집 가족들이라도 묵은세배를 되살려 볼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친척 어른들과 자식들 제각기 멀리 떨어져 있고 나 역시 이웃 어른들과 멀어지기 쉬운 아파트에 살면서 바빠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어 의식주는 넉넉해졌으나 먹고살기에 더 분주하여 예의를 차릴 여유가 부족해지고 있다.
웃어른께 세배하고 나면, 자식에게 세배받기 전에 먼저 부부가 맞세배를 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이날 이때까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참 의미 깊은 세배라는 생각이 들어 뜬금없이 올해 처음 시도해 보았다. 어색하고 쑥스러웠으나 사뭇 진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계속 실천하다 보면 멋쩍은 마음도 줄고 부부간의 정의(情誼)도 두터워질 성싶다.
또한 일가친지가 아니어도 동네 어른들이나 선배를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 것이 오랜 풍습이었다. 세배에 얽힌 한 이야기를 옮겨 본다.
정월 초에 어느 중노인이 이웃에 사는 상노인에게 세배하러 갔다.
“함께 늙어가는 처지에 세배는 무슨 세배? 그냥 앉게 고만.”
하고 상노인이 만류했다. 그래도 중노인이 세배를 하려고 하자,
“그만 됐네, 이렇게 보면 되지, 새삼스럽게 세배는 무슨?”
하고 그냥 앉으라고 권했다. 중노인은 못 이기는 척하고 세배를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상노인이 버럭 화를 내며
“이 사람아, 세배를 하러 온 것은 자네 도리이고 앉으라고 한 것은 내가 할 도리인데, 내가 그만 두라고 한다고 그냥 앉는 법이 어디 있어? 자네가 할 도리는 자네가 해야지.”
하며 꾸짖었다고 한다.
하루를 인사로 시작해서 인사로 마무리하는 우리 민족은 예의를 잘 아는 민족이다. 그래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른들께 인사하고 하루를 보내며 잘 때도 인사를 한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친구들과 동료들을 처음 만날 때 서로 인사하고 헤어질 때도 인사를 한다. 이처럼 모든 인사예절은 처음과 끝이 짝을 이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연중 짝을 이루는 묵은세배와 설 세배를 재조명하여 살려보는 것도 그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하겠다.
이번 설에는 아이들의 세뱃돈을 올려 주어야겠다. 더불어, 잊혀져가는 좋은 세배풍속에 관해 알려 주어야겠다. 주어지는 여건 안에서 다가올 섣달 그믐날부터는 묵은 세배를 시도해 볼 요량이다. 내일이면 어른들께 세배하고, 아이들의 세배를 받으며 모두가 나이를 먹을 것이다. 우리 모두 나이를 한 살 먹으면서 더 철이 들고 자랐으면 좋겠다.
(2014.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