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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덕의 눈물 시장의 보물 김인기
누구라도 대구에 오거들랑 아무나 붙들고 봉덕시장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라. 그러면 더러는 싱거운 녀석 다 보겠다는 투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야 봉덕동에 있지, 그러니까 봉덕시장이지.” 다시 정색을 하며 봉덕동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라. 이러면 이런 반문이 나오리라. “아, 그거야 미군부대가 있는 곳 아니냐?” 그러나 이들도 이 부대 자리가 과거에는 일본군이 있던 곳이라는 사실까지는 미처 모를 것이다. 이 시장이 부침해온 그간의 내력도 잘 모를 것이다. 그래도 행여 연로한 분들 가운데 몇몇은 이 주변에서 전쟁 피난민들의 정착촌이나마 잠시 떠올리려나. 여기에는 이런 소음과 먼지도 스몄다. 개발독재시대의 비바람도 비켜가지 않았다. 서민들의 일상사가 별스러울 게 없다. 이들은 저마다 눈앞의 필요에 골몰한다. 그러니 뭘 더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이게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나?’ 이런 거창한 담론은 지식인들이나 한다. 그렇다고 장삼이사들의 행태가 한 시대의 흐름에서 멀리 벗어난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작은 물방울들도 모이고 모여 실개천을 이루고, 이게 또 어디에서 만나 마침내 강이 되어 굽이친다. 자잘하나마 저마다 체험도 많다. 아, 나도 한때 여기에서 뭔가를 했다니까. 나부터 이랬다. 그러나 이 또한 강이 되고 말 물방울이다. 이래서 일단의 사람들이 예술기행을 간다는 소식에 나도 응했다. 나도 강이 되기로 하였다. 얼마 전 토요일 오전, 그러니까 그게 지난 6월 5일이었다. 일행은 스무 명 남짓이었다. 나는 회원들을 잘 모르는데도 그 분위기가 무척이나 익숙하다. 역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거나 춤을 추거나 글을 쓰는 게 다 통하나 보다. 더군다나 지난달에 혼인한 최창윤 시인도 부인과 함께 왔고, 내가 ‘껑조언니’라 부르는 박 시인도 나타났다. 예술마당 솔에는 현재 네 명의 공동대표가 있다는데, 이 가운데 한 분인 손병열 님도 구면이다. 나는 지난가을 한 행사에도 참가했으니까. 몇몇 분들은 이미 두 차례나 사전답사도 했다. 손 대표는 도로를 불법으로 점거할지라도 난전이야말로 시장을 시장답게 한다는 지적을 곁들이며 여기 상황을 개략이나마 소개했다. 나는 그간 재래시장의 보물을 찾으러 다녀본 적이 없다. 이와 유사한 경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따라다니기로 했다. 마침 이번 행사에는 방송국 사람들도 장비를 갖추어 두 명이나 왔다. 이 분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취재를 하자니까, 사람들이 큰 소리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는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에 허름한 차림이라는 건데, 이 와중에도 두 손은 먼지를 털고 머리카락을 가다듬느라 부산하다. 누군가 몇 마디 말을 건네니 불평이 쏟아진다. 정치인들이 입만 벌리면 재래시장을 살린다고 하면서 주위에 할인점을 잔뜩 허가하는 짓이 다 뭐냐는 거다. 또 이 시장에는 재개발 문제도 있다. 마침 엊그저께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있었다. 그래서 저마다 할 말도 더 많았을까. 사람들이 설왕설래하며 수선을 떠노라니, 34년 경력의 일흔 살 할머니가 스윽 나타난다. 그 표정이나 말투에 거침이 없다. 명절 대목에는 유과를 만든다. 떡도 주문을 받는다. 평소에는 칼국수를 판다. 이게 이 할머니의 일이다. 유과를 만들 때 옥수수기름을 쓰느냐 콩기름을 쓰느냐에 따라 색깔이 어떻게 되느냐. 또 팥고물은 하룻밤만 지나도 쉬는 게 정상인데, 저기 저것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요즘 새댁들은 음식을 포장만 보고 사는데, 그게 얼마나 몸에 해롭겠느냐. 손님들은 여기에 와서 깔끔치 않다고 하는데, 이것도 터무니없다. 뭐가 건강에 좋은지 찬찬히 따져나 봐라. 한동안 이러다가 그만 모두 먹먹해졌다. 이 할머니한테는 자식들이 여럿 있는데, 이 분은 손이 부르트도록 일해서 이들을 다 대학교도 보냈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그만 사고로 크게 다쳤다. 그 아들이 지금은 외국에 가 있는데……. 그런데 이즈음에서 손 대표가 뭔가를 직감하고는 이 분한테 몇 마디 더 묻더니, 이내 “아이고, 어무이요, 지가 바로 아무개 친구라요.” 한다. 그리고는 이어 “아무개 장가보내느라 애 많이 쓰셨지요.” 한다. 그 분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마치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만 같다. 곁에 있던 나와 박 시인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보물을 찾으려다가 눈물만 만나게 되었으니까. 이러다가 이 분이 그만 목을 놓아 통곡이라도 하면 어쩌나. 그 우여곡절을 다 묻기는 어려우나, 그 심경을 헤아릴 수는 있다. 아들한테 약혼녀가 있었다고 하자. 자기도 가슴이 아프지만, 그래도 그만 돌아서겠다고 하면, 누가 그를 잡을 수 있을까? 그 처녀가 내내 변심하지 않겠다고 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 눈빛을 마주하기 어렵다. 그 처녀와 헤어져 새로 사람을 물색해도 걸리는 게 있다. 장한 내 아들이 어쩌다가 이리 되었나. 이런 생각을 하면 그 어머니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다. 이걸 누가 감당할 수 있으랴. 오늘 일행 중 어느 분이 오랜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을 작품으로 뜨겠다며 점토판을 가지고 왔다. 나중에 보니 과연 손도장 두 개가 선명하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어디에 어떻게 뜰 것인가? 나도 이걸 해낼 자신은 없다. 자식은 애물단지이다. 나는 이걸 방앗간에서도 확인한다. 여기 주인은 암을 앓았나 보다. 그래도 이 사나이는 쾌활하다. 본인이 그런 병을 앓았는데도 우스갯소리가 넘친다. “남자는 바람을 피우더라도 아내 몰래 피우면 괜찮아!” 그러면서 옆에 있는 부인더러 손님들한테 대접할 냉커피를 가져 오게 한다. 이 분은 여기에서 36년째 제분기와 압착기를 만진다. 자식들 생각도 여전하다. 그러면서 “내 딸은 아이가 중학생인데, 우리 순남이는 이제야 시집을 갔다.”고 한다. 최창윤 시인의 부인이 바로 따님의 친구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예전에는 여자들을 그저 아이 낳는 기계로만 알았는데, 이제 며느리를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노라 한다. “혹시라도 며느리가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어쩔 거야? 마아, 나는 며느리가 아이를 낳아주니까, 이게 고마운 기이라.” 이 분은 나름대로 행복하게 산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시장에서 방앗간이 끄떡없다. 그리고 그 생활도 소박하다. 사람들과 어울려 풍물놀이도 한다. 주위의 이런저런 대소사에도 관여해서 왁자지껄한 분위기도 연출한다. 그 연배의 어르신들 대다수는 부인이나 자식들한테 터놓고 애정 표현도 하지 않는데, 이 분은 그렇지도 않다. 내가 오래 묵어 보이는 제분기를 보며 ‘저게 고장이 나면 어쩌느냐?’ 하니, 웬만한 고장은 본인이 직접 고치노라 한다. 이 분한테는 큰 욕심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서도 어떤 기억은 아주 완강하다. 자기 고향 사람들은 영천이나 여수 사람들 못지않게 지독하다는데, 이건 과거 경험에 뿌리를 뒀다. 내 고향이 영천이어서, 그 근거를 물었더니, 영천 사람들이 그런 건 10·1사건으로 알 수 있다나. 여수 사람들이 그런 건 여순사건으로 알 수 있고. 약목 사람들도 그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나 뭐라나. 그러나 그런 불상사가 어디 이뿐이랴. 또 이런 걸 결과만으로 판정하랴. 반드시 정리해야 할 갈등이 있었는데, 이게 길을 찾지 못하고는 파탄이 났다. 바로 그게 그런 것이라면, 누가 누구더러 뭐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방앗간 사나이는 이런 분별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인간들의 품성으로 시비를 가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 있느냐?” 그러면서 이 분은 무엇이든 모질면 안 된다는 거였다. 이런 지론을 가슴에 새기며, 이 분은 그저 만사가 원만하기를 바란다. 나는 시장을 다니다가 문득 궁금했다. 요즘 청년들도 과거의 나와 같을까? 한때 나는 상인들의 언행과 어른들의 맞장구를 촌스럽게 여겼다. 이들이 자꾸만 본의에서 벗어나지 않는가? 옷이나 그릇을 사러 왔으면 그저 그 상품의 품질이나 가격 따위를 살펴서 사거나 말거나 하면 그만이지, 왜 이 양반들은 쓸데없는 너스레로 시간을 낭비하나?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너나없이 사생활도 마구 개방한다. 장남이 서울에 갔다거나 며느리가 몸살이 났다거나 시아버지가 눈길에 미끄러졌다거나. 이러다가는 달포 전에 사돈의 팔촌이 황소를 산 소식까지 전할 판이다. 나는 곁에서 이런 소동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휴, 사람들이 워낙 무식하니까, 저런 소리까지 다 하는구나!’ 그런데 이제 보니 무식한 건 바로 나였다. 오래오래 사람들은 이렇게 애환을 조절해온 것이다. 그래서 가격마저도 나름의 관례에 따라 오르내린다.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니까, 그 거래마저도 길사냐 흉사냐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진다. 인류사 전체를 두고 보면 도리어 이런 게 더 생명력이 있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요즘 자본주의 제도가 독특한 것이다. 재물을 현물이 아닌 방식으로 축적하는 것도 그렇고. 더구나 이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대도시에 산다. 누가 누군지도 모른다. 누구 말마따나 이래서 사람들이 이렇게나 금전에 집착할까? 하느님도 인간들도 다 미덥지 않으나, 이곳저곳 감춘 돈만은 이런 나를 구원하리니. 뭐, 이런 신앙이다. 정가제에는 획일화 또는 규격화라는 이념이 서렸다. 혹자는 이게 바로 상거래 질서를 확립하는 길이라거나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바라고 하는데, 그러기에 앞서 뭔가 검토해야 할 것들이 많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런 걸 도외시하고 너무나 멀리 내달려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관리자들이 판매장 직원들의 표정마저 감시한다. 그 기법도 다양하다. 자본가들은 그 관리자들을 성과로 재단하고. 이러면 사람이 인격체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러면 그 자본가들은 또 어떠냐? 생각이 이에 이르면, 나는 여기가 혹시 지옥이 아닐까 싶다. 칼국수 할머니의 발언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들도 이미 포장만 알록달록한 칼국수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면 누구라도 이에 대응해야 한다. 우리들 주위의 일부 인간들을 보라. 이들은 갖은 수단으로 재물을 그러모으고도 이를 시정하자는 법안에 ‘증오법’이니 ‘좌파악법’이니 하지 않더냐. 더러는 예외도 있지만, 대개 제 정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끝끝내 이런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그야, 뭐, 자꾸만 비밀이 생기겠지. 내 딱한 처지를 남들한테 전하거나 남들의 딱한 처지를 내가 듣는 게 그다지 편하지 않으니까. 그건 자신이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주머니가 축나는 일이다. 이게 싫다. 그래서 저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한다. 으이그, 여기에 성공하면 우아한 것이고, 여기에 실패하면 비루한 것이고. 사실은 이게 물정을 아는 게 아니고 그 꼴이 한심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사정이었으리라. 이번에 우리들이 수의(壽衣) 파는 집 할머니를 만나기로 했는데, 이 계획이 틀어졌다. 일전에 몇몇이 여기로 와서 45년 동안이나 장사를 한 그 분의 사연을 이날에 마저 듣기로 했다. 그러나 그새 사단이 났다. “어머니는 뭐 그런 이야기를 다 하려고 해요? 창피스럽게!” 이렇게 된 거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나와 박 시인이 거기로 찾아가니, 그 분은 이미 문을 잠그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내가 한동안 그랬듯이 그 자식들도 아직은 한 시대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그럴 것까지 없는 일에 그렇게 예민하지.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탓하랴. 내게도 의견이야 있다. 아마도 그런 태도를 바꾸는 게 그들한테도 좋으리라. 주위에는 늘 미신이라 할 게 자옥하다. 여기에 사로잡혀 귀한 인생을 낭비할 게 뭐 있어? 그러느니 차라리 ‘에라, 이 미친 것들, 지랄을 하더라도 곱게 해라!’고 떠드는 게 더 낫지. 이런 폭언이 귀에 거슬릴지는 모르나, 이걸 순화해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일전에 어느 경제학자는 이렇게 일갈했다. “요즘 대학생들, 스펙 쌓을 생각 말고 차라리 데모를 해라.” 이 시국에 데모가 답이 될지는 더 살펴야 하겠으나, 아무래도 청년들한테는 개똥보다 불똥이 더 어울린다. 또 이들이 스펙만 쌓아서 될 일도 아니지 않느냐. 나날이 쇠락하는 시장에서 바라보는 내 시선도 서늘하다. “사람들이 뭘 착각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 방안이란 게 당최 미덥지가 않다. 하기야 아케이드가 되어 있으면 궂은 날 사람들이 다니기에 좋다. 세금은 이런 데 쓰자고 내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 재래시장이 되살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시골의 농로를 시멘트로 포장한 것만 같다. 비록 이게 유용하기는 해도 이런다고 농촌이 되살아나지는 않는다. 내가 사계의 권위자는 아니지만, 이게 헛다리짚는 짓인 줄은 안다. 아무리 봐도 이게 아니야. 그러면 뭘 어쩌라는 거냐? 그러나 그 답변을 내가 하기는 어렵다. 나는 그게 오답인 줄은 알아도 그 정답은 모르니까. 다만 나는 재래시장의 상권을 앗아간 백화점이나 대형할인점이나 또 각종 전문점 등등의 수작에 홀리지는 않을 뿐이다. 이런 나도 때로는 거기에서 물품을 산다. 종종 알고도 속아준다. 그러나 나는 상표에 마음을 주지는 않는다. 천사들의 옷에는 재봉선이 없다. 네가 봤느냐고? 아니지. 아하, 그러니 내가 다시 이렇게 말하자. “고수들의 세계에는 쓰레기가 없다.” 그들이 재단사든 요리사든 마찬가지이다. 상인들도 고수가 되면 이와 다르지 않다. 혼인한 이래로 지금까지 46년 동안이나 그릇을 팔았다는 분한테 내가 물었다. “사장님은 그릇을 보기만 해도 저게 팔릴지 말지 압니까?” 그러자 대답이 시원스럽다. “예! 물론이지요.” 이 가게에는 간판이 없다. 그걸 만들어 걸지 않았다. 그런 게 필요도 없다. 단골한테는 그 얼굴이 간판이니까. ‘그런데 왜 이 구석에서 여태 이러고 있어요?’ 혹시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아마도 그 답변도 담담할 것이다. 그게 바로 인생이니까. 이 분한테는 남편이 수렁이었다. 조금이라도 감각이 있는 이들이라면 ‘소주’와 ‘쐬주’의 차이를 알듯 ‘원수’와 ‘웬수’의 차이를 알 것이다. 누가 대놓고 그렇게 성토한 건 아니나, 내가 듣고 보니, 그게 이런 뜻이다. “아이고, 웬수도 이런 웬수가 없어!” 여기에는 세월에 곰삭은 연민도 그득하다. 원래 신랑의 누님이 하던 장사였는데, 이걸 신랑이 이어받았다가, 결국 자신이 맡게 되었는데, 이제는 새댁들이 그릇을 사러 재래시장에 좀처럼 오지 않으니, 여기에서 하는 이 일도 끝이 보인다나. 이 분한테는 이제 여기가 세상 어디보다 더 편하다. 아이들도 여기에서 키웠다. 아무리 아파트가 편하다고 해도 거기에서는 좀이 쑤신다나. 이 분은 이렇게 늙었다. 재래시장도 이 사회의 한 부분이다. 그런 만큼 시장도 당연히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언제 우리들이 이런 영향권에서 벗어난 적이나 있었던가? 그런데도 더러는 소견이 천박하다. ‘아, 거기야 그저 양파나 감자 따위를 파는 곳 아니냐.’ 이들한테는 더 따질 여지가 없다. ‘물품을 더 싸게 살 수만 있다면야 그게 어디든 무슨 상관이랴. 설령 그게 상관이 있다고 해도, 그거야 다 남의 일이지.’ 글쎄, 이렇다니까. 그러나 재래시장이 상인들과 함께 다 몰락했다고 가정해보라. 그래도 그만일까? 그렇지 않다. 그래도 나름의 경제력을 가진 그들이 있어서 누가 횡포를 부리지도 못하거니와 사실은 이들이 이 체제의 균형추이다. ‘비록 이 현실이 고달파도 내 앞에 희망이 있어 참는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무너지면 사태는 심각하다. 시장도 온갖 것들이 켜켜이 쌓인 세계이다. 상인들 사이에도 번영회니 뭐니 하는 조직이 있어서 대소사를 처리한다. 시장이 무너지면 이것들도 무너진다. 그러면 정부에서 이걸 다 담당할까? 가당찮다. 혼자서는 어려워도 여럿이면 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얼씨구나, 우리도 해외로 나가보자.”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사족이 되겠지만, 상인들한테도 인맥이란 게 있다. 이를 통해 이들이 자식들의 진학이나 취업 따위도 상담한다. 시장이 무너지면 이것들도 무너진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시장이 있으니까, 정치인들도 여기로 와서 인사라도 하지, 이게 무너져 봐라. 아마 법률마저도 더욱 거대자본 위주로 재편될 것이다. 난들 미래사를 어찌 알겠느냐. 그래도 이런 디스토피아는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하기야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예언도 있다. “이렇게 지구마저 망가뜨리면서 너희 인간들이 어찌 무사하랴.” 딴은 그렇다. 어쩌면 우리들이 조만간 자멸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우리들이 낙관주의자가 되어 보자. 현재 새로운 형식의 판매점들도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 나중에는 바람직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 재래시장도 물품의 거래만이 아닌 여러 기능들도 다 살리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에 인간이 이 지상에서 아주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딴 형식으로든 시장은 남을 게 아니냐. 그러면 상인들도 있을 테고. 언제라도 시장은 그 시대의 형편을 고스란히 반영할 것이다. 그러나 이래도 낙관은 거의 백일몽에 가깝다. 자본의 논리에 다 맡기다가는 재앙이 온다. 공익을 표방하는 조직조차도 폐단이 있어 권력을 분산하는데, 하물며 사익을 추구하는 세력임에랴. 마침내 이것들이 국가마저 접수하면, 거의 모든 구성원들의 처지도 불문가지이다. 그러니 혹여 재래시장 소멸이 불가항력이라 해도 우리들이 수수방관할 수 없다. 시장이 담당했던 여러 기능들이라도 건져야 하니까. 내가 이런 과업을 감당할 수야 있으랴. 그러면 이런 걸 누구한테 맡기나. 결국은 민주정치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문제가 된다. 재래시장의 경쟁업체인 대형할인매장을 냉정히 바라보면, 사실은 이것들이 이미 여러 기능들을 흡수했다. 이것들이 영화관이나 식당이나 커피전문점 등등을 유치해서 시너지 효과를 낸다. 그래도 이것들이 방앗간이야 어쩌지 못했지만. 나는 봉덕시장에서 보물을 찾으려 했다가 이렇게 근심만 얻었다. 한편으로는 내게도 귀한 게 있어서 이러려니 한다. ‘하기야 누구는 보석도 눈물의 결정체라 하니까…….’ 이러다가 나는 또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 시장에는 앞으로 공방을 들여야 하나? 아니, 차라리 인근에 납골당이나 장례식장이라도 세워 망자들을 달래야 하나?” 그러나 이것도 해법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저 소비자로 자족하는 이들한테는 재래시장도 일종의 혐오시설이다. 그 영혼이 자유로워서 불편과 남루를 감수하는 이들한테는 여기가 살맛나는 곳이겠으나, 이런 사람들이 그리 많지도 않거니와 구매력도 약하다. 시장 상인들도 이들의 요청에 부응하기 어렵다. 그러면 영영 희망이 없는가? 그러나 나는 그렇게 단언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내내 주택과 여객선을 동일한 사물로 바라보지 못했다. 이것들은 성격이 판이한 별개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건축가한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주택을 사람이 살기 위한 기계라 했다. 여객선은 움직이는 주택이고. 자동차와 비행기도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었다. 그렇다. 사물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쓰인다. 예전에야 누가 전화로 상거래를 하리라 짐작이나 했겠는가? 컴퓨터와 인터넷은 원래 군사용이었다. 이러니 누가 대도시를 화분 한 개로 여긴다 해서 이상할 게 없다. 재래시장 또한 이와 다를 게 없다. 이런 사정을 헤아리면 내가 어찌 시장을 두고 망언을 하랴. 오로지 자신의 빈곤한 상상력이나 탓할 뿐이다. [201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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