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인용하지만, 소설가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에는 두 가지 형태의 아픔이 등장한다. 6·25전쟁이라는 참혹한 실존적 경험 속에서 실제로 동료를 죽이고 돌아와 아파하는 형이 있다. 형의 아픔은 명확하다. 관통상의 흉터가 있고, 그 아픔을 유발한 구체적인 비극의 기억이 있다. 그는 진짜 '병신'이다. 반면 동생은 어떤가. 전쟁을 직접 겪지도 않았고, 구체적으로 피부를 찢는 상처를 입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생은 형의 고통을 곁에서 바라보며 끊임없이 가상의 통증을 앓는다. 까닭 모를 관념의 늪에 빠져 붓을 쥐고 방황한다. 아픈 이유조차 알지 못하면서 아파하는 자, 소설은 그를 '머저리'라 부른다.
오랫동안 나는 내가 '형'과 같은 '병신'인 줄 알았다. 내 안에 거대한 실재적 상처가 도사리고 있고, 그 고통이 너무나 명확하여 나는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환자라고 믿었다. 아프니까 쓴다. 쓰다 보면 내 안의 관통상이 메워지고, 생각의 병이 글로 흘러나와 자연스레 정화될 것이라 믿었다. 치유의 글쓰기, 정직한 고백. 그 근사한 명분을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매일 밤 펜을 쥐었다. 글을 써서 나를 살려내고, 마침내 정상이 되리라는 소박하고도 간절한 신념이 나를 지탱했다.
그러나 어둠이 깊어진 어느 날, 가만히 문장과 문장 사이를 들여다보았을 때 섬뜩한 진실 하나가 눈을 뜨고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병신조차 되지 못하는 '머저리'였다.
내게는 처음부터 찢어진 피부도, 관통된 흉터도 없었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없는 빈 공터 위에 스스로 환각의 병을 만들고, 그 병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 생각을 쥐어짜며 엉터리 글을 써 내려가고 있었을 뿐이다. 아파서 쓴 것이 아니라, 쓰기 위해 아픈 척을 했다. 아프다는 착각 속에 나를 가두고 환자라는 역할극에 깊이 몰입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써 내려간 엉터리 글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쩌다 보니 나는 '작가'라는 이름표를 달게 되었다. 세상은 내 고통의 포장에 속아 넘어가 주었고, 나는 타인의 눈에 그럴듯한 문장가로 비쳐졌다. 물론 병신이 머저리로 변신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진짜 '병신'이었다면, 치열하게 쓰고 벼려내는 과정 속에서 상처가 흉터로 변하고 얼마간은 나았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글을 쓰면 쓸수록 내 안의 불편함은 사방으로 번져갈 뿐이었다. 나아지지 않는 아픔은 곧 내가 앓고 있는 병이 실재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없는 병을 만들어 스스로 머저리로 살아가는 일. 그 거짓된 환자 역할에 취해, 이제는 진짜 글과 진짜 생각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른 것은 아닐까. 나라는 존재는 과연 글을 통해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거짓된 고통의 연극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가.
결국 나는 거짓말을 해왔다. 나 자신에게도, 내 글을 읽는 수많은 타인에게도. 심지어 지금 써 내려가는 이 고백조차도 하나의 정교하게 기획된 거짓말일지 모른다. 참회하는 척하며 또다시 글이라는 도피처를 찾고 있는 머저리의 몸부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문장은 이렇게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이 글은 참인가, 거짓인가?"
논리학이나 비평의 기준을 대어본다면 이것은 전형적인 자가당착(Self-contradiction)이자 자가모순일 것이다. 거짓말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 선언 자체가 참이 됨으로써 발생하는 역설. 그러나 삶의 문맥 속에서 이 문장은 한가한 논리 게임으로 치부될 수 없다. 핵심은 단순하다. 인간은 100% 거짓말만 하며 살 수도 없고, 100% 참말만 하며 살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매일 거짓의 바다를 헤엄치지만, 그사이 사이로 참말의 섬을 딛고 선다. 거짓말을 일상적으로 일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 순간 통증처럼 튀어나오는 진심까지 거짓으로 도배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은 결코 논리적 모순이 아니다. 거짓말도 참말의 얼굴을 하고 던져지고, 참말도 거짓말의 탈을 쓰고 건네질 수 있다. 그렇기에 이 글은 참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하지만, 자기 모순에 빠져 파괴되는 글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가 지닌 생생한 표상일 뿐이다.
모순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쪼개어 본다. 창 모(矛)와 방패 순(盾). 서로를 겨누는 두 개의 무기. 그러나 모순의 본질은 서로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드러나는 아주 미세한 빈틈에 있다.
창과 방패는 서로를 완벽하게 막아서지 못한다. 미세한 빈틈으로 창이 방패를 비집고 들어가고, 그 찌름을 안에서 막아 상황이 만들어진다. 겉으로는 서로를 찌르고 막아서며 격렬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빈틈과 찌름이 조화를 이루며 '삶'이라는 형태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서로를 무너뜨리는 것 같지만, 실은 그 긴장감 덕분에 비로소 부서지지 않고 버티는 이상한 구조. 우리가 사는 방식이 바로 이러하지 않은가.
어쩌면 인간이란 자신이 참말을 하는지 거짓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채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알고서 참말을 할 때도 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을 내뱉기도 한다. 반대로 거짓이라 믿고 한 말이 뜻밖에 진실이 되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 누군가의 뼈를 찌르는 참말이 되기도 한다. 100% 알고 하는 행위도 없으며, 100% 모르고 하는 행위도 없다.
우리의 삶은 참과 거짓, 앎과 무지, 진실과 환영이 무수한 경우의 수로 뒤섞여 있는 거대한 직물이다. 놀랍게도 인간은 바로 그 '뒤섞인 경우의 수'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 완전히 맑고 투명한 진실만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우리 같은 병신 머저리들은 숨이 막혀 단 하루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완벽한 거짓뿐인 세상이라면 삶의 의미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 날아갔을 것이다.
모든 참과 거짓의 경우의 수에는 그에 상응하는 '짝작용'이 존재한다. 거짓이 던져지면 그것을 메우기 위한 가상의 통증이 일어나고, 그 통증을 달래기 위해 억지 글을 쓰다 보면 그 글이 뜻밖의 지점에서 타인의 슬픔과 짝을 맞추어 하나의 성립을 이룬다. 내가 만들어낸 엉터리 병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의 모양새로 닿기도 하고, 내가 내뱉은 거짓말이 내 안의 숨겨진 참말을 밖으로 견인해 내기도 한다. 이 유기적인 짝작용 덕분에 우리의 허무한 행위는 성립되고, 무의미해 보이는 삶은 꾸역꾸역 유지된다.
그러니 이제 와서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다. 비록 완벽하게 기쁘거나 순수한 진실에 도달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슬퍼하며 스스로를 단죄할 필요는 더욱 없다.
완벽하지 않음, 모자람, 그리고 그 모자람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빈틈. 바로 그 빈틈이 존재하기에 우리 안에서 흐름이 생겨나고 작용이 일어난다. 물은 차오르면 흐르지 않지만, 비어있을 때 비로소 흘러내린다. 가짜 고통을 앓는 머저리라 할지라도, 그 가짜 고통이 유발하는 삶의 요동침과 문장의 흐름 덕분에 나는 오늘을 살아낼 수 있었다. 참과 거짓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이 지독한 우유부단함과 머저리성이야말로 나를 숨 쉬게 하는 역설적인 호흡이었던 셈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세상의 일들이란 그저 그렇게 흘러간다.
진짜 병신이면 어떻고, 가짜 통증을 앓는 머저리면 어떠한가. 내 글이 순도 100%의 진실이든, 자신을 속이기 위한 정교한 촌극이든 그것은 이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상관없고, 안그래도 상관없는 무던한 날들이 내 앞에 길게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비워진 무감각의 날들은, 생각만큼 그리 슬프지도 않다.
오늘 밤도 나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환통을 느끼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창밖으로 어둠이 깊어지고, 내 손가락은 다시 자판 위를 번잡하게 오간다. 참과 거짓의 빈틈 사이로 펜 끝을 밀어 넣는다. 내가 짓는 이 문장들이 또 어떤 거짓을 만들어내고, 그 거짓이 어떤 짝작용을 일으켜 나를 내일로 밀어 줄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분명한 것은, 이 머저리 같은 짓을 계속해 나가는 동안에도 삶은 멈추지 않고 자기만의 작용을 계속하리라는 사실뿐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거짓으로 시작했으되 글이 되어 흘러가는 이 모순의 궤적이야말로, 내가 세상과 맺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짝작용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