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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부부가 만나기로 한 2015. 8월 20일 미팅 일자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설악산 대청봉 산행에 이어서 십이선녀탕계곡에서 복숭아탕을 경유하여 대승령을 거쳐 장수대로 하산하는 일정을 연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2015년 여름은 유난히도 덥고 불볕같은 더위가 연일 지속되고 있었다.
이미 입추가 경과하였기 때문에 늦더위가 가라 앉고 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보여야 하였는 데도 하늘은 잔뜩 구름으로 덮힌 채 마지막 폭염을 불사르기 위하여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올 해의 찌는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처럼 산행을 지속 하였던 나는 예전과 다름없이 산행을 꾸준히 진행 하리라 생각하였으나 여름 하반기 늦더위 때문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2주 동안만 잠정 산행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한 후 산행을 유지 하리라 생각하였으나 그 영향이 몸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정신이 혼미 해져서 나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다가오는 8월 20일 설악산 산행이 과연 가능할 지가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몸이 나른하여 아침 6시에 일어나기도 점점 거북하였다.
2015. 8월 20일 오전 06:00시에 집에서 출발하면 사전에 친구들과 약속한 시간인 09:00시에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 리 십이선녀탕계곡 입구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전 05:00시에 일어나 대충 몸을 추스린 후 집사람과 함께 집을 나섰다.
포이사거리에서 능인선원쪽으로 이동하다가 좌회전하여 양재 대로를 거쳐 서하남 I∙C 에서 빠져나와 경∙춘 간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도 있었으나 양재 대로가 신호등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복정역을 경유한 후 판교∙구리간 외곽도로를 우회하여 경∙춘 간 고속도로로 진입 해볼까 생각하였다.
그래서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로를 경유하여 복정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복정역에서 남한산성 입구쪽으로 이동하다가 유턴해서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 판교∙구리간 외곽도로로 쉽게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위례신도시가 착공되어 아파트를 짓느라 판교∙구리간 와곽 도로 주변의 도로가 뒤범벅되서 경∙춘 간 도로 진입로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친구들끼리 약속한 시간이 점점 촉박해 갔다.
출근시간과 맛 물려 차량이 계속 증가해가고 있었는데도 유턴해서 되돌아 가는 차량은 거의 없었다.
유턴해서 판교∙구리간 도로로 이동하는 진입로가 없어졌나 의혹이 들기 시작하였다.
더군다나 유턴하는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고 모든 차량이 좌회전을 위하여 신호를 대기하고 있었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많은 차량을 따라 좌회전을 하게 되면 곧 판교∙구리간 외곽도로로 쉽게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좌회전 신호를 받기위하여 대기하다가 신호가 바뀌자 파도에 떠밀리는 심경으로 차량의 꽁무니를 따라 이동 하였는데 구리∙판교간 진입로는 나타나지 않고 엉뚱한 위례신도시 공사 현장이 나타났다.
신호 대기를 하고 있었던 차량은 거의가 위례신도시 공사 현장으로 이동하는 근로자들의 차량이었다.
이들을 판교∙구리간 외곽도로로 진입하는 차량들 일 것이라 생각하여 따라간 것이 큰 오판이었다.
실수를 돌이키기 에는 이미 시간이 지나치고 말았다.
도로는 편도 1차선 꾸불꾸불한 곡선 도로가 계속되고 있었다.
한 번 실수가 평생 자신을 고달프게 한다는 말이 맞는 듯 싶었다.
인생살이도 이와 같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도로는 비 포장에 편도 1차선이 지속되고 있었고 차량은 경∙춘 간 고속도로 진입로 하고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순간 실수로 50분 이상을 좁은 골목길에서 헤매야 하였다.
애초에 경∙춘 간 고속도로로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팔당 대교가 전방에 나타났다.이제는 하는 수 없이 시간이 다소 소요 되더라도 경기도 양평에서 홍천을 거쳐 인제 군으로 이어지는 44번 국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팔당 대교를 거쳐 양수리에 도착하여 내비게이션을 바라보니 강원도 인제군 북면 십이선녀탕계곡 입구 에 도착해야 할 시간이 갑자기 오전 09:00시에서 오전 10:30분으로 변해버렸다.
약속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지가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것은 하늘의 뜻 이겠거니 생각하여 느긋하게 처신 하려 하였으나 자꾸만 차량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홍천을 거쳐 인제로 이동하니 시간이 다시 오전 09:00대로 단축되기 시작하였다.
그 때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 인제 휴게소에서 용무를 마친 후 다시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 리 십이선녀탕계곡 입구 주차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미 한 팀은 십이선녀탕계곡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소박하고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가워 손을 잡으며 인사를 대신하였다.
10여분 후에 교수부부 팀이 도착하여 세 팀이 환하게 웃었다.
이 세 부부팀이 이제까지 추억을 함께 만들어갔기 때문에 눈빛만 보아도 상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섯 명이 계곡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계곡물 소리가 시원스럽게 들려 운치가 있었다.
십이선녀탕은 십여년 전 개포고등학교 재직 시 친구들과 장수대에서 대승령을 거쳐 복숭아탕을 구경하고 용대 리로 하산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동행 하였던 사모님들이 무척 힘들어하였다.
난이도가 별로 높지는 않았으나 장 거리여서 힘들어 한 것 같았다.
이번에도 산행이 어려울 것 같았다.
무더위와 싸워야 하였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친구가 1년동안 안식년을 맞이하였다.
1년동안 어떻게하면 시간을 보람있고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인 가를 고심하다가 학문 연구와 체력 단련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 것 같았다.
안식일은 유대인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기인 하였다.
유대교 율법에 따라 생활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제한하는 것이 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첩경이라 생각하여 안식 일이라는 개념이 나왔다.
안식일은 6일 동안 일한 후 7일째 되는 날을 휴식하는 날로 정하고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을 갖게하였다.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6년 이후 휴식하는 7년째를 안식년이라 여기고 잠정적으로 휴식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러한 안식년은 일반적으로 선교 사역을 하는 사제들이 종교적 목적에서 주로 활용하고 있었으나 기독교 계통 교수들도 6년 동안 강의와 연구를 한 후 7년 째 1년 동안을 휴식하며 연구를 하면서 체력단련 기간으로 이용 하였는 데 이것을 안식년이라고 하였다.
이번 산행에 동행한 연세대학교 교수부부도 이러한 안식년을 의미있게 보내던 중 우연히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인연이란 불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로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생기하거나 소멸하는 데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생성과 소멸에 직접 관계되는 것을 인이라 하고, 인을 도와서 결과를 낳는 간접적인 조건을 연이라 하여 구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무엇이 인이 고 무엇이 연인 가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기준은 애매모호하여 그 깊이를 가름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번 안식년 동안 교수부부와 좋은 인연을 맺어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였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고급 와인을 먹어볼 수 있었고 설악산 중청 대피소에서 하룻밤 동안 만리장성도 쌓았다.
전라남도 월출 산과 천관산도 함께 산행 하였으며 영암군 삼호면 독천식당에서 꿈틀거리는 낙지의 환상적인 모습에 환호성을 지르고 그 맛에 매료 되기도 하였다.
언제나 새벽부터 산행을 시작하여 오후면 하산하여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곤 하였다.
교수는 이제 안식일을 마치고 2015년 9월 개학과 동시에 학교 현장으로 복귀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교수의 따뜻한 마음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짬을 내 우리와 함께 하였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교수는 산행시 바쁜 일정때문에 당일 새벽에 현지에 도착 하였으나 친구 부부와는 늘 산행 전일에 현지에 도착하여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새벽에 등산을 하곤 하였다.
그런데 교수가 다른 때와 달리 산행 시간을 오전 9시로 결정한 것은 안식년 기긴동안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노력과 그동안 소홀히 하였던 개학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바빴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복숭아탕을 거쳐 대승령과 대승폭포를 걸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함께 동행하는 일행이 있었기 때문에 보조를 맞춰야 하였다.
그리고 장애물도 있었다.
한 여름의 무더위가 마지막 피치를 올리고 있었고 사모님들이 더위를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복숭아탕 까지만 산행을 하고 하산하는 것으로 이번 산행을 마무리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십이선녀탕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부안의 명기 이매창이 정자에 앉아 사랑하는 정인 유희경을 그리며 연주하는 가야금소리 만큼이나 맑고 청아하게 들렸다.
또한 다람쥐가 이방인의 방문을 환영이나 하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벽계수처럼 맑은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다람쥐가 환영해주는 가운데 친구들이 함께하여 주어서 행복할 수 있었다.
설악산 십이선녀탕에서 하산한 우리는 강원도 속초시 노학 동에 있는 척산 온천 휴양 촌으로 이동하였다.
척산 온천 휴양 촌은 본래 큰 소택 지기 있었던 곳으로 눈이 오는 겨울에도 풀이 자랄 정도로 따뜻한 기운이 솟아 오르는 지역이었다.
왜가리와 기러기 등 많은 조류들이 이곳에 날아와 습지에서 먹이를 찾곤 하였으며 빨간 뱀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서식 하였던 뱀이 유난히도 윤기가 나고 번들번들하여 이상하게 여긴 주민들이 가끔 이 소택 지의 물로 목욕을 하곤 하였는 데 피부가 매끈하고 부드러워져서 상쾌 하였을 뿐 아니라 피부 병에도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이 소택 지가 주변으로 널리 소문이 나게 되고 찾는 사람도 많아 오늘날 오천 장이 들어서게 된 이유였다.
척산 온천 휴양 촌에 여장을 푼 후 잠깐 휴식을 취하며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우거진 소나무 숲 아래 냇가에서 왜가리 한 쌍이 먹이를 찾고 있었다.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부리로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하늘로 던졌다.
옆에 있던 암컷이 재빨리 낚아채서 숲 속 둥지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다.
하찮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보다 더한 것 같았다.
숲 속에는 여러 왜가리의 보금자리가 있었다.
예전에 날개를 다친 학 한 마리가 이곳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로 몸을 적셔 상처를 치유 하였다는 전설이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척산 온천 휴양 촌 온천수에 몸과 마음을 씻은 다음 저녁식사를 하기 위하여 온천장 바로 뒤에 있는 생대구탕∙물곰탕 집을 찾았다.
생대구탕∙물곰탕 집은 척산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인가 하고는 먼 거리에 있었다.
주변은 차량만 주로 이동하고 보행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위치에 있는 음식점이 과연 제대로 운영이 될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안으로 들어 섰으나 의외로 음식점 내부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였다.
음식점 내부는 아주 깔끔하고 청결 하였으며 음식 또한 일품이었다.
내장을 곁 들은 대구탕도 있었고 신선도가 높은 회무침도 있었다.
교수가 가지고 온 와인을 식탁에 올려놓으니 마시기 전부터 와인 향기에 흠뻑 젖어들었다.
정갈한 음식은 금방 동이 났다.
오징어 순대를 입에 넣고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을 순배 하면서 세상의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갑자기 북한이 남한을 향하여 포격 했다는 속보가 T・V 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무장 지역에서 북한 군의 사주로 지뢰가 폭발하여 상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을 수 없었는데 이 사건이 마무리 되기도 전에 남한이 북한에 의하여 또 포격을 당했다는 뉴스를 듣고 전쟁이 정말 일어 나려나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그동안 모든 국민들이 피땀흘려 노력 하였던 성공가도가 하루 아침에 허무하게 허물어 질 것 같아 허탈감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지도자와 국방력을 신뢰하고 있는 만큼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수록 와인의 술기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하였다.
중국 남북조시대 동진의 도연명이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을 벗 삼으며 세상을 유유자적 하였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양이 뉘엿뉘엿 넘어가고 땅거미가 깔리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에 어둠이 앞을 가렸다.
다음날 아침 교수부부는 서울로 올라가고 두 팀은 척산 온천 휴양 촌에서 44번 도로를 따라 줄곧 이동하다가 강원도 인제군 남면 부평 리에 있는 빙어마을 길로 들어섰다.
겟세마니 피정의 집을 가기 위해서였다.
겟세마니 피정의 집은 호주인 조선희 필립보 신부에 의하여 1991. 3월에 설립되었다.
조선희 필립보 신부는 1940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선교 사제가 되어 호주 멜버른에서 한국에 왔다.
1939년 아일랜드의 성 골롬반 신학교에서 사제의 서품을 받아 한국에 입국하여 춘천지목구의 홍천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였다.
조선희 필립보 신부는 58년간 춘천 교구의 농촌 본당에서 사목활동에 헌신하다가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 추방 되기도 하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다가 700여명의 연합군과 다수의 성직자와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한 후 석방 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호주로 출국하였다.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한국에 입국한 뒤 58년간 주로 농촌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는 말을 듣고 예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산 증인으로 생각되었다.
조선희 필립보 신부가 한국 천주교사업에 헌신 하였던 기간은 일제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격랑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겨레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나누었던 진정한 선교사는 내국인도 아닌 파란눈을 가진 호주출신 조선희 필립보 신부였다는 말을 듣고 한동안 감동되어 진한 눈물이 흐르기도 하였다.
피정의 집을 서울에서 몇 군데 찾아보기는 하였으나 가슴의 정곡을 찌르지 못하였다.
그것은 피정 과정에서 경험한 일정이 나의 심곡을 찌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고 믿음이 얕았기 때문이었다.
이곳 겟세마니 피정의 집도 어느 피정의 집과 마찬가지 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겟세마니 피정의 집 정문을 두드렸다.
맨 먼저 마주친 것은 예수가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는 문제를 놓고 동산에 엎드려 현실과 갈등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예수가 생존 당시 유대교의 납비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학에 대하여 이론적으로는 해박 하였으나 하느님의 뜻을 전파 하가나 실천하는 문제 앞에서는 기득권의 향수에 젖어 관습을 뿌리치지 못하였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문제를 놓고 망설이지 않았어야 하였으며 자신을 하느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교의 납비나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은 항상 가난하고 핍박 받는 대중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먼져 다가가 늘 그들과 함께하였으며 사랑과 정의를 몸소 실천하려 하였다.
유대교의 대 제사장이나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예수의 행동이 자신들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예수도 당시 정의를 위하여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자신보다는 관습에 젖은 기득권들 때문에 더 쉽지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하여 기꺼이 죽음을 무릅쓰고 정의를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인간적이고 친화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종교보다 가톨릭에 가까이 접근하였다.
이곳 겟세마니 피정의 집은 친구 부부와 인연이 있었을 뿐 나 하고는 전혀 인과관계가 없었다.
우연히 친구부부가 인도하여 문을 두드리게 되었는 데 분위기가 조용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어 나도 몰래 주변을 돌아보며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가톨릭에 심취한 친구부부와 함께 겟세마니 피정의 집에 도착 하였을 때 맨 먼져 눈에 띄었던 것은 무릎을 꿇고 고뇌하며 갈등하는 예수의 모습이었다.
이것이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겟세마니 피정의 집은 강원도 인제군 남면 부평리 3반 565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당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소양 호가 바라 보였으며 사방이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산책로가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어서 산책로를 따라 묵상을 하며 걸어 갔더니 정면에 소양 호가 한 폭의 그림처럼 나타났다.
생각없이 그냥 걷고 싶었다.
일반적인 피정의 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고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환경이어서 나 자신을 탐색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곳은 본래 제 3군단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과거 제 3군단 사령부 소재임을 알리는 표석만 언덕에 남아 있었을 뿐 치열하고 가열하게 전개 되었던 한국 전쟁의 상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아 있었고 고즈넉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소양 호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미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제대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 리에 있는 갈매못 성지가 생각났다.
갈매못성지에서 미사를 보고 있던 중 신부가 갑자기 커텐을 걷어 올리자 확 트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갈매기가 날아가는 석양의 너울진 바다가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소양 호의 강물은 가뭄으로 매말라 있었고 바다처럼 출렁이거나 갈매기도 날아가지 않고 있었으나 분위기는 어디라 없이 갈매못을 연상하게 하였다.
산책로 중간, 미사를 집전하는 제대 앞에서 소양 호를 바라보았다.
과거에 북한의 영역 이었던 38도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민족의 역사와 함께 흘렀던 강물처럼 우리민족의 슬픔과 애환을 갈라놓았던 소양 호가 한 때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았던 곳이었다.
강물은 가뭄으로 고갈되어 바닥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삼년 가뭄은 살 수 있어도 석 달 장마는 살 수 없다는 말처럼 강바닥이 드러나고 농작물의 피해는 이루말할 수 없었으나 끈질긴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뿌리를 내리고 생명을 부지해가고 있었다.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십자가의 길은 최근에서야 조성된 것 같았다.
1처에서 14처까지의 십자가는 춘처교구 소속 주교들을 비롯하여 사제들, 독지가의 도움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그 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14처의 십자가가 친구부부의 기부금으로 조성 되었다는 말을 듣고 친구부부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고 마음 씀씀이가 천사와 같았다.
소양 호를 바라보고 있는 십자가는 마치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태양 아래서 햇살을 받으며 어느 수녀가 뜨거운 열망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탐욕이나 욕심은 차찾아볼 수 없었다.
민족의 화합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마침 종소리가 들렸다.
미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나도 몰래 고개를 숙이고 묵상한 후 성당으로 이동하였다.
성당은 조그마한 방을 연상하게 하였다.
신호철 토마스 신부님과 복사 외에 채 10명도 되지 않았다.
신부님은 강론에서 예수의 실천 의지를 높이 평가하면서 교황 비오 10세를 언급하였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비오 10세는 항상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으려고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라고 말할 만큼 소탈하고 가난한 삶을 사랑하였다.
이러한 그의 특징은 그의 즉위미사 때 확실히 드러났다.
비오 10세는 종래의 신비스럽고 호화스럽던 역대 교황 들의 의식주의 상당 부분을 생략 함으로써 되도록 간단하고 검소하게 치렀다.
또한 그는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확립 되었던 교황 혼자 식사하는 관습을 폐지 하였으며, 자신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하였다.
그의 큰 책상은 보통 문서와 서류 들로 쌓여 있었고, 중앙에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성상과 성녀 요안나 아르크(잔 다르크)의 성상이 놓여 있었다.
비오 10세는 특별히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만토바와 베네치아에 있을 당시 그는 주머니에 항상 사탕을 넣고 다니면서 길거리의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교리를 가르치곤 하였다.
교황이 된 후에도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어린이들을 가까이 곁에 두고 그들이 궁금해 하는 것에 친절하게 대답해주곤 하였다.
비오 10세는 치세 전반에 걸쳐 성직자와 평신도의 종교적 삶을 쇄신시키기 위해 힘 썼으며, 성찬례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성체에 대해 “하늘 나라를 향한 가장 짧고 안전한 길”이라고 말하였다.
비오 10세는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영성체를 자주 할 것을 신자들에게 권장하였다.
영성체를 하기 위한 준비로서 죄를 씻고 몸가짐을 정갈하게 할 것이며 고해성사를 자주 볼 것을 권장하였다.
비오 10세의 치세 전반에 걸쳐 가장 큰 걱정거리는 당시 가톨릭 신앙에 크나큰 위협을 끼친 것은 근대주의와 상대주의였다.
당시 근대주의와 상대주의의 바람은 교회 내에도 침투하여 칸트와 같은 근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가톨릭 신학에 도입 시키려는 신학적 경향이 나타났다.
철학과 신학은 물론 성경 주석에도 근대주의와 상대주의의 사상이 알게 모르게 침투해 있었고, 특히 미국에서 발행된 간행문에 그 흔적이 드러나고 있었다.
근대주의자들은 이 같은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교회의 신앙은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해왔으며, 따라서 시대가 변하면 그 시대에 맞게끔 교회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 근대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장이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전통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에 따르면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교리는 세월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 교리의 본질마저 부정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의심으로 가득차서 흔들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근대주의가 낳은 가장 위험스러운 결과 물은 이신론과 불가지론 내지는 무신론이라는 위험한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이었다.
1907년 7월 3일 교령을 반포 하면서 비오 10세는 65명의 근대주의자들 및 상대주의자들의 주장들을 직접 거론 하면서 공식적으로 규탄하였다.
여기서 말한 근대주의자들 및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이란, 교회의 본질과 계시, 성경 주해, 성사,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회칙에서는 근대주의를 가리켜 ‘모든 이단의 총집합’이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비오 10세는 반근대주의 선언을 작성하여 모든 성직자에게 근대주의를 명백하게 반대할 것을 서약시켰다.라는 신해철 토마스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신앙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의식을 높일 수 있었다.
예수가 바라고 강조한 진정한 사랑이란 교리를 미사여구의 단어로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비오 10세가 그러한 경우였다.
역대 교황 과는 달리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직자가 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으나 사랑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성인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요구하는 사랑도 교리만 강조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서 평범한 사랑을 실천해가는 친구 부부의 자세가 오늘따라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