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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에스더- 김점동(金點童 Esther kim pak 1876~1910, 朴愛施德 박애시덕)
남편 박유산(朴有山 1868.9. 21~1900. 4. 28일 미국 볼티모어에서 사망)
에스터는 닥터 홀이 데리고 있던 24세 된 청년 박유산과 1893년 5월 24일 결혼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김점동(金點童 Esther kim pak, 朴愛施德)
그리고 그 남편 박유산(朴有山)!
최초로 미국에서 학위를 받아온 유학파 여의사,
그의 남편, 그리고 그의 젊은 날의 영면!
제가 따로 쓰는 것 보다 여러분들의 글을 모셔왔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1879~1910)
1890년 10월, 박에스더는 여성병원 ‘보구여관’ 의사로 내한한 로제타 셔우드(Dr. Rosetta Sherwood)의 통역을 맡게 된다. 에스더의 영민함을 눈여겨 본 당시 이화학당의 교장이었던 스크랜턴 대부인의 추천이었다. 당시 박에스더는 환자를 돌보는 직업에 존경은 느끼면서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통역을 하려면 환자의 환부를 봐야 하고, 수술실에도 들어가야 하는 등 14세 어린 여성으로 감당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느 날 입술이 갈라진 아이 하나가 병원에 들어왔다. 구순구개열, 흔히 언청이라고 부르는 병이었다. 아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당시 한국의 의술로 볼 때 언청이는 평생 놀림을 받아야 하는 불치병이었던 것.
“수술하면 정상이 된다.”는 에스더의 통역에 아이의 부모는 놀랐다. 아이의 수술이 시작되고, 수술 칼이 얼굴에 닿자 피가 쏟아졌다. 지켜보는 에스더가 더 떨렸다. 며칠 후 아이의 얼굴에서 붕대를 풀었다. 정상으로 돌아온 아이를 보자 부모는 감격해서 울었다.
“아, 정말 놀랍다. 모두 고칠 수 없다고 포기했는데 저렇게 간단히 고치다니.” 에스더는 처음으로 의술의 힘에 놀랐고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그래 나도 훌륭한 의사가 되어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살 거야.”
조선시대 여성들의 지위는 낮았다. 병에 걸려 도 치료받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간단히 치료가 되는 종기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다리를 못쓰게 될 만큼 악화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광혜원(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이 있었지만 여자는 바깥출입도 잘 못하던 시기라 여자들만이 갈 수 있는 병원이 필요했던 것. 보구여관(保救女館)은 1887년(고종 23년)에 스크랜턴 부인의 제안으로 미국 감리교 여성의사인 M.D. 하워드가 이화학당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이다.
보구여관.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역사관 제공
의사로 헌신하기로 다짐하다
에스더의 이름은 김점동(Esther kim pak, 朴愛施德)이다. 서울 정동의 가난한 선비인 김홍택과 연안 이 씨 슬하 딸만 넷인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에스더가 10세 무렵 정동에서는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김홍택도 미감리회 초대 선교사였던 아펜젤러의 집에서 잡무를 보고 있었다. 신앙이 있어서라기보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이화학당을 세우고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을 교육하던 스크랜턴 부인이 에스더의 아버지를 설득해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영어와 산수 등 일반과목과 함께 주기도문, 찬송, 기도 등을 배우면서 점차 신앙의 길로 들어섰던 것.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에스더는 이화학당에 들어가면서 정신과 영혼의 변화를 겪게 된다.
1888년 여름밤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쳤다. 기숙사 방에서 두려움에 떨던 에스더는 선교사들이 들려주었던 노아 홍수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동료 학생들과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했던 것. 기도가 끝나자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에스더는 벼락에 놀라 성직을 다짐했던 ‘루터’처럼 바로 그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그 헌신은 1890년 보구여관에서 셔우드의 통역을 하게 되면서 ‘의사’라는 직업으로 구체화 된다.
1891년 1월 25일, 에스더는 올링거(F. Ohlinger)에게 세례를 받는다. ‘에스더(Esther)’는 이때 받은 세례명으로 태어날 때 부모님이 지어주신 ‘점동’이 보다 더 많이 불리게 된다. 에스더는 셔우드가 보구여관 안에 만든 ‘의학반’에서 의학의 기초를 배운다.
박에스더와 박유산. 주간한국 제공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의사가 되다
1893년, 당시 17세였던 에스더의 나이는 14세만 되면 결혼을 종용하던 당시의 풍습으로 보면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외부 활동을 계속하던 에스더에 대한 부모의 염려로 결혼을 서둘렀다. 그해 5월 24일, 박유산이라는 청년과 결혼한다. 셔우드(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 ‘로제타 홀’로 불림)와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 부부의 중매였다. 박유산은 홀 선교사의 조수로 일하던 믿음이 깊고 성실한 청년이었다. 가난했지만 선비 집안이었던 에스더와 맞지 않는 낮은 신분의 청년이었지만 에스더는 결국 부모를 설득해낸다.
에스더 부부는 1894년 5월 4일 닥터 홀의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진료를 계속한다. 1894년 청일전쟁이 터지고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던 평양. 2년 4개월 동안 그곳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진료를 계속하던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순교하고 만다. 남편을 양화진에 묻고 로제타 홀 선교사는 뱃속의 아기와 돌이 지난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로제타 홀은 에스더에게 본격적인 의학 공부를 권했다. 박에스더(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부부도 함께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로제타 홀 선교사의 친청인, 뉴욕 리버티에 도착한 에스더는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리버티 공립학교에 등록한다. 1895년 에스더는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해 9월 에스더는 뉴욕시의 유아병원(Nursery and Child's Hospital)에 들어가 그곳에서 1년 이상 근무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한편 개인 교수를 통해 라틴어와 물리학, 수학 등을 공부한다. 1896년 10월 1일, 스무 살의 에스더는 드디어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현재 Johns Hopkins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는다. 박유산은 로제타 홀의 친정에서 농장일을 하며, 생계비를 벌었다.
1900년 6월, 스물네 살의 나이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에스더는 한국 최초의 여성의사가 되었다. 꿈꾸던 의사가 되었지만 에스더는 기쁘지만은 않았다. 6년 동안 노동을 하며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뒷바라지 하던 남편이 불과 20일 전에 급성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음식과 문화도 전혀 다른 미국에서 힘듦과 외로움, 향수병을 견디며 외조를 기쁨으로 감당했던 남편의 미국행은 오로지 아내를 돕기 위해서였다.
1895년 9월 미국에서 찍은 사진. 뒷줄부터 에스더와 박유산 앞줄은 셔우드 홀과 로제타홀 선교사,
유복자로 태어닌 에디스. 연합뉴스 제공
의사와 교육가로 헌신하다
에스더는 미국에서 보장된 화려한 생활도 뒤로 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고국에 돌아온 에스더는 이미 한국에 들어와 의료봉사를 펼치고 있던 로제타 여사와 조우한다. 6년 전에는 조수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동역자로 힘을 합쳤다. 에스더는 이후 10년 동안 의사와 교육자로 힘껏 봉사하는데, 통역자로 드나들었던 서울의 보구여관을 맡아 한국인 여의사가 한국 여성을 진료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또 순교한 홀 의사의 뜻을 기념해 지은 평양 기홀병원과 황해도,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며 무료 진료 사역을 펼친다. 평양에 광혜여원의 건물을 신축하고,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 개설에도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로제타 홀 선교사를 도와 평양맹아학교와 전도 부인을 양성하는 여자성경학원 교수로도 활약한다. 이런 공로로 1909년 경희궁에서 고종황제가 임석한 가운데 열린 대한부인회 주최의 ‘해외유학 여성 환영회’에서 은장(銀章)을 받기도 했다.
한 달에 3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며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던 에스더는 1910년 4월 13일,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에 결핵이 걸려 34세라는 나이에 짧고도 큰 삶을 마감했다.
죽음 뒤에도 삶의 향기를 풍기다
로제타 홀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은 에스더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폐결핵 전문의가 된다. 결핵요양소를 세우고, 한국 최초로 결핵요양소의 운영비 마련과 결핵에 대한 계몽과 선전을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는 등 결핵 퇴치에 앞장섰다.
2006년 한국과학기술부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을 최연소로 입학해 졸업한 박에스더의 공을 기려 과학기술 선현 분야에 박에스더를 선정,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보구여관의 맥을 잇는 이화여대 의과대학 동창회에서는 2008년부터 ‘자랑스러운 이화의인 박에스더賞’을 제정, 의사로 박에스더의 정신을 잇는 동문 여의사에게 시상하고 있다.
평양 선교를 떠나며 에스더에게 동행할 것을 물었던 로제타 홀 선교사에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는 데는 어느 곳이라도 가겠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를 죽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에 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고 의연히 대답했던 에스더. 그 삶이 그 신앙의 답이 되었다. (2009. 8. 7. 주간기독교 / 이연경 기자)
입술이 갈라진 아이 하나가 부모와 함께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왔다. 속칭으로 ‘언청이’라 일컫기도 하는 구순구개열. 아이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는 서양인이었고 통역을 맡은 이는 10대 중반의 소녀였다. 수술을 받으면 고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통역을 통해 전해들은 부모와 아이는 크게 기뻐하면서도 말을 잇지 못했다. 외과수술이라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수술을 받고 얼마 뒤, 붕대를 풀고 정상이 된 것을 확인한 부모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그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의사와 통역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부모. 때는 1890년대 초였고 장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이었다.
보구여관(1912년 동대문으로 옮겨 신축한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전신)은 1887년에 이화학당 설립자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 1832~1909)의 제안으로 서울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세워졌다. 당시 통역을 맡은 소녀는 박에스더(1876∼1910)였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박에스더는 14살 때인 1890년 10월부터 메리 스크랜턴의 추천으로 보구여관에서 통역과 간호보조 일을 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1885년 의료선교사로 함께 내한한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의 어머니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박에스더는 메리 스크랜턴을 처음 만났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열 살 때 스크랜턴 부인을 처음 만나러 가게 되었다. 매우 추운 날씨여서 부인이 나를 난로 가까이 오라고 했는데 나는 부인이 나를 난로에 잡아넣어 태워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부인의 친절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게 하였다.”
보구여관에서 일하면서부터 박에스더는 의사가 되려는 소망을 품었다.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金點童)으로 서울 정동에서 딸만 넷인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홍택은 선교사 아펜젤러의 일을 돕고 있었다. ‘에스더’는 1891년 김점동이 세례를 받으며 얻은 세례명이고, 1893년 결혼한 남편 박유산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가 되었다. 보구여관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1865~1951)을 돕던 박에스더는 로제타 홀이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과 평양 선교 책임자로 부임할 때(1894) 남편 박유산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조수 역할을 했다. 청일전쟁 와중에 전염병까지 유행하던 평양에서 윌리엄 제임스 홀이 발진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로제타 홀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하게 된 로제타 홀은 늘 헌신적이며 영리했던 박에스더를 남겨둘 수 없었다. ‘박에스더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우리라.’ 로제타 홀은 박에스더 부부를 미국으로 오게 했다. 로제타 홀의 친정이 있는 뉴욕 리버티에 도착한 박에스더는 1895년 2월 리버티 공립학교에 등록하여 고교 과정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9월부터는 뉴욕 아동 병원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버는 틈틈이 대학 입학에 필요한 물리학과 수학, 라틴어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1896년 10월, 20살의 박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했다. 박에스더가 고학(苦學)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로제타 홀은 한국에 다시 와 있을 때(1897년 재입국) 박에스더에게 귀국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에스더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로제타 홀에게 보냈다.
“제가 지금 여기에서 이것을 포기하면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한 후에도 도저히 배울 수가 없다면 그 때 포기하겠습니다. 그 이전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박에스더는 1900년 6월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이자 여성 의학박사가 탄생한 것이다. 의사의 꿈을 이룬 박에스더는 그러나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유학 생활 내내 힘겹게 노동하며 뒷바라지 해주던 남편 박유산. 그런 박유산이 박에스더의 의대 졸업시험을 3주 앞둔 1900년 4월 폐질환이 빠르게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현재 볼티모어 서쪽 로레인 파크 공동묘지에 ‘1868년 9월 21일 한국에서 태어나 1900년 4월 28일 볼티모어에서 사망했다’는 문구가 새겨진 박유산의 묘비와 묘가 있다.
유학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박유산도 공부를 하려 했으나 박유산은 아내의 재능이 더욱 남다르고 공부를 향한 뜻도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부부가 모두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은 공부를 포기하고 아내 뒷바라지에 나섰던 것이다. 늘 헌신적으로 외조를 도맡았던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박에스더가 느꼈을 깊은 슬픔. 박에스더의 귀국 소식을 전하는 <신학월보>의 1900년 12월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인의학박사 환국하심. 박유산 씨 부인은 6년 전 이화학당을 졸업한 사람인데, 내외가 부인의사 홀 씨를 모시고 미국까지 가셨더니 공부를 잘 하시고 영어를 족히 배울뿐더러 그 부인이 의학교에서 공부하여 의학사 졸업장을 받고 지난 10월에 대한에 환국하였다. 공부가 여러 해 되었는데 그동안 박유산 씨는 세상을 떠나시고 그 부인이 혼자 계시니 섭섭한 마음을 어찌 다 위로하겠는가만…(중략)…미국에 가셔서 견문과 학식이 넉넉하심에 우리 대한의 부녀들을 많이 건져내시기를 바라오며 또 대한에 이러한 부인이 처음 있게 됨을 치하하노라..
의사가 되어 귀국한 박에스더는 먼저 들어와 있던 로제타 홀과 함께 활동했다. 유학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로제타 홀의 조수였으나 이제는 사실상 동등한 입장에서 의료봉사에 전념하게 된 것이다. 박에스더는 보구여관에서 여성 환자들을 진료했고 간호양성소도 설립했다. 평양의 여성치료소 광혜여원(廣惠女院)에서도 진료했고 평양맹아학교(한국 최초의 맹아교육을 위한 특수학교로, 1894년 설립 당시에는 맹인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평양여맹학교였다가 1909년 농아학교도 세우면서 이름을 평양맹아학교로 바꿈)와 여자성경학원에서도 가르쳤다. 또한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며 진료봉사활동을 펼쳤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성 의사에게 몸을 보여줄 수 없다는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많은 여성 환자들이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여성 환자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의료 현실도 열악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 의사 박에스더의 활동은 이 땅의 많은 여성 환자들에게 유일한 희망과도 같았다. 박에스더가 귀국하여 활동한 10년 동안 매년 평균 5천 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보아야 했던 것도, 박에스더의 헌신적인 사명감과 함께 그러한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박에스더는 진료 활동 외에도 근대적 위생 관념을 보급ㆍ확산시키는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최초의 여성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돈독한 기독교 신앙이 박에스더를 받쳐준 힘이었다.
박에스더는 심각한 과로로 폐질환에 걸리고 말았다. 그의 나이 34세 때인 1910년 4월 13일, 의사로서 10년 간 활동한 박에스더는 세상을 떠났다. 박에스더와 늘 함께 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홀 가족의 슬픔은 남달랐다. 로제타 홀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 ~ 1991)은 박에스더의 죽음을 계기로 폐결핵 전문 의사가 되어 한국에 결핵요양소를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셔우드 홀은 1928년 해주에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소를 세우고 결핵 퇴치 활동을 뒷받침했으며, 1932년에는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실을 한국 최초로 도입했다. 셔우드 홀은 1940년 스파이 혐의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된 뒤 벌금을 물고 사실상 추방당했다. 박에스더의 헌신은 세상을 떠나서도 빛을 발했던 셈이다.
박에스더는 한국 의료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지만, 한국 근대 과학의 역사에서도 한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미국 감리교회 의료 선교의 역사에서 박에스더는 ‘유일한 동양인이자 유일하게 순교자의 숭고한 대열에 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6년 11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부는 박에스더를 과학기술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에서는 2008년부터 ‘자랑스런 이화의인(醫人) 박에스더상(賞)’을 제정하여 동문 여의사에게 시상하고 있다.
로제타 홀은 자신의 일기에 박에스더에 관해 이렇게 기록했다. “그녀는 날마다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한다.” (로제타 홀은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 아들 셔우드 홀, 태어난 직후 세상을 떠난 딸 에디스 홀, 며느리 메리언 홀과 함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박에스더는 단순한 한 사람의 의사가 아니었다. ‘최초의 여성 의사’라는 의미를 뛰어 넘는 의사였다. 그는 선각자이자 선구자라는 말에 명실상부한 인물이자 우리 시대에도 보기 드문 ‘의인(義人)으로서의 의인(醫人)’이었다.
‘박유산’을 기억하십니까?
한국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의 남편 , 미국서 무덤 찾아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였던 박에스더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아도, 낯선 이국땅에서 4년여 동안 아내의 공부를 위해 묵묵히 뒷바라지 했던 박에스더의 남편 박유산(朴有山)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필자는 서울 감신 대학원 재학 시절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면서 한국인 최초의 여자 의사였던 박에스더를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박에스더의 삶보다는 그의 남편인 박유산의 삶에 더욱 마음이 갔었다.
▲ 박유산 선생의 묘비 사진.
홀(W.J. Hall) 선교사의 조수였던 박유산은 1893년 5월 24일 홀 선교사 부인(R.S. Hall)의 통역인이었던 에스더(본명은 김점동이었으나 세례를 받은 후 김에스더로 불렸고 남편 성을 따 박에스더가 되었음)와 결혼했다. 비록 박에스더의 집안에 비해 박유산의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 낮긴 했지만, 이들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믿음의 가정을 만들었다.
결혼 후 박유산은 그 당시 가부장적이었던 다른 남성들과는 다르게 아내의 사회적 활동이나 학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아내 박에스더를 도왔던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1894년 미망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홀 부인의 도움으로 박유산·박에스더 부부는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듬해인 1895년 박에스더는 뉴욕의 고등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고, 1896년 10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지금의 Johns Hopkins University, Baltimore, Maryland)에 입학하였다. 이런 과정 중에 남편 박유산은 아내의 의학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농장에서 일하면서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댔다.
그러다 박에스더의 의과대학 졸업을 한 달도 남지 않은 1900년 4월 28일, 안타깝게도 박유산은 폐결핵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재미사학자 한 분이 처음으로 몇 해 전 매릴랜드주의 볼티모어에서 박유산의 묘비를 찾아 영문으로 소개하셨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정보는 없고 볼티모어 로레인 파크 공동묘지에 박유산의 묘비가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일단 볼티모어 지역 공동묘지 목록에서 로레인으로 발음이 되는 곳을 찾아, 무작정 찾아가 확인해 보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2006년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12월 29일 오후 반신반의 하면서 볼티모어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 Lorraine Park Cemetery & Mausoleum을 찾아 갔다. 공동묘지 사무실을 찾아 1900년에 사망한 Yousan Park 이나 Yusan Park의 묘비가 있는지를 문의 했더니 ‘Yousan Chairu Pak’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기대감을 가지고 그 묘비가 있는 곳을 찾아 갔다.
김점동- 조선의 별이 된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그녀는 이화학당에 네번째로 입학하면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화 학당은 1886년에 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최초의 여사립학교로, 당시 입학생을 구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여성교육에 대한 인식이 빈약한데다 외국인들이 아이들을 외국으로 빼돌린다는 괴소문까지 보태져 입학을 기피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김점동의 경우 이와는 달리, 아버지 김홍택의 권유에 이화학당에 쉽게 입학했다. 그는 신문물을 받아 들여 딸도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깨인 인물이었으니,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김점동이 의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의 경우,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지원과 응원을 받은 경우가 많다는데, 김점동의 경우는 그런 경우였다. 개화했을 뿐 아니라, 배운 지식을 남을 위해 사용하길 바랐던 아버지야말로 김점동이여성이라는 약점을 이겨내고 자신을 꿈을 이루는데 백만원군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점동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돼 귀국하는 과정을 보면 최초라는 타이틀을 따기 위해서는 본인의 노력과 각성 외에도 여러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의 지원과 시대적 여건이 받쳐줘야 가능하다는 것인데, 김점동은 아버지의 지원 외에도 입학한 후에 이화학당 안에 최초의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여관이 개원하면서, 의술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선교사를 통해 영어를 익힐 수 있었고, 외국으로 유학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됐던 것도 다 그런 시대의 흐름 위에서, 그녀는 자신의 길을 개척한 것이다.
하지만 김점동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결혼문제였다. 그녀에게 결혼은 신앙생활과 그녀의 꿈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직업과 꿈을 허용하지 않는 유교적가치 가부장적 가치관에 젖은 조선사회이기에 그녀는 망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평범한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녀는 꿈을 향한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접을 수 밖에 없었을텐데, 다행히 아내의 꿈을 지원해주는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독실한 신심을 가진 박유산을 만나 정동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의 연을 맺게 됐고, 그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을 수 있었다. 김점동의 인생에는 신앙생활과 의학이라는 길로 채워져 있었는데, 박유산은 김점동의 이 두길을 모두 이해해주는 훌륭한 동반자였다.
김점동이 의사기 되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이화학당 시절이었다. 서양 의술로 언청이 환자를 치료해주는 것을 보고나서 였다. 언청이라는 이유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던 딸이, 이제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환자 어머니를 보면서, 점동은 의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미국에 간 김점동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했고, 남편은 홀 부인의 농장에서 일을 거둘어주었으니, 부부가 함께 기거하지는 못했다. 김점동이 박에스더라고도 불리게 된 데에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그곳 관습과 그녀의 세례명 에스더가 합쳐진 것이었다. 에스더는 히브리어로 '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드디어 오늘날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으로 잘 알려진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하게 됐다. 동양여인이 그것도 어려운 의학을 전공했으니 그 어려움이야 충분히 상상이 된다. 하지만 경사를 앞둔 그녀에게 행복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졸업을 불과 3주 앞두고 남편 박유산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그녀는 망부의 슬픔을 뒤로 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잃은 상심이 얼마나 컸을지, 아마도 그녀는 이런 시련을 신앙심과 환자를 돌보는 일로 이겨낼 수 있지 않았을까.
미국에서 의사로 취업해 그곳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지만, 그녀는 조국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 곁으로 돌아와 배움을 펼쳤던 것이다. 배운 지식을 남에게 베풀라는 아버지의 뜻을 잃지 않았던 것인지,
그러고 보면 그녀에게 아버지와 남편은 든든한 울타리였다. 아버지나 남편의 몰이해로 혹은 횡포로 불행해진 개화기 여성들이 많았던 것에 비하면, 김점동은 이런 끔찍한 불행에서 비켜갔다. 그것은 대단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김점동이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의사가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을 진료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기꺼이 다가가는 의사가 될 수 있었던 밑받침이 돼주었던 것이다.
6년만에 귀국한 그녀는 예전의 보구여관으로 출근하게 됐고, 진료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신앙생활에도 열심이었다. 콜레라가 창궐하자 치료와 예방을 위해 나섰고, 또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무료 진료, 간호학교와 맹아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까지.. 진료와 선교, 그리고 교육까지,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이 활동했을 그녀가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녀의 활동 기간은 길지 못했다. 바쁜 생활로 인한 무리와 혹사가 병을 부른 것인지, 폐결핵이 발병했고, 결국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우리 나이로 서른 다섯이라는 그 젊음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운 인재였다. 그녀에게도 단명은 불행이었지만, 당시 환자들을 생각해보더라도 그녀같이 헌신적인 의사의 부재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해가 공교롭게도 1910년, 조선인이 나라를 잃은 해였다. 조선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김점동이라는 조선 여성이 남긴 유산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서구 문명이 들어오는 개화기 그리고 여성이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준 것이다. 또 교육의 필요성과 그 배움을 타인을 위해 나누어 가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사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런 세상을 위해서 반상의 구별, 남녀의 차별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고.
또 한가지, 그녀가 폐결핵으로 사망하면서 우리나라에 폐결핵 퇴치 운동과 연구활동, 크리스마스 실이 처음으로 발행됐다고 하는 걸 보면, 그녀의 죽음은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각성을 일깨우고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김점동처럼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최초의 길을 닦아 놓은 선구자들 덕에, 그 최초의 길들은 이제 무난한 길이 될 수 있었다. 이 책 처럼, 어린이들, 청소년들이 보는 책으로 조선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을 담아낸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김점동이 누구인지도 몰랐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마저 느낀다. 직업을 갖고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여성이라고 해야 퀴리 부인이 고작이었는데, 요즘 책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길을 닦아 놓은 여성들의 맹활약상을 접하게 돼서 뿌듯했다.
조선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을 통해서도 이런 뿌듯함을 맛볼 수 있었다. 앞길이 구만리같은 어린 친구들은 이렇게 자신의 꿈을 이룬 최초의 인물들을 통해,자신이 앞으로 선택하고 성취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과 기회, 꿈을 발견하는 눈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 참고자료
1. 「박에스더 :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생애」, 이화 의학 글로벌 챌린지 사업단
2. 「韓國最初의 女醫師 金點童(박Esther)」, 기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