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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43 - 엑스트라 2
S#1. 캠퍼스 전경 / 낮
이제 완연한 겨울 날씨. 추운 듯이 오가는 학생들....
그 위로 들리는 댄스음악.
S#2. 이교수 랩
각자 자기 자리에 앉은 정태와 중희, 만수가 어이없어 보고 있는 곳.
명환이 컴퓨터 앞에서 mp3 음악을 듣고 있다. 리듬에 맞추어서 고개도 조금씩 흔들고 있다.
중희, 만수를 툭툭 치더니 뭔가 말해보라는 시늉.
만수, 목소리를 가다듬고.
만수 : 명환선배.
명환 : (못 듣고)
만수 : (좀 더 다가서서) 선배님.
명환 : (돌아본다)
만수 : 저기.. 그 음악이요...
명환 : 아. 미안한데. 방해가 됐나.
근처를 뒤지더니 해드폰을 찾아서 잭을 꼽는다.
중희 : 세미나 준비는 어떻게 할까요.
명환 : 하던대로 하지 뭐.
중희 : 그래도 작업분담은 해야 되지 않나요?
명환 : 늘 하던대로 하면 되잖아. 알아서들 해.
정태 : 성원산업에 보낼 자료, 확인해 보실래요? 지금 작업 다 끝나가는데..
명환 : 끝나면 니가 보내. 어디로 보내는지는 알지? (해드폰을 끼고 음악을 계속 듣는다)
만수, 완전히 입이 벌어져서 보고 있다.
S#3. 복도
만수와 정태가 우편물을 한아름 안고 오며.
만수 : 나 진짜 불안하다. 이건 뭔가 잘못되가고 있는거야. 명환선배, 벌써 사흘째 나한테 잔소리 한마디도 안했어.
정태 : 좋잖아. 명환선배 잔소리만 안들으면 천국이 따로 없겠다며.
만수 : 야야.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저러다 일 내는 거 아니냐?
정태 : (우편물 함에 하나씩 우편물을 찾아넣으면서) 그냥 지켜보자구. 명환선배가 사고치고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
만수 : 그러니까아. 그랬던 사람이니까 더 기분이 나쁘지. 그인간이 누구냐. 모르긴해도 유치원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숙제면 숙제,
그림일기면 그림일기, 단 한번도 안 빼먹고 하라는대로 해온 사람이잖아.
그러던 사람이 한번 엇나가면 이게 진짜 무서운거다. (갑자기 정태를 잡아 돌려세우더니) 말해.
정태 : 뭐얼.
만수 : 저번에 형수님 왔을 때, 너 그 현장에 있었다며.
정태 : 거참.. 자고 있었다고 했잖아.
만수 : 넌 어떻게 그런 순간에 자고 있을 수가 있냐.
정태 : 글세 자고 있었으니까 어떤 순간인지 알 수가 없지.
만수 : 그래도 임마. 한마디는 들었을 거 아냐. 한마디도 못 들었어? 응? 단어 하나두?
S#4. 기숙사 방 / 밤
민재, 빨래 말린 것들을 개며 앞에서 책을 보고 있는 정태를 힐끗거리다가..
민재 : 너 자고 있었던 거 아니지?
정태 : (피식 웃고 책장을 넘기고)
민재 : 너.. 그 후에 갑자기 선배의 시를 찾아보고 그랬어. 너같이 게으른 놈이 이상하잖아.
정태 : (결국 책을 덮더니) 자고 있었어.
민재 : 헤. (안 믿는.. 빨래를 개는데)
정태 : 자고 있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깼어.
민재 : 그렇지. 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에 장난스레)
정태 : 이민재.
민재 : 계속해.
정태 : 연구소에 연구원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법관하고..둘중에 아무거나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쪽 할래?
민재 : 내가 왜 그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데.
정태 : 임마. 가정법도 모르냐.
민재 : (의심스러워 정태를 보다가) 방금 너의 그 질문은 혹시 형수님하고 관계되는 거냐?
정태 : 뭐. 형수님이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분을 얘기하는 거라면, 넌 역시 눈치가 빠르다고 대답하겠다.
민재 : 그 분이 명환선배한테 그런 질문을 한거야?
정태 : 비슷한 말을 했지.
민재 : 마. 정확하게 말해봐. 데이터가 정확해야 추론이라도 해보지.
정태 : 추론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문제의 요점은 간단해. 남자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상이냐. 여자냐.
내 이상을 쫓아가는 것이 잘 사는거냐. 아니면 한 여자와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더 잘 사는거냐.
민재 : (보다가) 근데 그거 문제의 요건이 성립되지 않는 거 아니냐. 이상과 여자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되는 게 아니잖아.
정태 : 어이그 자식 지금 중학교 수학문제 푸냐. 현실이 그렇다는거야. 지금 명환선배의 현실이.
소리 : (전화벨 소리)
둘 전화를 돌아본다.
정태 : (울리는 전화를 바라보며) 몇시냐.
민재 : 열두시 다 되가는데.
정태 : 설마 민경진이가 밥사달라고 전화하는 건 아니겠지. (수화기를 들어) 이 밤중에 누구여? (자세가 바뀌더니) 어 교수님.
민재 : (놀라서 보는)
S#5. 건물 앞 / 밤
남희와 지원, 진수가 나서고 있다.
진수 : 그럼 그건 주말까지만 끝내면 되는거죠?
남희 : 그래 우리 교수님 중간에 어떤 돌발사태를 일으킬지 모르지만 지금 스케쥴로는 그렇다.
영석 : (E) 남희후배.
모두 돌아보면 저만치 영석과 명환이 다가오고 있다.
지원, 진수, 명환 적당히 인사를 주고받고...
영석 : 뭐야뭐. 이렇게 늦게까지 작업한거야? 남들 잘 때 안자고 그럼 금방 늙는다구.
남희 : 두분은 웬일이세요. 아주 한가해보이네요.
영석 : 이 친구는 잠시 쉬는 중이고, 나는 원래 노는 사람이고. 어이. 같이 가지. 박사과정끼리 오붓한 시간 어때.
남희 : 어디 가는데요?
영석 : 우리가 가봤자 제주도를 가겠어. 하와이를 가겠어. 그냥 따라오라구. 근데 남희후배. 그 가방 속에 지갑 들어있는 거 맞지?
그 지갑 속엔 돈도 들어있을까?
남희 : (웃으며 지원네를 돌아본다) 아무래도 나 오늘밤에 물주로 찍힌 거 같다.
진수 : 가보세요. 저흰 기숙사쪽으로 갈게요.
지원 : 내일 뵈요.
남희 : 그래..
영석 좋아서 남희 옆에 붙어 이끌어가며 목소리를 깔고..
영석 : 이 어둡고 황량한 밤. 어디선가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 같지 않습니까?
남희 : 바로 옆에서 들리는 거 같은데 왜요?
명환, 어설프게 웃으며 그들을 따라가고..
진수, 차쪽으로 가려다 보면 지원이 가는 그들을 보고 있다.
진수 : 안 가요?
지원 : 진수 너 저번에 무슨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있다구 그러지 않았니?
진수 : (찡그려서) 설마 하나 더 하겠다는 거 아니겠죠? 홈페이지도 새로 맡았다면서요.
지원 : 나 말고 또 필요한 사람이 있는 거 같아서.
진수 : 누구요.
지원 : (머뭇거리다가) 아니 됐어. 잘 모르는 사람이야.
지원 앞서 간다. 진수, 영석 등이 간 쪽을 다시 돌아본다.
S#6. 구내식당 앞 / 밤
오리연못에서 팬하면 거기 불꺼진 식당이 보인다.
S#7. 교수 식당 내부 / 밤
불이 꺼져있어서 어두운 식당 내부. 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만.
입구 쪽 문이 덜그럭거리더니 열리고 영석이 먼저 들어선다.
영석 : 뭣들 해. 얼른 들어와.
남희 : (겁 먹고.. 고개만 들이밀고) 들어가두 되요? 여기 교수 식당이잖아요.
영석 : 어허. 이 추운 날 오리연못 옆에서 궁상 떨 순 없잖아. 들어와 들어와. 내가 이 학교에서 청춘을 다 보낸 사람이야.
어느 건물 어느 랩 냉장고에 먹다남긴 순대까지 다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하며 부지런히 안의 주방 쪽으로 간다. 남희와 명환이 어정쩡하게 들어온다.
둘레둘레하다가 남희 먼저 창가의 자리로 앉는다.
명환을 보고 어색해서 웃고. 명환도 어색해서 웃고. 피차 할말이 없다가..
남희 : 장가간지 몇 년이 지났는데 여전하네요. 저 선배는.
명환 : 그러게 말입니다.
남희 : 근데 이렇게 쉬고 있어도 되요? 그쪽 랩 요즘 굉장히 바쁘다고 들었는데..
명환 : 그럴 겁니다.
남희 : (이상해서 보는데)
영석 : (E) 짜안...
돌아보면 영석이 어디서 찾아냈는지 촛불에 불까지 붙여서 한손에 들고 한손에는 쟁반에 컵을 받쳐들고 오고 있다.
영석 : 어때 분위기 좋지? 뭣땜에 자릿세 바쳐가며 술집에 가냐. 남희후배. 우리가 이 레스토랑을 전세냈다고 생각하는거야.
나를 대부에 말론브란도라고 생각하라고. 그리고 여긴 알파치노. 남희후배는.. 음.. 그냥 남희후배 해라.
왜냐하면? 남희후배보다 더 아름다운 여배우를 찾을 수가 없으니까.
너스레를 떨며 식탁을 차리고. 그리고 이쪽 저쪽 주머니에서 소주를 한병씩 꺼내든다.
남희 어이없어 웃는.
S#8. 이교수 연구실 / 밤
이교수가 차를 세잔 만들고 있다. 민재 불안해서 옆에 서있다가 얼른 찻잔을 나른다.
이교수 : 중희한테 물어보면 의리 지킨다고 입다물거고 만수한테 물어보면 과장되고 왜곡된 정보가 나올 거 같고.
그래서 니들을 불렀다.
정태 얼른 회의 테이블 옆 이교수가 앉을 의자를 빼준다.
이교수 : 앉어봐.
정태와 민재가 앉고..
이교수 : 명환이 무슨 일이야?
정태와 민재, 말을 못하는..
이교수 : 저번 브리핑 때 봤지? 그때 그거 명환이 아니었어. 뭐야. 나한테 말 못할 일이니?
민재 정태를 돌아본다. 정태 민재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서로 말하라고 미루는 분위기.
이교수 : 내가 맞춰볼까? 명환이 약혼자하고 무슨 일 생겼지?
민재, 정태 움찔해서 보는.
이교수 : 놀랄 거 없어. 최소한 일년에 한번씩은 보는 현상이니까. 명환이 상태가 어디까지 간거야.
내가 아는 명환이 성격이라면 지금 심각한 수준일텐데.
민재 : 심각..하다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데요.
이교수 : ...박사, 포기할지도 모르지.
민재 : 예?
이교수 : 안타깝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애들 많어. 각자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만
그래도 명환인 너무 아까워서 그래. 그래서 뭐니? 그 약혼자한테 다른 남자라도 생긴거야?
S#9. 교수식당 / 밤
남희, 소주를 마시다가 목에 걸려서 본다.
남희 : 다른 남자가 생겨요?
명환 : (웃고 있다) 예. 레지던트래요. 이제 곧 개업을 할건가봐요. 그럼 의사선생님이 되는거죠.
남희 : (멍해서 보다가 영석을 돌아본다)
영석 : 그리하여 오늘 술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 말이지. 근데. 내가 인공위성을 추락시키라면 뭐 버튼 몇개로 할 수 있겠지만..
이 멜러드라마 쪽은 전공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래서. 남희후배를 옵저버로 부른거거덩.
남희 : (다시 명환을 본다. 억지로 웃으며) 아이 뭐. 약혼까지 했는데. 그 정도로 기죽으면 어뜩해요. 어.... 그러니까 내 생각엔...
맞어. 이런건가부다. 요즘 그쪽에서 너무 소홀하니까 뭔가 질투작전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영석에게) 그렇죠?
영석 : (어깨만 으쓱.. 난 모르겠다..)
명환 : (그저 순하게..) 근데 말이죠 내가 제일 화나는 게 뭔지 아세요? 내 약혼자가 내 앞에서 딴 남자 얘기를 하는 건 괜찮아요.
뭐 그럴수도 있죠. 근데..나보구 머리도 좋은 놈이 왜 공학박사같은데 매달려 있느냐.. 이 말이요. 이 말이 화가 나드라구요.
그 말은 뭐냐..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십몇년...(영석에게) 형 몇 년이지? 내가 공학에 매달린 게?
영석 : 언제부터. 고등학교때부터?
명환 : 아니 난 초등학교때부터야. 초등학교 4학년때 타임머신에 대한 책을 읽었거든. 그때부터.
영석 : 그럼 한 십오륙년 되네.
명환 : 그렇죠. 그 십오륙년을 한꺼번에 무시당하는 말이거든요. 그게.
영석 : 근데 나 사실은 아까부터 이 말이 하고 싶었는데 무지하게 참고 있었거든. 해도 될까?
명환 : 뭔데.
영석 : 너 그냥 약혼 깨버려. 나 너의 약혼자. 만나본 적도 없지만 어째 맘에 안든다.
명환 : (물끄러미 영석을 보다가) 약혼은 깰 수 있는데. 근데 형. 그것보다 먼저 마음이 깨진거 같애.
영석 : 마음이 소주잔이냐. 깨지게.
명환 : 어쩜 수경이 말이 맞을지도 몰라. 초등학교 4학년때 내가 뭘 알았겠어. 그때부터 잘못 생각한거야. 그리고 이과에 들어가고
여기 대학에 오고 그 담부터는 그냥 떠밀려 온거야.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형. 정말 과학에 재능이 있고, 사명감이 있어서 이 길을 걷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영석 : 재능도 없고 사명감도 없으면 다른 길은 있냐? 이거 그만두면 너 딴 거 할 거 있어?
명환 : 그렇지? 그래서.. 이젠 정말 다른 선택이 없는건가. 없나? 계속 이렇게 떠밀려 가야되나?
영석 : ...너 취했냐?
명환 : (고개를 흔들더니) 그런가보네. (남희에게) 죄송합니다. 잠시.. 세수하고 오겠습니다.
일어나더니 걸어가는데.. 이제까지 멀쩡해보이던 그가 약간 휘청인다.
남희 그 모습을 보다가 영석에게.
남희 : 나.. 아무래도 불안해요. 이런 얘기 내가 들어도 되는 건가. 어째 잘못 앉아있는 거 같은데..
영석 : 내가 불안한 것도 그거야. 명환이 저녀석. 저렇게 아무한테나 자기 얘기 하는 놈 아니거든. 죽어도 혼자 조용히 죽을 놈인데
왜 저러는건지.. 입 다물게 할려고 남희후배 데려왔는데 소용이 없네. (술병을 들어 잔을 채운다)
남희, 명환이 간 쪽을 본다.
S#10. 구내 식당 전경 / 낮
아까의 건물, 낮의 모습이다. 그 위로,
박교수 : (E) 난 정말 이해할 수 없는데요. 이해가 안되지. 서교수는 이해가 돼?
S#11. 교수식당 내부 / 낮
전날밤에 명환 등이 앉았던 식탁 부근으로 서교수와 이교수 박교수 등이 식판을 들고와 앉으며.
박교수 : 아니. 연애를 하다가 잘못됐는데 왜 박사를 그만 둬. 연애는 연애고. 박사는 박사고. 둘이 상관관계가 뭐야. 없잖아.
서교수 :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이교수 : (불편해서) 그만 됐어요. 그냥 남자들의 심리를 좀 설명들을까해서 물어본 거에요.
박교수 : 잠깐만.. 이교수께서는 남자들의 심리를 모르는 게 아니라 혹시 연애 그 자체를 잘 모르시는 게 아닌가요.
이교수 : (대꾸를 말자해서 밥을 먹는)
서교수 : 저희 랩에도 가끔 그런 친구들이 있어요. 사랑을 하게 되서 연구를 소홀히 하는 거 까진 좋은데..그 과정에서 갑자기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는가 보드라구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순수하게 연구에 매달리다가
드디어 현실이 보이게 된다고 할까요.
박교수 : 말이 안되잖아. 사랑이라는 게 뭐야. 서로 상대방을 더 발전시키고 더 잘되게 해주려는 마음. 그게 사랑이잖아.
그럼 공학하는 사람들의 애인은 상대가 연구를 더 잘 할 수 있게 해줘야지. 그래야 사랑이지.
서교수 : 지금 그거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박교수 : 아니 그냥 헛소리야. (이교수에게) 그러니까 이교수님 제자중에 현재 사랑 때문에 연구를 중단할지도 모르는
학생이 있다..이건가요?
이교수 : 연구를 중단한다고는 안했어요. 그냥 그럴까봐 걱정하는거지. 그 여자 쪽에서 공학같은 거 보다는 좀 더 괜찮은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나오는 모양이에요.
박교수 : 그 여자 똑똑하네.
서교수 : 뭐?
박교수 : 사실 그렇지 뭐. 형이나 내 꼴을 봐. 아직 장가도 못가고 있잖아. 이게 다 현실을 반영하는 거 아니겠어?
그러고보니 여기 이교수님도 아직 시집을 못 가셨네.
이교수 : 박교수.
박교수 : 네?
이교수 : 뭔가 상의를 하면 한번이라도 좀 진지하게 생각해봐 줄 수 없어요? 박교수한테는 세상이 다 그렇게 장난처럼 보여요?
박교수 : (정색을 하더니) 장난이 아니죠. 현실이란 게.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살아야죠.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그래서 이렇게 웃는 겁니다.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서.
이교수와 서교수, 웬일인가해서 보는데.
박교수 : 어떻게 웃는지 가르쳐 드릴까요? (하더니 특유의 웃음으로) 하하. 따라 해보세요. 하하.
S#12. 석학의 집
미순이 컵들을 정리하며 한심해서 보고 있는 곳.
마이클과 진영이 테이블을 치우며 시시덕거리고 있다.
마이클 : 내가 만든 프로그램은 꼭 히트칠거에요.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가만이 앉아 있어도 맨날맨날 로열티가 막 들어와.
그럼 우리는 그 돈으로 여행 가는 거야. 나 아프리카 가고 싶은데 어때요.
진영 : 근데 거기서 우리가 왜 들어가요.
마이클 : 우리. 마이클 앤드 진영. 왜요.
진영 : 치이.. (수줍어서 쟁반을 들고 돌아서는데)
마이클 : (얼른 쟁반을 받아들어 주방쪽 따라가며) 미국에는 제일 부자들이 누군지 알아요? 영화배우하고 공학하는 사람들이에요.
빌게이츠. 진짜 부자에요. 영화배우는 사람들 즐겁게 해주고. 공학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줘요.
그러니까 부자해도 되요.
미순, 지나가는 그들을 보다가.
미순 : 좋을 때다. 그래 꿈 많이 꾸고 많이 커라.
경진과 자현, 지원이 들어서고 있다. 미순에게 인사하고 인사받고.. 자리를 찾아 앉으며.
경진 : 고물차라며. 그런 차를 오십만원이나 받는다고?
자현 : 겉에만 고물차지. 속에는 내가 싸악 수리해놔서 완전 새거야.
경진 : 글세. 내 주변에 차를 살만한 사람이 있나..
지원 : 그 차 누구거라고 했니?
자현 : 어. 지금 박사과정에 있는 명환이 선배의 선배님 찬데. 내가 그거 수리해주면서 구박을 좀 했거든.
이것도 차냐. 차의 모양만 간직하고 있는 고철덩어리 아니냐. 그랬더니 이 기회에 아주 바꿀 생각인가봐.
나보구 차 살 사람 알아보라고 하드라. 그 선배 이름이 박영석이라고 했나.. 김영석인가..
지원 : 전자과 아니니?
자현 : 맞어. 지금은 인공위성센터에 있대지. 왜. 알어?
지원 : 어.. 좀.
경진 : 아 생각났다.
자현 : 있어? 있음 빨랑 말해. 이 차 팔아주면 양장피 사준다고 했단 말야. 양장피.. 으흐흐..
경진 : 자현아 너 차 없지?
자현 : 뭬야?
경진 : 운전면허도 있고. 야 그거 니가 사라. 니가 사서 우리 좀 태우고 다녀라 엉? 추우니까 영 외출하기가 힘들잖아.
자현 : 너한테 물어본 내가 불쌍하지.. 병석이한테 사라 그럴까. 그놈이 돈이 없을텐데..
경진 : (미순에게) 언니. 민재네 안 왔어요?
미순 : 민재 아까 다녀갔다.
경진 : 앗 놓쳤다. 점심 먹고 갔어요? 남기지도 않고?
미순 : 민재 서울 간다고 하든데?
경진 : 예에?
S#13. 동아리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경진.
경진 : 김정태.
정태가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가..
정태 : 거 좀 조용히 다닐 수 없냐. 백미터 밖에서부터 니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라.
경진 : 민재 서울 갔대매.
정태 : 엉.
경진 : 왜.
정태 : 알아서 뭐할라고.
경진 : 혹시 그거 느이 랩장인 명환선배때문 아니냐?
정태 : (그제야 돌아앉는다) 어떻게 알어.
경진 : 그럼 그렇지. (의자를 끌어앉으며) 어제 밤에 그 선배 우리 센터에 끌려왔었거든.
정태 : 끌려와?
경진 : 엉 술에 잔뜩 취해가지구 영석이 선배가 아주 업구 왔드라구. 그래서 내가 그 선배가 잘만한 소파까지 수배해줬지.
그런데 그 선배 실연당했지.
정태 : 어째 넌 모르는 게 없냐.
경진 : 흐응.. 지구별 남자들한테는 아주 단순한 운동법칙이 있는데 그 첫째, 여자가 떠나면 위치에너지를 잃고 휘청거린다.
바로 어제 느네 랩장처럼.
정태 : 그래 그렇게 잘 아는 니가 한번 얘기해봐라. 이럴 땐 어떻게 위로를 해주면 되겠냐?
경진 : 내가 직접 개입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선 논평을 안하는 것이 내 방침이야.
정태 : 어이구 그러셔.
경진 : 그러나. 나를 개입시켜주면 몇가지 조언은 해줄 수 있지.
정태 : 꿈 깨시고. .. 참. 너 이거 좀 볼래. (컴퓨터 옆에 두었던 종이 한 장을 건네준다)
경진 : 이게 뭔데.
정태 : 시.
경진 : 뭔 시.
정태 : 명환선배가 학부때 썼던 시.
경진 : 오옷 그으래. (시를 읽는데)
소리 : (전화벨)
S#14. 이교수 랩
만수가 전화를 끊으며.
만수 : 김정태 불렀습니다. 곧 올겁니다.
이교수와 명환, 중희 등이 테이블에 둘러앉아있다.
중희 : 민재는.
이교수 : 민재는 내가 심부름 시켰어. (앞에 놓인 스케쥴 표를 들춰보며) 전산과 합동 프로젝트는 퍼지랩 진행에 맞춰서 스케쥴을
짜보도록 해. 일단 스케쥴을 짜면 그대로 맞춰주고.
명환 : 예.
이교수 : 다음은 뭐지?
명환 : 정부 발주 프로젝트에 대한 제안서를 만들어야 됩니다. 컨셉부터 잡아야 되는데 아직까진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이교수 : 그 프로젝트에 대해선 내가 다른 채널로 알아보는 중이야. 니들은 일단 제안서의 초안부터 잡아놔.
명환 : 알겠습니다.
이교수 : 아참 그리고.. (다이어리 펼치며) 아까 삼진의 박실장이 전화했는데 전에 우리가 보낸 중간결과가 좀 부족한 모양이야.
모레까지 다시 보충해서 보내주도록 해.
명환 : 모레까지요?
이교수 : 그래. 잊어버리지 말고. 그 담에..
명환 : 그건 어려울 거 같습니다.
이교수 : (보는) ...뭐라구?
명환 : 이 일정에 그 작업까지 하는 건 무립니다.
아이들 놀라서 명환을 보고 이교수를 보고.
명환 : 지금 랩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다섯 가지나 됩니다. 기획단계까지 합치면 더 많구요.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이틀 내로 뭘 해라.. 고 말씀하시면 .. 곤란합니다.
만수 : (숨도 못 쉴 지경이고)
이교수 : 곤란하다.. 못하겠다는 말이니?
명환 : (차분한 말투) 그래도 하라고 하시면 해야겠죠. 이제까지 늘 그래왔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시간에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긴
무리일 겁니다. 그저 구색은 맞출 수 있겠습니다.
이교수 : (말없이 보다가) 그래? 그럼 일단 구색이라도 맞춰봐. 약속을 한거니까. (중희 등을 둘러보며) 더 말 할 거 있니?
중희만수 : (얼른 고개를 저으며) 없습니다.
이교수 일어선다. 아이들도 따라 일어서고.
이교수 : (명환을 보더니) 내일 논문 면담하기로 했지?
명환 : ...내일이었습니까.
이교수 : (찌푸려지고)
중희 : (속이 타는데)
이교수 : 내일이었어. 늦지 않게 와.
명환 : 예.
이교수 문으로 가고. 중희 만수 얼른 인사를 하고. 이교수와 엇갈려서 정태가 들어서다가 인사를 한다.
이교수 말없이 나가버린다.
정태 안의 아이들을 보면. 분위기가 아주 이상하다.
명환, 혼자 냉정하게 테이블 위의 자료를 챙기더니.
명환 : 류중희.
중희 : 예?
명환 : 교수님 얘기 들었지? 준비해.
중희 : ..예.
명환 나가버린다. 나가는 명환을 보다가..
정태 : 뭐야? 무슨 일 있었나?
만수 : (긴장이 풀리며 의자에 주저앉더니) 아이구 내 심장. 이대로 영영 멈춰버리는 줄 알았네.
정태 : 왜애.
만수 : 내가 뭐랬어. 대형사고가 터진다구 그랬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명환선배. 얼굴을 봐봐. 시한폭탄같이 생겼잖아.
중희 : 안그래도 정신없는데 조용히 좀 해라.
만수 : 어이구 내가 조용히 못하지요. 정만수 일생에 이런 긴장감을 언제 또 맛보겠어. (벌써 문으로 나가며) 정태야. 동아리방에
누구누구 있냐. 이 스릴과 서스펜스를 함께 나눠야지. (나갔다)
정태 : (중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래요.
중희 : 정태야.
정태 : 왜요.
중희 : 넌 알고 있지? 명환이형하구 형수님 일. 그리고 이교수님도 알고 있지?
정태 : 어.. 그건..
중희 : 교수님이 오늘 같은 일을 당하고 저렇게 조용하실 분이 아니야. 이거 나만 빼놓고 다 알고 있는 모양인데.
뭐가 어떻게 된거야.
정태 : 오늘 같은 일이라니요?
중희 : 그리고. 민재는 어딜 갔어? 이교수님이 어딜 보내신거야.
정태 : (난처해서)
S#15. 동아리방
경진과 대욱이 지민이 보고 있는데.
만수 : 명환선배가 발표를 망치고 이교수님께 불려가서 만방으로 깨졌다 그러더니 하늘처럼 모시던 교수님 앞에서 반항을 하고
대들었다. 니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건 지능제어랩이 생긴 이래 최대의 파란이고 이변이라 이거다.
대욱 :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만수 : 뭐가.
대욱 : 만수선배가 그 랩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게 더 큰 사건 아닌가.
지민 : 맞어. 이교수님은 무슨 생각으로 만수오빠를 받아줬을까. (경진에게) 언니는 알어?
경진 : 모르지. 이교수님이야 생각이 깊으신 분이잖아.
만수 : 이것들이 보자보자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나. 가만히 있어 주니까 가마니로 보이나.
니들은 지금 선배를 걱정하는 나의 이 뜨거운 심정이 안 느껴지냐?
대욱 : 내가 보기엔 아주 신나하는 거 같은데?
지민 : 역시 오빠하고 나는 보는 눈이 같구나.
만수 : 어허.. (짐짓 화를 내는 얼굴로 보다가 으히히 웃더니) 솔직히 재미있잖아. 야아 어떻게 살다보니까 이런 일도 본다 야.
정만수가 아니고 정명환이가 깨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냐.
경진 : 그럼 몇번째가 되는거지?
만수 : 뭐가 몇번째야. 이건 최초의 사건이래니까.
경진 : 이교수님 랩에서 못 버티고 그만 둔 학생들 몇 명 있었잖아. 난 만수오빠가 그 다음 타자가 될 줄 알았거든.
만수 : 임마 넌 무슨 말을 그렇게 끔찍하게 하냐.
경진 : 그럼 명환선배가 그 다음이 되는건가.
만수 : 하이구. 그 인간이? 명환이형은 내츄럴 본 랩장이야. 애당초 랩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이거지. 그런 인간이 관둬?
경진 : 내가 듣기론 그럴 거 같든데?
만수 : 뭐? 왜? 뭘 들었는데? 뭐가?
대욱 : (하품을 하더니) 자현선배는 어딜 간거야? 왜 안와?
S#16. 캠퍼스 일각
영석의 낡은 자동차가 서있고 그 옆에 자현과 백곰이 나란히 서서 자동차를 보고 있다.
자현 : 보시다시피 외형은 별볼일 없습니다.
백곰 : 한마디로 폐차직전이군.
자현 : 그러나. 이 내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본넷을 열어젖히고) 카이스트 중에서도 기계과. 그 기계과 중에서도
엔진랩에서 소장하고 있던 최고의 부품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카엔지니어가 될 추자현의 손에 의해 조립되어 있습니다.
백곰 : 다시 말해 고물조립품이라 이거군.
자현 : 으이그.. 살거에요 말거에요.
백곰 : 얼마라고?
자현 : 백만원밖에 안하는데요.
백곰 : 뭐야?
자현 : 팔십만원.
백곰 : (돌아서는데)
자현 : (막아서며) 육십만원. (하다가 백곰의 뒤를 보고 손을 흔들며) 어이구 선배님. 좀 와서 도와주세요.
명환이 다가오고 있다.
자현 : 시방 선배님의 선배님 차를 흥정하는 중인데요. 이 손님이 영 차의 진가를 몰라주는구마요.
백곰 : 아주 인해전술로 판매를 할 모양인데..
명환 : (자현에게) 웬만하면 비싸게 팔아줘.
자현 : 글세 저야 그러고 싶죠. 그럼 양장피에 탕수육도 첨가될텐데.
명환 : 그 선배. 휘발유값이 없어서 파는거야. 전세값도 모자라고.
자현 : 예?
명환 : 그거 팔아봤자 전세방 얻는데 도움도 안되겠지만.. (백곰에게) 사실거면 좀 도와주세요. 그럼..
휘적휘적 간다. 백곰과 자현.. 멍하다가..
백곰 : 지금 우리 바자회 하고 있는거냐. 불우이웃 돕기 바자회?
S#17. 건물 내 휴게 장소
영석이 앞을 보다가 멋쩍은 듯 흐흐 웃는다. 그 앞에 앉아있는 지원.
영석 : 근데 그 아르바이트 나 주면 후배는 괜찮나?
지원 : 저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했어요.
영석 : 그래도 이거참.. 민망한데.. 후배 알바자리나 뺏구 말야. 하여간 정말 고맙다 어?
지원 : 고마워할 필요는 없는데요. 애들 가르치는 게 시간이 너무 매여서 그만 두는 거니까요. 대식이한테는 어제 말했구요.
그 어머니께서도 알고 계세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 까딱 숙여보이고 일어서려는데)
영석 : 어이 후배.
지원 : ?
영석 : 가난하다는 게 뭔지 알어?
지원 : ..예?
영석 : 난 대대로 가난한 집 자식이거든. 우리 할아버지때까지는 머슴. 아버지는 쪼끔 출세하셔서 택시 운전기사.
근데 우리 집에 아버지가 만들어 놓으신 가훈이 하나 있어.....'가난은 엔진오일.' ...멋지지?
지원 : 가난이 엔진오일이라구요?
영석 : 그렇지. 아버진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에 가족끼리 이렇게 서로 뭉치고 보살펴주며 사는 거라고 생각하셔.
그리고 가난하기 때문에 자식들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다고 믿으시고. (아버지 목소리) 니들이 돈 많은 집
자식이었어봐라. 내 빽이나 믿고 인생 낭비하고 살았을 거 아니냐! 내가 가난한 덕분에 니들이 이렇게 똑똑해진게야.
어쨌거나 지 힘으로 먹고 살아야하니까. 안그러냐. 어허허허.
지원 : 그래도.. 엔진오일이 들어가는 가훈은 처음 듣는데요.
영석 : 어어 진짠데. 정말로 우리 집 마루에 가면 걸려있다고. 이렇게 큰 글씨로 가난은 엔진오일.
지원 : (웃는)
영석 : 이 말 아무한테나 안해주는 얘긴데. 아르바이트 양보해 준 거, 보답으로 해주는거야.
지원 : 네. 고맙습니다.
영석 : 흐응. 근데 조대식이 수학점수는 어때? 영어만큼 바닥인가? 걔 수학노트에도 온통 핑클 사진 붙여놨어?
지원 : 수학노트에 붙어있는 건 엄정화 사진인데요.
영석 : 으윽..
S#18. 캠퍼스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다.
도서관 건물이 전등불이 들어와있다.
S#19. 도서관 내부
이곳 저곳에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찾는 학생들.
만수, 두리번거리며 그들 중의 누군가를 찾고 있다. 현재 명환을 찾는 중. 손목시계를 보고..
S#20. 도서관 입구
만수, 도서관을 나오면서도 오가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저만치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오는 병석을 본다.
만수 : 어이 기계과.
병석 : (보면)
만수 : 추자현이 친구. 너 자현이 못 봤냐?
병석 : 아까 낮에 차 팔러 다니는 거까지 봤는데요.
만수 : 바로 그 차의 주인의 후배, 알지?
병석 : 예?
만수 : 아 그 무지하게 멋없게 생긴 사람 있잖아. 우리 랩장이며.. 나의 시어머니며..
병석 : 정명환 선배요?
만수 : 어 이름 아는구나. 혹시 그 선배 이 주위에서 못 봤냐?
병석 : 그 선배라면 아까 쪽문으로 들어올 때 만났는데.
만수 : 쪽문? 그럼 밖에 나갔단 말이야? 하이구 이제 어디서 찾나. 그 선배는 단골술집도 없는데.
병석 : 나한테 게임방 물어보든데.
만수 : 뭔방?
병석 : 이 근처에 게임방 어디가 유명하냐.. 이렇게 물어봤지 아마? (옆의 친구를 돌아본다)
친구 : 그랬던 거 같은데.
만수 : (어이가 없어서) 혹시 뭐 잘못 들은 거 아니냐? 피씨방도 아니고 노래방도 아니고 게임방이라고?
S#21. 게임방 내부
DDR 게임이 한참 벌어지고 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그 앞에서 한참 춤에 열중하고 있고.
그리고 그 옆에서 명환이 헤 벌어져서 구경에 열중해있다. 보다가 자기도 조금씩 어설픈 발흉내를 내보기도 한다.
입구 쪽. 기웃거리며 들어서던 만수가 명환을 발견한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보다가 다가선다.
만수 : 저기 실례지만 지능제어랩의 정명환 선배 맞습니까?
명환 : (힐끗 돌아보더니) 여긴 웬일이냐.
만수 : 그건 제가 묻고싶은 말인데요. 도대체 여기서 뭐하는거에요? 위성센터에 가기로 했다면서요. 아까부터 계속 전화왔었어요.
아니 호출기는 왜 꺼놓고 계신 것이며, 지금 선배님이 여기서 이런 거 구경하고 있을 수가 없는 분이잖아요.
게임이 끝나고 열심히 뛰던 학생이 내려선다.
명환 : 가만 있어봐. (동전을 꺼내더니 넣는다)
만수 : 음마야. 선배니임.
명환, 판 위에 서더니 자세를 잡는다. 만수 기절하고 싶다.
명환, 아주 서툴지만 그러나 아주 집중을 해서 게임을 해나가기 시작한다.
만수, 어처구니가 없어서 주위를 둘러본다. 구경하던 누군가가 명환의 서툰 몸짓에 웃고 있다.
S#22. 위성센터 / 지상국 운용실
모니터에 나타나는 여러 신호들. 영석이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그 뒤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 명환. 그리고 그 뒤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만수.
영석 : (작업을 해나가며) 임마. 인제 오면 어뜩해. 자료 다 뽑아놓고 한참 기다렸잖아.
명환 : (시들..) 이렇게 가지러 왔잖아요.
영석 : 좀만 기다려. 이번 패스에 하지 않으면 안되거든.
모니터에서는 실시간을 내려오는 위성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
명환 : 위성이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것 같은데요?
영석 : 어 그래, 지난 번에 올린 스케줄을 보니까 에이지티(AGT) 모드 이네이블(enable) 시키는 것이 빠져 있더라구.
그래서 이번에 꼭 그걸 실행시켜야 돼.
* AGT(Automatic Ground station Targeting)
: 위성이 지상국 상공에 접근하면 자동으로 안테나가 지상국을 향하도록 자세를 제어 하는 것
전화벨이 울리고 만수가 얼른 받아든다.
만수 : 예에 지능제어랩...이 아니고 운용실인데요. 박영석씨요?
영석 : (얼른 가서 전화를 받아) 여보세요? 아, 예. 제가 박영석입니다. 예. 궁동 근처루요. 연립이든 단독이든 상관없어요.
몇 평인데요? 어.. 그정도면 좋은데... 반지하요? 그럼 얼만데요.
명환, 영석쪽 흘끔 본다
영석 : 그 액수에 반지하 말구는 없다구요?
명환, 다시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데이터를 살펴보다가.
명환 : 형, 위성이 지상국을 향해서 돌지 않구 있는데요?
영석 : 뭐?
명환의 말을 들은 영석, 모니터를 들여다보더니 허둥대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운영일지를 본다.
영석 : 아... 전에 잘못 세팅한 스케줄을 지우지 않았어. 우선 그걸 지우고 새로 명령을 줘야하는건데...
(다급한) 명환아 교신 끝나기까지 몇 분이나 남았나 봐봐.
명환 : 어디요?
영석 : 거기 두 번째 컴퓨터!
명환 : (확인하며) 앞으로 2분 남았어요.
영석, 오실로스코프로 나오는 신호를 쳐다보며.
영석 : 링크 상태도 안 좋은데 할 수 없지. 계속 보내는 수 밖에...
영석, 계속 키보드를 누르면서 명령을 보낸다.
영석 : 제발 한 번만. 메시지 한 번만 내려와라. 제발...
영석, 중얼거리며 계속 키보드를 눌러 댄다.
명환 : 종료 20초 전이에요.
영석 : 한번만 제발. (하다가 소리치며) 오케이! 됐어!! 메시지 받았어. 휘유....
명환 : 이제 된겁니까? 괜찮은 거에요?
영석 : 어. 됐어. (아차 싶어 수화기 든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멋적게) 끊어졌네.
영석이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지역정보지를 다시 뒤적거리는데.
명환 : 형수가 돈은 빌려왔어요?
영석 : (힐끗 보고) 어.
명환 : 처가댁에서 실망했겠군요. 형수도 자존심 상했을테고.
영석 : 너 술 취한 건 아니지?
명환 : 술은 안 마셨는데요.
영석 : 그래. 넌 취하면 나한테 말을 놓으니까 금방 알지. 근데 너 왜 이렇게 비딱해.
명환 : 그러게요.
영석 : 이 자식이.. (보는데)
명환 : 앞으로 자료는 이 친구한테 넘겨주면 됩니다. 만수야. 들었어?
만수 : (불퉁) 귀가 정상이니 들리죠. 들리기야.
영석 : (주머니를 뒤지더니 동전 몇 개를 꺼내준다) 너 이거 갖고 가서 당장 서울에 전화해.
명환 : (동전을 받아들어 보는)
영석 : 전화해서 헤어지든지 다시 붙든지 결정내리라고. 뭐냐 사내자식이 어떻게 여자 땜에 인간성까지 변해?
명환 : (동전을 세보며) 400원인데요. 400원어치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시외전환데요.
영석 : 정명환. 잘 들어. 난 비록 이렇게 썩어가는 머리를 달고 다니지만, 그리고 전세값도 없어서 처가집에 손 내미는
못난 놈이지만 그래도 내 여자를 웃게 만들어. 알어?
명환 : (보는)
영석 : 내 아내는 언제나 날 보면 웃긴대.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줄 아냐? 넌 뭐야. 너 마지막으로 니 여자를 웃게 만든 게 언제야?
명환 말없이 영석을 보고 있다.
S#23. 건물 내 로비 / 밤
명환이 걸어오고 있다. 그 뒤를 저만치에서 자료를 안은 채 줄레줄레 따라오는 만수.
만수 : (따라오다가) 저기 있는데요.
명환 : (돌아보면)
만수 : 공중전화. 저기 있다구요.
명환, 만수가 가르키는 곳을 본다. 거기 공중전화가 있다.
만수 : 저 먼저 갈게요.
웬일로 엿들을 생각도 않고 만수가 먼저 간다.
명환 물끄러미 전화기를 보는데 가던 만수가 다시 돌아오더니 부시럭거리며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준다.
만수 : 천천이 말씀하세요. 이런 건 천천이 말해야 될거에요.
동전을 억지로 명환의 손에 쥐어주더니 만수 가버린다.
명환, 전화를 돌아본다.
경과
명환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명환 : 여보세요. ..아 저 명환입니다. (상대가 뭔가 한참 얘기를 하고)...예 수경이 여기 다녀갔습니다. 수경이한테 대충 얘기
들었습니다. ..아니요. 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로 수경이하고 잠시 얘기하고 싶은데요....예. 예..
다시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명환, 손가락에 끼워진 언약반지를 만지작거려 본다.
명환 : 수경이니? 얘기할 게 있는데.. 아니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거 같다. 만나서 얘기하자. ...니가 내려올 필욘 없어.
넌 여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이번 주말에 내가 올라갈까. ...뭐? 누가 찾아와?...이름이 뭔데. ..(좀 격해지고 있다)
이름을 말했을 거 아냐.
S#24. 정태 / 민재의 방 / 밤
민재, 금방 들어선 참이다. 겉옷을 벗어 던지며...
민재 : 기차를 타고 오는건데 괜히 버스를 타가지고 오늘 중으로 못 오는 줄 알았다야.
정태 : 그래서 갔던 일은 어떻게 된거야.
민재 : 뭐. 전해주라는 거 다 전해주고.
정태 : 그거 말고..
하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명환이 들어선다.
명환 : 이민재.
정태 민재 엉거주춤 서는데...
명환 : 너 어디 갔다 왔어.
민재 : 저요? 저..서울에..
명환 : 서울 어디.
민재 : 저기 삼진 산업에.. 교수님께서 샘플 갖다주라고 하셔서..
명환 : 똑바로 말해. 언제까지 나한테 숨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거니 지금?
민재 : (괴롭다) 선배한텐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명환 : 뭘? 누구한테 뭘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어?
정태 : 저...좀 앉으시죠. 캔커피 있는데 드릴까요. (웃어보이려는데)
명환 : (정태를 휙 노려보더니) 니들.. 재밌냐?
정태 : ...우린 그냥 선배가 걱정이 되서..
명환 : 걱정이 되서 내 여자를 몰래 가서 만났어? 만나서 뭐라고 했는데. 정명환이가 불쌍하니까 잘 좀 봐달라고 했니?
정태 : 선배.
명환 : 내가 니들 눈에 그렇게 보였니? 여자 땜에 빌빌대고 지 정신을 못 차리는 거 같아서,
후배 손으로 챙겨줘야 되는 놈으로 보였어?
민재 : (그냥 참고 있다)
정태 : 이건 제 생각이었는데요. 민재가 서울 간다기에, 가는 김에 한번 만나보면 어떻겠냐고.
명환 : 만나서. 뭘 어떻게 해.
민재 : (결국 못 참고) 선배님이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말씀드렸습니다.
명환 : 뭐야?
민재 : 선배님이 우리 랩에서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그리고 선배님이 연구하고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그걸 말씀드리고 왔습니다.
명환 : (어이없어 보더니 웃는다) 그래서. 내가 지금 니들한테 고맙다고 말할까?
민재 : 만나고 나서 저도 후회했습니다. 돌아오면서 내내 잘못 갔다고 생각하면서 왔어요.
명환 : (보는)
민재 : 전 그 여자분 싫습니다. 선배. 파혼하세요.
정태 : (놀라서) 야 임마. 너 지금 뭔 소리 하는거야. (잡아 말리려는데)
민재 : (뿌리치더니) 그 분은 시계에 나사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몰랐습니다. 아무리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서 설명을 드려도
잘 이해를 못하시길래 내가 그렇게 말했거든요. (버벅대면서) 그니까 우리가 하는 일은 시계의 나사 같은거다.
나사 하나는 별거 아니지만 그래도 그거 없으면 시계가 안 돌아간다. 맞잖아요?
정태 : (명환의 눈치를 보는)
명환 : (말없이 민재를 보고 있다)
민재 : 근데.. 그 분은 ...그러시드라구요. 나사에도 중요한 게 있고. 중요하지 않은 게 있다구.
물론 그 말도 맞죠. 그렇지만 그래도 명환이 형은 정말 중요한 나사잖아요. 뭐 별로 비싸지 않은 부속일 수도 있지만..
명환 아무 말없이 민재를 보고 있고. 민재도 더 할말이 없고.
정태 눈치를 보다가..
정태 : 아무래도 민재 대신 내가 갈걸 그랬나봐요. (민재에게) 야. 미술하는 분한테 나사같은 얘길 하면 어뜩하냐.
뭐 고갱이나 피카소나 그런 예를 들 순 없었어?
명환 : (문득 시선을 돌려 다른 데를 보다가) 처음부터 시계가 고장나 있는지도 모르지.
정태 : ..예?
명환 : 이 사회가 하나의 시계라고 한다면 말이야. 이 커다란 시계가 지금 고장이 나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민재, 정태 언뜻 이해를 못해서 보는데 명환 문쪽으로 간다.
정태 : 선배.
명환 : 자라. 서울 다녀왔으면 피곤하겠다.
명환, 문을 열고 나간다. 문이 닫긴다.
S#25. 캠퍼스 / 밤
전경... 겨울 나무들..이따금 추운 듯이 지나가는 학생도 보이고..
그리고 저만치 불이 켜져있는 도서관 건물.
S#26. 도서관 내부
늦은 밤에도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공부를 하고 있거나 책을 찾고 있거나..
머리를 맞대고 뭔가 문제를 같이 풀고 있는 학생도 보이고...
그리고 이만치에서 명환이 우뚝 서서 그들을 보고 있다.
S#27. 도서관 로비
터덜터덜 걸어나오던 명환. 문득 멈춰서더니 한곳을 돌아본다.
거기에는 '과학입국'이라고 커다란 글자로 씌어져서 걸려있다.
S#28. 동아리방 / 밤
경진이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뭔가 글자를 쳐넣고 있다.
잘 안되는지 고민을 하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종이(명환의 시를 베낀)를 들고 읽으며 서성거린다.
경진 : 나는 모른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떤 길인지..
경진 곰곰 생각하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부리나케 컴 앞으로 가서 뭔가를 더 쳐넣는다
S#29. 영석의 집 / 밤
가스레인지 위에서 냄비의 물이 끓고 있다. 그 옆에는 라면이 있고.
그리고 거실 가운데서 영석이 수화기를 들고 뭔가 열심히 얘기하고 있다. 현재 아내와 통화를 하면서 웃기고 있는 중이다.
S#30. 이교수 랩 / 밤
중희가 머리를 긁어대며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다 돌아보면 만수가 나름대로 열심히 작업 중이다.
작업을 하며 옆의 뻥과자 봉지에 손을 뻗쳐 찾는다. 봉지는 비어있다.
만수, 으잉 해서 봉지를 들어보고.. 책상 밑에 떨어져 있나. 뒤져보는..
S#31. 오리연못 가 / 밤
명환이 혼자 앉아있다. 추운 듯 앉아서 물끄러미 연못을 보다가.. 자기 손가락의 반지를 본다. 유심히..
S#32. 캠퍼스 / 아침
건물 위로...
처장 : (E) 글세요 저는 반대인데요.
S#33. 처장실
처장이 이교수의 앞에 찻잔을 내밀어 주며.
처장 : 물론 이교수께서 안타까워 하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선생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집니다.
아무리 제자를 아낀다고 해도 그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는 거 아닐까요.
이교수 : 아니 전 그냥.. 너무 유능한 아이니까.. 근데 결혼은 해야되니까..그런데 생활 문제로 그게 어려움이 있다면..
학교에서 어떻게 도와줄 수는 없을까하구요.
처장 : 어떻게요. 우리 아이들은 다 유능합니다. 개중에는 성적이 좀 떨어지는 아이도 있고. 남보다 좀 늦은 아이도 물론 있지요.
그렇지만 박사 과정에 들어온 아이라면 최소한 십년은 이 세계에서 견뎌온 아이들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유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중에 누구를 골라서 어떻게 도와줘요.
이교수 : 그렇지만 그애들에게 사명감이나 보람을 느끼게 해주지 못하는 건 우리 어른들 잘못이잖아요. 솔직히 처장님 같은 분이
좀 일찍 정치계로 나가셨으면 좋잖아요. 그래서 연구하는 아이들. 기를 살려주게 그런 법도 좀 만드시고.. 그리고..
처장 : (허허 웃더니) 그리구요.
이교수 : 일년짜리 이년짜리 과시나 하는 연구 말고, 정말 사명감을 갖고 할만한 십년짜리 이십년짜리 그런 연구도 밀어주고..
그리고..
처장 : 이교수님.
이교수 : 예?
처장 : 어떻게 십몇년이 지났는데도 생각하는 게 그렇게 똑같애요?
이교수 : ...제가요?
처장 : 그 때도 나한테 똑같은 말 했었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했드라..이럴거면 차라리 다시 시험쳐서 의대애 들어가겠다.
의사가 되서 무의촌에 가면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소리는 들을 거 아니냐..
이교수 : ...제가 그랬어요? 그래서 뭐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처장 : 이런... 이러니 제자들 앞에 놓고 백날 떠들어대는 선생만 불쌍한거에요. 암만 좋은 소리 해줘도 기억을 못하니 말이에요.
이교수 : 가르쳐 주세요.
처장 : 싫습니다. 또 까맣게 잊어먹고 십년 뒤에 와서 같은 소리를 하실텐데요. 뭐.
이교수 : 이번엔 적어놓을게요. 저기.. 제 학생한테 얘기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처장 :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얘길 해 주겠다구요?
이교수 : 분명 좋은 말씀이셨을 거에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 여기 있는 거잖아요. 그쵸?
S#34. 동아리방
정태와 민재가 들어오다 보면, 경진이 야전침대에서 잠들어있다.
정태 : 어이 민경진. 어이.. (깨운다)
경진 : (뒤돌아 누우며 못 깨는)
정태 : 너 간밤에 여기서 잔거야? 어이 정신 차려. 아침이야. (흔들어대는)
민재 : 아무래도 우리 동아리방 앞에 여관 간판을 달아야 돼. 너. 만수형. 이젠 경진이까지 아이구..
경진 : (할수 없이 일어나 앉으며 눈도 못 뜨면서..) 너무 그러지 마. 나 밤새 시 썼단 말야.
민재 : 뭘 써.
경진 : (하품하며) 시. 포엠. 피오이엠. 근데 시 하나 쓰는데 시간이 무지 걸리네.
정태 : 갑자기 무슨 시를 써. 너도 신춘문예에 응모할거냐?
경진 : (시 읽는 어조로) 속물들이여. 시는 상금이 아닌 인간을 위해 쓰는 것이다. 인간의 외로운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민재 : 그게 간밤에 니가 쓴 시냐?
경진 : 아니. 그냥 밤새 시를 쓰다보니 말도 시처럼 나오네. (기지개 켜며 일어선다) 아이구 배고파. 왜 눈만뜨면 배가 고픈 것일까.
나는 아무래도 영혼이 굶주려 있나보다.
정태 : 난 못 말리겠다. 민재 니가 말려라.
민재 : 경진아 삽십분 있으면 식당에 아침밥 끝나. 얼른 가봐라. 엉?
경진 : (컴퓨터 옆에 놓였던 종이를 집어들며) 누구 이쁜 봉투 있니?
민재 : 이쁜 뭐?
경진 : 이런 역작은 아주 비싼 봉투에 넣어야 되는데. 공대 동아리방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아이구.. 힘없어. 누가 아침 좀 안 사주나. 그냥 돈으로 줘도 되는데.. (하품을 하며 나간다)
S#35. 이교수 랩 앞 복도
경진이 아직도 졸린 눈으로 서서 엉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손으로 빗어넘기고 있다가 보면..
저만치 명환이 오고 있다. 한손엔 우유를 들고. 한손에는 논문 자료를 들고.
경진 목 운동을 하고, 눈을 크게 뜨느라 애쓰고 나서 그 앞으로 간다.
경진 :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명환 : 어. 좋은 아침이다. (비켜서 지나가려는데)
경진 : (막아서며 명환의 얼굴을 살펴보는)
명환 : 왜?
경진 : 아뇨. 그냥 얼마나 잘 생기셨나 보는 겁니다.
명환 : 뭐?
경진 : 가만 보니까 잘 생기신 거 같네요.
명환 : (어이없어 웃는) 나 지금 교수님께 논문 면담 받으러 가는 길이야. 좀 비켜줄래?
경진 : 자요. (편지봉투를 내밀어 준다) 어떤 여학생이 전해달라고 하든데요.
명환 : 누가?
경진 : 모르지요. 그저 나에게 물었습니다. 전자과의 정명환 선배를 잘 아시지요?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잘은 몰라도
알긴 알지요. 그러자 그 여학생이 그러더군요. 그럼 죄송하지만 이걸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명환 : 이게 뭔데.
경진 : 글세요. 내가 보기엔 러브레터 같은데요.
명환 : 뭐? (열어보려는데)
경진 : 어어.. 안되지요. 그런 건 나중에 조용히 열어보는 게 상대에 대한 매너라고 보는데요. 그 여학생은 그거 하나 쓸려고
얼마나 마음을 썼겠습니까. 그리고 이걸 전하느라고 또 얼마나 긴장했겠습니까.
명환 : (어이가 없다) 너 도대체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경진 : 제가 아직 아침을 못 먹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선배 손에 들려 있는 우유를 대신 마셔도 될까요?
명환 : 이거 내가 마시던건데?
경진 : 상관없습니다. 반대쪽을 뜯어서 마시면 됩니다. 심부름값으로 접수하겠습니다.
잽싸게 뺏어들더니 걸어가며.
경진 : 선배님..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좋으시겠습니다. 앞날이 창창한데요.
명환, 도깨비에 홀린 기분으로 가는 경진을 보고 손에 들린 봉투를 보는.
S#36. 이교수 연구실
이교수가 명환이 가져온 보고서를 읽는 중. 그 앞의 명환 기다리고..
이교수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이교수 : 초기에 학습이 안되서 모델링 오차를 모른다면 적응제어 기법을 적용해서 한계치를 추정한다..
명환 : 예.
이교수 : 이게 다야?
명환 : 아직.. 거기까지밖에는 못 나갔습니다.
이교수 : (보고서를 덮으며) 갖구 가. 이거 가지곤 해 줄 말이 없어.
명환 : ... (받아드는데)
이교수 : 너..
명환 : 예?
이교수 : 반지 어뜩했어.
명환, 자기 손을 내려다보는. 언약반지가 없다.
명환 : ...뺐습니다.
이교수 : 왜.
명환 : ..손에 잘 안 맞는 거 같아서요. (웃어 보이고 일어서는데)
이교수 : 앉아봐.
명환 : (다시 앉는)
이교수 : 이건 내가 십몇년 전에 내 지도교수님께 들은 말인데..
명환 : 예.
이교수 : 잘 듣고 잘 기억해. 십년 뒤에 퀴즈시험 볼거니까.
명환 : (긴장하며) 알겠습니다.
이교수 : 너.. 하기 싫으면 그만 둬.
명환 : 예?
이교수 : 박사가 된다는 거 쉽지 않아. 그리고 학위를 딴다고 해도 갈 길이 널려 있는 것도 아니야. 벤처를 해서 떼부자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한마디로 이 길은 아주 별볼일 없어. 기껏 잘 되봐야 넌 지금처럼 밤새고 앉아서 컴퓨터나 들여다 보고 있게
될거야. 그러니까 관두려면 지금 그만 둬. 지금이라면 다른 길 찾을 수 있어.
명환 : ...
이교수 : 사명감도 없고. 즐겁지도 않으면서 여기 붙어서 어정댈 필요 없어. 너 아니래도 이거 할 사람 많아.
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아이들이 너 땜에 자리를 못 찾을 수도 있지. 내 말 틀렸니?
명환 : ...아닙니다.
이교수 : 그러니까 빨리 결정해.
명환 : 예.
이교수 : 근데.. 그 전에 업체에 중간 결과는 보내줘야겠다.
명환 : 알겠습니다. (일어서는데)
이교수 : 아 그리고 만수가 잡고 있는 거 어제 슬쩍 봤더니 엉망이야. 그거 손 좀 봐주고.
명환 : 예.
이교수 : 정부 프로젝트 기안서는 니가 맡어. 마음의 결정을 하기 전에 그 정도는 할 시간 있겠지?
명환 : 그럴 겁니다.
이교수 : 그래 그럼 가봐.
명환 고개 숙여보이고 돌아나오는데.
이교수 : 정명환.
명환 : 예?
이교수 : 어깨 피고.
명환 : 예.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감돈다)
S#37. 복도
명환이 걸어오고 있다. 의식적으로 어깨를 펴본다. 그러다가 문득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낸다.
안을 열어 종이를 꺼내 걸으며 읽어본다.
경진 : (E) 나는 안다.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명환, 멈추더니 찡그려서 시를 본다. 자기의 시의 패러디다.
경진 : (E) 나무는 언제부터 저 곳에 서있었는지.
S#38. 다른 복도
만수가 지겨워서 우편물을 분리하여 넣고 있다. 그러다 잠시 분리함을 노려보더니
에라.. 나머지 우편물을 슬그머니 한 곳에 쑤셔박는다.
바로 그 순간 종이 만 것으로 머리통을 때리는 손길. 아야 해서 돌아보면 명환이다.
명환 : 똑바로 안할래. 넌 어떻게 어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냐. 하는 짓이 그러니까 머리통 안도 맨날 뒤죽박죽이지.
만수 : (명환의 변신에 놀라서 반격도 못하는)
명환 : 하루 스물네시간 중에 한시간이라도 좀 제대로 살아봐 어?
명환 먼저 걸어간다.
만수. 놀라서 보고 있다가 어..어.. 허허.. 웃음이 나온다. 그위로..
경진 : (E) 바람이 불고 묵은 잎사귀 하나씩 떨쳐내며 나무들 맨 몸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안다. 나무가 언제부터 맨몸이었는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언제부터 저 자리를 지켜왔는지.
S#39. 이교수 랩
중희와 정태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옆에서 명환이 모니터를 보며 인상을 쓰고 있다.
명환 : 니들 지금 학부 신입생이야? 이걸 지금 정부 프로젝트의 기안서라고 쓴거야? 류중희.
중희 : 예.
명환 : 자료 갖구 와봐.
중희 : 아. 예. (얼른 가고)
명환 : 김정태.
정태 : 예.
명환 : 민재 뭐하고 있어. 당장 와서 데이터 정리하라고 해.
정태 : 예. (전화기로 가서 드는)
명환의 옆에서 중희와 정태가 눈을 마주친다. 뭐가 어떻게 된거야...해서..
경진 : (E) 나는 지금 그저 걷고 있을 뿐 이 길의 줄기가 되고 있을 뿐이지만 그러나 나는 안다. 언젠가 나는 뿌리가 될 것이다.
언젠가 나는 나무가 될 것이다. 그 때에 그대들은 내 그늘 아래 와서 쉬어라. 내 넓고 풍성한 그늘 아래서.
모니터를 보며 작업을 하는 명환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