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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溪 박희용 麗陽南禪軒日記 2024년 8월 12일 월요일]
국역 대동야승 제6권 음애일기
중종반정(각주 1)과 박원종(각주 2)
[국역]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박원종(朴元宗)은 부잣집에서 자라 젊었을 적엔 뜻이 크고 남에게 구속받지 않아서 푸줏간 동네에 출입하면서 활 쏘고 말 타는 것을 배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청현(淸顯)의 벼슬을 하더니, 드디어 행실을 고쳐 글을 읽고, 대의(大義)를 통달하게 되어 세속(世俗)을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부인(각주3)은 그의 누이로서 연산(燕山)(각주4)에게 더럽힘을 당하고 드디어 병이 들어 죽으니, 그는 마음에 항상 분하게 여겼었다.
이때 성희안(成希顔)(각주5) 은 매양 연산을 따라 망원정(望遠亭)에서 놀 제, 재상들과 그를 좇는 자로 하여금 시(詩)를 짓게 하였다. 이에 ‘성인의 마음은 원래 청류를 사랑하지 않는도다(聖心元不愛淸流)’라는 구절이 있으니, 연산이 크게 노하여 이것은 자기를 기롱한 것이라 하여 드디어 벼슬이 떨어져 집에 있었다.
연산의 어지러운 정치가 날로 심해져서 종사(宗社)가 위급하자 성공(成公)은 본래 큰 계략이 많은 터라, 어둡고 어지러운 것을 맑게 하고 성명(聖明)을 추대하고자 하나, 더불어 함께 계획할 사람이 없어 답답하여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마음으로는 박원종이 큰일을 부탁할 만하다고 생각했으나 본래 좋아하던 터가 아니어서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마을 사람 신윤무(辛允武)라는 자가 두 집을 왕래하여 심히 친밀했으므로, 창산군(昌山君 성희안)은 그로 해서 은밀하게 뜻을 시험하게 했더니, 평성군(平城君 박원종)은 이에 옷깃을 떨치고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는 내가 밤낮으로 마음속에 쌓아두고 있는 터요.” 했다.
이에 창산(昌山)이 저물녘에 평성(平城)의 집에 이르러서 각각 통곡하면서 평생의 충의(忠義)를 털어놓아 말하기를, “마땅히 죽음으로써 국사에 허락할 것이니, 남아의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는 터인즉 어찌 종사(宗社)의 위험이 조석에 있는 것을 보고서도 구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매우 즐거워하더니 두어 달이 지나자 공(公) 등은 고립되어서는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하고, 드디어 그 뜻을 유순정(柳順汀)에게 통지했다. 유순정은 회답을 오래도록 지연시키고 속히 승낙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마음속에 이미 같이하기로 승낙하였다. 드디어 박영문(朴永文)ㆍ신윤무ㆍ홍경주(洪景舟) 등에게 두루 말해서 각각 동지(同志)를 모으게 하였다. 그러나 규합(糾合)된 자들은 모두 무부(武夫)들이 많아서 의리를 좇지 않고 일을 인하여 공세우기만 즐겨 해서 상의하지 않고서도 서로 뜻이 같으므로 그들이 있는 곳마다 날뛰었다.
병인년 9월 2일에 연산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에서 놀고자 하여 호종(扈從)하는 재상은 다만 구종(口從) 한 사람만 데리고 가기를 허락했다. 공(公) 등은 약속하기를 이날 문을 닫고 한쪽으로 막고 한쪽으로는 지켜서 진저(晉邸)를 추대하기로 계획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연산(燕山)이 명하여 이 놀이를 중지시키었으나, 장사(將士)들은 환[奮]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여 계획한 일이 이미 폭로되었으니, 형세가 그대로 말 수가 없었다[將士思奮 機事已露 勢不可止 장사사분 기사이로 세불가지 : 장사들의 분노를 생각하니, 일이 이미 알려진 바엔 (반정하고자 하는) 기세를 중지할 수 없어)] 공 등은 의논하기를 초하루 밤중에 장사(將士)들을 훈련원(訓練院)에 모이게 하고 사람을 나누어, 변수(邊修) 최한홍(崔漢洪)으로 하여금 내성(內城) 동쪽을 지키게 하고, 심형(沈亨)과 장정(張珽)은 내성 서쪽을 지키게 하였는데, 창졸간에 군대가 없으므로 역부(役夫)들을 몰아다가 지키게 했다. 공(公)과 성(成)ㆍ유(柳) 양공(兩公)은 바로 광화문(光化門) 앞 수백 보 지점에 나가서 말을 세워 진을 이루고, 공이 부채를 휘둘러 지휘하는데 용지(容止)가 신인(神人)과 같았다.
신윤무(辛允武)로 하여금 용사(勇士) 이심(李甚)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신수영(愼守英)을 때려죽이고 다음으로 임사홍(任士洪)(각주 을 죽이고 그다음으로 신수근(愼守勤)을 죽이도록 했다. 신수겸(愼守謙)은 당시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었으므로 일이 정해진 뒤에 서서히 사람을 보내서 죽이기로 했다. 신수근 등은 비록 권세를 빙자하고 사치하여 형편없이 굴었지만 당시에 난폭한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해서 실로 국가의 근본이 기울어지게 한 자가 어찌 이 사람들뿐이랴만, 유독 이 세 사람만을 죽인 것은 수근이 본래 교만하고 방종하여 법대로 행동하지 않았었다. 또 장차 국구(國舅)가 된다면 함부로 나대어 제어하기 어려운 형세가 있을 것이므로 급히 그 우익(羽翼)을 제어했던 것이다. 공 등이 처음 의논하기는 구수영(具壽永)(각주6)이 음란한 짓을 가르치고 악한 것을 행하게 한 추함이 있다 하여 함께 없애려 했으나 그 족질(族姪) 중에 현손(賢孫)이란 자가 있어 이 계획을 알고 구수영에게 달려가 고하자 구수영이 훈련원으로 나와 목숨을 빌었기 때문에 공 등이 용서했던 것이다.
신윤무가 이 네 사람을 쳐 죽일 제 이심은 항상 철퇴를 가지고 길 옆에 숨었다가 별감(別監) 한 사람으로 하여금 명패(命牌)를 가지고 가서 대궐에 들어오기를 재촉하니, 저들이 경황하여 대궐에 들어갈 제, 이심이 세게 치니 말에서 떨어지면서 머리의 골이 모두 터져 나왔다. 신수근이 습격을 받고 땅에 떨어지자 따라가던 종 하나가 그의 머리 위에 엎드려 자기 몸으로 철퇴를 막는 것을 이심이 모두 쳐 죽였다. 이심이 손으로 네 사람을 죽이고 나니 피가 튀어 얼굴에 가득하고 옷이 온통 빨개졌으나 그 공을 보이기 위해서 며칠 동안 얼굴도 씻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으니 보는 자가 추하게 여겼다.
평명(平明)이 되자 백관들이 모두 모였으나 누가 어떻게 한 일인지 알지 못하고, 입직(入直)하던 도총관(都摠管) 민효증(閔孝曾)과 병조 참판 유근(柳謹)이 나오고 승지(承旨) 이우(李堣)(각주7)가 다음으로 나오고, 또 윤장(尹璋)(각주8)과 조계형(曹繼衡)이 또 나오니, 입직했던 군사들은 모두 성을 넘어서 공 등의 군사에 붙었다.
처음 연산(燕山)은 금중(禁中)에서 이 변을 듣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차비문(差備門) 안에 앉아 승지 등을 불러들여 앉히고 말하기를, “이같이 태평한 세상에 어찌 다른 변이 있겠느냐. 아마도 이것은 흥청(興淸)의 남편 되었던 자들이 모여서 도둑이 된 것이리니, 급히 정승과 금부당상(禁府堂上)을 불러 처치하도록 하라.” 하고, 이우를 명하여 열쇠를 가지고 대궐문을 돌면서 조사하게 하였다. 이우는 먼저 사람을 시켜 문에 나가서 조정이 이미 소속된 데가 있는 것을 조사해 알고 드디어 몸을 빼어 문을 나왔다.
연산은 이우가 이미 문을 나갔다는 얘기를 듣고 앞으로 나아가 윤장과 조계형의 소매를 잡으니, 두 사람은 거짓 사양해 피하는 체하고 소매를 뿌리쳐 나가 버렸다. 이들은 문틈으로 쫓아 나가려 하였으나, 조계형은 당시 희롱과 은총을 받던 신하인지라 문을 지키던 장사(將士)가 잡아다가 상을 타려고 데리고 군문(軍門)에 나가니 공 등은 역시 용서하였다. 이때 대궐 안 환시(宦侍)와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諸色人]이 모두 나오고 오직 후궁(後宮)과 광대 기생들만 서로 모여 울부짖으니 소리가 밖에까지 진동했다.
이에 극문(戟門) 안에서 회의하고 유자광(柳子光)과 이계남(李季男)은 머물러 궐문을 지켜 폐주(廢主)가 도망하는 것을 막도록 했다. 공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景福宮) 문밖에 나가 자순대비(慈順大妃)에게 명령을 청하니 이윽고 문을 열고 이끌어 들였다. 공(公) 등이 근정전(勤政殿) 서쪽 뜰에 나아가 벌여 앉아 유순정(柳順汀)과 정미수(鄭眉壽)로 하여금 잠저에 가서 임금의 행차를 맞게 했다.
이때 상감께서는 평시서(平市署) 옆 인가에 피해 있었으므로 유순정 등은 마을 문밖에 앉아서 재삼 나가시기를 권했다. 상감이 융복(戎服)으로 연(輦)을 타고 법도를 갖추어 나오니, 저자에서는 평상시와 같이 요동함이 없었고 부로(父老)들은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 한낮이나 되어 경복궁에 들어가니 유자광(柳子光)(각주9)은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폐한 고사(故事)를 본받아 전왕(前王)을 대궐 안에 가두고 대비(大妃)에게 폐주(廢主)한 연고를 고하려 하니, 공 등은 의논하여 이를 중지시켰다. 날이 어둡기 전에 백관의 반열(班列)을 정하고 임금이 근정전에서 즉위한 다음 사방에 교서(敎書)를 내려 대사(大赦)하였다.
교서는 도승지(都承旨) 강혼(姜渾)(각주10)이 초잡았는데 혼은 젊어서부터 이름이 당시 세상에 알려졌는데, 연산에게 총애를 받게 되자 경술(經術)을 가지고 난폭한 정치를 감싸며 아첨하는 태도와 아첨하는 말로 구차스럽게 굴었었다. 궁인(宮人) 하나가 죽자 연산은 슬퍼하고 애석히 여겨 강혼으로 하여금 애사(哀詞)와 재소(齋疏)를 짓게 했더니 그 글이 매우 아름답고 고와서 이로부터 사랑이 날로 두터웠다.
이 때에 이르러 교서를 초하는데 썼다가는 문득 지워서 종시 문장을 이루지 못하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호매(狐魅)의 글이어서 어두운 밤에만 잘 쓰고 날이 밝으면 저절로 막힌다.” 하였다.
대개 폐주한 일은 처음 창산(昌山)이 계획하고 공(公)의 손에서 이루어져서 위태로운 것을 편안히 하였고, 화가 변하여 복이 되었으니, 실로 동방(東方) 만세(萬世)의 사업이었다.
다만 창산의 천성은 과단성과 결단성이 있으나 학술(學術)이 없고, 청천(菁川 유순정)은 성질이 너그러워 주장이 없으며, 공(公)은 거칠고 사나우며 근거가 없어 비록 충의(忠義)에 격동된 바 있어 공이 마침내 이루어진 일이지만 일하는 것에 있어서는 마땅함을 잃었다.
옛날의 은혜로써 적신(賊臣) 유자광을 용납했다가 후일의 화를 싹트게 했으며, 자질구레한 인아(姻婭)들에게까지도 모두 철권(鐵券)을 주었다. 뇌물의 많고 적은 것으로 공로의 상하를 매겨 연거속구(連車續狗)의 기롱이 있어 지금까지 병통으로 여긴다. 공은 공을 이룬 뒤로부터 겸손하고 삼가는 것으로 자처하는 실지가 없어 장의동(藏義洞)에 집을 지었는데, 장려(壯麗)한 것을 극진히 하여 이목(耳目)의 욕심을 다하고자 했다.
수상(首相)이 되어서는 부승(負乘)의 화를 깊이 살펴서 굳이 사양하여 사직함을 얻었으니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공(公)이 죽은 날에 조야(朝野)에서 무엇인가 잃은 것같이 여겼다. 임금이 조회를 파하고 슬퍼하고 애석히 여기며 은전(恩典)을 보통보다 더하게 하고, 친히 가서 조상하려 했으나 바야흐로 왜난(倭亂)이 있으므로 유사(有司)가 이를 막았다.
[논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연산군의 폭정이 끝없이 치솟던 연산군 12년 9월 2일, 신하들이 거사를 일으켰다. 지중추부사 박원종, 부사용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군자부정 신윤무, 군기시첨정 박영문, 수원부사 장정, 사복시첨정 홍경주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 뜻을 같이 했다. 문관과 무관이 골고루 모였고, 건장한 장수들과 무사들도 호응했기 때문에, 지휘부와 행동대원이 두루 갖추어졌다.
박원종 등은 삼경(밤 11시~새벽 1시)에 연산군이 있는 창덕궁으로 향해서 하마비동의 어귀에 진을 쳤다. 삽시간에 장안에 소식이 퍼졌고 문무백관과 군민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좌승지 한순 등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반정에 합류했다. 한성판윤 구수영, 운산군 이계 등 종친들은 진성대군(연산군의 배다른 동생, 중종)의 집으로 가서 거사한 사유를 설명하고 군사로 하여금 호위하게 했다. 또한 윤형로를 경복궁으로 보내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 윤씨(진성대군의 어머니)에게도 거사 사실을 알렸다. 윤형로는 정현왕후의 사촌오빠이다.」
연산군 이융의 죄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포악한 왕으로 정리될 정도로 악랄했다. 수많은 죄상 중에서도 1498년 무오사화와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대부와 선비를 학살했다. 그가 왕위에 있은 1494~1506년 13년 동안 위로는 영의정부터 아래로는 백성들까지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는 생활이었다. 연산군 이융은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채 색정증과 편집증을 앓는 정신질환자였다.
이 일기에 보면, 높은 벼슬을 하며 연산군과 어울리던 성희안이 시 한 구절을 잘못 짓는 바람에 연산의 노여움을 사 정9품 미관말직으로 좌천된 것에 앙심을 품었고, 박원종은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부인인 누이 박씨가 연산에게 겁탈을 당해 차마 죽지 못해 살다가 1506년 7월에 죽으니 너무도 분하고 원통하여 반정을 도모했다고 한다.
이 일기에는 박씨 부인이 병이 들어 죽었다 하지만, 일설에는 연산군에게 10여 년을 희롱 당하다가 아이를 임신하여 자결했다고도 한다. 혹자는 박원종이 반정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누이의 죽음을 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반정의 명분을 만들어도 명문 반가의 사대부로서 누이의 명예를 더럽히면서까지 거짓으로 꾸미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음애일기가 1509년부터 쓰여졌으니 바로 몇 년 전의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기술했을 것이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박씨 부인에 대한 온갖 종류의 야사가 횡행하는데, 명색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월산대군의 정실부인이 된 명문가의 아녀자로서 추잡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억울하게 조카인 연산군에게 겁탈을 당하고도 죽지 못해 연명하는 세월이 너무나 부끄러웠을 것이다.
순천박씨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반듯한 교양을 갖춘 여성으로 월산대군에게 출가하여 승평부대부인의 귀한 신분이 된 분을 함부로 모독하는 것은 양아치 근성을 가진 소인배들이 하는 짓이다.
반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만 소문이 새나가도 즉각 고변되어 색출 당한다. 그러나 이 일기를 보면 영의정 이하 조정의 고관대작들부터 대소 신료들, 군사들과 장사들, 도성의 백성들 모두가 이미 마음 속으로 폐군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입직(入直)하던 도총관(都摠管) 민효증(閔孝曾)과 병조 참판 유근(柳謹)이 나오고 승지(承旨) 이우(李堣)(각주7)가 다음으로 나오고, 또 윤장(尹璋)(각주8)과 조계형(曹繼衡)이 또 나오니, 입직했던 군사들은 모두 성을 넘어서 공 등의 군사에 붙었다’에서 보듯이 신하들 모두와 대궐 수비군사들도 연산군에 대해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이 중에서 이우와 윤장이 반정군에 협조적이어서 반정공신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중종 14년(1519) 조광조 등이 주장한 위훈삭제 사건 이전인 1514년에 대간으로부터 거사 당일의 처신에 대해 탄핵되면서 공신호를 박탈당하였다.
이 일기 ‘중종반정 조’에는 거사 당일과 전후에 정변을 맞이하는 여러 유형의 인간상을 볼 수 있다. 성희안과 박원종은 이미 목숨을 걸고 거사를 도모하지만, 거사 계획을 듣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드물고, 소극적으로나 묵시적으로 참여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민효증, 유근, 이우, 윤장, 조계형 등처럼 거사 계획을 몰랐다가 당일 밤에 반정군에 슬그머니 협조한 인물들도 있다. 모두들 순간의 선택이 목숨과 가문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민효증, 유근, 이우, 윤장, 조계형 등 당일 밤에 대궐에서 입직한 신하들의 행태는 비겁한 기회주의자였다. 거사를 미리 알았으면 입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과 국가가 일체이므로 왕에 대한 충성이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이지만, 왕이 무도하여 개선의 가망성이 전무하면 반정하여 새 왕을 옹립함이 맞다. 그러나 입직하는 신하라면 다른 신하들과는 처신이 달라야 한다. 특히 왕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승지 이우는 먼저 사람을 보내어 사태를 알아보게 하고 조정이 벌써 소속된 데가 있는 것을 자세히 알고는 그만 몸을 피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연산군이 옷소매를 붙들어도 뿌리치고 슬그머니 도망치는 윤장과 조계형, 수채 구멍을 통해 대궐에서 빠져나가는 윤장은 결코 조선의 선비 출신 사대부다운 모습이 아니다. 이우는 퇴계 이황의 숙부이다. 어릴 때 학문을 배웠다.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 사회에서 이우 등의 처신은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아무리 화급하고 철퇴를 든 장사들이 들이닥치더라도 조정 신하, 특히 입직하는 신하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마땅했다. 그리하여 모시는 주군인 연산군을 위하다가 철퇴에 맞아 죽더라도 후세엔 충신으로 이름이 남을 것이다. 성희안과 박원종은 이미 철퇴로 당장 주살할 자들의 살생부를 작성했다. 입직하는 신하들을 주살하지는 않을 것이다. 살생부에 든 몇 명을 제외하고는 크게 피를 흘리지 않은 무혈 반정이었다.
이들에 비하면 그래도 신수근이 연산군의 충신이다. 진성대군을 옹립하는 반정을 일으키자는 박원종의 제의를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총명하니 믿어보자."라고 거절했다가 철퇴에 맞아 죽었지만, 박원종의 제의를 듣고도 반역 고변을 하지 않은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신수근 사후 ‘영조 15년에 딸인 단경왕후가 왕후로 복위 되면서 영의정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에 추증되었고, 영조는 신수근의 충절이 포은과 거의 같다고 신수근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럼 영조는 어떤 속내였을까? 아마 자기 주위를 신수근처럼 무조건 충성을 바치는 신하들이 옹위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신수근을 포은 정몽주에 비견한 것은 전혀 합당하지 않은 칭찬이다. 사육신을 그토록 모질게 죽여놓고는 몇십 년이 지나자 슬그머니 충신으로 올려놓고 ‘만고의 충절’을 본받으라고 강조하는 왕조의 생리. 이러한 왕조의 생리를 극복하기 위해 결코 원하지 않은 식민지와 분단, 전쟁과 독재의 20세기를 보내야 했다.
성희안과 박원종이 참으로 큰일을 했다. 을지문덕 장군, 연개소문, 강감찬 장군, 이순신 장군만이 구국의 영웅이 아니다. 성희안과 박원종도 구국의 영웅이다. 폭군을 만나 나라와 백성이 고초를 겪고 있을 때, 분연히 일어나 폭군을 제거하여 나라와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한 일은 분명 위업이다. 백여 년 후에 벌어진 정변인 인조반정은 김류, 이귀, 장유 등 서인들이 나라와 백성의 삶과는 무관하게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몰아내고 왕권과 정권을 잡기 위해 벌인 반란이지만, 중종반정은 정신질환자 연산군과 임사홍, 임숭재, 신수근, 신수영 등 극악한 간신들이 자행한 폭정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한 구국의 반정이다.
연산군의 네 명의 어린 아들들은 사사 賜死되었다. 임숭재, 신수근, 신수영은 철퇴를 맞아 죽고, 철퇴에 맞아 죽은 임사홍는 20일 뒤에 부관참시되었다. 연산군의 비호 아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권력을 쥐락펴락했던 장녹수와 일부 후궁들, 장녹수의 형부 김효손 등은 군문 앞에서 참수를 당했다. 특히 백성들은 장녹수와 전동, 김숙화 등 후궁들의 국부에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졌다. 시신 위로 한순간에 백성들이 던지는 원망의 돌무더기가 쌓였다.
왕 하나 잘못 만나면 온 나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다. 이 고통은 신하들도 마찬가지로 받는다. 못난 왕에게 충성하는 간신들은 소수이고, 대다수 신하들은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왕의 지시에 순종한다. 반대로 좋은 왕을 만나면 온 나라 백성들과 신하가 즐겁다. 이렇게 왕 하나가 만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왕조이지만 신하들과 백성들에겐 선택권이 없다.
그렇다면 신하들과 백성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겠는가. 반란뿐이다. 그 반란이 실패하면 역적이고, 성공하면 반정 공신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왕조 때마다 크고 작은 역모와 반란이 얼마나 많았는가. 왕이 선정과 덕치를 행할 때는 없었지만, 폭정과 난정을 행할 때는 음양으로 많은 역모와 반란이 일어났다. 왕이야 역모요 반란이지만 백성들로서는 시원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동물은 무리를 지어 산다. 그래서 무리동물이라고 한다. 사자와 호랑이 등 사나운 육식동물은 가장 힘이 센 수컷이 우두머리이고, 원숭이와 코끼리 등 온순한 초식동물과 개미, 벌과 같은 작은 곤충들은 암컷이 우두머리이다. 인간사회도 원리는 똑같다. 아마 원시인류는 일반 초식동물들처럼 모계사회가 아니라 강한 남성이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지와 정서가 발달하면서 생긴 애정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짝지으면서, 다른 동물사회처럼 가장 강한 수컷이 모든 암컷을 번식시키는 사회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녀 한 쌍이 고유의 번식권을 가지게 되면서 사회가 다양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단을 조직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권력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현상은 인간이 무리 동물인 이상엔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생긴 것이 씨족국가, 부족국가, 고대국가로 발전했다.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강한 동물이 우두머리가 되듯이 인간사회에서도 가장 강한 자가 왕이 되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시조들이 왕이 될 때는 평화로운 이적이 일어났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화의 세계이다. 내물이사금이 실질적인 김씨왕조를 연 것은 석씨왕조와의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이며, 경순왕이 박씨왕조를 제치고 다시 김씨왕조를 연 것은 후백제 견훤이 경주에 침략하여 경애왕를 죽이고 임명했기 때문이다. 견훤, 궁예, 왕건, 이성계 등 새 왕조를 연 왕들 모두 무력을 장악한 장군이었다.
왕을 떠받드는 심리는 고금이 같다. 로마 공화정은 결국 황제를 만들었고, 프랑스대혁명도 나폴레옹 황제를 만들었다. 현대에도 세계 곳곳에는 왕국이 있다. 그 국가에서 왕은 여전히 절대권력자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3선을 획책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3선개헌도 모자라 유신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종신 대통령을 획책했다. 전두환과 노태우 군벌은 12.12 반란을 일으켜 체육관 대통령이 되고, 간선제를 통해 군벌 장성들이 줄줄이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
인간의 본성 속에는 지배욕과 함께 피지배욕도 있다. 내가 왕이나 대통령이 되어 만인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도 있고, 나보다 강력한 자에게 복종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활짝 꽃 피어도, 어느 순간에 폭풍우가 휘몰아쳐서 꽃이 떨어지듯이 민주주의가 붕괴될 수도 있다. 연산군과 같은 류의 성정을 가진 야심가들이 날카로운 발톱을 깊숙이 감춘 채 민주시민 행세를 하고 있다. 세체 혀를 가진 자는 선전선동으로, 군권을 장악한 자는 군대를 이용하여 야욕을 채우려고 획책한다.
그러므로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연산군과 같은, 전두환과 같은 자가 도발해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연산군 이융은 우리 민족 왕조사에서 가장 악랄한 폭군이었다. 그의 증조부 세조 이유 李瑈는 사육신 등 많은 충신들을 참살했고, 현조부 태종 이방원은 정몽주 등 많은 고려 충신과 반대파 인사들을 참살했다. 뿐만 아니라 왕이 되기 위하여 형제들을 무참히 죽였다. 여진족 지역에서 5대를 산 태조 이성계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왕위를 찬탈하여 조선을 건국했다. 이렇듯 조선의 왕계에는 독사와 같은 냉혈이 흐르고 있었다.
현대에 와서 이런 연산군 이융을 떠받드는 무리가 우리 사회 일각에 슬슬 생기고 있다. 연산군이 시와 글씨에 우수했다면서 재조명이니 하면서 설친다. 신하들과 백성을 참살한 광인이 미친 마음으로 쓴 시와 글씨가 무슨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가. 연산군 묘가 있는 서울 어느 구에서는 해마다 ‘연산군제’ 행사를 한다. 민간단체 주관이라면 자유이지만 국고가 든다면 그러한 행사를 기획할 명분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제상을 받은 연산군과 신수근, 임사홍, 장녹수, 김효손 등 난신적자들의 귀신이 좋아할 것이다. 이 그 행사를 주관하고, 창의를 입고 제사를 지내는 자들이 설마 그 간신들의 후손은 아닐 것이다.
1506년 9월 2일 밤부터 모이기 시작한 백성들이 다음 날 아침에는 구름처럼 모였다. 반정을 응원하는 민심이 해일처럼 도도했다. 중종반정은 민심의 해일이 받쳐줬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각주1) 중종반정(中宗反正)은 1506년(연산군 12) 음력 9월 2일(양력 9월 18일) 당시 폭정의 극을 달리던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그의 이복동생인 중종(성종과 貞顯王后 尹氏의 왕자 이역 李懌)을 옹립한 政變이다. 성희안과 박원종이 주도하는 반정 계획에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재상 유순정, 당상관 유자광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정 중신들이 호응하고, 많은 장사와 백성들이 추종하여 성공시켰다. 거사 당일에 대궐 수비군도 무저항으로 동조하였다.
(각주2) 박원종(朴元宗 1467년~1510년) 본관 順天. 적개공신 평양군 박중선의 아들로 연산군 재위 기간 동안 신임을 얻어 연산군이 즉위하자 중추부지사 겸 경기도 관찰사,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다음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지고 도총부 도총관을 겸직하는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나 점차 왕의 미움을 받았고 결국 삭직되었다. 이에 성희안, 류순정과 함께 반정을 모의했고 1506년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옹립하였다. 이 공으로 정국공신 1등이 되어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을 거쳐 이과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1509년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에 봉해졌지만 몇 달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무열이다. 박원종에게는 적자가 없어 박원종이 죽은 후 박원종의 서자인 박운이 제사를 받들었다.
(각주3) 승평부대부인 박씨(昇平府大夫人 朴氏, 1455년 - 1506년 7월 20일)는 조선 전기의 왕족이다. 덕종의 장남 월산대군의 부인이자, 성종의 형수로, 연산군의 백모이기도 하다. 적개좌리공신인 박중선의 딸로,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의 누나이면서 또한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이모, 인종의 종조모(부계)이자 대이모(모계)가 된다. 본관은 순천이다.
첫 봉작은 상원군부인(祥原郡夫人)이었는데 뒤에 승평부부인으로 개봉되었다.
박씨는 1466년 8월 19일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장(李暲)과 혼인했다. 당시 박씨의 아버지 박중선은 병조 참판으로, 세조의 이종사촌이었다. 월산대군과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고, 월산대군은 후실 사이에서만 두 아들을 두었다.
일설에는 박씨는 미모가 출중한 여인으로 그녀를 둘러싼 추문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문 반가 아녀자들의 법도를 모르는 호사가들의 낭설이다. 연산군은 어릴 때 잔병치레가 잦아 백부인 월산군의 집 덕수궁에 자주 피접을 나갔고, 그를 손수 길러준 박씨는 연산군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후에 연산군은 보위에 오르자 자신의 세자도 박씨에게 기르게 하고 세자가 커서 궁으로 돌아올 때 박씨도 같이 들어오게 했다. 연산군은 박씨에게 많은 물품을 하사하고 인수대비에게 효도를 했다는 이유로 정려문도 지어 주었다. 그는 박씨에게 처소를 내어주고 자주 처소를 방문했는데 이 때문에 연산군이 박씨와 간통을 했다는 추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또 연산군은 승평부부인의 당호 앞에 '大' 자를 넣어 승평부대부인이라는 도장을 만들게 하였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이후 연산군이 박씨와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이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 월산대군의 묘에 긴 창을 꽂게 했다는 소리까지 있었다. 이처럼 박씨가 시조카인 연산군에 의해 겁탈당하였다는 소문은 당시에 파다했다. 그 뒤 박씨는 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는데,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연산군의 아이를 잉태하여 자결했다고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야사에선 연산군에게 성병을 옮아 자결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당시 박씨는 쉰을 넘긴 나이였으므로 아이를 가져 자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중종반정의 주모자였던 박원종이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이와 연산군 간의 사건을 조작하여 소문을 퍼뜨렸다거나, 불심이 깊었던 박씨가 당시 유교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각주4) 燕山君 이융(李小隆)(1476~1506) 본관 全州. 1494~1506년 조선 10대 왕. 연산군은 1476년(성종 7)에 성종과 윤기무(尹起畝)의 딸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종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융(小隆)이고, 1483년(성종 14)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494년 19세에 왕이 되었다.
연산군은 2대 사화(士禍) 이래로 더욱 그 마음이 사치해져서, 자기의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거나 혹은 멀리 유배 보내 언론의 자유를 막은 다음, 매일 주색과 오락을 생활로 삼아 자기 하고 싶은 바를 다하였다. 특히 갑자사화 이후에는 창기로서 얼굴이 예쁜 자를 대궐 안으로 뽑아들이니 처음에는 백 명 정도였던 것이 나중에는 만 명이나 되었다.
아버지인 성종의 친형이요, 연산군의 백부인 월산대군의 부인은 도총관으로 있는 박원종(朴元宗)의 누이였다. 그런데 월산대군이 하세한 후에도 박씨부인은 아직 젊고 어여뻐서, 자색이 아름답기로 종실 내에서 손꼽는 터였다. 결국 연산군은 갖가지 유혹과 위협 끝에 마침내 백모인 그녀 몸을 짓밟고 말았다. 불의의 봉욕을 당한 박씨 부인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1506년 7월에 자결하고 말았다.
그 뒤부터 그 부인의 친정 동생인 박원종은 원통하게 죽은 누님의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박원종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먼저 당시 물망이 있는 재상 유순정(柳順汀)과 성희안(成希顔) 두 사람과 손을 잡고 누나가 죽은 두 달 뒤인 1506년 9월 2일에 자순대비 윤씨의 소생인 진성대군을 추대하고 반정을 일으켰다. 이에 자순대비는 내린 비망기를는 다음과 같다.
“이 사직은 백 년의 덕을 닦아 만세의 터를 쌓음을 위주로 하거늘 승통한 인군이 불행히 실덕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졌음에 대소 신료들과 원근 민서들이 소리를 같이 하여 호소하기를 종사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여, 숙성하고 인자하며 민심이 스스로 모이는 진성대군을 추대하나이다 하므로, 내 또한 생각하기를 어두운 인군을 폐하고 밝은 인군을 세움이 어찌 고금 천하에 통하는 의가 아니리오. 이제 내 신하들의 마음을 좇아 진성대군으로서 왕위에 나아가게 하고 전왕은 폐하여 연산군으로 강봉하노니, 이렇게 함으로써 장차 끊어지려는 백성의 목숨을 회복하고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수를 바로잡고자 함이니 여러 신민(臣民)들이여, 나의 뜻을 충분히 살필지어다.”
폐위된 연산군은 교동부에 보내 가둔 다음 군졸들로 파수를 엄하게 하고, 폐왕비 신씨는 정청궁으로 내몰았으며, 폐세자와 그 밑에 아들들을 모두 귀양보냈다. 연산군은 그 해에 죽었는데 그의 장사는 왕자의 예로 였으며, 양주군 해등촌(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묻었다.
(각주5) 성희안(成希顔 1461년 ~ 1513년 9월 6일) 본관 창년. 제52대 영의정(1513년 중종 8년 5월 16일 ~ 9월 6일). 봉호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1485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경연에 참여하여 성종의 눈에 들었다. 연산군 때에는 종2품인 이조참판 자리까지 올랐으나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시를 써서 바치게 했을 때 풍자적인 내용의 시를 올려 연산군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종9품 부사용으로 좌천당하였다. 이후 성희안은 박원종, 류순정 등과 모의하여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끌어내리고 중종을 즉위시키는데 1등 공신이 됨으로서 박원종, 류순정과 함께 3대장(三大將) 혹은 3훈(三勳)이라 불리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의 자리에 서게 된다. 중종이 즉위한 후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의 벼슬을 거쳤으며 박원종과 류순정이 죽은 뒤인 중종 8년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하고 그해 사망하였다. 중종실록에 기록된 3훈의 졸기 중 사관의 평가가 가장 후한 것이 성희안의 졸기이다.
(각주6) 구수영(具壽永 1456년 ~ 1523년) : 본관 능성. 12세에 영응대군(永膺大君: 세종의 여덟째 아들)의 사위로 뽑혀 세조로부터 특별히 선략장군부호군(宣略將軍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예종이 즉위한 뒤에는 은총을 입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성종이 즉위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곧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다시 도총관을 역임하고, 1501년(연산군 7)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올랐다. 1504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가 되어, 흥청(興淸) 200인, 운평(運平) 1,000인, 광희(光熙) 1,000인을 모아 악률을 교육하면서 연산군의 유락(遊樂)을 도왔으며, 그 공로로 1506년에는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이어 경기순무사(京畿巡撫使)로 나갔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박원종(朴元宗) 등이 중종반정을 도모하자, 이에 가담해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했으나 사직하여 체직되었으며, 이후 연산군의 충복이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효성이 지극하고 성품이 자상했으며 음률과 악기에 재주가 있었다.
(각주7) 이우(李堣 1469 ~1517) :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 이운후(李云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산부사 이정(李禎)이다. 아버지는 진사 이계양(李繼陽)이며, 어머니는 부사직(副司直) 김유용(金有庸)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숙부이다.
1492년(성종 23) 생원이 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예문관검열·대교·봉교를 거쳐 1501년 성균관전적에 올라 사간원정언·이조좌랑·사헌부헌납·병조정랑 겸 지제교·사헌부장령 겸 춘추관기주관·봉상시첨정·사간·군기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지제교와 춘추관수찬관을 겸했다가 마침 입직하던 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협력하였다. 그 공로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고 우부승지로 벼슬이 승진되어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겸하였다.
1508년(중종 3)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희망, 진주목사로 부임해 청렴과 검소를 위주로 백성을 다스려 왕으로부터 특별히 옷감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전임,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형조참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양친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 뒤 영해·김해 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앞서 반정공신 책봉 당시에 이우의 녹훈 문제로 물의가 있었는데, 1514년에 (반정 당일 밤) 입직 승지로서 신하의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했다는 비난을 받아 삭훈되었다가 이듬해 안동부사로 서용되었다.
문장이 맑고 전아(典雅)하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시에 뛰어나 산천의 명승을 읊은 것이 『관동록(關東錄)』·『귀전록(歸田錄)』에 전한다. 최숙생(崔淑生) 등과 친하였다.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재집(松齋集)』 1권이 있다. 비가 안동시 도산면 녹전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다.
(각주8) 윤장(尹璋 생몰 미상) :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가고(可沽), 호는 고불(沽弗). 1483년(성종 14)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1488년 예문관대교를 거쳐, 1493년 사헌부지평에 승직하였다. 곧 체직되었다가 1494년(성종 25)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으며, 곧 삭령군수(朔寧郡守)로 파견되었다.
1497년(연산군 3) 삭령군수로서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03년 청주목사(淸州牧使) 재임 중 선정으로 체임시에 승서(陞敍)하도록 조치되고, 1505년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면서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 후 연산군대에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반정 후인 1506년(중종 1)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정2품 자헌대부에 오르면서 행우승지에 제수되고 양성군(楊城君)에 봉군되었다. 그러나 곧 ‘정2품자가 승지에 재직함은 합당하지 못하다’는 중론에 따라 체직되었으며, 1509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1514년 대간(臺諫)으로부터 “반정(反正)일에 승지로서 궐내에 직숙하던 중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화를 피하기 위해 국왕에게 정세를 살피고 오겠다고 하면서 근무지를 이탈한 뒤 궁내의 배수구를 통해 궐 밖으로 탈출한 불충한 인물이다.”라고 탄핵되면서 공신호를 박탈당하였다.
(각주9) 유자광( 柳子光 1439 ~1512) :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우후(于後). 서얼 출신으로 기사(騎射)와 서사(書史)에 능하였고, 기개를 숭상하였다. 갑사(甲士)로서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다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종군했으며, 임금의 총애를 받아 특별히 선략부호군(宣略副護君)이 되었고, 서얼로서 벼슬길을 허통(許通)받게 되었다. 돌아와서 종군하는 데 작은 공로가 있다고 하여 병조정랑이 되었다.
1468년에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 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1등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또한 예종은 유자광을 익대공신으로서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였다.
같은 해에 유자광의 반인(伴人)이 난언을 고함으로써 서소(西所)에 구금될 처지에 놓였으나 대왕대비의 비호로 풀려났다. 그 뒤 숭정대부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1476년(성종 7)에는 한명회(韓明澮)를 모함한 것이 드러났으나 임금이 죄를 묻지 않았고, 1477년에는 대신들이 서얼인 유자광을 도총관(都摠管)에 임명할 수 없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도총관으로 삼을 정도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1485년에는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이듬해에는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87년에는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또 등극사(登極使)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8년에는 북경에 갔을 때 구매했던 『역대명신법첩(歷代名臣法帖)』을 올렸고, 또 의주 및 동팔참(東八站)·요동·광녕(廣寧) 등지에 있는 산천·도로의 형세와 지도(地圖)를 바쳤다. 1497년(연산군 3)에는 무령군에 봉해지고, 이듬해에는 겸도총부도총관, 숭록대부 무령군에 제수되었다.
이극돈(李克墩)이 실록청당상(實錄廳堂上)이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金馹孫)이 쓴 사초에 자신의 나쁜 일을 쓴 것과, 또 세조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유자광에게 의논하자 곧바로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연산군이 이 말을 듣고 “이 나라에 충성한다.”는 말로써 특별히 칭찬한 뒤에 남쪽 빈청에서 죄인을 국문하도록 명하였고, 이에 옥사를 직접 맡았다.
또한 「조의제문(弔義帝文)」에 직접 주석을 달아 글귀마다 해석하여 연산군이 알기 쉽게 했고, 또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걷어다가 빈청 앞뜰에서 불사르게 하였다. 나아가 1498년에는 김종직과 제자들을 사초사건과 관련지어 크게 제거하는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후부터 유자광의 권세가 조정과 민간에 군림하게 되었다. 한때 1504년(연산군 10)에는 이극균과 사귀었다는 것으로 임사홍과 함께 직첩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충군(充軍: 군대에 편입함)되었으나, 곧바로 취소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는 성희안(成希顔)과 인연이 있어 다시 훈열(勳列)에 참여하게 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에 봉해졌고,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로 제수되었다. 이듬해에는 대광(大匡)으로 제수되어 충훈부당상이 되었으나 계속되는 대간과 홍문관·예문관의 잇따른 탄핵으로 중법에 처해져 마침내는 훈작을 삭탈당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이어 평해로 옮겨졌고, 정국공신의 호(號)마저 삭제당했으며, 그 자손도 먼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1512년(중종 7)에 눈이 멀다가 유배지에서 죽었으나, 이듬해에 ‘익대공신은 그 자신이 애쓴 공로이니 정국공신은 되돌려 주지 않더라도 익대공신만은 되돌려 주라.’는 조치가 있었다.
(각주10) 강혼(姜渾 1464 ~ 1519)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동고(東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8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함으로써 문명을 떨쳤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장류(杖流)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그뒤 연산군에게 문장과 시로써 아부하여 그 총애를 받고 도승지에 올랐다.
1506년 중종반정을 주동하던 박원종(朴元宗) 등이 죽이려 하였으나, 영의정 유순(柳洵)의 주선으로 반정군에 나가 목숨을 빌고 반정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대제학·공조판서를 거쳐 1512년(중종 7)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어 숭록대부에 올라 우찬성·판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나 김일손(金馹孫)에 버금갈 정도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명리를 지나치게 탐냈다.
특히 연산군 말년 애희(愛姬)의 죽음을 슬퍼한 왕을 대신하여 궁인애사(宮人哀詞)와 제문을 지은 뒤 사림으로부터 질타의 대상이 되었고, 반정 후에도 홍문관으로부터 폐조의 행신(倖臣)이라는 탄핵을 받았다. 저서로 『목계일고』가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8일 갑신 2번째기사 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공신을 책정하다>
영의정 유순·우의정 김수동이 아뢰기를,
"박원종 등은 감히 스스로 자기의 공을 의논할 수 없으므로, 아뢴 바가 아와 같습니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은 제일 먼저 큰 계책을 결단하여 큰 공을 이루었으니, 그 서차가 마땅히 자광의 위에 있어야 합니다."
하니, ‘알았다.’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수린은 성희안의 매부다. 공을 논할 때, 희안이 그의 어머니에게 고하기를, ‘박원종·유순정과 저 세 사람의 자제들이 모두 공신 등록에 참여하였으되, 저희 자제가 가장 많았습니다. 수린은 나이가 젊어서 사세상 입을 열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그 말을 듣고 그 어머니가 곧 노하여 누우며 ‘내 다시는 네 낯을 보지 않으리라.’ 하였다. 이튿날, 희안이 어머니의 말로 원종 등에게 청하여 덧붙여 기록하였다. 그 이웃 마을이나 족속들이 수린을 지목하여, 노와 공신(怒臥功臣)이라 하였다. 기타 외람되게 참여한 자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 많았다.
또 논한다. 연산 말년에 장차 복망(覆亡)할 화가 있었으나, 조정에 있는 뭇 신하는 한 사람도 계교를 내어 의를 외치는 일이 없었으되, 전라도에서는 유빈(柳濱) 등이 거사(擧事)할 것을 같이 모의하여 서울과 지방에 격문을 띄웠고, 경상도에서는 조윤손(曹潤孫) 등이 가까운 친척인 윤탕로(尹湯老)와 더불어 기병(起兵)할 것을 협모(協謀)했으나 거사하기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마침 박원종 등이 먼저 대의(大義)를 세움에 힘입었으니, 삼공 육경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족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훈맹(勳盟)에 참여해서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또 자제를 하여금 훈적(勳籍)에 참여하게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공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뿐만이 아니라 연줄로 인하여 참여하기를 청한 자가 얼마인지를 모르겠으니, 이와 같은 유는 족히 말할 것도 못된다. 그러나 우의정 김수동은 한때의 명류(名流)로 어머니의 복제 중이었으니, 추대한 뒤에는 곧 돌아가 상제 노릇하는 것이 옳거늘, 공을 논한 뒤에 조용히 집으로 물러나 유자광에게 묻기를, ‘아우 김수경은 어떤 등급의 공에 기록되었느냐?’라고 하였다. 수동은 조금 지식이 있으면서도 탐욕스러움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
○朴元宗、成希顔、柳順汀等, 論擧義之功, 分爲三等, 以柳子光、辛允武、朴永文、張珽、洪景丹爲一等, 以雲水君 孝誠、沈順徑、邊脩、崔漢洪、尹衡老、曹繼商、柳洵、金壽童、金勘、雲山君 誡、李季男、具壽永、德津君 濊爲二等, 以高守謙、沈亨、黃坦、柳世雄、柳繼宗、尹士貞、李𦸂、李軾、閔懷發、閔懷昌、許磉、張溫、具賢暉、白壽長、李克正、李碩蕃、金友曾、李蓀、申浚、鄭眉壽、朴楗、宋軼、姜渾、韓恂、柳涇、金壽鯽、鄭允謙、金敬義、李菡、沈貞、卞儁、邊士謙、韓叔昌、朴而儉、柳濚、成希雍、尹衡、辛允文、洪景霖、姜漬、尹金孫、柳應龍、尹坦、申壽麟、趙世勳、韓世昌、李孟友、尹汝弼、孫仝、柳承乾、安賢守盛同、李宗義、許礦、李翰元、柳泓、李夔、成瑮、趙元倫、金瑄、閔孝曾、尹璋、曹繼衡、李堣、金克成、黃孟獻、成夢井、李世應、張漢公、韓斯文、金任、朴永昌、朴蕡、曹繼殷、遂安君 𧭢、朴而溫、李希雍、李誠彦、辛殷尹、尹熙平、康允禧、李敝、崔有井、蔡壽爲三等以啓。 領議政柳洵、右議政金壽童啓曰: "朴元宗等不敢自議己功, 故所啓如此。 朴元宗、成希顔、柳順汀首決大策, 立定大功, 其序次當在子光之上。" 傳曰: "知道。"
【史臣曰: "申壽麟, 成希顔妹夫也。 論功時, 希顔告其母曰: ‘朴元宗、柳順汀與吾三人之子弟, 皆參錄功, 而吾之子弟最多。 壽麟年且少, 勢不可開口。’ 其母聞言卽怒臥曰: ‘吾不復見汝面。’ 翌日, 希顔以母言, 請于元宗等, 添錄之。 其隣里族屬, 目壽麟曰: ‘怒臥功臣。’ 其他濫與者, 亦多類此。" 又曰: "燕山末年, 將有覆亡之禍, 在朝群臣, 無一人出計倡義。 而全羅則柳濱等, 同謀擧事, 移檄京外, 慶尙則曹潤孫等, 與近戚尹湯老, 協謀起兵, 未及擧事, 適賴朴元宗等, 先建大義, 三公、六卿, 得保首領足矣。 及參勳盟, 不以爲愧, 又使子弟, 竝參勳籍, 其所謂功, 不知爲何事也。 不特此也, 因緣請參者, 不知其幾, 如此之類, 不足道也。 右議政金壽童以一時名流, 方持母服, 推戴後卽還居憂可也。 論功之後, 從容退家, 問柳子光曰: ‘弟壽卿, 錄何等功乎?’ 壽童稍有知識, 貪冒如此, 況他人乎?"】
▣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병인년에 정국(靖國)하여 중종(中宗)을 추대하다 ▣
○ 폐인(嬖人 임금에게 총애 받는 내시 등) 전동(田同)ㆍ김효손(金孝孫)ㆍ강응(姜凝)ㆍ심금손(沈今孫) 등을 군영(軍營) 앞에서 베어 죽였다. 감옥의 문을 열어 죄수들을 내놓아 모두 군에 참가하게 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대궐 밖으로 진군하였다.
○ 해가 뜰 무렵에 벼슬아치들이 모두 모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 자도 있었다. 입직한 도총관 민효증(閔孝曾)과 참지 유경(柳涇)은 먼저 나가고 승지 이우(李堣)는 그 다음에 나갔다. 처음에 대궐 안에서는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임금은 차비문(差備門) 안에 앉아 승지를 불러 들어와 앉게 하고서, “이 같이 태평한 때에 어찌 다른 변고가 있으랴. 아마 흥청(興淸)의 본부(本夫)들이 서로 모여서 도적질하는 것이니 빨리 정승과 금부 당상을 불러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이우를 명령하여 열쇠를 가지고 대궐문을 돌아 다니면서 살피게 하였다. 이우는 먼저 사람을 보내어 사태를 알아 보게 하고 조정이 벌써 소속된 데가 있는 것을 자세히 알고는 그만 몸을 피해 밖으로 나가 버렸다. 폐주는 이우가 벌써 나갔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서 윤장(尹璋)과 조계형(曹繼衡)의 옷소매를 잡았다. 두 사람은 거짓으로 공손히 하는 척하면서 소매를 뿌리치고 문구멍으로 빠져 나가려고 하였으나 조계형은 이때 임금의 총애를 받던 신하이므로, 문을 지키던 장사들이 상을 받으려고 붙들어 군영 앞에 나아갔다. 성희안(成希顔) 등은 그들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 입직한 군사들은 혹은 수구(水口)로 빠져 나오기도 하고 혹은 성에서 줄에 매달려 넘어오기도 하며 다투어 군영 앞으로 달려갔다. 환관과 여러 색인(色人 궁중의 잡무를 맡는 사람들) 등은 모두 나가고 다만 후궁과 기생의 무리만이 서로 모여 목놓아 우니 소리가 밖에까지 진동하였다. 이에 군문(軍門) 안에서 회의를 열어 유자광(柳子光)ㆍ이계남(李季男)ㆍ김수경(金壽卿)ㆍ유경(柳涇)으로 하여금 머물러서 대궐 문을 지켜 도주할지 모르는 폐주를 지키게 하고, 성희안 등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 문 앞에 나아가서 자순대비(慈順大妃 성종의 계비이며 중종의 어머니)에게 처분을 청하니 조금 후에 문을 열고 그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 대비에게 아뢰기를, “지금 임금이 임금의 도리를 잃고 정사가 어지러워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사가 매우 위태하므로 모든 관원과 백성들은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임금을 삼기 위하여 감히 대비의 명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니, 대비는 “우리 아이가 어찌 중한 책임을 감당하겠오. 지금 세자가 나이 장성하였으니 왕위를 이을 만하오.” 하고 사피하였다. 이에 유순(柳洵) 등이 여러 번 아뢰어서 명을 받았다.《국조보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