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09.27대민(주일낮)
*행동하는 믿음(약2:14-26)
믿음에는 행동이 직결되어 있다고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할지라도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심각한 고민을 해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생활 한다고 해놓고 믿음없는 행동을 보이는 신자가 교회안에는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행함은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행함은 믿음의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표준이 됩니다. 참 믿음인가? 거짓 믿음인가? 바른 믿음인가? 그릇된 믿음인가? 산 믿음인가? 죽은 믿음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행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열매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로만 믿는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백합화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백합화가 썩으면 냄새가 굉장히 고약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참으로 귀합니다. 금보다 훨씬 귀합니다. 그러나 죽은 믿음은 냄새가 납니다. 악취가 납니다. 추한 냄새를 풍깁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향기를 풍기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악취를 풍깁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전도의 문을 막고 하나님께 욕을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행함은 최후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태복음7장21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사람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2장17절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토록 거한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최후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영원한 복을 받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이 마를 때에 너희가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찾아와 보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가 돌아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영원한 복을 받을 사람들이 언제 우리가 예수님께 그렇게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지극히 적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였고 베드로는 소망을 강조하였고 요한은 사랑을 강조하였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도 행함으로 나타나야 되고 소망도 행함으로 나타나야 하고 사랑도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치 불에는 열기가 있음으로 불이 있음을 입증하고 사랑에는 사랑의 실재인 사랑의 행위가 나타날 때 참 사랑이듯이 믿음의 실재인 행위가 동반하지 않은 믿음을 사도 야고보는 본문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면서, 15절 이하에서 믿음과 행위와 상관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즉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져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편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한다면 과연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겠는가? 하고 묻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요한1서 3장17절에 “세상 사람이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2절에서 “사람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믿음의 실재인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진실한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입으로 고백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믿음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사랑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을 우리의 믿음으로 확증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쓸 것을 주어야 합니다.(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믿음은 실천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은 참다운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말로 시인하면 분명히 행동이 뒤 따르게 되어 있겠지만 일천번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우리 생활에서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은 사랑입니다. "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십계명의 요약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십계명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첫째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라 한 것이고 다섯째 계명부터 열째까지는 이웃을 이렇게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율법사는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답하시기 위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의 이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의 믿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그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를 말하면서 우리 주위에 헐벗고 굶주린 형제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위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서 성령이 그 사람을 도우라고 감동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돕지 아니하면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는 형제자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주안에서 형제 자매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참 믿음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죄인이던 우리,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증거는 형제를 사랑하는데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주의 보혈로 구원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순간에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 형제를 향한 사랑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권속의 일원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려운 형편에 처한 형제와 자매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태도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웃 사랑이 없는 믿음, 이것은 가짜입니다. 이웃에 필요한 것, 먹을 양식이 없을 때 "굶는 것을 알면서도 도와주지 않을 정도의 차가운 인간이라면... 그런 믿음이라면 그게 참 믿음인지 의심해봐야 합니다.
신앙에는 2가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는 이론이고, 하나는 실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천국에 관한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축복을 충분히 누렸습니다. 말씀을 많이, 또한 잘 들어야 믿음과 능력이 생깁니다. 로마서10장17절애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듣고 난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들은 말씀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가서 실천해야 합니다. 사회가 진실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능력을 잃어버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론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행동하려고 하지 않고, 이론만 외치고 있습니다.
참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랑을 생산하는 믿음만이 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 경건한 자입니다. 적어도 자신의 사랑 없음을 회개하는 자가 주께서 인정하시는 경건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이 항상 사랑을 실천하는 쪽으로 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끼리만 울타리를 치고 오손도손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울타리밖에 있는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앙 행위가 너무나 개인적이고 현세적인데 있습니다. 교회의 삶에 너무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이 평안해지고 육신도 건강하고 사업도 잘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믿음은 나 자신에게로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 향하고 밖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향하고, 밖으로는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행동하는 믿음의 방향입니다. 결국 행동하는 믿음은 사랑의 실천을 위한 몸부림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사도행전4장31-32절에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보면 ”기도-성령충만-복음전파-사랑의 나눔“ 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두드러지는 것은 재물의 나눔이 성령충만한 삶의 최종 결과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쓸 것을 공급하는 성도님들이 되어 행동하는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보여야 합니다.(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네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본문을 통해 야고보는 믿음이 있노라 자위하면서 참된 삶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를 합니다. 당시 교인들은 믿음이 있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아노라고 주장했지만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참 믿음이 있는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야고보에 의하면, 참 믿음이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으로 구원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율법은 필요 없다고 말할 수가 있지만, 오히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나가는 행위가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참 믿음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증거가 바로 행함이라고 야고보는 강조하였습니다.
성경에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들의 이야기를 교훈 삼아 행함으로 믿음을 보인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믿음을 보신 사건들이 몇몇 나타나는데 그 사건들은 대개 치유와 관계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 계실 동안에 수없이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23가지 병들! 수
백 명의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때마다 변치 않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냥 덜
컹 병을 고쳐주시기도 했고, 그냥 네 죄가 사했다하며 고쳐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면서 병을 고쳐 주셨냐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러면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
신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9장 20절에 보니까,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를 뒤좇아 왔습니다. 이 혈루병이란 병은 여인이 하혈병을 하는 건데, 그것은 유대사회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죄인취급된 병입니다. 유대사회에서 부정하게 취급이 되면 사람하고 얘기할 수도 없고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
부정한 사람이 몇 가지 있는데, 문둥병자, 시체를 만진 사람, 혈루병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격리되어서 살아야 합니다. 성한 사람이 그 사람과 접촉을 했으면 아주 복잡하고 까다로운 정결예식을 행해야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 혈루병 여인도 그러하였습니다. 1년도, 2년도 아니고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으며 사람과 격리돼 지내게 되었습니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사람답지 못한 일생을 산 것이 12 년입니다. 그가 이제 아픔을 가지고 예수님을 좇아오게 되었습니다. 내가 혈루병이다 라고 공개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으니까 몰래 왔습니다. 만약 그 자리에서 그 여인이 혈루병이라는 것이 발각이 되면 돌로 맞아서 죽든지 심한 모욕을 당하고 내쫓김을 당하든지 그 둘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혈루병을 숨기면서 예수님에게로, 예수님에게로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당당히 요구할 수도 없는 기도제목을 가지고 몰래몰래 살금살금 다가가서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 것입
니다. 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마음 속에는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나을 수 있다. 저분은 메시아이기 때문에 굳이 내가 명시적으로 말씀하지 않아도 고쳐주실 것이다.
내가 공개적으로 나서지는 못하지만, 내가 이렇게 숨어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저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서 나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실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자락을 만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아시고 22절에 그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자의 병이 고쳐졌습니다. 아주 위대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여
기에 보시면, '그 시로' 여자가 구원을 받으니라. 그 즉시로 병 고침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경을 고칠 때 진흙을 이겨서 바르거나 하는 접촉을 하시기도 전에 기적을 베풀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딱 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
람이 바로 이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고 있던 여인이요, 또 한사람은 백부장이요, 마지막
한사람은 수로보니게의 여인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직접 접촉하지 않고도 나를 고칠 수 있다
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즉시로 병 고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행함으로 주님께 믿음을 보인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21장1-절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강대상 앞에 헌금궤를 놓고 사람들이 나와서 각기 헌금을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헌금하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보시고 그 중에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과부인데다 가난하고 이름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차한 중에서도 생활비 전부에 해당하는 돈을 헌금하였습니다. 그 액수는 두 렙돈입니다. 지금 우리의 화폐가치로는 약 2,000원쯤 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고 크게 칭찬을 하셨습니다. 과부의 정성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 가운데 단독교회로서 제일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교회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회중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단독으로 약 세계 400여개 처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그 교회가 이와 같은 복을 받은 것은 그 믿음을 하나님께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 이름을 스미스입니다. 스미스 목사님은 37세 되었을 때부터 "하나님 아버지 일생동안 하나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매일 기도하였습니다. 스미스 목사님이 항상 그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그 교회의 성도들도 모두 그렇게 기도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생동안 하나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다음 스미스 목사님은 전 성도에게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헌금 드리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1) 헌금은 각각 하도록 해야 한다.
2) 헌금은 힘대로 한다.
3) 헌금은 기쁨으로 한다. 그리고 목사님 보는데서 헌금을 하는데 이 세 가지에 못 미치면 모두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시험을 당하는 성도들도 있어 다른 교회로 옮긴 성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 말씀대로 순종한 성도들은 점점 영육간 큰 복을 받았고 십일조가 엄청나게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들의 생활도 주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도 크게 부흥을 하였습니다. 전 세계 400여개 처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믿음을 행동으로 보일 때 주님께서는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온전케 되어야 합니다.(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과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르다 할지라도 유일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인들은 자신이 추종하는 종교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신앙의 가장 근본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오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이 곧 나를 위한 것임을 믿는 것이며, 영원한 삶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유업으로 주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삶은 아무리 훌륭하고 의롭고 진실하다 할지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히브리서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로마서14:23절에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다시 믿음과 행함이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향해 믿음과 행함을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설명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가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그는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행위는 믿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행함을 통해 온전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믿음과 행위는 필연의 관계에 있습니다.
즉 온전한 믿음이 되려면 행위가 뒤따라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온전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히브리서10장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온전한’ 이란 말은 ‘건전하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건전한 믿음 위에 있을 때에 참된 신앙의 성숙이 있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왜곡된다든지, 세속화된다든지, 이단에 빠진다든지, 혼미한 영을 받는다든지 하면 자신의 영혼도 망할 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실족시키게 됩니다. 영을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말세에는 악한 영들과 미혹의 영들이 얼마나 많이 역사하는지 모릅니다. 분별의 은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단의 미혹에도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참 악하게 되고 돌이키지 못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단들은 거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돌이키지 못합니다. 멸망을 받고 지옥에 갈 때까지 못 돌이킵니다. 그것을 끝까지 옳은 줄 압니다 또 사상이 잘못되면 끝까지 그 나쁜 사상에 빠져서 돌이킬 줄을 모릅니다. 죽을 때까지도 그것이 옳다고 소리치고 만세를 부르고 죽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이단에 속한 자에게 대해서는 디도서3장10절에 “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전’ 이란 말은 ‘강하다’는 뜻도 되고, ‘완성’ 이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는 신앙이 강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고, 역경에 흔들리고, 환경에 흔들리고, 또 소유에 따라 흔들리고, 대상에 따라 흔들리면 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끝까지 견고한 신앙, 흔들리지 않는 신앙,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신앙, 이런 견고한 신앙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민수기 14장24절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에 빈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열 정탐꾼의 아우성치는 미혹의 소리에도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라본 믿음의 눈은 정말 빛이 났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본 가나안 땅은 너무 너무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어느 한 순간에 있다가 사라지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신앙에 따라서 결과가 주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역사가 있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뒤에 엄청난 사건으로 이것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늘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일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행동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본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행동하는 믿음으로 주님앞에 나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