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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소년 카를로 아쿠티스(1991-2006)가 "가장 나이 어린" 복자들 중 한 명이라는 것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겨우 열다섯 살에 천국으로 떠났다는 사실, 그리고 최근인 2020년 10월 10일에 시복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순수하고 다정다감한 소년에게는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계신다는 사실보다 더 매혹적인 것은 없었다. 예수님의 이러한 현존은 소년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기에, 이 소년이 21세기의 사도가 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 완전하게 성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의 짧은 생애에서 볼 수 있다.
카를로 아쿠티스는 북이탈리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인 아버지가 영국 런던의 투자은행에서 금융전문가로 일하고 있던 1901년 5월 3일 태어났다. 또한 세 식구가 밀라노로 돌아가기 전 9월에 영국에서 세례를 받았다. 카를로의 부모는 가톨릭 신자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신앙심도 거의 없어 신앙 생활을 등한시했다. 오히려 이 어린아이를 신앙의 세계로 인도한 사람은 폴란드인 유모 베아타였다. 카를로의 어머니 안토니아는 기억한다.
“카를로가 세 살 반이었을 때 내게, 예수님께 인사드리러 성당에 가자고 졸랐다. 나는 카를로가 그렇게 신앙심이 깊다는 것을 알고는 너무나 깜짝 놀랐다. 그리고 카를로가 내게 심오한 질문을 많이 했는데 나는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그 덕분에 나도 다시 신앙의 길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카를로는 매우 자발적이고 활발한 아이였다. 부모의 증언에 따르면, 결코 고집이 세지는 않았고 순종적이었으며 늘 명랑하고 진짜 햇살 같은 아이였다! 그는 은총의 자극을 민감하고도 단호하게 따랐다. 겨우 네 살 때 사랑하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와 외할머니에게 미사에 가자고 졸랐을 정도였다. 미사에 가면 할아버지가 하늘 나라에 가시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유모 베아타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카를로는 너무나도 성체를 영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더 기다려야 했다. 영적으로 미숙한 엄마 안토니아가 볼로냐의 돈 일리오 까라이 신부(+2010)를 통해 아들의 "거룩한 소망"을 이루어주는 법을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어느 주교님 덕분에 카를로는 영성체를 하기엔 어린 나이인 일곱 살 때 성체를 영할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6월 16일 밀라노 북부에 있는 성 암브로시오의 은수자들의 베르나가 수녀원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면서 카를로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늘나라로 가는 고속도로
그 후로 이 초등학생은 매일의 미사를 자기 삶의 중심에 놓았다. 모든 일의 중심은 미사였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예수님과의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을 포기하고 영적으로 성체를 모셨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그 여행지에서 언제 어디서 미사에 참례 할 수 있는지를 인터넷으로 철저하게 조사했다. 카를로는 성체를 모실 때마다 친구이신 하느님을 마음속에 초대했다. “예수님, 편히 쉬셔요. 예수님의 집입니다.”
이 어린 소년이 성체 안의 예수님의 참된 현존만으로 매혹되고,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체 안의 예수님께서 이 어린아이를 열광시켰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밀떡 안에 숨어 계신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하실 수 있다!”
카를로가 "언제나 예수님과의 일치"라는 자신의 인생 모토를 분명히 갖게 된 것도 분명 성체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목적지로 그를 인도한 것도 성체였다. "성체는 하늘 나라로 가는 나의 고속도로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완전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카를로는 가능한 한 미사 전이나 미사 후에도 감실 앞에서 기도하면서 조용히 머무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그러니 새로 부임한 본당 신부가 아홉 살 소년이 혼자서 성전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것도 당연했다. 본당 신부는 이 소년의 본모습을 알아보았다. 카를로는 이처럼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햇볕에 노출되면 사람들의 피부가 타듯이, 예수님 앞에 있으면 그 사람은 거룩해질 것이다!"
"제대로 숙고한다면, 우리는 이천 년 전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행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가까운 성당에 가는 것만으로 우리 곁에 현존하시는 그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희망을 잃어야 하겠는가? 우리의 문 앞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그의 이 생생한 믿음이 얼마나 사실인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카를로가 첫영성체를 한 그해, 아버지가 성지순례를 가자고 하자, 평소에는 아주 기쁘게 나섰던 카를로가 놀랍게도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나는 언제든지 예수님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성당 감실이 있는 밀라노에 있는게 더 좋아요. 이천 년 전 예수님이 사셨던 장소를 방문하러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갈 필요가 있을까요?"
카를로는 예수님의 가슴에 다정하게 기대던 요한 사도에게서 자신의 모범을 찾았다.
“모두가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들 중 요한 사도는 어쩜 그렇게 사랑받는 제자가 되었는지 놀랍다. 성체적인 마음이 되는 것, 그래서 하느님께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을 우리에게서 행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물론 그러려면 우리 의지의 자발적 동의가 필요하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자발적인 사랑을 원하신다.”
완전히 "평범한', 그러나 특별한
그럼에도 카를로 아쿠티스는 요즘 아이였다. 애니메이션과 액션영화와 게임을 좋아하고, 하느님의 자유로운 본성을 사랑하며, 특히 가족이 키우는 강아지 네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를 사랑했다. 그의 비범한 이해력은 놀라웠다. 그는 성경과 성인들의 생애에 깊이 빠졌고, 자신이 여덟 살 꼬마 때 이미 통달했던 가톨릭 교리에도 깊이 빠져 살았다. 대학교재인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1년 만에 독학으로 완전히 습득한 후, 정보처리학은 그의 최애 관심사가 되었다! 친구들도, 정보처리기사조차도 소년 카를로를 이 분야의 천재로 인정할 정도였다.
어느 프로 프로그래머는 학생 카를로를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그의 프로그래머 지식에 '완전히 반했다.' 겨우 열다섯 살 소년이 컴퓨터에 관해서는 나만큼이나 전문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카를로는 밀라노의 마르첼루스 수녀원 초중등학교에서 아주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천부적인 능력 때문이 아니라 사교적인 소년의 순수한 단순함과 겸손함, 전염성 강한 쾌활함, "언제나 밝은 미소" 덕분이었다. 카를로는 친화적인 성격으로 누구와도 금방 친구가 되었다. 이 부잣집 도련님은 허세도 부릴 줄 몰랐고, 유행하는 옷차림에도 관심이 없었다. 반면에, 학급의 약자들을 걱정하고 드러내지 않으면서 마음을 썼다. 자주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도움을 주었다.
카를로의 신앙심이 과하다고 생각하는 급우들이 분명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선에도 그는 개의치 않은 채, 수업 중에 낙태와 같은 주제에는 교회의 입장을 확고하게 지지하는 유일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사에 자주 참례해야 하는 중요성도 친구들에게 직접적으로 설명했다. 사실, 카를로가 죽은 후에 많은 친구들이, 생전 카를로의 다정하고 단호하면서도 강제적이진 않았던 확언을 통해 다시 하느님을 찾았다고 밝혔다.
그렇다! 이 소년, 성체 안의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언제나 그분을 닮고자 했던 소년, 이 소년이 보여준 이기심 없는 모범을 통해 많은 이들이 하느님과 은총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삶은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고유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복사하듯이 남들을 따라서 살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힌두교 하인의 개종
카를로 아쿠티스의 열렬한 믿음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이 라예쉬 모후르(Rajesh Mohur)이다. 그는 아쿠티스 집안의 인도인 하인이었고 힌두교 신자였다. 그는 카를로가 네 살 때 이 집에 들어왔으며, 특히 두 사람은 친밀한 우정을 맺었다. 소년 카를로는 매일 그에게 가톨릭 신앙의 보화에 대해 말해주었고, 성경과 성모님 발현과 성체 기적에 관한 영화들을 자주 보여주었다. 라예쉬 모후르는 이렇게 증언한다.
"가톨릭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성체성사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열심히 설명해주는 카를로에게서 나는 감동을 받았다. … 차츰 나는 카를로의 권고를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성체를 모시기 위해 결국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다… 나에게 카를로는 모범적인 그리스도교적 삶의 스승이었다. … 카를로의 깊은 믿음이 나를 감화시켰고, 그의 큰 사랑과 순수함이 나를 항복시켰다."
12세에 견진성사를 받고서 카를로는 라예쉬 모후르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견진성사를 받을 때 지극히 신비한 힘을 내 안에서 느꼈어요. 그 힘이 나를 감싸고 성체에 관한 사랑이 더욱 커졌어요."
카를로는 본당에서 어린이들에게 소년 교리교사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마친 후 14세가 된 2005년 9월, 카를로는 예수회의 김나지움으로 진학했다. 거기서 매일 바쁜 학교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학생의 의무에 소홀하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사랑과 시간을 쏟아야 하는 일들을 많이 맡게 되었다. 자기 본당과 교황청의 "순교자 현양” 학술원과 자신의 김나지움을 위한 웹 사이트를 "전문가적인 지식"으로 개설했으며, 비디오 프레젠테이션도 제작했다. 그 일은 카를로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며칠 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카를로는 이미 한참 전부터 하느님께서 곧 자신을 데려가실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2006년 10월 초, 15세의 건강한 소년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독감처럼 보였지만 그는 밤마다 부모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져야만 하는 모든 고통을 교황님과 교회를 위해 주님께 봉헌합니다. 그래서 나는 연옥에 가지 않고 곧바로 하늘 나라로 들어갈 거예요.”
사람들은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6일 후, 그의 병이 당시 난치 병인 M3형 백혈병으로 판명되었고, 병세는 갑자기 나빠졌다. 하지만 카를로는 놀랍게도 지극히 침착하고 평화로웠으며, 반면에 이 말을 할 때는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의연하게 죽을 겁니다. 하느님 마음 에 들지 않는 일에는 단 일분도 낭비하지 않고 살았으니까."
죽음의 그림자가 더 짙어지자 그는 가까운 몬짜 지역의 특수병원으로 옮겨졌다. 거기서 그는 격심한 고통에도 결코 울지 않았다. 10월 10일, 병자성사를 받고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시고는, 상태를 묻자 가느다란 목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나처럼 좋아요. 저보다 더 상태가 나쁜 사람들이 많은 걸요." 이어서 30분이 채 되지 않아서 혼수상태가 되었고 뇌출혈이 일어났다. 2006년 10월 12일 아침, 카를로는 마침내 목적지 하늘 나라에 도착했다. 그날은 성체의 날인 목요일이었다. "성체가 나를 거룩하게 할 것을 믿습니다."
저 세상으로 떠나며 남긴 것,
세상 곳곳의 성체 기적 기록들
카를로는 주일에 한 번도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정말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지 않아서 성체를 흠숭하기 위해 단 5분도 할애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매우 괴로웠다.
“음악회나 축구 경기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리는가.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려고 성당 앞에 끝없이 긴 줄이 있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사람들이 진정으로 깨닫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정말로 깨닫게 되면,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감실 안에 그렇게 홀로 계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를로는 교회가 인정한 성체의 기적에 대해 친구들에게 설명해주면서, "너희는 이제 알게 될거야."라고 단언했다. 그래서 "잠들어 있는 마음들"과 의심하는 사람들을 성체의 힘을 증명하는 기록들로써 일깨워주려고, 전 세계의 성체 기적들을 보여 주는 홈페이지를 만들기로 했다. 그것은 장기적이고 방대한 프로젝트였다.
카를로는 삶의 마지막 2년 동안 이 일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컴퓨터를 세 대나 망가뜨릴 정도로…. 뿐만 아니라, 홈페이지에 올릴 사진 자료들을 직접 찍고 설명글도 직접 쓰기 위해 그는 부모에게 요청했다. 유럽에서 성체의 기적이 일어난 곳들을 여행하자고. 이 신심의 결과물은 그가 없는 지금도 여전히 관심을 끌고 있다! 카를로가 만든 그 홈페이지는 현재도 전 세계 어디서든 볼 수 있다. 미국에서만 10,000개 본당과 100개 이상의 대학에서 그의 홈페이지 내용들을 이용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때도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에 이르기 까지 많은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홈페이지를 방문하였다. www.miracolieucaristici.org에 게시된 기록물은 대략 136개이며, 17개 언어로 볼 수 있다.
카를로는 성체의 기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을 가장 깊이 있게 다루었다. 8세기 이탈리아 란치아노에서의 기적에서는, 의심하고 있는 사제의 손에서 밀떡이 성변화의 순간에 심장근육조직으로 변하고, 성작 속의 포도주는 피가 되었다.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1263년 볼세나에서의 기적도 유명하다. 성체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성체포를 적시고 제대 아래의 바닥 위로 흘러 내렸고, 그 기적을 계기로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이듬해 1264년에 성체 성혈 대축일을 제정했다. 1730년 시에나에서의 기적도 비슷하다. 1730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시에나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성체 348개가 모셔진 성합을 도난당했는데, 나중에 산타 마리아 성당의 헌금함에서 발견되었다. 그렇게 되찾은 성체들 중 신자들이 영하고 남은 223개의 성체는 오늘날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카를로는 내적으로 연결되어있다. 카를로의 가족이 휴가를 보내는 집이 아시시에 있는데, 카를로는 아시시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소년 카를로를 가장 매료시킨 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겸손과 천사처럼 깊은 성체 신심이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 겸손과 성체 신심으로 모든 현세의 고통을 이겨내고 스스로 살아있는 감실이 되었으며, 영원한 감사의 노래가 되었다. 카를로가 가난을 그처럼 사랑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거룩함은 무엇을 첨가하는 과정이 아니라 제거하는 과정이다. 하느님께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시도록, 나는 더 적게 가진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카를로는 아주 안락하고 온갖 것들로 넘쳐나는 자기 환경을 거부하고 검소하게 살려고 했다. 가난한 이들과 노숙자들이 카를로의 특별한 친구가 되었다. 그들 각각의 이름을 기억했으며, 침낭이나 먹을 것이나 자신의 용돈으로 힘닿는 대로 그들을 도왔다. 생전에 함께했던 그 가난한 사람들이 이 어린 친구의 장례식에 찾아와 애도와 감사를 전하자, 그들에게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던 카를로의 부모가 깜짝 놀란 것은 당연했다!
“성모님은 내 인생의 유일한 여성”
카를로 아르쿠스는 2006년 2월 파티마 성지를 순례했다. 그 결과, 생명도 포기할 수 있는 희생을 각오할 정도로 그의 내적 삶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몹시 기뻐했을 것인데, 하느님의 어머니는 그가 두번 째로 가장 사랑하는 분이다! 그는 이미 5세 때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고서, "하느님의 어머니는 내 인생의 유일한 여성이다." 라는 심오한 말을 했었다.
카를로는 매일 묵주기도를 충실히 바쳤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묵주기도는 성체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10세 때 처음으로 알게 된 파티마 발현에 매혹되었으며,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와 보속을 바치라는 성모님과 천사들의 호소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한 파티마에서 성모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연옥과 지옥은, 연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결심할 만큼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언제든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서” 매주 고해성사를 받았다. 영혼들의 구원과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바치고 작은 희생들도 실천했다. “하느님의 어머니께 장미꽃다발을 드리면, 도움이 몹시 필요한 당신 자녀들을 돕는 데에 그 꽃다발을 쓰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결점 중 하나인 과식 악습을 끊기 위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누텔라 초코쨈을 자주 포기했다. 그렇게 카를로 아쿠티스는, 교황과 교회와 세상을 위해 어린 나이에 경탄할만한 고결함으로 희생을 바쳤던 파티마의 어린 목동들의 영웅적인 모범을 따르고 마음속에 생생하게 지니고 살았다. 15세인 2006년 10월 12일에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카를로 아쿠티스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지도신부인 돈 일리오 까라이에게 그랬다. “아시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입니다.” 실제로 카를로는 아시시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 묻혀 있다. 생전의 얼굴 그대로에 청바지를 입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모습은 살아있는 듯하다. "인터넷의 수호성인"이라는 별칭 그대로, 지금은 성령의 도움으로 천국과 이 세상을 더 자유롭게 연결하며 많은 이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것이다. 세계 도처에서 회심과 기도를 청하는 전구가 너무나 많을 테니까.
카를로의 시복식은 2020년 10월 10일 아시시에서 거행되었으며, 축일은 그의 천상 탄일인 10월 12일이다. 그처럼 빠른 시일 내에 시복된 것은, 선천성 췌장 기형인 브라질의 6세 소년 마테우스Matheus 가 "즉각적이고 완전하며 지속적인" 췌장 치유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Triumph des Herzens nr. 166>에서 이선영 옮김
(마리아지 2023년 11•12월호 통권 24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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