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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경기헤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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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여성상을 심고 있는 김귀순 회장
사람마다 가치관에 따라 행동양식이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다. 다만 생각을 실천에 옮기고 지켜나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기에 끊임없이 정도와 실천을 강조한다. 특히 공동체에서 보편적 사고에 기인하고 활동하려는 모습은 화합으로 가는 기본이기에 더욱 강조를 아끼지 않는다. 긍정적 마인드는 개인이나 사회에 밝은 영향을 준다. 칭찬받는 식물이나 동물까지도 기대이상의 결과를 가져오듯 사람도 긍정의 마인드가 삶에 있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마인드 컨트롤을 배우고 스스로를 긍정적사고로 다지며 사회적 역량을 키우고 봉사하는 김귀순 회장을 만났다.
자신의 꿈을 바꾸다. 대한민국의 18현을 모신 여산향교가 있는 전북 익산시 여산은 그녀가 태어난 고향이다. 3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언제나 집안의 든든한 기둥이었다. 집안이 여산에서 유복하기로 유명하고, 조부모님의 나눔의 향기가 커서 그녀의 집은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드는 사랑방이었다. 그런 가정적 환경은 성장하면서 그녀의 심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조부모님은 살아있는 부처님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동네의 애∙경사가 있을 경우 그녀의 조부모님은 자신의 경사처럼 축하와 애도를 해주셨고, 아이를 낳는 집안이 있으면 미역과 쌀을 전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농사일이 거의 없는 겨울철에 그의 집은 동네의 사랑방으로 동네 사람들이 모여 담소와 점심제공 등 베푸는 집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그의 아버지는 조부모님과 달리 엄격해서 원칙에 어긋나면 밥상교육을 시킬 정도로 자신과 자식에게 사람의 본분을 지키도록 노력하셨다. 그녀는 조부모님의 자비와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받아 학교에서나 지역에서 예의범절이 바른 학생으로 성장했다. 또한 머리가 명석했던 그녀는 친구들로부터 우상이었고 담임선생님에게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병가로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에는 일일 교사를 할 정도로 학업성취도가 높았고 친구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이 컸었다. 그녀는 어릴 때 동네에 아픈 사람들이 병원에 가지 못하고 고생하는 것을 보고는 의사가 되기로 목표를 정하여 공부에만 매진하였다. 특히 중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의사의 사명과 역할은 어디에서든 성역 없이 봉사자로 인정받고 일할 수 있다는 말에 더욱 매료되어 열심히 꿈을 향해 정진했다. 익산에서 이리여고를 나온 그녀는 대학 진학 시 자신의 목표로 삼은 서울대 의대에 낙방하자 재수를 시작했다. 하숙집에서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핀잔을 들을 정도로 밤새워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 그녀는 장녀로서 자신만의 욕심을 위해 집안에 부담을 줘도 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자신 밑으로 동생이 여섯이나 있어 자신이 경제적으로 집안에 도움을 주지 않으면 동생들의 진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공무원 시험에 응시, 좋은 성적으로 합격한 그녀는 국세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자신의 꿈을 한 단계 내려 잡은 그녀였기에 처음에는 세무업무에 적응하기 어려웠었다고 한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입사한 국세청에서 그녀는 차츰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청사진을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업무가 끝나면 YMCA에서 클래식기타를 배우며, 직장으로 인해 중단된 학업을 위해 방송통신대학의 가장학과에 입학했다. 바쁜 업무에도 그녀는 자신의 일만큼은 완벽하게 처리하여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방송통신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사회의 봉사자로 우뚝 서다. 그녀는 일요일이면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안아주며 사회의 누나로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YMCA에서 알게 된 고아원을 보모들이 자리를 비우는 일요일이면 방문, 정에 굶주린 아이들에게 따뜻함을 전해주는 일을 했다. 그녀가 나타나면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고, 그녀는 봉사활동을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 더 무게를 두었다. 그런 결과 아이들은 봉사자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스스로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그녀 또한 자신이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더 많이 환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역량을 함양하고자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또한 국세청의 평직원으로 있다 보면 퇴직 후의 사회활동이 단절될 수 있다는 판단에 그녀는 세무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직장이 끝나면 곧바로 독서실로 향해 새벽 두시까지 공부하며 자신의 역량을 키워 나갔다. 각고의 노력 끝에 세무사에 합격했고 1999년 정든 국세청을 명예퇴직과 함께 세무사 사무실을 개업하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 세무사가 남성이었고 여성은 별로 많지 않아 사회적 편견까지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세무사 개업 후 명지대대학원, 아주대대학원 광운대부동산대학원 등에서 세무에 대한 강의를 요청해와 그때부터 대학원 강의까지 맡게 되었다. 그녀의 강의는 쉽고 명확해서 대학원생들로부터 찬사를 받아 대학뿐만 아니라 경기도 인재개발원 외래강사, 대림산업주식회사 등 기업체에서까지 요청을 할 정도로 정평이 났다. 사실 전국에서 여성세무사 중 50번째로 개업을 했으니 여성 세무사로서의 그 위상은 대단했다. 그녀는 국세 심사위원, 여러 대학에서 상속증여강사, 강남구청, 광진구청∙과천시 지방세 심의위원, 행정자치부 지방세 심의위원, 서울시 지방세 심의위원, 국세청 공명과세 추진평가위원, 한국세무사회 연수원 교수, 반포∙역삼세무서 이의신청심의위원 등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분야에서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웃을 위해 자신이 가진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고 배려하는 그녀에게 많은 단체에서 영입이 세도했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도 넘쳐나지만 조부모님의 철학이 몸에 베어 있어 거절하지 못하고 거의 동참하게 되었다. 특히 자신의 전공과 관계없는 총신대학교 고문, 수원지방검찰청 안양지청 범피위원, 연세사회복지회 이사, 서울시니어센타이사, 서울구치소 교화위원,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조정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그녀는 사회의 정을 나누는 전령사가 되었다. 여성으로서 가정과 사회봉사활동을 영위한다는 자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회활동에 역점을 두다보면 가정에 소홀해지고, 가정에 충실하다보면 사회와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이 자연적인 사회의 현상이다. 그러나 그녀는 가정과 사회에 모범이 되는 생활로 가정으로부터는 가족들이, 사회로부터는 구성원들이 모두 인정하는 행동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녀의 전문지식과 사회의 모범을 높이 산 한국여성세무사회에서는 그녀를 14대 회장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남성에 비해 월등히 숫자적으로 적은 여성세무사의 권익과 사회의 편견을 없애기 위해 그녀는 사회적으로 활동을 더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회장을 맡은 후 그녀는 여성세무사로서 활동을 더 확장해 나가고 있고 전국공무원상조서비스(주)와의 업무협약(MOU)을 체결, 초상을 당한 회원과 회원의 가족·친척뿐만 아니라 회원사무실 직원들까지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사회의 등불을 켜다.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그녀는 장마로 인해 피해를 입은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독거노인들을 방문하여 도배와 집안정리, 겨울을 대비해 이불과 보온매트 등을 20여 분의 독거노인들께 제공해드렸다. 사실 그녀는 여성세무사회 회장을 맡기 전부터 이웃사랑회후원회 김춘수 회장을 만나 소외된 계층과 어린이 후원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웃사랑후원회에서는 매년 소외계층, 외국인 노동자, 양로원, 구치소 등을 후원하다 보니 늘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이 따랐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흔쾌히 후원금을 전달했고 행사에도 늘 참여하는 모범을 보였다. 어린이재단과 인연도 김춘수 회장과의 만남으로 이뤄졌다. 어린이재단은 전국적인 조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어린이 후원단체이다. 그녀는 어린이재단 경기남부후원회 회장을 여성으로서 처음 맡게 되었다. 그녀가 회장에 취임하자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희귀한 일이 벌어졌다. 그만큼 그녀가 사회에 보여준 모습이 진정이었고 자신보다 이웃이 먼저라는 사상이 널리 인지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동안 서울지방검찰청장상, 국세청장상, 재경부장관상, 행자부장관상, 법무부장관상 등 수많은 상을 받은 것으로 보아도 그녀의 활동상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봉사에 임할 때 봉사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는다. 자신보다 부족한 사람에게는 자비를,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으로부터는 지혜를 얻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녀의 할머니를 가장 존경한다고 한다. 살아있는 부처님처럼 베푸신 삶, 남의 아픈 것을 보지 못하는 인정 많고 눈물 많은 할머니를 가장 닮고 싶어 한다. 사실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녀도 오늘의 살아있는 부처가 아닌가 할 정도이다. 이제 그녀는 청소년들에게 긍정적 마인드를 갖고 살라고 일려준다. 어떤 일을 하던 간에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하며 그녀는 마인드 컨트롤을 강조한다. 긍정적 사고로 꿈을 향해 간다면 그 꿈은 꼭 이뤄진다는 진솔한 철학을 젊은이들에게 꼭 전해 주고 싶어 하는 그녀. 자신을 희생하며 이웃과 동행하려는 수많은 봉사자들이 있기에 우리의 사회는 언제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지 모른다. 그 중심에 그녀가 있기에 우리는 아낌없는 찬사와 그녀의 봉사활동이 더 퍼지도록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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