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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하진보(河晉寶)
1530년(중종 25) - 1585년(선조 18) / 향년 56세
조선 전기에, 장령, 성주목사, 김해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재(德哉), 호는 영모정(永慕亭). 부사과(副司果) 하유(河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주목사 하우치(河禹治)이고, 아버지는 하숙(河淑)이며, 어머니는 대사간 어득강(魚得江)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된 뒤 승정원주서·세자시강원사서·정언·병조좌랑·예조좌랑·헌납·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선산부사를 비롯하여 성주목사·김해부사 등 다섯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지방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어 김해에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스승에 대한 존경이 지극하여 조식의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산해정(山海亭)의 옛터에 설립하였다. 만년에 최영경(崔永慶)과 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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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 제13권 / 비문(碑文)
사간 하공 묘비명(司諫 河公 墓碑銘)
공의 휘는 진보(晉寶), 자는 선재(善哉)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고려 때 휘 공신(拱辰)이 좌사낭중 벼슬을 하였는데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서 굽히지 않고 죽어서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추증되었다. 공은 그 후손이다. 증조부 휘 하유(河鮪)는 창신교위 행 충무위 부사과를 지냈다.
조부 휘 우치(禹治)는 통훈대부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다. 부친 휘 하숙(河淑)은 승사랑이다. 모친은 함종 어씨(咸從 魚氏)로 가선대부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어득강(魚得江)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 6월 4일에 공을 낳았다.
어릴 적에는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영특하였고 남달리 총명하여, 글을 세 번만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았다. 을묘년(1555, 명종10)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예문관에 들어가서 직책을 세 번 바꿨는데 검열ㆍ봉교ㆍ대교 등이었다.
승정원에서 주서를 맡은 것이 두 번이었고, 시강원에서 설서ㆍ사서를 역임하고 병조의 낭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경사 서장관이 되었는데, 공이 중국어에 능통하였기에 명나라 조정 사람들이 유능하다고 칭찬하였다. 뒤에 좌랑ㆍ정랑에 제수되었는데 병조, 예조, 형조에서였다. 전적ㆍ사예ㆍ사성은 성균관에서 지낸 세 관직이다. 네 번이나 재상어사(災傷御史)가 되어 해서, 호서, 호남 등지로 다녔다.
시(寺)와 원(院)의 우두머리를 지냈으니 종부시, 사복시, 상의원, 예빈시 등의 좌ㆍ우통례였다. 사간원에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는데 정언ㆍ헌납ㆍ사간이었다. 사헌부에 들어간 것이 두 번이었는데 지평과 장령이었다. 일찍이 권간 윤원형을 탄핵하자 남명 조식 선생이 서신을 보내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부사 하정(河珽)이 기묘년(1519, 중종14)에 화를 입고 죽은 지가 오래 되었으나 신원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비로소 논하여 씻어주었다. 외직으로 나가 주(州)와 부(府)를 맡아 다스린 것이 모두 다섯 번인데 성주(星州)에서 목사를 한 번 지냈고, 선산(善山)ㆍ김해(金海)ㆍ밀양(密陽)에서 부사를 지냈다.
성주 창고에 저장된 양곡이 수십만 섬이었는데 썩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곡식을 빌려주고 받을 때 항상 예전 장부 숫자에 의해서 행하니 백성들이 심히 고통스러워했다. 공은 곡식을 빌려줄 때는 두 배로 주고, 받을 때는 반만 받아서, 가모(加耗)로 그것을 보충하였다.
가모는 수령이 자기가 쓰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는데 공은 그것을 공적인 것으로 돌렸다. 온 고을이 덕을 입었고 국가의 재정도 축나지 않았다. 공이 떠나고 나서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고 비석을 세워 공적을 기록하려 했는데 공에 대해 감정을 품고 있던 어떤 토호가 그 일을 저지하였다.
김해는 포흠(逋欠)이 쌓인 지가 오래라 환수하기가 매우 어려워 그 해악이 장차 적지 않을 듯하였다. 공은 그 문권을 가져다 태워버리고, 관용 물자를 절약하여 채워 넣었다. 사간으로 부름을 받고 명에 따라 부임하다가 중도에 병이 들어 사직하고 돌아왔다. 백성들이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비석을 세워 그 선정을 칭송하였다.
밀양은 백성들의 풍속이 귀신을 좋아하여 밀양부 경내에 요사스런 사당이 있었는데 사대부 집안 여자들이 모여들어 서로 풍속을 더럽히고 난잡하게 굴었다. 공이 그 신상(神像)을 끌어내어 강에 던져버리니 요사스럽고 의혹스러웠던 일들이 비로소 해소되었다. 예전의 나쁜 습속이 조금 쇄신되니 마치 몽매함을 깨고 하늘의 해를 보는 것 같았다.
송사를 좋아하는 것이 습속이 되어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이 송정(訟庭)에 들어와 다투고 송사를 벌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공이 항상 염치로 가르치고 깨우치니 오랜 시간이 흐르자 점점 고쳐졌다. 3년이 지난 후 남천강(南川江)에서 배가 부서져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었다.
감독 소홀로 체직을 당했는데 선비와 백성들이 성문을 닫은 채 공을 에워싸고 지키면서 한 달이 넘도록 농성을 풀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대로 두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밀양부 백성들도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내임이든 외직이든 직책에 걸맞아 백성들이 편안히 여겼고, 내직으로 들어가나 외직으로 나오나 항상 춘추관의 관직을 겸했다.
공의 너그러움과 중후함은 천성이었다. 정신과 기상은 평이하고 온화하였으며 즐겁고 평안하였다. 평생 다급한 말과 황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니 바라보기만 해도 그가 화락한 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안에 있을 때는 우애 있고 화락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간질하지 못했다.
일처리와 사람을 대할 때는 시비를 따져서 안을 밝히되 모나게 드러나는 일은 속으로 감추었다. 다른 사람의 선한 행동은 기뻐하며 칭찬하였고 불선은 용서하였으니 그 덕과 도량은 남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공무에 임해서는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송사를 처리할 때는 공명정대했다.
백성을 인애로 어루만지고 아전은 엄하고 분명하게 다스려 백성들은 공을 사랑하고 벼슬아치들은 공을 두려워하였으니 고인의 풍모가 있었다. 학교를 일으키고 노인을 봉양하였으며 인재를 기르고 나이 많은 사람을 존중하는 일에 힘써서 양로연을 자주 열었고 권면하고 깨우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그중에 큰 것이다.
장부와 문서를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는 대나무를 쪼개듯 막힘없이 처리하여 미뤄두는 법이 없었으니, 공에게는 여사일 뿐이었다. 선성을 존모하고 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직접 행했는데, 이 또한 공에게는 평소의 행동이었다.
관직에 있을 때의 의복은 집안의 힘으로 충당해서 썼고, 송사를 결단할 때는 돈을 받지 않았으니 곧 공에게는 잗다란 일이었다. 자신을 위한 쓰임새에는 박하였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는 후했으니 이것이 공이 능한 일이었다. 벼슬살이할 적에는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나아가려고 한 적이 없었다.
만년에 홍문관에 천거되었고, 또 승선(承宣)에 의망(擬望)되었으나 단지 은명을 받지 못하고 나이 56세에 돌아가셨으니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아 식견 있는 사람들이 심히 아쉬워했다. 공은 수우당 최영경 공과 마음을 터놓고 사귀었다. 공이 병들자 수우당이 직접 와서 문병하였고, 공의 병이 심해지자 직접 탕약을 조제하였으며, 공이 돌아가시자 곡을 하고 염습을 하였는데, 모두 슬픔을 다하고 예를 갖추었다.
공의 집안에 관곽으로 쓸 재목이 없자 수우당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부의로 내었다. 장례 때 어진 사람의 곡식을 구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는 것인데 공은 최공이 주신 것으로 몸에 지니는 물품을 삼았으니 그 영광으로 말하자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성주와 밀양 두 고을에서는 각기 유생을 보내 제사를 올리고 부의를 내었으니 오래될수록 공을 잊지 못한 것이다. 공은 처음에 이공도(李公度)의 따님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자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재취 부인은 선전관 정수익(鄭壽益)의 따님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출가하지 않고 있다가, 공이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마친 후 유학 서산 정씨 연(沇)에게 시집갔다.
연은 나의 아들인데 불행하게도 단명하여 죽었다. 연에게는 외아들 릉(棱)이 있는데 사간 오여은(吳汝檼)의 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소실이 자녀를 낳았는데 딸은 어려서 죽었고 아들 동인(同寅)은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다. 백도(伯道)에게 후사가 없었으니 사람이 어찌 천도(天道)에 유감이 없겠는가?
공의 형님의 아들 성(惺)이 의리상 공의 제사를 받들었다. 공이 살아계실 적에 형님의 아들 척(惕)을 후사로 삼았는데, 척이 돌을 다듬어 묘에 세우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완성하지 못한 채 전쟁 중에 몸을 보전하지 못하고 죽었다. 릉(棱)과 진사 징(憕), 현감 성(惺) 등이 의논해서 비석을 준공하였으니 이로써 척의 뜻을 이루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월아산 한 언덕에 유택이 있으니 / 好音一岡幽宅在
조부, 부친, 형님이 이곳에 있네 / 有祖若考兄在斯
여기가 공의 묘지, 봉분은 넉 자 / 寔公塋丘封四尺
한 조각 비석을 세웠네 / 樹一片石
썩지 않을 것이 남아 있으니 / 不朽者存
산과 더불어 나란히 영원하리라 / 山與齊壽
<끝>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김익재 양기석 정현섭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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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司諫河公墓碑銘
公諱晉寶。字 善哉 。晉州人。高麗時。有諱拱辰。仕爲左司郞中。使契丹不屈死。贈門下侍郞同平章事。公其後也。曾祖諱鮪。彰信校尉。行忠武衛副司果。祖諱禹治。通訓大夫安州牧使。考諱淑。承仕郞。母咸從魚氏。嘉善大夫司諫院大司諫得江之女。嘉靖庚寅六月四日生公。幼時岐嶷不羣。聰明絶人。讀書三遍。輒不忘。乙卯登文科第。爲承文院正字。入藝文館。三遷職。檢閱也奉敎也待敎也。於銀臺。爲注書者再。於待講院。爲說書爲司書。轉爲騎曹郞。充赴京使書狀官。公通華語。天朝人稱其能 。後除佐郞正郞。兵禮刑曹三也。典籍司藝司成。成均館三職也。四爲災傷御史。海西,湖西南等路也。爲寺院長。宗簿司僕, 尙衣,禮賓左右通禮也。入諫院者三。正言也獻納與司諫也。入柏府者二。持平與掌令也。嘗劾權奸尹元衡。南冥曺先生致書稱奬 。府使河珽。被乙卯禍。死久未伸。始論雪之。外知州府事者凡五。牧一星州也。府三。善山,金海,密陽也。星之倉儲數十萬斛。陳腐不可食。散收常依舊數。民甚病之。公散二而收一。用加耗補之。加耗。守令認爲己用。公擧歸之公。一州飮德。國計亦不屈。公旣去。民追其惠。將立石記績。有土豪挾撼者沮止之。金海之逋欠積久。徵還甚難。爲害將不細。公取其券燒之。節官用以足之。以司諫召赴命。中途病辭歸。民久而不忘。立碑頌其政。密則民俗好鬼神。府境有妖祠。士女坌集。仍相穢亂。公曳出神像。投之江。妖惑始解。舊染稍新。如發蒙覩天日。好訟習成。士家婦女多入庭爭訟。不以爲恥。公常以廉恥曉諭。久而漸革。越三年前江船敗。有溺死者。照監當遞。士民閉城門圍守。月餘不解。事聞許令仍任。府民亦立石頌德焉。內任外治。職稱而民安之。出入常兼春秋。公寬厚天性也。神氣平和樂易。平生無疾言遽色。望之知其爲愷悌君子也。居家友愛和樂。人不間焉。其臨事接物也。是非內明。圭角外藏。喜稱善而容不善。德量有人所不及者。莅官淸儉。聽訟公明。撫民以仁愛。御吏以嚴明。民懷吏畏。有古人風。以興學養老。育人才尊高年爲務。頻設老宴。勸誨不倦。此其大者也。至於簿牒望委。剖斷無滯。特公餘事耳。尊先聖祭社稷。必齋沐身親。亦公之庸行也。在官衣服。辦用家力。決訟不受紙貨。乃公之細行也。薄於自奉而厚於恤窮。是公之能事也。仕宦未嘗枉曲干進。晩錄弘文。又擬承宣。特未蒙恩命。年五十六而終。位德不稱。識者深惜之。公與崔公守愚心交。公病。守愚親來問疾。其革也。親用湯劑。其沒也。臨哭襲歛。皆哀盡而禮備。家無棺槨材。守愚擧所儲賻焉。葬得仁者之粟。古人所榮。公得崔公賜爲附身具。其榮孰大焉。星密兩邑。各遣儒生。來祭致賻。愈久不忘也。公初娶全義李公度女。生子女俱夭。再配晉州宣傳官鄭壽益女。生一女。未出家。公下世喪畢。嫁幼學瑞山鄭沇。沇。仁弘之子也。不幸短命死。只有一子棱。娶司諫吳汝穩女。生子女俱幼。小室生子女。女夭。男同寅。被倭奴擄。伯道無嗣。人豈得無憾於天道也。公之兄子惺。以義承公祀。公在世以兄子惕後。惕伐石將樹墓。不幸未果。兵火中身亦不保。棱與進士憕,縣監惺等謀。竣石役。以成惕志焉。銘曰。
好音一岡幽宅在。有祖若考兄在斯。寔公塋丘封四尺。樹一片石。不朽者存。不朽者存。山與齊壽。<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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