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유출 피해를 본 지역(2400만㎢)의 개발을 ‘나 홀로 막아’ <타임>이 선정한 ‘지구촌 영웅’이 된 듄 랑카드 씨(왼쪽)가 태안을 찾았다. 세계적인 환경운동가인 그는 “해변 횟집이 재앙 부를 것”이라고 말한다.
[94호] 2009년 06월 29일 (월) 11:07:33
태안·김진화 순회 특파원
20년 전 3월24일, 알래스카에서 원유를 싣고 캘리포니아로 향하던 엑손오일 사 소속 11만t급 대형 유조선 엑손발데스호가 거대한 암초에 부딪쳐 칠흑 같은 겨울바다에 기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열흘 동안 기름 10만㎘가 쏟아져, 기름띠가 장장 2000㎞나 이어졌다. 사상 최악의 기름 유출로 기록된 이 사고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알래스카 남부 프린스 윌리엄 해협과 카퍼리버 삼각주 일대의 광활한 지역. 피해 보상을 둘러싸고 주정부·개발업자·정치인·원주민 간에 야합과 음모가 시작되었다. 원주민 땅을 사들이거나 임차해 다목적의 거대 관광단지를 만들고, 천연가스와 탄광도 개발하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한반도의 80%나 되는 17만㎢의 원시 자연은 천지개벽을 앞두고 있었다.
ⓒ김진화
듄 랑카드 씨는 10년에 걸친 설득과 싸움 끝에 윌리엄 해협 일대의 개발을 막았다.
개발론자들은 주민을 설득하기 위해 똑똑한 원주민이 필요했고, 그때 그곳에 27세인 이약족 원주민 청년 듄 랑카드가 살고 있었다. 고집이 세기로 이름난 볼드이글(대머리 독수리) 부족에 속한 그는 고교 졸업 후 연어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던 전업 어부였다.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개발이 시작되면 강과 바다가 오염돼 연어가 산란하러 오지도 않을 것이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바다·강·처녀림·야생동물과 함께 원주민의 생활방식·전통·언어·문화도 사라질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개발 반대에 나섰다. 보상금과 개발이라는 당근에 이끌린 원주민들은 듄에게 등을 돌렸다. “원주민의 토지 보존을 관할하는 ‘이약족 협의회’ 임원인 내가 개발에 적극 반대하자 협의회는 8대2로 나를 제명했다. 술 마시러 바에 들어갔더니, 인디언 벌목업자가 나를 벽에 몰아붙이고 수영장 청소에 쓰는 긴 막대기로 위협했다. 주민들이 나를 두 차례 법원에 고소하기도 했다.”
알래스카 해안의 험준한 빙벽 같은 반대에 부딪힌 듄은 외로운 싸움을 포기하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원주민 땅 거래 승인권을 쥔 연방상·하원 의원들에게 직접 호소하겠다는 독한 마음을 품고, 매일 아침 의사당으로 찾아가 등원하는 의원들을 붙잡고 호소했다. 환경단체·비정부기구(NGO)·언론·기름 유출 사고 전문가들을 찾아 의논했다. 장발에 낡은 가죽 가방을 메고 의사당 앞에서 서성대는 듄의 모습은 한때 워싱턴의 명물이었다. 서서히 국내외 환경단체와 정치권, 언론계의 눈길을 끌며 그의 호소는 원주민과 국민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10년에 걸친 끈질긴 설득과 싸움 끝에 프린스 윌리엄 해협 일대 2400만㎢는 개발을 면하고 원주민의 ‘낙원’으로 남게 되었다. 훗날 부족 추장은 그에게 원주민어로 ‘아주 큰 소리로 끊임없이 짖어대는 작은새’ 라는 뜻의 별명 ‘자마자키’를 붙여주었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1998년 그를 ‘지구촌의 영웅’으로 선정하고 표지 인물로 다뤘다. 알래스카 기름 유출 사고는 고졸 출신 어부를 세계적 환경운동가로 변신하게 했다. 지난 20년간 지구촌 기름 유출 현장을 찾아 피해 주민을 도와온 그는 세계 각국 대학·국제기구·NGO·피해 주민들의 초청으로 기름 유출 사고 강연회·세미나·심포지엄의 인기 연사로 활약한다. 한국 역사상 최악의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고 2주년을 앞두고 한국에 온 자마자키 씨(47)를 태안 바닷가에서 만났다. 그는 쉴새없이 말을 이어 갔다.
연어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던 전업 어부 시절의 듄 랑카드 씨.
태안을 찾아온 이유는?
방제 작업 현황, 환경복원 상태, 피해 주민 소송과 보상, 장래의 기름 유출 대비 계획 등을 알아보고자 왔다.
만리포와 구릉포 등 기름 유출 현장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깨끗한 편 아닌가? 밀물 때는 깨끗해 보이지만 썰물 때면 기름 찌꺼기가 바닥에 보이고, 파도가 거칠게 일면 찌꺼기가 올라온다. (만리포 해수욕장 모래를 파서 냄새 맡으며) 모래가 검고 기름 냄새가 나지 않는가. 서해안에는 갯벌과 암석이 많아 청소가 더욱 어렵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만리포 해수욕장 해변을 따라 둑을 쌓고, 그 위에 도로를 확장하고 식당·숙박·위락 시설을 건축하는 것이다. 당장 중지해야 한다.
왜 중지해야 하나. 현지 주민과 어부들은 제외되고 숙박·식당·관광 업자만 이익을 보게 된다. 기름을 완전히 제거해 사고 이전 상태로 복원하지 않은 채 시멘트 둑을 쌓으면 해변은 10~20년 내에 죽은 바다가 될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국 해변에 무수히 산재한 횟집이다. 한국에 네 번째 왔는데 올 때마다 횟집은 늘어났다. 횟집을 짓기 위해 둑을 쌓으면 모래 둔덕이 파괴되고 차츰 모래사장도 없어진다. 횟집 쓰레기와 청소로 바다는 오염될 수밖에 없다. 횟집의 해변 ‘점령’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게 급선무다.
지난해 여름 태안반도의 30여 군데 해수욕장에서는 개장 축제를 벌였고, 이번 여름에도 피서객이 몰려올 텐데 …. 피해 지역의 경제를 고려해 개장을 서두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만2000㎘가 넘는 기름이 쏟아진 지 7개월 만에 해수욕장을 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태계가 회복하려면 10~20년 이상 걸린다. 사고 20년이 지난 알래스카에서는 아직도 타르가 해변으로 올라오는 곳이 있다. 그 때문에 그 지역에서 나오는 어패류를 아직도 사먹지 않는 미국인이 많다.
위는 1989년 11만t급 대형 유조선에서 유출된 기름이 알래스카 윌리엄 해협을 뒤덮은 모습.
태안에서는 연인원 130만에 이르는 자원봉사자가 참여해 기름 제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당신 고향에서 초기 대응은 어땠는가?
그 많은 봉사자가 참여했다는 것은 한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애국봉사 정신이다. 감격했다. 우리의 초기 대응은 희극이랄지 비극이랄지, 기름 제거 장비 창고의 위치를 찾는 데 24시간이 걸렸다. 창고 열쇠 찾는 데 72시간이 걸렸고 창고를 열고 나니 이번에는 장비 사용법을 몰라 3일을 허비했다. 그 다음 날 장비를 몰고 해안에 도착하니 마침 시속 110㎞의 강풍이 불어 속수무책이었고 기름은 계속 해안을 덮쳤다. 해안경비대와 주 방위군 동원령을 내리고 수선을 떨었지만 전문가가 없어 기름은 유조선에서 열흘 동안 계속 흘러내렸다. 봉사자들이 손으로 하는 일은 한계가 있다. 이들의 경험을 체계적으로 조직화 해야 한다.
태안 사고는 일반 국민의 기억에서 거의 잊혀가는 것 같다. 방제 작업, 피해 보상, 앞으로의 대비책, 이런 일들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피해 주민과 국민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이 시점에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모르는 게 당연하다. 언론에서도 거의 말이 없다. 세계적인 전문가가 25명 정도 있다. 그중 한명인 리키 아트 박사는 지난 6년간 대형 사고에 관한 연구분석 보고서를 낸 바 있다.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그는 태안의 방제 작업은 초기 단계라고 판단한다. 한국의 ‘생태지평’ 같은 비정부 단체와 국제 환경단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피해 보상 소송, 사고 초기 대처와 기름 제거, 방제 작업 분석 평가, 향후 계획 수립, 해산물 안전성 조사, 주민협의회 구성, 환경 원상복원기금 설립, 쌍끌이 견인선(Double Haul Tanker)과 대형견인선(High Sea Super Tug Boat) 같은 특수 장비 구입, 이런 문제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가해 기업이 기름을 제거하고 벌금과 보상금을 지불한다고 해서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자연환경을 사고 이전 상태로 원상 복원해야 한다. 그 때문에 복원기금 설립이 중요한 것이다. 땅·바다·나무·들판에는 주민의 영혼과 마음과 삶의 넋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2007년 12월11일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방제 작업을 하고 있다. 랑카드 씨는 태안 기름 유출 사고 피해를 복구하는 데 10~20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환경 복원기금 조성과 특수 장비 구입에는 큰돈이 들어갈 텐데….
태안 사고를 계기로 삼성이 앞장서고, 정부와 유조선 선주 및 석유 관련 기업이 공동 출자할 수 있다. 한국은 3면이 바다이고 석유를 전량 수입하기 때문에 사고는 어느 때고 일어날 수 있다. 50~100년 앞을 보고 사전에 대비하는 것이 경제적이고 후손들을 위한 의무다. 기금 설치와 운용, 특수 장비 구입은 입법화해야 항구적 실효를 거둘 수 있다.
알래스카 주민들이 엑손오일 측으로부터 법정 외 합의금 9억 달러(약 1조2800억원)를 받았는데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엑손발데스 호의 선장이 보드카를 마시고 항해하다가 암초에 부딪쳤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가해자 측도 법정에 가면 비용이 휠씬 더 들 것을 알고 합의했다. 5억 달러는 환경 원상복구 기금으로 책정해 연구소 설립과 복원 사업에 사용한다. 4억 달러는 사고 예방, 방제 작업 연구 등 기술 개발에 쓰인다.
지난해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원주민 피해보상금으로 5억 달러를 최종 선고했다. 이 금액은 알래스카 배심원이 판결한 50억 달러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크게 실망했다. 이 액수는 20년을 기다린 주민 1인당 1만5000달러(약 1900만원)에 불과한 것이다. 사고 당시 인구의 20%는 현재 노령으로 사망했는데 이들은 1달러도 못 받고 죽었다.
한국 대법원은 삼성중공업과 홍콩 유조선 쌍방과실로 최종 판결하고, 각각 3000만원(약 2만3000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피해 주민의 민사소송과 관련해서는 삼성 측에 56억원 보상 판결을 내렸다. 삼성은 이를 받아들였고, 별도로 피해지역 발전기금으로 1000억원과 지속적인 장기복원 작업을 제시했다. 주민 대다수가 보상 액수에 반대하고 있다. 국민에게 그토록 큰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주고 환경을 오염시킨 가해자에 대한 벌금이 2만여 달러라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주민 피해 보상액 56억원도 국제 판례에 비추어 믿어지지 않는다. 세계 유류업계가 설립한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IOPC)이 추산한 보상액도 6000억원이 넘는다. 주민들이 주머니를 털어 법률회사를 고용했지만 삼성 같은 대기업을 상대로 어떻게 법정투쟁을 벌이겠는가. 주민이 대기업·정부·사법부·정치인과 싸우기가 그렇게 힘들다. 알래스카의 비극에서 배우기 바란다.
모든 한국 음식, 특히 생선회를 잘 먹는데…. 한국 음식은 맛있는 데다 영양가도 높다. 산낙지 빼고 다 잘 먹는다. 아마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인연 때문인 것 같다.
환경운동의 노벨상이라는 ‘골드먼 환경상’ 후보로 올해까지 8년 연속 지명되면서도 한 번도 받지 못한 이유가 대기업들의 ‘반(反) 자마자키 로비’ 때문이냐고 묻자, 그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말 한마디 없이 껄껄 웃기만 했다.
첫댓글 우리나라 '빨리빨리'가 세계 최고인데 잊는 것에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항상 근본적인 것을 잊지않는 것, 참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