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주제(theme) / 신재기
수필가는 작품 전면에 등장하여 자기 체험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한다. 작가의 자기 현시성과 독자 지향성이 강하므로 수필은 자연스럽게 메시지 전달 구조를 취한다. 글쓰는 이는 자기 의견을 전달하려고 하고, 세계에 관해 자기의 관점을 드러내려고 하며, 자기 생각과 느낌을 다른 사람과 공 유하려고 한다. 글에는 글 쓰는 이의 생각이나 의도가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독자는 글에서 지은이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초 점을 맞추어 글을 읽는다. 종류가 각기 다른 글일지라도 모든 글은 글쓰는 이 개인의 의견을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따라서 “주제란 글 속의 모든 것이 수렴된, 글 전체를 통합하고 지 배하는 핵심적인 생각(의견, 주장) 혹은 사실이다.” 이처럼 글을 통해 표현되는 필자의 핵심 생각을 ‘주제’라고 일컫는다.
‘테마 thema’라는 용어가 주제로 통용되면서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테마는 작품을 구조적 측면에서 이해할 때 사용되는 개념으로서 작품 전체를 지탱하는 뼈대를 의미한다. “문학작품의 소리, 낱말, 비유, 문장 등의 요소들이 나무 잎새와 잔가지라면 그것들을 다 흩어지지 않게 하면서 그 자체는 눈에 뜨이지 않는 중심의 큰 줄기”가 테마이다. 그런데 테마는 때에 따라 철학적 명제 thesis, 화제 topic, 주제 subject, 관념 idea 등으로 그때마다 다양하게 인식된다. 일반적으로 글쓰기에서 테마는 글 쓸 대상이나 화제를 의미한다. 글쓰는 이의 의견이 개입되지 않은 넓은 의미의 주제 혹은 가주제가 테마에 해당한다. 그래서 특정 영역의 대상을 글 감으로 삼는 수필을 ‘테마수필’이라고 하는 것이다.
수필을 ‘주제의 문학’이라고 한다. 주제 없는 문학작품이 없을진대 수필을 굳이 주제의 문학으로 규정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수필은 작가가 직접 나서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는 형식이다. 시와 소설은 화자를 내세워 말하기 때문에 시인과 소설가는 있으나 작품 뒤에 물러나 있다. 시와 소설의 독자는 화자의 말을 통해 시인과 소설가의 뜻을 간접적으로 수용한다. 수필은 수필가가 작품 전면에 등장하여 자기 개인의 체험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문학이다. 1인칭 발화를 원칙으로 하는 수필은 작가 개인의 인격이 주된 재료가 되는 자기 현시성이 강한 장르다.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전달이 강조되는 형식”이 바로 수필이다. 작가의 자기 현시성과 독자 지향성이 강하기 때문에 수필은 자연스럽게 메시지 전달이라는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다.
또한, 수필은 주제를 담아내는 방법에서 형상화에만 의존하지 않고 작가의 직접적인 기술을 선택하기도 한다. 체험을 구체적 사실에 근거하여 구성하는 것이 수필 쓰기의 중요한 방법이긴 하지만, 대상이나 실제 체험에 대한 작가의 해석과 가치평가가 작 품 전면에 직접 기술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 근거하여 수필을 ‘교술 문학’이라고 한다. 수필이 교술의 방법으로 주제를 구현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목적 문학이나 교훈 문학의 성격을 지 향하기 때문이다. 주제를 드러내는 방법에서 형상화에 제한되지 않고 교술을 취함으로써 수필은 교훈적이고 철학적인 주제와 매우 친숙하다. 교술에 의해 주제의 표출이 직접적이고, 도덕적 교훈이나 철학적 성향의 무거운 주제와 친숙하다는 점은 수필을 주제의 문학으로 규정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수필도 문학인 이상 형상화를 통해서 주제를 함축적으로 암시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하지만 수필은 전적으로 형상화에 의존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개인의 자질구레한 일상이나 삶의 조각을 사실에 근거하여 구성하는 것이 수필 쓰기이기 때문이다. 작가 개인의 일상은 우연의 세계 안에 있다. 경험의 낱낱은 불 연속적이고 연결고리가 매우 약하다. 문학작품으로서 한 편의 수필을 창작하려면 이러한 경험을 하나의 미적 구성물로 완결성을 지니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허구적 상상력을 전적으로 배제하 고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작가의 교술적 진술이 요구되는 것이다. 즉, 교술은 완결된 구성체를 창조하는 과정에 서 불연속적이고 개별적인 실제 경험의 틈새를 메우고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 결국, 주제는 그 방법이 형상화든 교술적 진술이 든 간에 수필작품이란 완성된 구성물 전체를 통해 구현된다.
일상의 체험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 수필 쓰기라면, 수필에서 화제는 매우 중요하다. 일상에서 좋은 화제를 찾는 일은 수필 창작의 성패를 좌우한다. 화제는 주제를 구현하는데 최상의 것이면 어떤 것이든 문제 될 것 없지만, 무엇보다 참신하고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흔한 화제이지만 그것을 개성적 관 점에서 해석하면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하지만 흔한 화제는 상투적 주제를 낳기가 쉬울 뿐 아니라, 다른 작가의 모작이나 아류작으로 보일 수 있다. 엇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참신 한 화제를 찾기란 쉽지 않다. 수필의 글감 구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작가는 글감을 일상의 직접 체험에서만 구하려고 하지 말고, 간접체험으로 범위를 넓혀야 한다. 독서를 비롯한 다 양한 미디어는 관심만 가지면 글감의 보고가 될 수 있다. 어쨌든 수필은 화제가 앞서는 글쓰기인데, 그 화제가 창의적 주제를 뒷받침해 주는 논리적 근거가 되지 않고는 좋은 글감이 될 수 없다.
주제는 모두 윤리적 명제가 되어야 한다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주제의 유형을 몇 개로 구분하여 경계 지우기 어렵지만, 편의 상 두 가지 형태로 제시할 수 있다. 소재 중심의 주제와 필자 중심의 주제가 그것이다. 전자는 “주제문의 꼴이 ‘X는 Y이다’ 또는 ‘X는 Y 한다’ 꼴이면 사실•상태•행동 등을 서술하거나 표현하는 주 제이다.” 작가의 주장과 의견만 주제인 것이 아니라 대상이 가 지는 특정한 사실도 주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때 사실은 객 관적 사실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함축하는 매 개로서 작용하거나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어야 한다. 작가의 주 장이 글 안에 녹아 있고 대상이 전면에 드러나는 이러한 형태는 구체적 형상화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어떤 의견과 주장을 내세 우거나 어떤 행동을 권유하는 성격의 주제가 있다.(‘X는 Y 해야 한다’ 형식이거나 ‘X를 Y 하자의 꼴이다.) 화제나 대상의 사실보다는 그것을 매 개로 하는 작가의 생각과 느낌을 더 강조하는 주제다. 수필은 대 체로 후자의 유형을 지향한다. 이는 수필이 교술 문학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필자의 주장과 논리가 분명한 에세이에 근접해 있음을 잘 말해 준다.
수필은 일상 체험을 기록하고 해석한다. 그런데 작품에 언어화된 것은 현실 체험 그대로가 아니다. 가공되고 변용된 것이다.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부터 구체적 일상은 작가의 추상화 과정에 편입되고 만다. 글쓰기는 단지 단어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골라서 버리는 작업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의 본질적 방법인 구체적 형상화도 추상화 작업이다. 새뮤엘 존슨 Samuel Johnson은 “문학이 하는 일은 개체가 아닌 종種을 들여다보는 것이며, 전체를 포괄하는 속성과 주된 형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한 종을 특징짓는 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미미한 차이는 무시해야 한다.”라고 했다. 추상화가 문학과 예술 창작의 본질적 방법이라는 주장이다. 추상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 한 편의 문학작품, 즉 수필을 하나의 피라미드로 가정해 보자. 이때 주제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다. 작품 전체를 추상화하여 나머지를 다 버리고 대표하는 정신 하나만을 남겨놓았을 때, 그것이 바로 그 작품의 주제이다. 수필의 주제는 작품 전체에 녹아 있는 핵심이며 진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