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록실록에 따르면, 태조~세종 시대 60년간 184회의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이중 조선 초기 18년간에는 총 127회(연평균 7회)의 침입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연평균 1회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마저도 계해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444년 이후로는 왜구의 침입이 한 차례도 없었다. 이 시기는 고려말(공민왕 22년)에 출생하여 1445년(세종 27년)에 별세한 이예의 활동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왜구의 침입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대일 강경책과 함께 이루어진 적극적이고 긴밀한 대일 외교의 결과였으며, 대일 외교의 핵심에는 이예가 있었다. 그는 43년간 외교관으로서 40차례가 넘게 일본을 왕래하면서, 때로는 원칙과 강경책을 앞세우고 때로는 회유책을 동원하여 대일 외교 일선에서 맹활약하였다. 이러한 이예의 노력은 1443년(세종 25년)에 조일 통교(通交)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된다.
계해약조는 대마도의 세견선을 매년 50선으로 한정하고, 조선으로의 도항(渡航)선은 문인(文引, 도항 허가증)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명시함으로써 조선초 대일관계 안정화에 기여했다. 또한, 이예는 왜인의 체류 문제, 입국 허용 조건 등을 지속적으로 협상해 나감으로써 대마도 중심의 대일 통교체제 수립을 주도했다. 이로써 울산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와 유구, 대마도 등지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사수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