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로 인해 당선무효가 된 대통령, 6개월 터울로 두 번 취임한 대통령도 있다. 대통령 중엔 18년 넘게 집권한 이가 있고, 8개월 남짓 권좌에 머물렀던 이가 있다. 여섯 번의 간접선거(1代, 4代, 8代, 9代, 10代, 11代)와 직접선거(나머지)를 골고루 거치는 동안 99.9%를 득표를 업고 등장한 이가 있는 반면(朴正熙·全斗煥), 36.6%의 지지율로 출발한 대통령(盧泰愚)이 있다.
대통령의 취임사는 이렇게 제각각인 정치여정과 向路(향로)를 몇 줌 안 되는 단어들로 녹여 낸 역사적 상징체계이다.
대통령 취임사는 한 개인의 메시지 차원을 넘어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여는 의식이다. 취임사에는 대통령 자신의 약점을 포장하는 두툼한 껍데기로서의 「레토릭」과, 시대를 이끌고 희망을 불어넣는 「마법의 언어」들이 교차한다. 음악에 調(조)가 있듯, 취임사에는 특정한 운율과 톤이 있다. 가사는 개인의 향취와 식견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들의 취임사는 각기 다른 유행가처럼 들린다.
2002년 2월25일 제16代 대통령 취임식에서 역대 대통령들과 악수를 나누는 盧武鉉 대통령. |
건국의 감격 드러난 初代 대통령 취임사
1948년 7월24일 중앙청에서 취임선서를 하는 李承晩 初代 대통령. |
역대 대통령 중 가장 悠長美(유장미) 넘치는 노래를 한 이는 初代 李承晩 대통령이다. 광복의 기쁨과 정부 수립의 감격이 넘실대던 1948년의 기운이 취임사 곳곳에 배어 있다. 그해 7월24일, 그는 제1代 대통령 취임사를 이렇게 시작한다.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느님 은혜와 동포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는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기쁨이 극하면 웃음이 변하여 눈물이 된다는 것을 글에서 보고 말로 들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나에게 치하하러 오는 남녀 동포가 모두 눈물을 씻으며 고개를 돌립니다. 각처에서 축전이 오는 것을 보면 모두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본래 나의 감상으로 남에게 촉감될 말을 하지 않기로 매양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석간장이 아닌 만치 나도 뼈에 사무치는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40년 전에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이오, 죽었던 민족이 다시 사는 것이 오늘 이어서 표명되는 까닭입니다』
자신을 줄곧 「나」로 지칭한 李承晩 대통령은 취임사의 청중을 「백성」, 「민중」, 「동포」, 「애국남녀」, 「나의 사랑하는 3000만 남녀」로 불렀다. 『정부 일이 좋은 시계 속처럼 잘 돌아가기』를 바란 그의 연설문은 「바입니다」, 「부탁합니다」, 「바랍니다」 등의 건조한 문어체형 어미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어투를 잃지 않고 있다.
그의 유장한 스타일은 1952년 8월15일 제2代 대통령 취임사에서 戰雲(전운)과 핏빛이 어른거리는 비장함으로 바뀐다.
『오늘 취임식에서 내가 다시 지게 되는 책임은 내가 할 수만 있으면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로 서두를 연 李承晩 대통령은 『100만 명의 반수되는 우리 청년들이 희생적 제단에 저의 생명을 바쳐서 냉정한 膽量(담량)과 百折不屈(백절불굴)하는 결심으로 무도한 공산당의 침략에서 우리를 구해 내기 위해 싸우는 중』이라는 당시 처지를 감도 높은 단어와 한자성어와 성경 문체를 섞어 가며 숨 가쁘게 풀어 내고 있다.
상황이 급박하다 보니 非(비)문장이 눈에 띄고, 미약한 희망의 메시지가 연설문 곳곳에 근거 없이 떠다니고 있다.
그는 주저함이 없이 적군을 『우리 포악한 怨讐(원수)』로 부르고, 『이 환난에 대해서 우리는 한 가지 경력으로 배운 것이 있느니 이것은 同族相愛(동족상애)와 互相援助(호상원조)의 뜻을 배운 것입니다』, 『이 용감한 군인들은 모든 연합군의 사랑과 칭찬을 받으며 우리 원수들이 미워하매 두려워하고 우리 민중의 영원한 감격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主語(주어)를 종종 생략하는 우리식 어법과 달리 그는 「나」를 주어로 강조하는 영어식 문장과 소유격의 잦은 사용으로 西歐式(서구식) 思考(사고)방식의 일단을 드러낸다. 『내 肝膽(간담)에 깊이 갈망하여 원하는 바는 내가 60년 동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전 민족에게 대하야 각 개인에게 일일이 말하노니』, 『이 전쟁 때와 그 후라도 우리의 행할 보편적으로 목적하는 것은』, 『지금은 나의 개인 메시지로써 우리 국민과 또 친절하고 관후한 우리 연합국에 한마디 하려 합니다』 등이 몇 가지 例(예)에 해당할 것이다. 영어식 「찻잔 속의 태풍」을 연상시키는 『솥 안의 풍파』라는 표현도 눈길을 끈다.
「저」라는 표현은 盧泰愚가 처음 사용
대통령이 자신을 「나」로 칭하는 것은 尹潽善(윤보선)·朴正熙(박정희) 대통령까지 이어진다.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은 「본인」과 「나」를 혼용했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이 등장한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대통령은 「저는」, 「제가」로 국민들 앞에 몸을 낮추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은 金泳三(김영삼)·金大中(김대중)·盧武鉉 대통령이 모두 자신을 「저」라고 불렀다.
국민에 대한 호칭을 보면, 李承晩 대통령은 「百姓(백성)」으로, 尹潽善 대통령은 「내가 사랑하여 마지않는 국민 諸位(제위)」로 불렀다. 朴正熙 대통령은 취임을 다섯 번이나 한 대통령답게 「국민대중」, 「겨레」, 「국민」, 「동포」, 「민족」, 「민주시민」 등으로 다양한 어휘를 구사했다. 金泳三 대통령은 「국민」과 「동포」를 함께 썼으나, 金大中 대통령 이후부터는 「국민」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연설문에는 흔히 연사들이 호흡을 고르고 청중과 교감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분!」 같은 말을 중간 중간에 넣는다.
李承晩·尹潽善 대통령의 취임사엔 「여러분」이 등장하지 않는다. 연설은 쉼표 없이 이어지고 話者(화자) 위주로 전개된다.
「교육의 대상」에서 「감사의 대상」으로 승격한 국민
1963년 12월17일 제5代 대통령으로 취임한 朴正熙 대통령은 비로소 연설문의 형태를 갖추고, 고풍스러운 文語體(문어체) 대신 비교적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단어로 연설하기 시작한 첫 대통령이다.
「나의 사랑하는 3000만 동포들이여」,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사랑하는 5000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이라는 말로 청중과의 교감을 시도한 朴대통령의 연설문엔 조국을 찬양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군인의 풍모가 묻어난다. 혁명 대통령으로서 朴正熙 대통령은 자신의 비전을 또렷이,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데 역점을 두었고, 그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성공하고 있다.
盧泰愚 대통령은 「친애하는 6000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으로, 金泳三 대통령은 「친애하는 7000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으로 外延(외연)을 확대해 가며 청중을 확보했다. 金大中 대통령은 청중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盧武鉉 대통령은 간단하게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으로 불렀다.
대통령을 가리키는 표현과 국민에 대한 호칭 간의 관계에서 聽者(청자)의 비중이 점점 커져 온 것에서 읽을 수 있듯이, 역대 대통령 취임사는 민주주의가 확대되어 온 역사이다.
9명의 대통령을 거치는 동안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는 수직 관계에서 수평적으로 이동해 갔으며, 국민은 「치하」의 대상에서 「감사」의 대상으로, 당부하고 가르치는 대상에서 「위대한 국민」으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일반 국민은 다 각각 제 직책을 행해서 위선 우리 정부를 사랑하며 보호해야 될 것이니 내 집을 내가 사랑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필경은 남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李承晩 대통령)
『참으로 우리 국민은 위대합니다』 (盧泰愚 대통령)
『저는 국민 여러분에게 뜨거운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金泳三 대통령)
『저를 믿고 도와 주십시오』(金大中 대통령)
역사적 좌표 실종된 尹潽善의 취임사
1960년 8월13일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제4代 대통령에 취임하는 尹潽善 대통령. |
강력한 대통령제下에서의 대통령이 내각제下의 대통령과 같을 수 없듯이 제4代 尹潽善 대통령의 취임사(1960년 8월 12일)는 길이나 형식 면에서 다른 대통령과 구별된다. 문어체 한 문장으로 된 긴 첫 문장은 호소력을 잃고, 이어지는 나열식 내용은 연설의 긴장감을 현저하게 떨어뜨린다.
그는 연설 말미에 『이 외에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 너무도 많습니다. 오늘은 간단히 인사말씀으로 대신 하겠습니다』고 했다. 그 결과 그의 취임사는 간단한 인사장의 인상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尹潽善 대통령의 취임사가 인사로 들리는 이유는 단순히 「인사말씀으로 대신 하겠다」고 해서가 아니다. 그의 연설문에는 역사적 座標(좌표)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4월 혁명으로부터 정치적 자유의 유산을 물려받은 제2공화국 정부는 이제는 국민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라고 스쳐 지나가듯 4·19를 언급한 것 이외에 역사적 사건이나 흐름을 연설문과 연결시키지 않고 있다.
李承晩 대통령이 『40년 전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이오, 죽었던 민족이 다시 사는 것이 오늘이어서~』(初代 대통령 취임사), 『1882년 韓美조약 이후로 우리가 밖으로는 각국의 제국주의와 안으로는 추락하여 가는 君主(군주)정부의 虐政(학정)을 대항할 적에 희망도 보이지 않은 것을 싸워 왔던 것입니다. 우리 국가의 자유를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우리 義兵(의병)들이 싸우며 보호하라 했고, 1919년 만세운동으로 우리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중국과 만주에서는 우리 국군의 잔병이 1945년까지 싸워 오다가 마지막으로는 공화 민주국가의 결실이 되어 지나간 4년 동안에 처음으로 民國(민국)정부를 건설케 된 것입니다』(제2代 대통령 취임사)에서 말한 것처럼 國權(국권)을 잃고 회복한 근대사 주변에서 맥을 찾은 것과 대조적이다.
이에 비해 朴正熙 대통령은 훨씬 치밀한 역사의식을 보여 준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자신이 등장한 사건을 역사적인 맥락 위에 구축하기 위해 檀君(단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긴 집권을 여는 제5代 대통령 취임사 첫 문장을 그는 이렇게 썼다.
역사적 맥락 강조한 朴正熙
1963년 12월17일 제5代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는 朴正熙 대통령. |
『檀君 聖祖(성조)가 천혜의 이 강토 위에 國基(국기)를 닦으신 지 반만년, 연면히 이어 온 역사와 전통 위에, 이제 새 공화국을 바로 세우면서, 나는 國憲(국헌)을 준수하고, 나의 身命(신명)을 조국과 민족 앞에 바칠 것을 맹세하면서, 겨레가 쌓은 이 聖壇(성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檀君이라는 시간적 좌표와 「아시아의 동녘에 금수강산이라 불리는 한반도」라는 공간적 좌표에서 시작된 그의 취임사는 이어 殉國先烈(순국선열), 戰歿將兵(전몰장병), 4월 혁명의 英靈(영령)에 영광을 돌리고, 3·1 독립 정신에 초점을 맞춘다.
『한 핏줄기 이 민족의 가슴속에 붉은 피 용솟음치는 분발의 고동과 약진은 결코 멈추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반세기의 고된 역정은 밟았으되,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한 3·1 독립정신은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였고, 투철한 반공의식은 6·25 동란에서 공산 침략을 분쇄하여 강토를 보위하였으며, 熱火(열화) 같은 민주적 신념은 4월 혁명에서 독재를 물리쳐, 민주주의를 수호하였고, 이어 5월 혁명으로 부패와 부정을 배격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되찾아, 오늘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3·1 정신을 받들어 4·19와 5·16의 혁명이념을 계승하고 당위적으로 제기된 바 민족적인 諸과제를 수행할 것을 목표로 나는 오늘 이 뜻 깊은 자리를 빌려, 일대 혁신 운동을 제창하는 바이며, 아울러 이에 汎국민적 혁명 대열에의 적극적 호응과 열성적인 참여 있기를 호소하는 바입니다』
10년 후인 1972년 12월27일, 朴正熙 대통령은 제8代 대통령에 취임하며 10월 維新(유신)에 대해서도 5·16 때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맥락화를 시도한다. 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새마을 운동, 4대강 유역개발 등의 치적을 나열한 후, 그는 10월 維新의 역사적 정당성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되찾은 민족의 위대한 自我(자아)와 민주, 自立(자립)의 역량을 한 차원 더 높이 昇華(승화)시켜, 이를 세계사의 진운 속에 드높이 발양해야 할 새 역사의 관문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이 같은 일대 전환점에서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은 국력배양의 가속화를 통해 번영된 통일 조국을 구현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중략)
그 이념이 바로 10월 維新의 기본정신이며, 그 제도가 지금 維新的 대개혁을 통해 정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10월 維新은 되찾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自我를 바탕으로 하여 안정과 번영, 그리고 통일의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가기 위한 민족의지의 창조적 발전입니다. 이 유신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아가기 위한 한국인의 사상과 철학의 확립이며, 그 실천인 것입니다』
全斗煥·盧泰愚의 前시대 부정
1979년 12월21일 제10代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는 崔圭夏 대통령. |
새로운 정권은 이전 정권의 역사를 종종 부인하면서 시작된다. 10·26 사태 이후의 어수선한 정국에서 대통령 직무대행을 거쳐 10代 대통령에 취임한 崔圭夏(최규하) 대통령은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경제적·사회적 변동이 일어나고, 이로 인하여 자치체제의 불안정이 초래됨으로써 부분적으로 마찰과 갈등, 그리고 새로운 문제가 파생되기도 하였습니다』라며, 처음으로 朴正熙 대통령이 주도한 産業化(산업화)의 그림자를 언급했다.
뿐만 아니라 朴正熙 대통령이 애써 구축한 檀君에서 10월 維新까지 이어지는 역사는 1980년 11代 대통령으로 취임한 全斗煥 대통령에 의해 『舊시대의 그릇된 기풍』, 『추방해야 할 舊시대의 잔행』으로 폄훼되었다가, 심지어 日帝시대와 同列(동렬)로 떨어지고 만다. 全斗煥 대통령은 1981년 제12代 대통령에 취임하며, 「36」이라는 숫자로 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를 구축한다.
『일본의 식민통치 36년에서 광복된 지 또다시 36년 만에 우리는 오늘 제5공화국을 출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환기를 사는 오늘 우리의 결의를 한층 더 새롭게 해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 통치하의 고난과 역경이 36년 만에 종지부가 찍혔듯이 광복 이후 독립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 겪었던 방황과 혼돈, 그리고 시행착오도 36년 만인 이 시점에서 종지부를 찍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제13代 盧泰愚 대통령은 역사적 좌표를 「이 나라에 민주정부를 세운 지 40년」으로 보며, 『반만년 동안 숱한 외세의 침략과 시련을 이겨 내며 빛나는 문화전통을 창조하여 민족의 자존을 면면히 이어 온 그 불굴의 민주독립정신을 가슴에 새깁니다』라며 전임 대통령과 비슷한 의식을 보여 준다.
金大中, 역사에 대한 언급 없어
文民(문민)정부를 연 제14代 金泳三 대통령의 역사의식은 민주화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는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文民 민주주의 시대를 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을 맞이하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라며 민주화 운동에 초점을 맞춘 역사의식을 보여 주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취임사에서 가장 역사와 적게 대면한 대통령은 제15代 金大中 대통령일 것이다.
그의 연설에는 거의 과거가 등장하지 않는다. 『지구 상에 인간이 탄생한 인간혁명으로부터 농업혁명, 도시혁명, 사상혁명, 산업혁명의 5大혁명을 거쳐 인류는 새로운 혁명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오지만, 실상은 바로 뒤 이은 「정보화 혁명」을 이야기하기 위한 배경설명에 지나지 않으며, 「6·25」는 「6·25 이후 최대의 國難(국난)인 外換(외환)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잠시 등장했을 뿐이다.
그 뒤를 이은 제16代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은 반만년 동안 민족의 자존과 독자적 문화를 지켜왔고, 광복 이후에는 분단과 전쟁과 가난을 딛고 반세기 만에 세계 열두 번째의 경제 강국을 건설한 역사를 다이제스트로 정리해 표현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역대 대통령들이 합의한 대한민국 현대사의 脈(맥)은 적어도 취임사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단군과 3·1정신, 광복, 6·25와 4·19와 5·16 등 굵직한 역사의 마디들이 파편적으로 또 편의적으로 차용되었을 뿐, 대통령들의 역사 인식은 큰 편차를 보이고 있다.
「민주주의」를 가장 많이 사용한 대통령은 全斗煥
1980년 9월1일 제11代 대통령 취임식에서 내빈들에게 답례하는 全斗煥 대통령. |
역대 대통령 중에서 취임사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한 대통령은?
퀴즈에 나올 법한 이 문제의 정답은 「全斗煥 대통령」이다. 1980년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을 통해 제11代 대통령에 선출된 全斗煥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민주주의」를 무려 22번 사용했다. 이어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된 12대 취임사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6번 사용해, 총 28번 언급했다.
연설문만 보면 그가 최초의 文民대통령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그가 말한 민주주의는 「참다운 민주주의」, 「민주복지국가」, 「우리가 정착시켜야 할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등으로 다양하다.
盧泰愚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21번 언급해, 全斗煥·盧泰愚 두 명이 민주주의를 자주 언급한 대통령으로 기록된다. 소위 「민주투사」 출신의 金泳三·金大中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각각 6번, 11번 언급했으며, 盧武鉉 대통령은 3번 언급하는 데 그쳤다.
朴正熙 대통령의 「민주주의」 언급 횟수는 집권을 거듭할수록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5代와 6代 취임 당시에는 공히 11번씩, 7代 취임사에는 7번, 8代 취임사에는 2번 언급하다가 9代에 이르러서는 단 한 번도 「민주주의」를 언급하지 않았다.
역대 취임사에서 「민주주의」만큼 過用(과용) 내지는 濫用(남용)된 단어도 드물다. 초대 대통령도 「민주정부」를 이야기했고, 모든 대통령이 어떤 형태로든 민주주의를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민주화가 진행된 후의 대통령들은 「文民 민주주의」(金泳三)로 부연 설명하거나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金大中)라고 길게 풀어 말하거나, 「참여민주주의」(金大中·盧武鉉)라는 新造語(신조어)를 만들어 내야만 했다.
레토릭은 현실의 逆說
제6대 朴正熙 대통령 취임 축하 꽃전차. |
레토릭은 현실을 반영한다기보다 현실의 逆說(역설)인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람들은 레토릭을 이용해 未(미)실현된 희망을 이야기하거나,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를 자주 언급한다고 해서 가장 민주적인 대통령이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취임사를 액면 그대로 읽을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全斗煥 대통령의 경우 취임사에서 『권력을 이용하여 수십억 또는 수백억원의 재산을 긁어 모은 정치인이 있고』 운운하였으나, 훗날 수백억원대의 비자금 혐의로 법정에 서는 장본인이 되었다.
金大中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道(도)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고 해놓고 퇴임 후 자신의 아들을 그 「무슨 道」 국회의원으로 공천을 주거나, 勢(세) 유지를 위한 「훈수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들었다.
盧武鉉 대통령은 『새 정부는 지역 蕩平(탕평) 인사를 포함한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 나갈 것입니다. 소득격차를 비롯한 계층 간 격차를 좁히기 위해 교육과 稅制(세제) 등의 개선을 강구하고자 합니다』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취임 후 계속되는 「코드 인사」로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고, 사회 兩極化(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북한에 대한 지칭 역시 역대 대통령마다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북한은 6·25를 前後(전후)해 「怨讐(원수)」로 불리다, 朴正熙 정권 들어 「北傀(북괴)」와 「동포」가 혼재하며 「통일」에 대한 언급이 늘어나는 양상을 보였다. 햇볕정책을 천명한 金大中 정부 이후 「북한」이라는 중립적 단어를 사용하며 「통일」에 대한 언급 횟수 역시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역대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사용한 북한 지시어와 「통일」이라는 단어의 출현 빈도를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괄호 안은 빈도수).
朴正熙 이후「경제」강조
1988년 2월25일 제13代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는 盧泰愚 대통령. |
李承晩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경제」라는 말을 단 한 번 사용했을 뿐이었다. 당시 경제는 시대적인 話頭(화두)가 아니었다. 尹潽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경제」를 6번 언급하고, 「부패」를 2번 사용했다. 그는 「경제적 자유에 뿌리를 박지 않는 정치적 자유는 마치 꽃병에 꽂힌 꽃과 같이 곧 시들어지는 것입니다」라는 표현에서처럼, 정치적 자유 못지않은 경제적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63년 5代 대통령 취임사에서 「경제」를 6번 언급하면서 「近代化(근대화)」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으며, 1967년 6代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경제」를 8번 언급하고, 1971년 7代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해 언급하며 체제경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경제 건설의 토양 위에서만 민주주의의 꽃이 길이 피어날 수 있음을 체험을 통해 실증하였으며, 개발 성장에 있어서도 민주체제가 공산체제보다 훨씬 능률적이라는 자유 이념의 승리를 기록하였습니다』(7代 취임사 中)
1972년 제8代, 1978년 제9代 대통령에 취임한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용어는 「경제」뿐 아니라 「기업」, 「근로자」, 「이익」, 「복지」, 「부강」, 「선진」, 「개혁」, 「개발」, 「세계」, 「경쟁」, 「사회」, 「산업」, 「번영」 등으로 다변화된다. 「세계」, 「기업」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도 이때이며, 「새마을 운동」,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구체적 정책이 등장해 경제 치적을 알린 것도 이 무렵이다.
崔圭夏 대통령과 全斗煥 대통령 취임사의 경제용어는 그동안의 성장 일변도를 벗어나 주로 「안정」과 「복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崔圭夏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경제」를 20번, 「안정」을 17번, 「발전」을 11번, 「국제」를 8번 언급했다. 全斗煥 대통령은 11代 대통령 취임사에서 「경제」 11번, 「복지」 12번, 「발전」 12번, 「국제」 7번, 12代 취임사에서 「경제」 1번, 「복지」 5번, 「빈곤」 5번을 각각 언급했다. 「석유파동」, 「에너지」, 「황금만능주의」, 「부조리」, 「절대빈곤」 등의 단어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다.
盧泰愚 대통령은 취임연설문에서 「경제」를 3번 언급하는 데 그쳤으나, 「성장」 4번, 「협력」 7번, 「발전」 7번, 「세계」 2번, 「분배」·「자율」 각 1번, 「행복」 4번을 말해 당시 경제의 지향점을 짐작하게 했고 「경제 민주화」, 「정의로운 분배」 등의 표현을 구사했다.
金大中, 「경제」 25번 언급
金泳三 대통령은 「경제」 대신에 「新경제」를 사용했고, 그밖에 「개방」, 「협력」, 「자율」, 「경쟁」, 「활력」, 「개혁」, 「세계」, 「기술」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다음으로 우리는 경제의 활력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정부는 규제와 보호 대신에 자율과 경쟁을 보장할 것입니다. 민간의 창의를 존중할 것입니다.
정부가 먼저 허리띠를 졸라맬 것입니다. 국민은 더 절약하고 더 저축해야 합니다. 사치와 낭비는 추방돼야 합니다. 근로자는 더 열심히 땀 흘려 일해야 합니다. 기업은 대담한 기술혁신으로 국제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정부와 국민, 근로자와 기업, 모두가 신바람나게 일함으로써만 우리는 경제를 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주장하는 新경제입니다』(金泳三 대통령 취임사 중)
「6·25 이후 최대의 國難인 外換위기」 직후 집권한 金大中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경제」가 25번이나 언급됨으로써 당시 상황의 긴박함과 극복의 의지를 함께 전하고 있다.
관련된 단어로 「難(난)」 11번, 「위기」 6번, 「극복」 10번, 「협력」 10번 등장한다. 「파산」·「부채」·「도산」 등의 단어가 당시 상황을 전해 주는 가운데 「기업」을 18번 언급했고, 「중산층」, 「봉급생활자」, 「중소기업」, 「자영업자」, 「관광산업」, 「형상산업」, 「문화적 특산품」, 「무한한 시장」, 「벤처기업」, 「고부가가치제품」, 「지배주주」, 「재무구조」, 「기업 투명성」, 「상호지급보증의 금지」, 「중소기업 협력」 등의 다채롭고 구체적인 경제 관련 단어들이 촘촘히 등장한다.
「우리」, 「조국」, 「국민」 즐겨 사용
1992년 2월25일 제14代 대통령 취임식에서 내빈들에게 손을 흔드는 金泳三 대통령. |
외환위기가 어느 정도 극복된 후 출범한 盧武鉉 정부의 취임사는 경제의 軸(축)을 국내에서 東北亞(동북아)로 돌리고 있다. 「경제」라는 말은 5번 언급했으나, 「東北亞」 18번, 「세계」 14번을 통해 세계 경제의 틀 속에서 東北亞 허브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부산에서 파리行 기차표를 사서 평양-신의주-중국-몽골-러시아를 거쳐 유럽의 한복판에 도착하는 날을 앞당겨야』 한다는 독특한 포부가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그 어느 단어보다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군은 「우리」, 「조국」, 「국민」이었다.
李承晩 대통령의 初代 대통령 취임사에 최다 빈도수를 기록한 단어는 「우리」로 50번 사용했고, 「조국」이 29번, 「국민」이 17번 사용되었다. 1952년 2代 대통령 취임사에는 「우리」가 무려 111번 등장한다. 「국민」과 「자유」가 14번으로 그 뒤를 이었다.
1963년 5代 대통령 취임사에서 朴正熙 대통령이 가장 많이 쓴 단어는 「국민」으로 29번 사용했다. 「나라」는 23번, 「우리」는 19번 사용했다. 「혁명」이 9번, 「피」라는 단어가 7번 등장한 것이 눈길을 끈다. 1967년 6代 대통령 취임사에는 「우리」가 37번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다. 「나라」가 13번, 「국민」이 9번 쓰였다. 1971년 7代 대통령 취임사에서 역시 「우리」가 33번으로 가장 많았고, 「나」가 19번, 「국가」가 16번, 「국민」이 11번 사용되었다.
1972년 8代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우리」와 「국민」이 공히 41번으로 가장 많았고, 「국가」와 「번영」이 23번 등장한다. 1978년 9代 취임사에서 朴正熙 대통령은 「우리」를 43번, 「국민」을 30번, 「국가」를 22번, 「민족」을 17번 순으로 사용했다.
全斗煥 대통령은 1980년 11代 대통령 취임사에서 「우리」를 33번, 「나라」를 26번, 「본인」을 22번, 「정치」를 22번, 「정부」를 14번 순으로 자주 사용했다. 1981년 12代 대통령 취임사에서 全斗煥 대통령은 「우리」를 62번, 「본인」을 50번, 「국민」을 49번, 「나라」를 35번, 「법·법칙」을 20번 사용했다.
민주화 이후 첫 직선 대통령인 盧泰愚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을 61번, 「우리」를 50번, 「나라」를 33번, 「민주주의」를 21번, 「민족」을 20번 사용했다. 「함께」라는 말은 14번이나 나온다.
金泳三 대통령은 「국민」을 60번으로 가장 많이 언급했고, 이어서 「우리」를 41번, 「新한국」을 27번 언급했다. 金大中 대통령은 「여러분」을 63번로 가장 많이 언급했고, 「저」를 25번, 「정부」를 23번, 「나라」를 17번 사용했다. 盧武鉉 대통령은 「우리」를 33번, 「국민」을 30번 「나라」를 22번 순으로 언급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취임사에서 「하느님」을 언급한 이는 李承晩, 朴正熙, 全斗煥 세 명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연설 머리에 「하느님의 은혜」를, 朴正熙 대통령은 연설 말미에 「하느님의 가호」를 빌었고, 全斗煥 대통령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 주었다.
낮아진 대통령들
1997년 2월25일 제15代 대통령 취임식에서 내빈들에게 손을 흔드는 金大中 대통령. 뒤로 역대 대통령들이 보인다. |
한국 정치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 중 하나가 소위 「정치의 世俗化(세속화)」가 더디 진행된다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성숙과 맞물려 있는 이 말은, 세속화 이전의 정치 지도자는 전지전능한 선각자적 위치에 있고, 글자그대로 「被(피)지배자」들은 그를 숭배하는 前근대적 경향을 비판적으로 말하고 있다.
세속화되지 않은 정치 풍토에서 대통령의 자리는 「성스러울」 수밖에 없다. 세속적이지 않기에 帝王的(제왕적)으로 흐를 개연성이 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취임사에 성스러운 위치로 대통령 자리를 격상시키는 표현들이 간간이 등장한다.
朴正熙 대통령은 1972년 제8代 대통령에 취임하며 『통일과 번영에 대한 온 겨레의 염원 속에서 마련된 이 식전이 나에게는 막중한 책임과 숭고한 사명의 십자가를 지게 하는 헌신의 제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978년 9代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취임의 시점을 『장엄한 민족사의 分水嶺(분수령)』으로 묘사하고 있다.
全斗煥 대통령은 『오늘 이 뜻 깊은 聖壇에 서서 본인은 굳은 다짐을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盧泰愚 대통령은 『오늘 이 거룩한 단상에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서 있습니다』라고 했다.
全斗煥 대통령은 單任制(단임제)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취임사에 퇴임 날짜를 1981년 3월3일로 미리 박아 놓고, 『대통령은 항상 오고 가는 것이지만 겨레는 영원한 것이며 정부는 바뀌어도 국가는 영속되는 것』이라고 했다.
盧泰愚 대통령은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국민 여러분의 命(명)에 따른 것입니다』라는 당연하지만 참신한 어휘를 취임사에서 구사하기 시작했다.
『국민이 대통령』이라던 盧武鉉 대통령에 이어, 최근 李明博(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 이전부터 「섬기는 리더십」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합의된 현대사 인식을 보여 주지 못해 제각각의 유행가처럼 들리는 역대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마침내 겸손해진 대통령의 모습과 정치 세속화의 흐름을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