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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가 환대한 미국 공주 앨리스, 황제와 한 테이블에 앉다!
1905년에 일본을 방문한 미국의 장관과 국회의원등 아시아 순방단이 필리핀과 중국을
거쳐 9월 19일 미국 군함 오하이오호를 타고 조선의 제물포에 도착하는데.....
일행 중에는 미국 공주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가 있었으니 그녀가 서울을
방문하자 고종 황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해서 극진히 환대합니다.
9월 20일 고종은 21살의 "앨리스를 미국 공주" 로 여겨 황실 가마에 태워서
영접 하는등 국빈으로 대접했으니..... 일행이 지나는 도로에는 조선
사람들이 빽빽이 늘어서서 청홍의 장명등과 성조기를 흔들었으며 고종
황제는 앨리스 루즈벨트를 위해 "덕수궁 중명전에서 오찬" 을 함께 했습니다.
고종황제는 앨리스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고 정성스레 마련한 선물을 전하는데 신세계
조선호텔에서 재현한 사진에 보면 신선로와 비빔국수(골동면), 숭어찜(수어증),
편육, 생선전(전육), 전복 조림에 각종재료 익히고 색을 맞춰 꼬챙이에 꿴 누름적
(회양적) 그리고 ‘두텁떡 (후병), 약밥(악식), 원소병에 숙실과며 홍시 등을 차렸습니다.
고종만 몸이 달았던게 아니라.... 대한 매일신보는 “연약한 미국 공주가 장거리 항행을 해서
한국에 온 것은 참으로 보기드문 일 이다 ” 라며 “그녀의 방문으로 한국의 산천은 더욱
빛나고 초목이 영광을 품었다” 고 했으나 미국 부영사 윌러드 스트레이트는 앨리스에
대한 한국 방문의 환대는 “황달에 걸린 그들의 상상력에 구명대” 같은 것이라고 묘사합니다!
앨리스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삼촌인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재임 1901~
1909년) 의 딸(장녀) 이었으니 미국의 아시아 사절단 일원으로 필리핀과 일본 ·중국 등을
방문하는 도중에 고종의 초청을 받고 일행과 함께 3박 4일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했으니....
공주 대접을 받으며 서울을 방문했던 "앨리스의 무례한 행동거지" 또한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평소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했던 앨리스는 서울에서도 승마복 차림에 시거를 피워가며
고종을 알현했으며.... 고종 황제는 미국인들에게 자연스레 "일본의 만행" 을 알리려고
"명성황후의 무덤 홍릉" 에서 야외 만찬 을 열었는데....... 그녀는 능에 가서는 능을
지키는 수호상 위에 떡하니 올라 앉아 사진을 찍는..... 오불관언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1909년 11월 20일자 뉴욕타임즈는 롱워스 부인(앨리스)이 한국 방문 때에 적절치 못한 행동에 대한
기사를 실었으니...... 독일인으로 대한제국 의전 담당을 1년간 역임한 엠마 크뢰벨이 1909년
펴낸 책을 영어로 번역해 싣자..... 다음날 부인은 인터뷰를 거절한채 남편인 롱워스 의원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는데 훗날 월르드 스트레이트가 찍은 사진으로 변명은 거짓으로 들통납니다.
엠마씨는 22일 오후 동대문밖 명성황후릉에서 열리는 야외 리셉션을 준비하기 위해 조선인들과
함께 먼저 도착했는데, 이후 먼지 폭풍을 일으키며 도착한 기마 무리가 있었으니.... 자욱한
먼지와 함께 말을 타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채찍을 들고 능에 들어선 앨리스는 말에서
내리더니 능에 세워진 "석상 위에 올라타고" 남편인 롱워스 의원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말합니다.
이후 앨리스는 샴페인을 마시고는 조선인 대신들로 부터 이 장소가 어떤 곳인지 명성황후가
어떻게 일본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됐는지 말을 꺼낼 틈도 주지않고, 말을 타고는 일행과
함께 쏜살같이 질주해 사라져갔던 것이니.... 현장에서는 공주의 이런 "망나니짓에 경악" 을
금하지 못했는데 훗날 뉴욕타임즈 보도에는 본인은 숨고 남편이 오리발을 내밀었던 것이지요?
앨리스가 마음껏 대한제국을 농락하고 돌아간지 두달도 지나지 않아....... 이토 히로부미는 저
“가쓰라~ 태프트 밀약” 을 방패삼아 방한해서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 늑약에 의해
대한제국 외교권이 박탈되는데, 미국은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 해 다른 유럽국가들
에게 모범(?) 을 보이니 사태를 깨달은 다른 나라들도 서울의 공사관 철수 대열에 합류합니다.
앨리스는 1934년 자서전을 썼으니....... “황제와 마지막 황제가 된 그 아들은 우리 공관 근처 궁궐
(덕수궁) 에서 남의 눈을 피해 생활했다. 궁궐내 유럽식으로 꾸민 장소 (중명전) 에서
점심을 먹었다. 위층 방으로 안내받아 키 작은 황제는 자신의 팔은 내주지 않은채 내 팔을
잡았고 같이 서둘러 비틀거리며 매우 좁은 계단을 내려가 평범하고 냄새나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찬장 헤드 테이블에는 고종과 황태자 및 앨리스 3명이 앉았는데....“우리는 황실 문양으로
장식한 조선 접시와 그릇에 담긴 조선 음식(Korean food) 을 먹었다. 내가 사용한 접시는
내게 선물로 주었고, 작별 인사에서 황제와 황태자는 각각 자신의 사진을 주었다.
”식단표 뒷면에는 "황제가 여성과 공식적으로 한 최초의 식사".... 라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일본의 손아귀로 끌려 들어가고 있어 이 황실도 얼마남지 않았으니..... 다소
측은하게 별다른 반응 없이 멍하게 지냈다.” 앨리스는 이미 “태프트- 가쓰라 밀약” 을 알았.던
탓에 곧 ‘망할 나라의 군주’ 임을 알고 한편으로는 측은하게, 또 깔보는 심정으로 환대를 즐겼던
것인데...... 두달 후에 을사조약으로 황실과 조선이 망할 것을 알았으니 "파렴치한" 이 따로 없네요?
오찬에는 쇠락해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이 고스란히 담겼는데 고종은 “미국을 대인배의 나라”
로 여겼으니 이하영에 따르면..... “미국은 조선과 거리가 멀어서 내국 침입이 심하지
않을 것” 이라면서...... “미국은 황금의 부국이니 조선은 물질적으로 덕을 볼 것이고,
종교 지상주의 국가이니 도덕을 존중할 터라 모욕과 야심도 적을 것” 이라 여겼다고 합니다.
이런 믿음 덕분인지 1882년에 통상조약을 맺은 첫번째 서양국가가 미국이었으며 조·미 통상조약 ‘제1조’
는 조선과 고종 임금에게 매우 의미심장했으니.......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 는 이른바 ‘거중 조정’ 조항이 있었습니다.
고종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않으려는 대인배인 “미국의 중재자 역할” 에 큰 기대를 걸었으니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는 훗날 드러나는데........ 먼로주의로 대표되는 미국의 외교 정책과
제국주의 열강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국제 외교의 냉엄한 현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종은 50일 전인 7월 29일 육군장관 월리엄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 사이에 맺은 이른바 “태프트 -
가쓰라 밀약” 을 까맣게 몰랐는데... 밀약은 ‘양국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각각
인정한다’ 는 내용이었으니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때 맺은 ‘거중조정’ 조항은 휴지조각이 된지 오래였습니다.
이 밀약 후 태프트는 귀국했으니 고종으로서는 버스 지나간 후 손을 흔든 격이 됐고, ‘앨리스
공주’ 는 결과적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을 내민 "대한제국 황제를 농락한"
셈이 됐습니다. 애가 탔던 고종 황제는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 헐버트" 에게
친서를 주어 미국 대통령 에게 보냈으나 도착도 하기 전에 을사늑약 이 체결되는 것이지요?
저 “태프트 - 가쓰라 밀약” 은 미국 육국 장관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 사이에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고 반면에 필리핀 지배권은 미국에 있다” 는 것을 합의한
문서인데...... 원래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로 1892년 필리핀 에서는 스페인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카티푸난 이 결성되고 1896년 부터 "독립전쟁 전투" 에 돌입합니다.
1898년 4월 쿠바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에 전쟁이 벌어져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필리핀과
괌은 "스페인령에서 미국령" 으로 바뀌니..... 미군은 아귀날도의 필리핀 독립군을 공격해 3년반 동안
"반군(필리핀 독립군) 2만명을 사살" 했으며 반항적인 민간인 수십만을 강제 수용소 에 가두게 됩니다.
마닐라에서 패퇴한 필리핀 독립군이 밀림으로 달아나자 미군은 밀림까지 쫓아가 촌락을 수색하는데 그때
미군이 공격을 받아 희생자가 나오니.... 미군은 10세이상 주민은 모두 죽이는 학살을 벌이는데, 나이를
정확히 알수 없으니 나무막대기 자를 가지고 그 자를 초과하는 키의 남자 아이들은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일본이 조선인을 죽였지만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니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 미국은 훨씬 더 잔인무도
했는데...... 알제리는 8년간 150만명이 죽고서야 비로소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달성했고, 중국의 손문과
버마의 아웅산에 인도와 동남아및 필리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으로 달아나 독립운동을 하는지라 미국은
필리핀 식민통치에 "일본의 도움이 필요" 했던 것인데 필리핀 독립군은 1913년에 최종적으로 진압됩니다.
조선이 쇄국 정책을 고집할때 일본은 만난을 무릅쓰고 개국해 젊은 인재들을 미국과 유럽에 유학시켰
으니...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미국 대통령이 되자 이토 히로부미는 하버드대 동문 가네코 겐타로에게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 책을 손에 들려 "동창 루즈벨트 대통령" 을 만나고 있을 때, 조선에서도
이승만이 선교사 헐버트의 소개장 한장 들고 미국을 방문했지만 가네코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고 했던가요? 바이든 부통령이 한국이 미국 반대편에 베팅하는걸 경고하더니
한일간의 오랜 대립에 피로감을 느끼는지 웬디 셔먼 국무부 차관의 한국 정상 싸구려 박수
비난에 이어....... 미셀 오바마 가 일본에서 국빈대접을 받으며 아키에 여사 손등을 토닥
이더니 한국의 집요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 미 상하원 합동연설" 이 성사 되었습니다!
존 매케인 상원 군사위원장은 미일 전략적 파트너쉽 과 군사협력에 만족을 표시하며 1905년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이 "나는 친일파이다" 라고 말했듯이, "나는 열렬한 아베
지지자" 라고 공개적으로 자랑스레 말하는데........아베 연설 성사를 저지하려는 한인 회합
에는 혼다 의원만이 홀로 참석한게 현실입니다? "한국을 지지하는 의원이 혼다 단 1명" 이라?
1905년 러일전쟁시 "이토 히로부미" 는 전쟁이 길어지면 보급 문제로 어렵다고 보고는...... 전쟁
전에 법부대신을 지낸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 가네코 겐타로를 미국에 보내는데, 가네코는
하버드 동문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 책을 선물하니......
루즈벨트는 사무라이 정신에 뿅 가서는 러일전쟁 평화협정 중재에 나서며 친일파를 자임 합니다!
니토베 이나조 (新渡戸稲造) 는 일본 화폐 5천엔권에 나오는 인물인데 19세기 메이지시대
에 독일과 미국에 유학하고 와세다 대학교, 버클리 대학교, 스탠포드 대학교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교 및 제네바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유엔 사무차장을 지냈으며.... 도쿄여자
대학을 설립하고 도쿄대 총장을 역임한 인물로 영어로 “武士道 무사도“ 라는 책을 썼습니다.
메이지 유신 성립 3년 후인 1871년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가 구미시찰단" 을 꾸려 2년간이나
미국과 유럽을 시찰 하는데.... "젊은이 50명을 데려가 유학시켜 인재를 양성" 했던 것이라?
이 시찰단을 계획하고 수행원과 유학생등 참가할 인사들을 선발하며 각국에서 구체적인
활동을 지휘한 자가 바로 영국에 유학한 "이토 히로부미" 였으니 그의 심모원려 를 알만합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중재 요청을 받은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 심취" 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미국의 포츠머스로 러시아와 일본 대표를 오게 해서 평화조약 을 맺게 하는데.....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공로로 "노벨평화상" 을 받지만 일본에서는 폭동이 일어납니다.
협정은 일본에 유리했지만 전쟁중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이기고 있다는 거짓 보도로 "일본인의
눈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에 저 정도로는 여론을 만족시킬수 없었으니 "폭동은 필연적" 이라!
이런 인연이 쌓여 일본 총리 조슈번의 가쓰라와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가 "필리핀과 조선" 을
각기 차지하기로 약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후에 을사보호조약(늑약) 이 체결되는 것이지요?
“가쓰라~태프트 밀약” 4년 후인 1909년에 당사자인 "윌리엄 태프트가 미국 대통령" 이 되자
일본은 3년 후인 1912년에 "3,020 그루의 벚나무" 를 미국으로 보내..... 워싱턴 포토맥
강변에 옮겨 심어 뿌리내리게 했으니 오늘날 "워싱턴 시민들의 최대 축제" 로 자라
난지라...... 이 벚나무들은 굳건한 "미·일 동맹을 상징하는 거목(巨木)" 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미일 개항조약 체결 기념으로 미국이 증기 기관차 모형을 선물하니... 일본은 불과 18년 후인 1 872년
에는 도쿄 신바시와 요코하마간의 철도를 서양의 도움없이 "자체 기술로 건설해서 개통" 합니다.
일본의 기술력은 100년 넘는 기업이 "한국 5개에 일본은 3만 3천개" 나 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도쿠가와 막부가 서양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자 전국에서 거부 운동 이 일어나는데 그중에
조슈번은 현장을 목격한 선각자 "요시다 쇼인으로 인해 존왕양이운동" 이 거세집니다.
조슈번주 모리 다카치카 는 군대를 교토로 올려보내 궁궐을 경비 하면서.... 일왕(천황)
을 움직여 막부의 쇼군이 양이를 천명 하도록 해서는 몇년 후 "양이결행을 공표" 합니다.
이에 선수를 뺏긴 조슈번(야마구치)의 최대 경쟁국 인 규슈 남단의 "사쓰마(가고시마)
번의 번주 시마즈 히사미쓰" 는...... 조슈번으로 부터 정국 주도권을 탈환 하기
위해 1862년에 대포 4문에 1천명 병사를 이끌고 덴유마루를 타고 교토로 올라 옵니다.
규슈의 사쓰마번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죽자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쇼군 후견직
에 임명하라며 에도 막부 정치에 간섭하고는..... 규슈로 귀국 중인 1862년 8월
나마무기에서 영국인 4명이 말을 타고 행열을 가로지르자 주저없이 살해하니.....
다음해인 1863년 7월 그 보복 을 위해 7척의 "영국 함대 가 가고시마를 습격" 합니다.
사쓰마번은 결사항전해 "영국 주함에 포격해 파손" 시킴으로써 육전대의 상륙은 저지했지만
가고시마 시내는 불바다가 됩니다. 이에 사쓰마번은 영국에 보복하는 대신에 서양의
"군사적 위력을 절감" 하고는 끄게 깨달은지라 방향을 전환해서는 "서구문명을 배우기" 위해
15명의 젊은이 를 뽑아 쇄국정책 중인 막부 몰래 비밀리에 "적국인 영국에 유학" 을 보냅니다.
만약에 영국 유학 보낸 것을 에도 막부에 들키면 여러 사람들이 “배를 갈라야 할 큰 사건” 이었지만.....
“배움의 욕구” 가 더 강했는데, 1840년 아편전쟁의 충격을 받은 중국의 웨이위안은 해국도지를 1844
년에 출간하자 바로 일본 나가사키에 수입되어 막부의 로쥬는 물론 "시판되어 일본에서 널리" 읽힙니다.
조선에서는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패배한지 몇년이 지난 후에 사신이 중국에 다녀와서 "북경 시내
가 예전처럼 조용하다" 고 보고하니...... 국왕 헌종과 안동 김씨 세도정치 하의 대신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끝났지만"....... 중국, 특히나 일본은 상하 할것 없이
모두 이를 연구하고 대비했으니 "무사안일로 아무른 대책 없이 넘어간 조선" 과는 다른 점 입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게 그냥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해방(海防)
의 방법으로 "이정(夷情, 서양)" 을 아는 것 만한게 없는데, "해국도지" 만큼 상세한게
없다” 고 번주와 지사들에서 말단 사무라이들 까지도 다투어 읽으며 서양 침략에
대비하는데....... 이무렵 “해국도지” 는 북경에 간 사신을 통해서 "조선' 에도 들어옵니다.
사학(邪學 천주교)을 배척한 책으로 “해국도지” 만큼 분명한게 없으니 사교 뿌리를 분별할수 있다고 승정원
일기에 적혀있으니! "서양문물과 현대적인 군사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천주교 탄압" 에만 기세
를 올리는데..... 이슬도 뱀이 먹으면 독 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 가 된다고 했던가요? “똑 같은 책” 인 데?
1801년의 신유박해 와 1839년의 기해박해에 이어 고종 때인 1866년 부터 1871년 까지 4차례
병인박해 가 일어나는데.... 1866년 봄과, 1866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1868년 무오사옥과 ,
1871년 신미사옥으로 이어져 도합 만여명의 사상자 를 냅니다! 공식적으로 처형된 사람
외에 체포 과정에서 죽거나 산속으로 도망쳐서는 병들고 굶어죽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요?
개화기에 서양 "천주교 배척" 보다 "서양의 문물과 제도" 를 배우는데 열심이었던 일본은 오늘날
기독교 인구가 1% 도 채 안되는데.... 그토록 사교(邪敎?) 인 "천주교 탄압 에 혈안" 이 되었던
한국은 이제 기독교 인구가 전체 국민의 30% 를 초과하니..... 그럼 무었이 잘못된 것일러나?
길 가는 행인의 외투를 벗기는건 “사납고 거센 바람” 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 이라고 했던가요?